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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한국장로교회에 미친 오순절주의

첨부 1

  1. 한국장로교회에 미친 오순절주의.pdf (File Size: 605.4KB/Download: 17)

원 자료는 스켄한 pdf자료였습니다. 아크로뱃 9를 사용해서 문자 인식을 한 것이 아래 글이고 스켄한 자료는 파일로 올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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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개혁 신앙의 현주소
한국 장로교회에 미친 오순절주의의 영향을 중심으로
심창섭(총신대원)
1 .서론
현대 교회사에 있어서 가장 현저한 성장은 오순절주의의 성장이다.
오순절운동은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강조, 즉 개인의 체험에 있어서 성
령의 임재를 강조하는 것으로 특징지어진다. 이 운동은 1906년 윌리엄
시모어 (William Seymour) 목사가 방언으로 성령을 체험한데서 비롯되
었다. 오순절운동은 1953 년 국제 순복음실업인협의회 (Full Gospel
Business Men' s Fellowship lntemational)가 조직됨으로써 그 영향력
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오순절주의는 다음 두 가지 주요 주장으로 요약
될 수 있다. 첫째, 오순절 성령 강립은 오늘까지 지속되고 있다. 둘째, 성
령 세례는 중생 후 이차 축복{second blessing)으로 체험되어야만 한다.
한국교회 내에서 오순절주의는 1970년대 조용기 목사에 의해서 시
작되었다. 그 당시 조 목사는 오순절 사건이 오늘날도 반복되며, 성령의
은사를 지금도 받을 수 있으며, 성령 세례가 신자의 중생과는 분리되어
일어나며 신유와 방언을 동반한다는 것을 역설하고자 “영적 운동
(spiritual movementf 이 라는 용어렐 사용했다. 이 오순절운동은 한국
심창섭, 한국 개혁 신앙의 현주소 89
장로교회 (Korean Presbyterian Church 이하 KPC) 에 큰 영향을 미쳐서
개혁교회와 장로교회의 몇몇 주도적 신학자들은 오순절적 관점에서 성
령의 사력을 해석하기도 하였다.
한국장로교회 내에 침투한 오순절운동은 한편으로 한국장로교회의
부홍운동올 일으켰다. 1907년 원산에서 시작된 한국교회의 부홍운동은
처음부터 오순절주의적 양상을 명백하게 드러내었다. 1930년 평양신학
교에서 사용된 성령론 교과서는 이러한 요소들을 수용하고 있음을 나
타낸다. 예를 들어, 성령의 표지적 은사들은 현재도 나타날 수 있으며
성령 세례가 효과적인 그리스도인뜰의 생활을 영위함에 있어서 필수적
이라고 이 교과서는 가르치고 있다.
한국교회가 부홍운동을 통해 역사적으로 성장한 이래, 이 현상들은
성령의 은사들을 강조하는 오순절운동의 옥토가 되어왔다는 것이 증명
되었다. 그러나 구 프린스톤신학을 대표핸 조직신학 교수 박형룡 박
사는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사건은 단회적인 역사적 사건이요 오순절
의 은사들은 교회의 기능이 정지된 이후 교회 셜립을 돕기 위해 보내
주신 것이라고 역설하였다.70년대 이전에 이 견해가 오순절에 대한 한
국교회의 전통적 입장을 대변했다.
1970년대 오순절운동의 발홍과 더불어 이러한 전통적 입장은 한국
교회 내의 사역자들과 신학자들에 의해 도전을 받았다. 이들 중에 두
사람이 총신의 차 교수와 고신의 안 교수이다. 보다 최근에는 여러 사
역자들과 신학지들이 로이드 폰스(0. M. Loyd-Junes)의 성령론에 영
향을 받았다. 이들은 모두 아브라함 카이퍼 박사와 웨스트민스터 신학
교의 개핀(Gaffin) 박사가 신봉한 전통적인 개혁주의 성령론을 반대하
고 대신 성령의 체험을 강조한다.
한국교회 내에서 이들의 영향이 매우 커서 현재 많은 장로교회 사역
자들과 신학생들이 성령 체험이 신앙의 필수적인 부분이라고 믿고 있
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전통적인 장로교회의 칼빈주의척 선앙을
따르고 있다고 믿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이 전통적 장로교회 신앙을 갖
90 개혁신학의 현대척 조명
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상 이들은 오순절적 사역에 치우쳐 있다. 그
들은 칼빈이 자신들의 신학의 원천이라고 주장하지만 성령론에 있어서
는 그렇지 않다. 한국장로교회가 성령 세례를 강조함으로써 엄청난 성
장을 만끽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이제 한국장로교회는 오순절
주의의 영향을 인정하거나 혹은 부인하거나 아니면 제3 의 길을 찾。}oþ
할 시점에 이르렀다. 이 논문은 한국장로교회와 오순절운동 사이의 역
사적 관계를 추적하교 한국장로교회의 현 상황을 분석하며, 칼빈의 입
장파 대안을 발견하기 위히여 칼빈의 저작으로 돌아갈 것이다.
1. 한국장로교회 내에서 부홍운동의 두 조류
1900년대 초에 시작된 한국의 부홍운동온 성령 체험과 깊이 연관되
어 있다. 한국의 초기 부홍은 한국올 방문한 여성 선교사 M.C.White가
1903년 원산에서 기도모임을 가진데서 시작되었다. 기도모임이 전국으
로 확대되어 지속되었다. 1904년 원산에서 얼린 초교파척 기도모임에
서 캐나다 선교사 A. F.Robb 이 성령충만을 경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몇몇 한국인 참석자들 역시 동일한 체험을 했다. 1907년 평양에서는
부흥회가 계속적으로 열렸다. 길선주 목사가 인도한 새벽기도회에서 기
도하던 사랍들은 강한 죄의식에 사로잡혀서 모두 자신의 죄를 고백하
기 시작했다. 전례가 없는 방식으로 모여 있던 그리스도인들은 회개의
눈물의 고백중에 성령의 임재를 경험했다.
열정적인 기도회가 계속됨에 따라서 치유와 이적들이 부홍운동의
일부가 되었고, 부홍운동에 신비적 요소들이 스며들게 되었다. 김익두
목사는 부홍운동에 있어서 이러한 경향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다. 치유
이적을 통해 김 목사는 식민 통치로 학대받던 백성들에게 살아계신 하
나님의 능력을 증거하였다. 김익두 복사 자신이 아내의 질병을 위해 기
도하는 중에 신유은사를 체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김 목사는 목의
심창섭, 한국 개혁 신앙의 현주소 91
종양 때문에 큰 고통을 겪고 었던 아내와 함께 산에 올라가 금식하며
기도했다. 자선의 기도가 웅답되었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후에 김
목사는 자신의 아내가 완전히 치유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김 목사는 막 16:17-18 에 근거하여 필요하면 기도를 통해 신유은사
를 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김 목사가 많은 병자들과 장애자들을 치유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1920년 동아일보에 보도된 기사를 통해
이러한 이적들이 불러일으킨 감동을 목격할 수 있다.
벙어리가 말하기 시작하고 절름발이가 걷기 시작한다. 황해도의 김익두
목사 부산에서 성공적으로 기도회를 인도하는 중에 놀라운 사건이 일
어났다. 기도중에 김 목사는 절름발이 소년이 일어나 걷게 했다. 이 소
년은 생후 7 개월만에 갑자기 절름발이가 되었고 7년동안 슬픔속에 지
내왔다. 이 소년은 우연히 교회에 오게 되었고 그뜰 불쌍히 여긴 김 목
사가 옆에 앉아 그에게 안수기또했다. 이 소년은 즉시 걸었고 오늘도
이 소년을 보는 자들에게 김목사의 이적의 증거가 되고 있다. 신자들의
수가 증가했고 김 목사는 계속적으로 치유했다. 한 교회에서 17세된 벙
어리 소녀가 치유되었다. 전지역올 통틀어 22명이 완전히 치유되고 18
명이 부분적으로 치유되었다는 소문이다.
김 목사에 대한 소문이 퍼지자 이 사건들올 조사하기 위해 임택권
목사가 인도하는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이 사건들을 상세히 기록한 보
고서가 “이적들에 대한 조선장로교회 보고서 .. (Chosun Presbyterian
Church' s Report on Miracles) 라는 제목으로 1921 년 출판되었다. 이
보고서에 근거히여 황해노회는 1923년 총회에서 총회 헌법 제 3조 1 항
(“오늘날 이적 현상은 중지되었다 )을 삭제할 것을 제안했다. 이 제안
은 거부되었지만 19회 노회 중 6개 노회는 이 제안을 지지했고 이적이
참되다고 인정했다. 한편 3 개 노회는 기권했다.
이 논쟁을 검토해 보면 한국교회 내에 두 가지 상충되는 조류가 존
재한다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헌법이 이적의 가능성을 부인하는 반면
92 개혁신학의 현대적 조명
에, 치유의 실재가 어느 정도 인정되었다. 환언하면, 칼빈주의적 개혁주
의 전통이 한국장로교회의 토대여야 했지만, 한국장로교회는 사실상 영
적 은사와 이적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모순적 상황
의 원천은무엇이었나?
이 질문에 대답승}기 위하여 평양신학교 교수진의 핵을 이루었던 미
국 장로교회 출신의 선교사들의 신학적인 특성을 평가해 볼 필요가 있
다. 19이년에 설립된 평양신학교는 맥코믹 (McCormick)과 프린스톤
(Princeton) 신학교 출신의 선교사들에 의해 운영되었다. 1909년 한국
에 있는 선교사의 수는 39명이었고, 그중에서 16명은 프린스톤 출신,
11 명은 맥코믹 출신이었다. 1907년 부홍운동이 절정에 이르는 동안에
이 운동을 열정적으로 후원했던 선교사들은 맥코믹 출신의 선교사들이
었다. 아마도 시카고가 무디 (D. L. Moody) 의 부홍운동을 이미 경험했
기 때문에 이들 선교사들이 즉각적으로 한국의 부홍운동을 후원했을지
도 모른다. 여하튼 그들은 한국의 부홍운동을 미국 부홍운동의 연장으
로이해하고자했다.
비록 무디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코믹 출신의 선
교사들은 신학적으로 장로교적 관점을 견지했다. 더구나 신학적인 관점
에서 한국장로교회에 보다 큰 영향을 끼친 사람들은 프린스톤 출신의
선교사였다. 1800년대 후반 프린스톤의 신학적 견해는 C. Hodge, A.
Hodge, B. B. Warfield 등으로 대표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오순절 사건
의 유일성과 이적의 은사들이 사도시대 이후 중단되었다고 역설하였다.
이것이 형식적인 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한국 장로교회 뿐만 아니라
북미 장로교회의 일반적인 신학적 입장이었다.
은사와 이적을 동반하는 부홍은 1930년대 이후 한국장로교회 내에
서 점차 소멸되었으나, 1970년대 조용기 목사의 오순절 부홍운동과 함
께 재연되었다. 처음에 한국장로교회는 조용기 목사의 부홍운동에 반대
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 한국장로교회 내에 오순절과 성령 세례에 관
한 논쟁이 일어났다. 성령에 관한 오순절적 관점을 지지하는 다양한 이
심창섭, 한국 개혁 신앙의 현주소 93
론들이 장로교 목사들과 신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었고, 몇몇은 한국장로
교회 내에서 갈둥을 야기시켰다.
1IT.한국장로교회 내의 오순절주의의 발홍
1993년 12월에 개최된 Academia Christiana 심포지엄에서 안용복
박사는 “구약에 있어서 성령의 사역”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
에서 그는 요엘서 2:22-32의 문맥에서 성령의 도래를 설명하였다. 논
문에서 그는 “성령의 도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오순절날에 완전히
성취되었는가 아니면 그날에 시작되었는가? 라고 질문한다. 그는 이 질
문에 대하여 요엘서의 구절들을 언급함으로써 답하였다. “하나님의 약
속의 말씀을 자세히 관찰하면, (요옐서에 있는) 약속은 오순절 성령의
도래가 파거에 완성된 사건이 아니라 성령의 도래를 시작케하는 사건
이라는것을보여준다”
사도 베드로가 요옐서의 구절들을 인용할 때, 그는 요엘서의 “그후
에 "(2:28)를 “말세에"(행 2: 17)로 바꾸었다. 안 박사는 베드로의 이러
한 용어의 치환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구약을 불명료한 예언
을 설명하려는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그가 보기에 베
드로는 성령 도래의 때는 오순절날로 제한되지 않고 오순절로부터 말
세(마지막날)까지의 모든 날을 포함한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서 그는 “부어주리니” 라는 미완료 미래시제는 오순절날 성령의
사역이 반복적으로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그리
고 구약시대에 간헐적으로 보내졌던 성령은 그리스도의 재립때까지 폭
우가 계속되듯이 오순절에 부어지기 시작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1987년에 안 박사는 “성령론 이해에 있어서 난제에 관한 성경적 연
구”를 저술했다. 여기서 그는 중생과 성령 세례를 구분하고 오순절 성
령감림은 (성령) 세례가 한 번 일어난 것이요 결론적으로 성령충만의
94 개혁신학의 현대척 조명
한 예에 볼파하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그는 성령 세례와 함께 성령충만
은 계속적으로 반복된다고 주장하였다.
총신의 차영배 박사는 성령 강림의 연속성에 관하여 유사한 입장을
견지했다. 1973년 이래 차 박사는 성령론에 관한 17 개나 되는 논문을
발표했고, 쩨퍼, 개핀, 스토트(J. Stott)와 같은 개혁신학자들의 입장올
공격하였다. 이들의 입장을 논박햄1 있어서 차 박사는 성령의 영원성
은 그분의 반복적인 강하에 있다고 지적한다. 홍미롭게도 차 박사는 역
셜적인 논법 속에서 자신의 결론에 도달한다. 차 박사에게 있어서 “성
령의 도래가 ‘단 한 번’ 이었기 때문에 그 계속성의 근원은 여기에 있
다. 성령 도래가 단 한 번이 아니라면, 그것이 반복될 필요가 없다. 선자
들 속에서 성령이 어떤 방식으로 다른 신자들에게 전달되거나 확장되
지 않는다면, 성령은 하늘로부터 계속적으로 보내질 수밖에 없다
차 박사는 성령영접(성령을 받는 것)에 관한 존 스토트의 견해에 강
력하게 반대한다. 스토트가 스테판과 같은 특별한 사람이 성령을 받았
던 사도시대로 성령충만을 제한하는 반면에, 차 박사는 성령 도래의 보
편성을 강조한다. 그는 이러한 성령충만의 보편성을 입증하기 위하여
1907년 한국의 부홍운동을 언급한다.
차 박사 주장의 또 다른 면은 그가 “성령 세례"(고전 12:13)를 “성
령을 마심" (요 7:37-39: 20:22: 계 22: 17)과 통일시한다는 점이다. 차
박사에게 있어서 성령을 마선다는 것은 모든 신자들이 경험해야만 하
는 인격적인 체험이다. 이러한 ‘성령을 호홉함’ 은 중생하는 순간에 일
어날 수도 있으나 대기 중생이후 기도 중에 발생한다. 차 박사의 묘사
는매우구체적이다 .
.. 신자는 탄식 (gro때)한다. 성령을 충만한 사랍 역시 탄식한다 성령충
만할 때만 성령의 탄식이 나의 탄식이 될 수 있다. 입을 완전히 벌려서
전 호홉기관을 확장시키고 탄식하라. 때때로 이러한 탄식은 한, 두 시간
지속된다. 이것이 성령의 탄식이요 우리의 탄식이다 이것은 우리 자신
심창섭, 한국 개혁 신앙의 현주소 95
의 의지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요 억압된 감정으로부터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없이는 일어날 수 없는 탄식
이다.
차 박사의 경험적인 훈계는 롬 8:26 에 대한 자신의 문자적 이해에
근거하고 있다. “ ... 우리가 마땅히 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 (groan)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차 박사는 모든 신자들이 이러한 ‘성령을 마시는 것’ 을 기도 중에 반
복적으로 경험할 것을 권고한다. 이러한 묘사의 위험은 한 가지 유형의
개인적 경험이 기도중의 성령의 임재나 비임재를 특성화하도록 위임한
다는데 었다.
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차 박사는 개인적 반복적 성령 체험올 성령
세례를 체험하는 것과 동의어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는 그러한 오순
절 현상들이 오순절교회 밖에서도 목사들과 선자들이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신학생에 대한 설문조사가 오순절적 경향을 드러낼
정도로 장로교회 신자들에게 큰 영향올 주었다. 다음 리스트는 총신신
대원 학생 264명의 견해와 그들의 복사들의 견해에 대한 필자의 설문
조사의 응답을 요약한 것이다.
1. 48% (1 27명)는 오순절 성령 세례 사건이 역사적으로 유일한 사건이
아니고 반복될 수 있다고 믿는다‘
2.54%(1 44명)는 성령이 오순절 사역파 유사한 사역을 반복히실 것이
라고믿는다.
3.85%(224명)는 그들의 목회자가 성령의 은사, 특히 신유와 방언이 오
늘날도 일어날 수 있다고 설교한다고 응답했다.
4.20%(63 명)는 자신들의 목회자가 신유의 은사를 갖고 있다고 옹답했
다.
96 개혁신학의 현대적 조명
5.40%(1 03 명)는 자신들의 목회자가 방언올 한다고 대답했다.
6. 216명은 기도를 통해 성령의 역사를 체험했다고 웅답했다. 173명은
지신들의 목회자 역시 기도를 통해 성령의 역사를 체험했다고 말했
다.
7.55%는 방언을 할 수 었고, 목회자익 42%는 방언올 한다.
8.21 명 혹은 8%의 목회자는 성령의 사역이 하나님의 말씀과는 무관하
다고주장한다.
이상의 셜문 결과가 보여주는 것처럼, 신유와 방언이라는 외적인 은
사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일부분이 되었다.
한국장로교회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위대한 교회 성
장을 목도했고, 성령에 대한 체험적 지식의 강조와 같은 오순절적 요소
가 이러한 성장에 기여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한국장로교회가 칼
빈의 신학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고 입장을 견지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잔존한다. 이 시점에서 한국의 상황을 평가하기 위하여 칼빈 자신의 성
령 이해를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1V. 성령의 사역에 대한 칼빈의 견해
한국장로교회가 칼빈주의적 신학 전통율 계숭하는 것에 큰 자부심
을 갖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한국 장로교회가 교회 내의 오순절적
요소에 관뼈 성령론을 펑가하는 것은 펼수적으로 보인다. 이런 평가
는 칼빈의 성령론에 대한 신중한 연구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이 연
구를 완수하려면 일차적으로 칼빈의 기독교 강요와 이차적으로 칼빈의
주석들, 마지막으로 그의 설교에 근거한 간명한 분석이 이루어져야 한
다.
심창섭, 한국 개혁 신앙의 현주소 97
1) (기독교강없
《기독교 강요) 1 권 13: 14-15 에서 칼빈은 성령의 신성 (deity)을 논
한 후 성령의 사역을 믿음에 앞서 일어나는 것으로 순서를 배열하였다.
칼빈은 성령이 창조 때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고 강조한다. 성령의 권능
은 모든 피조물이 존재하고 그 생명을 유지할 수 있게 한다.
모든 곳에 두루 미쳐서 만물을 지탱하고 자라게 하며 땅과 하늘에서
생기를 불어넣는 분이 바로 성령이시다 성령은 어떤 한계로부터 활동
의 제한을 받지 않으시기 때문에, 그분은 피조물의 범주에서 제외된다
만물 속에 그 에너지를 불어넣고 정수와 생명과 활기를 불어넣는데 있
어서 성령은 참으로 명백한 신성을 지니고 계시다.
칼번에게 있어서 성령은 하나님의 창조계를 지탱하는 역할을 할 뿐
만 아니라 중생을 일으키시는 분이다. 성령은 그의 신비한 힘을 통해
인간의 중생에 있어서 믿음에 선행한다. 칼빈의 문체는 성령의 강력한
사역을 입증한다. 그것은 “우리 마음에 새겨진 도장처럼 느껴지는 증
거” 요, 우리를 그리스도께 연합시키는 접착제이다. 이런 강력한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이 될 수 있다. 더욱
이 칼빈은 선지자들이 예언의 말씀을 전할 때 그것이 성령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사야 6:9과 사도행전 28:25-26 에 대한
결론에 근거하여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과 입술의 성령을 동등시한다.
그러므로 칼빈은 성령을 말씀과 융합시킨다. 이것은 칼빈시대에 성령과
말씀을 분리시키는 경향을 보였던 재세례파와 강한 대립을 이룬다. 칼
빈의 입장은 성령을 물이 없는 우물처럼 간주했던 로마 가톨릭 교회에
도 이의를 제기한다. 다른 한편 칼빈은 중생에 있어서 성령의 실제적이
고 생생한 사역을 강조한다.
성령의 사역은 인간 삶의 모든 국면에 준재하나, 성령의 제일 사역
98 개혁신학의 현대척 조명
은 믿음이다. 이 믿음은 단순히 개인의 추상적 혹은 의지적 동의로 생
기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활동과 자극에 의해 생겨난다. 칼빈은 성령의
적극적인 역할을 강조하나 이것이 오순절주의에 대한 경험적 강조로
이끄는것은아니다.
2) 칼빈주석
롬 8:15-17을 주석하면서 칼빈은 《기독교 강요》와 거의 같은 용어
로 성령의 사역을 논한다. 그는 신자가 확신을 얻기 전에 성령이 오신
다고 부언한다. 성령에 의해 생겨난 특별 효력에 대하여, 성령은 우리를
하나님께 담대하고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게 한다고 말한다. 칼빈은 이
것을 “인침 (sealing)" 이라고 부르고, 인침이 없이는 우리가 우리의 죄
를 용서받지 못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중생의 과정에 있어서 성령의 절
대적인 역할을 가리킨다.
바울이 연합의 영과 양자의 영을 구별하는 것을 설명함에 있어서 칼
빈은 구별정도의 날카로움에 집중하지 않고 구별정도에 주의를 기울인
다. 칼빈은 “그러나 우리는 이것으로부터 아무도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
에 양자의 영을 받지 못했다거나 율법을 받은 이들은 모두 노예요 아
들이 아니라고 추론해서는 안 된다 고 말한다. 이런 비유를 통해서 바
울은 성령 사역의 중요성을 설명한 것이지 신약과 구약의 성령 사역의
차이를 설명한 것이 아니다. “바울은 사람과 사람을 비교하기 보다는
율법의 사역과 복음의 통치를 비교하고 있다”고 칼빈은 분명히 말한다‘
나아가서 칼빈은 성령의 사역이 구약보다 신약에서 더욱 충만하게 현
존하고 있다고 단언한다.
율법이 유대백성들에게 공포되었을 때와 그 후에, 경건한 사람들은 동
일한 믿음의 성령에 의해 조명올 받았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서도
영원한 유업의 희망에 대한 가장 열정적인 보증은 성령이셨고 그들 마
심창섭, 한국 개혁 신앙의 현주소 99
음속에 영원한 유업이 보증되었다. 유일한 차이점은 그리스도의 왕국시
대에 성령이 보다 풍성하게 부어진다는 사실이다
칼빈이 신약에서 성령의 사역이 풍성하고 X내롭게 일어난다고 기
술하는 반면에, 그는 오순절적 의미의 성령 체험을 결코 옹호하지 않는
다. 오히려 그것은 성령께서 신자들에게 기쁨과 답대함과 구원의 확선
을 나누어주신다는 문맥에 속한다.
고린도전서 2:10-13절 주석에서도 칼빈의 유사한 관점이 발견된다.
성령의 사역이 없이는 우리는 하나님의 신비하심올 알 수 없고 중생에
이를 수 없다. 믿음은 오직 성령의 도우심으로만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의 신비를 이해하는데 둔할수록, 불확실
성이 커질수록, 성령의 계시로 유지되는 우리 신앙은 확고해진다.
우리가 하나님께 선택되었다는 사실에 명백한 중거를 제공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성령뿐이시다. 성령이 주시는 확신은 마치 손으로 만질
수 있을 만큼 너무나 확실하다.
성령으로부터 이런 증거를 얻은 사랍의 확신은 마치 그들이 믿는 것을
실제 손으후 만지는 것처럽 강하고 확실하다. 그 이유는 성령께서 신실
하고 의지할만한 증인이시기 때문이다.
이런 말들로 칼빈이 생생한 체험을 문자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거처
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칼빈은 성령의 강력한 사역의 확실성에 대
한 자신의 확신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칼빈은 의식주의적 신앙과 성
령의 감각적인 체험 모두를 회피하면서 성령의 사역이 지니는 권능을
옹호하는데 성공한다.
고전 12:8-10에 대한 칼빈의 주석 또한 성령의 사역에 대한 그의
100 개혁신학의 현대적 조명
관점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칼빈은 성령을 외적으로 드러나는 행
위나 은사라는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에 대하여 강력하게 경고한다. “성
령이라는 칭호가 어떤 본질적인 것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은사와 하나
님의 권능의 행위와 관련된 것이라고 믿는 광신지들에게 대항하기 위
하여 이 구절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칼빈은 결코 은사
자체에 강조점을 두지 않고 모든 권능의 유일한 원천이신 하나님께 강
조점을 둔다. 성령은 본질적인 사역은 기독교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되어야만 하는 은사들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심으로 다양한 재능
으로 교회를 섬길 수 있도록 하는데 있다. 더욱이 은사는 보여주기 위
해서가 아니라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주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
기 위히여 가시적인 현상이나 이적에 의존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이제 오순절과 사도시대에 부어주신 성령의 은사에 대한 칼
빈의 견해에 강조점을 주어야 한다. 오순절 방언의 은사를 주석하면서
칼빈은 조심스럽게 이 외적 은사를 내적 신앙의 문맥 속에 위치시킨다.
사도들에게 주어진 여러 가지 방언들을 말할 수 있는 능력은 직접적으
로 신자들에게 적용될 수 없다. 오순절 사건동안 주어진 은사들의 보다
중요한 목적은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께서 이런 이적들도 그의 왕국의 창립올 시작하시기로 작정하
셨으므로, 이것들은 잠시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나 주께서 그의 사람들에
게 주신 가시적 은혜가 그리스도가 성령을 주선 분이라는 것을 나타냈
기 때문에 ‘너회가 성령의 은사를 받으리라’ 고 한 베드로의 말씀은 어
느 정도 전 교회에 적용된다. 우리가 방언하고 예언하고 병을 고치고
이적을 행할 목적으로 성령을 받지는 않았지만, 성령은 더 좋은 목적,
즉 마음으로 의를 믿고 우리 혀가 참된 고백을 하도록 훈련되도록 하
기 위하여 우리에게 주어졌다
칼빈은 신약시대 은사의 가시성보다는 은사의 목적을 강조한다. 그
러므로 성령의 은혜는 믿음이나 세례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성령의 은
섬창섭, 한국 개혁 신앙의 현주소 101
혜는 항상 세례와 결합될 것이다 다른 데에서도 칼빈은 이런 신앙을
반복해서 말한다.
하나님이 그의 교회에 설립시에 가시적 은혜를 부어주셨으므로1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령의 비밀한 능력으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며 신앙체
험을 통해서 내적으로 깨닫게 되는 외적 표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공
개적으로 나타나실 것을 확실하게 안다.
이것이 성령의 사역이 제공하는 믿음으로 인도하는 확신이다. 처음
에 이것은 가시적이었으나, 동시에 비가시적이거나 비밀한 것이었는지
도 모른다. 그러므로 칼빈의 강조점은 ‘믿음으로 인도하는 성령의 비밀
한사역’이다.
이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외적 혹은 가시적 표지나 은사는 과도
하게 강조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성령의 사역과 은혜는 믿음이
라는 더 큰 은사라는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또한 사도들에 의해
주어진 외적 은사의 현시(휠흉~)는 일반적으로 복음서시대에 한정된다.
3) 칼빈의 설교
오순절에 대한 칼빈의 설교는 《기독교 강요Y와 주석들에 나타난 그
의 성령론을 확증한다. 칼빈의 “오순절에 대한 첫번째 셜교”는 성령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장으로 기능하기 때문에 성령을 ‘복음의 인
장’ 이라고 부른다. 성령의 강하가 휘몰아치는 바람이나 회오리바람으로
묘사되는데, 성령 강하는 하나님의 진리 앞에 선 모든 이를 움직이고
일깨우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성령은 사도들의 입에서 방언 형태로 나
타남으로써 복음 전파를 용이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 전
파라는 그들의 사명을 도울 뿐 아니라, 성령의 인도 없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할 수도 없는 인간의 상태될 나타낸다.
\02 개혁신학의 현대척 조명
칼빈의 설교는 오늘의 신자들과 관련된 성령의 역할올 강조한다. 우
리는 “하나님께서 왜 사도들에게 성령이 임하시도록 하셨는지를 체험
하도록, 그리고 그것은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 우리를
모으시려함이라는 것을 철저한 순종으로 중가할 수 있는 은혜를 우리
에게 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칼빈은 사도들에게 임한 성령
의 은사와 그 이후 선자들에게 임한 성령의 은사를 미묘하게 구분한다.
사도들에게 임한 성령 강림을 이해한 후에, 우리들 삶 속의 성령의 사
역으로 돌아와야 한다. 성령은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도록 통
치하고 인도하시며 믿음의 절개와 확신을 부여하는 과업에 필요한 모
든 것을 실행하신다. 칼빈은 “성령의 능력”을 묘사하기 위히여 “불변
“지속하다“견지하다” 둥의 용어를 반복해서 사용한다. 보다 중대한
의미에서 성령의 은사는 어떤 외적 성취에 있지 않고 내적 인식에 있
다. “우리를 부양하는 성령의 권능은 무한하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비밀하고 보이지 않는 은혜에 의해서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성취된다
“오순절에 대한 세번째 셜교” 에서 칼빈은 성령의 은사를 받는 것이
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 속에 모시는 것을 동등시한다. “왜냐하
면 우리가 이 은사를 빼앗길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빼앗기기 때
문이다 “오순절에 대한 네번째 설교” 에서 성령을 받는 것은 “성령
안에서 더욱더 인내하는 것 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성령의 참된 은사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며 우리를 불
신앙에서 구원한다. 칼빈은 누구도 동일한 방식으로 성령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지만 “그것이 우리의 작은 은사로부터 얻는 유익을 방해하지
는 않는다” 라고 주석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방언의 은사를 갖고 있다
면, 그는 다른 사람이 소유한 은사와는 다른 방식 으로 은사를 소유할
것이다. 바울이 말한 대로 어떻게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은사가 분배된
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동일한 성령이 행하신다라고 칼빈은 지적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성령의 궁극적인 은사는 신자의 믿음을 유지하는 그
섬창섭, 한국 개혁 신앙의 현주소 103
의 권능에 있다는 것이다.
칼빈의 성령론에 대한 이러한 피상적인 비명에서 우리는 몇 가지 불
변적 개념들을 분별해 낼 수 있다. 칼빈에게 있어서 오순절 성령의 강
림은 하나님의 진리를 가시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다. 오순절과
복음서 시대에 사도들이 받은 방언의 은사는 복음 전파를 돕기 위한
것이었다. 신자들에게 있어서 성령의 최상의 은사는 성령께서 주시는
확신과 담대함과 인내이다.
V. 결론
성령에 대한 칼빈의 신학적 관점에서 한국장로교회 내에 있는 치유
와 방언의 형태로 외적으로 드러나는 은사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최근
의 경향이 신중하게 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앞서 논의한 바대로, 한국교회의 역사는 종종 선앙의 외적 감정적
표지들에 대한 의존으로 특징지어졌다. 이것은 오늘 많은 장로교회에도
일반적으로 적용된다. 성령의 은사의 외적 현시에 대한 의존을 정죄하
거나 비난해서는 안 되지만, 믿음이라는 보다 큰 문맥 속에서 성령의
사역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
다-
한국장로교회에 대한 오순절교회의 영향은 간과할 수 없다. 그것은
한국장로교회와 신자들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일부분이 되었으므로 이
제 그 실제를 인정하고 평가해야 합 때이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성령의 외적인 은사
에 대한 의존파 강조는 칼빈주의적 개혁주의 전통의 일부가 아니다. 성
령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기쁨을 경험하고 믿음을 견지하도록 도우
선다 칼빈에게 있어서 성령은 은밀하고 눈에 보이지 않게 신자들의 모
든 삶의 영역에서 역사하선다. 선자탈은 구원을 확신하기 위히여 성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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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역사를 육체적으로 즉각적으로 경험해야 할 필요는 없다. 방언과 신
유의 은사는 오늘날도 아마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반복적인 외적 성령
체험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의도동}신 성령의 본질적인
신성과 은혜라는 시각을 상실케 한다는 문제를 야기한다. 성령은 성경
에 계시된 것처럼 매우 조심스럽게 이해되어야 한다.
한국장로교회가 현재의 경향을 지속한다면, 교회는 먼저 오순절적
요소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것이 교리적 입장과 일치되는지를 결정해야
만한다.
한국장로교회는 오순절적 장로교회가 될 것인가 아니면 전통적인
개혁교회로 되돌아가기 위하여 투쟁할 것인가? 이것이 한국장로교회의
미래를 결정하기 위빼 지금 질문히고 답해져야 할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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