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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정암 박윤선의 성령신학에 대한 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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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배교수의 논문 “정암 박윤선의 성령신학”에 대한 논평

 

 

유태화(기독신학대학원, 조직신학)

 

0. 들어가면서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의 신학적인 봉사를 이어받은 세대로서 보수적인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을 정초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쏟아 부은 박윤선 박사님의 성령론을 검토하는 일은 시의적절한 일이라고 생각되며, 그 일을 수행한 최윤배 교수님의 논문을 함께 읽고 생각을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효율적인 토론을 위하여 먼저, 내용을 요약하고, 다음으로 논평자의 논평을 긍정적인 점과 아쉬운 점으로 나누어서 제시하도록 할 것이다.

 

1. 내용 요약

최윤배는 박윤선의 성령론 연구를 수행하면서 조직신학자로서의 출발을 의도적으로 선택하였다. 이에 따라 최윤배는 자료를 박윤선이 생전에 남겼던 신학적인 글을 모은 『개혁주의 교리학』으로 제한하였을 뿐만 아니라, 내용을 배열함에 있어서도 조직신학의 전형적인 틀을 적용하여, 크게 성령님의 인격, 성령님의 사역으로 나누어서 고찰하였으며, 부록처럼 성령님과 종말론을 별도로 배정하였다.

먼저, 최윤배는 박윤선의 성령 이해는 애초부터 삼위 하나님의 제3위격이라는 사실을 전제하면서 형성된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특별히 최윤배는 성육신한 예수를 향한 성령의 사역과 부활하여 영광을 입은 예수께서 파송하는 성령이라는 이중적인 관계를 통하여 성령과 그리스도의 관계를 파악함으로써 성령과 그리스도는 외(外)삼위일체적인 측면에서 상호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음을 박윤선이 인식하였을 것이라고 읽고 있는 듯하다. 더 나아가서 성령은 삼위 하나님의 제3위에 해당하기 때문에, 내(內)삼위일체적 관계까지도 포괄할 수 있다고 파악하는 듯하다.

다음으로, 최윤배는 성령의 사역을 논구하였다. 박윤선이 성령의 사역을 이야기할 때, 창주주와 섭리주로서의 사역과 구속주로서의 사역을 구별하여 다루었다는 사실을 최윤배는 지적한다. 이러한 두 측면의 성령의 사역은 항상 방편(media)과 함께 동반된다는 것이 박윤선의 기본적인 입장이었다. 최윤배에 따르면, 창조주와 섭리주로서의 성령의 일반 사역은 일반계시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박윤선은 이것을 일반은총으로 파악하였다. 그런가 하면, 성령의 특별 사역은 하나님의 말씀을 방편으로 삼아 구체화된다. 최윤배의 연구에 따르면, 박윤선은 성령의 특별한 사역이 대략 다음의 네 범주를 중심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보았다. ①구원과 관련될 때, 성령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한 개인에게 적용한다. ②교회와의 관계에서 성령은 교회를 세우고 양육하는 사역을 하되, 은총의 방편을 사용하고, 은사를 베풂으로써 그렇게 한다. 특히 성령과 은총의 방편과의 관계를 이해할 때, 박윤선은 로마가톨릭교회의 사효론(ex opere operato)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은총의 방편에 대한 성령의 수위성을 항상 유지하였다. 은사를 이해함에 있어서 박윤선은 계시적인 은사와 비계시적인 은사를 나눈 후 전자는 종결되었으나, 후자는 지속된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물론 지속된다고 믿는 은사 역시 주의하여 받아들일 것을 강조한 것으로 최윤배는 박윤선을 이해한다. ③성령세례와 성령충만과의 관계를 이해함에 있어서, 박윤선이 전자는 구속사적인 사건으로, 후자는 개인적인 사건으로 적용되어야 함을 말한 것으로 최윤배는 이해한다. ④종말과 관련하여, 박윤선은 신약의 종말개념을 성령의 사역과 긴밀하게 연결 지었으며, 성령은 하나님나라를 진흥하게 함으로써 시작된 종말과 완성될 종말 사이를 견인하는 분으로서 성령을 파악하였다고 최윤배는 읽었다.

이상의 논의의 매듭으로서, 최윤배는 박윤선의 성령론은 삼위일체적이며, 그리스도 중심적이고 인식론 중심적이며, 성령론적 기독론과 기독론적 성령론의 균형이 잡혀 있으며, 일반사역과 특별사역을 망라하며, 성령론적인 교회론이 기독론적 교회론과 균형을 이루며, 신약의 종말 개념을 포괄하는 측면이 성령의 사역에 반영되어 있으며, 은사 이해에 있어서 균형 잡힌 시각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볼 때, 개혁교회의 전통에 서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고 결론을 내린다.

 

2. 논평자의 논평

 

사실, 박윤선이 성령론과 관련하여 거의 논란의 여지가 없을 만큼 정리된 이해를 제출하였기 때문에, 그리고 최윤배가 박윤선의 성령과 관련한 신학적 사고를 잘 배열하는데 만족하였기 때문에, 특별하게 논평할 것이 없다는 것이 논평자의 솔직한 판단이다. 그러나 생산적인 대화를 위하여 몇 가지 제안을 하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한다.

 

1). 긍정적인 점

 

① 박윤선의 성령론의 어떤 한 부분을 하이라이트하지 않고, 전체의 구조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접근한데서부터, 독자들이 박윤선의 성령론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는 점에서 이 논문의 생산적인 역할을 본다.

② 성령이 성부와 성자와 동등하시다는 점에서 참 하나님이시고, 위격으로는 구별된 제3위임을 잘 보여주었다.

③ 성령론적 기독론과 기독론적 성령론의 구조를 통하여 박윤선의 성령론을 읽어나감으로써 현대신학적인 관심사와 박윤선의 관심사를 비교할 수 있는 윤곽을 최윤배가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④ 성령의 일반사역과 특별사역을 나누어서 언급함으로써, 박윤선의 관심사가 어디에 집중되는지를 예측할 수 있도록 독자를 배려하였다고 판단된다.

⑤ 박윤선이 은사 이해에 있어서, 개혁교회의 신학적인 논의의 전통-벤자민 월필드나 루이스 베르꼬프의 견해에 비추어볼 때-보다는 교회 현장을 신중하게 배려하는 신학을 전개하였다는 사실을 보도록 도와주었다.

⑥ 종말을 성령의 사역을 논의하는 큰 맥락으로 파악하지 않고 따로 떼어서 논의함으로써, 양자의 관계를 보다 선명하게 볼 수 있도록 한 것이 최윤배가 취한 독특한 접근방식이다.

 

2). 아쉬운 점

 

① 박윤선의 성령론을 읽어 들어가는 틀을 전형적인 조직신학적 방법(locus)을 택함으로써, 박윤선의 성령론의 매력적인 국면을 도드라지게 드러내는데 약점을 드러내지는 않았는지 하는 아쉬움이 있다. 예를 들어서, 소제목을 삼위일체를 중심으로 본 박윤선의 성령론, 성령론적 기독론과 기독론적 성령론을 통해서 본 박윤선의 성령론, 일반사역과 특별사역을 통해서 본 박윤선의 성령론, 은사의 지속성과 비지속성을 통해서 본 박윤선의 성령론, 신약의 종말개념을 통해서 본 박윤선의 성령론과 같은 내용으로 더욱 분명하게 배정했더라면 더 역동적인 내용을 가진 논문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② 성령론적 기독론과 기독론적 성령론의 구조에서 박윤선의 성령론을 읽어 들어갔으며, 또한 그런 관점에서 평가하였는데, 박윤선이 그런 관점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최윤배가 헨드리꾸스 베르꼬프(H. Berkhof)를 비롯한 현대신학자들의 논의 구조를 집어넣어서 박윤선을 읽어낸 것인지가 궁금하다. 왜냐하면, 박윤선이 현대신학자들의 논의에 등장하는 이 두 구조가 제기하는 구체적인 문제성을 과연 인식하고 있었는지가 최윤배의 글에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③ 박윤선의 성령론이 가지고 있는 내용 가운데 21세기의 현대적 문제 상황과 관련하여 더욱 발전되어야 할 부분, 예를 들어서 성령의 일반사역의 구체적인 적용의 모색과 같은 방향성을 비판적인 평가를 통하여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주었으며 좋았을 것이다.

④ 성령과 종말의 개념과의 연결은 더욱 철저하게 신학화되어 성령론 논의의 기반으로 확대 및 심화되어야 할 부분일 텐데, 단순히 따로 떼어서만 논의한 것은 박윤선의 의도를 존중하고 살린 때문인지, 최윤배가 택한 방법론 때문인지 궁금하다. 달리 말하여, 박윤선이 신약의 종말 개념의 두 측면을 성령론과 관련하여 구체적으로 언급했을 법도 한데 그렇게 하지 않았는지가 궁금하다.

 

3. 나가면서

최윤배 교수님의 논문은 박윤선의 성령신학을 존중하면서 있는 내용 그대로를 드러내고 소개하는 일에 성공하였다는데서 독자들에게 귀한 수고를 하였다고 보인다. 그의 수고를 통하여 박윤선의 신학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어서 감사했으며, 앞으로도 한국교회가 한국교회의 신학자들을 발굴하고 연구하는 일에 더욱 매진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면서, 이 섣부른 논평을 마친다.

<정암 박윤선의 성령신학>에 대한 평가

-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이한수 교수 -

 

1. 논문의 저술 목적과 접근 방식

1.1 최윤배 교수는 그동안 박윤선의 성령신학에 대한 학계의 평가가 미미하였음을 지적하면서 자신의 논문 저술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따라서 박윤선의 성령론을 오늘날의 토론의 장으로 끌어오기 위하여, 특정한 관점에서 살펴보지 않고, 그의 성령론 전반을 골고루 살펴보고자 한다”(1쪽).

2.2 이런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최 교수는 신구약 주석서들과 같은 박윤선의 다양한 저술들에 초점을 두기보다 주로 한 가지 책, [개혁주의 교리학]을 중심으로 살피고 있으며 기술 방법도 성령의 인격과 사역에 초점을 둔 조직신학적 접근 방식을 택하고 있다.

 

2. 논문의 기여와 장점

2.1 박윤선의 성령신학에 대한 전반적인 논의는 지금까지 제대로 진행되어 오지 못한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금번 최윤배 교수의 논문은 정암 박윤선 박사의 성령신학의 면면을 상대적으로 소상하게 발굴하고 소개한 공헌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초기 한국교회의 신학을 정립하는 데 크게 기여한 정암 박윤선의 성령신학을 짧은 한 논문 안에서 다 기술한다는 것은 지면상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윤배 교수는 26쪽 분량의 논문을 통해서 비교적 소상하게 기술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2.2 본인 스스로 인정하였듯이 박윤선의 모든 저술들을 연대기적으로 분석하기보다 주로 그의 특정한 저술인 [개혁주의 교리학]에 초점을 두어 성령의 인격과 사역에 관한 그의 신학 이해들을 다루었다. 결론적 제언에서 밝힌 것처럼 앞으로 박윤선의 주석들과 다른 저술들, 그리고 다양한 논문들에 반영된 박윤선의 성령신학에 대한 평가는 앞으로 진행되어야 할 과제일 것이다.

 

3. 일반적인 비평적 소견

3.1 정암 박윤선 박사는 교의신학자라기보다 성경신학자로서 평판을 가진 분이지만, 아쉽게도 그의 저술 [개혁주의 교리학]에서는 성경신학자로서의 면모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가 그의 저술에서 그는 주로 부처, 칼빈, 바르트, 베르코프, 뵈트너, 바빙크, 핫지 등과 같은 고전적 교의신학자들의 글들만 인용하여 자신의 논지를 펼쳐나갈 뿐이다. 비록 ‘교리학’ 저술을 한다고 해도 치밀한 주석 작업을 통해 성경신학적 토대를 마련하는 형식으로 교리학을 저술했더라면 하는 큰 아쉬움이 남는다. 신구약 전체 성경 저술들에 대해 그토록 방대한 주석책들을 저술한 박윤선 박사가 왜 교리학을 저술할 때는 전혀 성경신학적 접근방식을 채택하지 않고 고전적인 교의신학의 개념들이나 접근방식만을 배타적으로 채택하였는지는 의아할 뿐이다.

 

3.2 최윤배 교수는 서론에서 자신의 논문 목적에 대해서 “박윤선의 성령론을 오늘날의 토론의 장으로 끌어오기 위하여” 그의 성령론 전반을 살펴보겠다고 하였다. 최 교수는 자신의 논문에서 박윤선의 성령신학을 성령의 인격과 사역과 관련하여 아주 훌륭하게 요약하는 방식으로 기술하고 있지만 그의 성령 신학의 장점은 무엇이고 단점은 무엇인지 거의 비평적 평가를 내리고 있지 않다. 그는 박윤선의 성령신학을 ‘오늘날의 토론의 장’으로 끌어오고 싶다고 의지를 밝혔지만, 그의 신학에 대해 요약 기술할 뿐 아무런 비평적 평가를 내리지 않는 것은 왜일까? 그는 본래 단순 요약 제시를 논문의 목적으로 삼고 있어서 그렇게 했는지도 모른다. 이미 박윤선의 성령론에 대해 논문을 발표한 황창기 교수는 주로 오순절 성령강림을 논하면서 그의 성령론에 대해 여러 ‘보완점들’을 제시한 반면, 최윤배 교수는 자신이 약속한 박윤선의 성령신학을 적극적인 토론의 장으로 끌어올리지 않은 것이 아쉽게 보인다. 단지 그는 논문을 다 끝낸 결론 부분에 가서야 박윤선의 성령신학이 “신구약성경과 종교개혁전통, 특히 개혁신학 전통에 아주 근접해 있다”(25쪽)는 총괄적인 평가를 내릴 뿐이다.

 

4. 구체적인 비평적 소견

최윤배 교수는 박윤선의 성령 이해들에 대해서 대체로 비평적 평가를 내리기보다 주로 소개하는 데서 멈추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아래 비평적 소견은 박윤선 자신의 성령신학에 대해서 성경신학자인 평가자의 시각에서 제시된 것이라 할 수 있다.

4.1 박윤선은 본직이 성경신학자임에도 불구하고 구원론을 다룰 때에 고전적 교의신학자들의 번쇄한 개념들을 무비판적으로 끌어오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서 설명할 때 ‘일반적 또는 이법적 부르심,’ ‘특수계시의 말씀을 통한 부르심,’ ‘성령을 통한 내적 부르심’ 등으로 구분한다(8쪽). 하지만 신약성경에서 과연 이런 식의 구분이 존재하는지에 대해 어떤 주석적 논증이 없다. 그는 첫 번째 부르심을 복음전파와 같지는 않지만 “율법 전파의 정도”에 해당한다고 주장하지만 과연 신약성경에서 ‘부르심’의 술어를 자연계, 역사, 이성, 양심과 관련하여 사용했는지는 의심스럽다. 따라서 박윤선은 교리학을 저술할 때 대체로 성경신학자로서 자신의 자리를 떠나 있는 것으로 보인다.

4.2 성경신학자로서보다 교의신학자로서 박윤선의 면모가 드러나는 또 다른 실례는 신앙을 네 가지 범주로 구분하는 데서도 나타난다. 예를 들면, ‘역사적 신앙’, ‘이적 신앙,’ ‘일시적 신앙,’ ‘구원받는 신앙’ 등이 그것이다(10쪽). 이런 구분이 오늘날 현대적인 교의신학에서 사용되는지는 몰라도 귀신들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인정하는 행위를 과연 ‘신앙’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는지는 극히 의심스럽다. 신약성경은 사람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데, ‘일시적 신앙’이 과연 신앙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는지도 엄밀한 주석적 고찰을 해야 하지 않을까?

4.3 개혁주의 성령론에 있어서 보통 은사론은 구원론만큼 중시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때로 소홀히 취급되는 경향이 있어 왔다. 박윤선의 성령신학에서 특징적인 것은 은사론에 대한 그의 강조에 있다. 그는 교회의 본질이 은사론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은사 없이 교회의 직무를 갖는 행위에 대해 “도적이요 강도다”라는 표현까지 쓴다(14쪽). “교회는 은사의 기관적 표현인만큼 거기에서 일하는 일꾼들이 은사 중심으로 선출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그의 받은 은사에 따라서만 몸된 교회를 봉사할 수 있다. 교회에서 은사 없이 일한다는 자는 도적이요 강도이다.” 은사공동체로서 교회를 이해하려는 박윤선의 신학은 오늘날 새롭게 평가될 필요가 있지 않을까?

4.4 박윤선의 은사론은 엄격하게 “은시지속설” 범주에 속한다. 특히 병을 고치는 은사라든가 방언과 같은 은사에 대해서 “오늘날 교회에서도 이 은사는 ‘특별섭리의 형태(사도적 이적과는 다름)로 계속 존재한다”(18쪽)고 주장한다. 하지만 성령의 은사들 중의 전형적인 형태의 은사인 ’예언‘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시대에는 계시로서의 예언은 존속하지 않고, 다만 사도와 선지자의 말씀의 전달자인 성경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19쪽). 방언도 일종의 계시의 일종인데, 무슨 근거로 방언은 오늘날 지속되고 예언은 오늘날 더 이상 지속되지 않는다고 말하는가? 더욱이 그는 ’예언‘의 헬라어 어원은 ’미리 말함‘이 아니고 ’선포함‘이기 때문에, “신의 대리자가 신의 뜻을 해명하는 것으로써 ’예언‘ 곧 대언의 은사는....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일반적으로 선포하는 오늘날의 설교자의 사역으로 대체되었다고 주장한다(19쪽). 과연 신약성경 어디에서 은사로서 ’예언‘을 설교로 동일시하는 곳이 있는가? 선포하고 교훈하는 기능에 있어서 예언과 은사가 중첩된 면이 없지 않으나 이 두 개념은 엄연히 구분된 개념이다. 전자는 하나님에게서 직접 받은 계시를 선포하는 것이지만, 후자는 기존의 말씀 전승을 해석하여 선포하는 것으로써 엄격하게 구분되어야 하지 않을까?

4.5 “성령세례와 성령충만”(21쪽)을 다루는 부분에서 박윤선은 성령세례를 “언약에 참가함”이란 뜻으로 정의한다. 그가 이렇게 성령세례를 이해한 데는 고린도전서 12:13의 본문에 기초해서 그렇게 정의하지만, 성령세례란 동일한 술어를 사용하는 사도행전 1:5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바울은 성령세례란 술어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구성원이 되는 구원론적 개념으로 사용하는 반면, 누가는 지상사역 기간 동안에 구원을 이미 경험한 120문도들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을 지시하고 있기 때문에 바울과 누가가 동일한 술어를 다른 의미로 사용했을 가능성에 대해서 논의조차 하지 않는다.

 

5. 결론적 소견

박윤선은 ‘교리학’이란 제목의 저술을 했기 때문에 기존의 교의신학적 개념들을 끌어다 썼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최윤배 교수의 논문은 주로 [개혁주의 교리학]에 초점을 두어 논문을 썼기 때문에, 성경신학자로서 박윤선의 면모를 드러내는 데는 논문 범위상의 한계가 있지 않나 사료된다. 아마도 이 부분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평가는 다른 연구자들의 몫으로 넘겨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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