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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포스트모던 시대의 올바른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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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던 시대의 올바른 예배

 

김 영 한*

 

머리말

 

오늘날 포스트모던 시대의 도래와 더불어 서구 및 미국교회의 신자 수 감소 및 정체성의 위기는 더욱 가속화 하고 있다. 복음주의 교회는 위기 극복의 방편으로 젊은이들을 끌어 들이기 위하여 세속적 문화와 타협하거나, 또는 열린예배, 경배와 찬양, 빈야드 운동, 신사도 교회(The New Apostolic Churches)운동 등 다양한 방안을 도입하고 있다. 2000년대 들어와 성장의 정체 늪에 빠진 한국교회도 포스트모던 시대의 문화적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는데 있어서 한국교회는 포스트모던 문화의 특성을 잘 이해하고 수용할 것은 수용하고 걸러 내어야 할 것은 정리해야 하는 신학적 성찰이 요청된다.

 

본 논문은 포스트모던 문화의 특성을 간략하게 분석하고, 오늘날의 예배의 세속화현상을 들추어내고자 한다. 그리고 개혁신학적 입장에서 포스트모던 시대의 올바른 예배에 관한 예전(禮典)의 방향을 제언하고자 한다.

 

 

I. 포스트모던 문화의 특성

 

포스트모던 시대에서 문화의 특징이란 다음과 같다. 그것은 모던 시대로부터 근본적인 가치의 변화를 말한다. 가치의 변화란 자유로운 윤리에서 책임적인 윤리로, 인간을 지배하는 기계기술에서 인간에 봉사하는 기계기술로, 환경을 파괴하는 산업에서 자연과의 일치 속에서 인간의 진정한 관심과 필요를 촉구하는 산업으로, 형식권리를 주장하는 민주주의로부터 자유와 정의가 화해하고 살아 있는 민주주의로의 가치변화이다. 모더니티의 특수한 가치들인 근면, 합리성, 질서, 일관성, 시간지킴, 깨어 있음, 능력, 효능 등은 단순히 없어지지 않고 새로운 맥락에서 해석된다. 포스트모더니티의 새로운 가치들이란 상상력(Imagination), 감수성(Sensibilitaet), 정서(Emotionalitaet), 따뜻함(Waerme), 유약성(Zaertlichkeit), 인간성(Menschlichkeit)이다. 여기서는 가치의 파기가 아니라 균형과 대응운동이 중요하다.

 

포스트모던 문화는 두가지 측면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감성, 대중문화, 다양성, 복지와 생태계를 강조하는 긍정적인 측면이다. 다른 하나는 진리와 가치의 객관적 실재를 부정하므로써 우리 삶의 전통을 무너뜨리는 해체주의의 측면이다.

1. 긍정적 측면: 삶의 다양성, 문화, 생태에 대한 각성

긍정적 측면으로 감성, 대중문화, 다양성, 복지, 소비주의, 삶과 생태의 강조를 들 수 있다.

 

1) 감성의 강조

이성 대신에 감성이 강조되고 있다. 이성의 획일성과 경직성 대신에 유연성, 다양성, 차별성, 유동성, 의사소통, 탈 중심화, 국제화 등이 증가추세에 있다. 이성적 합리적 사고는 이제 더 이상 만능 해결사의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미 현대에 와서 순수 이성이란 근대의 세계상이 만들어 낸 허구(fiction)에 불과하다는 것이 드러나게 되었다. 심미적이고 예술적 가치가 인류의 삶을 주도하는 시대가 되고 있다. 이 감성의 강조는 언어적 기호 보다는 주로 영상, 음악과 음향효과를 사용하는 광고에서 두드러진다. 이성에 호소하는 합리적 메시지보다는 오감(五感)에 호소하는 이미지나 분위기를 내세우는 방식이다.

 

2) 대중문화의 강조

인터넷의 발전과 더불어 대중문화가 강조되고 있다. 문화는 영상과 더불어 후기현대의 인간을 지배한다. 최고의 가치와 예술만을 인정하는 고전적 문화 개념과 전통민속문화가 쇠퇴하고 대중문화가 부상하고 있다. 21세기는 대중문화가 주도하는 시대가 되었다. 문화가 상업화 되었다. 그리하여 문화가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구조로 변화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컴퓨터 그래픽이 적용되어 생생한 영상효과를 가져온 쥬라기 공원이나 디워(D-War) 영화이다. 예배도 첨단 인터넷 기술이 응용되어 사이버 예배가 생겨나고 있다.

3) 다원성 내지 다양성의 강조

획일성이 사라지고 다원성 내지 다양성이 강조되고 있다. 포스트모던 시대에서는 신앙과 행위와 가치규범의 정형을 인정하지 않으며, 상품에서도 어느 제품의 획일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예술에서 고급형과 대중형이 혼합되며, 음악에서도 클래식과 대중형이 혼합한다. 여기에는 프랑스의 사상가 료타르(F. Loytard)가 말한 것 같이 정보화로 인하 “거대담론”이 해체된 것과 관련이 있다. 사회를 통일하는 거대한 사상적 체계가 해체되고 파편적 담론이 주장되고 있다. 다양한 문화와 종교 그리고 다양한 삶의 양식에 의하여 다원성과 다양성이 환영을 받고 있다.

 

4) 이미지의 추구

포스트모던 문화는 이미지를 추구한다. 대중 전자 매체인 TV, 광고, 영화, 드라마 등은 이미지를 생산한다. 이미지가 상품을 팔고 문화를 주도한다. 프랑스의 포스트모던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Jean Beaudrillard)는 현대인들이 살아가는 오감을 통해 모든 현실에 압도적으로 스며들고 있는 이미지(image)의 현상을 “시뮬라시옹”(simulation)이라는 단어로 표현하였다. 본래 이 용어는 대상물이나 사건들의 가짜, 모조품, 재현이나 복사를 의미했다. 그는 이 용어의 뜻이란 “실재 사건보다 이미지화 한 것이 사람들에게 더 실재적으로 다가간다”는 것이다. 보드리야르는 한편으로 오늘날 과다한 이미지 아래 실재가 실종되고 있다고 문명비판을 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미지가 포스트모던인들 문화의 중요한 일부가 되어 소통의 재료가 되고 있다. 포스트모던 문화에서 이미지는 힘의 언어로 작용한다. 사이버 상에서 아비타 문화, 각 브랜드의 상표, 광고물 등은 이미지를 형성해주고 심지어는 실재를 산출해내기도 한다.

 

5) 소비주의

사이버 문화와 대중문화에 주도되면서 소비가 포스트모던 문화가 중요특징이 된다. 모든 문화활동은 대중소비를 향하여 만들어진다. 따라서 소비자의 취향에 따라 만들어지며, 소비가 문화활동의 성공의 유일한 기준이 된다. 대량소비를 함으로써 그 문화활동은 의미성을 갖는다. 이러한 소비주의는 현대인들에게 종교의 의미와 효용성도 실용주의로 바꾸어 놓는다.

 

6) 삶과 복지의 강조

기술문명의 발전과 더불어 복지가 강조된다. 인간의 생존 권리의 강조와 더불어 인간의 복지에 관하여 사회적 관심이 높아진다. 어린이와 여성과 노약자와 장애인과 노인들에 대한 관심이 사회적으로 높아지고 있다. 인간의 삶은 단지 기계기술의 부속물이 될 수 없으며, 삶 그 자체와 복지가 강조되고 있다.

7) 생태계의 강조

환경의 오염으로 인한 생태계의 위기를 각성함에 따라 생태계의 보존에 대한 의식이 생겨나고 있다. 지구온난화이 따른 지구의 사막화와 오존층의 감소, 이에 따른 기후의 변화는 가뭄과 홍수를 가져오고 지구 생태계 파멸의 위협을 가져오고 있다. 이에 따른 생태계 보존과 유지가능한 발전이라는 대책이 논의의 의제가 되고 있다.

 

2. 부정적 측면: 해체주의

 

부정적 측면으로 전통적 가치와 진리의 부정, 도덕적 상대주의, 삶의 허무주의, 종교적 다원주의에 빠지고 있다.

 

1) 전통적 가치와 진리부정

근대성이 주장하던 토대주의가 무너짐으로써 이성주의가 무너졌다. 그럼으로써 이성주의가 주장했던 진리와 가치의 객관성이 부정되고 전통의 권위가 무너졌다. 그리하여 전통적 기독교 진리가 무너지고 전통적 신앙과 전도 방식과 예배방식이 부정되고 있다. 그리하여 열린예배가 등장하고 “이머징 교회”(emerging church)가 등장한다.

 

2) 도덕적 상대주의

1979년 그의 저서?철학과 자연의 거울?(Philosophy and the Mirror of Nature)에서 리처드로티(Richard Rorty)는 이러한 신실용주의 사상을 전개하였다. 그는 그동안 철학을 자연이나 실재를 있는 그대로 비추는 거울 쯤으로 간주해온 전통철학에 대해 냉소와 조롱을 퍼 붓는다. 인간의 목표설정이 중요한 것이지 인간과 독립된 실재는 없다는 것이 그의 사상의 핵심이다. 로티는 현상과 실재를 구분하고자 하는 노력을 포기하고자 한다. 그 대신 그는 신실용적인 사상(neo-pragmatic thought)을 제시한다. 그것은 “이것이 실재인가”라는 형이상학적 질문보다는 “이것이 우리의 목적을 위해 실용적 묘사인가”라는 질문이다. 이러한 실용주의적 사고방식에 있어서 그는 “진리나 과학보다 양식 있는 시민들 간의 자유로운 합의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입장은 문화상대주의로 귀결한다. 이것이 포스트모던 시대의 정신적 특징이기도 하다. 1988년 헨리(Carl F. Henry)는 고정된 진리를 부정하는 “새 야만주의”(the new barbarianism)에 관하여 언급하였다. 모든 진리는 상대적이다. 궁극적 선이란 없다. 궁극적 의미와 목적이란 없다. 살아있는 신이란 원시적 환상에 불과하다고 본다.

 

3) 삶의 허무주의

해체주의자들이 이러한 인간 삶의 실존적이고 가치적 기초를 부정할 때 그 자신의 실존과 가치를 부정하고 끝임 없는 미로와 방랑의 시궁창에 전락하게 된다. 이 의미도 하나의 일의적(一義的)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하고 애매하며 끊임없이 표류하는 현상이다. 여기서 모든 목적과 구원은 더 이상 기대될 수 없다. 삶은 목적과 종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끝임없는 오류와 방랑의 놀이이다. 해체신학은 극단한 허무주의와 허무 극치의 고통을 동반한 즐거움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철저한 피상성(superficiality)을 선포하고 있다. 극단한 피상성이란 오로지 생성 소멸하는 우주의 놀이에 짜여 져 논다는 니체적 허무주의를 말하고 있다.

 

4) 종교적 다원주의

포스트모던사회에서는 획일성이 비판되고 다양성(plurality)이 환영을 받음으로써 획일성의 신앙을 고백하거나 전파하는 것은 무식과 독선으로 간주된다. 기독교 안으로 옛 이교들이 들어오고 있다. 신비주의, 각종 요술의 힘, 자연과의 교통, 신비종교를 포용하는 새 이교주의가 허용된다. 그리하여 현대 미국과 유럽사회는 희랍과 로마시대의 이교주의 시대로 되돌아가고 있다. 이미 1965년 선언된 천주교 제2바티칸 공의회의 비기독교 종교들과의 관계에 대한 선언은 타종교의 구원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칼 라아너(Karl Rahner)와 한스 큉(Hans Kueng)이 제창한 타종교의 구원론은 개신교 안에서 존 힉(John Hick), 니터(Paul Knitter)등을 중심으로 수용되기에 이르며, 더욱 확산하고 있다.

 

 

II. 오늘날 예배의 세속주의

 

포스트모던 문화의 부정적 측면은 예배의 오락성과 세속성에서 나타나고 있다. 해체주의는 종교를 부정하고 삶을 연애오락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다. 포스트모던 시대에 교회 안에 침투해 들어온 세속주의는 예배를 연예오락(entertainment)로 만들고 있다. 종교를 연예오락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오늘날 현대 기독교인은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서 광란적으로 놀이를 즐겼던 이스라엘의 예배의 타락을 그대로 닮아가고 있다. “연예오락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마약중독자가 날마다 헤로인을 맞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것처럼 심리적 중독이 주는 위안을 얻고자 한다. 이들은 이 심리적 중독이 주는 위안을 가지고 현실에 맞서고자 한다. 예배가 밀려난 자리에 ‘프로그램’이라는 낯설고 이상한 것, 황금송아지가 들어와 있다. 프로그램이 예배에 적용되면서 프로그램 자체가 예배로 통하고 있다.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는 경건의 강이 없어지고 허영의 시장(vanity fair)으로 변모하였다.

 

오늘날 “신사도 교회들”은 저들의 은사운동에 적합하게 예배의 스타일을 변경하고 있다: “신사도 교회들은 ...주로 현대 음악스타일을 사용한다...예배지도자들은 음악 인도자들로 대치되었다. 키보드는 파이프 오르간을 대신하였다. 잠정적인 예배팀들이 까운(성의)을 입은 성가대들을 대신하였다. 오버헤드 프로젝트(환등기)가사는 찬송가를 대신하였다...서서 예배드리는 것이 통례인데 이들에게 자유스런 몸짓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러한 현대교회의 오락성이 찌든 예배에 대하여 “종교적 쇼를 중단하라”고 미국의 복음주의 장로교 목사 토즈(Aiden Wiplson Tozer)는 비판하였다: “연예오락과 흥밋거리에 따라서 운영되는 교회는 신약성경이 보여주는 교회의 참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얄팍한 자극을 갈망하는 욕구는 인간의 타락한 본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표시이다.” “기독교는 또 하나의 오락이 되어 버렸다. 복음주의자인 우리는 우리의 참 모습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북미의 경우 바르나 연구소장 바르나(George Barna.)는 북미예배의 문제 중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케 하는 일에 실패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예배를 정규적으로 드리는 성인들 중 반수의 신도들은 지난해 동안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했다고 말하였다.” 토저 역시 복음주의 신자들이 그 많은 카우벨(cowbell), 연주용 톱과 쇼와 영화와 흥미로운 도구들을 사용하고, 사람들을 부추겨 축하하고 분위기를 복돋우려고 애쓰는 이유는 저들은 마음속에 “주님이 주시는 기쁨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며, “참 기쁨의 근원이 되시는 성령님의 기쁨의 샘이 메마르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1. 인터넷을 통한 사이버 예배 - 오늘날 세속화된 예배의 전형

인터넷 문화의 확산과 더불어 생긴 사이버 예배는 다음 네 가지 문제를 지니고 있다.

 

첫째, 교회를 탈공동체화 시키고 있다. 사이버 교회에서는 공적 예배에 나가지 않고 사이버공간의 예배에 참여하게 된다. 공동체적인 신앙고백이 부재하고 서로간의 유대감이 없는 믿음의 사람들의 모임을 교회라고 말할 수는 없다. 코이노니아가 없는 가상교회는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할 수 없다.

둘째, 예배의 성격이 청취자 편의위주로 인본주의화 될 위험성이 있다. 사이버 예배에는 이러한 회심과 헌신과 결단이 결여되는 경우가 많다. 자기만이 있는 폐쇄된 공간은 신앙이 깊은 신자에게는 그것이 더욱 골방에서의 기도와 예배의 시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예배가 하나의 프로그램을 체험하는 것으로 끝나버릴 경우가 많다. 신앙이 아직도 어린 신자들은 왜 구태여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 라는 의문을 제시하게 된다. 더욱이 교통이 복잡하고 주차장도 부족한 도시에서는 아예 재택예배를 드리자는 의식이 일반화할 수도 있다. 21세기에 우리사회도 서구사회처럼 주 5일 근무가 일반화되면 사이버 예배가 휴양지나 여행지에서 더욱 늘어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지역교회당의 모임은 점점 약화 될 것이다.

셋째, 드리는 예배가 아닌 청취하는 예배가 되어 버린다. 그리고 헌신과 결단이 결여된 소극적이고 피동적인 예배와 신앙관습을 형성한다. 진정한 예배는 설교가 나오는 동영상을 청취하는 것만이 아니다. 진정한 예배는 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넷째, 성례전 없는 예배이다. 가상예배에서는 성례전을 시행할 수 없다. 사이버 예배에서는 구체적인 신앙고백도 그것을 집행해 줄 목회자도 없기 때문에 시행될 수 없다.

 

2. 공예배에 도입된 열린예배

열린예배는 불신자들을 위한 전도를 목적으로 한 것이다. 그래서 불신자들이 이질감이나 거부감을 느끼지 않도록 복음송가나 세속적인 매체를 사용하여 이들을 기독교 진리에 용이하게 접근하도록 한다. 따라서 열린예배란 전도집회이지 신자들이 드리는 예배라고 할 수 없다. 열린 예배가 불신자들의 세속적인 취향을 우선적으로 고려하거나 영합하는 것이 된다면 하나님께 드리는 바른 예배가 될 수 없다. 기독교 예배는 전도를 목적으로 한다. 기독교 예배는 본질적으로 열린 예배이다. 그렇다고 그 형식이나 내용을 세속화시켜서는 안된다. 초대의 예루살렘 교회가 열린 예배의 진정한 모델을 보여준다. 이들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교회의 전통적 예배 가운데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였다.

 

전통예배 형식 안에 열린예배를 도입하는 것이 요청된다. 양자를 분리시키지 않고 연결시키는 것이 요청된다. 2008년 4월 새문안교회에서 열린 제1회 언더우드 심포지움 두 번째 날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을 통해 미국 풀러신학대학원 총장 마우(Richard Mouw)는 최근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구도자 예배’와 기존의 ‘전통적 예배’를 따로 드려 교회에서 세대 간의 분리가 일어나는 것에 대해 우려하면서 “모든 세대가 함께 모여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마우 총장은 최근의 이같은 현상을 ‘예배 전쟁(Worship War)’로 규정하면서, 세대간 통합 예배가 필요한 이유로 “중장년층과 청년층 서로간의 대화를 통해 과거의 유물은 잘 간직하고 현재의 문화적 당면과제에는 진지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고, 청년들은 구세대와의 규칙적인 만남을 통해 심리적·정신적으로 더 건강해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3. 실험예배 등장으로 예배와 전도가 혼동되고 있다.

대학 채플이나 전도집회에서 많이 등장하는 예배형태이다. 그리고 오순절 교회에서 주로 많이 사용되는 예배형식이기도 하다.

첫째, 예배에 다양한 새로운 요소들을 첨가. 성령춤, 드라마, 유머가 담긴 촌극, 시각적인 필름, 성령 웃음 등 새로운 형태가 예배에 나타나고 있다.

둘째, 음악의 변화가 크게 작용하고 있다. 오늘 예배음악은 팝(pop) 음악이나 락(rock) 음악으로 변화하고 있다. 악기도 징, 장구, 꽹과리 까지 동원되고 있다.

셋째, 성경봉독과 기도는 할 수 있는대로 짧게 하고 설교는 심리적이고 실제적인 것으로 하고 있다. 성찬식은 상징적으로 대치하거나 생략하고 있다.

그리하여 강변교회 원로 김명혁은 다음같이 개탄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더 많이 자극하고 더 많이 흥분시키기 위해서 각종 음악 및 율동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중이다. 감정적인 흥분을 성령충만으로 착각하게 되었다. 서글프고 불행한 일이다.”

 

4. 자기 중심적 번영지향적 예배

신자들이 정규적으로 주일예배에 참석하나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가운데 하나는 하나님 중심이기 보다는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하나님 앞에 바치기 보다는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얻으려 하는 까닭이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분에게 영광을 돌리기보다는 자신을 기쁘게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교회들이 성장과 번영일변도의 철학을 가지고 하나님에 대한 경배와 찬양이라는 일차적 목표보다는 교회의 성장이라는 가시적 목표아래 예배를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열린예배, 총동원 주일, 지성전 예배, 은사 예배 등으로 드려지는 예배는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진정한 헌신과 봉사 보다는 복과 번영을 누리려는 동기로 지배되고 있다. 이러한 번영주의 교회에는 부자들, 상류계층, 유명한 정치인들, 기업가들, 사회적 명사들이 고급 승용차를 이끌고 예배 드리려 나오고 있다. 복음주의 목회자들이 그것을 보고 너무 좋아서 입을 다물지 못한다. 이들에게 회심과 나눔과 헌신의 설교보다는 듣기 좋은 번영과 복 받는 설교를 한다. 그리하여 기독교의 번영의 종교가 된다. 그리하여 이들 기독교 신자들과 목회자들 대다수에 있어서 회심의 증거인 도덕적 변화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서울 강남에 위치한 어느 교회에는 세속적 이권을 추구하는 자들이 매주일 예배에 모여들고 있다.

 

5. 직통계시로서의 예배

한국교회 안에 은사운동이 들어옴에 따라서 예배를 하나님과의 직통계시와 교제로 생각하는 신비주의적 경향이 있다. 그리하여 예배 시에 성령의 직통계시를 받음을 진정한 예배로 보는 것은 비성경적 태도이다. 신사도교회는 오늘날에도 직통계시가 있으며 그것은 성경의 권위에 동등하다고 본다. 개혁주의적 예배란 하나님과의 직접적 만남과 교제가 아니라 말씀의 선포와 성례전적 집행(세례와 성찬)을 통한 간접적인 것이다. 말씀과 성찬과 세례가 예배자에게 하나님과의 만남을 상징적으로 중재하는 것이다. 참여자는 말씀의 선포 속에서 그리고 성례전 참여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참회기도와 신앙고백과 찬양으로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성령의 인격적인 내주와 조명이 있다.

 

6. 지성전 화상(畵像)예배

지성전 화상예배는 대교회가 지역신자를 늘리는 목적으로 본성전에서 드리는 예배를 각 지역의 성전에 중개해서 화상을 통해서 드리는 예배이다. 이것은 한국교회에만 있는 특징이 아닌가 한다. 순복음교회에서 시작하여 오늘날은 소수의 장로교 대형교회들이 받아들이고 있다. 이것은 담임 교역자가 없는 선교지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엄연히 지성전 교역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담임목회자의 설교와 본 교회의 예배를 화상으로 보아야 은혜를 받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담임 목회자를 교주로 만드는 위험성을 지니고 있으며,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설교자중심으로 하고 그리고 설교자의 설교를 보는 것으로 혼동시키는 위험을 지니고 목회와 설교를 분리시키는 위험성을 동반하고 있다.

 

 

III. 포스트모던 문화 속의 바른 예배

 

포스트모던 시대라고 예배드리는 존재인 인간의 본질이 바뀔 수는 없다. 인간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영화롭게 해 드리기 위해 창조되었다. 따라서 하나님이 아닌 다른 대상을 예배하는 것은 자기 스스로 불행하게 만드는 일이 된다. 인간은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고 인간이 만든 우상도 예배를 받을 대상이 절대로 될 수 없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 이것이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기본 명제이다. 성령과 진리 아닌 인위적인 수단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시내산 앞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이라고 경배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하나님을 오락적인 즐거움으로 경배하는 것은 예배를 타락시키는 것이다. 예배의 신학적 본질을 분명히 하고 포스트모던적 상황을 예전적으로 고려할 수 있다.

 

예배는 두 가지 차원을 갖는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예배의 수직적 차원(vertical dimension)이라면 하나님의 사람들을 세우는 것은 예배의 수평적 차원(horizontal dimension)이다. 참된 예배(true worship)는 이 두 가지 목표를 함께 달성하는 예배이다. 예배의 첫째 목적은 구속함을 받은 신자가 창조주요 구속자요 완성자이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과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이다. 예배의 두 번째 목적은 신자가 자신을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완전한 자(성숙한 자, 온전한 자, 엡 4: 12)로 세워 나가는 것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정신은 즐거움, 경외심, 겸손, 순결, 탁월하심 인정, 중보자를 통함이다. 하나님은 무한히 즐거운 영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즐거이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은 무한히 위엄스런 영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경외심을 갖고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은 무한히 높으신 영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강 깊은 겸손으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 하나님은 무한히 거룩하신 영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순결한 마음으로 말씀을 경청해야 한다. 하나님은 무한히 영광스런 영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탁월하심을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노엽게 할 수 있는 영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화평을 이루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이러한 예배에는 항상 말씀을 선포를 통한 죄와 허물의 깨달음, 회개와 거룩한 슬픔과 감사가 있어야 한다.

 

베네딕트(Daniel T. Benedict)와 밀러(Craig Kennet Miller)는 저들의 공저 『21세기를 위한 현대적 예배』(Contemporary Worship for the 21st Century: Worship or Evangelism)에서 현대적 예배를 다음같이 정의하였다: “현대적 예배는 문화적으로 접근할 수 있고, 적합한 것이며, 새롭게 개혁된 것이며, 구도자를 만나기 위하여 현대적 통신기술을 사용하는 것이며, 전통적인 예배양식을 선호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초점을 두는 예배의 움직임과 유형을 일컫는다.”

 

포스트모던 예배란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의 흐름을 감안한 전통적 예배의 현대적 적용이라고 할 수 있다. 포스트모던 문화의 부정적 측면인 전통적 경건의 전통을 부정하고 고전적 예배형식을 부정하는 해체주의 경향, 고도의 소비시대에 소비자의 성향에 따라 마케팅하는 세속적 기호나 오락이나 쾌락정위의 경향은 복음주의 예배에서는 배제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문화의 긍정적 측면은 오늘날 예배에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예컨대, 서울교회(담임 이종윤 목사)는 1부(가족예배: 9시)와 3부(청년예배: 오후2시)는 포스트모던 문화를 많이 수용하여 인터넷 프로젝트를 사용하여 어린이와 젊은이들에게 보다 직관적인 예배를 드리도록 하고 2부(장년예배: 11시20분)는 경건과 성경 강해 위주의 전통적 예배를 드린다.

 

1. 하나님을 찬양하는 예배: 명상보다는 경축하는 예배

명상하는 시간보다는 축하하는 시간을 더 많이 할당한다. 하나님의 거룩성의 찬양이 기독교 예배의 핵심이다. 그것은 기독교적 누미노제(numinose)의 경험을 나누는 것이다: “21세기 예배의 새로운 패러다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누미노제의 경험을 예배에서 나누는 것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하나님의 베푸신 구속과 인도하심을 경축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축하는(celebrate) 예배이다. 경축에는 세 가지 요소가 포함한다. 기억(remembrance), 감사(thanksgiving), 재헌신(rededication)이다. 이 세 가지는 참된 예배를 구성하는데 불가결의 요소이다.

 

음악에 비중을 둔다. 그리고 문화적으로 형성하면서 서로 나누는 영적 음악은 전통음악보다 더 큰 영향을 끼친다. 복음송가가 찬송가보다 젊은이들에게는 더 큰 감동을 준다. 예배음악 팀이 찬양의 활기를 북돋우어 준다. 찬양밴드와 관현악단이 예배표현을 돕는다. 예전무(舞) 집단을 양성하고 활용한다. 음악을 통해서 성령의 역사가 충만한 예배를 드리게 해야 한다.

 

2. 명제적 설교보다 이야기 형식의 설교

교리적 설교보다는 신자들이 처한 현실의 문제를 취급한다. 간단한 이야기 형식의 설교는 불신자들에게 다가가 저들에게 어필하기 때문에 불신자들이 마음의 문을 열고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한다. 설교는 세속사회의 불신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통해서 전달하며 불신자들이 쉽사리 이해하도록 한다. 단순한 커뮤니케이션 체계를 발전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은 1970년대 발생한 서사신학(narrative theology)의 영향이라고 볼 수도 있다. 서사신학은 교리의 설교보다는 복음서나 구약인물의 신앙체험은 교리전달보다는 이야기형식을 통해서 복음의 메시지로서 청중에게 보다 직관적으로 다가가도록 한다고 본다. 그러나 서사신학은 조직신학의 테두리 안에서 설정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의 복음적 교리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성서의 이야기는 저자의 신앙과 떼어 내어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야기는 이야기가 설정하고 있는 역사와 떼어 이해될 수 없다.

 

3. 감각을 살리는 예배: 청각적 예배보다 시청각적 예배

인쇄된 말씀보다는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제시된 복음의 말씀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리고 여기에 청각 등 오감이 가미되면 시청각이 생동적으로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영감이 있는 예배에서 느끼는 네 가지 감각이란 미국 에모리대학의 예배학 교수 세일리어스(Saliers)에 관하여 경외, 환희, 진리, 소망의 감각을 언급하고 있다. 여기에 박은규는 봉헌의 감각을 첨가하고 있다. 우리는 예배에서 우리의 오감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된다. 하나님 임재는 지성적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 영과 마음 전체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여기에 중요한 것이 비구어적 언어(non-oral language)이다. 비구어적 언어는 육체적 감각과 연관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경험에 있어서 육체적인 감각과 영적 감각을 연결시켜서 이해하여야 한다.

 

포스트모던 문화 속에서 이메일, 이카드, 휴대폰문자, 영상전화, 광고, 영화, 드라마 등이 사회구성원들에게 시뮬라시옹 현상을 야기하고 있다. 교회나 신학도 이 현상을 막을 수 없다. 신자들도 이 사회 안에서 살고 있고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디어 학자들이 현상학적으로 분석한 것을 예배현상에 적용하여야 한다. 따라서 시뮬라시옹이라는 포스트모던 문화의 특성을 예배에 비판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요청된다. 비판적인 관점이란 이미지가 과도하게 영향을 줌으로써 실재는 유토피아로서 실종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면서 이미지의 조작에서 실재로 조금이라도 다가가도록 노력한다는 것이다.

 

4. 정적(靜的) 예배보다는 역동성의 예배

포스트모던 문화가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기독교 예배는 혼돈스러운 것이 아니라 역동성을 가져야 한다. 예배에서 역동적인 것의 본질은 각종 악기(樂器)를 사용하고 찬양을 동원하는 인위적인 연예오락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이다. 그의 임재는 “고무하면서도 감동시키는 인격적 현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역동적인 예배에 오시는 하나님의 임재가 그의 살아계심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이것은 역동적 순간이다. 이 순간은 예배 가운데에 신자들이 회중 속에 말씀의 선포와 찬양과 기도와 신앙고백과 성례전에의 참여 속에서 하나님의 감동시키는 고무시키는 임재를 느끼는 시각이다. 이것은 구속의 기쁨을 체험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며, 다른 신자들과 함께 은혜를 나누는 신앙의 놀이이다.

 

예배를 하나의 형식으로 고정 시키지 않고 기독교 예배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다양하게 설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예배학자 캘라한(Koennon L. Callahan)에 의하면 역동적인 예배 안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고 은혜는 네 가지를 가져다 준다. 새 힘, 소속감, 삶의 의미, 소망이다.

 

첫째, 예배에서 우리의 허물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새 힘을 받는다.

둘째, 예배 속에서 우리는 신앙공동체 안에 귀속되는 소속감을 갖는다. 고향이 다르고 신분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국적이 다르고 인종이 다르다 할찌라도 예배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같이 받고 그의 성례전을 같이 받을 때 신앙공동체 안에 소속감을 갖게 된다.

셋째,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자기중심의 이기적인 삶이 허망하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하여 살려는 삶의 의미와 목적을 발견한다.

넷째, 예배를 통해서 삶에 희망을 발견한다. 역동적인 예배를 통해서 죄의 사함, 병의 치유, 하나님의 축복, 문제의 해결, 내세의 확신 등 삶의 희망을 갖게 된다.

 

5. 삶과 분리된 예배 아닌 삶의 예배

예배는 의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열매를 맺어야 한다. 예배의식을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경배로서의 섬김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끝나서는 안된다. 이것은 반쪽의 예배이다. 공예배의식의 참여는 삶에서 이웃과 세상과의 관계에서 섬김의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 삶의 예배는 삶과 웰빙이 중요시된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다시 한 번 환기되고 있다.

 

1) 삶이 교화되는 예배

바른 예배는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의 구속을 찬양하고 감사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러한 자신의 인격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신앙적 덕성이 함양된다. 겸손하여 덕을 세우며, 사랑을 배우며, 형제 자매를 배려하는 삶의 자세를 말한다.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에 의하면 초대교회 예배의 목표는 경건성을 함양하는데 머물지 않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데 있었다.

 

2) 봉헌으로서 예배

구약제사의 핵심은 희생제물의 피를 제단에 뿌리고 헌납하는 것이었다. 제물을 태우게 됨으로써 하나님이 그 향을 흡양하시는 것이었다. 신약예배에서 제물은 예수 그리스도 이시다.

 

이 그리스도의 속죄제물의 봉헌에 근거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다. 예배순서에서는 찬송, 기도, 예물 드리기, 성례전, 파송의 축도 순서를 통해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봉헌할 수 있다.

 

삶의 예배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전인격적 응답이며, 삶 전체를 통하여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드림이다. 그리스도께서 피 값으로 우리를 사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 몸은 우리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다(고전 6;19, 갈 2;20). 이제 우리의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 드리는 것이 아니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롬 6;13). 이것은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지상에서 지속적으로 경축하여야할 영광스러운 일이다. 여기에 기독교 예배의 의미이다.

 

3) 일상적 성례적 삶으로서의 예배

종교 개혁자 루터는 “소년 농부와 농장에서 젖짜는 여자”도 제사장 일을 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루터의 만인제사장 교리의 심오한 가르침은 소년 오부가 경작하면서 제사장의 일을 하며, 농장에서 일하는 여자가 젖을 짜며 제사장의 일을 한다는 점이다. 종교적 영역과 일상적 영역이 심오하게 연결되어 있다:“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계속해서 세례가 의미하는 바를 행동으로 옮긴다. 그것은 우리가 죽었다가 다시 일어났다는 것이다.”

 

주일 공예배가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면 삶으로서의 예배는 이웃에 대한 봉사와 사랑의 실천으로 나타나야 할 것이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 가정, 직장, 사회생활에서의 삶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예배가 되어야 한다. 성례적인 삶의 기본적인 장소는 결혼생활, 가정과 가족이며, 우리의 직장(vocatio)이며,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영역(예술, 문학, 연극, 학교와 병원, 기업, 정치의 영역) 이다. 이 영역은 문화적 위임(cultural mandate)의 영역이다.

 

6. 축제로서의 예배: 드라마로서의 예배

예배는 축제가 되어야 하고 이 축제는 기승전결을 갖고 있다. 드라마는 절정을 가지고 있다. 예배는 드라마로서 전개되기 때문에 전통적 형식에서 느끼는 지루함과 경직성을 극복한다. 스킷 드라마를 효과적으로 포함시킨다. 정규 드라마팀이 복음전달을 위해 기여한다. 죄 사유함을 받고 식어 버린 은혜를 다시 찾고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는 신앙의 놀이로서 축제행사 된다.

 

1) 잔치로서의 예배

기독교 예배는 본질적으로 잔치의 성격을 띠고 있다. 즉, 역사 안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성업, 그의 능력을 나타내신 이 모든 일을 찬양하고 축하하는 잔치다. 그러나 예배에 참석한 장로교회 교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굳어져 있고 근엄하다. 감사와 감격과 기쁨에 넘쳐서 드려야 할 잔치가 엄숙하다 못해 때때로 장례식에 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2) 함께 드리는 예배

예배는 고립된 개개인의 행위가 아니라 교회 전체의 행위다. 예배는 성직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것은 중세 천주교적 예배이다. 개신교 예배는 전 교인들이 만인제사장으로서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함께 드리는 예배이다. 그러므로 예배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응답이라고 볼 때 예배하는 회중이 구경꾼으로만 머물러 선 안 된다. 어디까지나 예배자들은 기쁨과 감사, 찬양, 헌신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구체적인 행동을 보여야 한다.

3) 코이노니아로서의 예배

축제로서의 예배는 신앙공동체에 소속된 성도들의 공동체 지체들 사이의 교제와 친교로 나타난다. 그래서 최근에는 예배순서 가운데 교제와 신입교우 환영의 순서를 가지고 이웃에 있는 교인들 사이에 짤막한 인사순서가 있다. 그리고 그것의 연장으로서 친교식사가 예배 후에 이어진다. 천교식사는 단순히 음식만 나누는 것이 아니라 신도들의 기쁨, 슬픔, 고통 그리고 신자들의 여러 정황과 관련하여 목회적 돌봄을 시행하는 모임이다. 초대교회는 애찬을 자주 가졌다. 주일 대예배 후에 교회식당에서 서로 나누는 친교식사는 코이노니아에 기여한다. 코이노니아는 개인주의가 강한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공동체를 세우는 역할을 한다.

 

4) 개인 구원 위주의 예배보다는 증언자로서 부름받는 예배

개혁주의 예배는 개인 구원에만 집중하는 복음주의 예배의 협착성을 극복하고 복음의 증언자로 부르심을 받는 예배를 강조해야 한다. 2007년 잠실 샤롯데사이터에서 공연된 뮤지컬 ‘맘마미아’의 주인공 도나역을 맡아 큰 인기를 모은 가수 이재영은 자신을 “문화선교사”라고 부를 만큼 신앙적인 열정이 강하다. 이재영은 1989년 대학가요제 입상 후 가수겸 뮤지컬 외길을 걸어 왔으나 한 때 성대(聲帶)결렬로 시련을 당하였으나 신유의 체험을 통해 새로 태어남을 경험하였다. 그녀의 예배관은 개인구원 일변도를 벗어나 복음증언자로서의 예배관이다.

 

2008년 1월 15일자 국민일보 미션판에 그녀의 간증기사가 실려 있다: “2004년 병원 생활이 반복되자 그녀는 성경을 펴놓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살려주세요. 아픈데를 고쳐주시면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겠습니다. 그리고 이 내용을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로 하나님께 날려 보냈다. 그녀는 서원기도대로 경기도 고양시 사리현동 한사랑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예배당 한구석에서 엉엉 울면서 회개기도를 드리기를 며칠, 이때 기적이 일어났다. 몸이 가벼워지기를 시작한 것이다. 성령님이 아픈 부위를 만져 주시고 계심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숙면의 양약이었다. 비둘기 같은 평화가 영혼을 감쌌다. 난생 처음 누리는 안식이었다. 이제 그녀는 ‘가수’이며, ‘문화선교사’다, 그녀는 ‘맘마미아’ 뮤지컬을 공연하면서 동료들과 신우회를 만들고 무대에 오를 때 마다 기도를 드리고 있다. 공연도중 다리를 삐었지만 안수기도 후 부기가 급속히 빠지는 신유의 체험을 했다. 찬양을 부르는 일도 잦아졌다. 믿지 않는 어머니를 교회로 인도했고, 교회학교 교사와 성가대, 금요철야예배 찬양단원으로 활동중이다.”

 

7. 현대 문화를 수용하는 예배

 

예배는 현대문화의 옷을 입어야 한다. 문화는 예배의 의상(衣裳)이기 때문이다. 로버트 웨버(Robert Webber)는 “모든 피조물은 예배에 참여 한다”며 “하나님은 말씀과 성찬 성례전, 기도 외에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경험의 방법으로서 공간(건축, 환경, 예술)과 소리(음악)와 예술(드라마, 움직임)을 주셨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어느 민족이나 문화에 전파되든지, 그 특유의 문화를 수용하면서 그 나라와 민족의 교회로 발전해 왔다. 그리고 그 문화는 예배로 나타난다. 때문에 예배가 활성화 되려면 각각의 주어진 그 시대의 문화 속에서 자신들의 믿음과 신앙을 표현하는 예배의 방식은 다양해야 한다.

1) 경배와 찬양을 잘 활용할 필요가 있다.

경배와 찬양은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오늘날의 음악성을 동원하여 젊은이들이 자기의 신앙을 음악적으로 발산한다면 측면에서 영적인 카타르시스의 측면을 지니고 있다. 이런 경배와 찬양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자들이 적지 않다. 청년들을 위해서 현대적 찬양예배를 드린다. 그러나 부정적 측면을 항상 의식해야 한다. 그것은 말씀에 대한 성찰 보다는 감성에 치우친 측면이 많다. 피상적인 감성이 아닌 말씀의 묵상과 회개와 성결에의 결단이 동반한 감성을 추구해야 한다. 이것은 거룩한 정서(holy affection)이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지적은 오늘날에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주목할 부흥이 있을 때마다, 참된 종교와 거짓 정서를 구별할 수 없도록, 또 구원에 합당한 정서와 체험들을, 겉으로 현란한 빛을 내뿜는 거짓된 정서와 체험들과 도무지 구분하기 힘들도록 하는 교란이 나타난다. 이 양자를 옳게 구분하는 법을 잘 배우기까지는 언제나 교회가 그런 양상으로 빠져들기 쉽다.”

 

2) 열린예배: 구도자 예배를 예전적으로 잘 수용할 필요가 있다.

열린예배는 구도자의 예배(seeker's service)로서 전도의 성격을 자는 예배이다. 미국의 윌로크릭교회와 새들백교회가 이러한 예배시도를 통하여 많은 새 신자를 얻고 있다. 이들 교회는 구도자들에게 제일 중요한 시간대를 준다. 구도자에게 심지어는 아직도 신앙의 회의에 있는 자들에게 선교적으로 접근하는 예배로서 효과가 있다. 그러나 열린 예배는 진정한 예배라고 할 수 없다. 이것은 기업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자 성향에 맞추는 생산방식처럼 교회가 예배를 종교소비자에 따른 단지 오락(entertainment)으로 전락시킨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대학 채플도 하나의 열린 전도회의 형태를 가진다. 불신자들이 과반수 또는 70%이상이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전도회의 성격을 갖는 것이지 이들이 예배를 드린다고 말할 수 없다. 열린 예배란 전도를 위한 집회행사(evangelistic event)로 보는 것이 무난하다.

 

2007년 8월 한국을 방문한 여성 영성신학자, 캐나다 리젠트 신학교 마르바 던(Marva Dawn)교수는 하나님께 초점을 맞춘 예배,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게 만드는 영성 등을 시종일관 강조하며, “진정한 예배, 영성의 회복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고 역설했다. 그녀는 “예배는 무엇보다 하나님이 중심이 돼야 한다”며 “예배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 사람을 섬기게 될 때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면에서 그녀는 열린예배, 구도자예배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데, 예배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또 불신자들을 위한 예배는 초점 자체가 잘못돼 있습니다. 불신자들이 강조되고 그들이 중심이 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는 자칫하면 교인들 전체가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닮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미국교회가 다양한 문화를 잘 수용하지만, 문화의 흐름에 저항하는 점에 있어서는 매우 약하다”며 “때로는 예배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사라지는 경우가 있다”고 지적했다.

 

3) 신세대와 구세대의 통합예배

포스트모던 시대에서 젊은이들은 전통적 스타일을 파기하고 자기 세대문화와 친숙한 대중음악을 가미한 예배음악을 원하고 저들의 도전에 대한 해답을 주는 파격적 설교를 원하고 있다. 이러한 신세대의 형식을 파기하는 예배는 자칫 무질서의 예배로 실추할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이에 반해서 중장년층들은 오래된 찬송을 좋아하거나 역사적으로 지속되어 왔던 전통에 뿌리 내린 예배의식을 원한다. 그러나 구세대가 추구하는 전통에 따르는 예배가 영적이고 완전한 예배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리하여 신앙의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 각기 세대의 특성을 살리는 예배형식의 도입이 필요하다. 그러나 세대들이 분리해드리는 예배형식은 신구세대간의 신앙적 의사소통을 차단하는 위험성이 있다. 그러므로 풀러신학교 총장 마우(Richard Mouw)가 제안하는 것 같이 신구세대의 통합예배, 말하자면, “신구세대 사이의 영적 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는 예배가 필요하다,” 서울교회(이종윤 목사 담임)의 경우 1부 예배는 세대 간 통합예배로서 가족예배를 드리고 있다. 통합예배는 “교회 안의 다양한 계층 사람들을 한 예배 형식 안에서 모두 원활한 소통이 이루어지도록 하여” “이를 통해서 현대문화에만 관심을 갖거나 과거 전통에만 집착하는 양(兩) 극단(極端)을 극복할 수 있다.” 세대의 간의 분리 보다는 세대들이 같이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과거의 유물을 잘 간직하고 현재의 문화적인 당면과제에 진지하게 대응할 수 있다. 그러나 예배형식이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각 시대마다 달라지는 의상과 같은 것이다. 예배에서 참여자를 변화시키고 영적으로 하나 되도록 하는 자는 성령이시다. 신구세대간의 통합예배 형식의 진정한 의미는 신학적으로 성령론적 이해 안에서 비로소 온전히 이루어진다.

8. 예전(liturgy)이 있는 예배

우리는 이러한 다양한 문화적 세팅을 아무렇게나 혼합하지 않고 예전신학 안에서 잘 배열시켜야 한다. 한국교회 예배는 사경회 내지 부흥회 집회식의 예배가 그대로 정착되어 평신도가 기도하고 예전의 부분이 적으며, 예배인도자의 인도에 많이 의존하고 특히 설교가 예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점이 그렇다. 그래서 예전(禮典)에 의존하지 않는 점이 그것이다.

 

아무렇게나 즉흥적으로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예전신학을 가지고 성경적 법도에 맞추어 예배의 내용과 순서를 정립하는 예전신학이 요청된다. 예배란 언약갱신의 축제(Fest der Bundeserneuerung)로서 주일 공예배는 일상생활의 삶의 예배와 연결되어야 한다(Ernst Lange). 예전의 기본적 틀은 1부, 하나님의 영광찬양 (죄 고백과 용서의 선언, absolutio), 2부, 하나님의 언약(말씀의 선포를 통한 하나님과의 교제, promissio), 3부, 세상으로 파송(헌신의 결단과 파송의 의미, missio)로 되어야 한다.

 

한국교회는 일 년에 성찬식을 두 차례씩 갖는 것이 관례가 되고 있다. 더 자주 드리는 교회는 네 계절에 한번 드리는 교회도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예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있으며, 종교개혁의 예전연구가 진행되면서 성찬에 대한 새로운 인식도 깊어져가고 있다. 칼빈이 말하는 바 같이 성찬은 자주 드리는 것이 좋다. 성찬은 은혜의 방편이기 때문이다. 성만찬을 통해서 주님과의 신비로운 연합과 교제를 체험하게 된다. 성만찬을 통해서 예배가 그리스도중심이 되고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축제의 예배가 되기 때문이다. 말씀예배와 성찬은 항상 연결되어야 한다. 올해 16년째 개최되고 있는 숭실대 전국목회자 세미나 개회예배의 성찬식에는 1982년 제정된 리마예식서를 사용하고 있다.

 

개혁전통은 단순한 예배형식을 가지는 것이기 하지만 예배서와 기도서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었다. 영국의 청교도들이나 독일 경건주의자들도 자유로운 예배를 드렸으나 이들은 역사적으로 이들이 태어나고 자라온 국가교회나 국민교회의 예전을 배경으로 하여 그 가운데서 자유로운 의식을 드린 것이다. 역사가 이제 1백 20년밖에 되지 않는 한국교회에서는 예배의 모범이 되는 예전(문서화된 예배순서, 기도문, 각종 절기 의식서)을 갖는 것이 요청된다.

 

 

맺음말

 

포스트모던 문화 속에서도 찬양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의 본질은 여전히 변치 않는다.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하여 지음을 받은 인간의 신학적 본질을 확인할 때 비로소 포스트모던 문화 속에서 하나님을 어떻게 예배해야할 것인가 문화적이고 예전적 성찰이 그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 속에서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청각만이 아니라 시청각 등 오관을 사용하여 보다 역동적으로 경배해야 할 것이다. 명상보다는 축제적인 예배, 명제적 설교보다는 이야기적 설교, 삶의 헌신으로 드리는 예배, 인터넷 문화를 규모 있게 활용하는 예배, 열린 예배와 경배와 찬양을 예전신학의 테두리 안에서 활용하는 예배가 요청된다. 그리고 성만찬을 자주 드리고 각종 민속절기(구정, 추석, 삼일절, 해방일, 6.25전쟁일 등)에 따른 예전을 실천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요청된다.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개혁신학적 예배의 궁극적 차원이다.

 

종교개혁자들의 예전의 개혁은 단순히 교회의 예배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전 삶의 영역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복종하고 삶을 헌신하는 문화적 소명으로 나아갔다. 삶 자체가 무엇보다도 중요시된 오늘날 포스트모던 시대에 우리는 우리 삶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해야 한다. 하나님께 우리의 삶을 예배로 드리는 것이 바로 포스트모던 시대의 바른 예배이다. 그것은 바로 회개와 찬양, 감사, 헌신과 결단이 있는 예배이다. 지성과 감성이 균형 잡힌 전 인격적 예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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