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일반 한국장로교회사 강의안-고려신학대학원 허순길교수

첨부 1


한국 장로교회사

허 순 길 교수

1998년 3월 11일

 

주 교 재: 한국장로교회사 (고신), 예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역사편찬위원회, 1988

고려신학대학원50년사, 고려신학대학원 출판부, 1996

 

과제: 역사적 신학적 입장에서 본 고려파 장로교회의 정통성 , 5월말까지 5페이지 정도로

 

 

- 우리가 교회사를 생가할 때, 교회-교회사를 문화적인 현상으로만 보고 지나가는 일이 있다. 이것은 인본주의적 견해이다. 성경에서 교회사를 말한다면 사도행전을 들 수 있는데, 1장에서 보는 대로 너희 성령을 받으면 권능을 얻고........ 이 말씀을 좇아서 교회가 성령을 받은 복음의 종들에 의해서 확장, 성장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도행전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어떻게 교회를 건설해갔는가를 볼 수 있다. 교회의 역사는 그 사건들과 연결된 것이다. 선교적 교회의 확장, 성장을 중심으로 교회사 본다. 이것은 일반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다루는 사람과 사건과 교리를 다루기는 하지만 선교적 측면이 강조되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를 통치하시고 교회를 세워 가시는 예수님의 통치가 있었고, 교회가 확장될 때는 저항하는 세력이 있었고, 그 세력은 내 외부에 다 있었다(이단). 이것은 진리에 관한 문제였다. 그러나 이렇게 보지 않고 단지 문화적 측면에서만 교회사를 보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특히 토착화 과정으로 보는 경우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민경배씨이다. 이 사람은 민족적 자립으로 교회사를 보았기 때문에 문제점이 많다. 구미 선교사들의 선교사들의 노력을 식민지 확보로 보고 비판적으로 본다. 선교의 역사를 흐리게 만든다. 한 민족에 들어온 외부의 선교사를 대립적인 입장에서 본다. 역사적으로 볼 때 식민지 확보를 위한 군대를 따라서 선교사들이 들어온 것도 사실이고 선교를 정치적 입장에서 이용한 경우도 있는 것이 사실이나, 우리의 입장에서는 선교의 입장에서 교회의 입장에서 보아야 한다. 또 그는 교회사를 문화적 입장에 너무 결부시킨다. 초기에 복음주의적, 경건주의적 입장에 선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복음을 전하고 그 결실이 맺어진 것을 오늘날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런 면을 어느정도 시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종교적 성향이 강한 한국민족이 기독교를 쉽게 빠르게 받아들였다고 주장함으로, 문화적 입장을 너무 강조함으로 성령의 역사 복음의 힘을 감소시키면서 글을 쓰고 있다. 교회의 본질은 구약의 교회(이스라엘)이난 신약교회나 같은 것으로 본다. 교회는 보편성, 세계성을 가지는데, 이 사람은 이전의 교회들은 보편교회를 위한 준비과정으로 보고, 언약적 요소를 빠뜨리고 교회를 인본주의적으로 보는 것이다. 교회의 주시오 왕이신 주님의 하신일을 빠뜨리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토착화 신앙에 기초한 민족 교회사는 재료제공면에서는 이정을 할 수 있으나 사관이 잘못된 것이다.

민중사관에 입각한 교회사관이 나타난다. 한국적인 해방신학이다. 외국 사람들도 한국의 행방신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WCC에서 민중신학이라는 책도 낼 만큼 한국의 민중신학에 관심을 가진다. 민족교회사관을 말하는 것에서 더 나아간 자유주의 신학에 입각한 교회사관이다. 복음이라는 것은 소외되고 억눌린 민중의 행방과 구원을 위한 것이 복음이라고 본다. 그래서 지난날 우리 나라의 교회의 역사도 이런 관점에서 본다. 대표자는 주재용씨이다. 이런 사람은 결국 우리의 초대교회의 역사를 민중에 의해서 수용된 복음의 시기로 보고 1919년까지를 반봉건 반식민의 민중의 투쟁의 시기로 본다. 그리고 그런 맥락에서 교회사를 본다. 이런 것은 다 예수중심의 교회가아니라 인간중심의 교회사이다.

우리 입장에서 교회사에서 교회관이 중요하다. 교회관은 신앙고백의 한 항목이다. 12항목 가운데 하나가 교회관이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것과 똑같이 한 거룩한 공(보편)교회를 믿는다 라고 고백을 한다. 우리가 믿으면 교회에 속한 자이다. 교회의 하나님의 몸이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다. 우리는 교회관을 바로 가져야 교회역사를 바로 볼 수 있다. 우리는 교회에 대해서 어떤 신앙고백을 하는가? 웨스터민스트 신아고백의 25장에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요 그의 몸이며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라고 나와있다. 교회는 유기체적 관계를 가지고 있다. 주님은 하늘에 계시지만 그는 영구한 교회와의 연관을 가지신다. 한순간도 교회와 절연된 적이 없다. 주님과 영속적인 관계를 가져온 것이 교회이다. 지상에서 나타난 교회의 지도자 목사들은 그의 수종자에 불과하고 그분이 교회를 이끌어오신 것이다. 교회는 그의 왕국이다. 그는 왕이시고 우리는 그의 백성이고 우리는 그분의 통치를 받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교회와 우리와 그리스도는 떨어질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여기에 민족적인 것, 민중의 투쟁적인 면으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대교리 문답에 보면 유형적 교회는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와 통치아래 있으며 모든 원수들로부터 그분의 보호를 받고 보존 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신앙고백이 우리의 교회사관에 정착이 되어야 한다.

하이델 베르크 교리문답 54번에 보면 공교회에 대해서 말씀과 성령에 의해서 처음부터 끝날까지(에덴부터 마지막날 까지) 주님의 모으시고 방비하시고 보존하심을 믿는다고 고백한다. 지금도 순간도 단절하시지 않으시고 지상교회를 통치하신다.

이러한 교회관 아래서 교회의 역사를 보아야 한다. 우리는 지나간 사건과 인물들을 중심볼 것이 아니라 그 들 가운데 주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고 이끌어 오셨는가를 보아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오늘날과 같은 세대에서도 우리는 외롭지 않다. 이전의 교회와 함께 보편적 교회속에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모든 세대와의 교제속에 안정감과 격려를 받으면서 미래의 교회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주님의 인도를 더 실감하면서 교회에 참여할 수 있다.

 

3월 18일

장로교 한국전래사

쇄국정책 때문에 외국과의 통상에 어려움이 있었다. 이 때 외지에 있던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한국에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한국 땅 밖에서 선교기지가 이루어지고 선교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만주에서 개화를 갈망하던 사람들이 한국을 떠나온 사람들이 있었다. 만주에서 일을 하던 외국 선교사들이 한국인들과 접촉을 하게되고 한국 밖에서 예수를 믿는 한국인이 생기게 되었다. 일본 유학중에도 예수님을 믿게되는 경우가 있었다. 만주에서 백홍준, 서경조등 젊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고 교회를 세우게 된다. 선교사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생적으로 교회가 생긴것이다. 그리고 만주에서 한국말로 성경이 로스 목사의 지도아래에서 서상룡등이 협력을 해서 복음서, 신약등이 완역되고, 일본에서는 이수정등에 의해서 성경이 번역된다. 언더우드가 1884년에 한국에 올 때, 일본에서 1885년 정월에 일본에서 복음서등이 출판되었는데, 이미 선교사가 들어올 때 번역된 복음서등을 가지고 한국에 들어올 수 있었다. 하나님의 섭리였다. 외세를 배격하던 때, 외국에서 한국선교를 위한 준비를 하셨던 것이다.

한국에 복음 증거를 위해서 노력한 선교회등은 서구로 부터 온 선교회, 미주의 선교회등으로 갈라생각할 수 있다. 중국이나, 만주에 와서 활동하면서 선교를 시도한 사람은 서구의 선교사들이 많이 있었다. 매킨 타이어, 로스등이 만주에서 우리나라에 선교를 시도하였다. 또 토마스도 있었다. 그는 웨일즈 사람으로 회중교목사의 아들이었다.

이들이 한국에 외부적으로 영향을 미쳤으나 한국에 정착해서 선교하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미주에서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정착하고 선교를 시작한다. 한국교회는 미주의 영향을 받았다.

민경배씨의 책을 보면 서구의 선교와 미주의 선교를 비교하면서 한국에는 미국 교회의 선교지화 되었기 미국적인 교회관이 자리를 잡게되었다고 주장한다. 맞는 말이지만, 에큐메니칼의 일치에 집념을 보이는 그는 서구의 교회관은 교회의 일치성을 강조하지만, 미국적인 교회관은 교파적이고 분열을 수용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미국의 선교사들에 의해서 세워진 한국교회는 교파주의적이고 분열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본 교제에서도 이것을 많이 반영하고 있다.

서구의 교회관은 미국의 것과 차이가 있다. 서구는 역사적으로 원래 국가교회이다. 교회의 역사적인 일치가 강하다. 그래서 분열을 원치않는 국민정신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순수한 말씀을 파수하는 교회, 사도적인 신앙을 견지하기 위해서 자유교회가 생기고 국교회를 떠날 때 객혁이 일어나고 분열이 자연히 일어났다.

그러나 영국세계에서도 다른 교파가 있다. 스코틀랜드는 원래 장로교로서 영국교회와는 다른 교회였다. 민족적인 장로교회였다. 거기에는 이 전통을 지키기 위해서 또 여러교회로 나뉘어져 있다. 그렇기 미국식은 아니라할찌라도, 차이는 있을찌라도 교파가 있는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미주의 교회도 결국은 서구에서 각각의 교파가 건너가서 각각의 자기의 교파의 교회를 세운 것이다. 미국이 더 많은 교파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차이를 보고 미국교회의 선교를 받았기 때문에 한국교회의 분열이 심하다는 비판은 여과없이 수용할 수는 없는 것이다.

 

1) 개신교의 한국전래의 배경-

예수님이 오신지 거의 2000년이 지나도록 이방의 어두운 지역이었다. 19세기말에 이 땅에 복음이 전해졌다. 지역, 정치적 문화적 이유에서 복음의 지체의 이유를 찾을 수 있지만, 불가해한 하나님의 섭리에 그 이해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늦게나마 복음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한님의 은혜였다.

천주교가 먼저 들어왔다. 실학사상을 가진 사람들에의 해서 처음으로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수용된다. 종교를 위해서가 아니라 서양의 학문을 사모하는 것 때문에 받아들인다. 천주교의 윤리사상을 받아들이고 호의적인 자세를 가진다. 그러나 그 종교를 수용하거나 믿지 않았다. 실학자 중에 처음으로 카톨릭 신자가된 사람은 이승훈이다. 1784년에 북경에서 영세를 받았다. 개신교 한국에 들어오기 100년전 이다. 이외에 당시 카톨릭 신자가 된 사람은 정약용, 정약전등이다. 이들의 서교의 수입은 양반사회 유교사회의 큰 도전이었다. 이 왕조는 로마 카톨릭의 전파를 막았고, 쇄국 정책과 함께 박해를 가했다. 척화비를 세웠다. 그러나 18세기이후에 서세동점의 서양의 시도를 저지할 수 없었다. 병인양요(프랑스의 군함, 강화도), 신미양요(토마스 선교사의 순교, tu만호가 대동강을 따라서 올라와서 한국과 통상을 하기를 원했지만 한국은 배를 불살랐다.)등이 일어난다. 이러는 가운데 대원군이 물러나고 문이 열린다.

일본과의 수교, 1882년 한미 수호통상등을 차츰 개신교의 한국전래가 가능해진다. 그러나 이때 종교전파에 대한 문건은 없었다. 한국 문화와 예술 교류등만 언급되었다. 그러나 그후 선교사의 입국이 가능해진다.

 

2)개신교 선교운동의 개척자들

개신교의 한국선교는 서구와 미주양측으로 부터 진행된다. 미주로부터 교회가 자리를 잡게된다. 그런데 서구쪽의 두사람이 먼저 한국땅을 밟게 된다. 벨트브레와 하멜이다. 화란사람들이다.

벨트브레는 1627년 동해안에 표류한다. 경주에서 검거되어 한국에 영주하게 된다. 탁월한 인품의 소유자, 종교인으로 인정을 받았다. 개신교인으로 추증된다. 우리나라 이름으로 박연이었다. 한국여인과 결혼하여, 1남2녀를 두었다고 한다. 한국의 군에 상당한 공헌을 끼쳤다. 이 사건후 1653년 대만을 거쳐 일본을 가던 화란 상선이 파선되어 60여명이 제주도에 표류, 억류되었다. 14년간의 한국생활 가운데 고생을 많이했다. 농사와 흉년등.... 15명이 탈출을 해서 일본경유 돌아가게 된다. 그 가운데 하멜이 있었다. 1668년에 한국에서의 경험담을 하멜표류기라는 제목으로 출판하게된다. 한국을 구라파에 소개하게 되는 책이 된다.

칼 귀츨라프라는 한국을 방문한 최초의 선교사이다. 1827년 인도네시아의 자바, 슈마트라에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그후 태국을 거쳐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다 황해도, 백령도등 서해안으로 항해를 한다. 모리슨으로 부터 얻은 한문 성경을 이 때 한국주민에게 배포를 하고 의약품을 나누어주고, 병을 고쳐준다. 이명희와 김영순을 통해서 국왕에게 성경과 교리서를 증정한다. 양씨의 도움으로 주기도문을 우리말로 번역을 한다. 성경의 한 부분이 번역된 것이다. 40일간의 체류기간이지만 큰 공적을 남겼다.

귀츨라프가 한국서해안을 답사한 후 34년후 1866년 스코틀란드 토마스 목사가 대동강으로 입항을 했다가 순교한다. 영국 웨일즈의 회중교회의 아들로서 런던 선교회의 파송으로 중국으로 파송받는다. 1865년 산동에서 선교를 하던 중, 로마 카톨릭 교도들인 한국사람을 만나 한국에서 로마 카톨릭의 박해소식을 듣고 한국 선교에 대한 뜻을 가지고 1865년 9월에 황해도 의 작은 섬에 도착을 해서 해안마을을 돌면서 전도를 하다가 돌아간다. 그는 북경에서 동지사로 방문한 평양감사 박규수를 만나서 그에서 선교의 뜻을 알리고 평양에 갈 때 도와달라는 부탁을 한다. 1868년 청진에서 셔만호를 타고 한국으로 향한다. 이 때 배는 불타고 토마스 목사는 순교를 한다. 이 때 성경을 전하게 된다. 1899년 가을 평양에서 세례를 받은 박춘건은 병인양요당시에 군인인 것으로 밝혀졌다. 어떤 이들은 이 사람이 토마스의 목을 자른 사람으로 말하기도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만주 땅에 고려문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었다. 당시의 국제적인 교역지였다. 이곳은 선교사들이 한국을 위한 선교의장소이기도 했다. 병인양요등 이후 쇄국 정책이 강화되고 나서, 어려움을 피해서 나온 사람들이 그곳을 방문하기도 했다. 이 때에 스코틀란드 장로교의 연합자유교회의 목사들인 로스와 그 매부인 매켄타이가 만주등지에서 선교를 해오든 중, 토마스 선교사가 순교한 한국선교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874년 로스 목사는 고려문을 방문하여 한국인과의 접촉을 시도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백홍준, 김진기 등 4사람을 자기의 숙소로 인도하는데 성공한다. 개화를 원하던 이들에게서 한국말을 배우고, 이들에게 서양의 학문을 배워주었다. 3년간의 생활을 동안 예수를 믿고 매킨타이에게 세례를 받게 된다. 최초의 개혁교회의 신자들이 만주에서 탄생하게 된다. 국외에서 한국 장로교회의 기지가 생긴 것이다. 교회가 생긴 것이다. 알렌이 들어오기 8년전이었다. 그래서 이들을 통해서 성경이 번역된다. 로스는 한국말로 성경번역을 시작한다. 이 네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성경번역이 시작된다. 그뒤 의주 청년 서상윤이 세례를 받고 이 사람이 성경번역에 큰 공헌을 한다. 1887년 신약성경 전부가 인쇄가 되어서, “예수 성경전서”라고 불리는 최초의 한국어 성경 3000부가 출판되었다. 만주와 한국에 전해진다.

일본에서도 같은 번역노력이 있게 된다. 1881년 이수정이 일본으로 건너가 쓰다센이라는 일본 사람에게 ... 을 배우다가 1883년 세례를 받게된다. 일본 주재 미 성서공회의 총무의 부탁으로 성경번역에 착수 1884년 마가복음 출판, 그후 1885년에 언더우드가 올 때, 정월에 아펜젤러와 함께 일본에 머물렀는데, 이 때 한국말로 된 성경을 들고 한국에 입국을 하게된다.

하나님께서는 미리 한국의 외각에서 선교의 준비를 하셨다. 이수정은 성경 번역 뿐만 아니라 선교사들에게 미국교회의 한국 선교사 파송을 호소하였다.

한국의 최초의 교회도 한국인에 의해서 세워졌다. 이미 만주에서 백홍준등 성경번역에 협력한 젊은이들이 한국으로 성경을 가지고 가서 전도를 했다. 백홍준은 고향 의주에서 전도하여 6개월후 몇사람의 전도된 사람과함께 자기의 집에서 예배를 드림으로 최초의 교회가 생긴다. 그는 그 교회의 전도사로 있다가 순교를 하게된다.

한국의 최초의 교회당은 서상륜에 의해서 세워진다. 그는 그이 동생 서경조를 믿게하고 10여명의 사람을 전도한다. 그는 그의 고향에서 살기가 어려웠다. 위협을 느끼고 그의 동생과 함께 삼촌이 사는 황해도 솔내로 옮기게 된다. 그는 여기서 열심히 전도를 해서 1885년 초가 8칸의 교회당을 건축하게 된다.- 솔내교회당 - 그후 서울에서도 전도

 

서구의 선교사들은 한국의 외지에서 선교를 했지만 정착을 하지는 못했다. 최초의 백홍준, 서상륜등은 서구의 장로교의 전도를 받고 한국에

이 터전위에 미주의 선교사들이 정착을 하기 시작한다.

3)개신교 선교사들의 입국

 

 

 

2009년 6월 30일

1885년 - 한국인 전도자에 의해 교회가 생겼다. 서상준 - 솔내교회

성경이 먼저 번역되고 선교사가 들어왔다. - 이것은 복음이 구원에 이르는 능력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 이것은 칼빈주의정신(솔라 스크립투라)의 영향을 먼저 받은 것으로 다행한 일이다. 그후 이수정의 일본에서의 성경번역...

- 알렌 입국, 여전히 증교 금지가 법으로 정해져 있었다. 1886년 분위기 완화 - 광혜원 설립, 그후 공사에서의 집회가 가능해 졌다.

 

- 언더우드는 국내 최초로 노도사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노도사는 쪽복음을 읽고 세례를 결심하게 된다. 그것은 목숨을 건 결단이었다.

1886년말 솔내교회 서상륜이 언더우드를 찾아온다. 그를 찾아온 솔내교회의 교인들에게(3명) 1887년 봄 세례를 주게된다. 이들 또한 사형의 위험을 무릎쓰고 받은 것이었다. 그해 가을 언더우드는 솔내교회를 방문 7명에게 세례를 준다. 이들은 모두 서상륜에 의해서 전도를 받은 사람들이었다.

- 서울에서 선교활동: 서대문, 남대문 밖, 정동 등에서 노방전도를 하게된다. 본격적인 선교활동이 시작된 것이다.

1887년 세문안 교회 조직, 언더우드 집에서 다른 집으로 옮기면서 조직되었다. 이 때 만주에서 활동하던 로스목사가 교회 창립예배에 참여했다.

 

- 선교사들의 처음 선교방법은 순회전도였다. 한곳에서 정착해서 그 지역만 복음화 하기 위해서 노력한 것이 아니라 가능한한 넓은 지역에 복음을 전하고 많은 사람들과의 접촉을 원했다. 순회전도는 여러지역을답사, 개인전도- 선교거점확보, 어느지역에 신자를 얻게되면 Mission Station을 만들고 기도회 부흥회등을 한다. 처음에는 증교금지로 인하여 권서, 개인?도등만 가능했지만, 이제 순회전도가 가능했다. 또 믿는 자들이 없었을 때는 순회전도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안내인과 같이 다니면서 약품, 책자 보급등을 했다.

1887년 봄 개성을 지나 솔내교회를 방문 7명에 세례를 주었다.

언더우드 1889년 여의사 홀톤과 결혼 - 신혼여행을 전도여행으로 대치했다. 서울에서 송도, 솔내, 평양, 강계등 약 1000마일을 강행했다. 600명 치료. 의주에 도착했을 때, 100명이 세례를 받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국내에서 공개적인 성례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압록강을 건너가서 약 30여명에게 세례를 행했다.

- 순회전도는 특정지역 편중을 막았고, 순회를 통해선 널리 복음이 전해지고 교회가 설립이 되었다. 그런데 목회자가 부족했기 때문에 넓은 지역의 신자들을 돌보기 위해서 선교사들의 순행이 또 필요했다.

 

- 선교지 분활

1885년 이후 국적과 교파가 다른 미국, 카나다, 호주등의 선교사들의 선교지 분활의 필요를 느꼈다. 경쟁을 막고 효과적 전도를 위해서였다. 이를 위해서는 교파들간의 협의가 필요했다. 특히 장로교라는 같은 교파의 이름을 가진 다른 국적을 가진 선교사들에게는 이 분활이 필요했다. 장로교 선교사들이 모여 시작한다. 1889년 미북장로교회 선교회와 호주 장로교회(빅토리아) 선교회 간의 의논이 되어지고, 언더우드 측과 데이비스 목사간의 협의가 진행되던 중 데이비드가 죽자 중단되었다.

그후 남장로교회가 들어오고 “선교공의회”를 만들었다. 1893년 양선교회가(남북) 협력하여 하나의 장로교 교회를 세울 것을 협의했다. 이 공의회는 첫회의에서 선교지를 분할할 것을 협의했다. 남장로교회 - 전라지방과 충청지방을, 북장로교회는- 이미 활동하던 서울지역, 서북지역을 담당했다. 그리고 카나다와 호주도 가담한다. 이 때 북장로교회와 호주는 부산 경상도지방에서 활동을하고 있었다. 공의회는 낙동강 남쪽지역을 호주선교회가 담당하고, 강북지역은 북장로교회가 담당하기로 결정 했다. 이 통합된 “장로회 협의회”는 한국 교회가 조직을 갖추기 까지 모든 조직을 맡았다.

감리교도 어느정도 장로교 선교회와 협의해서, 인구 5000명이상이되는 곳에서는 각기 station을 만들어 활동을 할 수있지만, 그 이하에는 먼저시작한 측에서 계속하기로 했다.

그러나 일본측의 감리교에서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한국에서는 그 협의가 지켜졌다.

 

----------- 그런데

각지방의 장로교의 특성이 한국에 와서 한국의 교회의 특성과 혼합되었다. 특히 직분관에서 그렇다. 우리나라는 미국의 남북장로교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미국의 남북 장로교회가 나누어진 것은 시민 전쟁이후이다. 이 전쟁후, 남,북은 각각 자기의 전통을 지켜나갔다. 북쪽에서는 프린스톤 신학교, 남쪽에서는 조지아(?) 신학교를 중심으로.......... 북쪽에서는 찰스하지, 남쪽에서는 쏘낸이라는 신학자들이 영향을 미쳤다. 이 두사람이 수십년동안 논쟁을 벌였다. 19세기 미국장로교회의 잡지를 통해서 이 두분의 논쟁이 기재되었다. 목사와 장로에 대해서였다. 하지는 목사는 성경에 있는 감독이라고 불여진 직분을 말한다고 하고 감독과 장를 구분했다. 그래서 장로가 교회를 대표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쏘낸은 거기에 대해서 감독과 장로는 같은 직분에 대한 다른 이름으로 보았다. 행20장에 보면 바울이 밀레도에서 장로를 청해서 그들을 감독이라고 불렀다. 후자의 주장이 옳은 것 같다. 논쟁을 하던 중 북쪽의 사상이 이 자리를 잡았다. 우리교회는 북쪽영향을 많이 받아서 목사와 장로의 갭이 생겼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장로의 두 부류 즉 가르치고 설교하는 부류와 치리는 부류이다(딤전5:17). 이것은 남장로교의 주장에 일치하는 것이다.

찰스 하지는 개개의 목사가 그 교회를 관할하고 교회를 대표하는 것으로 주장한다. 우리의 헌법에 보면 장로가 교회를 대표하는 것으로 나온다. 이것은 원리적으로 문제가 생긴다. 따라서 목사는 고용인 혹은 파송한 감독의 입장이 되어서, 장로와의 알력이 발생하기도 한다. 장로를 교회의 대표라고 하는 것이 북장로교회의 영향이다.

우리 장로교회의 약점은 직분에 대해서 성경적인 원리를 탐구해서 적용하지 않고 편의적으로 생각한다. 문제이다. 교회의 직분은 교회의 주가 되시는 그분이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기 때문에 성경에서 그 원리를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 앞으로 문제가 더 발생할 것이다. 특히 여자 목사에 대한 것도 문제가 된다. 성경이 남자와 여자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는가를 보아야지, 사상의 조류에서 그것을 찾아서는 안 된다. 직분이 교회의 조직을 위해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원리를 찾아야 한다.

 

2009년 6월 30일

 

한국선교는 세계선교사상의 유래가 없는 큰 성장이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특별한 방법에 의한 것이었다. 초기의 선교사들은 선교의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예를 들어서 언더우드는 26살의 젊은 나이에 들어왔다. 그런 이유등으로 효과적인 선교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 때 중국에서 선교하던 40대의 네비우스(Nevius)를 1890년에 한국에 초청 두주간 동안 논의 하고 토론을 했다. 그로 부터 선교방법에 대한 말을 듣고 선교방법의 원칙을 정하게 되었다. -9가지

1) 선교사 개개인의 광범위한 순회전도를 통한 개인전도 - 그리고 사람을 얻게되면 station 을 정하고 모임을 가진다.

- 중국의 삼자교회

2) 자립전도: 신자한 사람 한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가 된다. 모든 신자 들은 자기보다 나은 사람으로 부터 배우는 자가 된다.

3) 자치: 모든 신자들은 선교회로 부터 공급을 받지 않고 스스로 지도자를 세워서 자립적인 정치를 한다.

4) 자족: 예배당 마련등을 스스로 한다. 교회가 조직되자 마자 전도인의 봉급을 스스로 지급 한다.

5) 교회지도자와 순회지도자 조사 아래서 조직적으로 성경공부를 한다.

6)성경의 가르침을 따른 엄격한 생활과 권징을 시행한다.

7)교회의 일치성 - 각 지역간에 협력을 한다.

8)지역조직과 프로그램을 서로 분활한 후에는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

9)경제생활면에서 상호협조

 

장로교 선교공의회는 1893년에 네비우스 선교방법 구체적 적용방법을 생각하고 원칙을 정한다.

1) 한국에서는 상류층보다 근로층을 선교의 주 대상으로 삼는 것이 좋은 것으로 결정.

2) 부녀자들에게 전도하고 믿는 소녀들을 교육하는데 힘을 쏟았다. 억눌리는 계층이었고, 그들을 통해서 자녀들을 교육하기가 쉬웠다.

3) 시골에 초등학교 경영을 통해서 전도의 효과를 볼 수 있었다. 그 교육을 통해서 목회자를 배출했다.

4) 장차 한국인들이 이 초등교육을 통해서 지도자로 배출될 것이다.

5)사람을 회개케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좋은 성경번역을 시작했다.

6)모든 기독교 서적이나 출판물은 외국어로 쓰지않고 한글로 쓰도록한다. 무엇보다 성경이 한글로 번역이 되어있었기 때문에 민중속으로 파고들 수 있었다.

7) 진취적인 교회가 되려면 자립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가능하면 선교사들의 공급을 줄여야 한다.

8)한국의 대중들은 동족의 전도에 의해서 믿게 되어야 한다. 전도자의 양성에 힘을 기울여 야 한다. 현지인 지도자 양성.

최초의 신학교인 평양신학교는 1907년에 동노회의 조직과 함께 설립되었다. 이것을

9)자비의 선교 - 기독교 사회사업. 의료선교: 환자와의 깊은 사귐을 통해서 전도를 할 수 있 다. 어려운 문제를 같이 고민하는 가운데 깊은 인간적인 관계를 맺는다. 지방의 환자까지 계속적인 치료를 통해서 전도를 했다.

 

이런 방법이 중국에서는 크게 효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한국에서는 대단한 도움이 되었다. 특히 자전, 자치, 자영의 원리는 한국교회의 정착과 발전에 큰 도움이 되었지만, 그보다 개인적인 성경연구와 깨달은 바를 또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는 것을 권장한 것이 가장 중요했다. 우리는 나라는 처음부터 성경 번역, 성경연구, 가르침 등이 있었기에 교회의 발전을 가져왔다. 부흥회는 처음에 사경회라고 불렸다. 1950년대까지 이 용어를 사용했다. 성경을 살피는 회, 성경을 배우는 모임이라는 뜻이다. 그 때는 일주일 동안 진행되었다. 말씀 중심이었다. 이런 것들이 교회를 성경적으로 정착 발전시키는데 주효 했다.

여자들을 상대로 해서 여성교육에 전념한 것과 소녀들에게 관심을 기울인 것이 근대화를 가져온 것은 물론이고, 여자들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사명을 자각하고 세상을 바라보는데 도움을 주었다.

 

- 부산 경남지방의 선교

부장로교의 부산지역의 선교

1891년에 시작을 했다. 처음에 부산에 배위량목사가 선교사로 왔다. 후에 평양신학교 교수로 있었다. 물론 1889년에 개인 선교사가 왔지만 이년뒤 떠났다. 특히 부산에는 두곳의 선교ststion이 있었다. 좌천동에 호주 선교회, 염주동에는 미 북장로교의 선교 station이 있었다. 미 북장로교를 통해서 전도가 이루어지고 1894년에 초량교회가 최초로 설립되었다. 배위량(Baird) 선교사는 부산의 선교기지를 마련한 후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경상도 북부지방에 관심을 가지고 낙동강을 따라서 대구까지 갔다. 그는 1895년까지 부산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서울로 이동을 한다.

그후 1895년에 Adams가 왔다. 이년을 봉사한다. 그가 올 때 3개월이었던 그의 아이는 안두완 선교사이다. 대구에서 활동을 했다. 북장로교 선교부가 부산에 기지를 마련하고 일을 했지만, 이미 호주 선교사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에 선교 효과상 이들이 협의해서 북장로교 선교회가 모든 것을 호주장로교에 양도를 하고 부산으로부터 완전히 철수를 한다.

강북은 북장로교가 강남은 호주 장로교가 맡았다.

1891년 데이비스 목사가 부산에 와서 세상을 떠났다. 도착한 후 6개월 뒤의 일이었다. 이것으로 호주 장로교회는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부산 선교에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호주 빅토리아 지역의 장로교회들이 주축이 되었다. 그리고 데이비스 목사가 죽은 그해 10월에 Mackay목사 가족과 세여자를 파송했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 무서운 추위가 찾아왔다. 한 겨울을 지나고 나서 그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 때까지 배위량 목사가 부산에 있었다. 배위량 목사도 단칸방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받아줄 수도 없었다. 그리고 매케이 목사의 부인이 삼개월 뒤 병으로 숨진다. 그리고 세명의 여자중 한 명과 결혼을 하고 자리를 잡았지만, 1893년 8월에 고향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결국 호주 선교회에서는 이 일들을 인하여 교회는 큰 자극을 받고 다시 사람을 보낸다. 1894년 5월에 애담슨 목사를 부산에 파송한다. 부산에 와서 일을 하면서 거제도 마산등지에서 전도를 한다. 부산에서 얻은 그들의 첫 신자는 맨지스양에게 한글을 가르치던 심서방이었다. 1893년에 배위량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애담슨 목사가 부산에 도착했을 때 세례를 받고 교인이 되기를 원하는사람이 24명이 있었다. 그리고 그후 약 60여명이 정기 집회에 참여했다. 1900년에 왕길지 목사가 왔다. 2개월 후 장년 41명 유아 61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것은 한국 굫개혁주의적인 성격을 띤 교회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먼저 있었던 교인들을 중심으로 1901년에 부산진 교회가 설립된다. 부산에는 초량교회, 부산 진교회가 있었다. 북장로교회가 양도했을 때, 호주선교부는 강남지역에 5개의 선교기지를 만든다. 진주, 마산, 통영, 거창, 부산등 다섯개의 선교기지가 있었다. 이들 각지역을 중심으로 그 주변의 전지역을 돌보는 선교기지였다.

부산 경남지방의 선교는 초기의 선교사들의 죽음, 여자 선교사들의 활약, 사회사업등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멘지스와 페리등 두여선교사들은 1892년에 미래의 자국민을 위한 선교사 양성을 목표로 세 고아를 데리고 와서 양성하는 가운데 고아원 설립의 기초가 된다. 그리고 일신여학교(지금의 동래여고)등 학교를 세운다. 그후 신명학교, 창신학교, 시원여학교, 광림학교, 명덕여학교, 지명여학교등 부산 경남지방에 기독교 교육을 통한 선교활동을 한다. 네비우스의 방법에 따라서 부녀들에게 교육과 전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 한국에 최초로 세워진 교회들

1885년 황해도 솔내에 한국최초의 교회가 서상륜에 의해서 세워졌다. 한국인의 힘으로 세워진 최초의 교회였다. 그러나 서상륜은 정식 교역자가 아니었기에 조직교회는 아니었다. 교회의 이름은 ........

그후 1890년 서울의 세문안 교회가 북장로교의 선교사에 의해서

1893년에 한국북단 평야의 장대현 교회, 부산에는 초량교회가 생겼다. 복음증거의 기초기지가 한국 중심의 사울과 남북단에 세워지고 복음 전판의 발판이 마련되었다.

 

- 교회의 발전과 신학

한국인의 복음 수용과 발전:

선교가 시작된지 5년째인 1890년인 장로교 선교사는 11명이었다. 그해 세례교인수는 119명이었다. 이것은 5년동안 선교치고는 상당한 결실이었다. 터를 잡은 선교는 빠른 성장을 한다. 선교시작 10년째인 1895년 평양선교부는 “평양에서 선교의 첫단계는 지나갔다. 학습교인도 전도를 하고 있다. 우리 선교사들은 뒷처리를 위해서 초청을 받고 있다”고 선교보고를 한다. 놀라운 성장이다. 바로 이해에 장로교회의 세례교인수는 286명으로 늘어났다. 계속 증가 1898년 급성장, 세례교인수 2079명, 그후 642교회 18962명의 세례교인, 1912년에는 1438교회 세례교인 53000명에 이르렀다. 감리교회는 초기에 미비한 성장을 보이다가 1907년 부흥운동이 있을 때 성장을 보게된다. 선교사에 있어서 한국교회의 경우는 일찌기 볼 수없었다. 그것은 복음의 능력과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

그리고 정치적 문화적 환경을 복음전도에 맞게 인도를 하셨다. 일본은 차츰 한국을 식민지하는 가운데 나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독립을 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의지하게 된다. 사람들은 이조말기에 종교에 대한 공허감을 가지기도 했다. 이조 500년동안 유교의 교육아래 살아오면서 종교적 기갈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말씀을 전했을 때 풍요한 수확을 얻을 수 있었다. 교회의 역사를 핵으로 해서 온 세계를 이끌어 가시는 주님의 사역을 볼 수 있다. 한국교회의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수 천년간의 어두움 속에 있던 민족에서 하나님께서 이해할 수 없는 섭리를 허락하셔서 복음 사역이 자리를 잡고 속히 확장된 것이다.

이 모든 유리한 조건들은 선교의 성공에 간접적인 원인에 불과하다. 직접적인 원인은 구원에 이르게하는 능력인 하나님의 말씀의 증거에 있었다. ‘해마다 우리는 이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높이 들었고 그 나머지는 성령께서 알아서 하셨다’라고 한 선교사는 고백을 한다.

한국 장로교는 계속 성장 - 그 원인은 네비우스 방법을 채용, 성경공부제도를 채용한 것이 었다. 성경공부에는 남여노소를 불구하고 교인의 60%이상이 성경공부에 참여했다. ........

성경공부반의 특징은 성경을 배우고 기회가 있는대로 가가호호를 방문해서 전도를 했다. 장로교의 선교는 성경공부에 강조를 둠으로 그 특성을 보였다. 그 집회를 부흥회라고 하기 보다 사경회라고 불렀다. 개혁주의 생활의 핵심은 오직 성경의 생활이 자리를 잡게된다.

- 초기선교사들의 신학 한국교회의 신학

 

2009년 6월 30일

- 일제 이후의 한국교회

1882년 제물포조약, 일본군 조선주둔, 한국침략의 발판을 마련, 1894년 청일 전쟁에 승리를 하고 만주국가를 세운다. 러일전쟁에서도 승리하고, 큰 기세를 가지고 조선의 국가를 탈취한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을 맺는다. 1907년에 군대해산, 1910년 한일합방

 

일본식민정치 이후의 교회

조선개신교회의 초기역사는 일반의 침략사와 때를 같이한다. 이땅에 설립된 교회는 이땅 민족과 고난을 함께 해야한다. 일본은 교회의 성장을 경계의 눈으로 바라본다. 반일 운동의 지도자의 상당수가 기독교인이었다. 기독교가 반일 운동의 중심이었기에 교회와 우호관계를 맺고 자기의 목적대로 교회를 움직이든지 아니면 강압으로 교회를 누르든지 해야했다. 결국 교회와 같이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핍박을 가한다. 선교사들은 강대국 출신들이기에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다. 한때 선교사들의 이해와 환심을 사려했다. 조선 선교사들을 이또 히로부미는 칭송을 하기도하고 회유책을 쓴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선교에 대해서 희망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이런 희망은 실망으로 바뀐다. 1909년 이또가 안중근에게 사살을 당한 후에 데라우찌가 조선에와서 한일 합방조약을 체결하고 초대총독으로 절대권을 행사한다. 그는 일본 불교도로서 기독교에 대해서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다. 탄압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서도 그 탄압이 이어진다. 그러는 가운데 일본인들의 음모와 심한 박해에 의해서 몇가지 사건이 발생한다.

1) 안악사건 - 교육총회사건: 조선 서북부지방은 기독교의 성장이 가장 빠른 곳이었다. 여기에는 신민회와 교회지도자들의 활동이 가장 활발한 곳이었다. 평북, 황해도의 안악지방등은 일제가 경계를 늦추지 않은 사찰지역이었다. 안악지역 교회의 지도자들은 학교를 세우고 교육을 통해서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위 해서 일면 일교운동을 전개하고 교육총회를 만든다. 안중근의 아우 안명근이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서 반출하다가 체포됨으로 교육운동의 박해에 빌미를 주게된다. 이때 김구등이 체포되고 수난을 당한다. 1915년에 전후해서 출옥을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계속 감옥생활과 유배를 당한다. 여기서 이 운동을 억누르는데 성공한 일제는 평안에서도 계속한다.

2)105인 사건

1910년 평안도 지역에 기독교 세력을 억누르기 위해서 한 사건을 조작해서 기독교인들을 투옥하고 선교사들을 추방함으로 1910년 12월 17일 압록강 철교 준공식에 데라우찌가 참여하러 갔는데, 기독교인들이 이 데라우찌를 암살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16명이 정주에서부터 선천까지 따라왔지만 이 일을 이루지 못했다고 조작을 한다. 선교사들이 이일을 하는데 모의와 격려를 했다는 것이다. 당시 선교사들은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키고 있었지만, 일본사람들은 교회를 자기들의 장애물로 보았기 때문에 그들도 또한 장애물로 여겼다. 이 때의 사건은 경찰이 날조한 것이다. 이 때 체포된 숫자가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전득기 목사등은 이 때 고문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재판을 받았는데 105명이 기독교인이었고 97여명이 장로교인들이었다. 67명이 정주사람들이었다. 윤치호 등이었다. 재판에 있어서 제출된 공소장은 고문에 의해서 날조되어 쓰여진 것이었다. 재판과정에서 날조된 것이 드러났지만, 재판장은 이런저런 구실을 붙여 유죄판결을 내린다. 판결문에서 “이것은 신민회에 의해서 이루어진 일이지만, 대부분 야소교의 유력자들이다......” 그들은 교회의 세력을 파괴하려고 한 것이었다.

형을 받은 사람들은 여러차례 감형이 되었다. 1915년 2월까지 다 풀려나게 된다. 기독교와 일본사이의 첨예한 대립이 생기는 것을 보게된다. 총독부는 포교를 법을 통제하면서 음으로 양으로 교회를 탄압한다.

3)삼일운동

일제의 조선일들에 대한 억압과 교회 탄압이 심해지자 나라의 독립을 부르짖을 때가 다가 왔다. 윌슨의 약소민족의 자결권을 주장한다. 이 때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은 이 소식을 듣고 한국 독립운동에 대해서 적극성을 띠게된다. 독립운동시위를 강화시키는데 촉발제가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고종의 사망이 일본인에 의한 독살이라는 소문이 퍼지게된다. 이 일이 삼일운동을 일으키는데 자극제가 되었다. 1919년 2월8일 일본의 유학생들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일부는 서울을 향한다. 조선에서의 독립운동은 기독교인에 의해서 주도된다. 33인중에 16명이 기독교인이었다. 이외에도 17명의 지도자들 가운데 7명이 기독교인이었다. 이들 중에는 목사가 9명 장로가 3사람, 전도사가 4명이었다. 지도자들은 3월1일 오후 태화관에서 총독부에 통보를 하고 당당하게 독립을 선언한다. 삼일운동은 거사가 되기 까지 비밀이었지만, 거사일에는 당당하게 시행을 했다. 그리고 이들은 일본 경찰에 연행이 되었다. 학생들과 군중들은 파고다 공원에서부 시작된다. 전국으로 퍼지고 만주까지 확대된다. 200여만명의 사람들이 참여했다. 사망 562명 상해 1592명이었다고 일본을 발표를 했다. 한국의 입장에서는 사망자를 약 7000명을 추정한다. 독립시위에 기독신자들이 적극적으로 가담한다. 기독교인들은 애굽에서의 종되었던 유대인들의 해방을 생각하면서 민족의 독립을 생각하게되었다. 출애굽, 포로귀한, 계시록등에 관심이 많았다. 삼일운동에서 교회적으로 가담을 하거나 결정을 한 일은 없었다. 노회나 총회의 결의등이 없었다. 이것은 교회는 정치집단이 아니라 신앙집단이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때에 주도한 사람들 중에는 기독교인들이 많았다. 길선주 목사도 33인중의 한 사람이었다.

당시의 교회에 대한 박해는 잔인했다. 제암리 학살사건.

1919년 10월 총회가 교회의 사상자와 피해등을 조사를 해서 보고를 했다. 수감201명 사살41명, 현재수감자 1641명. 매를 맞고 죽은 사람이 6명, 교회훼손 12곳이었다. 교회들 가운데 장로교가 피해를 많이 입었다. 선교사들은 가능한한 정치적 중립의 입장을 지켰다.

그러나 일본의 잔악상들을 선교사들은 자국에 상세히 보고를 함으로 일본의 야만성과 잔인성을 세계에 알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일본에 있는 선교사들과 함께 일본정부에 항의 인도적으로 대하기를 건의했다.

천왕교와 대립되는 기독교의 말살정책을 시작한다.

 

자유주의 신학의 한국침투\

한국장로교에는 개혀주의 신학이 처음 들어와서 1920년대까지 한국신학을 지배했다. 1960년대 하반부에서 자유신학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다.

성경비평학을 받아들여 자유주의 신학을 소개한 사람은 W.Scott였다. 이 사람은 일찍이 성경비평을 수용한 사람이었지만, 보수주의의 선배의 그늘에서 조심스럽게 지내왔다. 카나다 연합교회의 소속이었다. 1926년 함흥에서 선교를 했는데 교역자 연수회에서 자기의 성경관을 드러내고, 성경에는 역사적인 오류가 있다고 주장을 한다. 거기에 모인 교역자들을 납득시키고자 했다. 성경의 무오를 배운 사람들은 반발했다. 김관식, 조희영등은 서고도에게 동조를 했다. 조희영은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도 있다고 말을 했다. 문학적, 과학적 오류도 있다고 주장함으로 보수의 울분을 터뜨렸다. 이것은 자유주의의 발판을 말련한 것이다. 캐나다의 장로교는 1925년에 감리교, 회중교회와 합동을 해서 연합교회를 형성했다. 이것은 개혁주의 노선을 포기하고 아르미니안 주의를 받아들이겠다는 것이었다. 신학의 관용주의 노선을 걷게된 것이다.

이것은 한국에서 연합선교회(카나다, 미구의 남북장로회등)를 이루는 가운데 일어났던 일이었다. 장로회 15회 총회에서 이 문제를 다루면서 이 카나다 선교사들을 받아들였다. 이미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앞으로 선별해서 받아들이기로 하고 그들을 받아들였다. 이렇게 함으로 자유주의 신학의 유입의 문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교회의 상호관계를 맺을 때 교회의 순수성, 진리를 촉진하고 전하고 파수할 수 있는 것이 항상 선행이 되어야 한다. 이를 기준으로 결정을 지어야한다. 그러나 15회 총회에서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지금의 한신은 이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졌다. 서고도를 받아들임으로 그에게 활로를 마련해주어 자기의 신학사상을 전하고 확장하게 된다.

1920년대 후반에는 미국의 장로교에 큰 변화가 있었던 시기였다. 100년이상 보수주의를 견지해 오던 프린스톤이 자유주의가 유입되고, 이후 자유주의 신학자들을 기러내게 된다. 메이첸, 반틸, 울리등은 그 때 나와서 1936년 웨스터민스트 신학교를 세우게 된다.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이 OPC 정통장로교를 만들게 되었다. 그후 1920년데 미국의 신학자들은 정통이라 하더라고 신학에 대해서 관용의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일본으로 유학을 간 교역자들은 일본의 자유주의 신학의 물이 들었다. 20년대 30년대 일본에는 칼 바르트와 에밀 부르너등 구라파의 신학사상에 물들어 있었다. 그러데 일본에 간 사람들은 이것을 배우는데 김재준 등이다.

신학적인 논쟁

한국의 보수신학의 터전에 자유주의 신학이 자리를 잡기는 힘들었다. 주춤하다가 다시 시도를 한다. 1934년 제24총회에서 보수신학과 자유주의 신학의 공적인 대결이 나타난다. 물론 90%이상이 보수였기에 자유주의 신학은 자리를 잡을 수는 없었지만, 이 때 공적으로 거론이된 것이 중요하다. 성경 비평을 한 사람중 서울 남대문 교회의 김영주목사는 창세기의 저자가 모세가 아니라는 주장을 한다. 문서설이 배경이 된 것이다. 김춘배 목사는 교회내의 여권에 대해서 언급을 한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대해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에 대해서 이것은 그 지역의 풍습에 의한 것이지 모든 지역에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을 하면서 새 해석학과 연관되는 내용을 글로 발표를 한다. 34총회에서 조사위원회 조직하고 35회에서 정죄를 하자 그들이 자세를 낮추고 사과를 하고 일단락 된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이 사상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

같은 총회에서 감리교회에서 한국 선교 희년(50년)에 아빙돈 단권주석을 번역하게 된다. 그런데 당시 부흥사인 길선주 목사가 자유주의 경향을 가지고 있고 장로교와는 다른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번역한 사람들은 사과할 것을 요구했다. 총회는 길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채필근 목사는 사과했다. 그러나 송창근, 김재준, 한경직 등은 끝까지 사과를 하지 않았고 일단락 되었다.

김재준, 박형룡, 남궁혁등 이 때의 신학자들은 책참조

박형룡은 한국 장로교 신학에서 혜성과 같은 존재였다. 보수를 주장하고 김재준과 대결하면서 보수를 대표한다. 박형룡도 하나님이 말씀에 대한 경외감등은 그의 공로로서 인정을 하게되지만, 칼빈주의 학자로서 개혁주의 신학대해서, 개혁주의 문화관 세계관등에서 그는 그것을 얼마나 알고 파수하고 가르쳤는가에 대해서는 별로 찾을 수 없다. 그는 오히려 근본주의에 집착을 했고, 시대주의자는 아니었지만, 말씀의 문자적 해석에 이해서 시대주의에 근접했다. 박윤선 박사는 웨스터민스트에서 공부를 하면서, 벤틸의 사상에 매혹을 느끼고 두 번째 유학을 갔을 때 벤틸에게서 변증학을 공부하고 기독교 문화관 세계관에 눈을 뜨게 된다. 우리 신학교는 개혁주의 신학의 참 맛을 처음 맛본 학교이다.

2009년 6월 30일

자유주의 신학이 한국에 자리를 잡게된 것은 1920년대 중반, 1926년 서고도의 발언, 1934년 총회차원에서 여권에 대한 문제, 창세기 전래에 대한 문제, 아빙돈 주석등의 문제등으로 언급이 되었다. 사과를 함으로 일단락이 되었다(1935년). 이 이후에는 총회차원에서 문제가 없었다. 35년경부터 교회 내에 다른 문제가 대두되었기 때문이었다. 신사참배 문제였다. 긴장의 시대였다. 자유주의는 외적정리, 내적 잠재.

1935년 전통진영에서 강하게 문제화 시키고 사과를 받는 일에 주요역할을 한 사람이 박형용이었다. 박과 김재준이 대립되는 양상을 보이게 된다. 박형용 판정승. 아빙돈 사건후, 총회에서 대립양상은 나타나지 않았지만, 신학계에서 대립이 되기 시작했다. 박형용이나 김재준은 신앙이 있는 부흥사로부터 신앙의 영향을 받았다. 박은 길선주, 김은 김익두로부터 신앙의 영향을 받았다.

박은 숭의와 남경을 거쳐서 프린스톤의 메이첸으로부터 사사를 받고 1928년에 돌아와서 강사, 1930년에 전임강사가 되었다. 메이첸은 정렬적인 교수였다.

김재준은 일본의 아오야마와 청산학원이었다. 당시 일본은 바르트의 영향을 받았다. 거기서 3년을 공부하면서 위기신학 변증신학의 영향을 받았다. 미국에서 웨스턴 세미나리.., 프린스톤(이미 자경이 되었을 때)에서 공부를 했다. 바르트주의의 길을 걷게 된다. 김재준은 귀국후 그의 주유주의 배경에 의해서 교수가 되기 쉽지 않았다. 그의 후견인인 남궁혁이었는데 그가 신학 잡지에 정기적인 기고를 하게 했다. 그의 기사가 문제가 되었다. “이사야의 임마누엘 연구였다.” 사7:14절에서 처녀를 젊은 여자로 번역함이 타당하다고 주장을 함으로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에 대해서 의혹을 가진 주변의 자유주의 흐름은 더 크게되었다. 여기에 박형용은 도전을 한다. 그는 그 잡지의 편집위원이었는데 박은 사직서를 내게되고 주변의 파장을 불러오게 된다. 그리고 김재준은 더 이상 신학지남에 더 이상 기고를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후 박이 주도를 하게되고 “신학지남” 보수적 입장에서 이끌어가게 된다.

이런 일 후 자유주의 신학이 지하로 숨어들게 된다. 결국 그 후에 동면을 하던 김재준이 드러나게되는 일이 있었다. 이 때 김재준 신학을 옹호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윤인구, 송창근등이다. 윤은 부산대의 초대 총장이었다.

 

조선 신학교와 새 평양신학교의 설립

1935년이후에 한국교회는 외부적으로 신사참배의 바람으로 시련에 부딪히게 된다. 성경무오를 믿는 정통주의 신자들은 신사참배를 거부했지만, 성경의 유오를 주장하는 사람은 일제와 손을 잡게된다. 일제가 이런 사람들에게 접근했을 때 이때까지 보수주의에 눌려서 힘을 얻지 못하다가 기회를 잡는다. 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 가결을 하게되는데, 자유주의자들의 자의적인 협력도 있었다.

조선장로회 신학교는 그해 9월30일부터 무기휴학, 오늘까지 이르게 된다. 이사회도 이상더 학교는 문을 열수없다는 결론을 짓고 평양신학교는 1938년 이학기부터 문을 닫았다. 보수적인 신학자들 박형용, 남궁혁등은 망명을 했다. 그리고 밖에서 신앙운동을 하던, 주기철, 한상동등은 투옥을 당하게 되었다. 보수주의자들이 흩어지게 되고 신학교가 문을 닫자 공백상태가 오게되었다. 선교사들도 한국을 떠나게 되었다. 자유주의자들은 기회를 얻었고, 1940년 총회가 모였을 때 평양신학교 계승을 결정하고 총독부의 허락을 받고 평양에 다시 다른 평양신학교가 생긴다. 채필근이 교장이었다. 그리고 서울에 다른 신학교가 생긴다. 이름은 조선신학원이다. 이것은 한신의 전신이다. 자유주의자들이 배경이었다.

 

신사참배 강요와 한국교회의 시련

배경:

일제를 조선을 합방후(1910년) 조선민족의 역사문화정신을 말살하고 일본민족으로 만들려 햇다. “內鮮一體”정책 - 일본열도와 조선을 한몸으로 만든다.- 그리고 황민(荒民)화정책을 실시했다. 이런 정책을 실현하는 최선의 방법으로 일본의 신도를 수용하게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미 합방하면서부터 그전에도 신도들을 가지고 들어왔다. 그리고 합방후 남산에 조선신궁을 왕성했다. 천왕의 영과 천왕 명치를 모신절이었다. 그리고 한국에 이 신도를 통해서 위의 두 정책을 성취하려했다. 그런데 신도라는 것은 하나의 종교로 표방을 할 때 거부감을 가지게 됨으로, 그것을 종교로 인식하지 못하도록 유도한다. 다른 종교를 가져도 좋은데 이것은 일본 국민으로서 한 의식이요, 국민으로서의 의례를 지키는 것으로 가르쳤다.

그런데 교회가 이것으로 박해를 받게된다. 이전의 박해와는 달리 순수한 신앙 때문에 어려움을 겪게된다. 1930년대 까지는 크게 강조를 하지 않고 권장하는 정도였다. 신사가 종교로 인식될 때 교회등의 거부감을 우려하여 신사는 종교와는 다르다고 가르친다. 조선에서 단군등 조상을 섬기고, 부모를 섬기는 것 처럼, 일본의 천왕, 조상, 국가 유공자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는 것은 마땅한 것이다 라고 주장을 한다. 그런데 처음에는 부드러운 태도였지만, 그후일본에 있는 일본인들과 한국에 있는 민족을 하나로 만들어야 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은 주일전쟁, 러일 전쟁, 제 이차대전(1941년 12월 8일 진주만 습격)을 전후해서였다. 이것은 결국 기독교의 박해를 가져왔다. 신사참배 강요는 교회가 경영하는 학교(교회의 주변)부터 시작되었다. 이름있는 학교, 새로운 문화를 수용하는 학교, 교회와 관계가 있는 학교는 모든 사람의 주목의 대상이었다.-1932년- 1931년 만주사변으로 일본병사들이 죽게 되었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평양신학교 학생들의 참석을 요구했다. 학교에서는 신앙양심상 참석거부를 했다. 압력을 받게된다. 총독부는 전국학교에 신사참배를 국민의례로 엄수하도록 지시를 했다. 때를 같이 해서 교회에도 신사참배는 종교를 초월한 국민의례로 다 할 것을 강요한다. 총회는 교섭을 시작하지만 결과를 얻지 모한다. 1934년 총회에서 이인식 목사는 기독교 학생들의 신사참배 불참배허용을 신청했지만, 오히려 총독부는 참석 거부자들의 명단을 제출하라고 요구한다. 1935년 평안도지사 공사립 고등학교 교장들을 소집하고 그들에게 먼저 신사참배를 요구했다. 숭실중학교 교장 윤산온 선교사, 숭의여자중학교 교장 선우리등이 거부하자 60일의 여유를 두고 계속 거부할 경우 학교를 폐쇄한다고 협박을 한다. 그들은 1936년에 사면 후에 미국으로 돌아갔다. 1936년 신사참배 거부학교는 폐교한다고 결정을 한다. 먼저 학교장들을 교체한다. 이렇게 해서 약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선교사들은 신사참배에 강력하게 반대를 했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도 있었다. 평양신학교의 일반 교수들, 일반 장로교에 속한 사람들은 강했지만, 연합교단 성격을 띤 연의전문학교장은 유연한 태도를 취한다. 카나다 선교회(자유주의를 도입한)는 신사를 국민신으로 받아들이고 학교를 계속할 것을 주장한다. 선교사들은 그외에 대부분 강한 입장이었다. 그중에서도 남장로교였다. 남장로교 자체가 보수적이었기 때문에, 남장로교의 선교본부의 총무였던 쿨톤은 일본의 신도가 무엇인지 알았다. 다신교적 성격을 띠고 있고,(이때까지의 모든 천왕들, 전사자들의 영혼숭배),.... 민족종교로서 당시의 국수주의 사상과 혼합된 일본의 종교이고 제국주의의 도구임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이 사실을 미국과 한국의 남장로교의 선교사들에게 알렸다. 이 결과 남장로교가 가장 강하게 반대한다.

1936년 미나미 총독으로 바뀐다. 가장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이사람은 내선일체의 이 길을 성취하는 것을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길 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이것을 밀고 나아갔다. 1937년 7월 7일 중일 전쟁 발발한다. 이 때 총독은 9월 1일을 애국일로 정하고 각학교에서 신사참배를 강요한다. 동방교배는 할 수 있지만, 신사참배를 절대불가의 태도를 보였다. 이 때 호남지방의 20여개 학교가 폐교를 당하게 된다. 당시 북장로교 선교부는 남장로교와 같이 확고한 입장을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프린스톤이 이미 1920년대 자유주의를 수용했기 때문에 조금은 부드러운 입장이었지만, 남장로교의 영향을 받아서 반대, 여러학교가 문을 닫게된다. 그러나 연의 전문학교는 1941년까지 버티어나갔다. 그러다가 1942년에 기독교가 포기하고 일본 총독이 운영하는 학교가 되었다.

 

교회에 대한 박해를 가하게 된다. 조선민족을 내선일체 정책 황민화 정책을 사용 한민족정신 말살을 기도한 것이다. 중일전쟁후 애국일을 9월1일일로 정하고 국기 게양, 국가 봉창, 동방교배, 신사참배를 할 것을 강요했다. 37년 10월에 황국시민의 서사(맹세)를 하게했다. 1938년 이 때에는 조선어 사용을 금지하고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연맹을 조직했다. 학교에서 조선말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1939년에는 창시개명을 하게한다. 미나미는 이렇게 한국의 정신적 문화적인 것을 말살하려고 하였다. 전적인 조선의 일본화를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이 가운데 교회에 신사참배를 강요한다. 로마교회는 쉬웠다. 1935년 로마교황청으로부터 신사참배허용 통첩을 받았다.

감리교도 처음부터 신사는 종교가 아니라 국민의례라는 일제의 말을 수용했다. 1938년 9월 총리감인 양주삼이 신사참배는 국민이 반드시 봉행해야할 국가 의식이라고 모든 교회 앞에서 성명을 발표해서 수용한다. 개인적으로는 싸운 사람도 있지만, 전체로 볼 때 속히 넘어가게 되었다. 그들의 신학의 영향도 있었다.

교권체제에 있는 교회는 항상 개혁주의 세계보다 이런 경우 양보를 쉽게한다. 교권을 쥐고 있는 사람의 결정에 따라서 모든 교회가 따라가기 때문이다.

교회들 중에 장로교는 가장 강력하게 신사참배에 불응한다. 그러데 날이 갈수록 다른 교파들이 수용을 하게되자, 장로교 내부에서도 힘이 약해졌다. 특히 연의 전문학교 교장이 협상,수용적인 태도를 취하자 더욱 장로교 안에서도 힘을 잃게된다. 1938년 신사참배를 더욱 강요한다. 이해에 각도에 기독교에 황국 신민서사, 국가 봉창, 동방교배, 신사참배, 등을 강요하고 기도와 설교에서 반일 정신이 있는 것은 제거하라고 하고 일본 국책에 맞는 새로운 기독교 건설에 적극 참역할 것을 강요했다. 윤인구들이 있으는 혁신교단들은 일본의 정책을 따랐다.

모든 노회는 노회를 개회하기 전에 신사를 참배하라고 지시했다. 전국의 23개 노회가운데 17노회가 신사참배에 굴복하고 말았다. 교회지도자를 설득, 위협해서 4월경에 각교파대표자들이 서대문 경찰서에 모여서 신사참배와 황도정신을 발휘하겠다는 선언문을 발의하게 된다. 장로교회 총회가 종국적으로 무릎을 꿇게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신사참배 가결

38년 총회적 신사참배 가결을 위해서 일제는 노력을 한다. 애국자로 부각된 사람들을 포섭하기 시작한다. 당시 신문에 이승일이라는 분은 신민회 간부고 105인 사건에 연루된 사람이었지만 친일파 오문환에 포섭되었다. 이런식으로 신사를 종교가 아니라 국민의식임을 강조한다. 강의 등을 통하여... 교계지도자들 다수는 신사참배에 찬성하는 사람들로 만들고 신사참배거부는 비 국민적인 행동으로 규정하게 된다. 총회가 다가오자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주기철 등을 검속하고 각지방검찰청에서 23개노회에서 신사참배허용을 가결할 것을 강요했다. 출석해서 신사참배에 동의 하든, 참석해서 침묵을 지키든지, 아니면 총대를 사퇴할 것을 강요했다. 공적 신사참배 가결을 위해서 회유, 협박을 했다. 선교사들에게도 신사참배는 일본 국민으로서 애국을 표하는 것이기에 신사참배 반대를 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1938년 9월 9일 원래 신의주에서 열리게 되어있던 총회를 평양에서 개회하도록 만들었다. 평양경찰서는 평양 노회장으로 신사참배를 제안하도록 하고 평서노회장 으로 동의, 안주 노회장으로 제청으로 하도록 각본을 짜고 27회총회가 모이게 되었다. 참석 인원은 194명, 100여명의 경찰이 감시를 했다. 홍택기가 회장, 부회장은 김주창이었다. 이튼날 9월 10일 속회로 모였다. 이 때는 수백명의 경찰이 안팎으로 애워싼 가운데, 경찰 간부들이 안에 자리를 잡았다. 개회후 각본대로 신사참배 가결과 성명서 낭독을 위한 긴급제안을 했다. 홍택기 목사가 가만 묻고 부를 묻지않고 만장일치로 가결되었음을 선포했다. 반대의견은 묵살이 되었다. 이 때 두 선교사 박위량 선교사와 한부선 선교사는 이의를 신청했다. 경찰은 이들을 끌어냈다. 신사참배를 솔선 수범한다는 것을 낭독하게 된다. 이 후 평양기독교 친목회에서는 속히 결행을 특건을 한다. 이 때 총회 대표는 신사로 가서 참배를 하게된다. 공적인 굴복을 하게된다. 조선예수교 장로교 총회가 배도의 죄를 범하게 된다. 이 일이 있은 후 선교사들과 불법적인 처사에 찬성을 할 없는 사람들은 행동을 하게된다. 선교사들은 항의서를 총회에 제출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12일 권찬영외 25명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총의의 결의에 대한 항의서를 제출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통상법을 어기고 강요에 의한 것이었지만, 신사참배를 공식적으로 가결을 한 것이었다. 남?북장로교는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와 단절을 한다. 이렇게 됨으로 한국 장로교회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일제의 뜻에 따라 움직임으로 교회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1939년 신의주에서 모인 28회 총회는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예수교 장로회 연맹을 만들고 ..... 선언문을 채택한다. 29회 총회에서는 총회 상시위원회를 만들어서 총회후에도 이일이 계속도록 했다. 1941년 11월 태평양 전쟁을 시작한다. 이 때 전쟁승리를 위해서 기독교 신앙을 완전 분쇄하고 국민총화 시행을 위해서 노력한다. 기독교 교리중에 신도와 배치되는 것을 다 제거하게 했다. 도전적 전투적인 찬송은 부르지 못하게 했다. 1942년에는 완전히 일본 교회에 강제로 혁신교단을 조직하도록 하고 모세오경, 다니엘서등을 제거하게 했고, 총회에는 국민의례, 시국강연회, 신사참배등을 하게 했다. 일본기독교단 조선장로교단으로 명칭을 바꾸고 지도자들은 (책참조)

1945년 해방직전 모든 교파를 통합해서 일본기독교 조선 교단이 만들어지고 장로교가 없어진다. 김관식이 초대 통리가 되었다. 해방후에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었다. 상당히 오랫동안 정치부장을 했다.

1998년 5월 13일

- 신사참배 반대 운동 -

반대 이유:

십계명중 일 이계명을 범하고 우상을 섬기는 것이었다.

당시의 분위기는 네가지로 나타났다.

1)순교적 정신으로 조직적으로 항거하는 사람이 있었다.

2)신사참배는 반대하는데 조직적으로 하지 않고 개인에 맡겨야 된다고, 개인적인 것으로 보았다.

3)신사참배를 한 사람가운데 마지못해서, 하나님이 계명을 어기는 줄 알면서도 신사참배를 한 사람도 있었다.

4)국가의식으로, 일본의 말을 받아들이고 신사참배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있었다.

 

신사참배를 강하게 반대한 지역을 살펴보면

평안남북도와 경남지역에서 특별히 강하게 반대를 하였다. 다른 곳에서는 공적으로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것이 없을 때 이미 경남에서는 공적으로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주기철 목사가 초량교회에 부임하여, 신사참배 강요의 분위를 깨닫고 1931년 경남 노회에 신사참배 반대 결의안을 내놓았다. 공적으로 제일 처음 반대의사를 나타낸 것이다.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지도자들 중에는 두가지 유형이 나타났다.

1)신사참배를 반대하되 집단의 움직임 보다 개인의 양심에 맡기자는 입장이다.

주기철 목사가 대표적인 예이다. 개인적인 신앙을 가지고 반대하자는 입장으로 공적으로 반대할 경우 정치적 모양을 가지고 쉽고 희생이 많이 나타나기 때문에 이런 주장을 하게된다.

2)교회적, 조직적 반대를 주장한 사람들로는 한상동, 평북의 지도자 이기선 목사님이다.

이분들은 조직적인 반대를 주장했다. 한상동 목사님의 경우 현재의 분위기로는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정하고 노회가 시행하는 이런 교회는 교회가 아닌 것으로 보고, 이런 교회에 참여하지 말고 반대하는 교인들은 따로 모여서, 타락된 노회를 떠나서 새로운 노회를 만들자 라고 주장하고 운동을 하였다.

한상동 목사를 분리자로 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한상동 목사는 학자가 아니다. 고등교육을 받지 못하고, 평범한 목회자였다. 그러나 교회관은 바로가지고 있었다. 하나님의 교회는 순수해야된다는 참교회에 대한 개념이 바로되어 있었다. 교회를 사랑하는 분이었다. 개인의 신앙에 머물지 않고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가 정결해야 됨을 깨달았던 분이었다.

주남선 목사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평북에서는 이기선 목사가 있었는데, ...

평남에서는 주기철 목사

경남에서는 한상동, 주남성, 손명복전도사, 황철도 전도사, 조수옥 권사등

만주에서는 한부선 선교사를 중심으로

 

주기철 목사는 특히 사명감이 강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 이것은 어떤 일이 있어도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옥에 갇혀있을 때 설교금지 요청을 했지만, 이 설교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이기에 포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목사직을 사면할 것을 요구했지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직분을 포기할 수 없다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다. 1940년 9월에 평양노회가 목사면직을 시켰다. 그가 시무하던 산정현 교회도 문을 닫게했다.

주남선 목사는 언변에는 약했지만, 한국적 귀족 타입의 어른이었다. 언제나 한복을 입고 다니셨다. 26살 때 거창교회의 집사가 디고 30살에 장로가 되고 1921년 평양신학교 입학했다. 1930년에 졸업을 하시고 자기의 모교회인 거창교회의 위임목사가 되었다. 20여년 동안 본교회에서 시무하시다가 세상을 떠나셨다. 이분은 사랑의 종이었다. 그가 강조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나를 사랑하시는데 어떻게 내가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겠는가? 신사참배의 반대의 동기가 하나님 사랑이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셔서 구원하시고 성령을 주셔서 나를 변화시키셨는데 어떻게 신사참배를 할 수 있겠는가? 이런 사랑으로 자기 교회뿐만 아니라 주변 교회를 다 돌아보신 분이었다.

한상동 목사님은 25때 세례를 받고, 평양신학교를 37년에 졸업하고 그해에 초량교회에 부임을 했지만, 신사참배 강요 때문에 오래계시지 못했다. 38년에 신사참배 반대 설교를 하고 마산 문창교회로 옮기게 되었다. 그리고 곧 신사참배강요, 반대, 사면 하고 떠돌이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경남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했다. 교회의 조직적인 반대운동을 주장했다. 한 목사님은 주남선 목사님은 사랑을 강조한 반면에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했다. 그리고 항상 하나님의 동재, “세상끝날 까지 너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라는 말씀에 강한 집념을 가지고 있었기에 신사참배반대와 옥중생활을 가능케했다. 교회사랑과 하나님의 절대주권, 하나님의 우리와 함께 하심 - 이것은 칼빈주의 신앙자의 모습이다.

손양원 목사님은 37년 신학교 졸업하고, 전남에서 사역을 하셨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강하게 전개했다. 담력이 있었다. 일본 사람들에게 잡혀가서 심문을 받는 중에도 예수그리스도가 재림하면 일본은 망하고 천황도 옥에 들어가게 된다고 강하게 주장하면서 강한 태도를 보여주셨다.

이인재 목사 - 아직 미국에서 생존해 계신다. 38년 신학교 입학, 그리고 첫학기 후 신학교가 문을 닫았기 때문에 공부를 계속하지 못했다. 그후 한상동 목사님과 함께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하게 된다.

 

해방후 교회 재건 운동

해방은 우리 민족에게는 식민생활로부터 자유였고 교회로서는 우상숭배로부터 자유였다. 특히 8월 15일 해방이 되지 않았다면, 8월 18일에 일본은 대학살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감옥에 투옥된 모든 사람들과 밖에 있는 신실한 교인들을 다 죽이기로 계획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8월 15일 해방을 하나님께서 주심으로 이 일을 막아주셨다. 8월 17일에 하나님의 종들이 옥에서 풀려났다. 평양 감옥에 제일 많은 분들이, 신실한 분들이 갇혀있었다. 17일 30여명의 지도자들이 평양옥에서 나오셨다. 손양원 목사님은 호남지역 옥에서 풀려나셨다.

해방후 한국 국권은 어려웠다. 포츠담 선언, 카이로 선언등으로 미?소 양국의 군대가 남북으로 점령하게 되었다. 그리고 배후에 있는 이데올로기가 자리를 잡게된다. 남쪽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북은 소련의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가 자리를 잡게된다. 한국 사람들도 큰 역할을 했다. 북쪽은 김일성, 남쪽은 미국등지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의 이해서 삼팔선이 굳어져 버리고 분단이 계속되고 있다. 교회도 나누어지게 된다.

8월 17일 옥에서 풀려난 주님의 종들은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모여서 약 두달동안 휴양도 하고 미래의 교회의 재건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지냈다. 이들이 앞으로 교회의 재건에 대한 염려를 하고 재건 방안을 몇가지로 9월 20일 교회재건 원칙을 세워서 발표한다. 5개

모든 교회 지도자들은(목사, 장로, 전도사) 권징의 길을 택하되 지난날의 죄를 회개하고 교회에 나가야 한다. 목사는 최소한 이개월 통해자복..... 전한국노회의 지교회가 이것을 실행해야 한다.

특히 모든 지도자들에 대한 회개촉구는, 신사참배에 동참했던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이었다. 주변에서는 곱지않은 눈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평북의 6개 노회의 교역장 모임인 퇴수회가 있었다. 이 때 만주에서 동북신학교에서 수고를 하던 박형룡 박사가 여기에 참석하여 출옥지도자들이 내어놓은 재건 기본 원칙을 발표한다. 1938년에 신사참배를 총회에게 가결했던 홍택기도 참석했다. 이런 사람들이 불만을 토로했다. 밖에서도 함께 고생을 하고 수고를 했다는 주장이다.

5개원칙에는 원칙만 간단하게 나타냈고, 설명적인 것이 부족했다. 반대자들에게 설득력이 부족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북에서의 교회재건 운동

이런 가운데 이북에도 삼팔선이 가로막혀서 왕래가 불가능했다. 그래서이북에 있는 오도가 연합노회를 만들게 된다.

교회안에 차츰 박해가 시작된다. 1946년 11월 북한에서 정부수립을 위한 총선을 하게 되었는데 주일이었다.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주일 선거를 이북 오도 노회가 반대하게 된다. 그럴 때 북한의 30만의 성도에 대한 박해가 시작된다. 한쪽은 공산주의 정부에 대한 대항이 있었던 반면, 이들에게 협력하는 단체가 생겨났다. 강양욱 목사는 기독교 연맹을 조직하고, 이북의 공산정부의 의용단체였다. 이런 사람들이 김익두 목사등을 감언이설로 가입하게 만들고, 이북오도 노회의 임원들을 감속하고...... 신자들에 의한 박해가 시작된 것이다. 이럴 때 이기선 목사는 출옥성도들이 발표했던 교회 재건 방안의 기본 원칙에 따라 살기를 원하는 교회들을 규합하기도 했다. 이런 신자들에 의한 박해는 일제 때와 맥을 같이하는 사탄의 세력이 다시 나타난 것으로 보고, 기성교회를 벗어난 독노회를 조직하게 된다. 이것은 최초의 선의의 목적을 가진 교단 분리였다. 혁신 복구파라 불렸다. 일제때 완전히 장로교를 버리고 혼합단체인 교단이 이뤄졌다. 이 때 장로교가 없어지고 교회가 탈선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런 교단적인 요소로부터 탈피하여 혁신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신자들이 천국시민의 위치를 벗어나서 천황의 백성으로 선서등을 했기 때문에 이것을 복구해야 된다는 의미에서 혁신 복구파라고 이름을 지었다. 여기에 대한 방안을 가지고 있었다. 예배는회개 중심으로 모이고, 삼일간 금식, 육개월간의 혁시기간을 가짐으로 회복의 단계를 밟게된다. 목사는 먼저 사면을 하고 시무투표를 받고 다시 교회를 봉사는 방법을 제시한다. 일사 후퇴때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내려와서 재건파와 고려파에 속하게 된다.

고려파에 온 이북의 이런 혁신복구파의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후에 교회의 법정싸움등으로 경기 이북의 혁신복구파 사람들이 고려파에 대한 행정보류를하고 합동으로 들어갔다. 김창인 목사등이다.

남한에서의 교회 재건 운동

이북에서는 평안도를 중심으로 강한 신사참배 저항운동이 있었다. 그러나 숫자적으로 볼 때 경남이 그 숫자가 가장 많았다. 서울은 신사참배등으로 투옥된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일제와 타협을 하거나 친일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서울을 무대로 활동을 한다. 특히 조선신학교는 일본과 타협을 하면서 자유주의 신학을 지켜오게 된다. 특히 일본 기독교 조선교단이 해방직전 1945년 8월초에 서울지역에 자리를 잡게된다.

해방이 되어지자 1945년 9월 8일 이 당시 일본 기독교 조선교단의 통리였던 김관식이 해방이 되어지자 이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을 그 체제대로 바로 이끌어 가려고 계획을 하고 9월 8일 남부대회를 개최한다. 함께 참여한 사람은 송창근, 김영주등이 주동이 되었다. 장로교 감리교등이 함께 했다. 이렇게 함으로 교권을 통해서 한국 교회를 장악하기를 바랬다.

민경배는 이런 의도를 친일의 경력을 숨기려 했던 의도가 있었다고 말했지만, 한국교회의 통일을 위해서 노력한 것을 칭찬한다. 주재용은 건국이념에 기독교적 기초제공, 교회의 단일을 형성을 위해서 노력했지만, 각교파에서 환원 공작이 시작됨으로 실패했다고 말한다.

이들은 진리보다는 기구적 통일, 교회의 화합보다는, 진리보다는 교회의 통일만을 생각한다.

아무튼 이런 시도는 감리교회가 먼저 떠남으로 실패한다. 1946년 6월 12일부터 사일간 서울 성동교회에서 장로교로 환원을 결의를 위하여 남부총회가 모였다. 이들의 배후에는 일본에 협력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두가지 중대한 결정은 1938년의 신사참배 가결을 무효로 한다는 것과(거기에 대한 권징은 없었다. 후에 이 총회는 몇번 취소를 한다.) 조선신학교를 장로 교회의 직영신학교로 한다는 것이었다. 한경직 목사는 조선신학교의 교수였고 옹호자였다.

그 다음해에는 제 이회 남부총회에서는 지난날의 한국 장로교 총회를 계승하기로 하고 제 33회 총회로 모이게 된다.

 

경남노회

경남노회는 장로교회의 역사에서 큰 흔적을 남겼다. 경남노회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앞장선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해방후 위의 문제들에 대해서 첨예한 대립을 보였다.

1945년 9월 2일 부산진교회에서 신앙부흥운동 준비위원회가 모였다. 노회 재건을 하기로 결의를 한다.

1945년 9월 18일, 경남 재건노회가 소집된다. 자숙안을 발의를 하고 받게된다. 이 때는 아직 투옥된 성도들이 활동을 하지않고 있었다(평양에 있을 때이다). 이 자숙안에는 모든 목사들은 일단 사직을 하고 통해하고, 시무 투표를 시행할 것을 결정한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모인 사람들이 거의다 신사참배하고 일본에 협력을 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미래를 직감하고 이런 결정을 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출옥성도들이 오게 될 때 자기들의 입지에 대한 불안감을 가지고 선수를 쳤다고 볼 수 있다.

1945년 12월 3일에 마산 문창교회에서 제 47정기노회가 모였다. 주남선 목사님이 계셨다. 이전의 자숙안 결정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그래서 교회의 혼란이 일어났다. 그래서 이 47회 총회에서 주남선 목사님이 평화적인 재건을 위해서 집회를 할 것을 결의하고 손양원 목사님이 인도를 했다. 이 때 이전의 세력은 참여하지 않았다.

1946년 7월에 47회 임시노회가 모였다. 진해에서 모였다. 6월 성동교회에서 남부총회가 모여서 조선신학교를 총회직영으로 하기로 결정을 한 후였다. 그러나 이전에 주남선, 한상동 목사님은 고려신학교를 세우는 것에 합의를 본 후였다. 그리고 이 때 진해에서 신학강좌를 가졌다. 이런 가운데 임시노회가 개최된다. 주남선 목사님이 회장이 된다. 이런 분위기 가운데 고려신학교 설립을 환영하고 인정하기로하고 학생을 추천하기로 결정을 하게된다. 고려신학교를 급히 세운 것은 이미 서울에 자유주의 신학의 조선신학이 장로교의 직영신학교가 되었기 때문에 한국에 정통장로교 유지를 위해서 였다. 박윤선 박사를 초청하고 개혁주의의 정통성을 잇는 신학교를 세우고자 했다.

46년 12월 3일 48회 정기노회가 진해에서 열렸다. 김길창 목사가 사람들을 포섭하고 이 노회에서 회장이 된다. 이전의 임시노회에서 좋았던 분위기가 달라진다. 신사참배가 죄였는가에 대한 질문이 나온다. 그리고 신사참배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기로 결의를 한다. 그가 회장이 되고나니, 지난 노회에서 결정된 고려신학교 설립인가와 학생추천등을 취소하게된다.그러자 한 상동목사님은 노회가 바로 될 때까지 이 노회를 탈퇴할 것을 표명한다. 그러자 경남지역에서 이런 어른들을 따르는 분위기 였기 때문에 고려신학교 취소등의 소식을 듣고 교회가 일어난다. 영도교회등을 중심으로 67개교회가 항거를 하고 일어난다.

1947년 3월에 구포에서 48회 임시노회가 개최된다. 김길창목사와 모든 임원이 총사퇴를 하게된다.

1947년 12월에 49회 정기노회가 부산 광복교회에서 열리게 된다. 이수필 목사가 시무하고 있었다. 다시 분위기가 쇄신되었다. 박형룡 박사가 1947년 10월에 고려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한다. 여기서 그는 전 총회의 지원을 받게 하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경남노회가 결정한 자숙안에 따라서 근신하지 않은 사람들은 사과를 하기로 하는등 분위기가 좋았다.

1948년 9월 3일에 임시노회 소집청원이 들어왔다. 박형룡박사가 47년 10월에 교장으로 취임했다가 48년 4월에 사면을 하게 된다. 이러자 김길창이 기회를 잡게된다. 임시노회소집을 요구하고 고려신학교를 무너뜨리려 한다. 박형룡이 어떻게 고려신학교를 떠나게 된 것과 한부선 선교사를 교수로 임용한 이유를 따진다. 다시 고려신학교를 취소하게 된다.

1948년 12월 7일에 마산에서 50회 정기노회가 마산 문창교회에서 열린다. 회의중에 한 목사가 ‘미소기 바라이’에 참여한 것을 고백하고 회개했다고 고백을 한다. 여기에서 김길창목사는 ‘미소기 바라이’를 모른다고 부인하자, 한상동 목사가 그를 제명 하자고 동의한다.

1949년 봄에 3월 8일 항서교회에서 김길창은 다른 노회를 조직한다. 남쪽에서 최초로 교단 분리가 일어났다. 교권에 종이 된 사람은 끈질기다. 교권이 교단을 교단을 나누게된 것이다.

1998년 5월 20일

아무리 어려워도, 하나님의 말씀에서 탈선을 할 때 하나님의 징계가 있다는 것을 구약시대로부터 볼 수 있다. 우리 나라의 교회에서도 마찬가지 이다. 일제때의 죄에 대해서 아직도 해결을 하지 못하고 있다.

1946년 총선을 주일 때 하게된다. 이 때 이기선 목사를 중심으로 독노회가 조직된다. 북한에서 공산주의에 의해서 일제때와 같은 기독교

경남에서는 김길창 목사가 교회를 분리해 나간다. 1946년 7월에 경남 임시노회가 진해에서 열리게 되었을 때, 고려신학교 설립을 반영하고 학생추천할 것을 결정한다. 주남선 목사님이 회장이 되었다. 그 뒤 12월에 48회 경남정기 노회에서 김길창 목사가 운동을 해서 자신이 회장이 된다. 신사참배를 죄로 여기지 않고 다시 거론하지 말자는 분위기를 만든다. 한상동 목사는 노회를 바로설 때 까지 탈퇴한다고 선언을 한다. 경남지역 70여교회가 탈퇴선언에 동의를 한다. 김길창이 회장이 된 노회의 처사에 대해서 항거를 한다. 47년 3월 구포교회에서의 임시노회에서 김길창등은 사면한다. 그리고 박형용박사가 47년 9월에 한국에 나와서 10월 14일 고려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한다. 박윤선 목사, 한부선 선교사등과 함께 교수로 취임한다.(1947년 10월 14일). 박형룡박사가 고려신학에 오게된 것은 억지였다. 만주 동북신학교에서 모셔올 때는 한국에서는 고려신학교에서, 평양신학교의 전통을 따라서 일하겠다고 했지만, 서울에 왔을 때 서울에서 정치에 능한 중도에 있는 목사들이 이분을 붙들었다. 서울에서 신학교를 하자고 설득을 한다. 서울에서 며칠 머무는 가운데 설득을 당한다. 부산에서 연락이 왔을 때, 서울의 상황을 알려주었다. 부산에서는 학생대표와 교수대표들이 모시러 올라간다. 이러한 내용들은 한부선 선교사가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박형룡박사는 일단 내려오게 된다. 제일 중요한 문제는 신학교를 속히 총회인정을 받는 총회신학교를 만드는 것이었다. 박형룡박사가 왔을 때 너무 서둘렀다. 전국에서 학생을 받고 교육을 시키기 위해서 총회인준을 받는 것을 위해서 노력을 했다. 그러나 서울에서는 신학적으로 좌경화 된 한국신학이(조선신학, 김재준)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들의 신학은 황국시민으로서의 신학이었다. 그들은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일제때와 신사참배때부터 보수적 성향의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따라서 인준을 서두르는 것은 오히려 성사될 가망성이 없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런데 박형룡 박사는 이일을 서두르게 된다. 그리고 서울로 학교를 옮기자고 주장한다. 서울에서는 몇사람을 제외하고 중동적인 입장이다. 따라서 이것도 고려신하교 이념을 포기하라고 하는것과 다름이 없었다.

김치선 박사는 서울에 남대문 교회에 목사로 있었다. 고려신학교 개교예배때 설교를 한 분이다. 이분도 진심으로 서울로 옮기자고 제의한다. 그러나 서울로 옮겨서는 고려신학교의 이념을 펼치기가 어려운 것이었다. 또 고려신학교의 주역들의 활동무대는 부산과 경남지방이었다. 따라서 서울로 옮기는 것은 서울사람들에게 넘겨주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70년대까지 와서도 이 학교를 부산에 잡아두려고 했던 것은 잘못이었다.

그리고 중요한 세 번째 문제는 선교와의 관계이다. 박형룡박사는 1938년도까지 평양신학교에 계시면서 남궁혁과 함께 두분이 정교수로 있었다. 선교사들 밑에서 배운 사람들이었다. 신사참배로 문을 닫게되고 만주로 가서 제자를 양성하게 된다. 박 박사는 선교사들에 대한 정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이 좌경화 되었을 때 북장로교에서 나와서 메이첸(웨스터민스트 신학교, OPC)과 함께한 한부선 선교사는 만주로 갔다. 신사참배 반대로 옥살이를 하기도한다. 이분이 와서 고려신학교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박형룡 박사는 북장로교 남장로교등 큰 교파의 선교사들을 원했다. 작은 교파의 한부선 선교사를 무시하는 듯했고, 분리자로 보았다. 박형룡은 네 선교부와 손을 잡고 일을 하자고 한다. 그러나 한부선 선교사로부터 세계교회의 흐름을 알고 있던 한상동 목사님등은 그것을 반대한다. 자유화된 교파와, WCC(교리를 초월한 교회일치운동), 캐나다 연합교회등과 관련을 지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일로 해서 그 다음해 1947년 4월에 총회가 서울에서 열린다. 그전까지 서울과의 많은 연락이 있었다. 고려신학교서 사면을 하고 이때 서울에 올라가서 신학교 설립을 준비한다. 6월에 장로회신학교를 열게된다. 중립에 있는 사람들이 주체가 된다. 이들이 신학교를 세우니까 총회에서 마찰이 생겼다. 조선신학교와 함께 인준을 받으니 마찰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박형룡은 신학적으로는 한국교회에는 많은 공로를 세운 분이다. 그 분의 신학사상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교회관에 문제가 있었다. 개혁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 교회의 순결성에 대해서 관심이 적었다. 참된 순수한 교회건설을 하자고하는 한상동 목사, 주남선 목사의 뜻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오히려 그는 자유화된 네 선교회와 일을 하자고 한 것이다. 순수한 말씀의 전파, 성례, 권징에서 권징을 소홀히 한 것이다. 교리에 대한 권징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 그는 크게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후회한다. 합동직전에 그분은 네선교부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게 된다. 합동측에서는 고려파와 합동을 하자고 간절히 원하게 된 것은 그들이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 박형룡은 지난날의 잘못을 인정한다. 고려파 분리에 있어서 강한 충격을 주고 원인을 준 사람이 박형용박사였다.

1946년 12월에 그가 노회장이 되었다가, 결국 물러나게 되는 일이 있었고, 그 동안 고려신학 설립과 학생추천을 취소하는 일이있었다. 그 뒤 일년 후 세를 회복한다. 1948년 5월에 박형룡박사가 서울로 간 다음 경남지역의 분위기와 전 한국의 분위가 달라졌다. 한국 장로교의 거물이 부산의 고려신학교에 봉사하다가 이분이 서울로 떠난 것은, 자기로서의 이유를 가지고 있었지만, 고려신학교로 부터의 이탈이었다. 고려파에서 회개와 정화운동을 전개하는 분들을 반대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반대파들이 협력하는 길을 터주었다. 박 박사가 처음 와서 자리를 잡고나서 중도파등은 주춤했지만, 이분이 떠나가고 김길창이 힘을 얻게된다. “고려신학교와 신성파에 대해서”라는 괴문서를 가지고 고려신학교를 비난한다. 이것은 김길창의 짓이었다. 고려신학교를 배신자로 비난한다. 그리고 경남 임시노회 소집을 신청한다. 이사람은 항서교회 목사였다. 거기서 임시노회를 연다. 이전에 하던 일을 다시한다. 고려신학교인준을 취소하고 학생추천도 취소하기로 결정한다. 1948년 9월의 일이었다. 48년 12월에 마산 문창교회에서 50회 노회가 모였다. 여기서 그들은 고려파를 허물어 뜨리기 위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김길창이 미소기 바라이에 대한 발언이 문제가 되어 한상동 목사는 그를 제명하자고 동의 하고 제청까지 나오지만, 결정은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그후 1949년 봄노회를 자기가 따로 소집한다. 지금 현재의 주도 세력을 신조와 신앙양심에 맞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노회를 따로 구성하고, 자기교회에서 자기 동료들과 함께 노회를 만든다. 남한에서 장로교회의 분열운동을 일으킨 분이 김길창이다. 교권이 교회를 파괴하는 무서운 것이다. 이것을 조심해야 한다. 이것이 초기 분령이었다. 그런데 신사참배에 앞장섰던 김길창이 많은 사람을 끌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49년에 서울 새문안 교회 총회에서 인준을 받게된다. 장로회 신학교는 박형룡을 중심으로 중도 보수신학교이다. 조신은 자유주의이고 이 둘사이에는 투쟁이 일어나고, 그리고 고려신학교의 문제였다. 이 둘에 총회에서 문제였다. 고려신학교에 학생들을 추천하는 문제가 나왔을 때 반대를 한다. 김관식이 중심이었다. 결국 고려신학교와 경남노회가 문제가 된 것은 김길창의 분열때문이었다. 이 때 나간 사람, 불법을 행한 사람만 권징을 하면 되었다. 그러나 권징을 하지 않았다. 이 총회에서 경남노회는 한부선과 관계하지 말것과 고려신학교는 총회가 결의한 대로 노회가 관계하지 말 것, 그리고 경남 노회가 분열되었으니 전권위원회를 만들 것을 결정한다. 이 전권위원회는 경남노회에 방문을 해서 지시한 것은 한부선과 고려신학교문제는 총회의 결정을 따를 것을 지시한다. 독선자들에게(고려신학교에 관계된 사람들) 강단을 허용하지 말라는 것도 지시를 한다. 이렇게 고려신학교를 제외시키려고 노회에 압박을 가하면서 경남노회를 삼분한다. 경남 노회는 부산지방, 경동지방은 마산과 통영, 경서 노회는 거창지방등이었다. 세를 갈라놓자는 것이었다. 한상동, 송상석, 주남선등을 갈라놓기 위해서였다. 총회의 허락도 없이 전권위원회에서 행한 일이었다. 경남에 노회가 다섯 개가되었다. 경남 법통노회, 중립노회, 세 개의 노회이다. 경남 노회 노회장인 이약신 목사는 이 일을 보고는 전권위원을 불신임하고 분리를 거부하고 정통노회를 따를 것을 선언한다. 경남노회의 온 교회가 전권위원회에 대해서 불법으로 선언을 한다. 삼분노회에 가담한 노회가 50여개인데 이것도 개인적인 것이었다. 경남법통노회는 김길창이 갈라져 나간 것은 불법이었다. 그리고 삼분 노회에 대해서 옛날부터 계승해 나오는 이노회가 법통노회이다.

그후 1950년 4월 1일에 대구 제일교회에서 36회 총회를 열게된다. 가장 혼란한 총회였다. 경남에 다섯노회에서 총대를 파송한다. 회원권이 문제였다. 삼분노회는 전권 위원들의 보고를 받기 전이고 법통노회 중립노회등이 문제였고, 그리고 조선신학교와 장로회 신학교의 문제였다. 박형룡과 김재준의 대결이었다. 5일간 싸움만 하게된다. 강단에서 폭력이 일어난다. 경찰이 동원되었다. 일을 진행을 못하고 변리원(7일)을 다시내게된다. 전권위원회 보고를 받지 않기로 했다. 나눠진 노회를 병합하고 별위원으로 해결하기로 하고 정회를 하기로 한다. 회의를 마치고 난 뒤에 제일 교회의 일반 신도들이 모여서 교역자들의 회개를 촉구하고 폭력을 행사한 사람들을 징계할 것을 요구한다. 그 뒤 6월 25일에 사변이 일어난다. 그 해에 12월 24일 제일 교회당에서 축하예배가 모였는데, 불이 났다고 고함을 질렀다. 이 때 어린이들이 압사를 당하는 사건이 생긴다. 이것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였다. 9월에 열기로 했던 속회를 열지 못하고 그 다음해인 1951년 3월에 총회가 부산 중앙교회당에서 열리게된다. 이 중앙교회에서 모이는 총회에는 일반 사람들이 참석하지 못하게 했다. 입장권을 발부를 한다. 참석을 제한 한다. 특별히 고신측 인사는 참여하지 못하게 했다. 경남 법통노회에서 보낸 10여명의 총대는 입장거절을 당한다. 그전에 만들어진 별위원이 법통노회 밖에 다른 노회를 조직했다. 그 노회의 총대가 참석하게 했다. 경남 노회는 교리적인 뚜렷한 이유, 정치적 뚜렷한 이유 없이 총회로부터 제외를 당했다. 경남법통노회는 정통을 그대로 계승을 한노회인데 제외를 당했다. 1952년 대구 서문교회에서 제 37 장로교 총회가 모이게 되었다. 이 때 12명의 경남 법통노회에서 총대를 보내게 되었다. 이렇게 일년을 기다린 것은 총회가 자기들을 받아줄 것을 위해서였다. 이렇게 경남노회는 총회로부터 축출을 당하게 된다.

총회에서는 장로회 신학교를 인준한 이후에 조선신학교와 내적인 갈등이 생겼다. 한경직 목사등 중간인물들을 통해서 화합을 시도하지만 실패한다. 고려파를 제거한 채, 장로회 신학교와 조선신학교의 폐교와 총회신학교를 세운다고 결정을 했다. 김재준을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이동안 이미 1947년에 조선신학교 안에서 학생들이 김재준 송창근 등의 고등비평에 대한 항의를 하고 51명이 총회에 진정서를 냈는데 이중에 30여명이 박형룡을 따랐다. 장로교 신학교를 세울 때도.... 이런 가운데 두 신학교의 폐교를 결정한다. 53년 총회에서 조신 측에서 따로 모여서 법통장로교라고 해서 한국신학교의 강단에서 한신이 출발된다. 장신과 한신은 대립하면서도 고려파를 잘라내는 것에서는 협력을 했다. 이 때 박형룡은 한 번도 고려파를 위한 발언을 하지 않았다. 그후 그는 교회일치운동의 위원회에 한경직과 함께 일을 해왔다. 그는 59년에서야 성동과 연동이 나눠지고 나서야 잘못된 것을 시인한다.

1998년 5월 27일

 

- 합동과 환원

우리가 역사를 살펴보면 역사의 현장에서는 사람들이 뛰고 있다. 사람들은 아무리 중생되었다고 하더라도 인간성은 부패성을 가지고 있다. 완전히 성화된 사람은 없다. 세상에서 험모할만한 신앙을 가지고 충성을 보인 사람들에게도 연약성이 자리를 잡고 있다. 그래서 인간을 바라보고 살면 실망을 한다. 아무리 성화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기 위한 원리와 시작이 있을 뿐 실수는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인간을 통해서 주님은 그의 교회를 돌보시고 이들을 통해서 역사하신다. 그들의 결함과 실수를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지만, 순간순간 덮어주신는 은혜를 통해서 다시 일어나는 일꾼들을 통해서 교회를 이끌어가신다. 이 합동과 환원을 통해서 인간의 나약함을 볼 수 있고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를 또한 볼 수있다. 주님의 관용하심과 이끄시는 손길을 살필 수 있다.

 

1951년에 36회 총회 속회에서(중앙교회) 경남노회 총대가 제외를 당했고, 52년까지 기다려서 37회 총회에서 대구 서문교회에서도 총대는 제외된다. 이 때 경남노회가 축출을 당한다. 그 후 경남노회를 중심으로 주변의 고려신학교를 지원하는 교회들과 함께 교회의 새로운 조직을 이루어야했다. 1952년 9월 11일에 진주 성남교회에서 57회 경남노회로 모여서 총노회를 조직할 것을 결의한다. 총노회는 총회를 이루기 이전에 모든 교회를 통합해서 부른 것이다. 이때 취지문을 작성했는데, 여기서 현재의 총회가 장로교가 아닌 방향으로의 흐름을 바로 잡기 위해서 총노회를 조직한다고 선언한다. 1952년 경남 노회이후에 고려신학교에서 삼일동안 부흥집회를가진 후 삼일교회에서 선포식을 하기로 한다. 교려파의 새출발이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 교회가 바른 출발을 하게된다. 53년도에는 총회에서는 한신이 독립해 나간다. 고려파를 잘라 낼 때까지는 모든 교권주의자들은(친일파, 자유주의자들)은 하나가 되었었다. 그전에 박형룡박사가 1948년 고려신학교를 5월에 떠나서 6월에 장로회 신학교를 세웠다. 49년에 장로회 신학교 직영허락을 총회로부터 받게된다. 그러자 마자 총회 안에 두 대립그룹이 생긴다. 이미 46년에 총회직영으로 조선신학이 허락을 받았었기 때문이다. 내부적 투쟁이 있었지만, 고려신학교를 잘라내는 데는 하나가 되었다. 그후 박형룡그룹과 김재준 그룹은 함께 할 수 없었다. 그래서 53년에 한신이 독립을 한다.

고려파 교회가 52년 총노회를 조직하고 1956년에는 1946년에 고려신학교가 세워지고 회개와 정화 교회재건을 부르짖기 시작한 해이고 그 후 10년 기념 연도가 1956년도이다. 진리운동 10주년 기념으로 부흥집회를 열고 부흥회 다음에 이 때까지 내려왔던 총노회를 총회로 개편하기로 결의를 한다. 56년이 되었을 때 이해에 교회 안에 이상 기류기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 10년동안은 한국교회에 회개와 정화와 재건을 부르짖고 뜨거움을 가지고 교권주의에 대항해서 싸워왔기 때문에 한마음이었다. 56년도 10주년을 기념할 시기에 내적으로 잠재해 있던, 원수와 싸우는 일에 하나가 됨으로 이해되어 왔던 것이 노출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첫 째로 교회 소송문제이다. 이 문제에 대한 이견은 이전에도 있었지만, 이 때 강하게 나타난다. 1951년도 총회가 고려신학교를 중심으로 하는 경남노회를 제거할 때 이미 총회에 속하지 아니하는 교회들의 재산은 총회가 소유한다고 하고 총회후 9월 달에 총회의 교회접수 위원들이 초량교회(한상동 목사 담임)의 총회로의 명도를 요구한다. 교회를 점령하러 왔을 때, 교회접수 위원중 세력있는 양장로(초량교회 당회원)가 앞장선다. 그 후 한 목사님은 교회를 내어주지 않을 때 교회 안에 소동이 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울 것을 우려해서 9월 13일 오전 예배를 드리고 저녁 예배는 다른 곳에서 보게된다. 500여교인들 가운데 20명을 제외하고 거의 다 목사님을 따라 나온다. 그후 총회는 초량교회의 명도를 성공하고 난 뒤에 다른 교회의 접수도 쉬울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명도를 거부하는 교회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몇사람이라도 총회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할 때 문제가 된다. 마산 문창교회가 문제가 되었다. 교회의 명도에 대해서 수용하는 세력이 있었다. 문제가 되었을 때 노회가 모여서 논의를 한다. 결론은 그 교회의 형편을 따라서 처리하기로 한다. 명도에 응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응소를 하게된다. 이 문제를 위해서 송상석 목사님이 담임으로 가셨다. 법적으로 해결을 하려한다. 처음에는 고려신학교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다수 였다. 그러나 교회안에서 싸움에 계속되자 교회 안에서 신령한 은사의 분위기가 흐려졌다. 송목사는 행정적, 법적으로는 유능했지만, 목사로서는...... 그런 사건에 희말리는 가운데 목회자로서의 역할을 다 못하자 일부 세력이 나가서 제일 문창교회를 이루게 된다.(현 신마산 교회) 여기에 조숙옥 권사도 있었다. 그 다음에는 오동동 교회(동광교회)가 떨어져 나가게된다. 이런 가운데 명도를 요구하는 세력이 커지고 법통노회를 지지하는 세력이 작아졌다. 소송을 하는 중에 해방후, 예배를 두 부분이 나누어보는 교회는 마산 문창교회가 처음이었다. 뒤에 교인들의 숫자에 따른 결정을 하라는 판결이 났지만, 우리에게는 피해가 많았다. 결국 송상석 목사님은 본 교회를 내어주고 별관만 차지하게 되고 후에 완전히 나오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교회 안에서 법정 싸움을 반대하는 입장이 강하게 나타난다. 이 입장에 있었던 박윤선 목사님이었다. 고전 6장 1절을 근거로 세상 앞에서 교회문제로 송사하는 것은 좋지 않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포기하자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모든 교회가 여기에 따르지는 않았다. 이것은 교리적 문제였다. 논쟁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결정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이런 문제가 지속되는 가운데, 1956년도 진리운동 10주년 기념때 총회 앞에서 말씀을 하신다. 지난 날을 돌아보고 부족한 것을 바로 잡기 위해서 소송을 포기하자고 제의 하신다. 그러나 해결되지 않는다. 이 때 한상동 목사님은 자기는 포기하셔 놓고 박윤선 목사님의 주장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지지를 하지 않았다. 이 문제가 첨예하게 되립되고 57년이 되었을 때, 총회에서 이 문제를 그만 두어야 된다는 박윤선 목사님의 입장이 강하게 나타난다. 주로 북에서 오신 분들이었다. 그러나 총회에서 통과되지 않자 이 분들이 행정보류를 한다. 소송을 그만 둘 때까지 총회와의 관계를 끊을 것을 선언 한다. 그 때 사실상 고려파를 떠나게 된다. 이 때 박윤선 목사님은 소송 문제 외에도, 제도상의 모순을 시정하자고 제시했다. 당시에 신학교가 처음부터 사설이었다. 교회의 지원을 받았지, 총회의 직영은 아니었다. 한 상동 목사를 중심으로 사립이사회가 있었다. 이중에 반은 교수였다. 이사장이 한상동목사 였다. 박윤선 목사에게는 이것이 제도상의 모순이었다. 이사들이 교수이니까 교수들이 요구를 이사회에 바로 말하기도 어려웠다. 조금의 시정이 있었지만, 완벽하지는 못했다. 박윤선 박사는 57년에 소송을 그만두지 않았기 때문에 고신을 떠나서 서울에서 개력신학교를 개교하신다. 그러자 고려신학교는 흔들리게 되었다. 그분을 다시 모셔오기 위해서 이사회가 모이고, 돌아올 것을 간곡하게 부탁한다. 첫학기를 서울에서 신학교를 하시다가 9월에 다시 고려신학교로오셨다. 그후 이사회와 박윤선 박사와의 관계를 원만하지 못했다. 박 박사는 송송문제에 대해서 뜻을 굽히시지 않으셨다. 송상석 목사님과 지면을 통한 대립, 한상동 목사님과의 관계등 문제가 있었다. 그런 가운데 59년도에 박 윤선 목사님이 12월에 화란에 유학을 가셨다. 53년에 화란에서 공부를 하시는 중 부인의 교통사고로 6개월 만에 돌아오셨다. 이 때 박사 논문에대한 방향을 받으시고 오셨다. “신약과 이교”라는 논문을 계속 써오셨다. 그 뒤 59년도 12월에 화란에 가시기 위해서 미구 웨스트민스터에 가셔서 논문을 완성하려 하셨다. 그러나 화란에서 논문을 받아주지 않자 한국으로 나오셔서 학위를 포기하신다. 그후 주석 쓰는 일에 전념을 하신다. 그러나 충격이 있었다. 60년도 7월에 주일 성수 문제가 생긴다. 한 선교사가 안식년을 맞아 고국으로 돌아가셔야 하는데, 배가 주일날 떠나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교장으로서 박박사는 택시를 타고 부두로 가셔서 전송을 하고 교회로 가시려 하셨다. 예배시간에 늦고 말았다. 늦게 차를 타고 오시는 것을 성도가 보았다. 이 말이 나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이것이 큰 문제였다. 이것을 이사회에서 해명을 했다. 사정을 설명을 했을 때, 공적 사과를 요구했다. 그러나 박윤선 목사는 학자적 양심을 가지고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성경과 예배 모범등을 근거로 이것은 교리적으로 잘못되지 않았음을 주장하신다. 이사회는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견이 나누어지고, 결국 1960년 9월에 총회를 마쳤을 때 교장직을 해임하고 본인이 책임있는 태도를 취할 때 까지 교수직을 해임했다. 이것은 당시의 분위기를 이해한다 할지라도 15년동안 고려파의 터를 놓고, 헌시을 한 분이신데, 그리고 그분이 신학적으로 근거를 제시했는데, 이사회에서 아무도 그를 위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그후 조그마한 오두막에서 생활 하시면서도 글을 계속 쓰셨다. 그후 합동 때 밖에 계시다가, 우리의 환원 후 총회신학교에 잠시 계시다가 교권 문제등으로 다시 나와서 제자들의 권유로 합동신학교를 설립하신다.

60년에 고려파가 위기를 맞았을 때, 장신 때도 위기를 맞게 되었을 때 서로의 필요를 위해서 하게 된 것이 합동이었다.

고려파에는 1960년도 두 번째 학기(9울)에 박윤선목사님이 떠나시고, 고려신학교는 공백기를 맞게된다. 이미 주일 사건이 7월에 생기자마자 이사회의 분위기가 좋지 않게 되었다. 이미 분위기가 박박사님이 계시기 어려운 분위기 였다. 이 런때, 신학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온 교회가 이 분위기에 휘말리게 되었다. 신학교가 문제가 있다, 이사회와 박박사와의 문제가 있다는 말을 듣고 온 교회가 불안한 가운데 있었다. 당시 예장에서는(현 총신) 고려파 축출후, 53년도 한신이 나가고 난 뒤 WCC와 NAE간의 대립이 있었다. NAE의 대표적인 인물이 박형룡이었고, WCC에는 한경직이 있었다. 두 사람의 긴장이 강하게 자리를 잡게 되었다. 한경직은 신앙적으로는 바른 인물이었지만, 애큐메니칼의 경향을 보였다. 1958년에 큰 문제가 생긴다. 3000만원사건이다. 박형룡 박사가 거기 갈 때부터 선교사와 함께 일을 할 뜻을 가지고 가셨다. 그는 항상 네 선교부와 정상적인 관계를 가지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그는 NAE 에 있었기 때문에 한계가 있었다. 그런 가운데 신학교 건축을 위해서 미국 선교회등으로부터 희사받은 돈이 3000만원 정도가 있었다. 남산의 신학교 부지를 사려고 했다. 사기를 당하고 돈을 날린다. 자기의 도장을 찍었기 때문에, 총회에서 문제가 되었다. NAE가 밀리는 형편이 되었다. 59년도에 있어서 이사를 뽑는데, 이사의 수가 WCC측이 다수를 차지했다. (40대 17). 그리고 59년도 총회에서 특히 서울에 있는 노회가 WCC와 NAE 로 나누어 져있었는데, 총대가 문제였다. 투표를 하니까 WCC측이 월등히 많았다. 혼돈이었다. NAE에서 11월 24일까지 정회를 하자는 동의를 한다. 그런데 동의에 대해서 항의가 들어오지만, 동의 제청하고 총회장이 전략적으로 정회를 시킨다. 그러자 WCC측은 선교사들과 함께 연동교회에서 총회를 가지게 된다. 그래서 연동파가 생긴다. 그리고 NAE측은 정회를 하고 11월 24일에 성동교회에서 총회를 계속한다. 성동파가 생긴다. 성동측의 입장이 어려워졌다. 전 한구교회 앞에 성동측이 복음주의나 진리를 위한고하는 것을 주장하기가 어려워졌다. 특히 3000만원 사건과 연류되어 환경이 복음주의 주장이 희석되고 정치적 싸움으로만 보였다.

박형룡 박사는 WCC와 협력하여 학교를 세우려 했지만, 돈도 잃고, 선교사들과 사이도 멀어지고 홀홀 단신이 되었다. 또 이전에 메이천, 한부선등을 분리주의자라고 할 때 박형룡은 함구를 하고 절연을 하고 지내왔다. 그래서 입장이 난처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난국을 헤쳐나가기 위해서 성동측이 복음주의적이라는 것을 대외에 나타내기 위해서는 고려파와 손을 잡는 길 밖에 없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래도 외국과의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CRC등) 그리고 대외적인 인식도 보수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전에는 멸시를 했지만, 이제는 관계를 맺으려 했다. 59년에 장신이 그렇게 갈리고 나서 60년도에 교회의 나갈 길을 모색을 하다가 이해의 8월에 우리교회의 지도자들(주로 신학교의 이사들)과 박형룡박사들과 서울에서 만났다. 저쪽에서 먼저 합할 것을 부탁하자, 우리측도 박윤선박사가 나가고 허탈한 가운데 있었기에 이에 응하게 된다. 저쪽에는 박형룡, 한철하, 명신홍 등 학자가 있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는 합하면 신학적인 문제가 해결되고, 저쪽에서는 정통 복음주의라는 내외적인 명분을 가지게 되기 때문에서 합의 한다. 9월에 합동을 전제로 하고 총회가 모였다. 합동 추진위원회를 만든다. 정회를 하고 11월 13일에 흥천교회에서 속회를 하고 성동교회의 합동총회에 참여하기로 결정을 한다. 합동추진 위원회의 보고를 듣고, 합동총회를 하게된다. 이것은 부끄러운 역사이다. 과거와 뿌리를 가진 정통을 잇는다는 교회가 5개월 안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합하게 된 것은 합리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들을 때 우스운 일이다. 교파의 합동이 쉬운 일이 아니다. 해결할 일이 많이 있었다. 축출에 대한 온 교회 앞에서의 사과와 수용이 선행되어야 했다. 결국 이것은 교권적 행동이었다. 교회의 동의를 얻어야 했었다. 미국에서도 합동이 있었다. 그러나 거기서는 10여년 이나 걸리거나 합동에 실패할 만큼 신중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교회의 동의를 얻지 않고, 교회의 지도자의 독단으로 처리된 것이 문제였다. 너무 빨리 신중함이 없이 처리된 것이 문제였다. 합동이라는 것 때문에 흥분이 되어서 깊이 서로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결국 문제가 생겼다. 신학교 문제이다. 총회신학교와 고려신하교의 문제였다. 흥천교회에서 합동추진 위원회의 보고에서 신학교 문제는 총회직영으로 단일화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모였을 때 우리의 총회장이 송상석 목사였다. 신학교 단일화 하는 것은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총회직영 신학으로 일원화하기로 하자고 고쳤다. 그러나 이것은 성동측에서는 합의되지 않은 것이었다. 이 개정안을 내어 놓자 토의도 없이 그대로 통과되었다. 우리가 제시한 수정안이 통과된 것이다. 총회직영으로 일원화한다(서울에서는 총회신학교, 부산에서는 고려신학교)는 것이었다.

또 다른 문제는 신학교 이사는 각각이 12명으로 하되, 이사회에서 선정을 해서 총회의 허락을 받는 것으로 결정을 한다. 이것도 깊이 생각지 못한 것이다. 이사들 선정은 잘 된 결정이었다. 왜냐하면 저쪽이 숫자가 많았기 때문에 이사회에서 선정하는 것은 공평한 것이었다. 이것이 협동서약이라면, 하나가 될 때까지 계속되어야 했다. 그런데 1960년도 12월 13일 합동을 하고 1961년도에 한상동 목사님이 회장이되고 9월에 총회가 모인다. 그러데 다른 임원은 한 사람만 고려파에서 나왔다. 그 다음에는 전부 성동측이었다. 이 때 이사회 보고에서 성동측에서는 10사람, 고신 측에서는 6사람이었다. 이것은 합동 원칙에서는 12사람씩 하기로 했는데, 이것을 어긴 것이었다. 또 우리측 6명가운데서 4사라만, 4년제이고 두사람은 2년제이다. 2년이 지나면 숫적으로 큰 열세에 이르게 된다.

또 총회에서 신학교 단일화 청원이 들어왔다. 또 충성도 호남의 50여명의 신학교의 단일화에 대한 긴급 동의안이 들어왔다. 이것을 알아챈, 경남 노회측은(송상석 목사) “일원화 원치”을 따라서 고려신학교를 유지해 달라는 동의를 하게 된다. 경남 노회측의 건의를 먼저 상정해야 되는데, 총회직영의 단일화를 먼저 상정하게 된다. 숫적으로 우세한 성동측의 건의가 받아들여진다. 한상동 목사가 사회였는데, 합동서약을 말하지 않고 통과를 시켜버렸다. 61년 12월에 이사회에서 단일화할 것을 명령했다. 고려신학교 교수들이 서울에 올라가서 단일화 했다. 서울의 총신은 본교, 부산은 분교가 되었다. 3학년은 62년에 서울로 올라가고, 신입생은 뽑지 않기로 결정을 했다. 고려신학교가 없어질 위기였다. 이것은 합동원칙의 위반이라고 판단하고 학생들이 항의를 한다. 실패하고 3학년은 서울로 올라가게 된다. 고려신학교의 간판이 떨어지고 총회신학교 분교라는 간판이 걸렸다.

62년 9월 14일 한상동 목사님이(이 때는 총회장이 아니었다. 부이상이었다. 이사장은 성동측의 노진형 목사였다.) 부산 분교에 오셔서 채플을 마치고 난 뒤에 선언을 한다. “옛날 고려신학교는 복교를 합니다.” 폭탄선언이었다. 이것은 이전의 고려신학교 이사들과 의논을 한 적도 없었다. 신학교 단일화를 반대하던 송상석 목사와도 의논하지도 않았다. 단독으로 선언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그 때의 형편을 보면 이해 할 만하다. 이 때의 이사회가 모여도 문제가 해결될 수 없었다. 그 동안의 합동반대, 단일화 반대에 침묵을 하시다가, 그들을 만날 형편이 되지 않았다. 아마 말없이 자신이 혼자 책임을 지고 이전으로 돌이키려고 했던 것 같았다. 학생들이 은퇴를 요구했을 때 은퇴의사를 받아들인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학교가 복교를 하자, 학생들중에서 지지하는 파와 반대하는 파가 나온다. 홍반식 교수(반대)등 교수들 중에서도 반대파와 찬성파가 있었다.

문제는 재산에 관한 것이었다. 상대측에서 등기를 하려 했지만, 한상동 목사님의 등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확보를 할 수 있었다.

63년도에 와서 정상을 찾게 된다. 그리고 결국에는 서울에 갔던 학생들 가운데서 5명이 돌아왔다. 17회 졸업생, 이지영목사등이다. 이분들이 61년도에 내려와서 강도사 시험을 쳐야 되는데, 교회가 아직 나누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강도사 시험을 받아주지 않는 일이 있다. 9월에 총회에서 교회 환원이 된다. 이 때 500여(?) 교회중에 100여(?) 교회를 잃게 된다. 그리고 64(?)년도에 사립 운영에서 총회직영이 되었다. 그리고 각노회에서 지원을 하게된다.

이것은 우리의 잘못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여기에 교회의 터가 있었기 때문에 사람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한국교회를 위해서, 세계교회를 위해서 우리 교회를(고려파를) 유지시켜 주신 것이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