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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개혁신앙의 관점에서의 한경직 리더쉽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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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 신앙의 관점에서의 한경직 리더십 연구

A Leadership Study of Kyung Chik Han in terms of Reformed Faith

 

 

1.1.1. 임경철 교수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Lim Kyung Chul)

 

 

 

Ⅰ. 들어 가는 글 (Introduction)

 

히브리서의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브리서. 13:7,8)고 말한다. 한국 크리스천 리더십의 관점에서 한국 교회의 선대 지도자들을 기억하고 고찰하여 리더십 교훈들을 이해하고 배우고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리더십 교훈들은 한국교회의 상황에서 새롭게 출현하는 지도자들을 효과적으로 개발시키는 사역에도 유용할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1992년에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템플턴상(Templeman Award)을 수상하고, 당대의 한국 장로교회 역사상 가장 큰 교회였던 영락 교회를 서울에 개척한 한경직 목사를 연구하고자 한다. 실로 한경직 목사는 한국 목회자의 대표로 꼽을만하며, 동시대 전 세계 한인 목회자 중에 가장 존경할만한 인물이기도 하다. 또한 목회자로서, 교회 지도자로서 그가 가졌던 영적 영향력은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한국 교회에 미쳤다.

본 논문은 한경직 목사의 일생의 삶과 사역을 리더십 가치관과 철학, 성품, 리더십 유형, 의미 심장하고 궁극적인 기여(significant and ultimate contributions), 그리고 리더십 교훈의 관점에서 연구하고 분석하고자 한다.

 

 

Ⅱ. 리더십 특징 (Characteristics of Leadership)

 

본 장에서는 한경직 목사의 리더십을 가치관과 목회철학, 인품, 리더십 유형, 그리고 의미 심장하고 궁국적인 기여의 관점에서 논하고자 한다.

 

1. 리더십 가치관과 목회철학 (Leadership Values and Pastoral Philosophy)

 

영락교회 담임 목사로서 한경직 목사의 리더십 가치관과 목회철학을 고찰함을 통해 그의 신학적, 목회적, 영적, 철학적 가치를 그의 삶과 사역에서 찾아낼 수 있다. 리더십 가치관과 목회철학을 찾아내는 것은 그를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평가하기 위해서 매우 중요하다.

 

1) 교회 중심적 신학 (Church Centered Theology):

 

한국 신학의 지난 백여 년간의 역사는 성경의 본질를 이해하고 해석하는데 초점을 맞춰오면서 보수 신학과 자유주의 신학의 두 가지 흐름으로 나뉘었다. 1960년 이후, 신학의 관심과 대상이 문화, 문명, 혹은 사회, 등으로 민중에 제한적이고 상황적으로 변화하였다. 이때부터 신학의 보혁논쟁은 일단락되었으나, 특히 교회론에 주목하여 신학을 논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한경직 목사는 비록 광의적이기는 하지만 모든 신학은 교회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첫째로 교회는 인간적이지 않고 신적(divine)이어야 한다. 둘째, 교회(에클레시아)는 구별되고 성별된 자들의 모임이요 그리스도의 몸이다. 셋째, 교회는 가견적이면서 불가견적인 기관이다. 넷째, 불가견적 실체 교회는 가견적 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불가견적 교회는 가견적 교회를 통하여 복음을 전파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세운다. 다섯째, 교회가 있는 곳에는 개인적인 중생과 구원이 있어야 한다. 개인적 구원은 점차적으로 사회 개혁과 정화에 영향을 끼쳐야 한다. 여섯째, 진실한 교회는 나라의 초석이다. 교회에서 인간은 인간 이상의 존재인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비록 그가 신학자는 아니었으나, 그는 현대 교회의 역할을 강조했던 교회중심주의 운동의 기수였다. 그는 항상 교회가 교회적 일때 교회는 그 자체가 기독교의 본질이 된다고 주장했다. 물론 그는 교회는 하나님의 실체이며 그리스도의 몸임을 설명했다. 이는 그가 교회론의 성경적 해석을 이미 받아들였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헨드릭 크래머(Hendrik Kraemer)의 교회론보다 앞선 면모를 보인다. 한경직 목사의 교회론은 새로운 교회론이었다.

 

2) 목회적 가치관과 철학: 전도,교육,봉사 (Pastoral Values and Philosophy: Evangelism, Education and Service)

 

한경직 목사는 교회의 첫 번째 기능은 전도이고, 둘째는 교육이며, 셋째는 봉사(diakonia)라고 역설했다. 또한 이것은 교회에 있는 모든 믿는 자들의 의무이기도 하다고 주장했다. 첫째로, 전도의 기능은 교회의 최고 사명,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28:19)와 “땅 끝까지 이르러”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라고 했다(행1:8). 또한 교회의 최고 사명은 전도하는 것이라고 역설하며, 교회는 그리스도를 증거할 책임이 있고, 교회가 이 책임을 수행할 때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교회의 모든 일중에 전도 우선주의를 강조했던 것이다.

둘째로 교육의 기능에 대해서 그는 교육이라는 교회의 중요한 기능을 많은 신학자들과 목사들이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고 보았다. 이 교육의 기능은 이미 교회가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지상최대의 명령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9-20)에 나타나 있음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교회론을 논하는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교육은 단지 교회의 부수적인 기능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는 교회의 모든 활동이 교육이 아닌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셋째로 교회의 봉사의 기능에 대해서 그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리스도는 가장 낮은 자세로 인간을 섬기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세상을 섬기고, 세상에 봉사하는데 사명을 두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그는 교회의 존재론적 의미는 전도(mission)하며 교육(teaching)하고, 봉사(diakonia)하는 것에 있다고 보았다. 또한 교회에 속한 모든 믿는 자들은 이러한 기능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했다. 그는 평신도 신학(A Theology of the Laity, 1958)을 주창한 핸드릭 크래머보다 앞서서 평신도 신학에 대한 청사진을 갖고 있었다.

 

3) 반-공산주의(Anti-Communism):

 

한경직 목사의 철학은 두말할 나위 없이 반-공산주의적이었다. 일본의 식민주의 지배로부터 해방 이후, 그는 북한에서 자행된 공산주의자들의 테러와 폭력을 직접 목격했고, 공산주의 이념이 허구이며 잔인무도한 공포정치 체제임을 직접 체험한 후부터 철저한 반공주의자요, 멸공운동의 선두주자가 되었다. 그가 공산주의에 반대한 것은 단지 무신론적 유물사관 때문만이 아니라, 정권의 쟁취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테러를 일삼고, 인명경시, 민중압살, 양민학살, 등의 폭력을 자행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공산주의에 반대했으며, 공산주의는 타도의 대상, 인류의 적이며 세상에서 없어져야만 하는 것으로 여겼다.

그 결과 북한의 공산정권으로부터 피해 월남한 자들의 다수가 그의 교회로 모여들었다. 그 중 학생들을 중심으로 ‘이북학생총연맹’이 결성되어, 공산주의를 따르는 조직이나 공산주의 사상을 효과적으로 배격하는데 앞장섰다. 대부분의 구성원이 영락교회의 교인이었던 ‘서북청년단’은 ’기독교민주동맹’의 결성식을 무산시키기도 하였는데 이는 공산주의자인 김창준이 이 단체의 설립을 통해 ‘조선 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준비코자 했기 때문이었다.

 

4) 군 복음화 (Military Evagelization)

 

한경직 목사는 한국군의 복음화가 민족복음화의 지름길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매년 이십만 명이 넘는 젊은 남성들이 대한민국의 헌법에 의거해 입대한다. 그는 이 각각의 영혼이 천하보다 귀중하다고 생각했으며, 이 군대에 있는 물고기들을 잡기 위한 그물을 던져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만약 우리가 민족복음화를 빨리 성취하려면, 군 복음화에 최선의 노력을 쏟아야 함을 역설하였다.

또한 그는 군인들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구원을 확신하게 될 때 그들이 진정 용감하고 강인한 군사가 될 수 있으며, 따라서 군 복음화 운동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군 복음화를 위해 먼저 우리가 기도해야하며, 군목의 생활비와 교통비, 성경과 찬송, 기독교 문학의 보급 및 교회 건물의 신축 등을 통해 군목의 사업을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군 복음화를 위해 각기 내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스스로 생각하여 군 복음화를 적극 후원하자고 호소 하였다.

 

5) 민족 복음화 (National Evangelization)

 

신현균 목사는 한경직 목사가 지금 어떤 소원를 가지고 있을까 하고 생각해 보면, 아무것도 없고 그에게 오직 한 가지 있다면 이 민족이 복음화 되어 예수 믿는 나라가 되는 것이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울 사도가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롬 10:1)고 말했듯이, 한경직 목사는 바울사도를 분명히 닮았다. 그는 한국 기독교사에 있어서 민족복음화의 큰 역사를 창출해낸 인물이다.

한경직 목사가 한국 기독교 백주년 기념사업협의회의 총재로 있을 당시, 그는 사업협의회의 준비 사무실을 찾아와 “한국 교회가 선교 백주년을 맞게 되는 1985년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교인 배가 운동을 일으켜 기독교 인구가 1천 5백만 명을 돌파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 나라를 살리는 길은 민족복음화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큰 사명으로 이를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세확장보다는 일반적인 도덕과 정신혁명을 가져오는 데 관심을 가지고 힘써야 할 선교백주년 대회입니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분명한 것은 그가 영락교회의 목사에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한국 교회의 목사였다는 점이다. 그는 한국의 복음화에 대하여 분명한 비전과 열정을 리더십 가치관과 철학뿐만 아니라 그의 삶과 사역을 통하여 보여 주었다.

 

6) 애국심 (Patriotism)

 

한경직 목사는 잊을 수 없는 일생의 멘토를 두 명 만났는데, 그중 한 명인 홍기두선생으로부터 애국심을 배웠다. 홍기두선생은 안창호 선생이 설립한 평양 대성 학교를 졸업한 애국심이 넘치는 자였다. 홍선생은 한경직을 진광 소학교 시절부터 가르쳤으며, 그를 오산 중학교로 진학하도록 이끌기도 하였다. 그는 이 멘토로 부터 민족구원과 애국정신이라는 일생의 사명을 느끼고 배웠다. 이후로 그는 애국이라는 일생의 사명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또한 그는 오산 중학교 시절, 애국자 조만식선생과 이승훈선생의 영향을 깊게 받기도 하였다.

영성학교의 선생을 할 당시, 한경직은 학생들에게 기독교적 신앙과 애국심을 가르쳤다. 이 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동안, 그는 자신의 삶의 가치를 학생들이 기독교신앙과 애국정신 속에서 자라나는 것에 두었다. 그는 설교 중에 “대한민국이 잘 되어야 교회도 잘 됩니다…… 우리는 이 나라를 잘 보위하고 육성하여 우리가 자유와 평화와 번영가운데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애국의 길은 할 수 있는 대로 한국 정부와 국민이 하나가 되어 서로 협력하고 단결하여 봉사와 희생으로써 모든 방면에서 국력을 배양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우리의 책임을 다 하여야 합니다.” 라고 말했다.

 

7) 나누어 주는 삶 (Giving Life)

 

한경직 목사는 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낫다고 믿었다. 또한 그는 후하게 베푸는 자였다. 김창빈 사모는 그가 때때로 아무런 상의 없이 자신의 월급을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에게 주어버리는 바람에 생활을 꾸려 가는데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한 목사는 가난한 자나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자를 만나면 자신의 월급이나 주머니의 있는 돈 모두를 생활비를 생각하지 않고 주어버리곤 하였다. 이 때문에 영락 교회는 그에게 현금으로 월급을 주는 대신 그의 가정이 생활하는데 필요한 것들이나 쌀을 직접 보내기도 하였다.

김창빈 사모는 이러한 그의 나누어 주는 것에 대하여 결코 불평하지 않았다. 사모 역시도 나누어 줌에 있어서 손이 컸으며, 언제 누구라도 도움이 필요한 자는 은밀히 돕곤 했다. 그녀가 죽은 후에 그녀에게 도움 받았던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장례식에 찾아와 오랫동안 울고 또 울었다고 했다. 사실상 한목사와 사모는 베푸는 자의 좋은 모델이다. 그는 설교를 통하여 나누는 삶의 몇몇 중요한 점을 강조하였다. 첫째로 나누고 싶다면 먼저 스스로가 자립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 둘째로 믿는 자의 성품은 이기적이기보다는 나누어 주는 고상한 자가 되어야 한다. 셋째로 내 것을 희생하여 나눌 때 보통 때에 누릴 수 없는 최고의 환희를 느낄 수 있다. 넷째, 하나님의 특별하신 축복을 받게 된다고 했다.

 

8) 성경 중심적인 삶과 사역 (Bible-Centered Life and Ministry)

 

한경직 목사는 세상에는 많은 위대한 책들이 있으나 오직 성경만이 사람을 회개케 하며, 하나님을 알게 하고, 주를 만나게 하여 새 사람을 만든다고 믿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양식이고 도덕의 젖이라고 말했다. 만약 사람이 지속적으로 성경을 읽는다면 그의 영적인 삶은 성장하고 건강해지며, 유혹과 시련을 이길 수 있게 된다. 낙담할 때 성경을 통해 위안을 받는다. 사업에 실패하고 실망했을 때 성경를 통해 재차 용기와 새 힘을 얻게 된다. 성경을 매일 읽은 사람들은 매일 좋은 음식을 섭취한 사람과도 같다고 했다.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야 한다고 했다. 만약 교회가 성경 중심적이라면 그 교회는 부흥하기 마련이다. 성경을 연구하는 교회는 성공적일 수밖에 없다. 성경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성경이 비록 고루한 책처럼 보일지라도, 언제나 새로운 책이다. 그는 성경을 가르칠 때마다, 언제나 성경의 가치와 더불어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 자신도 성경 중심적인 삶과 사역을 유지하기 위하여 매일 성경을 읽었다.

 

9) 섬기는 삶 (Servanthood)

 

한경직 목사의 목회철학은 “사람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였다. 그는 언제나 사람을 섬기는데 최선을 다했다. 특히 한국 전쟁 중에 많은 사람들이 공산정권으로 인해 북에서 남으로 피난을 오자, 그는 그들에게 안식처와 음식을 제공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의 설교를 통해 격려하였다. 그는 교회 마당에 많은 천막을 쳐서 북으로부터 빈손으로 내려온 피난민들에게 음식과 쉴 곳을 제공하여 남에서 정착할 수 있게 도왔다.

그는 가난한 성도들을 돕기 위해 매주 의료 진료를 하였고 의료 봉사대를 조직하여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지역 주민의 건강을 돌보았다. 그는 가족을 떠나 군복무 중인 군인들을 찾아가 함께 예배드림으로서 위로하였다. 또 그는 군인들에게 위문품을 전달했으며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교회 설립기금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사실상 그는 지역교회가 섬김의 단체가 되어야만 한다고 믿었으며 “사람을 잘 섬김으로서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다”고 보았다.

그의 목회 철학에 따라, 영락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섬기는 교회의 원형이 되어 갔다. 영락교회는 모든 연령대를 실질적으로 섬기고 돕기 위해 유아원, 유치원, 중학교, 고등학교, 여자 신학교, 보린원, 모자원, 양로원, 기도원, 농아인 교회, 교회 묘지 등을 설립했다. 그 결과 그는 영락교회에 이러한 믿음과 전통을 세운 사람이자, 고통과 역경 가운데 있는 자들을 위한 섬김과 격려를 신실하게 행동으로 실천한 자로 존경받게 되었다.

 

10) 기도하는 삶 (Prayer Life)

 

한경직 목사는 자신의 설교를 통하여 기도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지도자들은 믿음을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 지도자들은 회개하는 기도를 해야 한다. 지도자들은 최선을 다해 기도해야 한다. 지도자들은 순종하며 기도해야 한다. 지도자들은 지속적으로 기도해야 한다. 지도자들은 매일 아침저녁으로 기도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지도자들은 서로를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지도자들은 병든 자를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기도할 때에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며, 믿어야 하고, 교제를 나누며, 필요를 구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는 기도에 대해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그의 전 생애를 통하여 기도하는 삶의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애국심을 뜨거운 기도를 통해 보여주었다. 군사독재정부가 대통령의 임기에 관한 법을 개정하여 삼선까지 가능하게끔 하려 했을 때, 나라는 중대한 정치적 위기에 부딪혔다. 목사로서 그는 금식하며 교회 제단에 무릎 꿇고 이 나라의 미래를 위하여 울며 기도함으로 이 나라를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올려드렸다.

 

2. 개인적 성품 (Personal Character)

 

무엇보다도 먼저 많은 한국의 지도자들은 한경직 목사가 겸손했다고 입을 모은다. 그는 매우 바쁘고 힘든 와중에도 방문객들을 입구까지 바래다주었다. 둘째로 그는 온유한 자였다. 특별히 그는 인간관계에 있어서 온유했다. 셋째로 그는 목사로서 인내했다. 만약 누군가 그를 오해하고 비판했을 때 그는 매우 참을성 있게 그 비판을 수용했다. 넷째로 그의 외양은 온유했으나 내면은 강인했다. 누군가 그를 핍박을 하게 되면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 그 핍박을 이겨내곤 했다. 그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다섯 번째로 그는 항상 사람들과 교파간의 화평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결코 불의는 용납하지 않았다. 장로교가 나뉘었을 때, 그는 다시 화합케끔 하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하였다. 이런 점에서 그는 한국 교회의 존경받는 목사가 될 수 있었고 전 세계의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로부터 존경받을 수 있었다. 또 그는 이러한 좋은 성품들로 인하여 하나님께도 크게 쓰임 받았으며 그의 삶과 사역을 통하여 한국과 세계에 많은 하나님의 위대한 업적들을 이루어냈다.

 

3. 리더십 유형 (Leadership Styles)

 

일반적으로 다양한 상황의 필요에 따라 다양한 상황은 다양한 리더십 유형들을 요구한다. 로버트 클린턴(J. Robert Clinton)에 따르면 리더십 유형을 연구하는 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고 한다. 첫째는 리더가 불필요한 충돌을 줄이고 싶다면 리더십 유형에 대하여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둘째, 다양한 리더십 유형을 인지하고 있는 지도자는 추종자들에게 가장 적합한 유형을 택하여 사용할 수 있다. 셋째, 지도자는 지도력을 기르기 위하여 리더십 유형을 알아야만 한다.

 

1) 목자 유형 (Shepherd Style)

 

클린턴은 “목자형 지도자 모델은 성경에 나타난 다양한 목자와 양 비유에서처럼 따르는 자들을 보살피는 데에 리더십의 책무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과 본보기를 중심에 둔 철학적 모델이다”라고 정의한다.

한경직 목사는 지덕을 겸비한 목자로서 “그의 삶의 자세는 예수님같이 늘 눌린 자의 편에 섰고, 가난한 자의 친구였고, 현실에서 버림받은 자, 소외된 자, 병든 자, 외로운 자의 벗이 되어 그들의 삶에 보람과 기쁨과 용기를 주었다.” 또한 그는 목자로서 언제나 사람들을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하였다. 그는 북에서 빈손으로 내려온 피난민들에게 음식과 쉴 곳을 제공했으며, 설교 말씀을 통하여 격려했다. 그는 형편이 어려운 신자들에게 매주 의료 검진을 제공하였다. 또한 의료 설비가 없어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지역에 의료 봉사단을 보냈다. 그는 군부대를 방문하여 함께 예배드림으로써 군인들을 격려했고, 그들이 교회를 세울 수 있는 기금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진실로 그는 “사람을 잘 섬김으로서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유아원, 유치원, 중고등학교, 여자 신학교, 보린원, 모자원, 양로원, 기도원, 농아인 교회를 세워서 모든 연령대의 사람들을 실질적으로 목양했다. 그러므로 그는 좋은 목자로서 사람들을 돌보았고, 격려했고, 이끌었으며, 먹였고, 보호했다. 이런 종류의 많은 사례를 통하여 그는 목자로서의 리더십 유형을 보여주었다.

 

2) 사도 유형 (Apostolic Style)

 

클린턴은 "사도형 리더십은 책임져야할 자들에게 지도자가 위임받은 권위의 역할을 가정하고, 결정에 관하여 하나님으로부터의 계시를 받아, 하나님 뜻에 관한 계시와 위임 받은 권위의 역할을 근거한 순종을 명령하여 영향력을 미치는 하나의 리더십의 유형이다."라고 정의한다.

한경직 목사는 사도적 은사를 가진 자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인도(계시)와 뜻을 순종하여 영락교회를 여러 곳에다가 개척했으며, 성도들과 함께 고아원, 학교, 양로원 등의 새로운 프로젝트를 착수하기도 하였다. 이런 면모는 그를 굉장히 지배적인 사도적 유형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실제로 그의 리더십은 사도적 유형과는 다른점이 많았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전서 2장 7,8절에서 “오직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니라”라고 언급한 바 있다. 실제로 그는 영락교회 신자들을 대할 때 진실로 온화하고 겸손했으며, 그들을 어머니 같은 목자로서 돌보았다. 그는 신자들을 깊이 사랑하였고, 재정적 필요를 보거든 언제나 주저 없이 자신의 소유를 나누었다. 그러므로 그는 전통적 사도적 리더십 유형의 면모와 다른 내면적 특성을 보여준 사도적 리더십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3) 성숙함을 보여주는 유형 (Maturity Appeal Style)

 

클린턴은 “지도자들은 종종 자신들이 하나님과 함께한 '족적(Track Record/ 경험적 지혜: Learned Wisdom)‘을 나눔으로 따르는 자들을 설득하고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말하면서, “성숙함을 보여주는 유형은 사람들이 지도자의 아이디어들을 우호적으로 수용하게끔 신뢰를 주기위하여 일반적으로 오랜 기간을 두고 얻을 수 있는 경건한 경험, 경험을 공유하는 것에 기초한 공감대 형성과 사람들의 인정으로부터 나오는 리더십 영향력의 한 형태이다.”라고 정의한다.

한경직 목사의 전형적인 리더십 유형은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에 우호적으로 반응하도록 설득하고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었다. 그가 교회에서 장로 회의를 가질 때, 그는 자신의 생각을 장로들에게 개진하되 지혜롭게 설득하여 그들이 받아들이게끔 하였다. 때때로 그는 특정 사안에 대하여 인내심을 발휘해야하기도 했는데, 그는 위대한 사역을 위해서는 그만큼의 위대한 인내가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는 지도자들이 인내심을 갖추었을 때 비로소 모든 것을 다 갖춘 것이라고 강조하기도 하였다. 실제로 그는 화평에 대한 그의 사상을 이해시키고 납득시키기 위하여 오랜 시간을 기다렸다. 그의 목회사역은 장로회의(당회)와 교회에서의 평화와 조화로 특징지어진다. 그는 삶과 사역을 통하여 성숙함을 보여주는 유형의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4) 유모 형 (Nurse Style)

 

클린턴은 “유모 형 리더십은 자신을 따르는 이들의 양육이 방해되지 않게 하기 위해 자신의 권리를 포기했음을 시사하는 온화함과 희생적인 섬김, 사랑 넘치는 돌봄으로 특징지어지는 리더십 행동유형이다”라고 정의한다.

사도바울은 “오직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딤전 2장 7절)라고 말한다. 한경직 목사는 한국 전쟁동안 뿐만 아니라 그의 전 생애를 통하여 고아와 과부는 물론 모든 연령층의 사람들을 위하여 실질적으로 사랑하고 희생하였다. 그 증거로 그는 보린원과 모자원, 양로원 등을 지었다. 그는 고아와 과부와 돌보는 이 없이 외로운 자들의 부모가 되어주었다. 실제로 그는 슬하에 일남 일녀를 두었으나 그의 사랑 넘치는 돌봄을 통하여 더 많은 자녀를 품고 있었다.

이종성 목사는 한경직 목사의 성품을 온유함과 인내, 겸손, 고귀함, 사랑 많음으로 특징짓는다. 그는 온유하고 인내와 사랑이 많았다는 점에서 유모 형 리더십의 좋은 본보기가 된다. 바울 사도는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딤후 2:24,25)할 것이라고 그의 제자 디모데를 가르쳤다. 이 구절은 한경직 목사의 인품이 유모 형 리더십을 가졌음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5) 본보기 유형 (Imitator Style)

 

클린턴은 본보기 유형을 “본보기 유형은 따르는 자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하나의 수단으로써 따르는 자들이 마음속으로 리더의 본보기를 본 받고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어떠해야 하는가, 따르는 자들이 리더의 본을 받게끔 독려하는 기대치를 사역에서 어떻게 나타내는가에 대한 리더의 책임감이 반영된다”라고 정의한다.

 

한경직 목사와 그가 한 일들은 영락교회의 성도들, 그의 교단과 한국내의 따르는 자들에게 강력한 본보기가 되었다. 그의 강력한 영향력으로 인해, 영락교회의 이름은 한국뿐만 아니라 해외에까지도 널리 알려졌다. 한국내의 대부분의 큰 도시들에도 영락교회가 있다. 또한 로스엔젤레스 도시 주변에도 여러 개의 영락 교회가 있다. 그가 1973년 서울 영락교회를 은퇴했을 때, 이미 1966년부터 연계훈련(Tandem Training)을 통해 준비 된 박조준 목사는 성공적으로 그의 당회장 직분은 물려받을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박조준 목사가 설교 방식이나 논조까지도 포함한 많은 부분에서 한경직 목사를 닮았다고 이야기 한다.

한편, 많은 목회자들은 목회 가치관과 목회 철학, 설교법, 인품, 영향력의 범주, 영락교회의 성장 및 영적인 부분 등 여러 가지 부분에서 한경직 목사를 닮고자 한다. 특히 한국 교회와 교파가 겪어왔던 숱한 분열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영락의 정신은 조화와 연합을 지키고 있다. 1959년 이래로 한경직 목사가 몸담은 그의 교단이나 영락교회는 단 한 번도 분열되지 않았다. 예를 들어 남가주 영락교회는 김계용 목사에 의해 1973년에 세워졌으며 1990년부터 부목사였던 박희민 목사가 사역하고 있다. 이 교회 역시 지금껏 단 한 번도 분열되지 않았으며, 아직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미국에 있는 한국 이민 교회의 뛰어난 본보기가 되어 역동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이러한 예들을 통해 우리는 한경직 목사는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빌4:9)라는 바울 사도의 말처럼 자신을 따르는 자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국내외의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친 효과적인 리더십으로서 그의 존재와 업적이 남긴 뛰어나고도 역동적인 모델을 볼 수 있다.

 

6) 관계 중심적 유형 (Relationship Oriented Style)

 

폴 헐시(Paul Hersey)와 케니스 블란차드(Kenneth H. Blanchard)는 관계 중심적 유형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관계 중심적 지도자는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중재를 할 때 최선의 역할을 하는 경향이 있다……. 관계적 행동은 지도자가 쌍방향 혹은 다방향(multi-way)의 의사소통에 관여하는 것을 뜻한다. 관계적 행동은 들어주는 것, 관계를 촉진 시키는 것, 지지해 주는 것 같은 행동을 포함한다.

 

한경직 목사의 행동은 전형적인 관계 중심적 지도자 유형에 속해있다. 그는 사역과 삶에 있어서 과업 성취보다도 인간관계를 우선시 했다. 피들러(Fred E. Fiedler)는 “작업 환경에서, 관계 중심적 지도자는 구성원들의 참여와 각기 다른 아이디어를 내놓는 것을 격려한다. 그들은 일이 복잡하게 꼬일 때에도 성내지 않으며, 창의적으로 문제를 해결 하는 것을 좋아한다.”라고 말했다.

 

한경직 목사는 교회 건물 건축이나 고아, 피난민, 과부, 노인 등을 위한 시설을 건축하는 등의 자신의 목회 프로젝트에 교회 구성원들의 참여를 권장했다. 또 그는 성도들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그들이 무엇을 느끼는 지를 예민하고도 주의 깊게 살폈다. 그가 교회에서 장로들과 복잡하고 어려운 사안을 논의할 때면, 그는 항상 겸손하게 다른 의견을 수렴했고 온화하고 평화로운 가운데 현명한 결정을 다함께 이끌어내도록 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자신의 일생과 사역에서 좋은 관계 중심적 지도자의 본보기였다고 할 수 있겠다.

 

7) 반-공산주의 형 (Anti-Communist Style)

 

한경직 목사는 공산주의가 북에서 권력을 잡기 위하여 횡포와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본 경험이 있기에 반공산주의 철학을 가졌다. 그는 공산주의의 유물론적 사고뿐만 아니라 정권을 잡는 방식에도 반대했다. 그러므로 그는 공산주의는 인류의 적이며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대상이라고 가르쳤다.

한국 전쟁동안 많은 피난민들이 북의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도망쳐 한경직 목사의 교회에 모여들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난민들을 돌보았다. 공산주의 단체에 효과적으로 맞서기 위하여 피난민 중, 학생들이 모여서 ‘이북학생총연맹’이 결성되었다. 그는 또한 ‘서북청년단’이 공산주의자 김창준이 준비했던 ’기독교민주동맹’의 결성식을 무력화하는 것을 도왔다.

 

4. 귀중하고 궁극적인 공헌들 (Significant and Ultimate Contributions)

 

많은 지도자들은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공헌들을 남긴다. 그러나 필자는 한경직 목사는 중대하고도 긍정적인 공헌들을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남겼다고 믿는다. 이 장에서는 그의 중요한 공헌들을 논하고자 한다.

 

1) 성자의 모델 (A Model of A Saint)

 

클린턴은 성자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성자는 본 보이는 삶을 사는 사람이다. 그는 다른 사람이 본받고자 하는 성자의 모범을 보여주며 항상 하나님과 매우 친밀한 관계를 가진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종종 신비적 체험을 하기도 한다. 성자는 성령의 열매를 보여준다. 하나님을 향한 열망이 보통 사람보다 띄어나다. 그의 성취의 초점은 주로 수직적, 상향적이며 하나님을 향해 있다는 특성을 가진다.

 

한경직 목사는 그의 전 생애를 통하여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가져온 성자의 좋은 사례이다. 그는 그의 삶에 하나님의 간섭으로 인해 어떤 고립 과정(Isolation Process)도 거쳤다. 프린스턴 신학 대학을 졸업한 후, 그는 당시로서는 치명적이었던 결핵에 걸려 삼년간 요양소를 전전하게 된다. 요양소에서의 삼년 동안, 그는 죄를 회개하고 말씀을 묵상하며 한국에서 삼년 동안만 이라도 사역할 수 있게 허락해주시기를 살아계신 하나님께 전심으로 구했다. 이 기회를 통해 그는 하나님을 만나고 깊은 교제를 할 수 있었다.

그는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감옥에 가게 되었고, 이를 통해 생애 두 번째의 고립 과정를 가졌다. 감옥에서 그는 다시금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갖게 된다. 그는 이 사건으로 인해 신의주 제 2장로교회를 사직하고 보린원으로 가서 고아들을 돌보았다. 그는 이곳에서 한국의 독립을 기다리며 매일 성경을 연구하고 기도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다.

그의 성품은 크게 온유함과 겸손함과 경건하고 청빈한 삶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그는 성령의 거룩한 열매를 사역과 삶을 통해 보여준 성자였었다. 그는 성자의 원형이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모든 교회에 강력한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결국 지금까지도 한국의 많은 목회자들이 한경직 목사를 존경하고 그의 삶과 성품을 닮기 원한다.

 

2) 창조적인 개척자 (Creative Founder)

 

클린턴은 창조적인 개척자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개척자는 새로운 종교 조직이나 새로운 종교 기관, 새로운 교회나 교단 혹은 단체를 만들거나, 아무도 시도한 적 없는 분야에서 일을 하거나, 특별한 필요를 감지해내거나, 무언가를 하는 새로운 방식을 보여줌으로서 새로운 장을 열고 그에 도달하는 방법을 제시하는 등의 일을 하는 사람이다. 그가 창조한 일이나 세운 업적은 유산으로 남게 된다.

 

한경직 목사는 국내외의 중요한 교회 중 하나인 영락교회를 최초로 개척하여 설립한 사람이다. 그는 고아들을 위한 보린원, 과부와 그 자녀들을 위한 모자원, 대광 중고등학교 같은 기독 학교, 영락 고등학교, 그리고 여성 신학교도 설립하였다. 사실상 그는 한국의 복음화가 국군의 복음화를 통해 이루어질 것이라는 새로운 비전을 확실히 보았던 것이다. 그 결과 많은 목사들과 교단들이 함께 참여하기 시작했으며, 지금까지도 이어져 한국 복음화에 있어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또한 그는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역할을 다하여 지역 교회를 세우고 사회봉사를 하는 것에 막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는 창조적인 개척자로서 다음 세대를 위하여 많은 유산을 남겼다.

 

3) 사역 모델 선구자 (Stylistic Practitioner)

 

클린턴은 “사역 모델 선구자(stylistic practitioner)는 중요하거나 또는 독특한 사역 모델이 되는 사람을 말한다. 또한 그는 본받을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사역 모델이야 말로 궁극적인 공헌이라 할 수 있다”고 하였다.

 

한경직 목사는 자신의 목회 가치관과 철학을 실제로 적용하여서 영락교회에서 선교(전도), 교육과 사회사업을 실행하였다. 그는 지방에 지역 교회를 개척하기 위해서 일군들을 보내고 지원하였다. 또한 그는 군 복음화와 교도소 전도도 지원했다. 그는 또한 교회의 사명은 교육이여야만 한다고 믿었고, 특히 믿는 자들의 성경 교육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그는 교회가 예수께서 행한 대로 사람과 세상을 섬겨야만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의 교회는 봉사부를 따로 두었다. 그의 교회 성도들은 쌀과 돈을 한 달에 한 번씩 모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의 교회는 장례식을 위하여 상례부를 두어서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간에 형편이 어려운 자들을 위하여 장례식을 준비해 주었다. 그는 한국 교회들에게 좋은 목회 사역의 모델을 유산으로서 남겨주었다.

 

4) 대중 설교자 (Public Rhetorician)

 

클린턴은 대중 설교자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대중 설교자는 대중 앞에 노출되며 그의 사역이 대중 혹은 대규모 집단을 상대로 하는 사람이다. 보통 그들은 대중 전달자(mass communicators)였다. 그들은 대중 앞에서 빛이 난다. 그들은 대규모의 따르는 무리들에게 동기를 부여한다. 비록 포괄적이고 집중적인 영향력은 거의 없지만 넓고 광범위한 영역의 영향력을 가진다. 이들의 궁극적인 공헌은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한경직 목사의 대중연설의 은사는 일찍이 개발되었었다. 숭실 대학교 학생 시절에 그는 최우수 웅변상을 타기도 하였다. 또한 프린스턴 신학대학을 졸업할 때 그는 설교 상을 받기도 하였다. 그가 동남아 선교대회 때 “힘으로도 못하고 능력으로도 못하고 오직 성령만으로”(슥 4:6)라는 설교를 했을 때 모든 참석자들은 그의 설교에 감동하여 기립박수를 오 분간 친 적도 있었다.

그는 여러번 밥 피어스(Bob Pierce)나 빌리 그래함(Billy Graham)같은 사람들과 함께 세계 전도 집회를 같이 다녔다. 특히 그는 빌리 그래함과 함께 “베를린 세계 전도대회”에 서 같이 사역을 하였다. 정진경 목사는 한 목사의 설교가 모든 세대에게 간결하면서도 이해하기가 쉬웠으며 청중들에게 영감을 주었다고 말했다. 그의 설교는 청중을 사로잡는 열정이 있었다. 영락교회의 급성장의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그의 설교가 가지는 막대한 영향력일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목회 가치관과 철학이 담긴 설교를 통하여 그의 교회의 성도들을 격려하고 가르쳤다.

 

5) 프로모터(Promoter)

 

클린턴은 프로모터를 “프로모터는 어떤 개념화로부터 시작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으나, 기독교 시장에서의 마케팅에 뛰어난 사람이다. 그 공헌은 기독교인들에게 널리 수용되어 사용되는 관념화에 있다.”고 정의한다.

한경직 목사는 1932년 미국 인디아나 폴리스에서 공식화된 “교회의 사회 강령”을 총회의 월간지였던 신학지남에 소개하였다. 그는 기독교인의 사회적 기능을 주창하였다. 그는 기독교인과 지역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깨닫고 있었기에 보린원이라는 이름의 고아원과, 모자원이라는 이름의 과부를 위한 건물을 지었다. 이를 통해 그는 자신의 교단과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인식하고 점진적으로 실행할 수 있도록 영향을 미쳤다.

1966년 “베를린 세계 선교 대회”에 참석했던 그는 효과적으로 많은 고기를 낚기 위해서는 고기가 많이 모여 있는 곳에 가야만 함을 배웠다. 그는 당시 한국의 상황에서 군대야 말로 많은 고기를 낚기에 적합한 곳임을 발견했다. 그는 국군 장병들에게 복음을 설파하기 시작했으며 많은 군목들을 그들 가운데 파송했다. 사실상 그는 한국의 복음화가 국군의 복음화를 통해 이루어질 것이라는 비전을 확실히 보았던 것이다. 그 결과 많은 목사들과 교단들이 이 프로젝트에 함께 참여하기 시작했으며, 지금까지도 이 프로젝트가 계승되어 한국 복음화에 있어 많은 열매를 맺고 있다.

 

6) 안정시키는 사람 (Stabilizer)

 

클린턴은 “안정시키는 자는 어떤 기관을 세우고 그리고 그 기관에 안정을 정착시켜 그 기관이 존속되고 효과적으로 운영되도록 한다. 이들의 공헌의 결과는 안정된 조직체나 계속 존속 발전하는 기관이다” 라고 정의하고 있다.

한경직 목사의 첫 사역지는 신의주 제 2 장로교회였으며 이 교회는 급속도로 성장하였다. 그는 교회 건물은 물론이요 보린원, 모자원의 건물을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건축했다.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그는 모든 사역들을 효과적으로 발전시키고 안정시켰다. 또한 그는 1945년, 서울에 영락교회를 개척 설립했다. 그는 영락교회를 한국에서 가장 큰 장로교회로 발전, 안정시켰으며 그리고 교회 건물도 건축하여 교회가 효율적으로 운영되도록 했다.

그는 교회사역 뿐만 아니라 교회의 사회적 책임에 따라 고아와 과부, 노인, 고학생 등을 돕기 위한 여러 사역들을 출범시켰다. 그리고 이 교회의 모든 사역을 공고히 했으며 교회를 국내외의 앞서 가는 교회로 성장, 발전시켰다. 이러한 사례들을 통하여 그는 여러 가지 많은 기관들을 세우고 안정시키는 사람으로서 훌륭한 자신의 업적들을 남겼다.

 

7) 개혁운동가(Crusader)

 

클린턴은 개혁운동가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개혁운동가는 일들을 바로잡고자 하는 열망을 가진 사람이다. 그들은 사회나 교회나 기독교 기관의 문제점을 직시하고, 그것들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사람이다. 어떤 이들은 일들을 더 좋게 만들려는 동기보다는 실제 필요들에 대한 동정심에서 시도하고자 하기도 한다. 그들이 사역한 사람들이나 변화된 상황이 그들의 유산으로 남는다.

 

한경직 목사는 공산주의자들이 북한에서 정권을 잡고자 행한 횡포와 폭력을 목도했다. 그는 공산주의자들의 유물론적 세계관에도 강력히 반대했다. 그는 공산주의야 말로 인류 최대의 적이며 이 세계에서 사라져야할 존재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그는 북에서 공산주의를 피해 도망온 피난민들의 영적, 육적 필요를 돌보면서도, 그는 공산주의 사상을 따르는 다른 조직에 대항하기 위한 새로운 조직을 세워서 변화를 시도하였다.

한국전쟁을 통해 그는 목회자들의 영적 필요를 발견하였다. 그래서 밥 피어스에게 목회자의 영적 부흥회를 열어 달라고 요청하였다. 전쟁 후에도 그는 목회자들을 위한 사역을 계속하야 개선해 나아가는데 앞장을 섰다. 또한 그는 민족 복음화의 필요를 깊이 인식하여서 여러 종류의 복음화 운동을 시도하였는데 한국 군복음화 운동을 통해서 한국 군대를 변화시키고자 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의 관심은 한국에만 국한되지 않았고 세계의 필요에까지 미쳤으며, “사랑의 쌀” 운동을 통하여 온 세계의 빈민들에게 쌀을 보내서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Ⅲ. 리더십 교훈 (Leadership Lessons)

 

이 장에서는 한경직 목사의 삶을 통한 리더십의 원리와 교훈들을 논하고자 한다.

 

1.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Blessed the Meek):

 

한경직 목사의 삶과 사역을 통한 리더십 교훈을 되새겨 볼 때,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라는 말씀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김용기장로에 의하면 한경직 목사의 인품은 겸손과 온유로 대표된다 하였다. 예수님께서 말씀에서 약속하신 것처럼 그는 목회 사역과 삶에 있어서 온유한 자의 축복을 기업으로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여러 개의 영락교회를 한국의 대도시들에 개척했다. 더구나 영락이라는 이름은 그의 탁월한 영향력 때문에 남한뿐만 아니라 해외에까지도 널리 알려졌다. 영적 리더로서 그의 영향력의 범주는 온유한 자의 유업으로서 확장되어 한국을 넘어 세계에 미쳤다. 다시 말하자면 그의 교구는 한국뿐만 아닌 세계를 포함했던 것이다.

 

2.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 (To Give is Better than to Receive):

 

한경직 목사의 삶과 사역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행20:35)라고 말씀하신 교훈을 배울 수 있다. 그의 베푸는 삶에 대한 일화가 몇몇 있다. 그는 봉급이나 선물, 소유 등을 나누기를 좋아하였다.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본다면 그는 기꺼이 자신의 지갑 속에 있는 돈이나 소지품을 주곤 하였다. 수차례에 걸쳐서 그는 자신의 봉급을 아내와 상의 없이 불우한 자에게 주어버려서, 사모는 가계를 꾸려 가는데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고 한다. 이렇게 되자 교회는 봉급을 현금으로 주는 대신에 사모에게 직접 쌀이나 음식, 옷 등의 일용품으로 보냈다고 한다.

설교나 학회 강의, 예배 또는 교회 행사에 초청 받았을 때, 그는 사례금을 받지 않거나, 받은 즉시로 다른 선교 단체, 혹은 영락교회 장학기금으로 보내어 다른 자들을 돕게 하였다. 한번은 그가 개척교회의 설교자로 초청 받았으나, 사례금은 물론 받지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재정을 지원해주고 자금 대출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도 하였다.

그는 선물을 받으면 이를 필요한 자에게 나누어 주고자 하였다. 사모 역시도 남몰래 자신의 소유를 필요한 자에게 나누는데 힘썼다. 그 결과, 사모가 소천 하였을 때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빈소를 찾아 울고 갔다고 한다. 한경직 목사와 그의 사모는 항상 그들의 소유를 필요한 자들에게 나누고 베풀기를 원했다. 그들은 자신의 삶과 사역을 통하여 베푸는 삶의 좋은 본보기를 보여주었다.

 

3. 사람을 섬기는 것이 곧 하나님을 섬기는 것 (To Serve People is to Serve God):

 

한경직 목사는 자신의 목회 가치관인 “사람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실천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그는 말없이 자신의 삶과 사역을 통해 섬기는 좋은 본보기를 보여주었다. 그는 섬김의 의미를 자신이 스스로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 가르쳤다. 섬김은 어떤 말이 필요 없는 것이다. 그는 유창한 웅변가는 아니었으나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데 았어서 위선이나 두 얼굴을 갖지 않고 행동으로 실천하는 행동가였다. 그러므로 그는 입으로만 섬기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거나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애초부터 그의 섬기는 철학은 자신의 선행을 대중매체를 통해 알리려는 사람들과는 근본부터 달랐다. 그는 예수께서 “너의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말씀하신 것에 맞는 섬김의 태도를 취했다. 그는 자신의 이득을 얻으려하거나 이름을 내기위하여 사람을 섬기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봉사의 과업(serving project)에 따라 지속적으로 사람들을 도운 신실한 종이었다.

그가 신의주 제 2 장로교회와 영락교회를 섬길 때 그는 복음과 봉사를 동시에 진행하였다. 한국 전쟁 중, 그는 교회 마당에서 빈손으로 온 피난민들에게 음식과 텐트를 제공하였다. 그는 산간오지의 미자립 교회들에게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여서 건강을 돌볼 수 있도록 도왔다. 사실, 그는 교회는 섬기는 기관이 되어야만 한다고 믿었다. 그의 목회철학에 따라서 영락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는 실제적 기관이 되었다.

 

4. 멘토가 중요하다 (Mentor is Important):

 

한경직 목사의 삶과 사역을 돌아볼 때에 리더십 개발에 있어서 미치는 멘토의 영향은 매우 중요함을 배운다. 그는 평생토록 자신의 가치관과 삶의 목적을 제시해 준 두 명의 멘토를 잊지 않았다. 우영진은 그의 신앙에 영향을 주어 인생의 방향이 하나님께로 오게 하였고, 홍기두는 그에게 애국심과 민족의식을 심어주었다. 특히 홍기두는 한경직을 오산학교로 이끌어 이승훈과 조만식을 만날 수 있게 한 장본인이었다. 남강 이승훈과 고당 조만식은 그의 애국심과 민족정신을 깊이 고취시켰다. 이러한 멘토들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그는 자신의 삶에 있어서 분명한 가치관과 철학을 세울 수 있었다. 게다가 윌리엄 블레어(William Blair)도 멘토로서 그가 엠포리아 대학(Emporia College)에 들어갈 수 있도록 이끌었다. 그리하여 블레어는 그의 일생에 새로운 장이 열리는 관문을 열어 준 멘토가 되었던 것이다.

 

5. 목회사역은 전도, 교육, 봉사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Pastoral Ministry Focused on Evangelism, Education and Service):

 

한경직 목사의 목회철학은 균형이 매우 잘 잡힌 모델로서 전도, 교육, 봉사에 집중되어있다. 무엇보다도 그의 가장 큰 관심은 복음 전파였다. 그는 1945년 12월에 베다니 교회를 세웠다. 일 년 안에 그는 한변혁 목사를 보내어 인천 제일 교회를 세우게 하였고, 길진경 목사를 보내어 인천 송도 교회를 세우게 하였다. 1955년에는 한국 전쟁 이후의 극심한 재정난에도 불구하고 최찬영 목사를 최초로 태국에 타문화권 선교사로 파송 하였다. 1990년도 까지 그는 “너희는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는 지상 최대 위임 명령에 순종하기 위하여 29가정의 타문화권 선교사를 보내었고, 19가정의 지역 전도자(local evangelists)를 지원하였다.

한경직 목사는 교회와 교육은 서로 분리될 수 없음을 굳건히 믿었다. ‘교회 교육’에 관하여 언급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는 교육은 교회의 사명임을 강조하였다. 그는 교육 사업은 두 가지로 나뉜다고 보았다. 하나는 지역 교회에서 믿는 자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대광 중고등학교(1984), 영락 중학교(1952), 영락 고등학교(1959), 영락 유치원(1966), 성경 학교(1986), 영락 여자 신학교 등의 많은 기독교 학교들을 세웠다.

뿐만 아니라 한경직 목사는 지역교회가 봉사 단체여야 한다고 믿었으며, 지역교회가 잘 섬길 때 교회가 잘 성장한다고 보았다. 그는 지역 교회가 잘 성장하고 난 후에야 봉사를 잘 할 수 있다는 목회 전통을 온전히 깨뜨렸다. 그의 봉사는 알파도, 오메가도 사랑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목회 철학에 따라 그는 보린원, 모자원, 많은 학교, 많은 사회봉사기관, 사업 들을 사랑으로 이루어냈다. 그는 전 생애의 삶과 사역을 통해 사랑의 봉사의 본을 보여주었다.

 

6. 위대한 일은 위대한 인내가 필요하다 (Great Patience is Necessary for Great Work):

 

한경직 목사는 “위대한 일을 위하여서 위대한 인내는 필수적이다”라고 말한 인내의 사람이었다. 그가 폐결핵에 걸렸을 때, 그는 하나님께 주를 섬길 수 있는 이 삼 년의 시간을 주실 것을 기도하면서 요양소에서 하나님께서 치유해 주시기를 이 년 동안이나 인내하며 기다렸다.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치유해 주시고 장수하도록 축복하사 97년 동안이나 사시도록 하셨다. 교회의 월례회에서 모든 장로들이 어떤 사안에 대하여 합의 하지 않을 때, 그는 그들 모두에게 인내하면서 한 번 더 그 사안을 재고할 것을 제안하곤 했다.

그는 결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앞서 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일과 사건에 대해서 인내를 가지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위하여서는 인내로 더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믿었다. 하지만 많은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인내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순간에 포기하고 만다. 어떤 일이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졌을 때, 그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렸다. 결론적으로 지도자가 인내에 성숙했을 때, 비로소 그는 하늘 아래 모든 것을 가질 수 있게 된다.

 

7. 나를 반대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목회 성공의 비밀이다(To Love Opponents is A Secret of Successful Ministry):

 

성공적 목회의 비밀은 반대자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한경직 목사는 “나는 나를 반대하는 사람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였다. 교회의 당회에서 안건을 논의할 때 몇몇 장로들이 한경직 목사에게 반대하는 일들이 있었다. 회의가 끝난 후 그는 반대했던 자들을 포용했고 그들을 사랑으로 설득했다. 이렇게 하여 그는 자신의 반대자들을 지지자로 바꾸었다. 이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마 5:44-45)라는 예수님 말씀의 실천이라 하겠다. 그는 구약에 나타난 호세아의 사랑을 보여주었으며, 아모스 선지자처럼 반대자들을 꾸짖기보다는 포용하였다. 그는 “힘으로 이기려고 하기 보다는 사랑과 관용으로 이기고자 한다”고 말하였다.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은혜로 국내외에서 이루어진 한경직 목사의 교회 와 사역 성장의 진정한 비결이다.

 

8. 기도는 매우 중요하다 (Prayer is Very Important):

 

한경직 목사는 수많은 설교에서 기도에 관하여 언급했다. 기도는 하나님을 찾는 것이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지도자는 회개 기도를 해야 하며, 믿음을 가지고 기도해야 하고, 순종하며 기도해야 하고, 약한 자를 위하여 기도해야 하고, 지속적으로 기도해야 하고, 서로를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지도자는 아침저녁으로 기도하는 습관을 가져야만 한다. 목회자가 설교를 준비함에 있어 눈물로써 하는 기도는 필수적이다. 한경직 목사는 여러 번에 걸쳐서 그의 설교와 강의를 통해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는 한국 교회의 지도자로서 좋은 기도의 본보기를 보여주었다.

 

9. 복음전도는 교회의 최우선이다 (Evangelism is the First Priority of the Church):

 

한경직 목사는 “복음 전도는 사람이 많은 곳을 집중해야 한다. 복음 전도는 교회 성장의 수단이 아니라 사람의 영혼을 살리고 지키는 것이다. 교회의 최우선 순위는 복음 전도가 되어야 한다... 복음 전도의 방식은 1)말을 통하여, 2) 삶을 통하여 3) 교회 공동체를 통한 방식들이 있다”라고 말하였다. 그는 복음 전도의 참 의미와 방법을 알고 있었다.

사실상 그는 한국의 군대를 복음화 하여 한국 및 전 세계를 복음화 하는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국내외의 많은 곳을 방문하여 설교하였고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민족 복음화를 위한 수많은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는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한 여러 종류의 사업도 진행시켰다. 그는 자신의 전 생애를 국내외 복음 전도를 위해 바쳐 본보기가 되었다.

 

 

Ⅳ. 나가는 글 (Conclusions)

 

최종적으로 정리하자면, 첫째로 한경직 목사는 한국 교회사에 길이 남을 목회자의 탁월한 모본임이 틀림없다. 둘째로, 그는 세계적인 지도자로서 그의 목회 사역과 교회 관계 속에서 건강한 연합 정신을 배울 수 있다. 셋째로 한경직 목사의 목회 사역을 통해 한국 교회를 위한 목회 철학과 가치관의 탁월한 모델을 발견할 수 있다. 넷째, 한경직 목사는 뛰어난 한국 교회의 지도자로서 자신의 삶과 사역을 통하여 전 민족 복음화와 세계 선교를 향한 그의 비전을 재확인 할 수 있다.

다섯째, 지도자의 궁극적 사명을 성취하는데 있어서 사역이나 인간관계의 관점에서 온유함과 인내가 가지는 중요성을 배울 수 있다. 여섯째, 한경직 목사와 그 사모의 삶을 통하여 베푸는 삶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다. 일곱째, 한경직 목사로부터 이 세상에 인간을 섬기러 오신 예수님과 흡사한 섬김의 본을 발견할 수 있다. 여덟째, 지도자가 효과적으로 받은 사명을 성취할 수 있게끔 하는 리더십 개발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만남(divine contact)을 통한 멘토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아홉째, 한경직 목사는 복음 전도와 목회 사역의 설교자로서 한 분의 효과적인 모델이다. 마지막으로 한경직 목사는 참된 성도(성자)의 모본이며,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템플턴상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 분이었다. 이 글을 마치면서 한경직 목사의 삶과 사역을 연구하는 좋은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이 연구를 통해 얻은 교훈을 삶과 사역에 적용시키기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 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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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학저,『아름다운 사람 한경직』규장문화사, 2000.

조성기저,『한경직 평전』김영사, 2003.

한숭홍지음,『한경직의 생애와 사상』장로회신학대학출판부,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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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mazio, Frank, Effective Keys to Successful Leadership, Portland, Oregon:Bible Temple Publishing,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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