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일반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예배에 대한 논평

첨부 1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예배”에 대한 논평

 

 

김성규 교수(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송영목 박사의 논문은 요한 계시록에서 나타난 예배의 형태에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 매우 매혹적인 주제다. 우선 두 가지 면에서 본 논문의 가치가 인상적으로 느껴지는데, 비록 요한 계시록에서 예배의 특수한 상황을 다루지만 구약적 예배로부터 상징적 기원을 추적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리스도인들의 예배의 일반적 전통성과 규범성을 파헤치고 이를 토대로 예배의 올바른 예전적 모형을 제시하려 한다는 점이다.

 

우선 본 논문이 기여하고 있는 몇 가지는 간과되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계시록을 읽는 많은 독자들이 가지는 전제는 요한 계시록이 지나치게 많은 비일상적 용어들을 채용함에 따라 신비적이라는 느낌을 갖는 것이다. 그러나 본 논문은 이 같은 어려움이 요한 계시록의 예배적 측면을 고려할 때 상당부분 해소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러므로 저자는 요한 계시록 전체의 주제를 참 예배와 거짓 예배라는 흥미 있는 단순한 구조를 제시한다. 실제로 저자는 예배 주제가 요한 계시록의 구조를 결정하는 결정적 요소들임을 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요한 계시록에서 나타난 예배의 이 같은 인상적인 분석은 저자에게 한편으로 계시록에서 예배의 독특한 측면이 동시에 그 기원이 구약 제의와 성취라는 측면에서 이해를 촉구함으로써 예배에 대한 균형적인 시각을 갖도록 돕는다. 이것은 결국 예배 주제의 그 특수성을 생각할 때 오늘날의 현대 교회와 무관 할 수 없다. 저자는 현대 교회의 편의주의와 무속의 영향으로부터 자유하지 못한 잘못된 성향에 요한 계시록의 예배를 제시함으로써 예배의 바람직한 적용에 대하여도 충고를 잊지 않는다. 저자의 마지막 결론적 뼈 있는 한 마디는 누구나가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교회는 언약의 갱신으로서의 공적 예배를 삼위 하나님을 중심으로 질서 있는 예전적 요소에 담아서 행해야 한다. 유혹과 핍박이 있을 지라도 왕 같은 제사장이 된 성도는 우리 주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나라를 온 세상에 건설하도록 삶의 예배를 드려야 한다 (계 11:15).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예언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삶의 예배이다 (계 22:7, 18)”

그러나 본 논문의 참신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점이 뒤로 남는다.

1. 본 논문이 “요한 계시록 나타난 예배”를 다루고 있지만 서술 방식에 있어 역사적 형식을 선호함에 따라 예배의 성격과 특성을 규명하는데 세밀하지 못한 점이다. 이는 좀 더 주석적으로 접근하여 보충되었으면 한다. 가령 구약 제의와 성취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하게 제시되지 않아 혼란스럽다. 4-7페이지에 제시된 저자의 논지는 구약제의와 관련된 예배의 관계성과는 무관한 것으로 생각된다.

2. 서론에서 저자는 논문의 목적을 구약적 배경에서 예배를 추적하여 계시록의 예배의 의의를 생각하는 것으로 제시하고 있지만 과연 구약적 배경에서 예배의 형태는 무엇인지 제시되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3. 예배의 용어를 사용할 때 그리스도인들은 예전적 의식만을 생각했는지 고려해야 할 것이다. 구약과 신약의 예배에서 예배는 오히려 선지적 특성을 더 잘 보여주고 있지 않는가? 저자가 인용하는 구약적 예배의 이런저런 인상적 용어를 언급할 때조차도 구약의 제의적 측면보다는 선지적 측면의 구절들이 더욱 강조되고 있지 않는가? 실제로 요한 계시록에서도 예배의 선지적 용어인 회개가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지 않는가?

 

끝으로 본 논문을 통하여 계시록의 예배를 통한 성도의 지상적 종말론적 예배참여가 천상적 기쁨의 통로로서 제시된 것에 매우 만족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예배의 예전적 선지적 요소가 균형 있게 제시되었으면 하는 바램과 예배의 기독론적 성격이 좀 더 주석을 통하여 논지 속에 구현되기를 제안하면서 논평을 마친다.

 

논평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예배”에 관한 논찬

 

 

소 기 천(장신대 신약학)

 

 

계시록에 관한 연구는 한국에서 황무지와 같은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 논문은 계시록에 나타나 있는 예배를 연구함으로써, 우리가 어떻게 계시록을 읽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논문에 의하면 계시록이 단순한 편지, 예언, 권면, 묵시라는 장르를 넘어서 예배를 위해 기록되었으며 예배에서 읽혔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다. 우리는 이점을 감사하면서 먼저 이 논문의 논지를 요약하고, 그 후에 몇 가지 질문들을 던지고자 한다.

 

1. 요약

이 논문은 계시록의 예배에 관한 균형 잡힌 연구를 통해서 현대 예배에 어떤 의의를 주는지 살펴보고 있지만, 요한의 예배의 기원과 배경 혹은 초대 교회의 예배의 모습을 추적하지 않는다. 이 글은 다음의 절차로 전개되고 있다. (1) 계시록의 예배 주제와 구조, (2) 계시록에 나타난 구약 제의와 성취, (3) 로마 황제 숭배와 계시록의 예배, (4) 예배 공동체가 지상에서 드리는 천상의 예배, 마지막으로 (5) 현대 예배에의 적용. 이를 위해 특별히 계시록의 역사적 배경과 예배 관련 용어와 주제에 주목할 것이다.

 

이 논문의 방법론은 “계시록이 가지는 진한 구약 간본문성으로 인해 유대적 혹은 구약적 배경에서 예배가 연구되어 균형 잡힐 필요가 있다.”에 언급되어 있는 바와 같이 신약과 구약의 본문상호성(intertextuality))을 통한 계시록의 예배를 연구하고 있다. 좀 더 자세하게 그 방법론을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다음의 내용을 인해 해보자.

 

혹자는 계시록의 예전적 요소의 기원을 유대 묵시 문헌에 종종 등장하는 천사 숭배 (the angelic worship)와 황홀경적 환상 경험(ecstatic visionary experience)에서 찾는다 (참고. Nogueira, 2002:166). 하지만 계시록의 찬송들은 이런 외경의 묵시적인 찬송들보다는, 요한이 많이 의존하고 있는 간본문인 구약 선지서 중에서 겔1-10장, 40-48장 그리고 사 6장의 보좌의 모습과 천사들의 경배와 더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견해에 의하면, 우리는 계시록에 나타나 있는 예전적 요소 중에 찬송시들이 구약에 직접적으로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을 본문상호성의 원리로 연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점에서 이 논문은 계시록이 예전적인 측면에서 구약을 아주 많이 언급하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다음의 인용을 보면, 우리는 계시록이 신약에서 좀 더 구약에 의존하고 있는 예전적인 책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신약성경 중에서 요한계시록은 아마도 히브리서를 제외하면 가장 예전적인 (liturgical) 책일 것이다. 이 사실은 계시록이 종종 구약의 성전을 언급하고(11:1, 2, 19; 14:15, 17; 15:5; 16:17), 언약궤(11:19), 제단(6:9), 촛대(1:12, 20), 향(5:8; 18:13), 연기(18:9, 18), 나팔(8:2), 대접(16:1) 등을 언급하기 때문이다. 그 외에 ‘어린 양'(5:6, 7, 8), ‘거문고'(5:8; 14:4; 15:2-3), 그리고 ‘세마포'(15:6; 19:8, 14)와 같은 용어는 문맥에 따라서 예전적인 함의를 담고 있는지 결정해야 한다.

 

이 논문은 이와 관련하여 계시록이 이러한 구약적 제의 용어와 사상을 특별히 그리스도의 십자가-부활-승천-재림 중심으로 이해하여 그리스도의 현재적 통치를 강조한다고 간주하면서 (1) 계1:4-5절의 삼위 하나님의 순서, (2) ‘주의 날' (1:10), (3) ‘열린 하늘 문'(4:1), (4) 계시록에 등장하는 여러 찬송들, (5) 새 예루살렘에게 장막을 치심(21:3), (6) 구약의 돌 성전을 대체하신 새 예루살렘 성의 새 성전이신 그리스도(21:22-24), 그리고 (7)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22:20) 등의 예전적 구절들을 연구한다.

 

이러한 연구를 통하여 이 논문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계시록에 나타나 있는 신령과 진정의 예배이다. 이 논문은 이 점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이러한 신령과 진정의 예배는 교회에게는 현재적인 구원을 가져다주며, 교회의 대적에게는 현재적인 심판이 임하게 한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 계4-5장의 경우 그 구약적 배경에는 단 7장과 사 6장 그리고 겔1-2장이 혼합되어 있는데, 모두 심판을 통한 하나님의 우주적인 통치와 구원이라는 환상의 배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보라. Beale, 1999: 368-69). 모든 시대의 공 예배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현재적 구원과 복을 경험하는 시간인 동시에 복음의 대적에게는 심판을 초래케 하는 사건이다.

 

이러한 논의는 결과적으로 계시록에 나타난 예배에 비추어 본 지상 예배의 바람직한 모습을 유추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이점에서 이 논문은 계시록이 교회가 고난 가운데서라도 과연 하나님과 사단(과 그의 추종자) 중에서 누구를 예배해야 할지를 분명히 계시한다고 확신하면서, 계시록의 천상의 예배의 모습을 어떻게 우리의 지상의 예배에 적용하고 있다.

 

2. 질문들

이 논문은 계시록에 예배 용어가 전체에 걸쳐 산재해 있으며, 특별히 천상의 예배는 계시록의 구조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구약의 영향 아래 있는 특징을 본문상호성의 방법론에 입각하여 연구한 아주 중요한 논문이다. 이 논문은 이러한 예배가 천상의 예배에 해당하는 것으로 오늘 지상의 예배가 추구해야할 올바른 모습이라는 사실을 우리 모두에게 제안하였다.

 

무슨 논문이든지 그것을 읽는 독자들의 마음속에 몇 가지 질문들이 떠오를 수 있는데, 우리는 다음의 긴 내용을 인용하면서, 먼저 계시록의 기록 연대에 관한 질문을 제기하고자 한다.

 

요한계시록의 이른 기록 연대로 인해 네로의 황제 숭배를 살펴보는 것은 중요하다. 네로의 동전 중에는 그가 ‘세상의 새로운 선한 영'으로서 알렉산드리아의 신과 동등시 되었다. 이집트에서는 ‘세상의 구주요 은혜 베푸는 자'로 불리어졌으며, 로마제국의 동쪽 속주의 동전에서는 네로를 ‘신'으로 칭하였다, AD65년부터는 사후 신격화된 황제들에게만 허용되었던 빛나는 관을 쓴 네로 황제의 모습이 등장했다. 네로의 과대망상증이 극에 달하자 그의 궁전에 100피트나 되는 자신의 상을 세웠다. 황제의 경우 주로 흉상이, 신의 경우 주로 전신상이 제작되었다. 네로는 AD59년 상류계급의 군인들로 구성된 Augustiani를 두어 그가 극장에 나타날 때 박수를 보내도록 했는데, 이러한 황제에 대한 환호에 사용된 단어는 신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참고. Cukrowski, 2003: 58). 디오 카시우스에 의하면 네로가 그리스를 정복하고 돌아 왔을 때 군중은 “네로. 우리의 아폴로 신이여. 태초로부터 계신 유일하신 분, 신의 승리여. 당신의 말을 듣는 이들은 복이 있으라”고 외쳤다. 여기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네로는 신으로 불리어지고 숭배를 받고 있다는 점이다.

 

이상의 내용은 우선 계시록의 기록 연대가 네로 황제 시기이며, 그 때에 황제숭배 강요에 의한 계시록의 수신자들은 박해로 인해 거짓 예배 대상자를 숭배할 위험에 처해 있었다고 이 논문은 논증하였다. 이러한 지적은 이 논문이 유일하게 계시록의 당시 사회사에 관한 분석을 토대로 그 기록 연대를 제안하고 구체적인 근거이다. 그러나 과연 계시록이 네로 황제 때 기록된 것인지 의문이 제기된다.

 

어떤 학자들은 주후68년 6월 8일의 네로의 죽음 이후에 로마의 황제로 재임하였던 베스파시안(Vespasian) 통치시기로 보는 견해도 있다. 베스파니안 황제는 네로의 죽음 이듬해인 69년 7월 1일부터 79년까지 통치하였다. 이 주장에 따르면, 요한계시록 17장 9-11절에서 여섯 번째 왕을 베스파시안으로 간주하고, “전에 있다가 지금은 없는 여덟 번째 왕”을 네로로 간주하고, “아직 나타나지 않은 왕”을 도미티안으로 간주한다. 이렇게 계산을 하는 것은 아우구스투스(Augustus)로부터 갈라(Galla)까지 일곱 왕 중에서 가운데 세 명의 왕을 뺀 것으로 베스파시안 황제를 여섯 번째 왕으로 보는데서 유래한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에 묘사된 박해의 상황이 네로 치하에 그리스도인들이 받았던 박해보다 훨씬 더 강렬하였다는 점을 미루어 볼 때, 도미티안(Domitian) 통치 말기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왜냐하면, 초기의 전승 가운데, 이레네우스와 빅토리누스(Victorinus)는 “요한은 도미티안 황제 말기에 묵시를 보았다”라고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미티안은 주후81-96년에 통치하였는데, 그의 통치 말기를 감안할 때, 거의 1세기 말을 요한계시록의 기록 년대로 간주할 수 있다. 몇 가지 점에서 도미티안 황제로 보는 것이 유력하다. 첫째, 저자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계1:1 = 마24:6; 눅21:6, 계2:7 = 마11:15; 눅8:8, 계6:2-7 = 눅 21:8-12).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의 기록 년대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보다 더 후대로 간주될 수 있다. 둘째, 2장과 3장에 나타난 소아시아 일곱 교회의 형편은 네로 이후의 상황을 보여준다. 즉 서머나 교회는 실제로 주후60-64년에 창설되었고, 에베소의 니골라 당(2:6)은 바울 이후에 생긴 것이다. 셋째, 소아시아 교회에 보내는 서한은 그리스도교가 당대에 상당히 널리 퍼져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이것은 주후 70년 이전의 경우에는 가능하지 않은 현상이다. “차지도 덥지도 않은” 교회가 있었다는 것은 이미 이들 교회들이 상당히 오랜 역사를 경과하였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넷째, 저자는 이 세상에 도래할 큰 시련의 때를 예견하고 있는데, 13장에서는 박해의 성격을 강화하고 있다. 자기 자신을 신성시하는 로마의 정치권력은 그리스도교와의 투쟁을 야기하는데, 이미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한 박해가 다시 시작될 것이고(6:9-11; 17:6), 더 악화될 것이다. 이때에 아시아 지역에 있는 교회는 소멸되고 말 것이다. 이러한 박해는 도미티안 시대의 박해 상황과 부합한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도미티안 황제 때에 일어난 대박해와 배교의 유혹을 당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는 위로와 격려의 글이란 성격을 지니고 있다. 저자는 요한계시록을 그리스도인들이 박해의 상황 속에서 어떻게 희망의 성취를 볼 수 있을 것인지에 관해서 관심을 갖도록 이해시키려는 목적으로 기록되었다.

 

또 하나는 이 논문이 “단수 명사로서 ‘예전'(liturgy. 헬라어 leitourgi,a, 빌 2:30)은 예배 행위를 가리키며 좀 더 특정적으로는 성찬식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더 나아가서 예전은 ‘예배 양식'으로서 신자들이 공적 모임에서 행하는 것으로 이해하며 ‘예배'는 예전과는 다소 다른 개인과 가정 혹은 특정 집단이 행하는 기도를 포함한 경건 생활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여기서 모든 한국교회에서 동일하게 이해하고 있는 예전을 의미하는 헬라어 leitourgi,a는 원래 봉사나 섬김을 뜻하는 것이 아닌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헬라어에서 원래 예배를 뜻하는 단어는 latrei,a이다.

 

이 논문은 한국에서 계시록에 관한 논문이 아주 드문 것을 고려할 때, 아주 의미 있는 연구이다. 특히 계시록을 예배와 예전이라는 특별한 관점에서 연구한 것은 계시록의 원래 정황이 예배에서 읽혀진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 모두에게 일깨워주는 아주 중요한 논문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귀한 논문을 연구하신 발표자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