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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들아, 내가 만든 것들 다 어디 있느냐? 

롬8:19-22


인류의 조상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을 배반하는 범죄를 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가인이 그의 동생 아벨을 살해하는 범죄를 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가인아,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인류의 첫 번째 범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파괴하는 것이었습니다. 인류의 두 번째 범죄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행해지는 죄악의 극치였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범죄의 역사로 본다면 인류가 저지른 모든 죄악은 결국 이 두 유형의 죄악에 귀속될 것입니다. 그런데 21세기를 살고 있는 오늘날의 인간은 과거의 범죄 유형과 전혀 다른 새로운 차원의 죄악을 자행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곧 자연을 무제한적으로 파괴한 죄악입니다. 자연 파괴는 생태계 파괴를 일으키며 생태계 파괴는 결국 인간을 포함하여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를 멸절시킬 것입니다. 생태계 위기는 어느 특정한 지역이나 특정한 국민에게 국한된 위기가 아니라 오늘날 전 인류가 공통으로 직면하고 있는 중대한 위기입니다. 핵무기의 무서움보다 더 큽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던지시는 세 번 째 물음은 무엇이겠습니까? 아마도 "인간들아, 자연은 어디 있느냐?"하시며 하나님은 자연에 대한 책임을 인간에게 추궁하실 것입니다. "가인아, 네 아우는 어디 있느냐?"라고 묻는 하나님께 가인은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하고 뻔뻔스럽게 대꾸했습니다. 오늘날의 인간은 하나님의 셋째 번 물음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해야 마땅하겠습니까?

 

화이트(Lynn White Jr.)라는 학자가 "생태학적 위기의 역사적 뿌리"라는 논문에서 자연 파괴와 생태학적 위기의 사상적 근원은 유대교-기독교적인 인간 중심적 자연관에 있다고 내린 진단은 충격적입니다. 인간이 자연을 대규모로 그리고 급속도로 파괴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 것은 과학과 기술의 발달 때문인데 과학과 기술의 발달은 서양의 진보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이 진보 사상은 유대교-기독교적인 종교의 토양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성서의 창조 사상은 자연을 탈 신성화, 탈 마법 화 시켰으며 그 결과로 인간은 자연을 무제약적인 탐구와 이용의 대상으로 취급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비 콕스라는 신학자도 화이트와 마찬가지로 창조 기사는 자연을 탈마법화시켜서 인간의 용도에 이용될 수 있는 대상물로 만들어주었으며 여기에서 과학과 기술이 발달하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창조 이야기에 근거하여 자연을 정복하고 지배하는 주인으로 행세했습니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가 아니고 자연 위에 군림하는 존재이며 자연은 인간을 위해서, 오직 인간의 사용을 위해서 존재할 따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유대교적-기독교적 자연관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자연을 무제약적으로 착취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의 무제약적 자연 착취와 그것으로 인한 생태학적 위기라는 엄청난 재앙을 초래한 책임은 상당 부분 성서적 창조 신앙에 있다고 했습니다. 전통적으로 기독교는 자연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자연을 경시했습니다. 성서에는 '자연'이라는 개념 자체가 나오지 않습니다. 성서의 창조 신앙은 만물을 피조물로 규정합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존재하거나 어떤 신적 힘을 지닌 '자연' 또는 '자연물'이라는 개념은 있을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기독교 신학에서 자연이 차지하는 자리는 거의 없었습니다. 자연은 신학의 관심 영역으로부터 떨어져 나가서 탐욕스러운 인간들이 마구 짓밟도록 내버려져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창조 신앙의 본래적 의미는 무엇이었습니까? 창세기 1-2장에는 두 개의 창조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1장에 나오는 창조 이야기에는 큰물을 처리하는 작업이 창조 활동의 주요한 내용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둘째 날의 창조 활동은 물 한가운데 궁창이 생기게 하여 위에 있는 물과 아래 있는 물로 가르는 작업이었으며 셋째 날의 창조 활동의 하나는 아래 있는 물을 한 곳으로 모아 바다가 되게 하고 물이 없어진 곳을 뭍으로 만드는 작업이었습니다. 2장의 창조 이야기는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실 때에 땅 위에는 비가 내리지 않았으며 땅에는 나무가 없고 들에는 풀 한 포기도 아직 돋아나지 않은 상황으로 묘사했습니다. 이 두 창조 이야기는 각각 다른 환경에서 생성되었음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1장의 창조 이야기는 인간이 큰물을 처리하는 것이 삶의 중대한 과제가 되어 있는 곳, 즉 메소포타미아 같은 지역을 전제합니다. 2장의 창조 이야기는 물이 없는 곳, 즉 인간이 물을 찾아 끊임없이 헤매는 각박한 곳, 즉 사막과 같은 광야 지역을 전제합니다. 두 창조 이야기의 공통점은 인간이 자연 환경으로부터 위협을 당하고 있는 처지입니다. 큰물을 막아서 농사할 수 있는 땅을 확보하거나 오아시스 같은 것을 발견하여 삶의 공간을 확보해야 하듯이 무력한 인간은 적대적인 자연의 거대한 세력과 맞서 싸워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인간이 자연에 해를 끼친다거나 자연을 파괴한다는 관념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자연의 세력은 인간에게 너무나 적대적으로 거대하였고 인간의 힘은 너무나 미약하였습니다. 더구나 인간의 지적 수준은 너무나 낮았기 때문에 전염병, 화산, 지진, 태풍, 홍수와 같은 자연의 불가항력적 위력이나 일식이나 월식과 같은 기이한 자연 현상 앞에서 인간은 너무나 무력한 존재로서 두려움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인간은 자연의 세력에 위압을 당하여 자연을 신으로 숭배하는 미신에 빠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에 반하여 성서의 창조 신앙은 자연이 아무리 위협적이라 하더라도 자연은 신적 존재가 아니고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존재로 규정했습니다. 해와 달과 별들은 더 이상 인간의 운명을 좌우하는 신들로서 숭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빛을 비추고 때와 절기를 정하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창조된 피조물로 보았습니다. 여기서부터 창조 신앙을 자연의 탈 신성화, 탈마법화가 가능해진 것입니다. 창조 신앙의 목적은 원래 자연 정복, 자연 파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연의 위력으로부터 인간의 해방, 인간의 존엄성 회복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 파괴와 생태계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역사가 토인비(A. Toynbee)는 주장하기를 자연 멸시와 자연 착취의 원인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와 같은 유일신 종교 사상에 있기 때문에 현재의 생태학적 위기에서 탈출하는 길은 유일신 세계관에서 탈피해서 내재적인 범신론으로 회귀하는 데 있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자연의 가치를 일깨운다는 점에서 일리는 있다고 하겠으나 문제 해결의 열쇠는 될 수 없습니다. 범신론에는 자연 친화적, 자연 경외적 요소가 있음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범신론이 자연 파괴를 막는 최후의 보루는 아닙니다. 범신론적 종교가 지배하는 곳에서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따름이지 자연 파괴는 자행됩니다. 인간의 자연 파괴 행위는 자연을 비신성시하는 데 연유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욕심에서 연유합니다. 자연 파괴 행위는 인간에 대한 인간의 착취 행위의 연장선에 놓여 있습니다. 인간의 욕심이 근절되지 않고서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착취 행위가 단절되지 않으며 인간과 인간 사이의 착취 행위가 단절되지 않고서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착취 행위가 단절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수직적 관계가 올바로 서지 않고서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올바로 설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피조물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참된 인간을 뜻합니다. '피조물'은 인간과 대조적으로 사용될 경우에는 자연 만물을 뜻합니다. 인간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인간만 고통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만물조차도 함께 고통을 당하고 있으며 이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종말에 하나님의 자녀, 즉 참된 인간이 출현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자연 파괴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이 담당해야 할 몫이 크다고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올바른 창조 신앙을 회복함으로써 자연을 가꾸고 보호하는 일에 선도적 역할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성서는 자연의 본유적 가치에 대해서는 거의 침묵하고 있습니다. 십계명에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종교적 관계, 인간과 인간 사이의 윤리적 관계에 대한 규정만 있으며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에 대한 규정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성서학자는 오늘날의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십계명에 "자연을 파괴하지 말라"라는 제11 계명이 새로이 첨가되어야 한다고 재치 있게 주장하기도 합니다. 자연은 인간의 소용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존재 목적이 있다고 보는 새로운 자연관이 절실히 요청됩니다. 또 인간은 거대한 자연계의 일부이며 자연의 생태계가 파괴될 때 인간의 생존도 위험에 빠진다는 엄숙한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억압하거나 착취하거나 심지어 죽이기까지도 하는 것은 사람의 가치에 대한 무지 때문만은 아닙니다. 남을 억압하거나 죽이는 사람은 비록 그가 사람의 귀중함을 알고 있을지라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자기의 욕심을 충족시키려는 이기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자연의 소중함을 인식한다 하더라도 자연 파괴의 고리를 끊기 어렵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의 악순환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자연 파괴와 생태계 위기는 인간이 구축해 놓은 이러한 삶의 행태가 낳은 필연적 산물입니다. 자연에 대한 인식의 전환도 요청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의 삶의 방식의 전환입니다. 그러므로 생태계 위기 해결의 열쇠는 인간의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혁명에서 찾아야 합니다. 자연과 생태계 보호는 결국 윤리적 문제와 종교적 문제로 다시 귀착됩니다.

 

예수와 어느 율법 교사 사이에 벌어진 대화를 새롭게 쓰면 이렇습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율법 교사 하나가 예수를 시험하여 물었다. "선생님, 율법 가운데 어느 계명이 중요합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셨으니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가는 계명이다.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여라' 한 것이다. 셋째로 한 가지 덧붙일 것이 있는데 그것은 '자연을 네 몸 같이 사랑하여라' 하는 것이다. 이 세 계명에 모든 율법과 예언자들의 본뜻이 달려 있다"(마 22:3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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