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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고전6:1-11

 

전에는 종교(신앙)가 그 첨단에 선 피라밋과도 같은 가치관을 형성했어요. 그런데 오늘날은 그 자리에 과학이 들어서 있어요. 그러면 과학이 모든 인간 개개인의 삶을 가치 판단해 주느냐? 그렇지 못하죠? 과학은 인간의 생각과 행동과 삶을 가치판단해 주는 역할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개인의 가치관을 통합하고 책임져줄 권위의 손재가 없는 거죠. 따라서 과거에는 일원적인 세계상을 보였으나 오늘은 다원적인 세계상에 직면해 있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이 시대에 사는 사람들에게 제7의 감각이 필요하다고 하겠어요. 여기서 말하는 제7의 감각이란 연결입니다. 이제는 연결능력이 힘이 된다는 거예요. 제7의 감각은 새로운 생존 본능이 된 거죠.

 

계속되는 테러, 난민의 물결, 침체된 세계 경제, 놀라운 선거 결과, 뜻밖에 찾아온 부의 순간, 기적적인 의학의 진보…… 이 모든 현상이 연결성의 산물이죠. 인공지능과 사물인터넷, 소셜미디어 등 혁신적 기술로 인해 인류는 초연결사회 진입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 생존은 물론 권력과 부 또한 새로운 기회를 발견하는 자에게 돌아가게 되어 있죠. ‘제7의 감각, 초연결지능’이라는 책에서 조슈아 쿠퍼 라모는 미지의 권력과 부를 깨울 새로운 본능을 제안합니다. 네트워크 시대의 작동 원리를 간파해 이용하는 힘, 그것이 바로 그가 창안한 ‘제7의 감각’입니다. 이런 지경이 되었으니 여러모로 자기 판단을 하기 어려워 진거죠.

 

미래에는 연결과 네트워크, 인공지능의 지배와 사용이 실제적이면서 결정적인 역할을 행사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소리 없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진행되죠. 문제는 우리가 바로 연결의 대상이면서도 그 연결이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 알거나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연결은 소유하지 않고도 사물을 통제할 수 있게 해 자칫 우리는 거대한 네트워크에 속수무책으로 갇혀버리고 맙니다. 미래의 싸움은 우리가 네트워크에 얽히느냐 마느냐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얽히는가에 대한 것이 됩니다. 이런 시대에는 믿음직했던 것들이 쓸모없어지고 심지어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의 직관만이 중요해질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새로운 생존본능, 제7의 감각 즉 동물적 본성의 회복입니다. 이제 이정도 되면 참으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게 어떤 건지, 어느 만큼의 문제인지 스스로 정하기가 어려워지죠.

 

이러다 보니 종교가 슈퍼마켓에 진열된 상품 중의 하나일 뿐, 생존에 필수적인 것이 아니게 되었어요. 실감하시나요? 또 전에는 가치 기준이 확실한 흑백(黑白)의 차이와 구분이 확실했어요. 그러나 지금은 흑과 백이 섞여 있을 뿐만 아니라 수시로 뒤바뀝니다. 따라서 선과 악, 불의와 의, 이러한 구분을 하기 위핸 두렷한 기준은 적어도 팻말에 써 붙인 것처럼 되어 있지 않아요.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기준이 문제성을 갖게 되고, 동시에 ‘그리스도인이라는 의식을 갖고 세상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를 간단히 답 달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제 이런 다양성의 변화에를 두려워 한 이들이 단답형의 종교로 몰리고 있는데, 그게 이단입니다. 그들은 세상이 어떻든 경전의 문자에 천착을 하고, 거기에 간단히 사람들의 삶과 가치와 판단을 규정해 버립니다. 간단해서 혼란하지 않아도 되니 좋긴 하겠지만 이것은 실로 인간성의 회피입니다. 그래서 들 가운데 세상 도피적인 현상이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거죠.

 

우리나라만 해도 그래요. 전에는 “교회에 출석하느냐”, “술, 담배를 안 하느냐?”, “세례를 받았느냐?”, “직분이 뭐냐?” 뭐 이런 것들로 그리스도인인 것을 확인했잖아요. 그러나 오늘날 아무도 이런 기준으로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다, 아니다’를 규정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제가 보기에는 말입니다. 다른 어떤 교회에서는 그러는지 모릅니다만. 이제는 정말 교회 안에 참된 그리스도인이 있는지, 아니면 교회 밖에 참된 그리스도인이 있는지, 심하게는 무신론의 영역 속에 참 그리스도인이 있는지(니체처럼), 유신론의 그늘 밑에 반(反)그리스도인이 있는지, 얼른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이이라는 기준은 뭔가? 오늘 그걸 논구하는 것이 될 거 같아요. 앞의 질문은 다시 “그리스도인으로 세상을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이 되겠습니다. 이건 어려운 문제입니다. 제 목회의 전부를 걸고 내려야 할 결론과도 같기 때문이죠. 그래서 바울이 한 말 중에서 그 근거를 찾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어디선가도 말씀을 드렸지만 바울은 베드로와 안디옥 결별이후 고린도로 가서 공동체를 만들면서 오늘날과 같은 언어들로 구성되는 공동체를 만들 게 됩니다. 그리고는 고린도에 구축된 새 공동체가 예루살렘 공동체와 어떻게 다른가. 무엇이 다른가, 그 방향은 무엇인가를 제시하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근거를 바울의 초기 공동체 설립현장에서 읽는 것이 마땅하다고 보는 겁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바울의 말들은 특수한 상황에 처해 있는 고린도 교회에서 한 말입니다. ‘고린도’는 로마 제국의 점령 아래 있던 희랍을 속 빼닮은 문명 도시였죠. 로마는 무력으로 이 도시를 정복(대부분의 도시 점령이 무력이었다)했지만, 정작 삶은 희랍의 철학과 삶의 습속들이 고린도에 가득했습니다. 그러니까 정치적으로는 로마에 속했고, 문화적으로는 그리스에 속해 있는 겁니다. 그리스에 가 보셔서 아시지만 사실 로마는 고린도와 아주 멉니다. 지중해를 건너가야 하니까요. 그런데 그리스는 그리 멀지 않습니다. 에게 해를 끼고 돌면 되거든요. 그러니 당연히 삶의 풍습이나 언어는 그리스화 되었겠죠. 그때 그리스에 성행하던 철학이 에피큐리안(이 당시 유명한 철학은 스토익, 에피큐리안, 견유학파)이라는 거였어요. 그게 어떤 철학 인고 하니, 쾌락주의적 행복을 추구하는 것을 지상의 과제,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거였습니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인생의 행복을 꾸미기 위한 도구였고, 일하기 위해 먹는 게 아니라 먹기 위해 일하고, 철학은 진리 탐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미(美)를 감상하기 위한 도구이며, 심지어 종교도 이 쾌락의 보장을 위한 장식품이었습니다.

 

이런 철학과 문화의 사조 속에서 고린도 교회는 어떤 문제에 당면하고 있었을까요? 고린도 시에는 아프로다일 신전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지난 여행 때 그 신전터에 가서 섰었죠. 점심을 그곳 레스토랑에서 먹었는데, 한국 여행객 일행과 만났고, 그 일행의 인솔자가 제 신학교 후배였어요. 그 때 가이드가 말해 주지 않았지만 왜 도시에 아프로다일 이라는 신전을 세웠느냐? 이 신이 아주 우스워요. 남이 행복한 걸 못 보는 신이예요. 그래서 행복한 꼴에는 곡 보복을 하거든요. 그래서 괘락을 삶의 기둥으로 삼는 사람들이(에피큐리안)행복하다간 큰 코를 다칠까봐 미리 이런 신전을 만들어 놓고 거기다가 뇌물을 바치는 거예요. 이거 먹고 내가 행복하더라도 봐 달라 이거죠. 그래서 만들어 놓은 신전이었어요. 그런데 이 신전에서는 한 때 1000명이 넘는 미녀들이 제사의식에 참여했습니다. 미녀들이 뭐 하러 제사의식에 참석을 했을까요? 저녀들은 신가 인간의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하는 거였어요. 순례자들에게 쾌락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신도 무마하는 종교적인 창기들이었어요. 에베소 교회 터에도 가면 길바닥에 이런 종교적인 무녀들의 집으로 향하는 표시가 그려져 있었죠. 따라서 그 제사는 그야말로 축제였어요. 제신들 앞에서 실컷 놀고, 먹고, 마시고, 구경하고 즐기는 겁니다. 즐거움이 목적이었습니다.

 

이런 오락은 종교의 영역에서 뿐 만 아니라 재판과정ㅇ[서도 마찬가지였어요. 재판이란 게 공정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이 재판조차도 재미로 하는 겁니다. 재판이 하나의 연극, 관극이었어요. 문제가 있는 두 사람이 대표 두 사람을 냅니다. 그 가운데 재판관 비스름한 중재자가 나오고요. 그리고 사람의 왕래가 빈번한 거리에서 해요. 일종의 볼거리로서의 재판이죠. 이렇게 하다가 결론이 나지 않으면 군중 속에서 배심원을 뽑는데, 20, 40, 100, 1000, 60000명 까지 뽑았대요. 상암 월드컵 경기장 같은 곳에서 하는 재판인거죠.

 

그린도 교회가 놓인 주변은 이랬어요. 이런 헬레니즘 문화속으로 바울의 기독교가 들어간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이런 세상 속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하나? 하고 묻게 되지 않겠어요? 그 물음이 곧 그 자신들의 정체성이니까요. 아마도 이 공동체의 이런 질문은 우리의 질문과 다르지 않을 겁니다. 이런 직면한 문제에 대해서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두 갈래로 나뉘어졌어요.

 

*이방 문화에 때 묻은 사람들은 절대로 받아들이지 말자는 부류가 하나였습니다. 상대도 하지 말자고 했습니다. 이들은 사회적인 관계를 끊고 금욕적이며, 율법적으로 행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마도 오늘날 신천지 정도 될 것 같습니다.

 

*저들의 분위기에 휘말려서 적당히 살자는 부류들이 그 둘째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의 문제를 제기한 부류들입니다. 이 두부류 사이에 무슨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들은 그 문제를 바로 연극과 같은 재판에 맡겼는데, 그만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은 사람들의 조소거리가 되었습니다. 마치 요즘 교회가 무슨 분쟁이 생기면 뻑 하고 세상 법정에 고소하고 하잖아요? 그거예요. 그래봤자 교회가 교인이 수치를 당하는 거 아닙니까? 감리교도 엄청나게 그러지만요. 지금 감신대도 그러고 있어요. 그때 이런 말을 하는 거예요? 꼭 이래야 합니까? 그리스도인들이 문제가 생길 때 꼭 그 연극 같은 재판에 걸어야 하겠어요?

 

이에 반해 유다민족에게는 하나의 전통이 있었습니다. 로마가 유다를 정복하고 통치할 때 유다인들은 정치범 외에는 즉 민사사건은 끝끝내 자체 안에서 처리할 것을 주장해서 그 권리를 쟁취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두 경우를 알고 있던 바울은 이 본문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자의식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밝히고 있는 겁니다.

 

바울이 뭐라죠? “성도가 세상을 심판 하리라는 것을 여러분은 모릅니까?”라고 합니다. 자질구레한 문제를 자체 안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극장과 같은 대중에게 시비를 가려달라고 하는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도가 세상을 심판 하리라는 것을 여러분은 모릅니까?”라는 말은 그들에게 어처구니없는 말이었어요. 바울은 재판을 구경거리로 만든 세상을 ‘불의한 것들’이라고 단정하는 반면 그리스도인들을 [성도 Hagioi]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거룩하다’는 말은 ‘구별되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런 세상(재판을 재미로 하는)안에 살면서 그런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로 부르는 거죠. 이런 사고는 이스라엘인의 자의식에 그 뿌리를 두고 있어요. 이스라엘의 선민사상은 아시는 것처럼 어려움 속에서도 ‘이스라엘 인’으로 스스로를 지키고 살게 하지만, 죽고 망하게도 한 중요한 인식이었어요. 그들의 선민 인식은 그들이 어떤 굴욕적 역사 상황 속에서도 비굴하지 않게 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의식은 자신들을 주변 민족과 적대하게 되고 스스로를 고립되게 만들기도 했지요. 제가 왜 이런 역사적인 사실을 들춰내는가 하면, 앞에서 [성도]라는 구별을 바울이 지었대서 그것이 앞의 선민사상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실까 싶어서 그러는 겁니다. 바울의 표현이 설사 선민사상과 유사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염두에 두고 하는 표현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떻든 세상 사람과는 달라야 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 건 분명합니다. 이게 앞의 선민사상과 다른 것은 바울의 성도 개념은 ‘남은 자’사상이기 때문입니다. ‘남은자 Remnent’라는 말은 묵은 싹의 그루터기에서 새삭이 돋는 그런 형국의 말입니다. 다 망한 거 같아도 살아남긴 그루터기가 있다는 것이고, 거기서 새로운 출발이 시작된다는 뜻입니다. 구약성서의 신학을 ‘남은자 Remnent’신학이라고 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다 죽어 문드러진 거 말고 ‘구별된 싹’이있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성도]였습니다. 바울은 그러면서도 이런 신념이 이스라엘의 선민 전통에서 왔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고전6:11, 롬9:6-8).바울이 이런 신념의 연장선에 있는 이유는 그가 바리사이파의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이 ‘바리사이’라는 말 자체가 선별되었다는 말이고, 그것이 훗날 바리사이들의 공죄(公罪)에 많은 여향을 끼쳤죠. 그것은 엘리트 의식의 극치로서 교만과 동시에 책임의식을 넣게 합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을 [성도]라고 할 때 ㅇ마도 이같은 사상의맥락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특이점인 이 엘리트 의식이 자타가 공인하는 불학무식(不學無識)한 천민 민중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계승되었다고 하는데서 역사의 주체를 뒤집는 바울의 의식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앞의 선민엘리트 의식과 다른 점이죠.

 

민중인 그리스도인들이 [성도]로 구별된 것은 이런 역사의식의 역전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특권을 부여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 안에 있으나 세상에 예속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그들이 특별해 지려면 세상 속에 그대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민중 그 자체가 세상 속에서 그들을 규정하는 굴레니까요. 그 굴레에서 그들을 벗겨내려면 그들이 세상 밖에 있는 존재로 규정이 되어야 하죠. 그런데 이걸 다시 종교적으로 이해하는 집단이 생겼습니다. 그것을 성속의 구별로 알고, 세상을 등지고 세상에 무관심 하려는 금욕적 고립주의자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사실 세상과 나를 칸막이 치고 그 칸막이 뒤에 숨는 건 어찌 보면, 세상 속에 살면서 세상과 구별되는 것보다는 쉽습니다. 보통 하층 종교가 선택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이런 신앙을 주장하거나 실행하는 집단이 있다면 그 또한 하층신앙이며 성경의 오독입니다. 바울의 [성도]는 그런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탈세계도 아니고 비세계화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디까지나 이 세상안의 존재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발은 이 세상을 벗어나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선별된 사람입니다. 바울은 이 세상이 썩어 문드러지고 있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그렇게 문드러지면 그 끝에 하나님의 통치가 있다는 낙관주의자도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렇게 무정란 같은 세상에 그리스도인들이 보냄을 받았다는 겁니다. 여기서부터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교회의 존립성, 신앙의 생명성이 출발하는 겁니다. 이런 세상에 보냄을 받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럼 뭣 때문에 보냄을 받았나요?

 

바울은 “성도가 세상을 심판한다.”(6:2)고 합니다. 아니, 더 나아가 “우리가 천사도 심판한다.”(6:3)고 합니다. 이로서 ‘세계 안에서 그리스도인 됨’이 무엇인지 극명하게 드러냅니다. 바로 본문의 위 5:13, 하나님께서 심판을 한다고 했는데, ‘심판’이라는 단어가 6장의 그 심판과 같습니다. 이로써 그리스도인 됨에 있어 바울의 인식의 근거가 확실합니다. 그것은 심판의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 내맡겨 버리고, 자기를 객관화시키는 수동적인 자세를 완전히 배격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세계 심판의 주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겁니다. 이 망할 세상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거 맡는데 그 실행자, 주체자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죠. 이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겁니다. 천국 징검다리로서나, 천국의 재화를 획득하는 기회로서나, 천국 가는 보증서로서의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바로 그런 책임, 세계 심판의 책임으로서의 [성도], [그리스도인]이라는 겁니다. 세계 심판의 주체=그리스도인, 이 얼마나 장엄한 현존의 선언일까요? 그가 알고 있는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적 위치, 불학무식(不學無識)한 천민들에게 이런 선언을 하는 것은 그의 회심의 동기와 맥락을 같이하는 겁니다. 기층민중이 중심을 이룬 예수공동체가 세계안의 하나님의 권력을 이양 받았다는 뜻입니다.

 

더욱 중요한 사항은 세상만 아니라 천사들도 심판할 권한을 그리스도인들이 가졌다는 겁니다. 천사는 누구죠? 하나님을 둘러싸고 있는 그의 영광의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이 선언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그 어떤 중간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당시대 기성종교세력의 천사론하고도 연관이 있습니다. 이런 지경이니, 천사도 심판할 권세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으니 군주의 권력, 교권 따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세상과 이들, 하나님과 이들(그리스도인들)가운데 개입하여 가타부타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선언은 로마의 권력과 유다교의 권력을 안중에 두고 있습니다. 언젠가도 말씀드렸지만, 바울은 이렇듯 기존의 권력체계, 그것이 국가의 정치권력이든(로마) 전통의 종교권력이든(유대교. 율법)지간에 강력하게 부정하고 항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에게 곧 복음이었고, 사명이었고, 예수와 같이 하는 일이었고,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세상의 권력은 생사 권을 장악하고 세상 사람을 지배했습니다. 유다교는 성서의 해석권을 장악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람과 세상을 심판할 권리를 독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현장을 아직 자의식이 확실하지 않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그대로 용인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을 그대로 세상 법정에 세워 조롱거리가 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그런 행동 자체가 이미 세상에 백기를 든 것과 같다고 합니다. 이런 마당에 이기고 지는 것은 무용지물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세상법의 밖에 있다는 말일까요? 법의 제재밖에, 피안에 존재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저 사람은 법이 필요 없다’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 경우, 그가 법이 필요 없다는 말일까 아니면, 법이 간여할 필요가 없이 주체적으로 법의 제재를 앞질러 산다는 말일까요? 이해되시죠? 그러나 이 표현은 소극적입니다. 바울의 ‘우리가 세상을 심판 한다’는 표현에 의하면 말이죠. 법이나 양심마저도 심판하는 주체가 누가인가 하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은 현실의 법 밖에 삽니까? 아닙니다. 바울도 법의 제재를 받아 처벌을 받지 않았어요? 투옥되기도 했어요. 바울이 그렇게 한 것은 세상의 법이 시시비비를 가려 줄거라고 믿어서 그런 게 아닙니다. 법을 등에 업고 불의를 실행하는 자들을 심판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예수와 같은 방식이었어요.

 

행16:16-40이 바울다운 면모의 일면입니다. 이게 고고한 자의식의 발로입니다. 그것은 엘리트 의식도 아니고, 선민의식도 아닙니다. 이미 식민지 사람들로 길들여진 마당에 그런 민족의식이 더 이 상 유효하지 않았을 시기에,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차용하여 구겨진 그 자존의식을 돌려 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망가진 인간 존재의 자의식, 세상의 풍경과 풍물에 매매된 존엄성의 의식을 고양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 됨]입니다. 그것은 특권이나, 보장이나, 특별한 존재의 상징이 아니었습니다. 바닥에 떨어진 인간성의 회복, 세계 안에서 인간으로 당당하라는 독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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