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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개혁신앙과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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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앙과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이은선 교수(안양대학교 기독교문화학과)

 

 

들어가는 말

 

올해는 평양대부흥운동의 100주년을 맞이하는 뜻 깊은 해이다. 평양대부흥 100주년을 맞이하면서 평양대부흥에 대한 학문적 평가 작업이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평가 작업 가운데 1907년의 평양대부흥운동을 개혁 신앙이라는 신학적인 시각에서 평가하는 작업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평양대부흥운동을 신학적인 시각에서 평가하고자 한다면 평양대부흥운동의 전반적인 진행이 어떤 신학적인 관점에서 이루어졌는가 하는 것을 평가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한 평가를 위해서는 한국에 파송된 장로교 선교사들의 신학적인 성향을 파악하는 것과 함께 평양대부흥운동이 일어난 과정에서 어떤 신학적인 조류들이 영향을 미쳤는지를 평가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평양대부흥운동의 배경으로 학자들은 사경회와 기도운동을 공통적으로 들고 있다. 그리고 대부흥운동의 중요한 양상은 성령의 역사를 통한 죄의 회개와 경건한 삶을 들고 있으며, 중요한 결과들로는 교회의 양적인 성장과 교육열의 고조, 반상의식의 타파, 교회의 조직의 진전과 해외선교를 들고 있다. 그래서 본고에서는 평양대부흥운동의 배경으로 거론되는 사경회와 기도운동, 그리고 중요한 양상인 성령의 역사를 통한 죄의 회개와 거룩한 삶의 모습이 과연 개혁신앙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를 검토해 보고자 한다.

한국에 파송된 장로교 선교사들의 신학적인 성향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네 가지 시각이 자리 잡고 있다. 첫째는 전 성천 교수가 주장한 견해로서 한국에 파송된 장로교 선교사들은 그들의 극단적 보수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구학파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전 성천 박사는 한국에 파송된 장로교 선교사들이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라는 엄격한 교리에 집착하였고, 이러한 엄격한 입장의 고수에서 진보적인 성경관을 가진 김 재준과 충돌하면서 한국교회의 분열이 야기되었다고 보았다. 둘째는 한 철하 교수가 주장하는 견해로서 한국에 파송된 장로교 선교사들은 부흥운동을 찬성하고 목사들의 신학교육의 수준을 낮게 잡는 것을 볼 때에, 신학파라는 것이다. 셋째로 홍 치모 교수와 김 영재 교수는 한국 초기 북장로교 선교사들은 구학파를 대표하는 프린스턴 출신들이었지만 부흥운동을 찬성하는 점에서 신학파적인 특성을 공유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넷째는 박 형용 교수의 견해로서 한국에 파송된 장로교 선교사들의 신학적인 입장은 청교도의 유산을 이어받았다는 것이다. 박 형용 교수가 한국에 파송된 장로교 선교사들이 청교도들의 신학적인 유산을 이어받았다는 주장은 두 가지 근거를 제시한다. 하나는 엄격한 주일성수신앙이고, 둘째는 성령의 역사를 통한 직접적인 전도를 강조하는 청교도 신앙이라는 사실이다. 박 형용 교수는 한국 초기 선교사들이 사경회를 하면서 순회전도를 통해 직접 전도에 힘쓴 것은 청교도 실천신학을 이어받은 것이라 지적한다. 그런데 최근에 김 홍만 교수는 한국에 파송된 장로교 선교사들의 신학은 청교도들의 회심신학을 이어받아 부흥을 주장하는 구학파의 신학이라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였다.

둘째는 평양대부흥 운동을 일으키는데 영향을 미친 신학적인 조류가 무엇이냐 하는 점이다. 평양대부흥운동이 일어나는데 영향을 미친 것은 1903년의 원산부흥운동의 시발이 되었던 남 감리교회 소속 선교사 하디의 회심이다. 그리고 하디의 뒤를 이어 부흥운동에 가담했던 남 감리회 선교사는 저다인, 크램 등 이었으며, 하디의 회심 이후에 스칸디나비아 선교회 소속의 프란손이 입국하여 그에게 부흥회 인도방법을 가르쳤다. 박명수 교수는 프란손이 바로 심슨과 연결되어 웨슬리안 성결운동의 영향을 받은 인물일 뿐만 아니라 남 감리교 선교사들도 웨슬리안 성결운동의 영향을 받은 인물들로서 한국교회 부흥운동에 웨슬리안 성결운동이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 박용규 교수는 ”조나단 에드워즈로 대변되는 개혁파 영적 각성 운동, 맥코믹 신학교 출신들로 대변되는 무디 부흥 운동의 전통, 언더우드의 경건주의 전통, 그리고 남북 감리교회의 전형적인 웨슬리 부흥운동의 전통이 어우러져 거대한 부흥운동의 물줄기를 형성한 것“이라고 종합적으로 평가했다. 지금까지의 일반적인 평가는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의 유형은 교파를 막론하고 미국의 무디의 학생 자원운동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로 경건주의적이고 복음주의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이들의 신학사상은 각 교파의 특성을 가지고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무디의 3대 표어인 3R(인간의 전적 타락, 그리스도에 의한 구속, 성령에 의한 중생)을 믿었다. 이러한 근본적인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면서 각 교파의 특색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흐름을 보수적인 복음주의라고 부르고 있는데, 개혁주의와는 어느 정도 연관을 맺고 있을까?

셋째로 평양대부흥운동의 발생은 한국교회의 성경번역과 보급과 함께 사경회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사경회의 진행이 대부흥운동과 어떤 연관을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이러한 사경회는 개혁신앙과 어떤 관련을 가지고 있는가?

넷째로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주요한 모습 가운데 하나는 성령의 역사를 통한 철저한 회개운동이다. 이러한 철저한 회개 운동은 원산의 하디 회심 이후에 한국교회에 지속되어온 부흥운동의 주요한 모습인데, 이러한 회심은 개혁주의에서 주장하는 중생인가? 웨슬리안 성결운동에서 주장하는 성령세례인가?

 

I. 한국장로교 선교사들의 신학사상과 부흥운동의 상관관계

 

첫 번째로 제기된 문제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한국에 파송된 장로교 선교사들의 신학적인 관점을 올바르게 파악하는 것이 가장 핵심이라고 판단된다. 한국 학계에서 부흥운동과 관련하여 19세기 미국 장로교회의 구학파와 신학파에 대한 일반적인 서술은 무엇인가? 서론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가장 대표적인 견해가 신학파는 부흥운동에 찬성하는 입장을 취하였고, 구학파는 엄격한 칼빈주의 교리를 내세우며 부흥운동에 반대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1837년에 분열한 미국장로교회의 구학파와 신학파의 실상을 올바르게 제시하지 못한다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김 홍만은 그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19세기 미국의 구학파와 신학파는 모두가 부흥운동에 찬성했는데, 구학파는 신학파의 새로운 부흥운동의 방법론의 사용을 반대하고 청교도 회심 신학에 입각한 신파의 부흥운동을 계승하였다고 주장한다. 구학파와 신학파의 부흥에 대한 진정한 견해 차이는 청교도 회심신학에 근거하여 진정한 부흥을 추구하느냐 아니면 새로운 방법을 사용하여 감정주의에 입각한 부흥주의를 추구하느냐의 차이이다. 구학파는 피니의 부흥운동을 피상적인 회심을 끌어내는 부흥주의라고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청교도 회심 신학을 바탕으로 부흥을 추구했던 18세기의 신파의 전통을 계승했다. 미국에서 18세기에 일어난 제1차 대각성운동에서 회중교회에서는 조나단 에드워즈가 중심인물로 활동하였고, 장로교에서는 길버트 테넌트를 중심으로 통나무 대학(log college) 출신들이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1차 대각성운동에서 중심 역할을 한 이러한 인물들이 장로교회 안에서 부흥운동에 반대하며 엄격한 교리를 강조했던 구파와 충돌하면서 뉴브룬스위크 노회를 결성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뉴브룬스위크 노회는 목회자들을 육성하기 위해 동부의 하버드 대학교나 예일 대학교를 대신할 새로운 학교로 뉴저지 대학교를 설립하였다. 뉴저지 대학교는 기본적으로 부흥을 지지하는 장로교의 신파의 신학을 교육하기 위하여 설립된 학교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신학을 전수하기 위하여 세운 학교이므로 뉴저지 대학교는 3대 교장으로 조나단 에드워즈를 초빙했던 것이다. 뉴저지 대학교가 개명한 프린스턴 대학교의 학생들이 점차로 신학을 지원하는 경향이 줄어들자 장로교 신파의 목회자 육성을 위해 1812년에 설립된 신학교가 프린스턴 신학교였다. 프린스턴 신학교는 18세기 1차 대각성운동의 부흥 신학을 계승하여 신학생들을 양육하고자 설립된 학교였다. 프린스턴 신학교의 제1대 교장이었던 아치발드 알렉산더는 2차 대각성운동 때에 회심한 인물로 신파의 전통을 따르는 유명한 부흥사였다. 그러므로 그는 조나단 에드워즈와 길버트 테넌트의 전통을 따르는 부흥을 지지하였다. 그리고 에쉬빌 그린과 밀러 등도 이러한 유형의 부흥운동을 지지하였다.

이러한 신파 전통의 부흥운동을 반대하면서 새로운 부흥의 방법을 사용하여 부흥운동을 전개한 사람들이 찰스 피니로 대변되는 신학파였다. 그러므로 신학파는 19세기의 새로운 시대분위기에 발맞추어 인간의 자유의지의 능력을 인정하는 부흥운동을 전개하였다. 찰스 피니는 감리교에서부터 발전되어 나왔던 새로운 방법들을 채용하였다. 그들은 사람들의 감정에 호소하는 감정적인 설교를 하였고, 즉각적인 회심을 주장하였으며, 깊은 죄의 각성에 따른 회심보다는 설득을 중심하였다. 그리고 은혜를 사모하는 자리를 만들어 사람들이 자신들의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즉각적인 결단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1837년에 분열되었던 19세기 미국 장로교의 구학파와 신학파의 차이는 부흥운동을 지지하였느냐의 여부가 아니라, 부흥운동을 하되 진정한 부흥을 추구하는 기준이 무엇이냐의 문제였다. 부흥을 추구할 진정한 기준으로 18세기의 1차 대각성운동, 더 나아가 영국의 청교도 회심신학의 기준을 따를 것을 주장한 것이 구학파였다. 반면에 부흥을 판단할 기준으로 새로운 측정 방법을 주장한 것이 신학파였다. 그리고 19세기에 이러한 구학파 신학을 대변했던 학교들이 프린스턴 신학교와 시카고에 세워졌던 매코믹 신학교였다. 물론 남북전쟁 이후에 구학파와 신학파가 혼합되어 남장로교와 북장로교를 형성함에 따라 양자의 어느 정도의 혼합은 불가피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매코믹 신학교 교수님들 가운데는 구학파뿐만 아니라 신학파도 있었다.

그런데 1907년까지 한국에 왔던 미국 장로교 선교부의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프린스턴 신학교나 그 프린스턴 신학교의 영향을 받고 있던 맥코믹 출신들이었으므로 그들의 신학은 부흥운동을 지지하면서도 개혁파신학을 지지하는 인물들이었다. 동시에 한국에 온 장로교 선교사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이 19세기 후반에 미국에서 진행되었던 1857-59년까지의 정오기도운동과 무디의 부흥운동와 학생자원운동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부흥운동들도 찰스 피니의 영향을 받았다기보다는 개혁파의 영향을 받은 유형의 것들이었다. 무디는 인간의 전적 타락을 강조하고 성령에 의한 회심을 강조하면서 부흥운동을 일으키면서도 다양한 교파의 사람들과 협력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부흥운동은 다른 교파를 배척하기보다는 협력하는 복음주의적인 색채를 지니고 있으면서 인간의 철저한 부패 교리를 강조하는 개혁파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무디의 학생자원운동의 영향을 받아 한국에 왔던 장로교 선교사들은 말하자면 복음주의적인 개혁주의자들이었다. 한국에 왔던 장로교 선교사들은 구학파 출신들이었지만, 종말론에서는 구학파의 전통적인 무천년설 내지는 후천년설보다는 부흥의 긴급성을 강조하기 위해 전천설을 주장하던 무디의 영향을 받아 전천설의 입장을 가진 경우가 많았다.

그러면 이러한 교리 중심의 개혁파 부흥운동의 특성은 무엇인가? 개혁파 부흥운동의 특성은 청교도 회심 신학을 이어받으면서 부흥운동이 성령의 부어주심을 통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라는 인식과 함께 기도를 통한 준비를 강조하였다. 이러한 특성은 조나단 에드워즈의 1차 대각성운동에서 출발한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회심, 즉 중생의 체험을 부흥운동의 핵심으로 보았다. 그는 회심을 전통적인 청교도 신학의 관점을 따라 율법에 의한 죄의 질책, 자신이 죄인이라는 겸비(humiliation), 회개의 과정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조나단 에드워즈는 중생이 이러한 준비의 과정을 통해서도 일어나지만 순간적으로 일어나기도 한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에드워즈는 중생의 회심은 성령의 직접적인 사역으로 일어나고 즉각적으로 일어난다고 보았다. 그는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여 하나님께 돌아갈 수 없으므로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만 회심이 일어나며, 이러한 회심 후에는 성화의 삶이 따라온다고 보았다. 에드워즈는 청교도 신학을 수용하여 이러한 회심을 위해서는 성도들의 심령을 살피는 것(searching the heart)과 마음의 종교(heart religion)를 강조하였다. 에드워즈는 중생 체험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에드워즈를 위시한 친부흥주의자들에게 하나의 결정적인 경험이 있다면 그것은 회심의 경험이었다. 이러한 청교도의 회심론에 바탕을 둔 신학사상은 알미니안주의를 수용했지만, 웨슬리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웨슬리도 근본적으로 성령의 역사를 통한 신생을 강조한 점에서는 동일한 점이 있다. 그리고 에드워즈는 이러한 성령의 역사를 통한 인간의 심령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부흥운동을 주장하였고, 이러한 부흥운동의 전통은 19세기 프린스턴 신학교를 통해 전수되었으며,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던 무디와도 어느 정도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 무디는 인간의 전적인 타락을 강조하면서 성령의 능력에 의한 중생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성령의 역사를 통해 중생 내지 회심의 경험이 1903년부터 한국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의 핵심적인 사항이라고 판단된다.

 

 

II. 평양대부흥운동에 영향을 미쳤던 신학적인 조류들

 

둘째로 평양대부흥운동에 영향을 미쳤던 신학적 조류들은 무엇인가? 북장로교회에 왔던 선교사들은 대부분 구학파의 신학전통을 따르는 프린스턴과 맥코믹 출신이었다. 프린스턴과 맥코믹은 거의 같은 조류의 신학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교리적으로 칼빈주의 신학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부흥운동도 찬성하였고, 동시에 다른 교파와 연합하여 복음을 전하려는 복음주의의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의 신학적인 입장은 다른 교파와 연합하여 복음을 전하려는 개방적인 자세를 가진다는 점에서는 복음주의적이었고, 성경의 영감을 주장하며 교리중심적인 설교와 가르침을 통한 회심 체험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경험신학을 추구하는 청교도 신학의 원리를 가지고 있었다. 회심 신앙의 경험을 추구하는 것은 청교도 신학의 유산으로, 이러한 청교도 신학의 유산이 경건주의와 웨슬리안에게도 영향을 미쳤으며 본류로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영향을 받은 미국의 구학파 전통의 부흥운동을 통해 한국의 장로교 선교사들에게 전해졌다. 그러므로 이러한 회심 경험을 추구하는 신학전통은 복음주의이면서도 더 근본적으로 개혁주의적이다. 물론 복음주의의 회심 신학을 주장하는 데서 신학적인 색채에 따라 회심 신학을 주장하는 흐름들은 다양할 수 있다. 한국에 들어온 장로교 선교사들은 복음주의적인 개혁주의 신학 전통을 이어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면 감리교 선교사들의 신학적 배경은 무엇인가? 이 덕주는 “초기 내한 선교사들의 신학”이란 논문에서 부흥운동을 주도한 남감리교 선교사들보다는 북감리회 선교사들의 신학사상을 분석한다. 북감리회의 첫 선교사인 아펜젤러를 비롯하여 감리교 협성신학교 신학교 교수로 활약한 노블(W. A. Noble)과 스웨어러(W. C. Swearer) 등을 배출한 드루 신학교는 "감리교의 사관학교"(The West Point of Methodism)라 불릴 정도로 엄격한 신앙훈련으로 유명하여 “학문적 훈련과 기도 생활을 중심으로 한 개인적 경건을 동시에 강조하였다. 드루 신학교의 졸업식의 절정은 애찬식이었는데, 그 시간에 졸업생들은 자신의 종교적 체험에 대해 공개 증언을 하였다." 드루 신학교는 학문(이성)과 체험의 조화, 경건주의와 복음주의의 조화를 추구하였다. 원래 개혁교회 출신인 아펜젤러는 '머서스버그 신학'의 본거지였던 프랭클린 마샬 대학 재학 중 개인적인 중생의 체험을 한 후에 감리교회로 이적하고 '경건주의 신학과 신앙의 훈련장'인 드루 신학교를 찾았다. 이와 같이 드루 신학 교 출신의 초기 북감리교 선교사들도 신앙 경험에 대해 열린 자세를 유지하였다. 그래서 박 용규 교수는 “북감리교 출신 미국 선교사들도 좀 더 폭이 넓었던 본국의 신학적 분위기보다 복음주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어 부흥운동에 대해 상당히 열려 있었다”고 평가한다.

당시 한국에서 활동하던 남감리교 출신의 선교사들은 박 명수 교수의 상세한 분석이 잘 보여주는 바와 같이 대부분 복음주의적인 웨슬리안 성결운동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다. 하디는 처음에는 카나다 장로교회의 보수적인 신학을 가지고 있으면서 무디의 학생자원운동의 영향을 받아 한국에 왔던 독립 선교사였는데 1898년 이후에 남감리교로 옮겨가 1903년에 성령체험을 하고 무디의 영향을 받은 프란손을 통해 무디 스타일의 부흥회인도법을 배워 원산부흥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 저다인은 하디와 함께 1902년부터 1906년까지 원산에서 일했으며 성령의 은혜를 체험하여 함흥과 목포의 장로교회의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하디가 1904년 안식년을 떠난 후에 송도에서 부흥회를 인도했던 크램(W. G. Cram)은 1898년 웨슬리안 계통의 에즈베리 대학은 졸업하였고 웨슬리의 전통적인 부흥운동, 즉 중생과 성령의 능력을 강조했다. 서울 잣골에서 사역했던 무스(J. R. Moose)도 성결운동가였다. 이와 같이 남감리회 소속 선교사들은 한국에 와서 성령체험을 했거나 미국에서 성결운동에 영향을 받은 전형적인 웨슬리안 복음주의 부흥운동의 후예들이었다.

그러므로 박명수 교수도 한국의 초기 교회의 모습을 복음주의라고 정의하면서 가장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를 미국 복음주의의 경험적 성격이라고 강조한다. 한국에 온 선교사들이 자신의 출신 교파에 따른 교리적인 차이점은 있지만, 성령의 역사를 통한 체험 신앙의 추구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1903년부터 1907년까지의 부흥운동의 공통점이다. 이 덕주는 감리교 선교사들과 장로교 선교사들의 공통적인 요소로 경건주의의 들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경건주의(pietism) 신앙은 웨슬리를 통해 경건주의에 맥이 닿아 있는 감리교 선교사들뿐 아니라 장로교 선교사들에게서도 발견되는 현상이었다. 초기 한국 개신교 선교사들은 교파를 초월하여 경건주의 색채가 강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을 통한 중생의 체험과 기도와 성경공부를 중심한 신앙훈련, 그리고 선교와 사회구제로 연결되는 윤리적 실천 등으로 정리될 수 있는 경건주의 신앙 요소는 선교사들에 의해 촉발된 초기 부흥운동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18세기 '뉴잉글랜드 신학'이 감리교 운동과 연결된 종교 각성운동이란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었듯 한국의 초기 부흥운동도 종교 각성운동의 성격이 강했던 것이다. 초기 부흥운동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1903년의 원산 부흥운동이 하디(R. A. Hardie) 선교사의 개인적 회개와 중생의 체험에서 시작되어 집단적인 회개운동으로 발전된 것이 대표적인 경우다. 이때부터 시작된 부흥운동은 하나님의 임재와 윤리적 갱신이라는 경건주의 신앙 분위기 속에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경건주의와 복음주의, 웨슬리안 성결운동, 개혁주의의 신학 사상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성령의 역사를 통한 회심을 강조하는 신학적인 공통적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각 교파에 따른 교리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지만 성령의 역사를 통한 신앙의 체험을 강조하는 공통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III. 사경회와 부흥운동의 연관성

 

셋째로 평양대부흥운동이 일어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경회는 한국에서 어떻게 생겨났으며, 사경회와 성경 번역과 보급은 어떤 관계에 있으며, 이러한 사경회는 부흥운동 발생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

한국 교회의 사경회는 네비우스 선교방식에서 생겨났다. 네비우스 선교 운동의 중요한 내용은 무엇인가? 첫째로 네비우스는 중국선교에서 사례를 받는 현지인들을 고용하여 복음을 전하는 옛 방법을 비판하고 자급, 자전, 자치를 주장하였다. 그가 이렇게 자급, 자전, 자치를 주장하면서 옛 방식에 의한 신도들의 신앙양태를 청교도 회심 이론인 마음의 탐구와 위선자 이론에 입각하여 분석하여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 둘째로 그는 선교지 현실에 맞는 교회 조직과 교회 건물을 짓는 것을 주장하였다. 셋째로 그는 선교사들의 순회전도와 함께 교회 지도자 육성을 위한 성경 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원칙은 네비우스가 1890년 6월에 한국에 와서 한국 선교사들과 두 주간 동안 세미나를 연 후에 언더우드와 곽 안련이 정리한 내용에 잘 나타나 있으며, 1893년 1월에 장로교 선교부 공의회에서 채택한 10개 항에도 반영되어 있다.

네비우스는 특히 중국에서 주일 오전과 오후를 위한 경건회의 형태(form of exercise)를 네 부분으로 구성하여 실시하였다. 첫째는 모든 사람이 참석하기를 요망하는 비공식의 주일학교(informal Sunday school)이다. 참가한 모든 사람들은 인도자와 그 아래 있는 사람들의 지도 아래 개인적인 공부를 하는데, 중국어 문자를 배우거나 성경 구절을 외우며, 성경 이야기를 말 하거나 혹은 요리문답 혹은 성경문제집을 공부한다. 둘째로 우리는 훨씬 더 공식적인 예배(formal service of worship)를 드린다. 이 예배는 찬송과 강해나 권면을 깃들인 성경봉독과 기도로 구성되어 있는데, 45분을 넘지 않는다. 셋째로 성경 이야기 경건회(Scripture Story Exercise)가 있다. 이것은 사람들을 지정하여 연속적으로 이야기하여,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그 이야기에서 교훈과 의무를 끌어낸다. 넷째는 시간이 있으면, 요리문단 경건회(Catechical Exercise)를 가진다. 이것은 이미 배운 것의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도록 계획되어 있다. 주기도문, 십계명, 선택된 성경 구절, 성경의 어떤 책, 혹은 자선의 의무 같은 주제들을 다룬다. 네비우스는 자신이 사역하던 중국 산둥에서 봄과 가을에는 순회전도를 하였고 겨울과 여름에는 학생들을 모아서 교육하였다. 초신자들을 40명 정도 선발하여 반으로 편성하여 교육하였으며, 이들에게 최소한의 비용만을 지불하고, 나머지는 스스로 부담하도록 하였다. 네비우스의 경건회의 방식 가운데 첫째와 둘째는 그대로 한국에서 시행되었으며, 여름과 겨울의 사경회도 그대로 도입되었다.

한국에서는 이미 1888년 스크랜턴 부인이나 언더우드에 의해 사경회가 실시되었는데, 네비우스 방식이 채택된 후에는 좀 더 체계적으로 시행되었다. 스크랜턴 부인은 1888년 1월 이화학당에서 처음으로 어린 처녀 12명과 부인 3명이 모여 성경을 공부하여 사경회를 시작하였다. 언더우드는 1888년 12월부터 그의 사랑에서 여덟 명의 청년들에게 기독교 교리와 함께 성경공부를 가르쳤는데, 선교부에 이를 ‘단기 신학 교습’이라고 보고했다. 1888년 새문안교회 주일예배에 50명이 참석할 정도로 성장하고 한국의 전역에서 복음이 확장되어 가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언더우드는 한 해가 지나기 전에 몇몇 한국인 사역자들을 집중적으로 양육할 필요를 느끼기 시작했다. “막 한 해(1888년)가 끝나기 직전에 8명의 한국인 사역자들이 자신들의 고향과 사역으로 돌아가기 전 교육을 받고 성령의 권능을 힘입도록 기도하기 위해 서울에 모여 함께 한 달을 보냈다.” 언더우드는 자신의 집에서 한 달 동안 집중적으로 한국인 사역자들을 교육시켰는데, 이것이 후대 사경회의 모체가 되었다. 언더우드는 1887년 9월에 서울을 방문한 로스를 통해 이미 만주에서 시행되고 있던 네비우스 방식을 듣고 난 뒤에 이러한 사경회를 실시하였다. 언더우드는 1890년에 서울에서 사경회를 개최하여 한국인 7명을 한 달 동안 훈련시켰다. 사경회는 처음에는 서울에서 사역자들만을 대상으로 시행되다가 1893년부터는 여러 지역에서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개별적인 사경회를 열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사경회가 가능한 것은 로스와 네비우스의 선교정책에 따라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여 대중들이 쉽게 접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주일학교 활동과 연결되어 오전에는 성경교육을 실시하였다. 한국교회에서 성경번역은 양반들인 지식인들이 아니라 대중들(common people)을 대상으로 하고 있었다. 만주에서 로스와 매킨타이어가 한국인들의 도움을 받아 성경을 번역할 때에 “오직 대중에게 적합한 것을 목표로” 하였다. 그러므로 만주에서 번역된 성경은 완전히 한글만을 사용하여 성경을 번역하였다. 일본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양반출신 이수정은 현토성경을 만들기도 하였고, 국한문혼용체의 성경번역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이 서울 표준어에 맞추어 새롭게 성경번역을 시도할 때에도 일반 대중을 목표로 하여 한글만을 사용하여 성경을 번역하였다. 이렇게 한글로만 번역된 성경은 일반 대중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 대중들을 대상으로 하는 주일에 시행되는 성경공부와 특별한 시기에 사경회를 열 수 있는 좋은 통로를 제공하였다. 이렇게 대중에게 적합한 언어로 번역된 성경은 국내에 선교사가 없는 상황에서도 상당량이 보급되어 언더우드는 “씨를 뿌리러 왔으나 열매를 거두고 있다”고 고백하였다. 이와 같이 성경이 보급되고 한국성도들이 성경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선교사들은 한국기독교인들을 “성경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였다. 한국교회는 이렇게 순수한 한글 성경을 번역하였고, 이러한 성경이 한국교회의 부흥과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렇게 한국교회에 성경이 번역되어 사용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네비우스의 선교방식이다.

한국의 부흥운동의 주요한 원인은 바로 순 한글로 번역된 성경을 사용하여 실시한 성경공부인 사경회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사경회는 두 가지 형태로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개교회에서 진행된 사경회이고, 다른 하나는 여러 교회들이 연합하여 모여 진행했던 사경회가 있었다. 개교회에서 진행된 성경 공부는 매주 시행되었다. 이 시기에 장로교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에서는 주일 오전에는 성경 공부를 하고 오후에 정기 예배를 드렸다.

1898년 연례 보고서에서 마펫과 그라함 리는 평양교회들에서 “두 개의 정식 주일 오후 예배, 성경 연구를 위한 5개의 아침 모임들, 두 개는 도시 밖에서, 두 개는 도시 안에서, 하나는 강 건너에서, 여성들을 위한 수요일 오후 성경 공부반, 하나는 도시 안에 있고 하나는 밖에 있다. 토요일 오후에는 성경 교사들을 위한 반이 있다. 마지막으로 특별히 언급할 가치가 있는 것은 교회의 정식으로 임명된 직분자들인 지도자들, 집사들, 그리고 선교사들의 지도 아래 수요일 저녁 기도회가 열린다”고 서술한다. 선천에서 1902년에 성경 연구를 위한 아침 회중은 연령에 따른 반들로 나누어진다. 고린도전서를 연구하는 동안에 전체 학교는 동일한 교재를 가지고 있는 반면에, 남자들과 청년들이 고린도 후서를 공부하는 동안에, 여성들과 소녀들과 소년들은 마가복음을 공부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지금 함께 마태복음 공부를 시작하고 있으며, 9개 등급의 반을 가지고 있다. 교사들의 모임은 매주 금요일 밤에 열린다. 이것은 다음 겨울의 성경 연구와 연관하여, 주일학교 교사들을 위해 하루에 한 시간 수업의 정규 사경회반을 가질 계획을 가지고 있다. 1902년에 평양의 교회들의 주일 아침 성경 공부반들은 다양한 채플들과 사랑방들을 흘러넘칠 정도로 많아져 사람들을 수용하기 위하여 다른 반들이 조직될 것이다. 채스(Chase) 양은 선천에 도착한 직후에 교도 자매들에게 지적인 방식으로 복음을 제시하는 방법을 알기를 열망하는 것을 발견하여 한 주일에 세례자와 학습자들을 위한 두 개 반을 열었다. 지속적인 참고서인 성경과 함께, 그들은 “천국에 대한 안내”(Guide to Heaven)이란 논문을 연구하였으며, 이러한 특별한 작품으로 그들을 도와줄 본문들이 날마다 교육되었다. 이와 같이 당시에 교회에서 오전에 모여 성경공부를 하면서 전도훈련도 실시하였다.

그리고 선교 지부가 있는 중심 지역에 영수와 조사와 같은 교회의 지도자들을 모아 사경회를 실시하였다. 이러한 사경회의 중요한 목적은 교회 지도자들의 육성과 함께 전도활동이었다. 1898년의 연례보고서에서 “조사들과 영수들을 위한 겨울 사경회들의 특징은 교회의 영적 성장을 위해 매우 중요한 열렬한 복음전도 정신이다. 사경회가 열리는 동안 토요일 하루는 모든 참석자들이 도시 안과 주변에서 전도 활동에 전념한다. 일부는 도시 문들까지 갔고, 일부는 주요 거리들로 일부는 그들이 전도하고 책을 팔았던 근처 마을들까지 갔다.” 그리고 이러한 사경회에서 조성된 이러한 전도 정신은 지방 교회들로 확산되어, 신자들의 많은 새로운 그룹을 형성하였다. 이와 같이 이미 1898년에도 사경회는 평양에서 개최된 사경회에서 전도정신을 육성하여 지방으로까지 확산시켜 교회를 확장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여자들을 위한 사경회가 1898년 4월에 처음으로 열렸다. 자금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평양교회들의 도움으로 해결되어 24명이 참여하였다. 두 시간 반의 찬송 이외에 세 개의 반을 운영하였다. 이러한 공부에는 평양 여성들까지 60여명이 참여하였고 “참석했던 지방 여인들은 기쁨에 가득 차서 그들의 집으로 돌아가면서 그들의 이웃들에게 복음의 전파를 위한 열정으로 타올랐다.” 그리고 1월의 겨울 사경회가 끝난 후에 매일 사경회를 해 달라는 요청으로 특별사경회가 열려 7명에서 20명이 참석했는데, 이 반도 “복음전파 사역에서 가치 있는 요소가 되었다.”

1898년에는 17개의 성경 공부반이 열렸고 1899년에는 52개의 사경회가 열렸다. 25개는 선교사들이 참석하였고 27개는 한국인들에 의해 운영되었다. 1902년의 지방에서 열린 사경회도 복음서의 내용을 가르치며, 가끔씩 주제 연구들이 사용되었다. 모든 방문된 곳에서, 여성들에게 복음을 조직적으로 제시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과 관련된 소책자를 연구하는 시간이 할애되었다.

이러한 사경회 제도에 대하여 1904년의 연례 보고서에는 “우리들의 사경회”라는 제목으로 전체적인 내용이 개괄되어 있다. “전체 교회의 교육, 즉 청년과 노인, 식자와 무식자 등 모든 교인들의 교육은 성경을 주교재로 사용하는 사경회를 통해 조직적이고 광범위하게 시행되고 있다.” 사경회의 목적은 성경 공부이지만, 기도, 회의, 그리고 실질적인 복음 전도도 이 사역의 중요한 부분이다. 사경회 방식은 새벽에 기도와 찬양으로 예배를 드리고, 아침 식사 후에 30분 동안 경건회를 가지며, 그 후에 반으로 나누어 성경 공부를 하고, 오후에는 다른 성경 공부 시간과 찬양을 가르치는 시간이 있으며, 종종 오후 시간의 일부는 축호 전도를 위해 사용된다. 저녁에는 모두 연합하여 부흥회나 전도 집회를 갖는다. 성경공부 방식은 주제별, 권별 성경 공부 혹은 한 절씩 주석석으로 책을 정리하는 방법들 다양한 방식이 도입되고 있으며, 마지막 방식이 가장 인기가 있다. 한국인은 천성적으로 공부하고 가르치기를 좋아하므로, 이 방법은 한국인의 알려진 특징을 제대로 활동하는 것이다. 사경회의 목적은 무엇이고 어떤 선교 이론에 근거하고 있는가? 성경을 배우는 목적은 배우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성경에 근거하여 전도는 더욱 권세를 가지며, 생활 속에서 실천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신앙은 성경적 근거를 가집니다. 사경회는 평신도와 지도자, 조사, 선교사 간의 상호이해를 가져왔으며, 교회의 남녀를 하나님의 말씀을 능숙하게 사용하는 군인으로 만들며, 교회 전체가 전도부대가 되게 하고, 진정한 지도자의 자질을 개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입니다.

케언즈(Carl Kearns)는 선천에서 일 년을 보내서 쓴 보고서에서 “한국의 북한 지역에서 격렬한 각성(rude awakening)이 있었는데, 바로 종교적 각성과 근대적 삶을 위한 각성입니다”라고 서술하면서 “전쟁으로 인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선천 교회는 중단없는 한 해를 보냈다”고 기술하였다. 의주에서는 “불신자 이웃에게 날마다 복음을 전하거나, 더 멀리 있는 미전도 지역 전도를 위한 국내 전도회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일에 만족하지 않고 주님을 위해 더 많은 개인적인 일을 하고자 하는 열망이 일어나” 날연보를 하였다. 이것은 11월의 어느 사경회에서 350일을 연보하면서 시작되었는데, 3개월 동안 평안북도 전역에서 3000일 가량의 자비량 전도가 행해졌다. 날연보는 “자기 집을 떠나 불신자 마을에 가서 자신의 비용으로 정한 날 동안 그곳에서 특별한 복음 전도자의 일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경회를 통하여 성도들은 성경을 통해 복음을 배웠을 뿐만 아니라 성경대로 살아가야할 삶을 배웠다. 여기서 주일성수와 십일조를 비롯한 교회생활에 필요한 여러 가지 것들을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경회를 통하여 한국인 교회 지도자들이 육성되었다. 이러한 사경회를 통하여 한국이 조사들이 육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선교사들이 교사로서 모든 사역을 감당할 수 없었으므로 한국인들이 지도자로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러한 사경회는 한국교회에 성경의 내용의 철저한 교육, 성경의 교훈에 따른 신앙생활, 복음 전도, 기도의 훈련, 한국 지도자 육성을 통하여 교회 부흥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전도활동은 성경말씀을 통한 개인전도의 실천이었다. 박형용은 이러한 전도활동이 대중집회보다는 개인전도와 요리문답교육에 힘썼던 청교도 목회와 전도의 실천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들은 이러한 사경회에서 성령충만을 받기 위하여 꾸준하게 기도하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경회는 부흥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이와 같이 사경회는 성경공부와 기도회, 전도활동이 종합되어 있으며, 특히 성경공부를 통해 성경 내용과 함께 체계적인 전도법을 배워 전도하여 부흥을 준비하였다. 네비우스는 설교보다 교육에 역점을 두었는데, 이것은 형식주의를 조장하고 위선적인 교인들을 양산하여 교회의 성장과 진보를 방해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성경을 잘 가르쳐 참된 믿음을 가진 성도들을 육성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이 이 사경회는 네비우스의 원리를 따라 청교도의 회심신학을 따라 교육과 전도가 병행되어 개혁주의 원리가 시행되었다.

사경회는 이와 동시에 강력한 기도 운동을 통하여 부흥을 준비하였다. 선교지 교회의 특성이겠지만, 한국 교회의 사경회에서 성경의 교육과 함께 기도운동이 강력하게 전개되었다. 이러한 기도운동은 한국민족의 특성과 연관되어 설명되기도 한다. 기도회는 한국의 전통적인 샤머니즘의 기도 습관이 기독교와 만나 기독교의 경건으로 변화된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미 옥성득 교수는 샤머니즘과 도교의 영성이 한국 기도전통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지적한다. 사경회는 새벽기도와 함께 시작되었다. 새벽기도가 한국에서 언제 시작되었느냐에 대해 여러 가지 논의가 있었는데, 최근에 옥성득 교수는 새벽기도회가 이미 1898년에 열렸던 사경회에서 한국인 신자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장로교의 연례보고서에 따르면 이미 1898년 여성성경반에서 베어드가 아침 기도회(morning prayer)를 인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xxii) 번하이즐은 1901년에 황해도 사경회를 인도할 때 사람들이 새벽 4시에 성경공부와 기도회를 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1902년의 선천 보고서에는 “매우 이른 아침의 첫 번째 소리들은 기도와 찬송의 봉헌(oblation)이다. 많은 사람들이 해가 뜨기 전에(before sunrise) 예배(devotion)를 위해 교회에 왔다. 이것은 북쪽 지방에서 일반적인 관습(common custom)이다. 하나님이 그들의 기도를 듣고 응답하시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들은 그들의 하늘 아버지로 나온 모든 말들에 절대적인(implicit) 신앙과 어린 아이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 보고서는 북쪽 지방에서 새벽기도는 일반적인 관습이 될 정도로 퍼져 있었던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1906년 9월의 존스톤 목사의 소개로 통성기도가 한국교회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한국교회에 의해 시작된 새로운 기도회가 바로 수요기도회이다. 언더우드는 1886년 1월부터 주일 저녁예배를 부흥회 성격을 띤 주중 기도회로 확대하였다. 이 주중 저녁 기도회에 소수의 한국 기독교인들이 참석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기도회가 발전하여 수요예배로 정착되어 갔다. 물론 주간에 모이는 기도 모임도 개최되었다. 1898년 평양에서는 주일 저녁에 3개 예배가 한국인의 인도로 드려지고, 주중 낮기도 모임(week day prayer meeting)이 4개 모였다. 이러한 한국인들의 다양한 기도 모임은 1857-9년에 걸쳐 일어났던 정오기도운동을 체험한 선교사들이 다양하게 전개한 기도회와 한국인 특유의 심성이 결합되어 발생하여 교회 부흥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IV. 성령의 역사를 통한 회개의 성격

 

넷째로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가장 중요한 양상은 성령의 역사에 의한 강력한 회개 운동이다. 그런데 이러한 성령의 역사에 의한 회개 운동은 이미 1903년 하디에 의해 시작된 원산 부흥운동에서부터 시작되어 평양대부흥운동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이러한 성령의 역사에 의한 회개의 양상에 대해 감리교 선교사들은 성령 세례라고 말하고 있고, 장로교 선교사들은 성령의 부으심이라는 용어를 주로 사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물론 장로교 선교사들도 가끔씩 성령세례라는 용어도 사용한다. 당시에 선교사들이 전했던 공통적인 메시지는 죄, 회개, 구원, 성령으로 충만한 성결한 삶, 전도 같은 주제들이었다. 이러한 주제들은 19세기 후반 미국 복음주의가 전한 핵심적인 내용이었다. 그러면 이러한 성령세례는 중생과 구별되는 웨슬리안 성결운동에서 말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가? 아니면 성령세례와 중생(회심)은 동일한 것인가?

1903년 8월 24일부터 30일 동안의 남감리교 선교사들과 북장로교 선교사가 참여한 기도회에서 일어났던 하디의 성령의 체험과 회개를 통한 회심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스코틀랜드의 혈통을 이어받은 하디는 1888년에 토론토 의과대학을 졸업한 그 해에 곧바로 YMCA의 후원을 받아 한국에 파송되었던 게일(James S. Gale)의 초청으로 한국에 오게 되었다. 그는 토론톤 YMCA의 후원을 받아 한국에 파송되어 8년 동안 활동하였고, 계약 기간이 끝난 후에는 의료 선교사를 찾던 남감리교로 옮겨가 남감리교 선교사가 되었다. 그러므로 하디는 1903년 당시에 남감리회 소속의 보수적인 복음주의 신앙을 가진 인물이었다. 이 사실에 대해 이 덕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캐나다 출신 초기 한국 선교사들의 신학도 보수적이었다. 게일(J. S. Gale)·하디(R. A. Hardie)·펜윅(M. C. Fenwick)·에비슨(O. R. Avison) 등을 파송한 기독청년회(YMCA)와 이들의 선교 동기를 부여한 학생자원운동의 신학 입장은 1846년 런던에서 결성된 반(反) 퓨지주의(Puseyism) '복음주의 연맹'(Evangelical Alliance)에서 발표한〈교리적 근본〉(Doctrinal Basis)에 잘 나타나 있다. 게일을 비롯한 캐나다 출신 선교사들은 성경의 영감(靈感)과 절대성, 인간의 전적 타락, 신앙의인(信仰義認), 영혼의 불멸과 육신의 부활, 그리스도의 심판 등 보수적 '복음주의 원리'를 담고 있는 이 신앙고백을 공개적으로 밝혀야 했다.

 

그러므로 하디가 YMCA의 보수적인 복음주의 신앙을 가졌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사경회를 인도하다가 성령 체험을 한 후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자신의 체험에 대해 “아버지로부터 약속하신 성령을 받아서 우리에게 부어 주셨습니다”라는 사도행전 2장 33절 말씀을 인용하여 설명하고, “사역이 확장되지 않아서 특별히 자기반성과 자기비판을 하며 보낸 해였지만,” “치리를 소홀리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는 다음 해 보고서에서는 “성령께서 제게 임했을 때”라고 묘사하고, “성령충만의 실재를 경험”했다고 말한다. 그는 같은 보고서에서 “성령 세례를 받자마자” 강원도 지경대에서의 3년간의 실패가 육신의 노력 때문이었다고 설명하고, 그곳에서 열린 사경회에서 기존의 거의 모든 사람들과 신입 회원 여러 명이 회심하였고, 그것을 “성령의 능력이 은혜롭게 부어짐을 통해” 자신들이 기도해 온 일이 영화롭게 이루어졌다고 기술한다. 이러한 설명의 내용을 볼 때, 하디는 치리를 엄격하게 하고 자신을 살피는 청교도적인 특색을 나타내는 가운데 자신의 성령의 체험을 성령세례라고 설명하면서 동시에 성령충만을 경험했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하디는 이미 세례를 받았으므로 그가 말하는 성령세례는 참된 회심의 경험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경회에 대해 메리 놀스는 “이 기간은 마음을 살피면서 하나님께 더 나아가는 기간”이었는데, “우리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축복이 우리 위에 부어졌습니다 --- 원산에서 부흥은 그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라고 설명한다. 프란손이 떠난 후에 하디가 인도한 집회에 대해서 “성령께서는 탐조등으로 우리교회를 철저히 살펴보시면서 “성전을 정화시키셨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빛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침투하여 그들의 감추어진 교만, 악의, 사기 등 갖가지 죄를 보여 주었습니다. 하지만 실제적인 구원을 가지지 못했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집회가 끝나기 전에 자기가 참으로 하나님 나라에서 태어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더 깊은 가르침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몇몇 사람들은 성령의 세례를 받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케이블은 하디가 제물포에서 열었던 부흥회에서 “말씀 선포가 성령의 큰 능력과 임재 속에서 행해져서, 죄의 무시무시한 힘과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예수의 능력이 드러났습니다.” 그리하여 이러한 집회에서 사람들은 죄를 공개적으로 고백하였으며, 주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싶다는 깊고 간절한 소망을 표현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성령충만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것이 우리 사역 전체에 임할 대부흥의 시작에 불과하다고 확신한다.” 크램은 1905년 송도에서의 부흥에 대해 설명하면서 “모든 설교에서 죄로부터 구원받는 것은 개인적인 자각의 문제라는 사실을 특별히 강조했으며 거듭남과 성령의 증거와 관련된 교리를 분명하게 제시했다”고 설명한다. 그러자 죄에 대한 뉘우침이 사람들을 사로잡는 “옛 시대의 부흥”이 임했다. 그는 “불신자의 마음이 구세주의 얼굴빛을 발견하는데 여러 해의 훈련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점점 더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성령이 죄를 뉘우치게 하심은 확실하고, 그 분이 모든 진리 가운데 인도하시겠다고 약속했으며 우리는 그러한 인도를 의심할 수 없습니다. 그는 한국교회가 전국으로 확산되는 부흥의 계절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러한 설명에서 드러나는 것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 죄인들의 죄에 대한 회개가 일어나며, 이러한 성령의 역사를 통한 회개를 통한 회심이 그들에게 중요한 관심사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러한 성령의 체험들을 성령세례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회심의 특별한 의미로 성령세례를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크램에게서 즉각적인 회심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디를 비롯한 남감리교 선교사들의 성령세례가 성결의 능력을 체험하는 경험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설명들은 성령의 강력한 역사를 통해 죄를 회개하여 진정으로 거듭하는 회심의 체험과 그로 인한 성령충만의 경험을 성령세례라고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장로교 선교사들은 청교도들의 회심 신학을 가지고 진정한 회심자를 얻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장로교 선교사들은 진정한 회심자를 얻기 위해 복음전도 사역을 강력하게 진행하면서 철저한 교리교육을 바탕으로 한 원입교인을 위한 학습 교육과 세례교육을 통하여 참된 회심을 한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고자 하였다. 그리고 원입교인들부터 안식일을 철저하게 준수하도록 지도하고 엄격한 교회 치리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내용들을 주일학교 교육과 사경회를 통해 교육하고 그러한 내용을 담은 소책자들을 저술하여 교육시켰다. 그러므로 장로교 선교사들은 청교도 유산으로부터 영혼을 깨워 회심자를 얻으려고 복음전도 사역을 시행하였다. 장로교 선교사들은 이러한 교리중심의 복음 전도 사역과 6개월에서 2년에 걸친 학습 교육을 통해 참된 회심자를 얻고 그들을 통해 참된 부흥이 일어나기를 소망하였다. 그러므로 선교사들은 성급하고 믿으려고 생각 없는 결정의 경우에 생각할 시간을 가지도록 추천하였다. 사무엘 마펫은 20주년을 기념하는 논문에서 복음전도의 이러한 규정을 확정하였다. 복음전도 사역의 요소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 죄, 그리고 처벌, 죄의 결과로서 하나님의 진노를 설명하는 것 2) 회개의 실재와 진실한 회심자에 대한 사죄의 선언을 설명하는 것 3) 성령의 중생하는 사역의 실재, 구원의 하나이자 유일한 길로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앙의 실재- 초자연적인 것을 가르치는 것 4) 한국인들이 하나님의 실재, 용서와 구원을 위하여 그 분에게 오는 어떤 사람이라도 구원하시는 복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심원한 확신을 경험하게 하시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는 여기서 중생을 통한 영혼 구원에 초점을 맞추는 선교정책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는 선교 정책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성경 말씀의 능력이라는 확신을 강력하게 피력하였다. 그는 심지어 개혁도, 개화도 기독교가 아니라 죄로부터의 구원이 복음의 본질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선교사는 강한 믿음을 가져야 하고, 선교사 자신의 영적인 삶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5가지 원칙을 정한 후에 방법은 각자의 취향에 따라 다를 수 있으나, 그는 개인적인 접촉을 하는 사랑방 전도를 선호한다. 그는 전도와 회심을 위해 성경을 사용할 것과 세례문답교육, 지속적인 복음전도 정신 주입, 사경회, 마지막으로 훈련된 조사, 전도인, 그리고 목회자의 개발을 제시한다. 그는 특히 성경을 설명하는 도구나 성경 공부로 이끌기 위해 소책자를 사용해야 하는데, 네비우스의 예수교문답, 구세론, 장원량우상론, 천로지남을 사용하고, 글을 모르는 사람을 위해 존스 여사가 집필한 초학언문을 활동한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장로교 선교사들은 청교도 회심신학에 입각한 부흥을 추구하였으며, 평양대부흥운동 이전에도 영적 각성에 대한 여러 건의 보고가 있었다. 평양교회가 영적으로 깨어나기 시작한 것은 청일전쟁 직후였다. 전쟁 이후에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었고 영적 각성의 움직임이 북부 전역에 확산되면서 평양은 한국 교회를 이끌어가는 중심부가 되었다. 기포드는 이와 같은 평양의 급속한 확장을 “놀라운 전진 운동”이라고 표현하였다. 이렇게 점진적인 영적 각성의 분위기 속에서 1901년에 열린 사경회에 대해 사경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하여(filled with the power of Holy Spirit)” 이러한 그룹들을 효과적으로 계속하여 가르치고 성경 지식에서 교회의 무지한 사람들을 급속도로 발전시킨다고 설명한다. 1902년에 열린 여러 사경회들은 성경 연구에 대한 전반적인 관심과 모든 곳에서 성경 진리의 더 나은 이해는 이 사역의 포괄적이고 영적인 영향력을 증언하고 있다. 1902년에 12월 17일부터 31일까지 열린 남자들을 위한 겨울 사경회에는 713명이 등록하였는데, 이러한 성경 공부에서 성경의 각권들을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성령의 사역과 주제 별 연구가 취급되었다. 이 보고서를 종합하면서 하나님이 문을 여셨으며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기회라는 서술로 끝을 맺고 있다.

북장로교 선교사들의 사역 속에서 공식적으로 보고된 첫 번째 부흥은 1903년 2월 부산 선교부의 보고였다. 이 선교부 소속의 사이드보담(R. H. Sidebotham) 선교사는 1890년 선교 시작부터 1902년까지 만족스러운 숫자적이고 영적인 성장이 없다가 1903년에 들어서 사람들이 기도회와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면서 부흥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보고하였다. 1903년 2월에 웰본(Arthur Welbon) 선교사는 배천에서 10일 동안 진행된 사경회에서 강한 성령의 나타나심으로 사람들이 죄로 인한 괴로움과 슬픔의 눈물을 흘렸으며,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체험하고, 죄에 대한 분명하고 무서운 결과를 깨닫는 새롭고 놀라운 체험을 했다고 보고했다. 그는 1903년 12월에 강원도 순회 전도 결과에 대해 복음이 들어 간지 3년 밖에 되지 않았는데 영적 각성이 일어나서 마을마다 주일을 엄격하게 지키고 복음의 빛에 충성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평양선교부는 1902년 이래 매년 1월에 신년 성경공부반을 개설했는데, 1904년에 성경공부반 참석자들이 오전에 성경을 공부하고 오후에는 가가호호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였다. 이로 인해 저녁 집회에 수백 명의 불신자들이 참석하여 복음을 듣고 도시 전체가 복음에 대한 응답이 고조되어 이 해 선교역사상 가장 많은 1436명이 회심했으며, 이러한 영적 움직임이 계속될 것이라고 하여 부흥이 시작되었음을 알린다. 1904년 겨울 상인들을 위한 사경회에서 우리가 교회에서 경험했던 가장 큰 각성(greatest awakening)이 일어나, 이것은 절망감을 변화시키고 커다란 영적인 고양을 가져왔던 영향력의 절정이어서, 교회는 전보다 훨씬 더 견고한 토대 위에 서게 되었다. 이 사경회 2일째 날에는 2000명이 참석했으며, 자리가 비좁아 수백 명이 돌아갔고, 기독교인들은 불신자들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했다. 3일째 되는 날에는 75명이 일어나(rose) 기독교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였다. 이 집회는 러일전쟁으로 중단되었는데, 관리, 장교, 하층관리, 학자들, 상인들, 예술가 등 다양한 계층이 참여하여 크게 감동을 받았다(greatly impressed).

이렇게 장로교와 감리교가 같이 부흥을 경험하는 가운데 복음주의 선교공의회에서 1905년 말에 1906년의 신년부흥회를 개최하는데, 교회 내의 사람들의 영적인 각성을 목적으로 할 것을 주문한다. 사역이 깊어지면 널리 퍼지는 일을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이 부흥회에서는 성경공부반을 진행하더라도, 머리보다는 마음을 가르칠 수 있는 주제를 선택할 것을 권장한다. 즉 죄, 회개, 고백, 죄의 용서, 구원의 확신 같은 교리를 제시하고, 교인들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귀중한 선물을 실제로 소유했는지 여부를 확인하도록 인도해야 할 것을 강조한다. 이러한 가운데 1906년 신년 사경회 겸 부흥회가 열려 죄의 고백을 동반하는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고, 그 절정으로 1907년 1월 14일과 15일에 걸쳐 평양대부흥이 일어났다. 평양대부흥운동이 일어날 때, 장로교 선교사들이 이것이 지나친 감정의 고조로 이어지지 않도록 중간에 찬송을 부르며 진정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평양의 대부흥은 단순한 감정의 고조가 아니라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 일어난 회개운동이었다. 이것은 단순하게 평양 장대현 교회의 역사로 끝나지 않고 평양시내의 여러 학교들로 확산되었고, 이 부흥운동을 감정의 고조라고 비판하던 이은승의 남산현교회로도 확산되어 갔다. 그 후에 이 부흥운동을 1월에서 6월에 걸쳐 한반도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만주와 중국으로도 확산되었다. 그러므로 이 부흥운동을 철저하게 성령의 역사 가운데 일어난 죄의 회개운동이었다. 그리고 이 부흥운동에 대하여 1908년에 이 길함은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을 확인한다. 그를 방문하여 부흥운동에 대해 이야기했던 하밀 박사(H. M. Hamill, D. D.)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한 가지 일은 감정적인 것이 당신의 종교에서 강조되는 것을 믿지 않거나 허용하지 않는 당신 자신 같은 냉정하고, 차분한 장로교도들이 여러 주일 동안 인간의 감정의 그렇게 거대한 격동의 특징을 나타내는 집회를 인도했고 참석했느냐 하는 것”이라고 질문하였다. 이 질문에 대해 이 길함은 회상에 잠기는 엄숙한 표정으로 “우리는 그것에 대하여 어느 것도 설명할 수 없다. 이것이 우리의 관습적인 방법이 아니라고 말할 때 당신은 옳다. 그러나 당신은 ‘인간적인 것으로’ 이것을 말할 때 잘못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초자연적으로(supernaturally) 왔으며, 우리가 그것을 통제하고자 원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를 일상적인 조건들 하에서 전혀 통제할 수 없었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죄의 고백들을 통하여 그들은 중생의 체험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 부흥운동은 인간들이 어떤 목적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였다. 감리교의 부흥운동을 개관하는 레너드의 글은 이러한 점들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는 평양에서 장로교에서 부흥운동이 먼저 일어났을 때 남산현 교회의 이 은승목사가 죄를 고백하는 부흥운동을 반대하였으나, 결국의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로 부흥운동에 동참하게 되었다. 다른 여러 사례들에서 반대자들의 강력한 반대 속에서도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를 통해 회개의 역사가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러한 부흥운동과 회개운동은 미국의 변경의 캠프 집회와 같이 불신자들을 모아 놓고 감정적인 설교를 하여 그들의 회심을 유도했던 것과는 성격이 다르다. 그리고 찰스 피니의 인간의 의지의 능력을 강조하던 부흥운동과도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그러므로 1907년의 평양대부흥운동은 청교도 회심신학을 토대로 사역을 해 온 장로교회에 성령의 강력한 역사를 통해 진정한 회개를 통한 회심을 체험한 것으로 판단되며, 이것은 1903년부터 원산부흥과도 공통점을 가지는 것이다.

 

나가는 말

 

1907년의 평양대부흥운동은 1903년 하디의 성령체험을 통한 회심으로부터 일어난 원산부흥운동에서 시작된 부흥운동의 정점이었다. 이러한 평양대부흥운동은 개혁신앙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잠정적인 답변을 제시할 수 있을 것 같다. 평양대부흥운동은 죄의 질책, 겸비, 회개를 통한 진정한 회심을 추구하던 청교도 신학을 이어받은 18세기 미국1차 대각성운동의 신파의 정통을 이어받은 19세기 2차 대각성운동의 구학파 전통을 가지고 한국에 왔던 선교사들의 수고의 결실로 일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평양대부흥운동은 근본적으로 청교도 회심신학을 토대로 하여 일어난 부흥운동이었다. 청교도 회심신학을 토대로 진정한 회심을 통한 부흥을 추구했던 구학파 전통을 가진 프린스톤 신학교와 맥코믹 신학교 출신들이 중심이 된 북장로교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진행된 선교활동은 그들의 주일학교 교육, 사경회 교육, 학습교인 교육, 세례문답교육, 그리고 소책자들의 저술에 반영되어 나타났다. 그들은 이러한 다양한 활동에서 인간의 죄의 심각성과 죄의 두려움, 그러한 죄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할 필요성과 궁극적으로 성령의 역사로 인한 회심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활동이 열매를 맺어 1903년부터 부분적인 영적 각성과 부흥이 일어나기 시작하다가 1905년의 장감연합의 복음주의 연합공의회를 결성하여 전국적인 부흥회를 개최한 후에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물론 1903년의 원산의 감리교의 부흥운동은 보수적인 남감리회 출신 선교사들을 통하여 진행되었다. 이들도 근본적으로 자신들을 살피며 엄격한 치리를 시행하는 가운데 성령의 역사를 통한 회개의 열매를 맺게 되었다. 그들은 이러한 활동을 성령의 세례라고 표현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성령세례는 중생과 구별되는 제2의 축복이라는 의미라기보다는 오히려 진정으로 거듭나는 중생 내지는 회심으로 보인다. 그리고 평양대부흥운동 당시의 성령의 역사를 통한 강력한 회개 운동도 진정한 회심의 역사로 보인다. 그러므로 이러한 성령의 역사를 통한 회개운동으로 전개된 1903년부터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까지의 핵심적인 양상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 진정한 회심의 역사가 일어났다는 면에서 동일한 측면이 있다. 물론 그 성령의 역사에 대한 이해와 그러한 역사가 일어나는 배경이 되는 각 교파의 교리의 차이는 존재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부흥운동이 성령의 역사를 통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라는 면에서 동일하고, 그러한 성령의 역사가 회개의 양상으로 나타났다는 점에서도 동일성은 있다. 이러한 면에서 양 교단의 협력을 통한 복음주의적인 성격과 성령의 역사를 통해 체험적인 신앙을 추구한 점에서는 통일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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