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일반 칼빈의 성례 신학속에 나타난 현실개념에 대한 연구

첨부 1


칼빈의 성례 신학속에 나타난 현실개념에 대한 연구

 

황 덕 형*

 

 

I. 성례전 신학 갱신의 요청: 현대사회의 질문과 기독교의 정체성이 만나는 자리

 

오늘의 세계는 매우 다양한 요구 앞에 서 있다. 그리고 그 대다수의 요청은 과거의 전통과는 다른 새로운 관점들과 연관되어 있다. 교회도 이러한 변화에 노출되어 있으며 새로운 담론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새로운 담론의 필요성은 변화된 세계의 현실을 반영하여야 한다는 사실의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 변화의 바람을 받아들이는 것이 현대신학이 세속사회와 의미 있는 공적대를 하기위한 기본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좀 더 세밀하게 연구해 보자면 교회가 가져야 할 이러한 공적담론의 필요성은 무엇보다도 기독교의 복음이 가지는 보편성에 기초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즉 기독교의 복음은 모든 현실을 포괄하는 보편성을 갖고 있다. 교회가 만나는 사회는 세속적 다양성의 가치를 확고하게 믿고 있으며, 미래 지향적인 개방성을 공적 담론의 기반으로 여기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전통을 고수하는 것 보다는 현실과 그들이 보는 미래의 전망에 더 많은 가치를 두고 있는 것이다. 신학에서도 이러한 현상은 두드러진다. 오늘날 신학의 영역에서 주장되는 다양한 주장들의 내용을 살펴보면 전통보다는 보다 새로운 세계에 자신을 맞추려는 노력, 그리고 좀 더 세심하게 표현하자면 포스트모던적 지향점을 가지고 논의가 진행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 신학자들이 만나는 개방성에 대한 요구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개방성은 다음의 조건을 기초로 해서 이해할 수 있다: 정신이 아니라 몸의 중요성, 초월적 계시보다 주변의 상황과 현실을 분석함으로써 얻게 되는 진리의 실증성과 동시에 귀납적이며 해석학적인 이해, 한 특별한 진리의 계시적 관점에 대한 헌신이 아니라 다양한 의견을 인정하고 그 사이에서 대화와 타협의 가능성을 추구하는 것 등이다. 이렇게 상술된 구체적인 조건들을 배경으로 볼 때 그 개방성은 양가(兩價)적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먼저 이러한 기류에 편승하여 교회 내 일단의 그룹은 기독교의 본질을 망각한 채 교회의 핵심적 요소를 다른 종교나 초월적 철학에서 발견할 수 있는 유사한 내용과 혼동함으로써 중대한 위기를 자초하고 있다. 변화된 패러다임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제시하는 일은 궁극적으로 복음적 신학의 작업일수 밖에는 없다. 하지만 이 변화가 기독교적 자기 정체성을 위협한다면 그것은 심각하게 고려하여 비판적으로 검토해 보아야 한다. 이 일단의 기독교안의 비기독교적 그룹들이 제시하는 미래와 그들의 현실이해에 맞서서 보다 더 적극적으로 예수께서 보여주신 미래의 희망을 제시해야만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오늘날의 우리의 처지에 대한 철저한 반성을 함으로써 예수께서 보여주신 그분의 삶이 우리의 진리인식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런가하면 동시에 이 거센 개방성의 요구는 기독교 자체의 새로운 정체성 확립을 촉구하면서 기독교의 자기 정체성의 재발견의 문제로 발전하였다. 개방에 대한 욕구들이 제시한 문제들은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지 간에 주어진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핵심적 조건으로서 기독교의 현실을 바르게 이해하고 이를 선명하게 세우는 것에 있음을 시인한 셈이다. 기독교의 본질을 파악하거나 기독교의 현실을 성서로부터 선명하게 다시 확인하는 것이 어떻게 현실의 문제제기에 대하여 답변이 될 수 있는가? 혹시 우리는 이 시대가 요청한 본래의 문제를 회피하여 자기 폐쇄성 안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아닌가? 분명하게 말해야 할 것은 이 와중에 다시 새롭게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우리의 노력은 일반적인 우려와는 달리 우리의 고유한 위치만을 확인하려는 나르시적인 심리상태를 벗어나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이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는 과제를 통하여 우리는 보다 보편적인 진리에 다가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즉, 우리의 과제, 예수 그리스도의 현실을 이해하려는 그 신학적 작업은 포스트 모던적 태도에서 비롯된 요구보다 더 포괄적인 지평을 가지고 있다는 확신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의 현실은 오늘 날 무엇이고 어디에서 파악 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사실 교회의 존재의미에 대한 질문일 수 있다. 오늘날 기독교는 한 기독교도라는 개별자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공동체라는 더 포괄적인 사회적 공동체의 현상에서 찾을 수 있다. 기독교는 먼저 우리를 자신의 동반자로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거하여 존재하는 공동체로서 그 안에서 하나님과의 공동체적 계약아래 있는 존재로서 특징 지워 지는 것이다. 개별자도 중요하지만 그 개별적 존재는 부르심의 공동체성에서 자신의 본질을 찾아야 한다. 그가 존재하게 된 그 약속의 부르심은 개개인의 단독적인 것보다는 더 먼저 세상과 함께 하시기로 한 하나님의 원 결단에 의거한 인간 공동체의 수립에 의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현실에 대한 질문과 교회에 대한 질문이 인간의 운명과는 상관이 없는 특정한 집단의 세계관에 대한 단순히 객관적이며 역사적인 관심에서 자라난 것 일 수 없으며 오히려 우리 인간 존재 전체와 우주적 존재 전체에 미치는 결정적 사건으로서 근본 존재론적 지평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로 작정하신 가운데 일어나는 그 역동적 공동체성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으며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교회는 예배라는 독특한 행위에서 존재하며 그 행위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게 되는 일종의 제사공동체로서 역사적이며 동시에 초-역사적 공동체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인간 역사 안으로의 돌입이라는 초-역사적 돌발사건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초-시간적 동적-존재이면서 동시에 인간 역사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시간 내적 공동체인 것이다. 이 공동체의 존재는 예배가운데 찾을 수 있으며 그 예배의 중심에는 성령이 주장하시는 말씀선포와 더불어 성례전이 존재한다. 우리 개신교회들이 말씀의 성사를 강조하였지만 이와 더불어 성례전 역시 보이는 말씀으로써 하나님을 섬기는 교회의 존재됨의 근본-사건으로서의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특히 성례전은 그 예전의 성격상 역사에서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이 이 세상의 다른 사물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활동을 표현하시는 독특한 세계내적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말씀선포와 달리 성례전은 더 철저하게 이 세계 내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내재적 공동체성을 보여주는 사건인 것이다. 성례전이 이 세계의 다른 사물들을 하나님의 존재를 보여주는 사건의 재료로서 이용한다는 점에서 교회만이 아니라 이 세계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구원의지에 의하여 관통된 하나님과 인간의 동시적 세계라는 복음적 종말의 궁극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성례전 신학을 통하여 드러나는 하나님과 인간의 동시성과 공속성은 칼빈에게는 성령론적 통합의 관점에서 이해된다. 성례전의 동시성과 공속성은 그리스 철학의 존재론적 이해와 혼동을 일으킬 수 있으나 이는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성례전 신학의 놀라움은 하나님과 인간의 동시성과 공속성이 차이와 통시적 사건으로 유지되고 있으며 살아있는 하나님의 능력가운데 현실로 이루어진 눈앞에 이루어진 “역설적인 것의 통합(coincidentia oppositorum)”임을 스스로 보여주는데에 있다. 이 성례전적 현실은 다른 그 어떤 이상적 존재들의 존재양태로서 얻어지는 관념적 고찰이 아니라 실제적인 구체성가운데 이해되어야 하는 현실적 범주를 요청하는 것이다. 역설적 통합의 현실을 전통적 그리스철학의 존재론과는 전혀 색다른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는 새로운 범주, 성령의 현실을 즉시 할 수 있도록 만드는 새로운 언어는 성례전 신학자체가 요청하는 사항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절대적인 차이를 극복하고 동시적 사건으로 여기 우리에게 항상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성례전안의 존재성은 하나님의 타자성의 세계로 초대하는 신학적 언어사건을 요청한다. 이는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세계가 그 실체이며 동시에 그 실체를 담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임을 보여주는 화행론적(illocutionary) 성령사건인 것이다. 성령의 그 참된 역사를 이 타자론적 언어사건으로 신학화함으로써 성례전은 기독교적 현실이해의 가장 중요한 상징 중 하나가 될 수 있었으며 복음의 진실과 함께 중대한 전통의 한 축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던 것이다. 이 점에서 성령론적인 틀 안에서 성례의 독특성을 이해하고자 한 칼빈의 공헌이 분명해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기독교의 자아 정체성을 밝히고 그것으로부터 현대의 도전들을 맞이하려 할 때 종교개혁자들을 통하여 주어진 예전(禮典)안에 있는 현실이해를 분석해야 하며 이는 성례전 신학의 재발견을 통하여 성취될 것이라고 기대해도 좋다. 카톨릭신학에 대하여 목숨을 내 걸고 함께 싸웠던 그들, 종교개혁자들이 이 성례전 이해를 달리함으로써 서로 다시 갈라서게 되는 그 역사를 이해하고자 할 때 성례전 신학의 중요성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일부 차이가 있었지만 성례전 신학은 로마 카톨릭 교회만이 아니라 종교개혁자들에게도 매우 심각한 주제였다. 거기에는 이 세상에 낯설고 타자적이신 하나님이 이 세상의 한 복판에서 이 세상의 일원이 되셔서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가지는 그 구체적인 방식의 유형이 사유되고 표현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우리는 이 성례전의 상징을 통하여 기독교가 세계에 선포할 복음의 본질적 원형을 찾을 수 있다. 또한 성령의 능력가운데 예전을 통하여 이 성례전적 이해를 신앙으로 수행함으로써 우리의 예배는 보다 온전한 하나님의 공동체로서의 자의식을 확실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한국 예배는 성례전에서 제시된 이 폭발적인 가능성을 얼마나 자각하고 있는가? 신앙의 사건으로서의 예배에서 우리에게 무엇이 경험되는가? 그리스도안의 하나님의 임재가 죄의 용서와 하나님과의 동행이라는 현실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가? 칼빈이 이해한 대로 성례전은 제대로 시행되고 있으며 그 목적은 온전히 성취되고 있는가? 성례전적 동시성이 보여줄 하나님의 타자적 세계가 우리에게 예배가운데 제시되고 있는가? 우리가 교회의 예전에서 구체적으로 체험되어야 할 그리스도의 임재는 오늘의 예배상황에서 어떤 효과를 가지고 있는가? 우리의 예배 안에서 성령이 보여주시는 새로운 세계의 나눔이 선포되고 체험되고 있는가? 성례전에 참여함으로써 우리 성도들의 존재 목적이 이해되는가? 과연 우리들이 성례전 안에서 개개인의 단독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여주실 새로운 세계를 책임질 영육간의 공동체로 불림을 받고 있으며, 비록 이 부름에 의하여 아직 다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통하여 그 목적을 이루어가는 존재로 체험되는가? 이 성례전적 공동체성이 교회의 예전에서 실제적이며 구체적으로 체험될 때 교회는 현대의 여러 욕구들을 앞당겨 성취한 진리와 구원의 복합체로서의 기능을 온전히 할 것이다.

 

 

II. 성령론적 성례전 이해: 약속으로서의 성례와 언약의 타자적 존재론

 

칼빈의 성례전 이해는 교회의 기능과 그 존재의 이해로부터 규정되어 있다. 칼빈은 교회를 하나님의 구원이 더 분명하고 명료해지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외적 기관이라고 생각한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나태와 태만으로 인해서 구원을 위한 필요한 여러 수단들을 교회에 위임하시고 그곳에서 그 사역을 이루어나가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을 성취하기 위한 기본적인 통로로서 하나님의 약속이 실행되는 기적적인 현실이다. 그리고 성례전은 교회의 표지로서 교회의 교회됨을 확보해주는 거룩한 제도이다. 더 분명하게 할 점은 성례는 단순한 제도가 아니라 실행해야 할 의식(儀式)이며 지켜져야 할 내용이 있는 언약들이라는 점이다. 성례가 의식이라고 지적한 것은 성례가 사건적 측면, 즉, 시간성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고 이는 교회의 역사성과 성례전이 시행될 때 일어나는 사건성 사이에 깊은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즉 교회가 하나님이 세우신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거룩한 공동체로서 구속의 약속과 하나님의 임재로 대표되는 사건성에 기초하여 있듯이, 성례전 역시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과 인간 공동의 사건성에 의하여 존재하고 그것을 목표로 하는 시간성과 사건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각별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할 점은 이 사건성으로서의 교회와 성례이해는 사실 성령론적인 기초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교회가 교회되고 성례가 목적한 바 참 목표를 성취하는 것은 오로지 성령의 사역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성령의 사역으로 교회를 세우셨고 성례를 설정하셨다고 할 찌라도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그 어떤 제도에 의하여서도 제한을 받지 않으시는 한편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이 정하신 그 제도와 표적아래 갇혀 있을 수밖에 없는 특수한 사정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교회라는 이 공동체의 성격이 바로 성령의 사역의 결과라는 것을 보여준다.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만이 우리는 성례의 사건성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칼빈은 “성령의 신학자”라는 그의 별명에 맞게 오직 성령의 은총만이 이 성례의 내용을 전달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으며 이 성령의 활동성이 성례전의 존재이해와 시간성의 중심에 서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교회와 성례전 이해의 근거를 형성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역동적 공동성을 지적함으로써 칼빈은 우리에게 교회의 존재와 성례전의 관계에 대하여 논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특질을 지적하고 있다. 신앙의 실체로서 체험되어야 할 성례전적 현실은 참된 교회의 불가시적 존재와 동일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즉, 교회의 불 가시성과 성례전적 현실이 기초하고 있는 성령론적 시간성이란 성례전을 이해하기 위해서 서구 철학으로부터 동원되었던 서구신학의 존재론적 모델과 틀 자체를 비판하는 효과가 있다. 즉 교회를 성도들의 공동체로 이해하기 위해서 교회가 누리고 있는 존재의 근거가 가시적 교회를 초월하여 시간의 이전, 교회의 역사탄생의 시점보다 더 근원적인 심원에서 찾아져야 한다는 관점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영원성을 언어로 말할 수 있는 새로운 범주를 추구하게 한다. 교회의 기초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활동에 의거한다는 것을 말해야 함과 같이 성례전의 모든 역사적 효과와 그 실체는 인간이 참여하기 이전의 하나님의 피안성에서 시작된 것임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전의 모든 존재들 사이에서 구조적으로 있을 법한 존재내적 유사성이나 그에 근거한 정적 관계는 불가능하다는 것, 참된 교회, 혹은 불가시적 교회와 가시적 교회 사이의 관계가 마치 변화하지 않는 이데아와 보이는 현실 사이의 관계처럼 이해하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이는 성례전의 화행론적이며 성령론적 성격을 염두에 두면 분명해진다. 즉 성례의 존재 그 자체가 사건에 의거해서 생기되는 성격을 가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제 성령의 능력가운데 하나님이 행하시는 약속에 근거한 철저한 타자적이며 화행론적 존재이해가 성례전에 적합할 뿐 아니라 필수적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비판적 인식은 사실 보다 자세하게 기술되어야 한다: 이를 인식론적으로 말하자면 성례전의 의미는 개개인의 신앙적 확신에서만 약속으로서 참여할 수 있고 인식 가능한 성격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함축하고 있는 약속과 실체(예수 그리스도와 인간의 구원)는 주관적 측면에 의한 의미의 발생을 의미하지 않고, 보다 보편적이며 객관적인 하나님의 실제적 구원 역사가운데서 실제적 사건으로 발생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성례전을 가능하게 만드는 그 독특한 시간성이란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만남 그 자체를 지칭하는 이름이며 그 조건에서 우리에게 밝혀지는 인식론적 과정은 언약의 타자성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자신이 아닌 것 가운데 자신이 아닌 것을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전적인 타자성의 발현이 성례전에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이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하시는 주체로서 이 세상의 다른 사물들 가운데 그 사물들을 통해, 그 사물들과는 절대적인 차이가운데 우리를 만나주시기로 언약하셨으며 그 언약에 의하여 우리들은 성례의 존재를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성례전에는 이 하나님의 약속이 현존하며 그것이 바로 성례전을 열어주는 원 동력이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약속이 지향하는 타자성이란 우리가 인식하는 대상의 대상성이나 객관성을 지적하는 말이 아니다. 이는 보다 더 적극적으로 우리의 인식과 의미파악의 가능성과 현실성을 그 존재발생의 원인으로부터 이해하고자 하는 태도이다. 즉 타자적 인식의 참된 의미는 그 의미사건의 원천이 자아 중심적, 자신의 존재론적 과정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말 걸어오기부터 시작된다는 사태를 지적한 말이다. 흔히 하이데거의 존재개념이 가진 “사건성”과 그 “역동성” 혹은 “역운성”으로 인해 이러한 인식론적이며 해석학적 혁신을 이루어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말 그대로 이는 개체가 아닌 중성적 사건에 대한 새로운 존재론적 반성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렇게 중성적 형식개념이 아닌 그 주체가 주체로서 연관된 계시이다. 자기의 주체를 자기의 고유함속에서 이해하게 할 뿐 아니라 타인의 운명과의 참된 만남을 추구하면서 일으키는 개방의 가능성이 이 타자성의 이념 안에 녹아있다. 나의 운명과 세계의 존재들을 무한성과의 만남의 현상으로 변화 시키면서 참된 개방성의 미래로 만드는 사건이 바로 이 타자성의 사건이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모든 대상이 언제나 그 고유한 유사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초월적 대상을 생각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전대 미문성의 새로운 이해가 바로 이 타자성인 것이다. 나의 의미-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현재의 지평으로는 도저히 생각해 낼 수 없는 대상 아닌 대상의 출현으로부터 새로운 세계의 구성이 시작된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이 타자성은 불 붙은 가시떨기의 형상과 같이 사물의 세계안에 또 하나의 세계처럼 겹쳐있는 하나님의 현존과 같은 삼자성(나-너, 나-그것의 2인칭 적 주관 객관의 세계를 넘어선 것으로서)의 계시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계시적 삼자성의 세계에서는 우리 주변의 세계사물이 그 존재의 의미를 타자성의 드러남으로부터 새롭게 부여받는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대상의 절대 타자이신 하나님의 임재에서 파생되는 지속성에서 우리는 칼빈이 주장하는 성례전의 객관적 의미를 확인 할 수 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우리의 주변을 이해 할 수 있는 새로운 힘이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속에 주어진 성례전의 사물들을 하나님의 타자성의 결과로서 이해하는 것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절대 타자이신 하나님과 만나게 된 인간들이 이 세상의 사건 속에서 갖게 되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성례전 안에서 찾을 수 있는 언약의 시간성인 것이다.

이는 교회와 성례전의 존재성에 대한 이해가 단순히 과거에 속한 역사적 자취, 시간상 과거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하게 한다. 즉, 우리가 여기 현재에서 만나는 사건에서 그 성례전은 약속으로서, 하지만 약속 안에서만 드러나는 아주 특별한 실체로서 체험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에 칼빈이 주장하는 언약의 현실로서 만나게 된 성례전의 의미는, 전통 신학적 관점에서 설명하려 할 때, 종말론적인 것으로 이해 가능할 것이다. 즉, 언약 속에서 현재적이면서 과거를 변화시키고 오늘의 의미를 담보하는가 하면, 한, 걸음 더 나아가 미래의 지평을 여는 역할을 맡고 있다는 의미에서 성례전의 사건은 종말론적이다. 현재를 구성하는 주위 세계의 물질성의 한 복판에 이질적인 것이 등장함으로써 세계의 사물들을 구성하는 원리인 시간이 미지의 것을 향하여 개방되어 있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고 이 시간의 미래성을 보여줄 수 있는 구조가 성례전의 종말론적 사건성이다.

신학적으로 종말론적 사태인 이 특수성이 성례전에서 현재의 존재사물 가운데 수용될 수 있는가? 칼빈의 언어에서 표지와 인이라고 규정된 이 성례전의 사태를 어떻게 보다 더 정확하게 해명할 수 있는가? 종말론적 시간성 그 자체가 현재적 순간의 한 시간으로만 존재할 수 있는 사물 내에 수용되었다는 이 특수한 사태를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우리들은 적어도 철학적으로는 이런 세계의 현상을 구성할 수 있는 언어와 로고스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 성례전적 현실은 종말론이나 우리가 익숙했던 철학적 존재론이외의 다른 말을 찾을 것을 강요하고 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발견하고 주위에서 찾을 수 있는 너무나 익숙한 대상들, 빵과 포도주, 물들을 그것 자체로 이해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 더하여 그 사물들을 다시 하나님의 말씀이 덧 붙여져 있는, 그래서, 그 성례전에 사용된 그 사물들 자체가 이 미묘한 변화를 거친 것으로 발견하는 것은 타자성의 패러다임으로 보다 더 풍성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이 성례전의 신비가 열리는 그 과정 자체가 하나님의 타자성이다.

칼빈이 성례전 이해를 이렇게 타자성의 관점에서 이해하기 시작하면 그의 신학이 갖고 있는 핵심적 문제를 보다 더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된다. 그가 반복해서 기술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성례전적 상징들은 우리들의 시선을 자기 자체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 아니며 항상 그 이상의 하나님의 실체를 바라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인 만큼 하나님과 우리사이에 절대적인 차이와 차별이 요청된다는 일차적인 요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와 더불어 우리 인간들은 이 절대적인 차이에서 생각될 수 있는 이 하나님의 실체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상징들과 기호들이 요청된다는 상호 이율배반적 요소들이 갖고 있는 문제이다. 여기에 덧붙여 이 실제적인 상징들이 너무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기 때문에 하나님의 실재와 우리사이의 차이와 구별을 강조하지 않을 경우 우상과 미신에 빠지고 마는 인간의 연약성을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칼빈이 성례전을 대할 때 교회의 전통적인 상징에 대한 이해를 기초로 하여 접근할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그의 언어와 사유 방식들은 그 어떤 상징론으로도 완벽하게 소화되지 못하는 반면 오히려 가장 현대적인 입장의 “타자론적”접근을 하고 있다는 가정을 가능하게 만든다. 그렇기에 그의 글 속에는, 단지 기존의 상징론의 입장에서 머물러서 그를 이해하고자 노력해 볼 경우, 이중적이며 이율배반적 표현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III. 화행론적 성례전 이해와 신앙의 의미: 성례안의 그리스도의 몸의 실제

 

칼빈이 성례전의 문제를 다룸에 있어, 현대적인 의미에서 타자론적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칼빈 당시 성례전 신학에 있어서 매우 뜻 깊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었던 요인이 될 수 있다. 이는 성례전이 성령론적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영원성에서부터 시작되었고, 하나님의 행동방식의 특수성을 의미하는 그 가능성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언약의 타자성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성례전이 “하나님의 부르심”과 “인간 역사 안으로의 낮추심”에 근거한 것이라는 사실은 이렇게 부르심을 입은 인간이 신앙으로만 응답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신앙적 주체의 새로운 측면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중성과 연관해서 칼빈이 성례전 해명에서 폭넓은 관점에서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특별한 의미가 있다. 즉 칼빈은 성례를 성령의 타자론적인 계시사건으로만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언어사건 속에서 지평화된 화행론적 언어사건(illocutionary language event)으로도 이해하고 있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성례란 고립된 상황에서 모든 것을 객관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지성적 작용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의 역동성에서 구체적인 행동이다. 모든 문장들을 단지 명제로만 생각할 수 없듯이 성례라는 현실은 실행적(performative) 언어활동을 배경으로 일어나는 실제적인 사건이다. 성례적 사건은 그 성례의 의식의 실행과 더불어 하나님이 무엇을 행하시고 우리도 그 안에서 무엇을 행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이 화행론적 언어사건으로서의 이해될 때 이제 성례는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절대적 타자이신 하나님이 이 성례사건의 궁극적 객관성의 보루로서 드러나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성례사건의 유일한 원-주체자로서 우리에게 자신의 몸을 주시는 분으로서 행동을 하신다. 그리고 이는 우리에게 주어진 약속으로서 그 성례의 객관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두 번째로 이 성례를 인간이 시행함으로서 구체화되며 이때 인간은 하나님의 약속의 사건에 의거한 두 번째 주체자, 신앙으로 활동하는 보조적 주체자로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양자의 대화적 관계에서 만나는 인간과 그리스도의 대화와 구체적인 만남의 의미가 바로 성례전에서 주어진 그리스도의 몸의 의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화행론적 성격의 첫 번째 국면으로 다음의 사실이 중요시 된다: 성례에서 사용된 모든 진술과 거기에 덧붙여지는 하나님의 말씀은, 적극적을 말해서, 그리스도의 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의 사역의 연장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오셔서 생명과 신앙을 나누어주시는 성령 하나님의 행동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성령 안에서 생기되는 하나님의 행동과 말씀의 일치가운데서 성례를 이해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성례가 성취되고 주어진다는 것을 명심하는 것이다. 칼빈의 말로 하자면, 광의의 성례개념은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들의 진실성을 더욱 확신하게 하고 신뢰하게 하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베풀어 주신 모든 표징들을 다 포괄한다.” 하나님께서는 그 자신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 모든 행동을 수행하셨던 것이다. 칼빈이 드는 그 구체적인 실례가 바로 아담과 하와에게 주어졌던 생명나무와 노아에게 주어졌던 무지개의 언약이다. 그것들이 聖禮로서 이해될 수 있던 까닭은 그것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자기를 계시하는가 하면 자신의 뜻을 드러내시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에 의하면 “나무 자체가 그들에게 불멸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었고 무지개도 ...그 자체가 홍수를 막는 효과를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그것들에게 표징을 새겨 놓으셨기 때문에 그것들이 하나님의 언약의 증거요 인이 된 것”이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사실 그 나무도 그 이전에도 나무로 있었고, 무지개 역시 무지개 그대로였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그것들에게 하나의 새로운 형식이 새겨졌고, 그리하여 과거에는 없던 본질을 새로이 지니게 된 것”이라고 해명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성서의 기적의 보도역시 그 자체로 성례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하면서 그 기적들이 성례로서 이해되는 그 결정적인 요인은 기적들에 덧이어진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화행론적 말씀 때문임을 분명하게 한다. 성례와 하나님의 모든 활동 속에서는 하나님께서 약속의 주인으로서 그 말의 주인으로서 매우 특별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하나님은 타자적으로 그 사건 속에서 자신을 계시하고 그것이 구속사를 형성하며 이 구속사속에서 성례전은 그 성서적 뿌리를 갖고 있다. 성례의 뿌리는 지금 여기에서 우리와 만나 활동하시며 역사하시는 분, 약속하시는 하나님, 바록 그리스도의 몸이신 것이다.

이는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참된 계기이다: 성례전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예배 중에 이루어지는 모든 성례전은 약속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순종의 행위로서 우리는 그 약속에 대한 응대가 가능할 뿐이다. 그렇다면 예배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벌어지는 그 교제가 어떻게 가능한가? 이 교제는 오직 성령의 사역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 앞에 거룩한 것이 되는 까닭은 그 예배의 내적 성질에 의거한 것이 아니라 그 예배 중에 임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더 적극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때 가능한 것이며 바로 이때 참된 개혁교회적 예배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 성례와 세례 중에서 하나님의 주체성을, 스스로 약속하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존재론적인 원리나 예배의 신비로서가 아니라 여기 모든 것 가운데 계시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말씀하시는 현장의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이 보다 더 정확한 이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칼빈의 성례전을 하나님 말씀의 화행론적 관점에서 이해함으로서 그 본질적 이해에 도달 할 수 있다는 우리의 주장은 칼빈이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중세 카톨릭 교회의 성례전과 비교해 봄으로써 그 차이를 정확하게 알 수 있게 된다. 칼빈은 성례전 자체가 스스로 어떤 효과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교황주의의 사효론을 비판한다. 소위 "ex opera operato"를 주장하는 중세기의 성례전 이해는 칼빈에 의하면 미신적이며 우상숭배적인 것이다. 칼빈의 사효론 비판의 핵심은 중세 카톨릭이 성례전의 이행과정을 어떤 신비주의 종교의 입문양식으로 변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카톨릭 교회의 성찬이해는 사건의 원초적 가능성과 그 이차적 가능성을 혼돈하였다. 그 결과 그들은 성례전의 핵심을 이루는 하나님의 행동을 보지 못하고 떡과 그리스도의 몸 사이의 실체변화에만 전력하게 되는 것이다. 카톨릭의 성찬이해에 따르면 성별의 예식을 통하여 떡이었던 것이 그리스도로 바뀌어 지고 그리스도께서 떡의 모양으로 된 것 아래 숨어계시게 된다. 이러한 성례전 이해는 “그리스도와 의 교제에 이르고 또한 그에게 붙어 있도록 해주는 유일한 수단인 참된 믿음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고...자기들 스스로 꾸며낸 그런 식의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임재만 있으면 족하다고” 여기는 터무니없는 주장인 것이다. 더욱이 화체설이 주장 하는 바 떡의 본질을 사라지게 하고 떡의 형체만이 남아 있어 그것이 그리스도의 몸을 의미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 자체가 성례전의 정황에 맞지 않는다. 오히려 칼빈은 그 떡은 떡으로서 남아서 그 떡으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나타내는 것이 성서적이라고 주장 한다. 그렇기에 그 떡이 그 떡 자체의 성격으로 우리의 생명의 떡이 되신 그리스도의 임재를 나타내기 위해서 영의 임재를 주장한다. 칼빈이 제시하는 카톨릭교회에 대한 비판은 화체설, 떡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화되었다는 사실에 집중하고 있다. 그러나 칼빈의 성례전 이해에서 볼 때 더 사태에 적합하고 치명적인 카톨릭 비판은 그 시효성(성례예식 스스로 그러한 효력을 나타내도록 되었다는 주장)의 특성이다. 즉 예식 스스로 어떤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은 칼빈의 입장에서 볼 때 그리스도의 몸이 여기 실재하게 하는 성령사건을 신비주의적 예식으로 바꾸어 버린 불경죄인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것이 개혁교회와 카톨릭 교회 사이의 실제적인 차이이다.

성례전의 특질로서 화행론적 요소의 두 번째 측면에서 우리 신앙의 주체성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부름에 순종하면서 응대할 때 가능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성례를 시행하는 것 자체가 “지금” “우리가” 이 하나님의 약속을 읽고 그 가운데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고 약속을 행하신 하나님의 활동가운데, 그와 대화적 관계 속에서, 그에게 응대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성례를 시행한다는 것은 우리를 그 안에서 만나주시는 그리스도와 몸과 몸의 관계에서 대화에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대화적 관계의 역동성 안에서, 응대자로서, 그 말씀을 행하시고 그 약속의 행동을 수행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차적 주체로서, 우리의 행동을 하는 것이다. 칼빈은 이를 매우 다양하게 묘사하고 있다. 성례의 실행을 통하여 우리가 갖는 행동의 성격은 먼저 고백인가 하면 동시에 하나님의 은총을 얻고자 하는 우리의 소원을 공적으로 시인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예배에 참여하기를 바란다는 동의일 뿐 아니라 마지막으로 예배 안에서의 신앙고백이라는 것이다. 성례전에 참여하는 인간의 구체적인 행위들은 한결같이 인간이 홀로 있을 때 가장 심오한 주체성의 관점에서 스스로 결정할 내용들이지만 그것들이 이미 몸으로서 만나고 있는 그리스도와의 대화 관계 하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칼빈은 보여준다. 칼빈이 지적하듯이, 물이나 포도주, 그리고 떡 안에서 이미 몸과 몸으로서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성령사건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성례를 통한 칼빈의 통전적 견해에 의하면 인간의 주체성은 홀로 있을 때 고독하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이 예배 중에서 주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도 응대하고 감사하는 실존으로서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존재하는 자로 나타나는 것이다.

 

 

IV. 연합과 개방성으로서의 성례전: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은혜의 교환(Exchange)

 

칼빈의 성령론적이며 타자론적 성례이해를 통해 성례전안의 신성적 요소에 대한 초월적이며 원인론적 측면을 강조할 수 있었다면, 그의 성례이해의 화행론적 측면은 인간이 성례에 참여하는 것이 성례전 전반의 공간과 시간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를 알 게 한다. 지금까지 살펴 본 바 대로 칼빈에게 있어서 성례전은 매우 특별한 시간의 기적이 일어나는 새로운 세계로의 창이라고 할 수 있다. 성례전이 이토록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까닭은 그 성례전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해 계시면서 우리에게 자신이 행하신 구원의 실재를 나누어 주시고 있기 때문이라고 칼빈은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성례를 다룸에 있어 우리가 거기에 어떻게 참여하게 되었는가를 가장 중요한 질문으로 대하고 있는 칼빈의 태도는 존재론적 해명보다는 타자적인 하나님의 섭리의 활동이라는 관점으로부터 성례에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령의 활동으로부터 은혜가 주어지는 거기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무엇보다 먼저 성례전은 단순한 지칭적 효과를 가지고 있을 뿐, 그 자체로 어떤 내용도 포함하지 못하는 외적기호에 불과하다는 주장은 칼빈에 의하면 올바른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세례가 아무런 효과나 효력이 없이 “마치 군인들이 그들의 충성의 표시로 그 지휘관의 군기를 지니듯이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하나의 증표 이상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는 자들은 세례의 주된 목적을 제대로 가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비록 우리의 신앙적 행동이 시간 공간의 한계 안에서 일어나는 유한한 것이지만 이 성례의 의미는 그 유한성의 한계를 넘어서 존재하기 시작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세례의 시행은 일생에 한번 있는 사건이며, 그것도 어떤 특별한 역사적 위치, 회개와 같은 신앙의 최초의 순간과 연관되어 있지만 그 효과만은 전 생애에 걸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세례 후 범죄 한 경우 그 사람에게는 죄 사함의 표지로서 세례가 아무런 효용이 없어지기에 그에게는 회개라는 후속 조치가 죄사함의 표지로 사용된다는 생각은 칼빈에 의하면 어리석은 것이다. 오히려 이 땅위에 성도들이 자기의 잘못을 회개하고 새롭게 하려 할 때마다 이 세례를 떠 올림으로써 그리스도의 피에 의하여 이루어진 유일하고도 영구한 죄 사함의 은총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세례로 인한 효과는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과 연관되어 말씀의 성취로서 경험되는 바, 세례를 통하여 우리들이 죄 사함을 체험하며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의 죽으심에 동참하게 되는 것과 같이 또한 그의 사심에 동참하게 되었고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존재에 덧붙여지는 것이다. 성례에 참여하는 인간이 찾을 수 있는 경험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즉 그의 성례전에서 문제시 되는 것은 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성격이다. 칼빈은 성례의 중요한 실체는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 그 자신이라고 말한다. 성례의 효용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실제적으로 가져온 개방성에서 발생한 것임이 분명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이 만남에 참여하는 자는 그 성례전과 더불어 자신 내면의 깊은 측면에서도 놀라운 변화를 갖게 된다. 성령 안에서 인간들은 가장 깊숙한 실존적인 측면에서의 변화를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을 하나님의 지배에 내어 맡기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뜻에 동의하고 그를 타자적 대상으로 인정하게 된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그를 형성하는 것이다. 동시에 예배 공동체내에서 이 실존적 결단을 스스로 공식화하는 공적시인의 행동을 하게 된다. 그는 스스로 혼자가 아니라 그 대상에 의하여 공동체적인 존재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기술한 성례전의 효용은 사실 하나님의 행동과 인간의 행동이 성령의 능력 안에서 일치하는 기적으로 일어난 일이다. 칼빈은 이 효용을 표현하기 위해서 매우 극적인 단어를 사용하는바, 그에 따르면 이 성례의 효용의 궁극적 표현은 “그가 측량할 수 없는 자비하심으로 우리와 행하신 놀라운 교환” 이라고 표현될 수 있다. 하나님의 영광이 인간의 비참함과 자리를 바꾸어 나타난 구원의 사건이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의 죽음을 담당하심으로 인간들에게 부활과 생명의 참 근원이 되시고 그것을 우리에게 은총으로 허락하신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주의할 점이 있다. 칼빈이 성례에서 일어났던 그 변환의 기적을 “놀라운 교환”이라고 정의하였으나 이 교환은 동일한 권위와 존재들이 상호간의 정당한 자격으로 자기들의 것을 서로 바꾸어 가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성령의 기적가운데 하나님의 세계가 인간의 세계를 만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침범하여 인간의 지평을 변화시켰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성령께서는 이러한 침노와 놀라운 변화를 어떻게 일어날 수 있게 하시는가? 성령께서는 어떻게 우리를 그리스도에 접붙히시고, 또한 어떻게 당신의 몸을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으로 삼게 되는가? 그에 대한 정확한 답변을 칼빈도 하지 않는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 효과들의 직접적 원인이 성례가 갖는 자기 원인이 아니라 오로지 성령의 사역에 의한 것이라고 칼빈이 말하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므로 우리가 그것을 다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불가해성에도 불구하고 칼빈이 더 강조한 부분은 성례의 효과들은 현실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오셔서 실제로 역사하심으로서 일어나는 우리 주변 세계의 일이라는 것이다. 우리들이 칼빈과 함께 이 성령의 역사를 이해한다면 이제 우리는 예배와 성례전의 의미와 그 깊이를 알게 된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와 현실의 삶속에서 더욱 성령의 충만한 역사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성례의 기적은, 칼빈에 의하면, 우리가 주체적으로 구성해 간다고 믿었던 이 세계의 한 복판에 임하신 하나님의 동행이라는 그의 은총의 현실이다. 그럼으로 우리들은 성례전에서 이 세계를 변화시킬 생명의 양식을 만난다.

 

V. 한국교회의 성례전이해 비판: 칼빈의 입장에서

 

한국 교회는 여전히 성장 중인가? 양적 성장의 시대가 지났다면 혹시 질적이라도 부흥하고 있는가? 한국 교회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어디에서 찾고 있는가? 현대의 많은 교회들은 사회봉사 활동과 같은 매개를 통하여 외적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려 함으로써 당면 목회의 과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상황에 대한 적응성을 키우고 사회적 책임을 인식하는 것은 필수적인 과제이다. 서론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급변하는 세속 사회의 환경은 교회의 언어가 공적 담론이 되어야 한다고 강요하고 있으며 교회가 키워내야 할 사람들은 사회의 공적 책임을 가질 수 있는 자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점증되는 양극화 현상, 흩어진 가족들의 아픔과 물신숭배의 자본주의가 낳은 파편화된 개체들의 무지와 오만과 편견을 과연 교회가 어떻게 고칠 수 있을까? 동료 인간에 대한 무관심과 하나님에 대한 불경을 교회가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고칠 수 없는 것이 확인된 사실인 것처럼 교회가 자신의 올바른 사명과 그 위치를 찾는 일, 교회가 자신의 정체성은 찾아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키우는 일은 예배를 올바르게 세우는 일과 연관되어 있다.

그렇다면 한국의 교회들은 예배를 통하여 자신의 위치를 올바로 발견하고 있으며, 또한 현실을 변혁시켜 나갈 수 있는 힘을 그 예배에서 찾고 있는가? 유감스럽게도 그렇다고 자부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 대다수의 교회들이 가진 예배에 대한 신학적 반성은 매우 열악해 보인다. 설교 잘하는 슈퍼스타 - 목회자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기대고 있는 이 현실은 확실히 복음적이 아니다. 한국교회처럼 예배에 열심인 그런 교회도 없는데도 그렇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 교회의 예배의 의식에서 아직도 부족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다름 아니라 성령의 사역방식에 대한 보다 철저한 이해이다. 그리고 이는 성례에 대한 부족한 이해에서 발단된 것으로 보인다. 쯔빙글리 전통의 상징론이 세속적 이성의 범람과 더불어 왜곡되어 교회가 가진 가장 고유한 은총의 수단을 미신으로 전락시켜 버린 것이다. 하지만 성령이해의, 은총론과 구원론의 핵심적 관건은 이 성례전에서의 은총의 수여방식에 대한 이해에 따라 달려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칼빈이 교회론의 상당부분을 성례전에 대한 설명에 쏟아 부은 이유는 바로 이것과 연관이 있다. 성례에 대한 부족한 이해는 성령의 역사방식에 대한 빈곤한 사유를 낳았고 그 결과 성령운동들이 교회에서 많이 일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예배의 회복으로 쉽게 이어지지 않고, 예배의 감동이 생활의 현장 속으로 스며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우리의 예배에 칼빈의 성례전적 신학이 적용된다면, 그의 성령중심의 타자적 성례전이해가 적용된다면 우리들의 예배는 더 영적이 될 것이다.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내어주신 하나님의 은총이 영의 현실로서 성령의 능력가운데 체험되는 그런 예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성례전에서처럼 하나님의 은총이 만져지고 느껴진 채로 말씀과 성령이 역사한다고 전제된다면 우리는 우리 주변의 세계의 모든 사태에 대하여 더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그 고유한 차이를 간직하시는 채로 이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한 다양한 방법들을 자유롭게 사용하실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성례전은 상징으로 가득 찬 미신이 아니다. 성례전은 우리의 현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영적 활동이 아니다. 성례전은 칼빈이 주장한 것처럼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의 현장인 것이다. 그것도 성령의 능력 안에서 하나님의 인간 세상에 대한 항존적 관심이 드러나는 곳이며 역사하는 곳이다. 예배의 본질은 바로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교류에서 찾을 수 있다면 칼빈이 말한 바, 성례에서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놀라운 교환이 일어난다는 사실은 예배의 핵심이 성례전적 사태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그 고유한 현실을 보여주시듯, 성례전 역시 이 땅위에서 하나님이 지상의 역사 속에 어떻게 개입하시고 계신가를 보여주는 소중한 은총의 그릇이다. 이제 한국 교회는 이 성례전을 은총의 소중한 그릇으로 다시 재평가해야 한다. 그래서 성례전 안에 나타난 성령의 능력과 역사하심을 이해하고 닮을 수 있는, 지금 여기에서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는 타자적 미래의 신학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추천인 1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