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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경의 열매] 김선도 <1> 성시화된 평북 선천서 태어난 것은 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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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30년 12월 2일 평안북도 선천군 선천읍에서 아버지 김상혁과 어머니 이숙녀의 4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김탁하 장로는 평양신학교에서 수학했으며 평북 정주에서 강도사로 활동했다.

선천은 동양의 예루살렘이라 불리던 곳이다. 시내를 4등분해서 동서남북에 교회가 하나씩 있었는데 이사를 가면 그 지역 교회를 다녀야 했다. 1890년 북교회가 시작됐고 1907년 양전백 목사가 목회할 땐 1500명이 모였다. 1910년엔 김석창 목사가 남교회를 개척했는데 1200명이 모이는 교회로 급성장했다. 당시 선천읍 인구가 5000명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두 교회 성도만 해도 인구의 절반이 넘었다. 당시 5일장이 주일과 겹칠 때면 장사꾼들이 장사하러 왔다가 인파를 따라 교회까지 가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그만큼 선천은 성시화된 곳이었다.

선교사들과 김석창 목사는 1906년 미션스쿨인 신성학교를 세웠다. 신성학교는 백낙준 전 연세대 총장, 평생 인술을 베푼 장기려 박사, 장로교 신학의 거목인 박형룡 박윤선 박사, 영등포교회 원로목사였던 고 방지일 목사 등 크리스천 지도자를 배출했다.

선천은 내게 축복이었다. 기독교의 살아있는 역동성과 원형을 가르쳐줬기 때문이다. 우리 가정은 선천의 기독교 문화를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어머니는 어려서부터 교회밖에 모를 정도로 신앙심이 깊어 새벽기도와 하나님 제일주의, 십일조와 예배를 목숨처럼 지키는 분이었다. 나는 장로교 가정에서 청교도적인 신앙의 엄격함을 습관처럼 체득했다. 어머니로부터 신앙을 통해 인간의 존재 목적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 성실과 선행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일제 강점기 청교도적 신앙은 도피처 같은 역할을 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우연히 ‘킹’이라는 일본 잡지를 봤다. 거기에 마적단 이야기가 나왔는데 우리 독립군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비밀리에 전승되는 장백산(백두산) 독립운동가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나도 모르게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이 움터 올랐다.

‘그래, 백두산을 찾아가자. 거기서 독립운동 유격대에 참여해 나라를 구해내자.’ 앞뒤 재지도 않고 짐을 쌌다. 그러다 아버지에게 발각됐다. “선도, 네 이놈. 지금 어딜 가려는 것이냐.” “독립운동을 하려고 합니다.” “이 나라가 독립하려면 힘을 키워야 한다. 어린 네가 독립운동을 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을 열심히 믿고 실력을 키운 다음 운동을 해도 늦지 않다.” “예….”

중학교 2학년 때까진 일본말만 썼다. 학교 수업이 끝나고 동네에 와서 놀 때도 일본말을 쓰라고 했다. 우리말을 쓰면 벌표 10장을 받았다. 게다가 학교 옆에 가미다라라는 신사가 있었는데 일왕 히로히토의 유년 시절 사진이 있었다. 우리는 거기에 절을 해야 했다.

억눌렸던 감정은 졸업식 때 폭발하고 말았다. 나는 친구들과 함께 학교 유리창에 돌을 던졌다. 그리고 이렇게 외쳤다. “나는 한국 사람이다. 내 이름은 마츠나가 센토가 아니라 김선도다. 내가 왜 일본 신사에서 절을 해야 하나.”

정리=백상현 기자 [email protected]

약력=△1930년 평안북도 선천 출생 △해주의학전문학교, 감리교신학대학 졸업 △미국 애즈베리신학대학원, 호서대, 감신대, 서울신대 명예박사 △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회장 △세계감리교협의회 회장 △한국월드비전 이사장 △국민훈장 목련장 수상 △서울 광림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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