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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박윤선의 구약신학과 주경신학에 대한 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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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선의 구약신학과 주경신학’에 대한 논평

 

성주진 교수(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구약학)

 

 

‘박윤선의 구약신학과 주경신학’을 읽는 동안 시종일관 감사한 마음이 떠나지 않았다. 학문적 진지함과 신학적 성찰, 그리고 신앙과 혼이 담긴 논문을 읽는 독자는 행복하기 때문이다. 논찬은 먼저 간단하게 개요와 특징을 살핀 후 논평하는 방식으로 전개될 것이다. 이 논문은 크게 서론(I), 본론(II, III), 결론(IV, V)으로 이루어져 있다.

 

I. 간략한 박윤선의 신학전기

정암의 신학적 전기는 주로 그의 자서전 『성경과 나의 생애』에 기초하여 신학의 형성과 저술의 관점에서 약술된다. 정암의 신학적 전기는 1913년 9살 때 한학을 공부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1979년 3월 성경주석 완간 감사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마친다.

 

II. 박윤선의 <구약신학>

논문은 정암의 구약신학이 게할더스 보스의 성경신학 편제를 그대로 따랐다는 설명을 소개한 후 전체적으로 볼 때 정암이 하나님의 구원의지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나머지 인간의 응답과 책임의 중요성을 소홀히 취급했다고 비판한다. 김회권은『성경신학』에서 구약신학을 해설하는 아홉 장 중 여섯 장은 내용을 요약, 소개할 뿐 비판을 삼간다. 그 여섯 장은 3장(홍수 이전 계시와 노아시대의 계시), 4장(선민국가의 기본계시), 6장(예언시대의 계시), 7장(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 8장(사후 생명 불멸), 9장(메시야에 대한 예언)이다. 다른 장들에 대에서는 요약 외에 비평이 덧붙이는데, 비평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장 기원론. 정암은 다른 학자의 주장을 인증할 뿐, 정암 자신의 창조 신학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진술하지 않는다.

2장 원시시대의 계시. 본문 주해가 신약의 그리스도적 대속사역의 광채 안에서 이루어진다. 각 역사적 단계에서 주신 하나님의 말씀과 계시의 당대적 중요성에 대한 주석이 미미하다. 결과적으로 구약 대부분은 거의 같은 메시지를 갖는다(메시야 대망적, 메시야 예고적).

5장 선민국가 조직과 관련된 계시. 정암은 출애굽 운동을 영해하여, 죄에서 구속하심을 예표하는 사건으로 해석한다. 출 6장을 비롯하여 구약의 여호와가 예수님 자신이라는 입장은 양태론적 군주신론으로 기울 우려가 있다.

전체적으로 박윤선의 구약신학은 칼빈주의 개혁주의, 즉 하나님의 주권, 개혁주의 성경관, 개혁주의 인생관, 개혁주의 과학관, 개혁주의 일반은총의 틀 안에서 이루어진다. 여기서 이상규와 간하배의 평이 긍정적으로 소개된다. “이 (개혁주의) 신학이 한국교회 초기 선교사들의 사상에서 연원하지만 박윤선은 40여 년간의 교육활동과 저술, 성경석의 집필, 목회활동을 통해 개혁주의 신학을 소개하고, 석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개혁주의적 삶의 모본을 보였다”(이상규). ‘박윤선은 단순한 근본주의 차원을 넘어서..... 칼빈주의라는 보다 원시적인 안목에서 바라보고, 또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원했다’(간하배).

 

III. 박윤선의 성경 전권 주석과 구약 주석

 

김회권은 12권으로 구성된 정암의 구약주석을 권별로, 책별로 소개하고 비평한다. 세심한 일람표(출간연도별?)는 1957년 3월 시편 주석 발간부터 1979년 10월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주석 발간까지 23년에 걸친 구약주석작업의 대장정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정암의 구약주석은 탁월한 어학실력, 주석가적인 은사와 감수성, 당대 최고 최신 학문조류에 대한 정통한 이해에 기초하고 있는 목회적 학문적 주석이라고 평가된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주해작업에서의 진지성, 치열성, 감수성이 편집상 전체적으로 종합되지 않은 점이다. 서사적 읽기와 주석이 미미하여 유기적 응집력이 떨어진다. 문예적 읽기와 자세히 읽기 등의 감동이 없다. 수록된 설교는 교훈적 훈도적 관심에 치우쳐 서사적 완결성과 문학적 역동성과 전진감을 향유하는 데 방해를 줄 수 있다.

12권의 주석 중 두 권, 즉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주석과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주석은 책의 내용과 특징을 소개하거나 경건과 학문이 주석작업에 관여하는 예를 소개한다. 그러나 다른 10권의 주석에 대해서는 주석 내용에 대한 소개에 이어 지적과 비판이 가해진다.

 

1) 창세기, 출애굽기 주석. 김회권은 종교사학파적 구약연구에 대한 정암의 반대에 대하여 피터 엔즈(Peter Enns)의 『성육신의 관점에서 본 성서영감론』을 인증한다. 엔즈가 성육신 유비를 들어 고대근동자료(신화 포함)와 성경자료의 유사성을 인정하고 설명한 사실에서 보듯이, 유사성이 반드시 성경의 영감성과 계시성을 훼손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2) 사무엘, 열왕기, 역대기 주석. 세 역사서는 이스라엘 왕국의 통사를 재구성하는 데 보완자료로 간주될 뿐이다. 결과적으로 각 책이 특색 없이 뒤죽박죽 주석된다. 이 과정에서 각책의 신학적 메시지나 아젠다가 평탄화 작업의 희생물이 된다. 역대기서의 신학적 고유가치를 천착하는 일에도 관심이 없다. 역사실증주의적 관점에서 주석한다. 구약사를 메시야의 도래를 향하여 전진하는 역사로 보고, 당대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역사를 창조하고 향도하는지에 대한 주석적 관심이 미흡하다.

3) 이사야서 주석. 연대착오(이사야가 주전 800년경에 예언?)를 지적하며, 야웨가 바로 그리스도라고 보는 것은 양태론적 군주신론에 해당된다고 비판한다. 8세기 당시 역사의 빛 가운데 해석하지 않고 곧 바로 그리스도 구속사역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하는 것은 가현설적 예언 이해로 흐를 가능성이 있다. 40장 이후 모든 예언도 교회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하고, 당대적 의미로 석명하고자 하지 않는다.

4) 예레미야, 예레미야 애가 주석. 성경 전체의 저자를 하나님이라고 보는 관점이 지나치게 우세하여 인간 저자의 고뇌와 영적 분투와 탄식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개혁주의는 하나님의 아가페와 인간의 에로스를 동시에 주목하는 신학전통인데, 정암의 주석은 대체로 인간보다 하나님께 초점이 있다. 수록된 설교에서는 구체적인 역사성과 맥락성이 사상된 채 보편적 인간을 향한 말씀으로 재해석되고 있다. 당시 청중의 입장에서 재구성된 후에야 이차적으로 보편적인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외침으로 재해석 될 수 있을 것이다.

5) 에스겔, 다니엘서 주석. 다니엘서를 예언서로 보는 입장을 비판적으로 소개한다. 정암은 다니엘서를 메시야 예언집으로만 해석하는 것 같다.

6) 소예언서(소선지서) 주석. 아모스서 주석은 역사적 문법적 주석에 가장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요나서에서 ‘큰 성’은 수도를 가리키는데, 니느웨는 기원전 704-681년에 앗시리아의 수도였으므로 750-745년에 활약한 요나가 수도 니느웨에 갈 수 없다. 성경의 영감성과 신언성과 계시성은 역사성보다 더 큰 개념이므로 랑케식 역사실증주의에 과도하게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7) 욥기, 전도서, 아가서 주석. 정암은 욥의 절규를 성도의 분투 정도로 이해한다. 전도서의 경우 솔로몬이라고 쓰지 못한 원저자의 의도를 헤아리지 못한다. 아가서 주석은 기독교적 모형론(알레고리?)을 취하여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로 해석한다. 일단 문자적으로 읽고 음미한 후에야 모형적 해석의 길도 열릴 것이다. 결과적으로 개혁주의 신학의 주요주제인 육체성과 남녀간의 사랑을 가볍게 여기는 듯하다. 설교재료나 설교를 내놓지 못하는 것도 이러한 이해 때문이다.

8) 시편 주석. 성경에는 신화가 없다는 입장은 성경의 모든 기록을 사실 역사로 환원하려는 과도한 역사실증주의에 해당한다. 시의 문학적 영적 감동을 충분히 살려내지 못한다. ‘다윗에게’(개역: ‘다윗의 시’)라는 표제가 붙은 시편들을 다윗 저작으로 돌릴 뿐만 아니라, 아삽/고라 자손의 시까지도 다윗의 저작으로 보려한다(창세기 주석 평 중에서)

9) 잠언 주석. 해석학적 지평융합이 강조되는 오늘날 엄격한 칼빈주의적 원칙에 입각하여 지극히 변증적인 동기에서만 동양 철학을 인용할 것이 아니라, 고상한 동양학적 세계와 통섭함으로써 성령의 인도와 감화를 제한하지 말아야 한다.

10)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주석. 뒷부분에 첨가된 비교종교학에서 동양철학은 지평융합의 동반자가 아니라 변증과 배척의 대상에 불과하다.

 

IV. 박윤선 구약주석의 의의와 특징

박윤선은 주석에서 성경본문의 권위를 입증하는 일에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성경전권주석은 경건과 학문의 결정체이자 성서주석학사의 위대한 업적이다. 또한 칼빈주의 신학의 효과적인 보급기지였다.

 

V. 박윤선 주석의 한계와 우리 시대의 개혁주의 주석의 과제.

1) 한계 (1) 박윤선 주석은 교회론적 조망과 기독교인들의 관심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개혁주의 신학의 장엄함과 포괄성, 차안적인 차원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한국적 상황에 대한 신앙의 고뇌가 배어나오기보다 한국교회의 주류적 쟁점이 되기 이전의 서구신앙의 쟁점들에 지나치게 몰입한 인상을 준다.

(2) 인간의 역사가 하나님의 영에 의해 사상되거나 주변화된다. 시대의 고뇌와 분투가 부각되지 않음으로써 개혁주의적인 균형감각이 결여되었다. 민족적 수난의 시기에 신학적인 저항을 하지 못하고 악에 대해 무관심 또는 순응주의적 입장을 보인 것은 아닌가.

(3) 자연계시와 특별계시를 둘 다 강조하는 개혁주의 전통을 살리지 못한 채 동양사상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한다.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순결주의 때문에 동양철학 사상을 빌어 성경을 해석해 보려는 해석학적 시도는 하지 않았다.

(4) 성서신학과 교의학의 경계선을 그었던 가블러의 성서신학 독립선언에 좀 더 충실했어야 했다. 교훈을 찾아내려는 의도가 구원계시의 발전과정을 추적하려는 의도보다 더 부각된 듯하다.

 

2) 과제

(1) 정암이 제시한 해석원리들을 더 깊이 연구하고 학문적으로 체계화할 필요가 있다.

(2) 개혁주의적 정통주석을 협애화하지 말고 원래의미를 잘 살리는 주석전통을 확립할 필요가 있다.

(3) 정암의 유산을 창조적으로 계승하여 좀 더 자세하고 포괄적이고 깊은 연구와 주석사업을 통하여 정암의 유산을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논평

 

1) 신학적 전기. 정암의 신학적 전기가 1979년 3월 성경주석 완간 감사예배를 끝으로 중단된다. 그 이후 소천(1988.6.30)까지 9년의 족적이 기록되지 아니하였다. 신학교육 등의 족적을 생각할 때 사라진 9년이 신학적 전기에 포함되어야 하지 않을까.

 

2) 연구자료. 짧은 시간에 적지 않은 1, 2차 자료를 수집, 섭렵, 연구, 참고하였다. 그러나 정암에 대한 평가가 정암을 숭모하는 경건주의적 문학에 해당된다는 말은 지나친 것 같다. 각주에 언급된 학자들 외에 김길성. 김정우, 장해경, 정승원 등은 나름대로 객관적인 시각에서 정암의 신학과 사역을 보려고 애쓰면서 필요한 지적을 빼놓지 않았다.

 

3) 구약신학 비판 논평

정암의 구약신학이 포괄적인 신학체계를 갖지 못하고 구원론적인 강조를 가지는 점은 그의 구약신학이 포함된 『성경신학』이 정암 스스로 서론에서 밝힌 바와 같이 편저의 성격을 가지는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정암은 포괄적인 성경신학을 개진하기보다 당대의 유력한 성경신학을 소개하는 데 주력한 것 같다.

1장 기원론. 구약을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 해석한다는 것 자체는 구약 주석의 중요부분이다. 구원론에 치중한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이 정암의 구약주석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2장 원시시대의 계시. 구약주석이 신약의 그리스도적 대속사역의 광채 안에서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말씀과 계시의 당대적 중요성에 대한 주석이 미미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구약 대부분이 거의 같은 메시지를 갖는다는 지적도 시대적인 상황과 필요성을 감안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정암의 구원론에 대한 강조도 절대주권에 대한 경시가 아님이 그의 구약주석 전반에 나타난다.

5장 선민국가 조직과 관련된 계시. 출애굽을 죄에서 구속하심을 예표하는 사건으로 해석하는 것이 출애굽 운동을 영해하는 것이라는 관점은 동의하기 힘들다. 개혁신학은 예표론을 부인하지 않는다. 출애굽과 같은 구약 사건이 그리스도의 구원을 내다본다는 것은 예표론의 가장 중요한 내용 가운데 하나이다. 이것을 영해라고 할 수 없다. 이사야 6장의 여호와가 예수 그리스도, 즉 구약의 여호와가 예수님 자신이라는 입장은 재고할 필요가 있으나, 양태론적 군주신론을 우려할 정도는 아니라고 본다.

 

4) 주석 논평

(1) 문학적 접근방법. 김회권은 도처에서 주석의 문학적 민감성을 언급한다. 그러나 이는 상당부분 시대에 앞선 주문이다. 문학적(문예적) 접근방식(literary approach)이 해석방법론으로 정착된 것은 오래 되지 아니하였다. ‘자세히 읽기(close reading)’는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방법론을 정암의 주석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리이다.

(2) 시의 표제. 표제가 본문보다 후대의 것이기 때문에 ‘다윗에게’라는 표제만을 가지고 어떤 시가 다윗의 시라고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표제의 내용을 하나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도 문제이다. 저자에 대한 믿을만한 전통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3) 신화의 문제. 신화에 대한 피터 엔즈의 관점은 관계된 해당 개혁주의 전통에 관한 한 시험적이고 논쟁적인 제안이다. 신화와의 유사성은 성경의 영감성과 계시성에 비추어 이해되어야 한다. 최근에 논란이 불거진 주장을 동일한 전통 안에서 3-40십년 전에 출간된 한국 주석에 대하여 요구하는 것은 지나치지 않는가.

(4) 역사서. 사무엘, 열왕기, 역대기 주석의 경우 성경은 한 분 하나님이 쓰신 하나의 책, 이스라엘 역사는 하나의 통일된 역사라는 것이 강조되는 측면도 있다. 정암 주석의 계몽적인 성격과 당시 역대기 해석의 경향을 고려할 때 역대기의 ‘현대적’ 주석은 어려웠을 것이다.

(5) 이사야 6장. 정암의 6:1주석, 즉 여호와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구약에 나타난 그리스도를 인정한다고 해서 양태론적 군주신론라고 규정하는 것도 공정하지 못하다. ‘높이 들린’이란 표현은 이사야 52에서 고난 받는 종에게도 그대로 사용된다(13절). 즉, 메시야적 함의를 생각할 수 있는 표현이다.

(6) 요나서. ‘큰 성’이 반드시 당시 앗시리아의 수도였던 니느웨를 가리키는가? 니므롯에 의해 건설된 니느웨(창 10:11-12)는 이른 시기부터 전통적으로 ‘큰 성’으로 불린 듯하다. 요나서에서 ‘큰(가돌)’이 수사적으로 사용되고 있음도 주목해야 한다(1:2, 4, 10, 13; 4:2; 4:6). 역사성의 문제에 있어서는 저자의 의도와 글의 장르가 중요하다. 저자가 역사적 사실을 의도했고 본문이 장르상 역사적 기록이라면, 역사성의 인정은 영감성과 신언성의 증거와 무관하지 않다.

(7) 역사실증주의. 논문에서는 역사실증주의가 통상적인 의미가 아닌 다른 뉘앙스로 사용되는 것 같다. 일반적으로 역사실증주의적 방법은 성경의 내용이 비과학적이라고 생각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에게 의해 성경을 해석하는 도구가 되었다. 역사적 예수 연구에서 보듯이 역사실증주의는 ‘전설과 과장으로 점철된’ 예수의 생애를 객관적 역사로 재구성하려는 경향을 가리킨다. 따라서 박윤선 목사님의 입장을 역사실증주의로 지칭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정암은 열린 역사관을 가지고, 역사로 표명된 것을 역사로 보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따라서 정암의 역사성 주장을 역사적 실증주의로 보는 것은 동의할 수 없다.

(8) 주류 입장. 논문은 명시적으로 또는 암시적으로 주류의 입장을 염두에 두고 정암의 입장을 판단하는 것 같다. 저자와 저작 시기 등에 대한 주류 입장이 중요한 참조점이다. ‘주류 입장’의 정체는 무엇인가? 이 편리한 도구가 소위 주류 입장과 보조를 같이 하지 않는 정암의 주석을 평가할 때 전횡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9) 가블러의 성경신학. 논문은 또한 가블러가 주창한 대로 교의학과 구별되는 성경신학을 반영하는 주석을 요청한다. 구속사와 구속계시의 흐름이 주석에 반영되는 것은 당연하다. 다른 한편으로 만일 정암이 철저하게 교의학과 구별되는 성경신학적 주석을 썼다면, 그의 구약성경주석이 그만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을까 질문해 볼 수 있다. 정암의 주석이 개혁신학을 전함에 있어 박형룡 박사의 조직신학책보다 사실상 더 많은 영향을 끼진 것은 그의 주석이 개혁신학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정암의 주석은 최종적인 주석으로 볼 것이 아니라 시대의 요청에 부응한 선구적 주석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 볼 때 정암 주석의 미진한 점은 후학들이 발전시켜야 할 몫이다.

(10) 용어의 사용. 정암의 신학과 주석에 대하여 오해를 불러 일으킬만한 강한 말들의 사용은 재고해야 하지 않을까? 역사실증주의, 가현설적 예언 이해, 양태론적 군주신론, 순응주의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주석작업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함으로 영혼을 구원하고 사람을 변화시키려는 일념으로 주석사업에 일생을 건 정암의 입장을 단지 한상동 등과 같은 방식으로 대응하지 않았다고 해서 순응주의라고 부를 것인가?

(11) 개혁주의. 개혁주의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논문이 말하는 개혁주의는 정암이 대변하는 개혁주의 전통과 적잖게 다른 것 같다. 이상규에 의하면, 정암의 신학적 입장은 청교도적 개혁주의 혹은 개혁주의적 정통주의이다. 이 신학은 벨직 신앙고백서(1561),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1563), 도르트 신조(1619),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그 대소요리문답(1647)으로 교리화되었다. 이 개혁주의 신학을 보통 하나님 중심, 성경중심, 교회중심 사상으로 정리하고 실제적 삶의 신학으로 강조해 왔다. 그렇다면 박윤선 목사님의 주석은 가장 개혁적 주석이라고 평할 수 있다.

 

4) 공헌 논평. 정암이 주석작업을 통하여 성경본문의 권위를 입증하려고 노력한 점을 높이 평가한다. 각 책의 주석에 대해서는 문제점을 지적하였지만, 여기에서는 정암을 향하여 최대의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정암의 성경전권주석은 경건과 학문의 결정체, 성서주석학사의 위대한 업적, 칼빈주의 신학의 효과적인 보급기지였다.

 

5) 사명과 과제 논평. 정암의 후학들은 정암의 유산을 창조적으로 계승해야 할 중차대한 과제를 안고 있다는 김회권의 지적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그러할 때에만 정암의 주석의 가치를 입증할 것이다. 그러나 계승의 의제 설정에는 더 깊은 논의가 필요하다. 역사와 하나님 나라의 전망에 대한 이해 등은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

(1) 한계1. 사람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골고루 다 갖춘 완전한(complete) 주석이 가능한가? 그리고 그런 주석이 좋은 주석인가? 주석에 요청되는 기본적인 것 외에 치우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특징이요 강조일 수 있다. 여기에 특화주석의 자리가 있다. 최근에 발간되는 적용주석(NIV Application Commentary)이 좋은 예이다. 박윤선의 주석은 경건주석, 변증주석, 설교주석의 측면이 있다.

(2) 한계2. 왜 신학적으로 저항하지 못했는가? 절대주권에 대한 강조가 섭리론적인 정적주의(정숙주의)를 가져오고 저항의식을 약화시켰는가? 정암에게도 문제 인식과 이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주석 사업을 평생의 사명으로 알고 이에 주력하였다. 아합의 시대에 엘리야뿐만 아니라 오바댜도 있지 않았는가? 신약시대에 예수님과 바울의 로마 제국에 대한 태도도 숙고할 필요가 있다.

결언

 

정암은 특정 교파나 학교가 독점해서도 안 되고, 또 독점할 수도 없다. 김회권이 강조한대로 정암의 유산은 한국 교회의 공적 자산이기 때문이다. 김회권은 박윤선 목사가 끼친 구약신학적, 구약주석적 업적을 다양한 관점에서 조명해주고 학문하는 자세를 가다듬게 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다양한 개혁주의 스펙트럼에서 유능한 학자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절실히 요청되는 때에 좋은 논문에 접하게 된 것을 감사한다. 이 논문을 계기로 정암의 구약주석을 다각도에서 더욱 깊이 이해하고 창조적으로 발전시켜서 한국교회에 더욱 유익이 되는 기회가 되기를 기원한다.

 

 

 

 

김회권의 “박윤선의 구약신학과 주경신학”에 대한 논평

김지찬 (총신대 신대원, 구약)

 

 

1 논지와 방법론

 

김 교수의 논문의 논지와 방법론은 명백하다. 논지는 박윤선의 학문은 “이제 한국교회에 남겨진 공적 자산으로 평가와 재음미, 그리고 계승과 비평의 대상”이 되어야 하기에 이전의 박윤선에 관한 논문들의 숭모적 경향을 떠나 “박윤선의 구약신학과 주경신학, 그리고 그의 구약 전체에 대한 주석을 분석하고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방법론은 “오늘날의 변화된 성경 신학적 주경 신학적 조망점에서 정암의 구약신학과 주경신학을 재검토” 하겠다는 것이다.

 

2 논문의 집행

 

김 교수는 자신의 논지와 방법론을 집행하는 일에 있어서 성공하였다고 볼 수 있다. 우선 김 교수의 논문은 박윤선의 방대한 범위의 글을 우선 네 가지로 분류하고, 그의 구약 신학과 주경 신학을 종합적으로 볼 수 있는 “교과서 형식을 빌어 쓴 변증적 구약신학과 그와 유사한 학문적 저술 그리고 구약 39권에 대한 주석 자체” 에 대해서 객관적 기술을 시도한 후에 현대 주경학적 관점에서 평가를 하고 있어서, 이런 객관적 기술 자체가 김 교수의 박윤선에 대한 평가의 적절성을 떠나서 그 자체로 유익한 자료가 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이런 자료에 근거하여 김 교수는 현대의 구약 주경신학적 입장에서 박윤선 박사의 글들을 어떻게 평가하고 재음미하고 계승할 수 있는지를 학문적으로 분석하고 검토하면서 박윤선의 학문을 어떻게 비평하고 계승해야 하는지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 점에서 김교수의 논문은 박윤선의 구약-주경 신학을 이해하고, 후학들이 그의 신학을 창조적으로 계승하는 중요한 디딤돌을 제공하였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고 본다

 

3 박윤선에 대한 긍정적 평가

 

박윤선에 대한 김 교수의 평가는 비교적 객관적이며, 긍정적 평가나 부정적 평가 모두 귀기울일만하다.

 

우선 김회권 교수는 박윤선이 근본주의 신학자라기 보다는 개혁주의 신학자로서 구약 신학과 주경 신학을 펼쳤다는 이상규와 간하배의 평가를 그대로 수용하면서 경건과 학문을 조화시키려고 애쓴 한국 성경 신학계의 거대한 발자취를 남긴 인물임을 긍정하고 있다.

 

(1) 개혁주의 신학자

 

김회권 교수는 박윤선의 구약 신학은 칼빈주의 개혁신학의 틀, 특별히 성경의 권위와 성경 무오설 안에서 펼쳐진 신학이었다는 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심지어는 박윤선을 비판하는 문맥에서도 그의 개혁주의적 관심만은 칭찬하고 있을 정도이다.

 

“많은 경우 정암의 주석집에 실린 설교들은 비교적 평이한, 교훈적, 훈계적인 설교다. 설교의 논리가 깊거나 정교하지는 않으나 삶의 현장과 말씀을 연결하려는 개혁주의적 관심은 그의 설교 모두에 잘 드러나고 있다.”

 

박윤선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 김 교수는 결코 박하지 않았다. “박윤선의 전질성경 주석은 주석의 불모지에 피어난 한 송이 꽃과 같다” 고 칭찬할 정도이다.

 

(2) 경건과 학문의 조화

 

김교수는 “박윤선 주석이 목회적이면서도 학문적인 성격을 띠게 된 것은 정암의 탁월한 어학실력과 주석가적인 은사와 감수성, 당대의 최고 최신 학문 조류에 대한 정암 자신의 정통한 이해가 구비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는 점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 특별히 박윤선이 경건과 학문을 조화시키려고 하였음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특히 여호수아 12-19장에 나오는 지명들에 대하여 주석하기 위하여 각종 책들과 씨름하며 하나님께 기도로 매달렸음을 고백한다. 경건과 학문이 잘 조화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이어 그는 성경권위의 확증에 그의 주석작업이 얼마나 투신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작은 고백을 한다. ‘오늘날 세계교회의 병통은 성경의 권위를 오해한데서 생긴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권위를 올바로 깨닫고 그대로 믿으며 증거하는 운동은 우리의 시급하고도 중대한 사명이다.’”

 

김회권 교수는 박윤선의 구약신학과 주경 신학에서 개혁주의 신학과, 그리고 경건과 학문의 조화적 관심에 대해서는 후한 평가를 주고 있다.

 

4 박윤선에 대한 부정적 평가

한편 김회권 교수의 박윤선에 대한 비평은 지금까지의 숭모적 태도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본인의 의도를 잘 수행해내고 있다. 김 교수의 비평은 박윤선의 신학을 창조적으로 계승 하려는 모든 후학들이 귀를 기울여야 할 내용을 담고 있다.

 

(1) 계시의 당대적 의미에 대한 주석적 관찰의 결여와 구원론적 해석의 경향

 

김회권 교수는 “박윤선의 구약주석은 거의 철저하게 신약의 그리스도적 대속사역의 광채 아래서 진행” 되고 있기에 “구약 각 책과 각 역사적 단계에 주신 하나님의 말씀과 계시의 당대적 중요성에 대한 주석적 관찰이 현저하게” 적다는 점을 단점으로 지적한다. “박윤선에게 구약 대부분은 거의 같은 메시지 (메시야 대망적, 메시야 예고적) 를 갖고” 있기에 “여자의 후손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 중심의 구약주석” 이 이루어짐으로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구약신학이 너무 구원론적으로 치우쳤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고 지적한 점을 적절하다고 볼 수 있다.

 

(2) 하나님의 절대 주권의 지나친 강조로 인한 인간의 신앙적 책무 언급 부족

 

김회권 교수는 박윤선의 신학에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구원의지가 강조되는 경우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 응답 및 책임의 중요성이 부각되어야 할 만큼 강조되지 못했다” 는 점을 간파해 냈다. “이 세상에서의 신자들의 바른 삶과 역사상 준동하는 악과 직면한 인간의 윤리적 신앙적 책무가 거의 논의되지 않았” 기에 “하나님의 구원사에 대한 인간의 응답, 의심, 책임적 투신 등을 피력하는 성문서가 거의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는 점을 정확하게 꼬집어내고 있다.

 

김회권 교수는 박윤선 박사의 단점을 지적하면서, 그의 주석 안에 인간편의 고뇌와 고통에 대한 언급이 적음을 잘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정암의 주석은 예레미야서의 서사적 문학적 전진(literary movement)과 구조를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절 단위의 분절적 주석, 말씀의 교훈화, 윤리-도덕화를 지향하는 설교들은 예레미야서에 바탕하지 않고도 작성할 수 있는 설교다. 모든 성경의 저자를 하나님이라고 보는 관점이 지나치게 우세하여 인간 저자의 고뇌와 영적 분투와 탄식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개혁주의는 하나님의 아가페와 인간의 종교적 상승감정이자 열정인 에로스를 동시에 주목하는 균형의 신학전통인데 정암의 주석은 대체로 인간보다 하나님께 중심초점이 옮겨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면 (예레미야) 35장의 여호야김의 예레미야 말씀 두루마리 분서 사건을 중심으로 구성한 설교재료 부분에서도 정암은 예레미야가 당한 고뇌에 별다른 주목을 하지 않고, 대신 성경을 불사른 자의 죄, 성경기록의 목적(성경기록의 목적은 역사적 사건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후세에 전하기 위한 것이며 그것은 역사적 제한을 경유하여 전파되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주장, 417쪽)을 논한다. 오히려 여기서는 배척받은 예언자의 탄식 등에 대한 설교자료를 뽑아내는 것이 개혁주의적인 균형감각이 아닐까?

 

(3) 문학적 감동이 결여된 verse by verse 에 의한 running commentary에 불과

 

김회권 교수는 박윤선의 주석이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단점을 잘 포착해내고 있다. 한절 한절을 주석해가는 전통적 주석의 한계를 지니고 있기에 성경 본문의 거대 담론이 드러내는 감동, “성서 본문의 웅장한 서사 구조나 시적인 점층 구조” 등을 드러내지 못하는 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또한 문학적 흐름과 기승전결 구조 혹은 교차대조 구조 등에 대한 주목없이 각 절이 혹은 각 절들의 소단락이 병렬적으로 주석되기 때문에, 즉 서사적 연결구조가 주목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각 책이 발출하는 문학적 감동의 점층 효과가 반감된다.”

 

5 논란 거리

 

앞서 말한 대로 김회권 교수의 박윤선에 대한 평가는 논평자가 지면 관계상 언급하지 않은 그 밖의 많은 통찰력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점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다. 무엇보다도 “그 (박윤선) 의 주석은 성서신학과 교의학의 경계선을 그었던 요한 필립 가블러의 성서신학 독립선언에 좀 더 충실했어야 했다” 는 평가는 논란의 요소를 많이 품고 있다. 우선 김 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넷째, 그의 주석은 성서신학과 교의학의 경계선을 그었던 요한 필립 가블러의 성서신학 독립선언에 좀 더 충실했어야 했다. 구약신학은 조직신학(교리)으로부터 독립되어 온 성서신학의 한 분야로서 구약성경의 독특한 신학적 자산 (資産)을 발굴하고 기독교신앙에 상관시키는 학문이다. 1787년 3월 30일 요한 필립 가블러 (Johann P. Gabler)가 독일 알트도르프 (Altdorf) 대학 교수 취임식에서 가블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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