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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인경을 통한 진리의 선포 -박윤선의 설교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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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격을 통한 진리의 선포: 박윤선의 설교 신학

 

류응렬,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설교학

 

 

I. 들어가는 말

 

박윤선 박사를 모르는 세대로서 그의 설교 신학과 설교를 다룬다는 일은 위험한 일이다. 지나간 사람에 대한 연구란 그의 글과 삶으로 평가할 일이기에 직접적인 만남이 없다 해도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다행히 박윤선 박사는 성경 전권 주석이란 태산 같은 흔적을 남기고 설교집도 남아 있고 육성 설교 테이프도 최소한 171개나 존재한다. 그에 관한 연구도 엄청나게 쏟아져 있고 살아있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고 영향을 입은 사람들의 증언도 적지 않다. 그의 설교를 연구하기에는 충분한 자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연구하는 동안 내내 다가온 심정은 조심스럽고도 위험하다는 생각이다. 박윤선 박사 자체가 연구 대상이 되기 보다 따라야 할 본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필자가 박윤선 박사의 삶을 살피고 설교를 읽고 들으면서 든 생각은 세 가지다. 첫째, 박윤선 박사가 모든 사람들에게 한결같이 예수님처럼 존경을 받은 분이라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와의 만남이 깊어질수록 이는 놀라운 사실이었지만 이상한 일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필자는 그 앞에서 눈을 감고 자주 생각에 잠기기도 했고 그분의 삶을 그려보며 눈가에 눈물이 고이기도 했다. 두 번째로 든 생각은 약간 의외였는데 남겨진 그의 설교를 들으면서 설교 전달이 그렇게 매끄럽지 못하다는 사실이었다. 그의 설교 문장은 세련미가 떨어지고 목소리는 시종일관 큰 소리여서 듣는 사람의 관심을 끌기에는 부족한 듯이 보였다. 본문의 내용에 충실한 설교임에는 분명하지만 주해에 가까운 설교라서 일반 교인들이 듣기에는 매우 어렵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 번째 든 생각은 주석과 같은 내용과 전달력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듯한 그의 매끄럽지 못한 전달에도 어떻게 그런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었다. 의문은 그의 설교를 읽어감으로 곧 풀려졌다. 그의 설교 내용은 본문에 충실했고 오늘날 커뮤니케이션의 이론으로 살펴보면 발전되어야 할 것들이 많지만 그의 인격과 영성은 이미 전달력을 뛰어 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설교가 한국교회의 등뼈를 이룰 정도의 위대함과 영혼을 뒤흔드는 능력을 담고 있다면 일반적으로 뛰어난 교자들과는 다른 무엇이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진리의 말씀을 살아내고자 하는 그의 신앙인격이다. 일생 주님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하고자 열망했던 그였기에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동인은 주님의 은혜이겠으나, 전하는 바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그의 성품과 인격은 삶과 설교를 통해 청중을 변화시키는 힘으로 나타난다.

필자는 이 글에서 박윤선의 설교 신학을 연구하려 한다. 먼저 설교자로서의 박윤선의 모습을 잠시 다루고 지금까지 박윤선에 관한 연구를 간략하게 고찰하려 한다. 다음으로 그의 설교신학에 나타난 특징을 몇 가지로 제시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그의 설교에서 후학들이 발전시켜야 할 점들을 지적함으로 글을 맺고자 한다.

 

II. 설교자로서의 박형룡과 그의 설교에 대한 이전의 평가

 

1. 설교자로서의 박윤선

 

박윤선은 자신의 삶을 신학교육과 주석작업 그리고 설교사역으로 집약한다. 신학교육과 주석작업을 위해 쉼 없는 삶을 보냈지만 아마도 그가 가장 불리우기를 원했던 것은 설교자 박윤선이라는 이름일 것이다. 대학 시절 이후로 이 땅을 떠날 때까지 거의 60년을 설교를 위해 달려온 인생이었다. 목사가 강단이 없는 것은 죽은 것과 다름 없다고 말씀을 섬기는 것을 강조한 박윤선은 주석을 집필하고 교수하는 가운데서도 설교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평소에 설교 부탁을 받으면 거절하는 법이 거의 없었던 그는 죽음을 앞둔 세브란스 병상에서 “모든 친구들이 다 갔으니 나도 가야 하지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설교를 못하는 것이다”라고 고백했다고 한다. 박윤선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했고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기 위해 주석작업에 삶을 바쳤고 그 말씀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하기 위해 인생을 불태웠고 전 생애를 걸쳐 그렇게 살고자 몸부림쳤다.

박윤선은 강단에 설 때마다 마치 리차드 백스터가 외친 것처럼 오늘 설교가 마지막 설교라는 마음으로 설교에 임하였다. 마치 오늘 설교를 마치고 나면 다시 설교할 기회가 오지 않을 것 같은 각오로 강단에 서곤 했다. 필자는 그의 육성이 담겨 있는 설교 테이프를 들으면서 한 가지 확실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의 모든 설교에는 전심을 다해 외치는 그의 열정이 스며 있다는 점이다. 그 열정은 거의 큰 목소리로 표현되었으며 한마디 한마디에 힘을 주는 것으로 나타난다. 방지일은 박윤선의 설교에 대한 열정을 다름과 같이 기록한다.

 

우리 기도의 동지들은 기도하기를 오늘 우리에게 맡기신 강단에 설 때에 이 설교가 내 최후의 설교라는 각오로 생명을 걸자고 기도하며 서로 격려 하였다. 전부터 우리들의 기도의 제목으로 삼은 것이 강단에 설 때마다 최후의 유언의 설교를 하자는 것이었다. 다음 시간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실는지 알지 못하니 생명을 걸고 하자는 것이다. 기도와 유언의 설교가 우리들이 서로에게 격려하던 일이었다.

 

박윤선은 설교와 주석을 분리시키지 않았다. 주석하는 가운데 떠오르는 것들을 설교하기도 했고 설교한 것을 주석에 싣기도 했다. 40년에 걸쳐 완성한 그의 주석은 1,000편이 넘는 설교를 담고 있다. 그가 성경을 주석하는 목적 또한 말씀을 바르게 깨닫고자 하는 열정뿐 아니라 깨달은 말씀을 전하고자 하는 열정 때문이기도 했다. “그의 설교와 주석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항상 동전의 양면과도 같았다.” 설교와 주석에 관한 박윤선의 고백을 들어보자.

 

주석을 하면서 종종 풀기 어려운 난제를 만나면 “이 구절에도 남들을 가르칠만한 진리가 나올 수 있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도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생각하면 그곳에서도 설교할 만한 단맛 있는 진리가 쏟아져 나오곤 했다. 그뿐만 아니라 밤중에 자다가 깨어 고요히 성경말씀을 생각하는 가운데 진리가 생각나면 메모를 해놓고 잠을 자기도 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 가지로 체험했다. 설교로 깨달은 것을 나의 주석에 많이 기록한 것은 온 세상을 아는 사실이다.

 

박윤선이 고백한 것처럼 그의 설교는 철저하게 주석에 기초하고 있지만 그의 주석 또한 설교를 소개하는 장이기도 했다. 정성구 교수는 박윤선의 설교도 “그의 성경주석 집필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고 주일과 수요일 설교 외에 연합 구역 예배 시의 설교 때에도 “그는 예외 없이 일반적 의미의 목회설교가 아니고 성경해석을 주로 했다”고 회고한다. 박윤선을 회고하는 사람들은 그의 강단과 주석과 설교가 분리되지 않고 거의 일치되는 느낌이었다고 고백한다. 박윤선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는 것을 좋아했고 깨달은 말씀을 설교하기를 좋아했다. 매주 외치는 설교였지만 설교 때마다 마지막이라는 비장한 느낌으로 설교했으며 그의 설교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언제나 그의 주석이었다.

 

2. 박윤선의 설교에 대한 이전의 평가

 

박윤선의 삶과 주석 그리고 신학 사상에 대한 연구와 평가는 이미 적지 않게 논의되어 왔다. 정성구 교수는 <박윤선의 목사의 신학과 설교 연구>라는 책에서 그의 설교를 “하나님 중심사상,” “오직 성경만의 사상,” “오직 은혜의 사상,” “오직 신앙의 사상”으로 나누어 칼빈주의 입장에서 분석한다. 정성구는 이 책에서 박윤선의 설교사상이 칼빈의 설교와 일치한다고 주장하고 “박윤선 목사는 성경말씀을 그대로 해석해 전달하려는 것과 하나님 앞에서 설교하고 살아야 한다는 입장은 칼빈의 설교입장과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라고 지적한다. 본문에 충실한 말씀을 선포하고 언제나 코람데오의 정신으로 살았던 박윤선에 대한 정당한 평가라고 여겨진다.

이종경은 “정암 박윤선의 설교연구” 논문에서 정암의 설교를 doing theology란 관점에서 text에서 어떻게 해석하여 context에 적용되었는지 분석하고 살펴보는 시도를 한다. 박윤선 설교의 장점으로 “본문 중심의 설교”와 모든 설교가 텍스트에서 출발한다는 한 출발점을 가지는 설교라는 점과 언약적인 개념을 가지는 것을 지적한다. 한편 단점으로 지적된 것으로는 정암의 설교가 상황 중심의 설교가 아니라는 점과 다중적 관점의 설교가 아니며 실천적 개념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한편 권성수 교수는 “박윤선 박사의 성경해석학”이란 논문에서 그의 성경관을 고찰하고 성경해석의 원리들을 살핀다.

이승진 교수는 자신의 박사 논문에서 “설교에 나타난 하나님의 임재”를 다루면서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설교자 다섯 사람 가운데 박윤선을 소개한다. 그는 박윤선의 설교에 나타난 신적 증거는 하나님 앞에서의 ‘거룩함’이라는 말로 표현되고, 하나님 앞에서 신자의 거룩함이란 하나님의 이미지와 유사한 것으로 지적한다. 박윤선에 대한 설교연구는 최근에 합동신학원에서 개최한 ‘정암 신학강좌’에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진다. 먼저 유영기 교수는 “정암 박윤선의 신학”에서 간략하게 정암의 설교사역을 소개한다. 그는 박윤선과의 개인적인 만남과 직접 들은 설교에 근거하여 박윤선의 신학과 설교를 소개한 후 정암의 설교준비와 자세를 간단하게 다룬다.

박윤선의 설교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는 “정암 박윤선의 설교”라는 제목으로 열린 제 18회 정암 신학강좌에 나타난다. 정성구 교수의 “목회적 관점에서 본 박윤선의 설교,” 이상규 교수의 “교회사적 관점에서 본 박윤선의 설교,” 그리고 정창균 교수의 “설교학적 관점에서 본 박윤선의 설교”에서 박윤선의 설교를 다양한 각도에서 심도 있게 연구했다. 정성구 교수는 박윤선의 목회를 종합하면서 그가 칼빈주의 신학자이며 성경 주석가이지만 오직 기도하는 일과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전무한 진실된 목회자였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상규는 박윤선의 설교가 “모범론적 설교에서 구속사적 설교로” 전환을 시켜 놓았으며 “풍유화와 신령화의 위험성을 지적”했고, 그가 남긴 가장 중요한 기여로 “성경 원전에 대한 이해력을 제고”하도록 했다는 점을 들었다. 그럼에도 박윤선 역시 구약 본문을 설교하는 데는 다른 한국교회 목회자들과 같이 소홀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박윤선의 설교에 대한 가장 방대하고도 정밀한 연구는 박윤선으로부터 직접 설교학을 배우고 설교를 들어왔던 것을 회상하면서 이루어진 정창균 교수의 글에서 나타난다. 그는 설교자로서의 박윤선의 삶을 다루고 그의 설교목록 가운데 주석과 설교집 그리고 설교 테이프를 소개한다. 박윤선의 설교 철학을 “성경 본문의 경건하고 깊이 있는 해석,” “간절하고 많이 하는 기도,” “성령의 감화,” 그리고 “말씀대로 순종하는 인격” 등 네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정교수는 박윤선 설교의 힘을 “성경의 권위에 대한 절대적 신뢰”와 “하나님이 절대 주권에 대한 신학적 확신”이라는 두 가지 명제에서 찾는다.

지금까지의 박윤선의 설교에 관한 연구는 다양한 전공 분야의 학자가 시도한 것으로 특별한 공통점을 찾기가 어렵다. 몇 가지 중심 되는 요소로는 그의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관에 근거한 칼빈주의적 설교라는 점과 본문을 잘 드러냈다는 점에서의 장점을 지적한다는 점이다. 이제부터 필자는 그의 설교관을 먼저 살피고 특징을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 후 그의 설교에서 발전되어야 할 점을 두가지로 나누어 지적하고자 한다.

 

 

III.박윤선의 설교신학과 특징

 

1. 박윤선의 설교관

 

박윤선은 자신의 설교에 대한 구체적인 글을 남기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그의 글이나 책 또는 설교를 통해 설교의 특징을 찾는 일은 어렵지는 않다. 그에게 설교는 하나의 논증이나 강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다. 설교집 머리글에 밝힌 그의 설교에 대한 견해를 들어보자. “설교는 강연도 아니고, 변론도 아니고, 영적 생명의 움직임이다. 이와 같은 역사는, 간절한 기도와 성경에 대한 경건한 연구와 특별히 그 말씀 순종에 따라서 하나님의 선물로 임하는 성령의 열매이다.” 박윤선의 설교관은 많은 점을 시사한다. 먼저, 설교가 강연도 변론도 아니라 영적 생명의 움직임이라는 말은 복음에 대한 본질을 무엇인지 보여주는 말이다. 강연이란 아무리 감동적이고 유익하다 할지라도 정보를 전달하는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변론이란 논증을 통해 정당성을 추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때로 논증과 변론을 요구하지만 본질적으로 진리에 대한 선포이다. 설교란 강연도 변론도 아니라 영적 생명의 움직임이라는 말에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실감하게 한다. 강연과 변론은 이성의 산물로 가능하지만 영적 생명을 낳는 설교는 간절한 기도와 성경에 대한 경건한 연구와 특히 순종에 따라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성령의 열매라는 말은 성경을 진리로 믿는 설교자들이 가슴에 새겨야 할 설교관이다. 박윤선의 설교관은 특히 오늘날 설교자들에게 들려주는 메시지가 크다. 고등한 신학이 발전될수록 설교는 영적 생명을 낳는 능력의 말씀의 자리에 논리와 강연으로 대신하려 한다. 때로는 감동적인 이야기로 청중의 관심을 끌지만 영을 변화시키는 말씀이 사라진 오늘의 강단에 박윤선은 설교의 본질을 알려준다.

박윤선에게 있어 설교란 인간의 사변적인 것을 전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다. 말씀을 전하기 앞서 설교자는 바르게 깨닫기 위해 삶을 던져야 한다. “설교는 성경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성경을 바로 깨닫고 전해야 된다. 설교자는 성경 연구를 깊이 하는 동시에, 기도를 많이 해야 되며 무엇보다도 설교자 자신이 그 말씀대로 살아야 된다. 그대로 살지 않으면서 전함은 무력하다.” 위와 같은 말에는 주경신학자로서의 그의 면모가 잘 나타난다. 성경을 바르게 깨닫기 위해 박윤선은 두 가지를 지적한다. 말씀을 깊이 연구하는 일과 간절하게 기도하는 일이다.

박윤선의 설교철학을 한 눈에 엿볼 수 있게 하는 두 축은 “나의 신학과 나의 설교”라는 글에도 잘 나타난다. 이 논문에서 박윤선은 자신의 설교 준비를 두 가지로 표현한다. “연구에 의한 준비”와 “기도의 준비”라는 점이다. “저는 설교를 준비해 놓고 기도할 때가 있고 또 설교를 준비하기 전에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일정하지 않습니다. 제가 체험한 바에 의하면 기도를 아무리 해도 말씀을 잘 준비하지 않으면 설교에 은혜가 없습니다. 성경말씀이 첫째이지 기도가 첫째가 아닙니다.” “설교를 잘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경의 말씀으로 확실하게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기도로 무장하는 것입니다.” 말씀 준비와 기도에 대한 헌신은 박윤선이 평생 힘써 온 두 축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로서의 책임감은 말씀을 신실하게 연구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그 위에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고자 하는 열망은 기도로 나타난다.

말씀 준비와 기도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박윤선의 설교관을 종합하는 것은 한 마디로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말씀은 전해야 할 대상이기도 하지만 설교자가 살아내어야 할 대상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한 편의 메시지를 준비하려 할 때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의 설교자를 준비시키신다. 한 두번 설교를 잘 준비하면 한 두번 설교를 잘 하겠지만 하나님의 가슴을 품고 주님처럼 살아가는 설교자는 일생 영혼을 깨우는 설교자로 세움을 입을 수 있다. 설교자 자신이 가장 강렬한 설교라는 말이다. 설교자로서 말씀을 살아내야 한다는 박윤선의 고백은 특히 오늘날 설교자들이 근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자질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내용과 전달에 뛰어난 설교도 필요하지만 오늘날 강단과 시대는 예수님의 가슴으로 살아가는 설교자를 필요로 한다.

박윤선의 설교를 지탱하는 신학은 한 마디로 칼빈주의 신학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칼빈주의 신학이 웨스트민스터에서 싹이 텄다고 밝힌다. “나의 신앙성장과정을 말해 본다면, 대학시절과 평양신학 시절에는 보수주의면서 주관적 체험을 탐구하는 정도였다고 생각된다. 평양신학을 마친 후 도미하여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연구한 후부터는 칼빈주의(혹은 개혁주의) 신앙을 자각 있게 붙들게 되었다.” 평양 신학교에서는 아직 칼빈주의가 미흡한 상태였고, 개혁주의를 만나지 못한 시간이었다. 그의 칼빈주의 설교는 몇 가지 특징으로 나타난다. 무엇보다 일생 박윤선이 정렬을 쏟은 것은 오직 성경을 가르친다는 사상이다. 그에게 성경무오에 대한 절대적 확신과 성경 진리를 바르게 가르치고자 하는 일념은 주해뿐 아니라 설교의 근간을 이루었다.

 

2. 성경의 권위에 기초한 개혁주의 설교

 

박윤선의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에 근거한 개혁주의 설교의 기초를 놓았다고 할 수 있다. 박윤선에게 설교란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고 가르치는 것으로 여겼으며 올바른 설교는 성경에 대한 올바른 시각에서 시작된다. 박윤선은 박형룡과 더불어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를 위해 싸워온 대표자이다. “나는 한 평생 성경 무오의 진리를 믿고 성경을 해석하는 중 때로는 자유주의자들의 잘못된 주장을 비판하여 왔다.” 박윤선은 요한복음 주석에서 “성경의 권위에 대하여”라는 특별참조란에 그릇된 신학과 성경에 관하여 비판한다. 자유주의 신학자 하르낙과 리출 그리고 헤르만을 비판하고 다음으로 디벨리우스, 불트만의 성경관이 잘 못 되었다고 비판한다. 성경의 권위의 근거로 성경 자체가 그렇게 증명하고 있으므로 믿어야 할 것을 주장한다.

그가 칼빈주의 신학을 선택한 이유도 칼빈주의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의 경건을 드러낼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에 대한 신념 때문이다. 그에게 개혁주의는 성경주의였으며 이는 칼빈주의와 다름이 없었다. “나의 교수 생활에 있어서 언제나 불타는 가슴으로 학생들에게 주고자 한 것은 칼빈주의 신학이다. 그 이유는, 칼빈주의 신학이야말로 성경을 그대로 믿는 말씀의 신학이기 때문이다”라고 밝힌다. 박윤선은 “나의 신학과 설교”라는 글에서 자신의 설교신학의 근간을 이루는 성경관에 관하여 상세히 밝힌다.

 

1. 나는 모든 성경을 하나님의 영감으로 되었다고 믿음

2. 나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계시)이라고 믿음

3. 나는 성경의 유기적 통일을 믿음

4. 나는 성경 무오의 진리를 믿음

5. 나는 성경 말씀은 살아 있는 말씀이라고 믿음

 

박윤선에게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으로서의 성경관은 그의 신학과 주석 그리고 설교의 뼈대를 이룬다. 그는 한평생 성경의 무오성을 지키기 위해 힘썼으며 성경의 진리를 주석을 통해 사수하고 설교를 통해 선포했다. 그는 “오직 성경만이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인 줄 확신하고, 성경을 바로 알고 그대로 전하는 것이 사도적 전도라고 믿으며, 지금까지 그렇게 살려고 노력해 왔다. 또 그렇게 말씀을 전할 때에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많은 열매가 있었음을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고백한다. 개혁주의와 칼빈주의의 전통을 웨스트민스터에서 유학할 때 생겨난 영향이라고 볼 수 있지만 성경에 대한 박윤선의 확신은 훨씬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고백에 따르면 1924년 경 신성중학교 시절에 성경에 대한 잊을 수 없는 신앙체험을 소개한다.

 

어느 날 나는 학교 가까이 수청고개 밑에 있는 시냇가를 산책하고 있었는데, 나의 심중에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의심이 생기면서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을까. . . . ’ 하고 자문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즉시로 나의 마음 깊은 곳에서 세미한 음성 같이 솟아오른 것은, ‘네 손에 들고 있는 성경이 하나님이 계신 증거니라’ 하는 분명한 대답이었다. 나는 그 때에 놀랄 정도로 하나님을 확신하게 되었고 의심은 사라졌다. 그 후로는 성경을 견고히 붙잡고 살아가는 믿음의 생활이 시작되었고, 그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왔다.

 

박윤선의 성경에 대한 확신은 그의 계시관과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이 자기 표현인 계시는 인간의 이성으로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성령의 은혜로 주어진 믿음으로 신뢰할 때 비로소 알 수 있다며 믿음의 우선성을 주장한다. “성경은 위에서 주신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기 때문에 먼저 믿어야 된다. 먼저 믿고 시작해야 된다. 그 누구도 성경을 믿지 않고는 성경의 진리를 알 도리가 없다. 성경, 즉 하나님이 주신 계시의 진리는 먼저 믿고 다음에 알게 된다.” 박윤선의 신학을 한마디로 ‘계시의존사색’이라고 표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의 계시에 온전히 의존하지 않고는 그 말씀을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이다. 유영기 교수는 정암의 신학을 연구하면서 그의 신학을 ‘계시의존사색’으로 지적한다.

박윤선은 계시에 전적으로 의존하였지만 계시를 바르게 깨닫기 위해 스스로의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성경 주해에 몰두하느라 세상의 물정을 거의 모르고 집안 사정에 대해서도 거의 무관심할 정도였다고 한다. 철저한 주석작업도 필요했지만 말씀 앞에서 기도의 중요성을 늘 강조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는 것은 사람의 이성과 지혜가 아니라 오직 성령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정창균은 박윤선이 설교와 주석을 두고 얼마나 기도에 전념했는지 잘 소개한다.

박윤선의 성경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는 오늘날 설교자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남긴다. 현대 설교학의 특징 가운데 가장 심각한 문제는 성경관에 있다. 전통적으로 고수되어온 성경에 대한 절대적 권위는 점점 무너지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을 부분적으로 담고 있는 하나의 텍스트로 전락시키거나 성경 그 자체가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이 아니라 말씀이 선포되는 가운데 계시가 되는 것으로 주장되고 있다. 성경의 권위가 무너진 곳에 설교의 권위를 찾을 수는 없으며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설교가 사라진다면 강단은 박윤선이 우려하는 강연으로 전락할 것이다. 박윤선의 추모예배에서 그의 신실한 친구였던 브루스 헌트는 일생 성경을 위해 싸워온 박윤선을 이렇게 회고한다. “박 박사는 성경을 위하여 싸운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그를 본받읍시다.”

 

3. 본문 해석을 중심으로 하는 설교

 

박윤선의 설교는 언제나 본문으로 시작한다.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도를 찾고자 하는 것이 그의 해석과 설교의 목표였다. 박윤선 이전의 시기에 한국교회 강단은 제목설교가 주종을 이루었다. 해방이전까지의 설교를 이상규는 세 가지의 특징으로 정리한다. 첫째, “순수한 복음적인 설교로서 이교적 문화나 관습을 버리고 복음적인 삶을 살도록 요청하는 내용이다.” 둘째, “내세 지향적이고 탈 역사적인 설교가 많았다는 점이다.” 셋째, 민족 현실과 해방,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설교도 이 시대 설교의 한 특징으로 볼 수 있다.” 이상규는 설교의 해방 이전까지의 설교를 형식면에서는 “제목설교, 모범적 설교”가 유행했고 “도적주의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해방 전의 기독교는 우리나라에서 기본적인 자리를 잡아야 했으므로 성경에 대한 주해보다는 기독교 일반에 대한 주제를 가르치고자 하는 목적이 강했기 때문에 제목설교가 유행했으면 이는 상당 부분 초기 선교사들과 박형룡 박사의 영향에 상당히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박윤선은 제목 설교의 유행을 벗어나 본문의 해석에 근거한 설교의 기초를 닦은 최초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서영일은 그를 한국교회 최초의 강해설교자라고 부르는 것은 정당하다. 이 때 강해설교를 어떻게 정의하는가의 문제는 다양하겠지만 박윤선이 본문에 밀착된 주해와 설교를 했다는 점에서 본문이 강조된 설교라고 말할 수는 있다. “내세를 바라보는 생활”이란 제목으로 한 마태복음 10:26?28절 설교에서 박윤선은 먼저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내세를 바라보는 생활’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라고 서론에서 설교의 주제를 명확하게 보이고 두 대지로 나누어 본문을 설명한다. 첫째, “하나님을 본위로 사는 생활”에서 그는 곧바로 26절을 읽고 이 본문에 대한 주해로부터 설교를 시작한다. 둘째, “영혼 본위로 사는 생활”이란 제목으로 28절을 소개하고 이 말을 주해하고 난 후 본문을 설명해 나간다.

마태복음 26:20?25절을 다루는 “주님을 파는 자와 팔 수 없는 자”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박윤선은 “주님을 팔 수 있는 자”라는 대지로 예수님이 자신을 판다고 말했을 때 제자들이 근심했다는 본문에 근거하여 설명한다. 한편 두 번째 “주님을 파는 자”라는 대지에서 유다의 삶을 설명한다. 두 부류의 대조를 통해 외식주의에 빠지지 말고 참된 신앙인이 될 것을 촉구한다. 짧게 설교를 요약해 놓은 설교집 두 권에서도 본문에 집중하는 그의 노력은 동일하게 나타난다. “백부장의 신앙과 예수님의 평가”라는 마태복음 8:5?13절을 다루는 설교에서 그는 1. 백부장의 겸손한 믿음, 2. 백부장은 하나님 말씀의 위력을 느꼈음, 3. 예수님의 평가라는 대지로 본문을 차례로 설명한다.

박윤선의 대부분의 설교는 비슷한 순서를 따르고 있다. 본문을 읽고 난 후 본문에서 무엇을 다룰 것인지를 먼저 살피고 그것을 대지로 표현하고 설명한다. 본문해석을 강조한 그의 설교에 알레고리적인 해석도 나타나지만 대부분 대지는 본문의 의미를 잘 드러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본문을 다루는 박윤선의 설교에 나타나는 한 가지 특징은 다른 성경 본문을 인용하여 전하고자 하는 내용을 보충하여 설명한다는 점이다. “예수님의(기도의) 고난”이란 제목의 누가복음 22:39?46절에서의 설교에서 박윤선은 10번 정도 성경을 인용함으로써 기도 가운데 나타나는 고난을 설명한다. 성경의 다른 본문을 인용함으로써 의미를 보충하거나 논증해 가는 방법은 칼빈의 설교와 청교도 설교자들이 대표적으로 택한 방법이다. 박윤선이 설교에서 본문의 의미를 바르게 파악하고자 하는 열정을 보게 한다.

본문에 대한 충실한 해석은 개혁주의 설교의 가장 중요한 기초 가운데 하나이다. 개혁주의란 성경주의를 말하는 것이며 성경의 가르침을 그대로 믿고 따르는 것이다. 설교자로서 개혁주의를 표방한다는 말은 성경에서 하나님이 말씀하고자 하는 의미를 그대로 전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는 성경적인 설교를 결정짓는 중요한 질문인 “설교자로서 나의 생각을 성경에 굴복시킬 것인가? 아니면 성경을 나의 생각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맞출 것인가?”에 대하여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는 자세에서 나오는 설교철학이다. 박윤선의 본문에 집중하는 설교는 한국 기독교 초기 설교가 보여준 제목 설교의 한계를 잘 극복한 것으로서 본문에 집중해야 할 설교자의 사명을 잘 세웠다고 평가된다. 오늘날 강단은 박윤선의 이러한 노력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강단에서 선포되어야 할 진리의 말씀의 자리에 사람의 사변과 청중의 관심을 끌기위한 화려한 예화와 감동적인 이야기가 대신하는 강단은 더 이상 진리의 샘이 될 수 없다. 박윤선은 일찍이 이런 설교를 진리의 선포가 아니라 강연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4. 인격을 통한 진리의 선포

 

필립 브룩스는 The Joy of Preaching에서 설교란 “인격을 통한 진리” (Truth through Personality)를 선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설교자에게 있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성품과 인격은 말씀을 전달하는 가장 중요한 통로가 된다는 말이다. 설교가 효과적으로 전달되기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세 가지의 수사학적 요소가 강조된다. 진리의 말씀인 로고스와 말씀을 전하는 전달자의 인격과 성품을 다루는 에토스 그리고 말씀을 전해야 할 이유를 다루는 파토스가 있다.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에토스라고 말한다. 한편의 설교보다 한 사람의 설교자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해돈 로빈슨은 강해설교를 “강해설교란 일정한 배경 속에 주어진 성경 본문을 역사적, 문법적, 문예적 연구를 통해 얻어낸 성경의 개념을 전달하는 것으로서 먼저 성령께서 설교자의 인격과 경험에 적용하게 하시고 또 설교자로 하여금 청중에게 적용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로빈슨의 정의 가운데 “먼저 성령께서 설교자의 인격과 경험에 적용하게 하시고” 라는 말은 설교에서 설교자의 위치에 대한 중요성을 일깨우는 말이다. 로빈슨은 “강해설교에 대한 헌신은 설교자를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 간다. 우리가 성경을 연구하는 동안 성령께서는 우리를 연구하신다”라고 지적한다. 설교자들은 십자가 뒤에 자신을 감추어 달라고 기도하지만 십자가 뒤에 설교자가 숨을 자리는 없다. 설교자란 자신을 통해 진리의 말씀을 흘려보내야 할 통로 역할을 해야 한다. 강단에 설 때 진리의 말씀이 말씀을 통해 선포되기 전에 삶을 통해 흘러나올 때 능력있는 설교가 가능하다.

박윤선의 삶과 설교는 설교자에게서 삶의 영역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한눈에 보게 한다. 필자는 박윤선의 설교의 특징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모든 설교가 그의 삶을 관통하여 흘러나오는 총체적인 산물이며 설교 속에 자신의 인격과 영성과 성품이 함께 어우러졌을 때 엄청난 변화의 역사는 일어났으리라 생각한다. 박윤선의 설교가 지나치게 주석에 치중하거나 설교 전달이 효과적으로 들려지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그토록 엄청난 반응이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은 설교자 자신에 어느 정도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박윤선의 설교에 대한 평가에 단점이 지적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의 그의 삶을 회고하는 데는 한결같이 예수님과 같은 그의 흔적을 고백한다.

정창균은 박윤선의 설교신학을 “말씀대로 순종하는 인격”이라고 명명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스려지는 성품을 얼마나 강조했는지 잘 보여준다. 박윤선은 “설교자 자신이 순종하지 않는 말씀을 교인들이 순종할 수 없고, 설교자 자신이 은혜 받지 않는 말씀을 청중이 은혜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확실히 믿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리하여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설교자의 인격은 그의 설교론에 있어서 떼어 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 박윤선의 설교는 자신의 삶이 베어나오는 통로요 진리의 말씀은 그의 인격을 통해 능력있게 나타났다. 이는 설교 뿐 아니라 평소의 언행을 통해서도 늘 나타난 삶이었다. 정창균은 합동신학원 졸업식 때 박윤선이 개인적으로 세 번이나 들려준 “기도를 많이 해야 돼!”라는 말이 어떻게 그의 생을 변화시켰는지 잘 보여준다.

손봉호 교수는 박윤선의 삶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박윤선 박사님께서는 학문이 경건으로 이어지고 경건과 온전히 융화되어 있었다. ‘이론’과 ‘실천’은 그에게서 결코 분리된 것이 아니었고, 신학과 신앙이 혼연일체를 이루었다. 바로 그 때문에 그를 접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의 감화를 끼쳤고, 한국교회 어느 지도자보다 더 실질적이고 더 큰 영적 권위를 행사하였다. 그와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있어도 그분의 신실함과 정직함을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론과 실천이 분리되지 않고 일체를 이루는 가르침과 삶은 합동신학대학원의 모토에서 잘 드러나다. 바른 신학과 바른 교회 그리고 바른 생활의 운동을 추구하면서 신학과 경건이 어우려진 진정한 인격체의 목회자를 양성하고자 하는 그의 열심은 바로 자신이 꿈꾸고 실천해 오던 삶이었다.

박윤선을 곁에서 보아온 방지일은 그의 삶을 “나다나엘”이라고 표현한다. “그에게는 간사함이 없다. 그는 주님이 찾으시는 참 이스라엘 사람임에 틀림 없다.” 그는 박윤선이 “어떤 환경에서도 그 성품에 영향을 받지 않는 분임을” 강조한다. 박윤선을 회고하며 박형룡은 그를 “겸손한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죄인임을 깨닫고 산 사람이다. 그는 코람 데오 (Coram Deo)의 의식을 가지고 매일 매일 산 사람이다”라고 고백한다. 박윤선의 삶은 한 마디로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이 어울릴 것 같다. 그는 하나님 면전에서 살듯이 사람들을 겸손하고 진지하게 대했으며 설교할 때마다 마지막 강단인 것처럼 사력을 다해 진리의 말씀을 전했다. 서영일은 학문이 중요하기는 했지만 “사람들을 움직이느 것은 그의 인격이었다”고 정리한다.

박윤선 자신도 설교자의 인격에 관하여 강조한다. “재지가 부족해도 진실하면 되지요”라는 라부열 박사의 말을 자주 인용하고 했다. 설교에서의 인격의 중요성은 다음의 한 마디에 집약된다. “우리의 인격이 진실하지 못하면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진리로 전달되지 못한다.” 박윤선이 인격의 중요성을 강조한다고 자신이 인격적으로 성숙하다고 생각한 적은 결코 없는 듯하다. 다만 자신의 모습을 성령님께 온전히 맡기기 위해 기도에 전념하기를 갈망한 흔적은 여러 곳에서 보인다. 그는 60대가 될 때까지도 매일 새벽 4시에서 6시까지 두 시간을 기도하는 생활을 가졌다. 죽기 전까지도 두 시간의 기도생활을 지켰다고 한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교수들도 박윤선의 기도하던 것이라고 말하며 그를 기억한다고 한다.

박윤선의 삶에서 인격은 사람들의 가슴에 예수님의 흔적을 남기는 힘이었고 강단에서 설교에 생명을 불어넣는 비밀이었다. 메시지에 앞서 메신저로서의 모습은 특히 오늘날 설교자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남긴다. 현재 한국 교회는 어느 때보다 사회적인 질타를 온몸으로 맞고 있다. 복음 자체의 가르침이나 교회 활동에 대한 부재 때문이 아니라 상당 부분은 목회자들의 삶과 직결되어 있다. 세상 사람들의 기대치만큼 이르지 못하는 목회자들의 도덕율이라든가 성직자라는 이름에 부합하지 못한 지도자들의 삶은 기독교의 복음이 지니는 능력을 사라지게 하는 주요한 요인이다. 학문과 경건과 실천을 강조한 박윤선 앞에 오늘날 한국교회는 학문적인 기치는 높이 들었지만 경건과 실천은 점점 약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시대 가운데 박윤선의 외침과 삶은 기독교회와 설교자들을 깨우는 음성으로 들려온다.

 

5. 박윤선의 설교에서 발전되어야 할 부분

 

한 시대를 깨운 주석가요 설교자라는 이름 앞에 발전되어야 할 부분을 지적한다는 것은 쉽지 않는 듯하다. 훨씬 더 뛰어난 전달력과 본문에 대한 해박한 분석력을 가지고도 그의 설교가 이루어낸 동일한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오늘날 한국교회는 그를 제대로 배우는 것이 우선적인 과제일 것이다. 그러나 박윤선도 다가오는 세대는 자신의 한계를 딛고 더욱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선포하여 이 땅에 말씀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대할 것이다.

필자는 박윤선의 설교 가운데 발전되어야 할 부분을 두 가지로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박윤선의 설교에는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는 설교가 비교적 결여되어 있다. 정창균도 박윤선의 설교가 당시 “청중이 처했던 사회적, 국가적 현실이나 정치, 경제, 윤리적 상황에 대한 관심이 결여되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개혁주의란 온 우주를 통치하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 아래 모든 것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나라로 회복시켜야 할 사명이 주어졌다. 복음은 하늘의 소리를 땅으로 들려줌으로써 삶의 거룩한 변화를 일으켜내는 능력이다. 박윤선의 설교에는 당시 민감하게 여겨졌던 각종 사회 정치 면에서의 설교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김명혁은 박윤선의 개혁주의 신앙이 문화와 사회의 변혁을 포함한다고 주장한다. “박 목사님은 한국 교회 안에 개혁주의 신앙이 무엇이며 개혁주의 삶이 무엇인지를 가장 분명히 보여주신 분이셨다. 칼빈주의 신학은 하나의 신학 체계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 중심의 뜨거운 신앙의 원리로 나타남을 보여주셨고, 소극적 분리주의가 아니라 적극적 포용과 교제의 삶인 것을 보여주셨으며, 세상사에 무관심한 반문화주의가 아니라 사회문제와 구제사역 등에 적극적 관심을 나타내는 문화변혁주의인 것을 가르쳐 주셨다.” 김명혁이 말하는 개혁주의적 성향이 박윤선에게 잘 나타나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그에게서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자신의 개혁신학적 신념이 적극적으로 설교를 통해 나타나지는 않는다. 박용규 교수도 박윤선의 사상을 연구한 후 결론 맺기를 “어디까지나 기존의 사회제도를 그대로 인정하면서 복음을 통해 인간의 심령을 변화시킨다는 ‘문화적 보수주의’차원에서 논한 것이다. 박윤선을 적극적인 ‘문화변혁주의’에 범주화시킬 수는 없는 듯하다”고 지적한다.

두 번째 필자가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설교 전달력에 대한 부분이다. 효과적인 설교란 본문을 바르게 이해하는 해석과 청중의 삶으로 적실하게 적용하는 적용 그리고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여 청중의 삶에 거룩한 변화를 일으키는 것을 가리킨다. 박윤선의 설교에는 본문에 뿌리내린 주해와 청중의 삶으로의 적용이 잘 나타나지만 전달력은 매끄럽게 보이지 않는다. 그를 가까이서 보아온 정성구는 이렇게 회고한다. “박윤선 목사의 설교는 단순히 설교학적으로는 평가되지 않는다. 박 목사의 설교는 매우 딱딱하고 절제된 표현에다가 문학적이지도 않고 대중적이지도 않다. 유머도 별로 없고 그저 성경진리를 깨닫는대로 증거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같은 말이 계속 반복되기도 하고 잔기침을 많이 하는데다 목소리는 톤을 높일 때 쇳소리가 나서 부드럽지 못했다.” “이제는 결론을 맺으려 한다”고 말해 놓고 거의 10분 이상을 계속 설교하는 경우도 있었다. 정창균도 정남의 설교를 많이 들어본 결과 “정암의 설교는 설교의 구성이나 전개에 있어서의 수사학적 전략이나 체제,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특별한 의도 등이 고려되지 않는 설교”라는 점을 지적한다.

박윤선의 설교전달이 그렇게 효과적이지 못하다는 평가는 정당하다고 여겨진다. 그의 육성으로 된 설교 테이프를 들으면 언어에 대한 감각과 전달이 매끄럽지 못하다는 것을 누구나 발견할 수 있다. 박윤선의 시대에는 오늘날처럼 매스컴의 천국시대와 다르다는 점을 감안하면 오늘의 시각으로 그의 설교를 동일하게 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설교는 전달면에서는 많은 발전을 요구한다. 설교에서의 전달은 단순한 중립적인 것이 아니다. 전달에 관계 없이 내용만 성경적이면 된다는 말은 설교자로서의 역할을 무시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말이다. 설교자란 진리의 말씀을 객관적으로 만들어 전달하는 기계가 아니라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여 청중을 깨우는 사명을 맡은 사람이다. 우리는 듣든지 말든지 설교해야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반드시 청중이 듣는 설교를 함으로써 죽은 자들을 살려내고 산 자들을 거룩하게 헌신하게 세워야 할 책임이 설교자들에게 놓여 있다.

 

IV. 나오는 말

 

필자는 지금까지 정암 박윤선 박사님의 설교신학을 살펴보았다. 먼저, 철저한 성경주의에 근거한 개혁주의적 설교를 지적했다. 박윤선의 개혁신학은 그의 주석과 집필뿐 아니라 설교를 통해서도 나타난다. 두 번째 특징으로 그의 설교가 본문에 집중하는 설교라는 점을 들었다. 박윤선이 설교를 처음 듣고 활동하던 시대는 주로 제목설교가 주종을 이루었으나 성경본문에 근거한 설교로의 흐름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주해자와 설교자로서의 균형잡힌 시각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그의 진리의 선포는 신앙 인격을 통해 거대한 변화의 결과를 가져온 점을 언급했다. 박윤선은 한 편의 설교를 위해 생명을 바치는 마음으로 강단에 섰을뿐 아니라 말씀대로 살고자 몸부림을 쳤다.

필자는 박윤선 목사님의 설교에서 발전되어야 할 점을 두 가지로 지적했다. 그의 설교가 시대와 사회 그리고 문화 전반에 걸쳐 폭 넓게 다루는 관심이 잘 나타나지 않는 점과 전달면에서 조금 더 효과적인 면이 요구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개혁주의 설교란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나아가 모든 삶의 영역을 변화시키는 방향까지 나아가야 한다. 박윤선의 한계는 오늘날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설교자들이 동일하게 안고있는 한계로 여겨지기에 이에 대한 논란은 앞으로도 진행되어야 할 중요한 관심사로 여겨진다.

필자는 박윤선 목사님의 설교신학 연구를 통해 그를 만나면서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쓰시는 설교자가 어떤 모습을 가져야 할지를 보았다. 그는 참으로 진실한 사람이었고, 진실한 목회자였으며, 진실한 설교자였다. 그가 그토록 전하고자 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는 강단에 서기 전에 그의 삶을 통해 흘러나오는 참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오늘날 시대는 이런 하나님의 사람을 기다린다. 진리의 말씀을 향한 거룩한 열정으로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기 위해 온 삶을 쏟는 주해자요, 발견한 진리를 마지막 설교인 것처럼 여기고 청중을 깨우고자 하는 열정으로 생명을 바쳐 전하는 설교자요, 전하는 대로 살아가는 진실한 신앙인들이 거대한 파도처럼 일어날 때 한국교회는 말씀으로 말미암는 거룩한 부흥으로 타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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