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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빈의 성례 신학 속에 나타난 현실개념에 대한 연구에 대한 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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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덕형 교수의“칼빈의 성례 신학 속에 나타난 현실개념에 대한 연구”에 대한 논평

 

강웅산 교수(총신신대원, 조직신학)

 

 

오늘날 교회에서 성례의 의미와 그 중요성이 점차 약화되다 못해 망각되어가고 있다는 우려를 느낀다. 사실 성례를 둘러 싼 신학적 갈등은 이미 종교개혁에서 가장 가시적으로 대립되었던 부분 중의 하나이다. 그런 만큼 아직도 성례에 관한한 어정쩡한 모습이 남아 있는 듯하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성례 자체를 일정 거리에 두고 지키는 하나의 절기행사로 전락(?)해 버린 듯 한 애석함이 없지 않다. 어쩌면 그 이유가 성례신학이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한데서 기인한 것이라는 생각이다. 대체로 화채설과 공재설은 크게 어렵지 않게 구분하는 듯하다. 그러나 상징설과 영적 임재설에 대해서는 아직도 어느 것이 개혁주의 입장인지 혼돈 하는 이들이 많다. 결국 분명하지 못한 신학적 이해가 성례를 오히려 지나치게 신비주의적인 것으로, 또는 그야말로 조상의 제사를 지내는 듯 한 상징적 예식 이상의 기대가 거의 없는 현실적 결과를 낳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황덕형 교수의 지적대로 성례의 회복은 오늘날 교회의 삶에 나타나는 많은 문제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하리라는 점에서 깊이 공감을 한다. 그런 점에서 필자의 논문은 시의적절하다는 생각이 든다. 칼빈의 성례신학에서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신학적 단초들을 찾아 제공하여 준 필자의 시도가 매우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하며 - 발제와 중복되는 요약은 생략하고 - 본 논문이 기여하는 몇 가지 특징과 함께 학문적 논의를 위한 질문을 함께 던지고자 한다.

 

1. 포스트모던적 경향을 의식하기 때문인 것 같긴 한데, 필자는 기독교 복음의 보편성에 기초하여 신학의 개방성을 언급하며 논의를 열고 있다. 그 개방성의 구체적인 방안으로, 정신이 아니라 몸의 중요성, 계시의 초월성보다는 현실 속에서의 진리의 실증성, 귀납적-해석학적 이해, 다양한 의견 사이의 대화와 타협을 제시하였다. 소위 현대사회가 제시하는 문제들과 이에 대해 교회는 어떤 답을 줄 수 있느냐의 가능성에 대해 필자는 성례 - 특히 칼빈의 성례신학을 - 를 해석하는 하나의 방법론 속에서 유비적(analogical) 조명을 통해 개방성의 가능성을 찾아보려 하였다는 생각이 든다.

 

2. 교회를 역사적/초-역사적 공동체라고 명명할 때 그 의미를 이해하는 정도는 각기 나름대로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필자는 이 양면성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역설적인 것의 통합”으로 해석하며 그 통합 또는 교통을 성령과 결부짓는 방향으로 논지를 진행시키고 있다. 이 때 “역설적인 것”의 실제적 해석은 타자적 존재론에 의해 지배받고 있으며, 사실상 실존주의의 사건성의 의미가 성령에 의한 “놀라운 교환(mirifica commutatio)”으로 주장되고 있다고 여겨진다.

 

3. 성례를 둘러싼 영원과 시간의 양면성의 문제, 또는 초월과 내재의 문제에 대해 필자는 한 쪽으로 치우치거나 또는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잠식시킬 수 있는 위험에 대해 잘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그는 타자성의 관점을 칼빈의 성례전을 이해할 수 있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론으로 제시하면서, 칼빈의 성례신학에 있어서 실재(떡, 포도주)와 상징(약속)을 연결하는 언약 사상을 타자의 개념으로 해석함으로써 칼빈의 성례신학이 우상과 미신에 빠지는 것이 아님을 변호하는 기여를 하고 있다.

 

14. 더 나아가 필자는 칼빈에게 있어서 성례를 “성령의 타자론적 계시사건” 즉 그 자체가 “화행론적 언어 사건”이라며 John L. Austin의 개념과 등치시키고 있다. 우리가 Austin이나 John Seale 등의 언어철학을 수용해야 하느냐 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진다. 단지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것은 필자가 언어철학이 다루는 언어와 행위의 관계를 멋있게(?) 칼빈의 성례신학에 대입시키고 있으며, 더 나아가 칼빈의 신학을 읽어 들어가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성령의 사역으로 이어지는 구속사적 진행을 - 매우 설득력 있게 - 설명해 내고 있다는 점이다.

 

5. 그러면서도 필자는 칼빈의 성례신학의 초점이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놓치지 않고 있다. 이때 인간이 성례에 동참함으로써 누리게 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해 필자는 “성례의 효용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실제적으로 가져온 개방성에서 발생한 것임”이라고 단정한다. 필자에게서 성찬을 통해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개방성 사이에는 필자가 말하고 싶은 매우 깊은 의미가 있는 듯하나 행간을 통해서 느껴질 뿐 명쾌하게 명시되지 않는 점이 아쉽다. 그러나 그것은 칼빈이 성찬에 대해 여러 차례 말을 하면서도 여전히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고 여운을 남기는 것과는 다른 의미라고 생각된다.

 

6. 논평자에게 이 논문이 아주 흥미로웠던 것은, 비록 필자는 한 번도 바르트를 언급하지 않아도, 전형적인 바르트의 신학으로 칼빈을 읽어 들어가는 유형임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필자의 말대로, 한국교회의 잘못된 성령운동이나 예배의 영성 등에 대한 실제적인 대안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대안이 한 철학적 방법론에서 유비적으로 착안한 것 같다는 생각은 떨쳐버릴 수 없을 것 같다.

 

7. 중요한 것은 칼빈의 성례신학에 있어서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믿음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의 질문이다. 칼빈의 영적 임재의 의미를 과거의 폐쇄성으로 치부하려는 의도인지 의문이 생긴다. 성례를 타자론적 언어사건으로 보는 언어철학의 화행론적 유추를 통해 현실과 기독교의 접목을 가능케 하는 시도는 결국 믿음을 실존주의적 사건으로 보는 결론을 피하기 어렵다는 생각이다.

 

비록 철학적 전제를 갖고 칼빈 - 성례신학뿐 아니라 그의 신학 전체까지도 - 을 읽는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개혁주의 해석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으나, 성례를 통해 현실적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시도한 점은 시의적절하며 계속해서 연구되어야 할 주제라는 점에서 필자의 노력에 감사의 뜻을 표한다.

 

논평

 

황덕형 교수의 논문“칼빈의 성례 신학 속에 나타난 현실 개념에 대한 연구”에 대한 논평

 

김 성 봉

(Dr. theol. 신반포중앙교회 담임목사, 전 안양신대원장)

 

 

문제의식 - 필자는 현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기독교적 담론 요청을 의식하면서, 그 요청에 응해야 할 한국 교회가 예배의식에서 성령의 사역방식에 대해 보다 철저한 이해가 부족한 것으로 보이며, 이는 성례에 대한 이해부족 탓으로 여겨진다고 한다. 성례에 대한 이해부족은 성령의 역사 방식에 대한 빈곤한 사유를 낳았고, 그 결과 성령운동들이 교회에서 많이 일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예배의 회복으로는 이어지지 않고 있으며, 나아가 예배의 감동이 생활현장 속으로 스며들지 못하고 있다고 보았다.

 

대안 제시 -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필자는 우리의 예배에 칼빈의 성례전적 신학이 적용된다면, 즉 그의 성령 중심의 타자적 성례전 이해가 적용된다면, 우리들의 예배는 더 영적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며 대안을 제시한다.

 

논지 전개 - 필자는 현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기독교적 담론 요청에 응하여, 몸에 대한 현대적 이해에 따른 그리스도의 임재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능성을 계기로 칼빈의 성령론적 성례전 이해를 타자론적인 계시사건과 화행론적 언어사건으로 해설하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은혜의 교환으로 진술한다.

 

새로운 담론을 요구하는 현대 사회의 요구에 응하여 변화된 패러다임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제시하는 일이 복음적 신학의 작업이라고 필자는 말한다. 개방성의 요구는 기독교 자체의 새로운 정체성 확립을 촉구하면서 기독교의 자기 정체성의 재발견의 문제로 발전하였다고 한다. 필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현실을 이해하려는 신학적 작업은 포스트모던적 태도에서 비롯된 요구보다 더 포괄적인 지평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하다.

 

필자에 의하면 교회는 예배라는 독특한 행위에서 존재하며 그 행위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게 되는 일종의 제사공동체로서 역사적이며 동시에 초역사적 공동체이며, 하나님의 인간 역사 안으로의 돌입이라는 초역사적 돌발사건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초시간적 동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인간 역사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시간 내적 공동체이다. 이 공동체의 존재는 예배 가운데 찾을 수 있으며, 그 예배의 중심에는 성령이 주장하시는 말씀 선포와 더불어 성례전이 존재한다.

 

성례전에 대한 필자의 강조는 두드러진다. 필자에 의하면 성례전은 그 예전의 성격상 역사에서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이 이 세상의 다른 사물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활동을 표현하시는 독특한 세계내적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런 면에서 성례전은 말씀 선포와 달리 더 철저하게 이 세계 내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내재적 공동체성을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한다.

 

필자에 의하면 이 성례전 신학을 통하여 드러나는 하나님과 인간의 동시성과 공속성이 칼빈에게는 성령론적 통합의 관점에서 이해된다고 한다. 성례전 신학의 놀라움은 살아 있는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현실로 눈앞에 이루어진 ‘역설적인 것의 통합’임을 스스로 보여주는 데 있다고 한다. 필자에 의하면 역설적 통합의 현실인 성령의 현실을 알 수 있도록 만드는 새로운 언어는 성례전 신학 자체가 요청하는 사항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절대적인 차이를 극복하고 동시적 사건으로 여기 우리에게 항상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성례전 안의 존재성은 하나님의 타자성 안으로 초대하는 신학적 언어사건을 요청한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화행론적 성령사건이다. 이처럼 성령론적인 틀 안에서 성례의 독특성을 이해하고자 한 점이 칼빈의 공헌이라고 필자는 주장한다.

이 성례전의 상징을 통하여 복음의 본질적 원형을 찾을 수 있다고 필자는 기대하며, 또한 예전을 통하여 이 성례전적 이해를 신앙으로 수행하므로써 우리의 예배가 보다 온전한 하나님의 공동체로서의 자의식을 확실하게 할 수 있다고 기대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오늘날의 한국교회의 예배 현실은 이런 기대에 훨씬 미치지 못하고 있다고 필자는 아쉬움을 피력한다.

 

필자는 성례에 대한 칼빈의 성령론적 이해를 레비나스의 ‘타자성’ 개념을 빌어 이해하려고 한다. 그에 의하면 칼빈의 성례전 이해를 타자성의 관점에서 이해하기 시작하면 그의 신학이 갖고 있는 핵심적 문제를 보다 더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성례전의 의미는 개개인의 신앙적 확신에서만 약속으로서 참여할 수 있고 인식 가능한 성격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함축하고 있는 약속과 실체는 보다 보편적이며 객관적인 하나님의 실제적 구원역사 가운데서 실제적 사건으로 발생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인데, 성례전을 가능하게 만드는 그 독특한 시간성이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만남 그 자체를 지칭하는 이름이며, 그 조건에서 우리에게 밝혀지는 인식론적 과정은 언약의 타자성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필자는 성례에 대한 칼빈의 성령론적 이해를 오스틴(Austin)이 정의한 ‘화행론’의 개념을 빌어 이해하려고 하는데, 그에 의하면 칼빈은 성례를 성령의 타자론적인 계시사건으로만 아니라 우리 인간의 언어사건 속에서 지평화된 화행론적 언어사건(illocutionary language event)으로도 이해하고 있다. 성례란 삶의 현장의 역동성에서 구체화된 행동이다. 두 가지 면을 제시하는데, 첫째는 성례에서 사용된 모든 진술과 거기에 덧붙여지는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의 사역의 연장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오셔서 생명과 신앙을 나누어주시는 성령 하나님의 행동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우리 신앙의 주체성은 하나님의 부름에 순종하면서 응대할 때 가능한 것이란 점이다. 칼빈에 의하면 인간의 주체성은 예배 중에서 주어진다.

 

필자는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성례전에서 일어나는 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말하며, 이 연합은 ‘놀라운 교환’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영광이 인간의 비참함과 자리를 바꾸어 나타난 이 구원사건은 오로지 성령의 사역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논찬과 문의 - 현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기독교적 담론 요청을 의식하여 바쁘신 중에도 이러한 귀한 논의를 낸 데 대하여 귀하게 생각한다. 더욱이 칼빈의 성례전 이해를 그 말거리로 잡고 가능한 한 그 정신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현대적 이해를 시도한 점은 필자의 신앙적 입장과 탁월한 신학적 역량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필자가 이미 그 서두에서 명시하였듯이 자칫 이러한 논의가 ‘기독교적 자기 정체성을 위협’하는 수준에로 떨어질 위험성도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전통보다는 보다 새로운 세계에 자신을 맞추려는 노력을 하다 보면, 즉 포스트모던적인 지향점을 가지고 논의를 진행하다 보면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탁월한 논문임에도 우리의 신학적 논의를 위하여 다음 몇 가지를 문의하고자 한다.

 

첫째로, 현대가 요구하는 개방성의 전제로 제시한 몇 가지 사항들에 대하여 과연 그리스도인들로서는 그것들을 당연시해야 하는지? 1) 정신이 아니라 몸의 중요성, 2) 초월적 게시보다 주변의 상황과 현실을 분석함으로서 얻게 되는 진리의 실증성, 3) 그것과 동시에 귀납적이며 해석학적인 이해, 4) 한 특별한 진리의 계시적 관점에 대한 헌신이 아니라, 다양한 의견을 인정하고 그 사이에서 대화와 타협의 가능성을 추구하는 것.

 

둘째로, 필자는 성례전적 의미를 교회를 넘어 ‘이 세계의 존재 자체’까지로 확대하는데, 혹 지나친 확대는 아닌지? - “성례전이 이 세계의 다른 사물들을 하나님의 존재를 보여주는 사건의 재료로서 이용한다는 점에서 교회만이 아니라 이세계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구원의지에 의하여 관통된 하나님과 인간의 동시적 세계라는 복음적 종말의 궁극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고 할 수 있다.”

 

셋째로, 필자는 칼빈의 성령 중심의 성례전 이해를 현대적 의미에서 재해석하였는데, 이런 식의 논의 방식은 과거의 논의를 객관적으로 읽기보다 과거의 논의를 지나치게 현대적 관점으로 읽는 것이 아닌지?

넷째로, 칼빈에 대한 이러한 논의를 읽으면서 칼빈이 가졌던 신앙의 전제들에 대하여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도 그가 다루었던 주제에 대하여 현대적인 언어로 재구성해 보려는 시도가 과연 어느 정도 타당할까 하는 의문이다. 즉 그가 가졌던 성경관의 공통분모를 가지지 않고도 그와 함께 이러한 논의를 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가능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다.

 

바쁜 중에도 귀한 논문을 써 주신 교수님께 다시 한 번 더 감사를 드리며, 이상으로 논평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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