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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인격을 통한 진리의 선포-박윤선의 설교 신학에 대한 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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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격을 통한 진리의 선포: 박윤선의 설교 신학”에 대한 논평

 

허 철 민 (국제 신대)

 

 

박윤선 박사의 ‘성경 신학’과 ‘설교 연습’의 강의를 들으면서 그의 영향을 받은 제자로서 그의 설교에 대한 논문을 평하는 것은 기쁨이라고 생각한다. 박윤선은 말씀을 사랑하기에 방대한 주석을 했을 뿐만 아니라 설교를 통해서 그 말씀을 평신도들에게 더 잘 드러내기를 바랐으며, 또한 말씀에 입각한 아름다운 삶을 사셨다. 이러한 그의 신학과 설교와 삶은 살아있을 동안 대단한 영향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많은 목회자들에게 본 받아야 할 분으로서 마음에 깊게 새겨져 있다.

그동안 박윤선의 신학과 설교에 대해서 여러 논문들과 글들을 통해서 많이 알려지고 있다. 본 논문도 박윤선의 설교 신학에 대해서 여러 면에서 공헌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선적으로 필립 브룩스는 “설교는 인격을 통한 진리의 전달”이라고 정의한다. 본 논문은 이러한 설교의 정의가 박윤선의 삶과 설교에서 잘 드러나고 있음을 보여주려고 하고 있다. 앙드레 레스너 (Andre Resner)도 그의 책 Preacher and the Cross 에서 바울의 십자가 설교의 주된 특징은 그의 십자가에 일치한 인격이었음을 주장하면서 설교자들에게 인격의 중요성을 상기시켜주고 있다. 오늘날 설교의 말씀에 일치한 삶을 살려는 목회자들이 많지 않은 한국교회에서 박윤선의 설교와 인격에 대한 강조는 좋은 도전을 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본 논문을 통해서 설교를 그렇게 사랑했고, 설교를 위해 말씀을 깊게 묵상하는 가운데 나온 깊은 진리가 주석에도 영향을 끼치면서 은혜로운 주석이 형성될 수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또한 본 논문은 또한 박윤선의 설교 신학에 따르는 특징들을 열거하고 있다. 칼빈주의에 입각한 성경주해자로서, 그의 설교는 성경의 권위에 철저히 근거하고 있으며, 본문 중심으로 주해와 설명이 어우러진 설교였다는 것이다. 북미에서는 신학과 설교는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 조직신학이 강했을 때 설교는 그 영향에 따라 제목 설교가 발전했었다. 그러나 2차 대전 이후에 성경 신학이 중요시되면서 그 영향에 따라 본문 설교가 발전하기 시작한다. 마찬가지로 본 논문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한국에서는 조직 신학자였던 박형룡의 영향에 따라 제목 설교가 유행했었다. 그러나 박윤선은 성경신학자로서 본문 설교를 통해서 강해 설교의 한 측면을 발전시켰다는 것은 한국 설교사에서 중요한 공헌점이라 할 수 있다.

본 논문은 박윤선의 설교에 대해서 여러 면에서 공헌을 하고 있지만, 그러면서도 아쉽게 생각되는 부분들도 없지 않다. 우선적으로 논문 제목 “인격을 통한 진리 선포: 박윤선의 설교 신학”은 우리로 하여금 논문 전개에 대한 혼란을 느끼게 한다. 실상 논문의 서론 부분에서 필자는 박윤선의 설교를 듣고, 그의 인격에 대해 증언자들로부터 들으면서, 설교에 일치하는 그의 인격적인 삶에 대해 감격하듯이 서술하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서론의 마지막 줄에서 그는 설교 신학을 논하겠다고 하면서 본론에서는 설교 신학의 특징들을 전개시켜 나가고 있다. 따라서 ‘인격을 통한 진리 선포’와 ‘박윤선의 설교 신학’의 매끄러운 연결 없이 갑작스런 단절은 이 둘 사이에 어떤 관련을 지니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으로 남고 있다. 논평자로서 본인은 앙드레 레스너가 바울의 십자가 설교 안에 드러난 그의 인격(ethos)을 집중적으로 논하는 것을 읽고, 필립 브룩스의 책 (Lectures on Preaching)에서 설교자와 인격과의 관계의 중요성을 논하는 것을 읽은 바 있다. 이런 토대 위에서 박윤선의 인격과 설교가 어떻게 긴밀히 연관되고 있는지를 알고 싶었지만, 본 논문은 ‘인격을 통한 진리 선포’에 대해서 ‘박윤선의 설교 신학’을 논함으로서 논문의 주제가 좀 산만하고 느슨한 느낌을 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두 번째 아쉬움은 박윤선의 설교 신학의 특징으로 2번에서 다루고 있는 “성경의 권위에 기초한 개혁주의 설교”에 있다. 성경의 권위는 칼빈주의자로서 박윤선 성경 신학의 근본 전제였다. 이것은 또한 설교에서 당연히 따라오는 설교의 근본 전제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박윤선 설교의 특징을 형성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점이 있다. 논문의 필자는 박윤선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자유주의 신학자들 (불트만, 하르낙 등) 과 설교자들 (프레드 크래독, 유진 로우리 등)의 잘못된 성경관을 언급하면서 박윤선은 성경의 권위에 기초한 설교를 하고 있다고 언급하면서, 설교 신학의 한 특징으로서 성경의 권위를 주장하고 있다. 성경의 권위가 박윤선 설교의 한 특징이 되려면 차라리 칼 바르트를 언급하면서 그와의 고투를 언급하는 것이 더 효과가 있지 않았을까를 생각해 본다. 박윤선이 성경의 권위와 관련해서 가장 고투했던 신학자는 바로 칼 바르트였다. 칼 바르트는 성경신학자로서 그의 신학 사상이 칼빈주의를 답습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신정통주의라 불릴만큼 교묘히 다른 면모가 있었다. 박윤선은『로마서 주석』에서 바르트의 잘못된 성경관을 조목조목 들어 비평하면서 고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그의 비평에서 성경에 대한 권위가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살펴보고, 그 주석에 게재된 설교에서 어떻게 성경의 권위가 나타나고 있는지를 살펴보았다면 그의 설교의 한 특징으로서 더 좋지 않았겠나 하는 아쉬움이 있다.

세 번째 아쉬움은 박윤선 설교의 문제점을 언급하고 있는 첫 번째 항과 관련이 있다. 논문의 필자는 박윤선의 설교는 사회문화적 변혁을 잘 반영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한다. 정창균과 박용규가 말한 것을 토대로 그러한 주장을 한다. 그러면서 또한 그는 “박윤선의 개혁주의 신앙이 문화와 사회의 변혁을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김명혁의 글을 직접인용하면서 긍정적 측면도 있음을 나열하고 있다. 그러나 박윤선의 문화적 변혁에 대한 이러한 긍정적 사실에 대해서 어떤 타당성 있는 반박도 없이 부정적인 입장만을 수용하면서 박윤선의 설교에서 발전되어야 할 부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논리 전개에 혼란함을 느낀다.

더군다나 문화 변혁에 대해서 박윤선을 논한다고 할 때는 좀 더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본문 설교를 할 때 “적용”에 대해 설교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있다. 많은 설교학자들은 본문을 오늘날의 상황에 적합하도록 적용을 해야 할 것을 주장한다. 만일 이러한 설교학적 “적용”을 박윤선이 배우고 설교에서 사용했다면 그 당대의 문화적 변혁에 관심 있는 “적용”을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시드니 그레이다너스 같은 설교학자는 본문만 충실하게 설명하다보면 적용은 저절로 되기에 현대 상황에 적합한 적용을 반대한다. 실상 박윤선의 설교적 정황은 성경신학자로서 후자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논문에도 언급되었듯이 박윤선은 세상 물정을 잊어버린 채 오로지 주석 작업에만 몰두했었고, 기도에 전념했으며, 주석에 따른 설교에만 몰두했었다. 그는 주해에 관심이 있었고 주해에 충실한 본문 설교가 그의 관심을 사로잡고 있었다. 따라서 문화적 변혁을 논하기 전에 그의 설교에 대해 좀 더 진지하게 분석하면서 설교학적인 차원에서 그의 한계를 논하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마지막으로 논문은 박윤선의 설교신학과 인격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지만 박윤선 설교의 일차적 소스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약간만 언급하고 있고, 대개는 타 학자들이 제시한 이차적 소스들에만 주로 치중하고 있다는 아쉬움이 있다. 박윤선 설교의 일차적 소스들인 설교문들과 테잎들을 들으면서 ‘그 안에서’ 설교학적인 관점으로 박윤선 설교의 특징들을 도출해 내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본 논문은 여러 면에서 아쉬운 면도 있지만 설교자로서 박윤선의 설교와 인격에 대해서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면들을 잘 제시해 주면서 우리에게 도전을 주고 있다. 그리고 본 논문은 우리가 박윤선 설교의 세계로 좀 더 깊이 들어가서 더 좋은 것들을 퍼내면서 박윤선 설교의 특징들을 발전시킬 수 있는 좋은 토대를 형성해주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류응렬의 “인격을 통한 진리의 선포: 박윤선의 설교신학” 에 대한 논평

 

이순근(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목회학)

 

 

류응렬은 박윤선의 설교신학이라는 큰 주제를 적절한 관점에서 잘 분석평가하고 있다. 과거의 평가를 참고하면서, 박윤선의 설교관을 잘 정리하였고,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으로서의 성경관에 입각한 개혁주의적 설교라는 점을 잘 드러냈고, 또한 본문에 충실한 설교이면서도, 한편 언행일치, 혹은 신행일치의 설교라는 점도 잘 지적하였다. 류응렬은 큰 주제를 적절한 문제를 제시하고서 논리적 흐름을 따라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한 논문을 우리에게 제시하였다.

 

이하에서 논평자는 이 논문을 읽고 느낀 점을 간략하게 서술하려고 한다.

 

1. 류응렬은 이 논문에서 박윤선의 설교가 “칼빈주의 설교”이며, 또 “성경의 권위에 기초한 개혁주의 설교” 라고 한다. 그리고 박윤선의 이런 설교를 특징짓는 것이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으로서의 성경관” 이라고 한다. 그리고 박윤선은 “한평생 성경의 무오성을 지키기 위해 힘썼”다고 한다. 이 점을 오늘 새삼 일깨워 준 것도 시의적절하다고 본다. 오늘날 점차적으로 교회 강단에서도 다원주의적 신학의 영향을 받아 “다른 복음”(갈1: )을 전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길 외에도 다른 구원의 길도 있다고 전하는 설교가 행해지고 있다. 그와 같은 설교는 성경의 영감과 무오성에 이의를 가진 성경관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것은 향후 한국교회를 혼란하게 할 가능성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으로서의 성경관에 근거한 박윤선의 설교가 오늘의 설교자들에게 하나의 긍정적인 설교모델이 되어야 하는데, 이 논문은 이 점을 잘 강조하고 있다.

 

2. 박윤선의 설교의 두축이 “연구에 의한 준비”와 “기도의 준비”라는 점을 오늘 새롭게 부각시킨 것도 하나의 공헌이라고 본다. 오늘날에는 설교가 교회 안에서 신자들만을 대상으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방송과 언론매체를 통해 일반대중인 비신자들에게 까지 전달되고 있다. 이런 현실 하에서는 설교가 성경말씀을 충실히 해석하여 오늘의 삶에 필요한 교훈적인 내용을 전하기 보다는 일반 대중들의 인기에 영합하는 내용으로 설교하기가 쉽다. 말씀에 대한 철저한 연구와 그와 병행하는 간절한 기도는 오늘의 설교자들이 다시한번 갖추어야 할 필요한 설교의 요소들인데, 이 논문은 그 점을 일깨워 주고 있다.

 

 

3. 또한 이 논문이 설교자 박윤선을 본문 해석에 충실한 설교를 하여 한국교회 내에 “제목 설교의 유행을 벗어나 본문의 해석에 근거한 설교의 기초를 닦은 최초의 사람”이라고 본 점도 박윤선의 설교신학의 한 특성을 잘 묘사한 표현이라고 본다. 이어서 류응렬은 “박윤선의 본문에 집중하는 설교는 한국 기독교 초기 설교가 보여준 제목 설교의 한계를 잘 극복한 것으로서 본문에 집중해야 할 설교자의 사명을 잘 세웠다고 평가한다” 고 하면서 “청중의 관심을 끌기위한 화려한 예화와 감동적인 이야기가 대신하는 강단은 ... 진리의 선포가 아니라 강연에 불과하다고 (박윤선은) 지적했다”고 한다. 이 점은 박윤선의 설교에 대한 올바른 평가라고 생각하면서도, 한가지 조금 더 연구하여 규명해야 할 점이 있다고 본다. 그것은 “예화”에 대한 생각이다.

 

논평자의 견해로는, 박윤선은 설교에 있어서 적절한 예화의 사용을 오히려 권장하지 않았는가 싶다.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논평자는 신학교 시절, 박윤선의 설교를 수차례 들었고, 또 설교에 관한 강의를 들었다. 정확하게는 “설교연습”이라는 과목을 들었다. 그리고 언제인가는 김진홍 목사의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라는 책을 우리에게 읽도록 하고, 그 책속에서 설교예화를 한번에 10개씩 정리하여 보고서로 내도록 한 적이 있었다. 그 때 많은 학생들이 예화를 고르라는 숙제에 대해 불평을 하면서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그리고 또 박윤선의 주석에 포함되어있는 수많은 설교들을 보아도 박윤선은 결코 예화사용을 부정시하는 것 같지 않다. 물론 류응렬의 글에서 ”화려한 예화“라고 하면서 ”화려한“이라는 수식어가 있어서 부적합한 예화사용의 문제점을 지적한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 자칫 오해하면 박윤선은 오로지 본문해석에 충실하여 일절 예화는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어서 조심스럽다. 앞으로의 연구에서 박윤선의 예화에 대한 입장과 사용 용례 등을 심층적으로 연구하는 것도 의의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4. “우리의 인격이 진실하지 못하면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진리로 전달되지 못한다”는 박윤선의 글을 인용하면서, 이 글은 박윤선의 설교신학의 한 특성을 필립 부룩스의 말을 빌어 "인격을 통한 진리(Truth through Personality)" 임을 지적한다. 그리고 박윤선의 그와 같은 설교신학은 오늘날과 같이 경건과 실천이 점 점 약화되고 있는 “... 시대 가운데 박윤선의 외침과 삶은 기독교회와 설교자들을 깨우는 음성으로 들려온다”고 함으로써 본 논문은 우리시대에 잊혀져 가고 있는 설교의 기본을 우리에게 새삼스럽게 다시 보여주는 귀중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본다.

 

5. 한편, 류응렬은 박윤선의 설교에서 발전되어야 할 두 부분 중 하나를 “설교 전달력”이라고 한다. 이 점에 대해 지난 날의 몇 연구자들의 박윤선의 설교전달에 관한 평가를 인용하면서 “박윤선의 설교전달이 그렇게 효과적이지 못하다는 평가는 정당하다고 여겨진다”고 한다. 하지만, 논평자는 류응렬이 만일 박윤선의 설교를 직접 들어보았더라면 설교전달에 관한 평가가 다소 다르지 않을까 싶다. 본 논문 초두에서 밝히고 있는 바를 보면 류응렬은 박윤선의 설교를 직접 듣지 못했고, 다만 그의 설교집과 171개에 달하는 육성 테이프를 중심으로 박윤선의 설교신학을 연구한 듯 하다. 박윤선의 설교는 물론 류응렬이 지적한대로 설교의 구성이나 전개, 그리고 높은 목소리나 쇳소리 등 설교의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문제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논평자 개인에게는 그와 같은 면이 거의 설교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는 것이 논평자의 개인적 경험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박윤선은 그의 인격을 통한 설교를 하였기에 전달의 약점들은 별 문제가 안되었다고 본다. 어떤 점에서는 박윤선의 설교전달에 있어서 미흡한 부분들이 소박한 아름다움으로 비칠 수도 있어서 오히려 더 효과적인 전달이 되었을 수도 있다고 보면, 너무 지나친 해석일까 싶다.

 

6. 그리고 박윤선의 설교가 당시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는데 미흡했다는 지적은 비교적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설교자 박윤선 개인의 살아온 인생과 당시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 보면, 이해할 수도 있는 면이 아닌가 싶다. 개혁주의적 설교가 문화와 사회의 변혁을 지향해야 하며, 청중이 처한 사회적, 국가적 현실과 정치, 경제, 윤리적 상황에 대한 성경적 관점과 방향을 제시해야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 역시 시대적, 상황적 제한을 받는다고 본다. 설교자 박윤선이 살아온 인생과 설교했던 시대적 상황과 또 그의 설교를 들었던 청중들은, 사실 오늘 2000년대와 다르다는 점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오늘의 한국교회의 청중들에 비해 박윤선의 설교청중들은 그 당시의 사회의 약자층들 이었고, 소외계층들이었다고 본다. 따라서 그런 청중들에게는 정치, 사회, 윤리적 상황에 대한 설교보다는 그들의 심령을 변화시키는 설교가 보다 현실적이지 않았을까 한다. 류응렬은 박윤선의 설교의 한계는 “오늘날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설교자들이 동일하게 안고 있는 한계”로 여겨진다고 하면서 이 점은 앞으로 중요한 관심사로 다루어야 한다고 하는데 이 점은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어떤 점에서는 이제 한국의 교회 안에 한국의 사회 지도층들이 대다수 들어와 있기에 이제야 말로 오늘의 정치, 사회, 윤리적 문제들에 대해 개혁주의적 설교를 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이상에서 간단히 느낌을 서술하였는데, 초두에 언급한대로, 류응렬은 큰 주제를 다루면서 적절한 문제를 제시한 후 논리적 흐름을 따라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한 논문을 우리에게 제시하였다. 이 점은 그의 적지 않는 공헌이라고 본다. 앞으로 이어지는 박윤선의 설교에 대한 그의 논문을 기다리는 마음을 갖도록 하기에 충분한 글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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