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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시편과예배-하나님을 기억함에 대하여의 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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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소라 박사의 “시편과 예배: 하나님을 기억함에 대하여”의 논평

 

최 만 수(계약신학대학원)

 

 

한국 교회에서 예배와 찬송(찬양)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가는 시점에 시편의 예배에서의 하나님을 기억함의 중요성을 다시금 환기시켜주는 시기적절하고 좋은 논문이다.

 

강 박사는 시편이 예배의 한 부분으로 사용된 것을 지적함으로 시작을 한다. 쉽지만은 않은 시편의 예배에서의 접목을 인정하면서도, 시편의 “삶의 정황”이 오늘날 독자(“우리”)의 “삶의 정황” 즉 고난, 고통 등과의 문제에서 아파하는 정황과 같음을 인식하고 있다. 그렇기에 저자는 시편의 내용 중에 시편 기자의 “하나님을 기억함”이 독자들의 예배와 삶에서 재조명이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강 박사는 “하나님을 예배함”은 예배자가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또한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기억하는 행위가 포함되어야 함을 잘 지적해 주고 있다. 먼저 구약에서 에배와 관련되어 사용된 히브리 단어들 - ???(엎드리다) ???(섬기다) ???(두려워하다) ???(구하다) -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에 대한 함축적으로 상용됨을 상기시킨다. 또한 이와 같은 예배에 관한 단어들이 하나님을 “기억하다(???)”라는 동사와 함께 사용되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 준다(p2).

 

더욱이 강소라 박사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곧 “하나님을 기억하는 행위”는 시편기자의 과거, 현재, 미래 모두 곧 시인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잘 논증하여 주고 있다. 시인은 자신의 과거에는 창조자와 왕으로서 하나님과 구원자이신 하나님으로 계셨던 하나님을 기억 한다. 현재에는 찬양과 감사, 기도와 간구, 그리고 확신과 소망을 통한 시인의 하나님을 기억한다. 그리고 시인은 자신의 미래에 “역동적”으로 나타날 자신의 (삶의)변화와 공동체와 이웃을 향한 (간증적) 선포까지 하나님을 기억하는 행위/예배로 이해한다.

 

위와 같이, 본 본문이 가지는 멋진 논문적인 내용와 목회적인 적용의 가능성에서 높이 평가를 할 수 있지만, 좀 더 발전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다음 몇 가지를 지적해 보고자 한다.

 

1. 강 박사는 예배에서 “하나님을 기억함”이 시인/독자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전체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결론에서 “하나님과 자신, 자신과 자신, 그리고 자신과 이웃의 의사소통을 위하여” 시편의 적용이 하나님의 기억함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시편의 예배와의 관련 속에서 하나님을 기억함이 과연 의사소통의 초점이 주어지는가? 예배는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으로 정의되어져야 하지 않을까?

 

2. 사/소소한 문제이지만, 강박사는 Brueggemann의 성경 이해에서 “상상력”의 강조를 언급하고 있다(3p). 그때에 “이스라엘은 자유로이 상상력을 동원하여 하나님을 다양한 비유적 인물(예: 왕, 용사, 아버지, 재판장, 목자 등)로 묘사했다.”고 하며 이때 고안된(?) 하나님의 이미지는 시편에서 더 다양하고 풍부하게 나타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시편의 “청중은 이런 다양한 이미지를 통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더 생생하고 깊게 새길 수 있었을 것이다.”고 자신의 상상력을 보여준다. 물론 이와 같은 해석적인 작업은 좋은 결론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때 과연 성경의 하나님에 대한 묘사 -시편에서 더욱 -가 이스라엘이라는 원 청중들에게는 “자유로이 상상력”을 동원하여 만들어진 산물인가? 하는 질문을 하게 만들고 있다. 만약 그렇다면 진정한 청중(독자)는 오늘날 자신의 삶의 정황 속에서 시편기자의 상상적 이미지에서 깊은 감동을 받고 그 상상력의 산물을 즐거워하는 것인가?

 

3. 사용된 표현(들)에서 명확히 하여 주었으면 하는 점들이 있다.

 

3.1 “창조 안에 감추어진 창조자 하나님을 알린다.”에서 과연 하나님이 창조 안에 감추어져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정말 시인은 하나님이 창조 안에 감추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를 알려주면 좋겠다.

 

3.2 “자기 피조물과 백성”(104: 14-16)이란 표현은 사람을 하나님의 피조물에서 구별하는 것같은 인상을 줄 수 있는 표현을 사용한다. 하지만 본문에서는 피조물과 그의 백성으로 구별하지는 않는다고 생각이 된다.

 

3.3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p.4와 p.6)이 어떤 의미로 사용이 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한 상태로 남아있다. 여호와의 하나님 되심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하나님으로 임재하심이나 역사하심 등을 의미하는 지를 부가 설명하지 않고 있다. 좀 더 부가하자면, 저자는 습관적으로 하나님이란 명칭(이름)을 사용한다. 전체적으로 성경 구절을 인용함에서는 여호와라는 명칭이 나타나지만, 일반적으로 그 명칭의 특성상 중요한 역할을 고려하지 않고 “하나님”으로만 표기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은 다른 곳곳에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행사를 기억하는 것”으로 단순화 시켜서 표기를 한다. 이는 글을 읽는 내내 “여호와가 하나님이 되심인가?” 라는 질문을 가지게 한다.

 

논평을 마치면서 강소라 박사의 논문은 시편과 예배에 대한 생각을 다시금 생각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에서 환영과 감사를 표하면서, 또한 논자의 기대처럼 - “우리의 예배도 이처럼 (하나님을 기억함에 대한) 확신과 소망을 품고 끝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 한국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가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좀 더 역동적으로 변하길 기대해 본다.

 

 

논평

 

강소라, “시편과 예배: 하나님을 기억함에 관하여,”에 대한 논찬

 

 

서 명 수(협성대, 구약학)

 

 

<내용요약>

강소라 박사는 본 소고(小考)에서 시편의 예배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를 전개하고 있는데, 특별히 ‘하나님을 기억함’을 핵심 주제로 제시하고 있다. 먼저 시편의 어휘들 중 예배와 관련된 용어들을 제시한 후 시편에서의 예배의 의미는 예배자가 하나님은 누구시며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기억하는 행위로 파악하고, 예배에서 기억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기억의 주된 내용으로는 하나님 자체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제시하고 있다.

 

이어 시간의 삼분법에 따라 과거, 현재, 미래 일을 ‘하나님을 기억함’과 연결시키고 있다. 과거에 대한 기억으로 창조자와 왕이신 하나님,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능력과 활동을 제시하고 있다. 구원자로서의 하나님은 공동체뿐만 아니라 개인의 삶에서도 나타난다.

 

현재와 관련해서는 찬양과 감사를 제시하고, 찬양과 감사의 이유에 대해 살피고 있으며,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억하는 것에서 기도와 간구의 근거를 찾고 있다. 이 부분에서는 주로 시편 탄식시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탄식시에서 감사와 찬양의 요소가 등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응답에 대한 확신과 소망 때문임을 말하고 있다.

 

미래와 관련하여서는 하나님께서 과거에 행하신 일을 기억하고, 현재 상황 속에서 하나님 능력과 도우심을 확신하고 소망할 때 미래적 사건으로 개인의 내적 변화가 일어나고 공동체와 이웃에게 하나님의 능력과 도우심을 선포하고 전파해야 할 의무가 있음을, 그런 의지가 표명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결론으로 부르그만(Brueggemann)의 용어를 차용하여 우리의 삶이 정위(orientation)-상실, 혼미(disorienation)-재정위(reorientation)로 움직여야 하며, 시편에 제시된 것처럼 현대의 예배에서 이와 같은 변화가 일어나기를 바라는 기대로 끝맺고 있다.

 

<평가>

 

시편의 예배적 측면에 관심을 기울이고, 예배의 핵심내용으로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 그리고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지평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역사(役事)에 대한 “기억”<자카르>에 초점을 맞춘 것은 매우 타당한 접근으로 평가된다.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적 신앙고백의 출발점은 출애굽사건인데 출애굽사건도 사실은 하나님의 기억으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이 그들의 탄식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시고<자카르>, 이스라엘 자손의 종살이를 보시고, 그들의 처지를 생각하셨다.” (출 2:25)

 

이점에 있어서 강소라 박사가 하나님을 기억함에 있어 “덧붙여 사람이 하나님을 기억함에 앞서 상기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먼저 사람을 생각하셨으며(창 8:1; 30:22; 출 32:13; 시 8:4; 115:12; 느 13:22), 사람과 맺은 언약(창 9:15; 출 6:5; 시 105:8, 42; 106:45; 111:5)과 더불어 사람의 연약함(시 78:39; 103:14; 136:23)을 기억하셨다는 사실이다.”고 한 것은 매우 적절한 지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사람이 예배할 때 하나님을 기억해야 하는 것은 그 이전에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기억하고 계시다는 것을 전제한다. 다시 말해, 예배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억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를 기억한다는 것은 우리의 사정과 형편, 내외적 상황, 그리고 기도와 간구를 기억하고 계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로 그 하나님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듯 사람의 기억과 하나님의 기억이 상호촉발요인으로 작용할 때 시편이 말하고 있는 예배에서의 하나님에 대한 기억의 의미가 분명이 이해될 수 있는데, 강소라 박사는 이점을 적시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강소라 박사는 본 발표를 통해 예배에서의 기억의 중요성을 일깨워주고 있으며, 우리의 삶에서 망각해야할 것과 망각하지 말아야할 것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보게 한다.

 

<논문의 완성도를 높이고 학문적 논의의 확장을 위해 몇 가지 질문과 제안>

 

(1) 시편연구에 있어서 시편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를 ‘제의(cult)’에 두고 본격적으로 연구한 기념비적인 연구로는 Sigmund Mowinckel, The Psalms in Israel's Worship, vol. I-II (Oxford: Basil Blackwell, 1962)를 들 수 있는데 아쉽게도 강소라 박사의 발표에서는 모빙켈과의 대화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강소리 박사가 주장하고 있듯이 시편의 삶의 자리는 분명 제의/예배이다. 그런데 고대 이스라엘의 어떤 제의적/예배적 정황에서 해당 시편들이 활용되었는지에 대한 차분한 논의가 없어 아쉬움으로 남는다.

(2) “III. 하나님을 기억함과 과거”에서 언급하고 있는 시편들은 대체로 시편의 양식적 분류에서 찬양시(The Hymn of Praise)에 속한다. 찬양시의 주요 내용들로는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 역사의 지평위에서 펼치신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役事)/능력(Magnalia Dei)을 찬양,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들이다. 강소라 박사 역시 대체로 이러한 내용들을 취급하고 있는데 보다 정교한 분류와 상세한 해석이 필요해 보인다. 예컨대, 찬양시에서 주된 부분(main section), 찬양시의 두 주요 양식(the enumerative & the descriptive style), 분위기(mood), 찬양시에서의 간구(petition in the hymn), 구원과 예배/제의에서의 찬양시의 위치 등.

(3) “IV. 하나님을 기억함과 현재”에서 다루고 있는 시편들은 대체로 탄원시(Laments)에 속하는 시들이다. 탄원시는 개인 탄원시와 공동체 탄원시로 분류되는데, 둘로 분류하여 본문을 다루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리고 탄식의 상황에서 확신과 소망 그리고 서원으로 넘어가는 분위기전환의 근본 요인에 대해 보다 분명한 지적이 필요하다 하겠다. 이것은 앞서 간략히 언급한 ‘이유절’(k?-clause)과도 밀접히 관련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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