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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한경직의 성령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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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직의 성령신학

 

 

1.1.1. 최윤배 교수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Ⅰ. 서론

 

한경직(韓景職; Kyung-Chik Han, 음력 1902.12.29~양력 2000.4.19)은 1902년 12월 29일에 평안남도 평원군 공덕면 간리(間里), 일명 자작마을이라는 아주 작은 벽촌에서 가난한 농부 한도풍의 맏아들로 태어났는데, 위로는 누나 한 명, 밑으로는 동생 두 명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2000년 4월 19일에 영락교회 사택에서 오후 1시 15분에 별세했다.

한경직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훌륭한 작품이 이미 출판되었고, 본 학회의 발표주제인 “한경직의 개혁신앙 재조명”과 조직신학적 방향이 이미 정해졌기 때문에, 우리는 주로 12권으로 구성된 그의 설교전집을 중심으로, 작품연대를 고려하지 않고, 그의 신학 중에서 성령신학에만 국한하여 고찰하기로 한다. 어떤 신학 작품보다도 콘텍스트를 반영하는 설교에 대한 역사 신학적 분석과 가능한 그의 모든 1차 자료를 활용하지 못한 점은 다음 과제로 넘기기로 한다.

한경직의 성령신학에 대해서 논의할 때, 조직신학에서 일반적으로 기술하는 방법과 순서대로 두 가지, 즉 성령의 인격 또는 위격(Person, 본질)과 성령의 사역(works, 事役)으로 나누어서 기술하기로 한다. 세부적으로 말하면, 제2장에서는 성령의 위격이, 제3장에서는 성령의 일반사역과 특별사역이, 제4장에서는 성령과 관련된 종말이 논의되고, 제5장에서는 결론이 할애될 것이다.

 

 

Ⅱ. 성령의 위격

 

1. 성령과 삼위일체 하나님

한경직은 “삼위일체(론)적 성령론”을 주장하고 있다고 볼 수가 있다. 성령은 하나님 자신이시며, 삼위들 중에 제3 위격이시며, 자신의 고유성을 가지신다. 다시 말하면,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일체를 이루면서 세 번째 위(person)로 계시는 하나님이시며, “성령은 삼위일체의 한 분”이다.” “『성신을 믿사오니』 곧 성신을 믿는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신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본체는 하나이지만 삼위로 계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성자 성신 성부 이렇게 삼위입니다. 영어로는 퍼어슨(person)이라고 하는 말을 쓰는데 혹 인격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정확한 번역은 아닙니다. 위는 셋입니다. 그러나 본체는 하나입니다.”

한경직에게는 성령의 본질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성경적인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먼저 확보하는 것이 선행된 작업인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 이는 특수한 기독교 신관이다. ● 사도신경에도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 ……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 …… 성령을 믿사오니’ ● 이 진리는 성경이 계시하는 진리이다. ● 신비하며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여 다 이해하기 곤란하다. ●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유한한 인간의 이성으로 무한하신 하나님의 본체를 다 이해할 수는 없다. 인간은 오직 하나님이 그 자신을 계시하는 것만큼 알 수 있다. ● 하나님이 ‘삼위일체’로 계신다.”

 

따라서 그는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성경적 신관을 확보하기 위해 위와 같이 긍정적인 방법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 진술한 뒤에, 부정적인 방법으로 교리사(敎理史)에서 나타난 대표적 반(反) 삼위일체론, 즉 양태론(樣態論)의 경향을 보인 일신론(Uniterianism)과 종속론(從屬論)의 경향을 보인 삼신론(Tritheism)을 비판하는데, 전자는 성령의 신성은 확보하였으나, 성령의 위격을 희생시키고, 후자는 성령의 위격은 유지하였으나, 성령의 신성을 희생시켰다고 비판한다. 그러므로 한경직은 좌로나 우로나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말고, 삼위일체의 일체성과 삼위일체의 삼위성을 성경의 근거와 신앙고백을 통해 균형 있게 유지하기를 거듭 주장한다.

 

“이 삼위일체의 신관을 믿는데 특별히 조심할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아야 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삼위라 해서 세 분이라는 것을 너무 강조하면 소위 삼신론(Tritheism)이 되고 맙니다. 신(神)은 하나인데 세 신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이것은 그릇된 사상입니다. 반면에 일체가 한 분이라고 너무 강조하게 되면 일신론(Uniterianism)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성자와 성신의 신성은 부인하고 성부의 신성만 믿는 그릇된 신학 사상에 빠지고 맙니다. 사실 이런 사상이 있습니다. 이것은 비성서적 사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죄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성경 그대로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믿을 뿐입니다.”

한경직은 성령을 ① 삼위일체 하나님의 일체성의 관점에서 성령을 하나님 자신으로 간주하여, “성령독신성”, 즉 “성령의 신성”을 확증하고, ② 성령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삼위성의 관점에서 성령을 제 삼의 위격으로 인정하고, 성령의 인격성을 주장하며, ③ 성령의 고유성(固有性, proprietas)과 관련시켜,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성령의 주된 경륜적 사역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물론 이것은 완전한 비유라고 할 수 없습니다. 또 우리가 기억하기로는 삼위의 역사는 다소간 다릅니다. 가령 성부는 창조와 섭리를 주로 하시고 성자는 구속의 일, 즉 속죄 구령의 일을 주로 하십니다. 성신은 믿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계셔서 중생과 인도하시는 일을 주로 하십니다.”

 

또 한경직은 보혜사로서 성령과 관계하여 성령의 주된 경륜적 사역을 주장한다. 다른 보혜사는 “곧 성령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나 삼위 곧 성부, 성자, 성령이 그 신격중에 계시다. … 성부는 창조와 섭리, 성자는 계시와 구속, 성령은 동재(同在)하여 돕는다.”

 

2. 하나님의 영과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서의 성령

 

한경직이 “성령 혹은 성신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똑같은 뜻이므로 오해할 것이” 없는데, “구역엔 성신, 신역엔 성령으로 번역되어” 있음을 주장하는 바, 우리는 본고에서 명칭을 “성령”으로 통일하기로 한다. “성령이란 그 영의 히브리 말의 뜻은 『바람』혹은 『숨결』이란 뜻입니다. 바람은 신비합니다. … 바람은 숨결, 곧 생명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하였습니다. 바람은 역시 능력도 의미합니다.”

한경직은 하나님을 영으로 이해하고, 성령을 “하나님의 성령”, “하나님의 영”으로 이해한다: “⑨ ‘하나님의 성령’(고전 3:16) ‘하나님의 영’(롬8:9).”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므로 하나님으로 충만하였습니다.” 또한 한경직은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 “주의 영”으로 이해한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올시다. 그들은(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그리스도인들, 필자)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였습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올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했습니다.” “성령은 곧 그리스도의 영이다. …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 곧 하나님의 영으로서 여러가지 상징으로 그 역사가 성경에 표현되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므로 하나님으로 충만하였습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므로 그리스도로 충만하였습니다.” 이상으로부터 한경직은 ‘성령’,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성령’, ‘그리스도의 영’, ‘주의 영’이란 용어를 호환 가능한 용어로 이해하여 사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비록 한경직은 A.D. 1054년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분열의 주요 원인이 되었던 ‘필리오케’(filioque) 문제와 이 용어에 대한 교리적 언급을 시도하지 않을지라도, 그는 서방교회의 전통에 서서 내용적으로 ‘필리오케’를 인정하고 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도 이 용어를 직접적으로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내용적으로는 ‘필리오케’를 인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령은 모든 은혜에 충만하신 하나님의 신이다. (성령은, 필자) 그리스도의 신이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마음이다.” “‘성령의 감화가 없으면 예수를 주라고 할 자가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필자) 사실 예수를 믿는 이는 다 성령의 감화로, 성령이 주를 그 마음에 계시함으로 믿는다.” “성령의 감화가 아니면 예수를 주시라고 부를 수가 없다(고전12:3).” 이상으로부터 한경직의 성령론은 부처(M. Bucer)와 칼빈(J. Calvin), 바르트(K. Barth)와 베르꼬프(H. Berkhof) 등 대부분의 개혁전통에서 발견되는 성령론의 전형적인 특징들 중에 하나에 해당되는 “그리스도 중심적?인식론적 또는 그리스도 중심적?적용(응용)적 성령론”으로 볼 수 있다.

 

3. 보혜사 성령

 

만약 우리가 한경직이 보혜사 성령에게 붙인 이름과 상징과 특징과 사역 등을 살필 경우, 그것은 우리에게 그의 성령론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보혜사”의 근본 뜻은 “부름을 받아 같이 섰는 이, 위안자, 협조자, 중보” 등인데, “항상 같이 있어서 돕는 이”라는 뜻을 갖는다. “또 다른 보혜사”라고 한 이유는 지금까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항상 함께 계셔서 그들을 도와주심으로써 보혜사 역할을 하셨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떠나시기 때문에, 보혜사로서 역할을 하시던 예수 그리스도 대신에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또한 보혜사는 “위로하는 이”라는 뜻을 가진다.

 

“성령은 보혜사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보혜사라고 하는 말은 위로해 준다고 하는 말입니다. 위로하는 이라는 뜻입니다.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아주 귀한 목적은 우리의 마음을 위로해 주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성령의 상징 가운데 하나는 기름이올시다. 기름이라는 것은 우리의 상처에 바르면 고통이 없어지고 빨리 회복됩니다. 성령의 역사가 이렇습니다. 우리 마음의 고통을 성령으로써 없이 해주시고 빨리 회복해 주십니다. 성령의 다른 한 가지 상징은 바람이올시다. 서늘한 저녁 바람은 우리의 심신을 상쾌케 합니다. … 성령께서 우리 마음 속에 오실 때에 우리의 근심을 속으로 풀어주십니다. 물론 성령의 상징은 불이지요. 깨끗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깨끗게 해 주시고 모든 것을 이기며 견딜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이처럼 성령에 대한 상징 또는 성품을 가리키는 말로서 기름, 바람, 불, 물, 비둘기 등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모든 영적 은혜를 물에 비교해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물”로서 성령은 생명, 새롭게 함, 시원케 함, 풍부, 자유와 관계되고, “불”로서 성령은 열심, 사랑, 청결, 빛, 진리와 관계하고, “바람”으로서 성령은 감동감화, 신비함, 위로, 능력과 관계되고, “기름”으로 성령은 성별(제사장, 왕), 상처회복, 빛과 관계되고, “비둘기”로서 성령은 순결, 온유, 겸손, 평화와 관계된다.

한경직이 보혜사 성령께 붙이는 명칭은 매우 다양하다. 보혜사 성령은 “성결의 영”(롬1:4), “은혜의 성령”(히10:29), 미혹의 영(요일4:6)과 상반되는 “진리의 성령”(요14:17; 요15:26; 요16:13),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사4:4), “지혜와 총명의 신”(사11:2), “영광의 영”(벧전4:14), “하나님의 성령”(고전3:16), “하나님의 영”(롬8:9) 등으로 불린다.

보혜사 성령이 하시는 중요한 일은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중생의 사역(고전12:3; 요3:5), 거듭난 사람으로서의 속사람을 영적으로 성장케 하는 성화의 사역,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기독교적 품격(品格)의 열매 맺는 사역(갈5:22-23), 그리스도인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고, 지도하는 사역(요16:13; 요14:26), 일상생활과 봉사활동에 필요한 능력을 제공하는 사역 등이다.(행1:8)

 

 

Ⅲ. 성령의 사역

 

1. 성령의 일반사역과 특별사역

 

우리는 성령의 사역을 기술하기 위해 크게 두 가지, 즉 성령의 일반사역(一般事役)과 특별사역(特別事役)으로 나누어 기술하기로 한다. 성령의 일반사역은 창조주 및 섭리주 성령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시고, 지금까지 보존하시고, 통치하시는 사역으로서 우주, 자연, 역사, 인간 등 피조세계 전체에 미치는 성령 하나님의 사역을 뜻하고, 성령의 특별사역은 구속주 하나님 성령께서 거룩케 하시고, 구원하시고, 구속하시는 사역으로서 주로 교회와 그리스도인, 특히 선택론과 하나님의 나라의 관점에서 이해되는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사역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칼빈은 성령의 사역을 위와 같이 두 가지로 분명하게 구별한 바 있다.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같은 영으로 하나님과 결합되셨을 뿐만 아니라, 중보자로서의 그의 성격 때문이기도 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의 백성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 그들에게 불어넣으시는 이 독특한 생명을 바울은 악인들에게도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자연적인 생명과 대조시킨다.”

 

우리가 앞에서 이미 인용한 문장인 “성부는 창조와 섭리, 성자는 계시와 구속, 성령은 동재(同在)하여 돕는다.” 로부터 한경직도 성령의 두 가지 사역을 인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성부께서 창조와 섭리 사역을 하실 때, 성령도 성부와 성자와 “동재(同在)”하셔서 창조주와 섭리주 하나님으로서 일반사역을 하시고, 성자께서 계시와 구속의 사역을 하실 때, 성령도 성부와 성자와 “동재(同在)”하셔서 구속주 하나님으로서 특별사역을 하신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경직은 “말 할 수 없는 그의 은사”라는 설교를 위한 설교 자료에서 “성령”이나 “성령의 은사”나 소위 ‘자연은총’(natural grace) 또는 ‘일반은총’(general grace)이라는 용어는 직접 사용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은사” 또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그리스도인을 포함하여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자연은총’ 또는 ‘일반은총’의 내용에 대해서 언급할 뿐만 아니라, 교회와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은사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선물로 주셨다.” 한경직에 의하면, 하나님은 태양, 공기, 물, 모든 자연계를 선물로 우리에게 주셨다. 태양은 생명의 어머니이며, 빛은 에너지를 주는 지극히 큰 선물이다. 시원하고, 신선하고, 맑고, 쾌적하고, 풍성한 공기가 있기 때문에 풀, 나무, 꽃, 열매, 짐승과 사람이 존재하는데, 달에는 없는 이 공기도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의 선물인 물이 있기 때문에, 곡식, 과실, 모든 생명이 존재한다. 모든 자연계, 예를 들면, 금수초목, 오곡백과, 산해어별, 금은보석 모두가 하나님의 선물이다. 사도 바울의 생명을 비롯하여 우리의 생명도 하나님의 모든 선물들 중에서 너무 크고 너무 훌륭한 선물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창조적, 자연적 선물, 즉 성령의 일반은사 외에 한경직은 최대의 선물로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한다. 그리스도는 ‘말할 수 없는 선물’이며(요3:16; 요4:10; 요1:14; 골2:9), 가장 값진 선물이며, 모든 재물을 팔아 살만한 값진 진주이다. 예수 그리스의 신성, 영광, 긍휼, 자비, 겸손, 고난, 사랑, 부활의 능력, 사죄의 은총은 너무나도 크고 놀랍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모든 선물 가운데 말할 수 없는 선물이다. 최대의 선물이다. 인간의 언어로 다 표현할 수 없다. 우리는 모든 것을 거저, 최고의 선물을 받았다.”

한경직은 자연 속에 주어진 하나님의 풍성한 은사에 감탄할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주어진 이성의 빛과 양심의 빛도 매우 강조한다. “산과 들을 보라 생명으로 충만하다. 생명으로 충만한 은혜를 받자.” 한경직은 그리스도인에게 역사하시는 성령의 두 가지 사역을, 즉 일반사역으로서 ‘이성의 빛’과 ‘양심의 빛’, 특별사역으로서 ‘성령의 빛’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다음의 글에서 짐작할 수 있다. “사랑하는 동포 여러분! 신앙생활이란 이 하나님이 주신 등불 아래서 항상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성의 빛, 양심의 빛, 성령의 빛 아래서 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촛불 경주와도 비슷합니다. 이 불을 잘 지키면서 경주를 해야 합니다.”

 

“유물론은 자가당착입니다. 만일 인간이 물질뿐이면 유물론을 생각하는 자신을 부인해야 합니다. 사람에게는 불멸의 영혼이 있습니다. 이 영혼은 하나님의 등불입니다. 이 영혼에는 빛이 있습니다. 이 빛은 하나님께서 켜신 것입니다. 첫째, 먼저 이성의 빛입니다. … 이성을 통하여 과학이 발전하였고 현대의 문화가 창조되었습니다. … 또 이성의 빛은 정치, 경제, 문화, 예술, 음악, 각 방면에서 큰 발전과 새 사상, 새 제도도 매일 가져 옵니다. 이 이성의 불은 하나님께서 붙이셨습니다. 모든 문제의 모든 방면에서 이 이성의 불을 밝혀야 합니다. 고집, 독선, 편견, 선입주견, 감정, 권력의식, 교만에 사로잡히지 않고 인간은 언제나 이성의 불빛에 살아야 합니다. 둘째는 양심의 빛입니다.”

 

한경직은 성령의 일반사역 또는 일반 은사에 해당되는 모든 자연인(自然人)이 가지고 있는 이성과 양심의 빛을 언급한 뒤에, 세 번째로 신앙과 구원과 관련지어 “성령의 등불” 또는 “성령의 빛”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세째는, 성령의 등불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믿는 이에게는 성령의 새로운 빛을 인간 심령 속에 비쳐 주십니다. 그러므로 과거의 모든 사도, 모든 성도들은 이 성령의 빛 아래에서 또한 살아 온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성령의 열매, 이 성령의 불을 끄지 말아야 합니다.”

한경직은 자연법칙과 도덕법칙에 대해서 언급할 때, 비록 그가 성령의 “일반은사”나 “일반사역”이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을지라도, 내용을 살펴보면, 자연법칙과 도덕법칙에 대한 그의 언급이 성령의 일반사역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우리가 알 수 있고, 성령의 특별사역과 관련해서 “성령” 또는 “성령의 씨” 또는 “성령의 열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이 우주를 지으시고 그 가운데 자연법칙을 두셔서 운행케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또 이 인간을 지으시고 도덕의 법칙을 두어서 그 아래서 살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 이 법칙대로 순종하지 않으면 그것은 결국 하나님을 조롱하는 결과가 됩니다. …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이 자연법칙과 도덕법칙을 순종해서 살아야 내게도 행복이 오고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릴 수 있을 것입니다. … 씨는 두 가지 종류 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뿌리는 씨요 또 하나는 육체를 중심해서 뿌리는 씨입니다. 성령의 씨를 뿌리려면 먼저 우리 마음속에 성령께서 계셔야 합니다. 우리 마음속에 성령께서 임재하여 계십니까? 우리는 이 새해를 당해서 어떠한 일 년을 살 것입니까? 모든 죄를 온전히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하여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우리의 마음속에 성령의 열매가 충만할 때에, 이것이 우리의 사언행으로 나타날 때에 우리는 가는 곳마다 금년 일 년 동안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생의 씨를 뿌릴 것입니다.”

 

2. 성령의 특별사역

 

구약신학자 폰 라트(G. von Rad)가 창세기 1:1-2절을 주석하면서 “실제로 창조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은 아무 역할을 하지 않는다. 그런 우주론적인 의미를 갖는 하나님의 영의 개념은 구약성서 전체에 걸쳐서 낯선 개념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우리가 볼 때, 비록 구약성경이 주로 구속사적 관점에서 성령의 일반사역보다는 성령의 특별사역을 강조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구약성경이 성령의 일반사역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구약신학자들은 구약성경에서 성령의 일반사역과 성령의 특별사역이 공히 발견된다고 주장한다.

 

“야훼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 백성에게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온누리에 작용하신다. 창조의 영으로서, 섭리의 영으로서 작용한다. 자칫 잘못하면 우리가 성령을 교회 안에 가두기가 쉽다. 교회를 포함하여 온 누리에서 일하시는 성령을 잊지 않도록 해야 한다.”

 

신약성서도 성령의 사역에 대하여 전체적인 맥락에서 구약성서와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신약성서에서는 구약성서와는 달리 창조에 대해 거의 이야기하지 않으며, 창조에 있어서 영의 활동에 관하여 더 이상 언급하지 않고 있다. 물론 이것은 하늘과 땅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구약성서의 신앙이 자명하게 전제되어 있으며, 아무도 이에 대하여 의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연관되어 있다. 그러므로 신약의 교회는 하나님의 창조의 영이 전 세계 안에 일 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약의 공동체에게 중요한 것은 그 영을 인식하고 그에게 복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공동체는 거의 내부에 있어서의 영의 - 사회적으로 구체화된 - 작용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였는데, 이 교회 안에서 사람들은 기꺼이 영에 순종하면서 새롭게 살고자 노력한다.(막10:42-43)”

 

신구약성경은 성령의 일반사역과 특별사역 모두를 인정하지만, 주로 구속사적 관점에서 성령의 일반사역보다는 성령의 특별사역을 강조한다는 사실이다. 한경직도 성령의 두 가지 사역을 공히 말하지만, 주로 성령의 특별사역, 즉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관점에서 더 많이 언급하기 때문에 우리는 한경직이 이해한 성령의 일반사역은 앞에서 언급한 것으로 만족하고, 중요한 주제에 속하는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인, 성령 세례, 성령 충만, 교회를 중심으로 한경직이 이해한 성령의 특별사역에 대해 논의하기로 한다.

 

1)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

 

한경직이 이해한 구속사 속에서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는 어떠한가? 신약성경에서 성령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관계는 이중적(二重的)이다. 부활승천하시기 이전의 역사적(歷史的)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되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을 하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부활하신다. 여기서는 성령이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보다 우월하신 것처럼 보인다. 반대로 부활승천 하셔서 하나님의 보좌우편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보혜사 성령을 보내시는 분이시다. 여기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보혜사 성령보다 우월해 보이신다. 전자의 관점은 주로 공관복음에서 두드러지고, 후자의 관점은 주로 요한복음과 바울서신에서 두드러진다. 그러나 “이러한 두 관점들이 서로 상반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상호 보완적이다. … 예수는 그가 처음 성령을 받은 자이며, 성령을 지닌 분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성령을 보내신 자가 될 수 있다.” “성령이 내려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줄 알라.”

한경직은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중적인 관계에 대하여 의도적으로 자세하게 기술하지는 않지만, 그에게 이 같은 이중적인 관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한경직은 예수를 “그리스도”, 곧 “메시아”로 성령론적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되셨다. “그리스도란 말은 본래 「기름부음을 받으셨다.』는 뜻으로서 하나님께서 장차 이스라엘 백성과 온 천하 만민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 보내겠다고 여러 백년 전부터 예언자를 통하여 예언을 했는데 그 예언했던 분이 곧 예수라는 말씀이 올시다. 메시야는 헬라어로 곧 그리스도입니다.” 세례 요한은 물로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불로 성령의 세례를 베풀었다.” 부활?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보혜사 성령, 곧 성령의 생수를 지금 우리들에게 주시고 계신다. “『누구든지 목마른 자는 내게 와서 마시라.』예수 그리스도는 생수를 주시는 반석이올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앞에 나와서 이 생수를 마실 수 있습니다.”

 

2) 성령과 그리스도인

 

한경직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을 거듭나게 하신 성령께서는 그를 떠나시지 않고, 일생동안 항상 함께 계신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신앙생활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시작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습니다. 성령이 아니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고 얘기할 수 없습니다. 성경 말씀 그대로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된 것,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다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된 것입니다. 또 한 가지 기억할 것은 신자의 마음 가운데는 성령께서 언제나 같이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믿음이 아무리 연약해도, 우리가 아무리 부족한 것이 많을지라도, 사실 믿는 사람 가운데는 성령께서 아주 떠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한경직에 의하면, 자연인(自然人)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성령으로 중생, 즉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한다. “근본적으로 부패한 인간 성품이 변하는 것을 중생(重生)이라고 합니다. 다시 나야 합니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서 새로 거듭나는 이 자체가 오직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오직 성령의 역사로써만 거듭나서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살리는 것은 영,’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이런 의미에서 믿는 이는 누구나 성령을 받은 이들이다.” “죄를 깨닫고 죄를 온전히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내 중심에 영접하면 그 밖의 일은 성신의 역사입니다. 성신께서 거듭나는 축복을 주십니다.”

성령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일생동안 성공적으로 살아 갈 수 있는 능력의 원천이 된다.

 

“성경에 믿음으로 맺는 모든 열매는 성령의 열매라고 하였습니다. …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 나갈 때, 유혹과 시험을 이기는 것도 승리의 생활을 하는 것도 결국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한경직은 그리스도인의 몸을 “성령의 전(殿)”으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몸을 외적으로, 육체적으로 건강을 유지하도록 노력해야하며, 육체적으로, 내적으로, 심리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죄를 멀리하고, 그 몸을 성결하게 유지해야하며, 특히 성령의 열매들 중에 하나인 절제의 덕을 발휘해야 하며, 그 몸으로 하나님을 위한 예배와 이웃을 위한 헌신과 봉사하는데 사용해야 한다.

한경직은 그리스도인이 맺어야할 성령의 열매를 매우 강조한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이 이 성령의 열매이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즉 마음속에 사랑, 희락, 화평, 대인관계에서 인내, 자비, 양선, 역경 속에서 충성, 온유, 절제의 열매를 맺어야하는데, 이를 위한 몇 가지 전제 조건 내지 단계가 있다고 한경직은 주장한다.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먼저 좋은 나무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좋은 열매 맺는 비결”인데, “참 회개와 신앙을 통한 중생의 경험이 있은 후에 성령의 열매를” 맺기 시작하는데, “우리 그리스도인 하나 하나는 성령의 열매를 맺는 한 나무이다.” 회개와 신앙을 통해 이 같은 성령의 새 생활이 시작되었으나, 인간의 육체는 근본적으로 소욕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령의 소욕으로 육체의 소욕을 대적하여 싸워야 하며, 적극적으로 우리의 심령을 성령으로 충만한 상태로 보존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역사로 자기중심에서 그리스도 중심으로 바뀐다. “이 모든 교훈은 우리 신자는 현재에 있어서 영적(靈的)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체험하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육에 죽고 영에 살아야 하겠습니다. 죄에 장사(葬事)하고 의에 다시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 같은 한경직의 표현은 성령을 통한 옛 사람의 죽임(mortificatio)과 성령을 통한 새 사람의 살림(vivificatio)이라는 사상이 짙게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성령을 통해 항상 기도하는 생활이 되어야 한다. “기도는 반드시 응답됩니다. 기억하세요. 성경이 얼마나 우리 믿는 사람에게 기도에 힘쓰라고 하셨습니까? 『항상 기도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성령으로 무시로 기도하라. 깨어서 기도하라』고.”

 

“그것은(엡6:18, 필자) 기도에 대한 말씀이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깨어 구하기를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특별히 자기 자신 곧 바울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부탁이다. … 기도를 열심히 하는 교인들이 많은 교회는 자연히 부흥된다. 예루살렘 교회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120명이 다락방에 모여서 열심히 기도하는 중에 성령을 받아 큰 부흥이 일어난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영적 분별력을 통해서 일생동안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온전히 변화된 마음에는 성령이 같이 하십니다. 따라서 성령의 지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온전히 변화된 새로워진 마음은 또한 성령의 지도로써 하나님의 뜻을 찾게 됩니다.”

한경직에게서 성령과 그리스도인의 관계에 대한 논의 속에서 특별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자. 한경직에게 성령 세례가 그리스도인의 영적 삶의 출발점이라면, ‘성령 충만’은 그리스도인이 일생 동안 자신의 모든 삶과 영역에서 올바른 삶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1) 성령 세례

한경직은 성령 세례 또는 불의 세례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일반적으로 성령 세례는 두 가지 관점에서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성령 세례를 중생과 칭의와 연결시키는 경우와, 성령세례를 성령이 충만하여 사역의 권능과 은사를 받는 것으로 연결시키는 경우이다. “성령의 세례는 곧 불의 세례를 의미한다.” 성령의 불은 “진리의 불, 성결의 불, 사랑의 불”이며, “성령은 하나님의 불, 거룩한 불, 성령은 하나님의 사랑의 불, 성령은 하나님의 의의 불, 진리의 불이다.” 한경직은 ‘불’을 “곧 성령의 상징”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으로 이해한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으로서 불과 관계된 성경 구절로서 모세가 본 불붙는 가시나무(출3:2; 행7:30),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한 밤의 불기둥(출13:21), 갈멜산의 불(왕상18:38), 엘리사가 목격한 불 말과 불 수레(왕하6:17), 오순절의 불의 혀(행2:3), 촛대의 불(출27:20; 계1:20)을 열거한다. 한경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신자에게 약속하신 이 불세례, 곧 성령세례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그 예언대로 오순절에 성령세례가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모든 사람에게 임했다고 주장한다.

세례 요한은 물로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불로 성령의 세례를 베풀었다.”

 

“내(나의, 필자) 안 믿는 민족을 영적으로 구원하고, 육적으로 모든 방면으로 돕겠다고 하는 불이 있어야 참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물 세례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성령과 불의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 심령의 제단이 엘리야의 제단으로 되어야 합니다. 성령의 불이 임해야 합니다. … 성령과 불의 세례를 받아야 참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오순절에는 열두 사도만이 이와 같은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열두 사도를 비롯하여 모든 평신도까지, 남자나 여자 할 것 없이 다락방에 모였던 전부가 이와 같은 성령의 은사를 받은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도 교역자 뿐만이 압니다. 장로 뿐만이 아닙니다. 온 교회가 다같이 이와 같은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 받는 길이 어디 있습니까? 먼저 주님의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성령을 주시리라고 하는 것은 아버지의 약속입니다. 믿는 모든 사람에게 주시리라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내 과거를 반성하면서 회개하며 기도하는 생활을 할 것입니다.”

 

한경직은 “거룩한 불”이라는 설교에서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사람들처럼 거룩한 성령의 불을 받을 경우, 우리도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 거룩한 불이 우리 속에 임재할 때에 우리의 성품을 통해서, 우리의 생활을 통해서, 사랑의 빛과 생명의 빛, 의의 빛이 사실 발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한 대로 이 성령의 불이 우리 마음 속에 임하게 될 때에 그 열매가 되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인내와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모든 아름다운 빛의 광선을 발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한경직은 불세례의 특징은 뜨거운 것이며(행24:32), 굳은 것을 녹이는 것이며, 깨끗하게 하는 것이며, 빛을 발하는 것이며, 아름다운 행실이며(갈5:22-23), 에너지와 힘이며, 급속도로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며, 최후 승리를 얻는 것 등으로 열거한다.

이상에서 볼 때, 한경직은 성령 세례와 불세례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고, 성령 세례는 물세례와는 다르다고 이해한다. 그는 성령 세례를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칭의와 중생과 1차적으로 결부시키고, 성령 세례의 결과로 “성령의 은사”와 “성령의 열매”와 “성령 충만”이 주어지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 성령 충만

한경직은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과 성령 충만한 교회가 될 것을 매우 강조한다. 그러면 한경직이 이해한 “성령 충만”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충만’은 물이 용기에 가득 채워져서 흘러넘치는 물리적인 현상을 가리킨다. 한경직도 사람의 마음의 ‘충만’ 상태의 반대 의미로 마음의 ‘진공상태’로 보고, 가득 채워져서 넘치는 것으로 이해한다. “어떤 이는 충만히 받는 것을 바람이 크게 부는 것처럼 흔들흔들하고 이상하게 생각하는 이도 있다. 그 뜻은 우리 심령 생활의 전부를 채우신다는 뜻이다.” “무엇이 충만하면 넘쳐서 흐릅니다. 컵에 물이 가득하면 물이 넘칩니다.”

한경직은 먼저 ‘충만’이라는 단어가 나타나는 성경의 구절을 언급하는데,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과 관계되는 대표 성경 구절을 열거한다. 땅과 거기 충만한 모든 것이 여호와의 것인데(시24:1), 하나님은 모든 것이 충만하신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권능, 지혜, 사랑, 영광도 우주에 충만하므로, 하나님은 무소부재, 무소부지, 무소불능하시다. 여기서 한경직은 하나님과 관계된 ‘충만’하다는 단어를 피조세계에 계시된 하나님의 본성과 속성과 관계시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고(요1:14), 신성이 충만하고(골2:9), 모든 충만으로 계시고(골1:19), 은혜가 충만(엡3:8)하기 때문에, 그는 “충만한 그리스도”이시고, 우리는 충만하신 하나님의 자녀, 충만하신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충만한 은혜(엡3:18-19; 엡4:13; 요10:10)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경직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충만’에 대해 논의한 뒤에, 성령과 관계된 ‘충만’에 대해서 논의한다. 성령께서 오신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지는 충만한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은 모든 은혜에 충만하신 하나님의 영이며, 그리스도의 영이기 때문이다. 오순절에 초대교회가 받은 은혜는 충만한 은혜이며, 성령의 충만을 따라, 각 방면에 충만한 은혜, 즉 지혜 충만, 믿음 충만, 권능 충만, 사랑 충만, 기쁨 충만,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의 충만이 임했다. 이상으로부터 한경직이 이해한 “성령 충만”은 성령은 통한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은사와 성령의 열매가 풍성해지는 것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한경직이 이해한 ‘성령 충만’은 그리스도인의 지적, 감정적, 의지적 생활, 그리스도인의 사(思), 언(言), 행(行), 그리스도인의 개인생활, 가정생활, 사업, 사교, 전 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성령의 전적인 지배하심이다. 신앙생활은 성령으로 시작되며(요3:5;고전12:3), 신자의 마음속에 성령께서 계시며(고전3:16; 롬8:9), 성령의 인치심은 기업의 보증이며, “‘성령의 충만을 받음은’ 성령이 우리 마음에 계심과는 다소 의미가 다르다. 이는 성령께서 우리 마음과 생활의 전 영역을 주관하심을 의미한다.”

 

“이미 성령을 다 받았는데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거듭 권면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다 성령을 받기는 받았습니다. 우리 마음 가운데 성령께서 계십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하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 마음과 생활의 전 영역을 주관할 수 있도록 충만하게 성령을 영접하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지적 생활, 감정적 생활, 의지적 생활의 전체, 혹은 우리의 사언행,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 혹은 내적 생활, 외적 생활, 경제 생활 등 생활의 전 영역이 성령께서 주관하실 만큼 성령을 충만히 받으라 하는 뜻입니다.”

 

한경직은 ‘성령 충만’에 대한 오해를 비판함과 동시에 성령 충만 결과로 나타나는 은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오해하지 말자. 무슨 변태적 현상이 아니다(떨고, 벌떡 나가 넘어지고 무슨 입신도 아니다). ● 복음증거의 권능으로 나타난다. … ● 사랑으로, 유무상통으로, 상부상조, 봉사(욕심이 없어진다. 돈 주머니가 열린다). ● 기쁨으로 찬송 … ● 지혜로 … 어떠한 환경에서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산다. 최고의 은혜이다.”

 

“그리고 어떤 분은 성령의 은사를 받는데 대해서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 사실 성령의 역사가 떠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가르쳐 줍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화평, (오래 참음, 필자),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라고 가르칩니다. 이런 것이 마음에 충만해서 생활하는 이는 성령을 충만히 받은 사람입니다. 떠는 것은 일종의 변태적 현상이므로 그런 것을 기대해서는 안되고 오래 계속해서도 안 됩니다. 제가 종종 보는 대로 이런 데 따라다니는 이들은 자칫 잘못하여 실수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한경직은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한 방법으로서 참된 믿음, 순복하는 마음, 기도와 기다림, 회개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는 삶을 제시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죄에 대한 성령의 경고에 민감할 것을 요구한다.

한경직이 이해한 “성령 충만”은 그리스도인이 성령을 받은 다음에 성령은 통해서 주어지는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은사와 성령의 열매를 통해 성령의 주권적 통치가 전인적(全人的)으로 삶의 모든 영역에서 나타나게 되는 것을 뜻한다.

 

3) 성령과 교회

 

성령과 교회의 상호 불가분리의 관계를 누구보다도 의식하고, 강조했던 사람이 바로 한경직이다. 한숭홍은 한경직이 어릴 때 다녔던 “자작교회는 마을에 성령의 강림을 알리는 지성소였다.”고 시적으로 표현하는가 하면, 한경직이 선교현장에 행한 설교를 집회장소와 청중을 성령의 도가니로 만든 설교로 소게했다. 한경직은 한국교회의 큰 문제들 중에 하나가 성령의 부재의 문제라고 다음과 같이 탄식했다.

 

“한국교계를 보면 제단도 있고 제물도 있으나 불이 없다. 예배당도 있고 교인도 있다. 그러나 불이 없다. 우리 마음의 제단에 불이 있는가? ● ‘너희 천부께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이 불이 우리 교회에 임하고 나아가서 온 교회에 임하고 이와 같은 불이 삼천리를 요원의 불과 같이 불어서 모든 부정과 불의와 부패를 불살라 버리고 이 땅에 새로운 역사가 창조되고 정의와 화평이 이룩되기 위하여, 우리가 열심히 기도하고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해야 되겠습니다.”

 

왜냐하면, 한경직에게는 성령은 교회를 세우신 분이며, 교회의 역사(歷史)와 교회부흥의 주체가 성령 하나님 자신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경직에게는 성령과 교회는 불가분리의 관계 속에 있다. 또한 교회의 능력의 원천은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철의 장막 속에 신음하는 교회들이 많게 되었습니다. 많은 순교자가 피를 흘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보세요. 오래지 아니해서 교회는 이 원수도 극복하고 승리할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어떻게, 이는 힘으로도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했습니다. 성령의 역사로 반드시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같이하심같이 교회는 영원히 빛을 발한 것입니다. 교회는 반드시 승리합니다. 교회의 능력의 원천은 마르지 아니합니다.”

 

한경직은 교회의 탄생과 교회의 지속을 위해 성령이 얼마나 필수적인지를 칼빈의 주석을 인용하면서 주장한 뒤, 한국교회사와 세계교회사에서 성령을 통해 일어났던 교회의 대표적 부흥사건을 개괄적으로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죤 칼빈이 이 귀절(스갸랴 4장 6절, 필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여기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이 교회를 보존하는 데 넉넉하며 다른 도움이 필요가 없는 것을 분명히 가르치십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영과 모든 세상에 속하는 도움을 대조하면서 하나님은 그 교회를 보존하는데 다른 도움을 빌리지 않는 사실을 분명히 하십니다. 그 까닭은 오직 그에게 모든 축복이 풍성하신 까닭입니다.』첫째는, 먼저 우리가 기억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성령만이 교회를 세우시는 사실입니다. 제1세기에 예루살렘에 교회가 처음으로 세워진 것도 오직 오순절에 성령이 당시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하는 120명 성도 위에 임하신 까닭입니다. …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 된 것입니다. 둘째, 초대 예루살렘교회의 이야기는 전 세기를 통하여, 또한 기독교 역사의 이야기입니다. 이 험악한 세계 역사의 파도 가운데서 어린 양 같은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지고, 보존되고, 확대되어 지금까지 내려오며 하나님 구속의 능력을 발휘함은 무슨 인간의 힘이나 지혜가 아니고 오직 그 곳에 불타는 성령의 역사가 있는 까닭입니다. 신교 복음이 한국에 들어온 이후에 이 복음이 점점 확포되어 교회가 설립되고, 지금부터 바로 60년전 1912년 평야에 대한 예수교 장로회 제1회 총회가 모이게 된 것도 오직 성령의 역사입니다. 특별히 1907년 평양 장대재교회에서 사경회에 큰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고, 따라서 1910년에는 백만명 구령운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한국교회 역사를 돌아볼 때에도 우리는 … (슥4:4, 필자) 말씀을 회상하게 합니다. … 대화있는 대결의 시대에 돌입한 우리 민족과 나라는 이 땅에서 자유를 수호하며, 사회를 혁신하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군사 모든 방면에 우위를 유지하여 장차 평화통일의 기수가 되기를 우리 교회에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 한국교회에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것입니다.”

 

 

한경직은 다시 한번 더 교회의 부흥의 비결은 인간의 권모술수에나 성명서와 결의서발표 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힘에만 있다고 설파한다.

 

“교회의 부흥은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아니합니다. 사람의 재주로 되지 아니합니다. 사람의 어떤 권력으로 되지 아니합니다. 하물며 사람의 어떤 권모나 술수로 되지 아니합니다. 어떤 사람이 모여서 성명서를 발표하고 결의서를 발표한다고 교회가 부흥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부흥은 오직 성신의 역사로만 되는 것입니다.『울어도 못하고 눈물로도 못하네 오직 내 신으로 되느니라.』하나님의 성신의 능력으로만 되는 것입니다.”

 

한경직에게는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구원의 우물이며,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기록이 담긴 성경이 구원의 우물이지만, 사실상 성령을 통해서 구원의 우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길어 올리는 교회가 구원의 우물로 불릴 만큼, 성령과 교회는 밀접한 관계 속에 있다.

 

“첫째 구원의 우물은 누구보다도 먼저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둘째는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성경 말씀도 넓은 의미에서 구원의 우물입니다. 셋째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도 또한 넓은 의미에서 구원의 우물이 되는 것입니다. … 여러분께서 새 힘을 얻어서 독수리 날개 펴고 올라갈 수 있는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성령과 성부(신부 =교회, 필자)가 말씀하십니다. 성령과 성부(신부=교회, 필자)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하실 것이요, 목 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마시라 하시더라』오늘 하나님께서 이 구원의 우물을 주셔서 하나님 앞에 감사합니다.”

 

교회연합운동 또는 에큐메니칼 운동을 강조했던 한경직은 교회의 하나됨의 근거를 일곱 가지, 즉 그리스도의 몸, 성령, 소망, 주, 믿음, 세례, 하나님이 각각 하나라는 사실에서 찾는데, 여기서도 성령이 중요한 역할을 하신다. 성령을 통한 교회의 하나됨은 성령의 은사의 다양성에 근거하는데, 성령을 통한 교회의 하나됨은 “유니티 인 다이버시티(unity in diversity)”, 즉, “다양성 속에서 통일성”을 뜻한다.

한경직은 “성령(聖靈)의 검(劍)”이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을 “성령의 검”으로 이해했다.

 

“에베소서 6장 17절을 기억하십니까?『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성령의 검이올시다. … 좌우에 날선 검이 필요합니다. 신혼 골수를 쪼갤 수 있는, 그리고 속에 파묻힌 음란과 악독과 불의와 허위와 교만과 나타(나태, 필자)를 근본적으로 수술해 낼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 즉 성령의 검이 필요합니다. 오대 사회악이니 칠대 사회악이니 하는 이 사회악을 근본적으로 깨뜨려 버릴 수 있는 성령의 검이 필요합니다.”

 

한경직은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제목으로 성례를 다루는데, 성찬을 세례보다 먼저 다룬다. 5대양 6대주, 세계 각처에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가족은 얼굴 색깔도, 음식도, 식사법도, 의복도, 말도, 글도, 예배당 구조도, 앉는 법도 모두 다르지만, 같은 것이 있다. “몸도 하나이요, 그리스도의 몸 곧 교회도 하나이며, 성령도 하나, 부르심을 입은 소망도 하나, 주도 하나, 믿음도 하나, 세례도 하나, 하나님도 하나 곧 만유의 아버지시다. 한 아버지의 자녀이며, 권속들이다. 우리는 이 큰 가족 중의 하나이며, 지금은 흩어져 있으나 함께 모일 때가 있다는 것이다.(계7:9) “성경이 가르치는 성례는 오직 두 가지이다. 세례와 성찬이다.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성찬을 통하여 그 자녀가 장성한다.”

성찬식은 무엇인가? “한 가족이 다 모여서 음식을 나눌 때 하나님의 가족도 주님의 상을 중심으로 음식을 먹는 풍속이 있다. 이것이 성찬식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성례를 세우셨으며(눅22:19-20), 그 때부터 믿는 자들이 종종 모여 이 예식을 거행하였다. 그 뜻은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기념한 것이며, 둘째는 생명이 양식이며(요6:53-57), 셋째는 연합의 뜻이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음으로써 우리는 그와 하나가 되고, 한 몸과 한 피 받은 형제와 자매가 되며, 넷째는 장차 하나님의 나라의 큰 잔치에 대한 예표이다.(계19:9-10)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례로서 세례가 있는데, 세례를 먼저 받아야만 성찬식에 참여할 수 있다. 한경직은 우리가 앞에서 논의한 대로 성령세례를 물세례와 차별화하였으나, 지금은 물세례로서의 세례를 경시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뜻과 반대되는 것이라고 물세례를 매우 강조한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자신은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세례를 받으셨고, 승천 전에 세례 베풀 것을 제자들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이다.(마28:19-20; 막16:16) 첫째, 세례는 중생을 의미한다.(요3:5) 물은 세례를 의미하고, 죄를 회개하고 세례를 받을 때 성령으로 중생한다. 둘째, 세례는 죄 사함을 의미한다.(행2:28). 셋째, 세례를 통해 성령을 받는다. 넷째, 한 몸 곧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다.(고전12:13) 곧 세례를 통하여 온전히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한경직의 경우, 성례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며, 성례의 효과는 성령을 통해서 나타난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각양 은사와 직분을 가지고 교회에서나 세상 어디에서나 봉사생활을 해야 하며, 이를 위해 특히 사랑의 은사가 중요하다.

 

 

Ⅳ. 성령과 종말

 

한경직이 종말과 관계하여 성령께 붙이는 이름은 “약속의 성령”이며, “보증의 성령”이다. 결국 한경직에게는 성령은 종말의 영이시며, 하나님의 나라, 샬롬의 나라를 실현시키시는 영이시다.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엡1:13) 약속대로 성령은 임하셨다. 그러므로 성령은 모든 다른 약속도 이루어 주실 것을 보증하셨다.” “성령의 인치심은 기업의 보증이다.”

 

“성경에 볼 것이면 성령이 이렇게 우리 마음 가운데 계셔서 우리에게 인을 쳐주시는 것은 장차 우리가 받을 기업의 보증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에베소서 1장 13-14절에 보면『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라고 기록했습니다. 사실 우리 마음 속에 성령이 계시므로 앞으로 영원한 하늘 나라에 가서 기업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보증으로 성령이 먼저 우리 마음 가운데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의 소유자이시고, 우리는 다만 청지기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총결산을 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문화, 예술, 정치 각 방면을 비롯한 물질적 결산이 있는가 하면, 기도 생활 등 영적 결산이 있다는 것이다.

한경직은 그리스도인 개인의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공동체적, 세계적, 우주적 차원에까지 성령을 종말과 결부시킨다. 한경직은 인류와 세계를 향한 성령의 탄식과 대망을 종말론적 관점에서 파악하고 있다. 피조물, 곧 자연 세계는 탄식하면서 전 인류가 회개하기를 대망하고 있다.

 

“우주 만물이 전 인류가 회개 하기를 기다린다. 개구리의 최후 비명 속에도 ‘인간들이여 어서 속히 회개하라’의 비절, 참절한 호소가 숨어 있다. 모든 인간이 회개하여 새 세계가 될 때에는 피조물 까지도 변화되어 진정한 평화의 자연계가 될 것이다.”(사11:6)

 

한경직에 의하면, 과학을 통하여 인류에게 부여된 그 많은 지식과 기술, 그 엄청난 에너지 곧 능력을 인류의 행복과 자유를 위하여 쓸 줄 아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피조물들은 기다리고 있다. 믿는 사람들은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로서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육신을 갖고 있는 신자들도 탄식하면서 신령한 몸을 입을 것을 대망하고 있다. “그런데 성령께서 우리를 위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여 주심으로 우리의 대망하는 바를 이루어 주신다.”

 

 

Ⅴ. 결론

 

우리는 본고를 한경직의 간단한 생애, 그의 성령신학에 대한 필자의 논술 방법, 범위와 한계 등을 밝히면서 시작하였다. 한경직의 성령론을 크게, 두 가지, 곧 성령의 위격과 사역으로 나누어 기술하고, 종말과 관계하여 마지막에 다루었고, 성령의 사역을 일반사역과 특별 사역으로 나누어 논의했다. 한경직의 성령신학을 다음과 같이 요약?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그의 성령신학은 신구약성경과 종교개혁전통, 특히 개혁신학 전통에 아주 근접해 있다.

둘째, 그의 성령신학은 “삼위일체(론)적” 성령신학이다. 성령은 하나님 자신이시며, 삼위들 중에 제3의 위격이시며, 자신의 고유성과 관련하여 경륜적 사역으로서 중생과 지도를 담당하시거나 성부와 성자와 “동재”(同在)하신다.

셋째, 그의 성령신학은 “그리스도 중심적?인식론적” 성령신학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영,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승천하신 주의 영이다.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는 이중적(二重的)이다.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하시고, 성령으로 사역하시고, 성령에 의해서 부활하셨다. 또한 부활?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우편에 앉아계시는 고양(승귀)된 예수 그리스도는 보혜사 성령을 보내시며,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 부활?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보혜사 성령을 통해서 현재 그리스도인과 교회에게 인식되시고, 현존하신다.

넷째, 그의 성령신학에서 성령의 사역은 크게 두 가지다. 모든 피조물에 역사하시는 창조와 섭리의 사역으로서 일반사역과 그리스도인과 교회를 중심으로 선택론과 하나님의 나라의 관점의 영역에서 역사하시는 특별사역이 있다.

다섯째, 그의 성령신학에서 성령은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을 중생시키는 것을 시작으로 일생동안 그와 함께 계시면서, 성령의 은사를 주시고,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셔서 성령 충만한 삶을 살게 하신다. 곧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성령세례를 시작으로, 성령의 은사와 능력과 열매가 가득하여 모든 삶과 영역에서 전인적(全人的)으로 성령의 전적인 통치(지배하심, 주관)를 받는데 까지 이르는 것, 즉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한다.

여섯째, 그의 성령신학에서 그리스도인이 성령의 전(殿)이듯이, 교회는 성령의 창조물 내지 성령의 피조물이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끝까지 교회의 권능의 원천이 되시기 때문이다. 세계에 있는 모든 교회의 탄생과 존립과 영적 성장과 선교의 주체는 성령이시다. 성령의 중요한 도구로서 성경말씀과 두 가지 성례(세례와 성찬)와 직분이 성령의 은사를 동반하여 상호 작용한다.

일곱째, 그의 성령신학에서 성령은 종말의 영이다. 약속과 보증(‘아라본’)으로서의 성령은 인간을 중심으로 전 피조 세계에 미치는 우주론적 대망을 하시며, 이를 위해서 탄식하시는 영이시다.

여덟째, 그의 성령신학에서 특이한 점은 역사적(歷史的)으로 일부 개혁파 정통주의에서 가끔 간과되거나 소홀히 여겨졌던 성령의 은사가 한경직에게서는 매우 강조되면서도, 일부 열광주의적 성령운동에서 자주 나타나는 특정한 신체적 떨림 현상이나 특정한 은사의 절대화에 대해 그가 매우 경계하고 있는 점이다. 이 같이 균형 잡힌 주장은 성경주석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가 있을 것이다.

아홉째, 서론에서 밝혔다시피, 콘텍스트에 민감한 설교를 제1차 자료를 삼으면서도 역사 신학적 분석을 배제한 점과, 가능한 모든 1차 자료를 사용한 보다 철저한 방법으로 그의 성령신학에 대한 연구를 무거운 마음으로 다음 과제로 남긴다.

열째, 더 많은 다른 1차 자료를 근거로 그의 성령신학에서, 필자가 분석한 바, 다른 주제보다는 상대적으로 적어 보이는 “성령과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이 관계에 대한 언급이 다른 자료에는 더 많이 나타나는지, 아니면 한경직 자신이 이 관계를 강조하고 있지 않는지가 궁금하다.

 

【참고문헌】

 

1. 제1차 문헌

 

한경직(이영헌 역음), 『한경직 설교자료』1~12권, 서울: 도서출판 예목.

한경직, 『한경직목사설교전집』1~12권, 서울: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교육부, 1971-1980.

한경직(한경직 목사 탄신 100주년 기념사업회 엮음),『평생에 듣던 말씀』, 서울: 도서출판 선?미디어, 2002.

 

2. 제2차 문헌

 

김운용, “강단의 거성 한경직의 설교세계,”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편, 『장신논단』제18집(2002).

이신형, “한경직 다시 그리기,” 한국조직신학회 편, 『조직신학논총』제6집(2001).

조은식 책임편집, 『한경직 목사의 신앙유산』, 서울: 숭실대학교출판부, 2007.

한숭홍, 『한경직: 예수를 닮은 인간, 그리스도를 보여준 교부』, 서울: 북코리아, 2007.

The Memorial Committee of Rev. Kyung-Chik Han’s 100th Birthday Anniversary(Ed.). May the Words of My Mouth., Seoul: The Memorial Committee of Rev. Kyung-Chik Han’s 100th Birthday Anniversary, 2002.

The Rev. Kyung-Chik Han Memorial Foundation(Ed.). Just Three More Years To Live!: The Story of Rev. Kyung-Chik Han., Seoul: The Rev. Kyung-Chik Han Memorial Foundation,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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