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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정암의 개혁파적 교회론에 대한 고찰에 대한 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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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구교수의 “정암의 개혁파적 교회론에 대한 고찰”에 대한 논찬

아신대 정홍열 교수

 

 

논찬자의 교단적 배경이 예장 통합 소속 목사라서 정암 박윤선목사님에게 신학을 배울 기회도 없었고 그분의 책조차 읽어본 적도 없었습니다. 그런 논찬자로서 이번에 정암에 대한 이승구교수의 글을 논찬하게 된 기회는 매우 특별하고 유익한 경험이었음을 먼저 밝힙니다.

논찬자는 먼저 정암의 교회론에 대한 평가를 언급한 후, 정암의 교회론에 대한 이승구교수의 글에 대한 논찬을 하고자 합니다.

 

논찬자는 이 글을 위해서 정암의 『개혁주의 교리학』의 교회론부분을 정독해 보았습니다. 주경신학자로 알려진 정암의 교리학을 읽는 것은 색다른 즐거움을 주었습니다. 성경신학적 조망이 곳곳에 배어 있어서 자칫 조직신학자들이 놓치기 쉬운 성경적 근거를 탄탄하게 뒷받침하는 정암의 교리적 진술은 다른 조직신학자들의 교리서에 비해 설득력을 높여주는 장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교회론의 중요 주제들을 소개하면서 교회가 반드시 기억하고 실천해야할 가르침을 목회적 관점에서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자상함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논찬자는 정암의 교회론이 오늘의 한국교회가 반드시 배우고 간직해 나가야 할 훌륭한 신학적 보물이라는 점에 깊이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논찬자는 정암의 교회론 가운데 크게 세 가지 특징이 있다고 봅니다: 성경적이고 종교개혁적(개혁교회적)이고 실천적(목회적) 성격입니다.

첫째 정암의 교회론은 성경적입니다. 교회론의 주요주제들의 정당성을 철저하게 성경적 근거에 의하여 판단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정암의 교회론은 종교개혁의 전통에 튼튼히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도 개혁교회적 강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정암의 교회론의 종교개혁적 특징은 교회의 정치체제와 직분제도와 교회의 영적권세(치리회)에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말씀과 성례를 은혜의 방편으로 강조하는 점에서도 종교개혁적 전통을 충실히 따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셋째로 정암의 교회론은 한국교회의 실제적 상황에서 등장하는 여러 구체적인 문제들에 대한 실질적인 답변을 목회적 관점에서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에 만연해 있는 목회자의 권위문제와 교회조직의 권위주의화에 대해 신랄한 비판은 정암이 한국교회의 현실에서 깊이 경험했던 왜곡된 구조에 대한 구체적 비판과 대안으로 평가됩니다.

그런 점에서 정암의 교회론은 방향을 잃고 표류하는 한국교회와 목회자들은 물론 평신도들에게도 길을 제시해 주는 매우 유익한 가르침이라 여겨집니다.

단지 정암의 교회론에 사족을 붙인다면, 정통 교리학자가 아닌 상황에서 기술된 교회론이다 보니 다소 교회론의 중요한 주제들에 대한 논구가 단순하고 충분히 전개되지 못한 점들이 있어서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이런 아쉬움은 교회의 종별(신학적 종별) 과 교회의 본질에 대한 내용이 다소 부족하지 않나 싶습니다. 예를 들어 교회의 사도성은 지금까지도 논쟁이 치열한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단지 5줄로 그리고 교회의 불멸성은 3줄로 언급하고 마친 점을 보면서 좀 더 자세한 설명이 있었더라면 더 유익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피력합니다.

 

이승구교수의 이 글에서 스승을 향한 존경심과 애정을 함께 읽을 수 있어서 논찬자의 마음을 따듯하게 해주는 깊은 감동이 있어서 더욱 좋았습니다.

이 교수는 정암의 『개혁주의 교리학』을 기본으로 하여 합신교단의 헌법주석서인 『대한 예수교 장로회 헌법주석』 그리고 정암의 여러 성경주석들을 참고하면서 정암의 교회론을 성실하게 소개해 주었습니다.

이승구교수의 논문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는데, 정암의 교회론 전체를 관통하는 성격으로 개혁파를 제시하면서 제 I부를 “개혁파적 교회론”으로 소개한다. 이 부분은 정암의 『개혁주의 교리학』의 교회론 부분을 요약하고 있다. 이승구교수는 다시 정암의 교회론 중 한국상황에 직접 관련된 내용들을 II부에서 “한국상황에서 정암 교회론의 특별한 강조점”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정리한다. 구조적 권위와 목회자에 대한 지나친 절대화, 교회조직의 권위주의화에 대한 혁파의 주제로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강조하는 정암의 교회론적 특징을 잘 소개해 준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교회 안에서의 다스림의 주체이시고 그 외의 어떤 조직이나 사람은 모두 수종자이며 역할의 차이일 뿐 본질적으로 평등하다는 정암의 교회론을 잘 소개해 주고 있다. 특히 주목되는 부분은 이적과 예배, 방언에 대한 정암의 사상을 소개함으로 한국교회에 잘못 받아들여지고 있는 왜곡된 현상들에 대한 성경적이고 개혁교회적 가르침을 충실하게 소개해 주었다.

마지막으로 이승구교수는 제 III부에서 “오늘날 우리들의 과제”라는 제목으로 정암의 교회론을 현재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직접 연결시켜주고자 시도한다. 사실 상 앞서의 진술들과 반복되는 내용이지만 기술적으로 중복을 피하면서 우리가 적용할 주제들로 다시 잘 정리된 글을 소개해 주었다.

논문을 쓰다 보면 몇 번 세심하게 읽어도 오자를 남기에 되는데 몇 군데 그런 사소한 오자들이 눈에 띄어서 지적합니다.

17쪽의 “예배시산”이 아니라 “”시간이, 그리고 19쪽의 “초소의 것이며”가 아니라 “최소의 것이며”, “최산의 노력”이 아니라 “최선의 노력” 일 것입니다. 아마도 논문이 뒷부분으로 가면서 다소 집중도가 떨어진 듯합니다.

정암으로부터 건강하고 바른 신학을 교육받은 이승구 교수님이 정암의 신학을 존경함으로 소개하듯이 마찬가지로 이교수님이 좋은 제자들을 배출해 내어서 훗날에 이 교수님의 제자도 이교수님의 신학을 존경함으로 소개해 주게 되길 소망한다. 좋은 글을 써 주신 이승구교수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이승구박사의 “정암의 개혁파적 교회론에 대한 한 고찰”을 읽고

 

장동민(백석대학교 기독교학부)

 

이승구박사의 본 논문은 정암 박윤선박사의 교회론이 개혁주의적이라는 것과 동시에 현재 한국적 상황에 적합한 사상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글이다. 이박사는 I장에서 정암의 『개혁주의 교의학』에 나타난 교회론이 헤르만 바빙크의 『개혁교의학』에 의존하는 매우 정통적이며 전통적인 개혁주의에 근거하고 있음을 보인다. II장에서는 주로 정암의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주석』(1983)을 통하여 한국적 상황에서 정암이 특별히 강조한 점이 무엇이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하자면,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 외에는 없으며(1절), 그리스도께서 부여하신 교회의 최고의 권위는 회중에게 있고(2절), 교회의 직임자는 그 권위에서 동등하며(3절), 각급 치리회도 계급적이 아니라 그 범위만 다르다(4절)는 점 등이다.

 

이승구박사의 본 논문은 다음의 몇 가지 점에서 매우 소중한 기여를 하였다. 첫째, 묻혀 있던 박윤선박사의 교회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점이다. 박윤선박사는 그의 주석과 그의 영감 있는 설교, 또한 그가 세운 학교로 기억이 되는데, 사실상 한국교회를 위한 더 중요한 기여라고 볼 수 있는 교회 개혁에 대하여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교회에 대한 일관성 있는 원리를 가지고 교회를 섬겼고, 신학교에서 가르쳤으며, 자신의 거취를 통하여 모범을 보였고, 이를 정리하여 후대에 남겼다. 박윤선이 남긴 생각은 그가 소천한 지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적실성이 있어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한다. 이승구박사는 이를 잘 요약하고 정리해 주었다.

둘째, 이승구박사의 논문은 교회론과 교회헌법을 서로 연결하여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보통 신학교의 커리큘럼에서는 ‘교회론’과 ‘교회헌법’이 나뉘어져 있다. ‘교회론’은 조직신학 교수가 조직신학의 한 파트로서 가르치고, ‘교회헌법’과목은 실천신학의 한 파트로서 실천신학교수나 교단의 목회자가 가르치곤 한다. 이 둘을 함께 다루어 전자가 후자를 통하여 어떻게 구현되는가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좋은 논문이다.

 

논평자의 입장에서 한두 가지 비평을 하려 한다. 우선 이 논문을 읽으면서 도드라지는 표현이 있는데, 바로 박윤선박사에 대하여 존칭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제시하신다,’ ‘강조하신다,’ ‘반대하셨다’ 등등과 같이. 대체로 논문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표현법이고, 이승구박사도 다른 논문에서 이런 존칭을 사용하지 않는다. 은사인 박윤선을(논평자도 ‘박윤선박사님’이라고 존경을 표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이 든다.) 대단히 존경하는 제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글을 읽는 사람으로서는, 이승구박사께서 어쩐지 박윤선을 연구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추종의 대상으로 여기면서 글을 쓰고 계시는구나 하는 선입견을 가지게 만든다.(⌒⌒)

아니나 다를까 이 논문 어디에서도 박윤선을 비판적으로 다루는 부분은 없다. “가장 기본적인 가르침부터 성경에 근거하여 가르치신 정암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려는 노력이 나타나야 할 것이다.”(p.18) 물론 이승구박사가 박윤선의 생각을 그대로 따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가 헌법주석을 통하여 교회론을 피력한 지 4반세기가 지나갔는데, 이렇게 빨리 변하는 세상에서, 스승의 생각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좋을지 생각해 본다. 강조점의 이동 정도는 있을 법도 한데....

논평자의 생각으로는 박윤선의 교회론은 물론 성경적이고 개혁주의적이지만, 그의 강조점은 당시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여겨진다. 한 마디로 말하여 ‘교권주의’에 대한 반대이다. 정암의 평생의 삶이 교권주의와의 투쟁이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사참배한 기성교회에 반대하여 고려신학교를 세우는 운동에 동참한 것이나, 고려신학교가 교권주의로 흐르는 것을 반대하여 탈퇴한 것이나, 총신에서 개혁운동에 실패하여 합동신학교를 세운 것이나, 그의 적대자는 교권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자신을 비롯한 여러 신자들의 양심을 짓밟았고, ‘봉사적’이며 ‘선포적’이어야 할 목사의 직을 가지고 권위를 행사하였으며, 총회가 부여한 ‘전권위원회’라는 이름으로 하급 치리기관을 자기 수하에 두려 하였다. 정암이 회중에게 ‘치리권’의 원천이 있다고 하거나, 목사와 장로가 동등한 권세를 가지며, 치리기관들 사이에 높낮이(hierarchy)가 있지 않다고 할 때 바로 이런 정황을 염두에 둔 것이다. 물론 정암의 목표는 지상교회의 민주화가 아니라, 지상의 교회에서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는 것이다.

논평자가 보기에는 정암의 교회론을 그 당시 상황을 염두에 둘 때는 백퍼센트 이해가 되지만 이를 모든 시대, 모든 교회에 적용하기는 어려운 점이 있을 것 같다. 한 쪽을 너무 강조하였기 때문이다. 정암의 다소 무리하게 보이는 헌법 해석을 몇 가지 들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① 헌법의 8원리 가운데 첫째인 양심의 자유와 둘째인 교회의 자유는 원래 국가의 권력으로부터 신앙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것인데, 박윤선은 교회에서의 평신도의 양심 자유와 대회(大會)에 대한 지교회의 자유로 해석하였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주석』, p. 19-20) ② 교회의 직원에 관한 바빙크의 “보이는 교회에서의 정치는... 장로적 귀족정치”라는 말을 원래대로 해석하는 대신 만인제사장을 아주 강력하게 강조한다. (p. 21-22) ③ 장로의 3년 1차 투표를 적극 추천하는데, 만일 사역자 동등의 원리를 그대로 적용한다면 목사도 그러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개혁주의자들 사이에서 장로의 시무투표를 반대하는 논리도 만만치 않다. (예를 들어, 존 머레이, “장로직의 임기제를 반대하는 논증.”) ④ ‘회중’을 치리회 속에 포함시키는 것은 (“회중, 노회, 총회의 제도에 의한 교회 치리...”, p. 113) 공동의회를 치리회 속에 포함시키자는 것인지(p. 162), 혹은 성도들의 ‘상호감독’을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치리회로서의 당회에 관하여는 합당한 설명이 없다.(p. 130) ⑤ 하급치리회와 상급치리회를 기능적으로만 이해하려다 보니 ‘최고 치리회’라는 말이 개혁주의에 생소하고 ‘전국회’(national assembly)를 지칭할 뿐이라 한다.(p. 150) 그러나 미국의 경우 PCUSA나 PCA 헌법에 총회를 분명히 ‘최고 치리회’(the highest court)라고 부르고 있다. ⑥ 박윤선은 보편적 교회를 교회의 ‘연합체’로 생각한다.(p. 28) 지교회를 본질로 생각하고 대회(大會)는 연합운동 정도로 여기는 것이다. ⑦ 전체적으로 보아 박윤선이 영향을 받고 참고하고 있는 교회헌법은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그것이다. 하지만 상하 계층구조를 강조하는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영향을 받은 미국 장로교회도 참고하여야 할 것이다.

 

25년이 지난 지금도 아직도 권위를 가지고 성도를 억압하는 전근대성을 못 면한 교회가 많이 있고, 또한 대회가 지역교회의 모든 것을 컨트롤 할 수 있다고 믿는 장로교단들이 많이 있다. 이런 교회와 교단을 생각할 때 박윤선의 헌법해석은 분명히 오늘날도 적실성이 있다. 하지만 그의 사후 한국교회가 여러 가지 면에서 달라졌다. 교회의 권위주의와 교권주의가 많이 누그러들게 된 것이다. 이러한 발전에 박윤선이 일정 부분 영향을 준 것도 사실이지만, 민주주의와 다원화가 그 주된 원인이다. 이제 교회에서 권위주의가 설 자리가 거의 없다. 권위주의적 목회자를 피하여 자유롭게 이동하는 시대가 열렸기 때문이다. 민주적인 목회자를 선호하여 많은 성도가 모이게 되면 그 사실이 곧 교회의 정당성을 보증해 주는 시금석이 되었다. 큰 개교회들은 노회나 총회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 숫자 외에는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 상업주의와 포퓰리즘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나 대회가 정한 규범의 권위가 없다. 지교회와 대회와 신학교와 교수들이 실용주의의 놀음에 휩싸여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땅에 떨어뜨렸다. 하나님의 뜻이 교회를 통하여 이 땅에 나타나는 최대한의 효율적인 방법을 찾는 것이 박윤선 교회론의 목표였다면, 그래서 권위주의와 교권주의를 그렇게 싫어하였다면, 오늘날 새로운 시대에는 동일한 목표를 위하여 말씀 전하는 교역자의 권위와 대회의 교권이 강조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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