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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루터와 칼빈의 성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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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 신학의 의인론(義認論)과

성화론(聖化論)의 재조명

 

 

 

 

* 신학과 교수

오 영 석*

 

 

차 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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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M.루터의 의인론

Ⅰ. 서론:의인 교리를 이해하

기 위한 전제

Ⅱ. 루터가 새롭게 발견한 "하

나님의 의(義)"

Ⅲ. 믿음에 의한 의인(義認)의

성격

Ⅳ. 의인(義認)과 선행(善行)의

관계

B. J.칼빈의 의인론과 성화론

Ⅰ. 의인(義認)론의 본질

Ⅱ. 성화론의 성격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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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M.루터의 의인론

 

I. 서론:의인 교리를 이해하기 위한 전제

 

루터의 종교개혁의 원동력은 이신 칭의(以信稱義 justification by faith) 교리였다. 그 교리는 그의 개인적인 깨달음과 경험에서 확인된 순전히 신앙의 문제를 다룬 것이었지만 중대한 정치적인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 교리와 관련된 신학적인 문제들로 독일 교회는 카톨릭 교회와 루터교회로 분열되었고 30년 전쟁을 치렀다. 이 교리를 중심으로 한 신학적인 이슈들은 유럽 전역으로 불길처럼 확신되었다. 이 교리는 특히 독일의 모든 가정, 여관과 시장에서까지 논의되었다. 이 교리를 지지하기 위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다. 그래서 이 교리는 유럽의 정신사와 정치사, 학문, 법학, 문학의 영역과 자연에 대한 인간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종교의 인식과 정치-사회적인 상황이 확연히 달라진 오늘날 이신 칭의 교리는 현대인들에게 낯설고 이해될 수 없는 것이라고 폴 틸리히(P.Tillich)는 말한다.

"개신교는 이신 칭의론을 위한 투쟁에서 태어났다. 이 교리는 현대인들에게 낯설다. 심지어 개신 교인들에게도 그렇다. 그 교리는 너무 낯설어서 현대인들에게 그것을 이해시킬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다. 현대 지성인들까지도 그것을 거의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이신 칭의론이 현대인에게 낯설게 되었다는 틸리히의 견해는 이신 칭의의 교리에 포함된 진리와 깊은 뜻이 무용지물이 되었으므로 그것을 폐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교리가 현대인에게 낯설게 되었다면 그 교리의 진정한 내용과 의미가 현대인들의 인식의 지평과 경험 속에서 바르게 해석되고 전달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문제는 이신 칭의의 교리만 아니라 신학의 모든 문제들은 현대인이 추구하는 삶의 의미 문제들과 대화하면서 관련성 있게 설명되고 적용되어야 한다. 복음은 사람들을 바로 그들이 서 있는 자리에서 만나고 그들에게 접촉점을 갖도록 해야 한다. 사람들의 자기 이해와 삶의 경험을 변화시키려면 복음의 선포자는 청중들의 소망과 절망, 두려움과 기대를 알아야 하고 복음의 생명력이 그들의 경험과 인식의 지평과 먼저 만나도록 힘써야 한다.

우리가 개혁자들의 의인론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교리와 경험, 교리와 실천의 깊은 상관관계가 주목되어야 한다. 교리는 추상적인 이념과 관계하지 않고 실존적인 진리 체험과 관련된다. 교리는 감정의 흥분이나 체험을 통해서 한 번 신나게 이해하고 곧 잊어버리기 쉬운 진리의 내용을 반성하고 정선된 문장과 언어로 형식화하여 그것을 보존하고 전승하려고 한다. 그것은 어거스틴이 적절하게 비유로 표현한 것처럼 밭을 지켜 주는 울타리이다. 여기서 밭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한 살아 계신 하나님과 그리스도인이 대면하는 풍요로운 구속적인 만남을 뜻한다. 교리는 이 만남의 경험을 개념으로 표현하고 언어의 옷을 입혀 구체화하고 그것을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전승한다. 그러므로 교리를 전승하고 전수하는 사람들은 교리의 공식과 규격화된 개념을 통해서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생생한 만나는 현실 경험을 주목해야 한다. 루터는 "탁상 담화"에서 "체험만이 신학자를 만든다고" 하고 "설교자가 하나님이 친절하고, 달콤하고, 자비하며 인간을 돕는다고 백번을 설교할지라도 설교자가 체험을 통해서 그것을 맛보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고 했다. 신앙의 확신은 신앙의 주체자의 직접적인 깨달음과 산 경험을 통해서만 인간에게 이른다.

루터가 깨닫고 확인한 이신 칭의 교리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살아 계신 은혜로운 하나님과 만나는 생생한 현실이 녹아 있다. 그 안에는 옛 인간을 변혁하고 역사를 뒤흔들고 새롭게 하는 깨달음과 산 경험이 담겨 있다. 이 교리는 그러한 경험이 실재로 일어났고 다시 일어나며 그것의 결과는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시도이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을 말로 옮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의 진실된 내용을 개념적으로 표현하고 전달하는 것은 절실히 필요하다.

다음으로 의인론을 이해하면 성서의 빛에서 인간이 누구이며 그의 본성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복음의 빛에서 보면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본성이 죄로 인하여 치명적인 손상을 입고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이로 인하여 인간의 행복을 위하여 필수적인 그 무엇이 결여되어 있다. 우리 몸이 바이러스에 감염되듯이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적대적인 세력이 침입하여 우리를 치고 에워싸고 있다. 그래서 인간의 근본 상황은 의사의 치료를 필요로 한다. 그는 죽을 병에 걸린 환자와 같다.

그러나 복음은 죽을 병이든 환자와 같은 인간에게 기쁜 소식이다. 그것은 치명적으로 손상을 입고 심각하게 병들고 훼손된 인간의 본성이 은혜와 사랑의 하나님에 의하여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을 선포하고 약속하며, 그것을 현실로 만들기 때문이다. 복음의 선언은 죽음과 파멸에 듣는 약과 같다. 이것이 이신 칭의 교리가 선언하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이신 칭의는 환희의 선언이다. 하나님이 우리가 스스로 처치할 수 없고 치료할 수 없는 고질병인 죄를 진단하고 치료(칭의)한다. 우리는 그 치료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이신 칭의 주제는 우리가 에덴에서 잃었던 것을 겟세마네에서 다시 찾은 것에 관한 것이며 병든 인간 전체가 치료되어 건강하게 되며, 결과적으로 개인과 사회가 평화와 정의 안에서 행복하게 된 것을 내용으로 한다.

 

II. 루터가 새롭게 발견한 "하나님의 의(義)"

 

1. 루터의 영적인 시련과 투쟁

 

자신의 구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어거스틴의 수도원에 들어간 젊은 루터는 하나님이 인간과 맺은 계약을 성실하게 이행하여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구원을 획득할 수 있으리라고 여겼다. 그 계약은 조건이 충족되어야 효력이 발생한다. 그 조건을 만족시키려면 인간은 겸손하게 믿고 율법의 의를 수행하면서 하나님 앞으로 나가면 된다. 그러면 하나님은 계약 관계에서 요구된 의를 훼손했으므로 불의하다고 생각한 자를 의롭다고 하고 받아들인다고 루터는 생각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작은 노력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 하나님과 맺은 계약의 조건을 충족시키는 믿음과 겸손은 인간의 몫으로서 신적인 은혜 없이도 이룰 수 있다고 당시에 전제되었고 루터도 그렇게 믿었다. 믿음과 겸손과 율법의 의라는 조건을 충족시킨 사람은 누구나 의롭게 한다는 약속에 근거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의인(義認)을 요구할 수 있다.

이때 루터는 하나님의 의를 엄격한 재판관의 속성으로 이해했다. 그에게서 하나님은 인간을 감독하고 인간과 맞서서 인간이 의인의 기본 조건을 만족시켰는가 못했는가를 공정하게 심사하여 판단을 내리는 판사였다. 그래서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의인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의 도움과 은혜 없이 동일한 조건을 만족시켜야 했다. 루터 당시에 일반화된 이 주장은 하나님의 은혜 없이 자신의 선행을 통행서 의롭게 될 수 있다는 펠라기우스의 견해와 일치한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정의롭게 판단하므로 정의를 요구하는 거룩한 하나님 앞에 혼쭐났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에 부족한 존재로 느꼈고 구원받기에 충분한 봉사와 헌신을 한다고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점점 죄인들에게 분노하고 의를 요구하는 엄격한 재판관으로 생각되었다. 루터는 적의와 진노로써 죄인들에게 다가서는 하나님 앞에서 심한 공포감을 가졌다. 하나님은 의를 사랑하고 그 자신이 의이다. 그런데 루터는 자신의 죄가 하나님을 모욕하고 그의 의를 손상하고 그를 공격하고 해를 끼친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의를 얻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자신의 죄악성을 깊이 느낀 루터는 하나님의 불타는 진노에서 구원을 얻기 위하여 당시 교회와 신학에서 제시된 은혜의 수단을 성실하게 사용하였다. 그는 모범적 수도사로서 수도사의 계율을 가장 성실하게 지켰고 고행을 하고 자신의 몸에 체형을 가하기도 했다. 그는 수도원에서 사랑, 소박, 자선, 정절, 가난, 순종, 금식, 철야 고행과 기도에 헌신하여 자신을 구원하려고 노력했다. 이로써 그의 몸이 극도로 쇠약해졌다. 수도원의 규칙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는 수도자가 있다면 그는 바로 루터 자신일 것이라고 토로했다.

그러나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정의로운 거룩한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고,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키는 자신의 죄가 고백할 수 있는 한도를 넘어선 것을 보았다. 죄는 인간들이 고해 성사를 통해서 고백할 수 있는 행동과 생각들 이상이라는 것을 느꼈다. 왜냐하면 인간이 본성 자체가 타락하여 부패하였기 때문이다. 용서를 받아야 할 것은 특수한 잘못이나 죄목들이 아니고 인간 전체라는 것을 스콜라 신학의 참회 제도는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특수한 과오를 참회함으로써 죄의식을 없애주는 고행의 성사들이 오히려 루터를 절망하게 했다.

그래서 루터는 "칭의에 관한 토론"에서 참회가 사죄와 의인의 원인이라는 스콜라 신학의 주장을 부정한다. 악마도 참회하지만 아무런 결과를 얻지 못했다는 것이다. 사죄와 의인은 그리스도가 돌보아 주어야 하는 것이며 성령의 역사이고 하나님의 의지에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베푸는 은혜와 구원에서 참회가 일어난다. 이것은 스콜라 신학의 근거를 무너뜨리는 주장이다.

루터는 참회를 할수록 거룩하고 의를 요구하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티끌, 잿가루, 죄인이라는 의식으로 전율했다. 그는 거룩하신 분에 대한 두려움, 무한자에 대한 공포가 날벼락처럼 그를 후려쳤으므로 그는 미사를 집전하면서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후들후들 떨었다. 그래서 자제하면서 제단을 붙들고 간신히 설 수 있었다. 지고한 하나님 앞에서 루터는 넋을 잃었다. 이런 그의 경험을 표현하기 위하여 번개와 같은 기습 전쟁(Blitzkrieg)이라는 말이 사용된다. 이러한 경험과 감정은 젊은 루터에서만 아니라 성숙한 그에게서도 존재의 기반을 뒤흔드는 믿음의 시련, 믿음의 시험으로 나타났다. 루터는 자신의 영혼의 구석구석이 말할 수 없는 쓰라림과 공포와 슬픔으로 가득 차서 깊은 흑암 속에서 신음하였다. 그 자신이 완전히 사멸될 것 같으며 모든 뼈들이 재로 변할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루터의 이러한 고통은 신비가들이 영혼의 어두운 밤이라고 지칭하는 것과 흡사하다. 그는 자신의 영적인 이 시련을 "안페히퉁(Anfechtung)"이라는 단어로써 성격화했다. 그것은 의심, 아픔, 겁, 공포, 절망, 버림받음, 허무, 황량함, 자포자

기의 현상으로 루터의 마음을 엄습하곤 하였다.

제베르크(E. Seeberg)에 의하면 이 안페히퉁은 하나님의 시험이고 인간이 자신에 대한 자연적인 사랑을 넘어서 "순수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인도한다는 것이다. 순수하게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인간이 자신을 위해서나 선물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 때문에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시련은 마치 요나가 삼일 동안 고래의 뱃속에서 지옥을 경험한 것과 같다. 요나는 그 시련에서 자신을 부인하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빛을 갈구하였다. 시련은 이처럼 하나님을 찾고 만나도록 한다. 하나님은 살리기 위하여 먼저 죽이고, 높이기 위하여 낮아지게 한다.

이렇게 거룩한 분에 대한 공포 때문에 영적으로 시련을 당하여 고뇌 속에서 절망하던 루터는 성서에서 "하나님의 의"라는 개념을 보면 견딜 수 없었다. 로마서를 읽으면서 빛을 얻으려 했지만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롬 1:17)는 구절에서 다시 불안에 사로잡혔다. 그는 인간들에게서 의를 요구하고 의를 행하지 못한 죄인을 정죄하고 심판하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런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었다. 루터는 하늘의 보좌에서 죄인을 심판하는 전능한 그리스도도 사랑할 수 없었고 하나님을 미워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신성모독이라고 할 정도로 하나님을 미워하기까지 했다고 고백하였다. 그렇지만 루터는 포기하지 않고 그에게 은혜스러운 하나님을 얻기 위하여 투쟁했다.

 

2. 복음의 의(義)를 향하여

 

이렇게 하나님의 의를 발견하고 구원을 얻기 위하여 사투를 벌리고 있는 루터에게 슈타우피츠(Staupitz)의 권유는 그가 새로움 돌출구를 발견하는 데 기여했다. 슈타우피츠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을 추종했지만 신비주의에 관심했다. 그는 참된 회개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의에 대한 사랑으로 시작하는 것이지, 공포와 자기애로써 시작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참된 회개는 모든 상황에서 혹독한 시련과 고통을 통해서 주도권을 갖는 자비한 하나님에 의하여 시작된다. 그는 그리스도의 상처는 포괄적인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라고 루터에게 가르쳤다. 그는 구원을 얻기 위해서 인간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매달렸지만, 은혜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를 관심 했다. 이러한 사고는 고통하는 루터에게 큰 영향을 끼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을 새롭게 이해하는 데 기여했다.

루터는 슈타우피츠의 권유에 따라서 신비주의자들의 저서를 읽으면서 하나님의 의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되었다. 루터가 연구한 신비주의자 타울러(Tauler)와 <독일 신학>에서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표현하였다. 하나님의 의라는 것은 인간의 모든 업적을 초월한 것으로서 초자연적이며 완전한 것이었다. 그 의는 인간은 무(無)가 되고 하나님이 인간 안에서 전부가 되는 것 안에 있었다. 인간의 모든 선행보다 근본적으로 우월한 의의 개념은 신비주의 신학에서 특별한 자리를 차지했다. 인간이 의를 얻으려면 자신과 세계의 모든 것에서 일탈해야 한다. 그것은 자신에 대하여 죽은 것이다. 자신 밖으로 자신을 넘어서는 전환이 일어나야 한다. 자신을 선한 가치 있는 존재로 여기는 사고를 철저히 폐기해야 한다. 의는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중심에 살 때만 일어난다. 신비주의자에 의하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의는 그가 선사하는 의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어느 정도 마음의 안정을 얻었다 그것이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사는 것 같은 의미이다.

루터는 시편을 강의하다가 22편에서 큰 깨달음을 얻었다. 시 22편은 그리스도가 십자가 처형을 당하면서 울부짖는 말씀으로 시작한다. "내 하나님이여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 전능한 하늘의 왕이 "버림을 당했다"는 구절에서 루터는 깊은 충격을 받았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에게서 버림을 당했다는 상태와 그 경험은 루터의 그것과 일치했다. 왜 순수하고 강한 그가 버림을 당한 것인가? 무지개 위에 앉은 재판관이 왜 죄 없이 버림을 당했는가? 그것은 루터가 당하고 있는 견딜 수 없는 안페히퉁(Anfechtung, 시련)이었는데 그리스도가 그것을 이미 체험한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루터가 당할 것을 이미 당한 것이다. 진리만이 거짓을 심판하고 정의만이 불의를 심판할 수 있는 이상 그리스도는 정의로운 심판자이다. 그런데 그가 죄인처럼 단죄되고 처형을 당하고 죽고 지옥으로 간 것은 무슨 이유인가? 그리스도는 왜 이런 절망을 끝까지 맛보았는가? 우주의 유일한 재판관이 십자가 위에서 버림을 받은 자가 되었다는 사실로 그는 놀라운 충격을 받았다.

루터는 시편 연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의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갖으면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롬 1:17)는 바울의 말과 그의 속죄론을 깊이 탐구하였다. 그는 죄인을 대신한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것의 구속론적인 의미를 이해했다. 그는 죄인을 심판하는 그리스도 자신이 그 심판하는 행동 속에서 심판받고 처형되어야 할 죄인과 스스로 하나가 되어서 죄인의 죄악과 그 죄과를 담당하고 극복한 것을 보았다. 그리스도가 버림당한 것은 의로운 심판자인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원수된 인간의 상황으로 뛰어들어 죄로 인한 인간의 비극적인 운명과 결과를 그 자신이 떠맡아 청산하고 하나님과 화해한 새 존재를 창조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하나님의 진노의 불로 소멸될 죄인 대신에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처형을 당하므로 죄인의 죄와 그 저주스러운 결과가 해결된 것이다. 이제 죄인은 아무런 비용을 치르지 않았지만 그리스도 자신이 값비싼 희생으로 죄의 지배에서 해방되어 의롭게 인정되어 참된 삶을 위한 소망의 문이 활짝 열린 것이다.

이로써 루터는 몸부림치며 찾았던 "은혜스러운 하나님"의 모습을 찾았다. 죄인을 심판하는 공포의 대상인 하나님이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무한한 자비의 하나님으로 나타났다. 위협의 하나님은 동시에 자비의 하나님이고, 폭풍의 하나님은 이제 죄인을 불쌍히 여기고 구원의 사랑으로 인도하는 자애의 아버지로 인식되었다. 죄인에게 의를 요구하고 심판하는 하나님 자신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인을 위하여 정의를 창조하는 하나님이었다. 이것은 루터가 이전에 깨달을 수 없었던 하나님의 참된 모습이었다. 하나님은 죄인들에 대한 순수한 자비를 통하여 자신의 의를 나타냈다. 여기서 루터의 하나님 이해에 결정적인 변화가 초래되었다. 이것은 그가 이전에 깨달을 수 없었던 하나님의 참된 모

습이었다. 그래서 루터를 괴롭힌 하나님의 의는 이제 그의 축복이 되었다. 그것은 복음으로서 이해된 기쁜 소식이 되었다. 이전에 복음서와 바울의 서신 속에서도 하나님의 의를 발견하고 영적으로 불안했던 루터는 이전에 하나님의 의라는 말을 증오했던 정도만큼 이제 그 말을 더 환영하고 계속하여 사랑하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의라는 바울의 표현에서 복음의 의를 발견하였다. 그는 생의 마지막 해에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바울의 로마서를 이해하려고 몹시 애쓰는 내게 가장 큰 장애물은 <하나님의 의>였다. 그것은 이 의라는 말을 하나님 자신이 의로운 분이고 따라서 불의한 사람을 공정하게 처벌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나는 수도사로서 흠 잡을 데 없게 살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여전히 고통스러워하는 죄인이었다. 나의 공로로 그의 분노를 해소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나는 공의롭고 분노하는 하나님을 사랑 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를 미워하고 불평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바울을 붙잡고 늘어지면서 그의 말에 무슨 뜻이 담겨 있을까 계속 생각했다……. 나는 어느 날 하나님의 의와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말 사이에 관련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나는 하나님의 의란 그가 은혜와 순수한 자비를 나타내어 우리의 믿음을 보고 우리를 무죄한 자로 여겨 주는 의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순간 나는 새로 태어나 활짝 열림 문을 통해서 낙원으로 들어간 느낌이었다. 성서 전제가 새로운 의미를 지녔으며 전에는 <하나님의 의> 때문에 내 마음은 증오로 가득 찼지만 이제 그것이 말할 수 없이 소중하게 되었고 더 큰 사랑을 불러일으켰다. <하나님의 의>라는 대목은 나에게서 하늘로 통하는 한 문이었다."

이렇게 루터가 복음에 나타난 의를 다시 발견한 것은 그에게서 해방의 경험이었다. 그것이 복음의 내용을 분명하게 깨닫게 된 경험이었다. "오랫동안 나는 방황하였고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확실히 나는 무엇인가 막연히 알고 있었지만 로마서 1장 17절을 대하기 전까지는 그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였다. 나는 이 후에야 비로소 해방되었다." 이 진술은 쉘(O. Scheel)에 의하면 루터가 하나님의 의를 새롭게 발견하지 전에 아직 율법과 복음을 구별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그가 1512∼13년 겨울에 하나님의 의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얻었을 것이다. "그가 1513년 여름에 시작한 시편 해석에서 하나님의 의에 대한 새로운, 종교 개혁적인 의미를 제시한다. 아마 루터는 늦어도 1513년 초에 자신의 내적인 삶을 결정적으로 전환시키고 카톨릭을 폭파하고 종교개혁을 이끌어 들인 체험을 했을 것이다."

은혜스러운 하나님을 얻기 위한 그의 투쟁은 하나님의 의를 얻기 위한 투쟁이었고, 그것은 복음을 새롭게 발견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그는 하나님의 의를 참으로 기쁜 소식으로 이해하고 붙잡을 수 있었다. 이것이 루터가 심한 갈등과 깊은 종교적인 체험과 시편 연구를 통해서 무엇보다 바울의 로마서를 통해서 발견하고 깨달은 "믿음에 의한 의인"(Justfication by Faith)의 교리(이신 칭의)이다. 루터가 이것을 깨달았을 때 그는 비로소 중생의 경험을 했고 모든 것에서 자유로운 해방의 기쁨을 얻었다. 그것은 그의 삶 전체와 모든 신앙 생활을 전적으로 새롭게 하고 변화시킨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쉘(Scheel)은 루터에게서 이 깨달음과 경험의 시간은 종교개혁의 출산 시간이다라고 한다. 이러한 루터의 경험을 "탑의 경험"(Turmerlebnis, tower experience)이라고 한다. 루터가 뷔텐베르크의 수도원의 탑 안에 있는 그의 연구실에서 하나님의 의를 복음으로 발견한 체험을 했기 때문이다. 이 깊은 깨달음과 체험에서 종교 개혁의 여명이 동텄다.

 

3. 복음에 나타난 새로운 "하나님의 의(義)"

 

루터는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롬 1:17)는 그가 오해한 것처럼 죄인들을 심문하고 단죄하고 처벌하는 율법의 의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가 하나님의 의를 심판하는 의로서 오해했을 때, 하나님은 율법에 의한 온갖 재난과 처벌도 부족하여 복음의 의로써 인간을 위협한다고 원망하고 불평하였다. 율법의 의는 인간이 충족시켜야 할 의이다. 율법이 보여주는 의 앞에서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경멸과 무지와 사악함으로 하나님의 진노, 죽음, 저주와 지옥을 경험한다. 하나님의 목소리가 양심에 큰 쇠망치 소리와 같이, 지옥의 우뢰, 신적인 진노의 번개와 같이 들린다. 인간은 무지와 죄와 사악으로 율법의 요구 앞에서 양심의 감옥과 지옥을 경험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고 위로를 발견할 수도 없게 된다. 하나님은 인간의 가장 깊은 마음 속을 보시고 심판하고 율법도 가장 깊은 속마음을 요구하고 심판하다. 인간은 외적으로 선한 것처럼 보이지만 깊은 마음속에는 위선과 뿌리깊은 악독이 숨어 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다.

루터는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그의 의로써 불의한 죄인을 처벌한다는 내용과 "처절하게 씨름하였다. 마침내 그는 하나님의 의는 인간이 이루는 능동적인 의가 아니라, 하나님이 선사하는 수동적인 의라는 것을 깨달았다. 인간은 하나님의 의를 수동적으로 받는 것 이외 다른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 이러한 깨달음이 그의 의인론의 기초를 이룬다. 루터는 이 깨달음을 그리스도의 처절한 십자가 사건에서 새롭게 얻었다. 그가 이 새로운 깨달음을 확인하기 하기 위하여 성서의 개념들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하나님의 "능력"은 무능한 자를 강하게 하고, 그의 "지혜"는 어리석은 자를 지혜롭게 하는 하나님의 은사였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의는 죄인을 의롭다고 인정하는 은총의 선물이었다.

루터가 새롭게 발견한 하나님의 의, 즉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우리가 선한 마음과 행동으로 성취하는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로서 우리에게 전가되는 수동적인 의, 낯선 의로서 조건 없이 우리에게 베푸는 선물이다. 루터는 이러한 사건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일어난 것으로 보았다. 그리스도는 죄인의 죄와 그 비참한 결과를 십자가에 떠맡아 처리하였다. 그것은 죄인을 의롭게 하는 하나님의 심판의 사건이며 죄인에게 무죄를 선언하는 하나님의 은총의 판결이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가 "죄인을 대신하여" "우리를 위하여" 성취한 구속의 사건을 기초로 죄인을 의롭게 인정한 것이다. 그것이 복음에 나타난 새로운 하나님의 의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는 인간이 의로웠거나 혹은 율법이 요구하는 조건들을 만족시켰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선행과 공적으로 이룩할 수 있는 인간의 의가 아니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로서 믿음으로 사는 자들에게 선물로 주어진다. 그 의는 밖으로부터 온 의이다. 그것은 의롭지 않는 인간을 의롭다고 받아들임으로써 믿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위대함을 드러낸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보여주신 그의 의로써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에 의하여 죄인으로 단죄된 사람의 죄를 용서하고 그를 의롭다고 선언하고 의롭게 인정하기 때문이다. 루터는 죄 가 용서되는 곳에 생명과 축복이 있다고 했다. 여기서 인간의 모든 업적이 부정되고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가 문제이다. 루터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구절을 의로운 자가 하나님의 선물로 사는 것, 즉 믿음으로 산다는 것으로 이해했다.

칼 홀이 제시하듯이 루터의 문제는 신의 의와 자비를 어떻게 혼합하느냐에 있지 않고, 의라는 개념 자체 안에 있다. 루터가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단순히 그의 속성으로만 보지 않고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선물로 보았을 때이다. 하나님의 의는 자비한 하나님이 죄인을 의롭게 하려고 주는 의일 뿐이다. 성서에서 하나님의 사역은 그가 인간 안에서 활동하는 것을 말하고, 하나님의 능력은 그가 인간을 강하게 하는 것을 뜻하고,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을 지혜롭게 하는 것을 의미하듯이 하나님의 의는 폴 틸리히가 잘 표현한 것처럼 은혜를 통한 믿음에 의하여 인간을 의롭게 하는 말로서 이해되었다. 루터는 이전에 심판하고 벌을 주는 하나님의 의 앞에서 떨었고 하나님의 의로 인하여 그 자신이 부서진 것처럼 느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의의 궁극적인 본래 의미를 이해했을 때, 그 의의 정당성을 인정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죄인을 의롭게 하기 위하여 의와 함께 은혜를 보낸 것이 아니라, 그의 의를 통하여 보낸다. 하나님은 언제나 주는 순전히 선일 뿐이다. 루터의 이 해석은 롬 1:17절을 새롭게 해석한 것 이상이고 신론을 새롭게 정초한 것이다.

위에서 확인된 것처럼 루터는 초기에 "하나님의 의"라는 개념 때문에 하나님을 증오하기까지 했지만 이제 그 개념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확인하게 되었다. 루터는 이것을 깨닫고 새로운 눈으로 하나님과 세상과 교회를 바라보았다. 그의 신학과 성서의 해석이 변화되었다. 하나님이 의로써 인간을 의롭다고 인정하는 의인은 인간의 덕스러운 성격이나 인간의 행위에 바탕을 두지 않는다. 의인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놓이다. 하나님과 바르게 된다 혹은 바른 인격적인 관계의 회복을 의미한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변혁하는 능력과 하나님의 선물로 이루어진다. 바울에 의하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죄된 인류를 의롭다고 선언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의롭다 한다. 하나님이 의롭다 선언한 것을 수용하고 인정하는 것이 믿음이다. 이 믿음은 효력을 나타내는 약과 같다. 종교개혁의 원동력이 된 그의 의인론은 하나님의 의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서 출발한다. 이 의인론에 교회의 존폐가 걸려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활동을 특징적으로 표현하며 기독교 신앙의 핵심에 속한다.

 

III. 믿음에 의한 의인(義認)의 성격

 

1. 밖에서 전가(轉嫁)된 낯선 의(義)

 

루터에게서 의인 교리는 교회를 서게도 하고 넘어지게도 하는 기독교의 독특한 자산이다. 그 안에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녹아 있다. 의인론은 기독교를 다른 종교와 본질적으로 구별한다. 의인은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는 하나님의 판결이며 그 결과 인간을 새롭게 살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하나님 자신 앞에서 불의한 죄인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의롭다고 인정하고 용납하여 하나님과 바른 관계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에 의한 의인이다. 이런 의인은 법정적인 개념이다. 죄인이지만 판사가 의롭다고 판결하므로 죄인은 석방된다. 하나님이 죄인을 의롭다고 판결하는 근거는 그리스도가 죽기까지 복종하여 죄인을 위하여 이룬 의에 있다. 우리의 죄와 죽음은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에게 옮겨져 처리되고 극복되고 그리스도의 순결한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어 우리는 무죄 판결을 받고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불의한 인간을 받아들인다. 불의한 인간을 의롭게 하여 받아들인 것이 하나님의 의이다. 이 의는 하나님의 놀라운 자비와 의의 심오함과 그 신비한 위대성을 드러낸다. 이것이 루터가 발견한 복음이다.

그러므로 죄인에게 주어진 의는 인간이 공적과 선행으로 성취한 적극적인 의가 아니고, 밖에서 온 낯선 의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의, 하나님의 의이다. 밖에서 온 그리스도의 의는 인간의 고유한 의로 대치될 수 없고 제한될 수 없다. 루터는 밖에서 온 낯선 의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거룩한 하나님 아버지를 안다는 것은 낯선 의로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태어나고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의를 근거로 하여 누구도 하늘 나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성취하지 않는 밖에서 온 낯선 의를 통하여 들어가게 된다. 아담이 외적인 죄로 저주를 초래한 것처럼 그리스도는 외적인 의로 우리를 구원하였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우리 자신을 구별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행위와 우리의 행위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복음에 의하면 누구도 자신의 의로 구원을 얻지 못하고 밖에서 온 그리스도의 의, 외적인 낯선 의를 통해서 구원을 얻는다."

그러면 낯선 그리스도의 의가 어떻게 우리와 관계하여 죄인 우리를 의롭다는 인정을 받게 하는가? 여기서 루터는 바울처럼 하나님의 전가(轉嫁)를 말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의를 죄인에게 전가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낯선 의가 전가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낯선 밖에서 온 의가 인간에게 전가되었으므로, 하나님은 죄인이 그리스도와 하나로 된 것으로 보고 그의 죄를 용서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는 것을 통해서만 의롭게 된다. 인간은 그 의를 스스로 성취하거나 획득할 수 없다. 그는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와 은혜로 그에게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를 믿음으로 받을 수만 있다. 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에게 우리의 자질이나 능력밖에 있는 그리스도의 낯선 의가 전가됨으로써 우리는 사죄를 얻는다.

우리가 사죄를 얻으면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된다. 여기서 루터는 죄인의 의는 "능동적인 의"가 아니라 "수동적인 의"라고 성격화한다. 죄인은 의롭게 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할 것이 없다. 그는 하나님이 무한한 자비로 전가하는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이고 그리스도가 그 안에서 살아 계심을 믿는 것뿐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할 때, 그의 의만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을 주시기 때문이다. 제베르크는 하나님의 의와 인간에게 전가된 의가 수동적인 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하나님의 의는 수동적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속성이 아니라, 죄인에게 선사하여 그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는 수동적이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심판과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주고 구원하는 하나님의 심판과 관계해야 하고 그것을 긍정하고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심판하는 하나님과 은혜의 하나님은 한 동일한 분이다. 그의 심판은 은총이고 그의 은총은 심판이다. 하나님의 의는 수동적이다. 우리를 그것을 어떤 방법으로도 획득할 수 없고 하나님의 심판과 선물로서 무조건으로 믿음 안에서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믿음에서 우리는 자신을 포기하고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희망한다. 그러므로 신앙의 의는 하나님의 수동적인 의와 상관 개념이다."

인간은 믿음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아 신자가 되는 순간부터 일생 동안 이 "밖에서 온", "수동적 의"에 기초하여 하나님 앞에서와 세계 안에서 의를 향하여 순례의 길을 간다. 이 믿음은 유일하게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만을, "우리 밖의" 그의 의만을 바라본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죄의 용서와 함께 그의 의의 전가를 가져온다.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우리와 연합되고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의롭게 하는 믿음이다. 의롭게 하는 믿음과 함께 우리는 옛 인간성을 벗고 하나님으로부터, 성령의 사역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그리스도는 믿음 안에서 임재하고 효과적으로 역사한다. 죄의 용서를 받아들인 이 믿음 안에서 이미 새 창조가 시작되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 새 창조는 아직 완전하지 않았고 날마다 의롭게 되어지면서 미래적인 완성을 지향한다.

 

2. 믿음을 통한 "즐거운 교환"

 

인간을 의롭게 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적인 판결로 발생했다. 그것은 우리 없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한 구원의 사건이다. 이 사건은 죄에 포로된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와 하나님의 진노로 불안한 우리에게 발생한 하나님의 무죄 선언이며 생명을 선사하는 사건이다. 그것은 "우리 밖"에서 "우리 없이" "우리를 위하여" 발생하였다. 그것은 객관적이다. 객관적인 것은 루터에게 힘과 밑받침을 주었다. 우리의 구원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떠맡아 대신 처벌을 당하고 죄와 죽음의 세력을 정복한 데 있다. 이것을 루터는 그리스도의 승리라고 한다. 이 승리는 그리스도의 부활로써 확정되었다. 이로써 그리스도는 죄의 힘을 꺾고 죽음을 멸하고, 저주를 없애고, 의를 제공하고, 삶을 빛으로 인도하고 생명과 구원을 가져왔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특정한 때와 장소에서 발생한 하나님의 의는 믿음을 통해서 받아들일 때, 효력을 발휘한다. 왜냐하면 죽음과 죄를 정복한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아서 역사해야만 그리스도를 통해서 일어난 하나님의 의는 내게 비로소 효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루터는 개관적인 것을 주관적으로 적용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우리가 그 내용을 알지 못하고 그리스도와 인격적으로 관계하지 않아도 타당하고 효력을 갖는 물질적인 성취가 아니다. 의인이 문제될 때, 하나님은 언제나 인격적인 믿음을 통해서 역사한다. 그것이 주관적으로 나와 관계되고 내게 유효한 법적인 판결이 되는 것은 믿음에서 일어난다. 약이 아무리 효력이 있어도 복용하지 않으면 아무 유익이 없듯이 믿음은 고질병을 치료하기 위하여(인간의 본성을 부패하고 왜곡시킨 죄와 죄의 결과) 그리스도를 통해서 선사된 약을 복용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믿음이 인간을 의롭게 하는 그리스도를 붙들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병든 우리를 치료하는 그리스도의 의와 생명이 우리에게 흘러와 효력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바로 이 믿음으로 통하여 죄의 용서를 얻고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로 인정되고 무죄 선언을 얻는다.

믿음 자체는 죄인을 의롭게 하고 성화시키는 그리스도를 담는 그릇이다. 믿음은 인간이 자신을 부정하고 자신을 떠나서 생명의 원천인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신뢰한다. 그런데 이 믿음 자체는 하나님의 의를 일으키는 원인이나 공로가 아니다. 인간을 의롭게 하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로서 믿음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믿음을 일으키고 새롭게 하고 강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인간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고 인간 안에서 이루는 하나님의 놀라운 창조물이다. 루터는 인간이 상상하고 창조하는 믿음과 하나님의 살아 있는 음성이 말씀을 통해서 사람에게 전달됨으로써 인간 안에서 내적으로 확신되는 믿음을 구별한다. 어떤 사람도 자신의 능력으로 참된 성서적인 믿음을 가질 수 없다고 루터는 주장한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불의한 죄인을 의롭다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하나님의 은혜스러운 판결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일어난 하나님의 그 판결은 "나를 위하여" 그리고 "나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인정하고 그렇게 내게 적용하는 것이 의롭게 하는 신앙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과 그의 피에서 죄와 사악함으로 저주받을 나 자신이 하나님이 허락하는 생명과 은혜의 관계 속으로 받아들여졌고, 불의한 내 자신이 의롭다고 인정되었다. 그것은 새로운 창조적인 의로 해방된 것을 의미한다. 믿음은 하나님이 십자가 사건에서 나의 죄를 용서하고 그리스도 때문에 죄인을 무죄 선언하고 의롭게 여긴다는 그 판결을 "붙잡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확실하게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고유한 의에 의존하고 그리스도에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의에 참여한다. 믿음은 반지가 보석을 붙박아 두고 있듯이 나를 의롭게 하고 새롭게 하는 그리스도를 굳게 붙잡는다. 그래서 루터는 의인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자비의 위대성을 강조하고 동시에 신앙의 위대성과 신비를 강조한다.

믿음의 신비는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어 그의 모든 은혜를 나의 것으로 즐기고 누리는 데 있다. 믿음은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사랑과 신뢰와 고백으로써 그리스도와 결혼하는 것이다. 이 신앙 안에서 나는 그리스도는 나의 것이 되고 그리스도는 나의 것이 된다. 이제 그리스도의 의는 우리의 것이 된다. 여기서 루터는 의인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와 인간 사이에 일어난 "즐거운 교환"을 말한다. 그리스도 자신은 우리의 죄, 죽음, 고뇌, 수치, 저주를 떠맡고 그에게 속한 순전함, 의, 생명, 축복을 우리에게 넘겨주었다. 이것은 "즐거운 교환"이다. 이 즐거운 교환을 통하여 우리의 죄는 이제 우리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의 의는 그리스도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이 된다. 이 즐거운 교환에서 무죄한 예수는 죄인이 되어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고, 죄인인 우리는 하나님의 평화를 누린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믿은 신앙에 의하여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는 신비에서 일어난다. 이 신비로운 교환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 일어난다. 신앙은 그리스도와 결혼하는 것이고 그 놀라운 교환을 발생하게 하는 결혼 반지이다. 이 결혼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의는 우리의 의가 된다. 그에게서 오는 의는 그와 연합하는 모든 지체로 퍼진다. 믿음은 그리스도와 믿는 자를 연결하는 고리이고 신랑이 신부에게 끼워 주는 결혼 반지와 같다. 신부는 신랑의 모든 함께 공유하듯이 믿는 자는 그리스도와 완전히 결혼한 신부로서 신랑의 모든 것을 공유하고 누린다. 신랑은 신부의 모든 것을 소유하고 함께 산다. 그것은 둘이 한 몸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모든 것이 신부의 것이 된다. 그리스도의 생명과 은혜와 구원은 그리스도와 믿음으로 연합한 나의 것이 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신 "복음의 의"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이 이루신 의를 통하여 우리가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일 때, "나는 너의 것"이라고 말하고 우리는 "당신의 것이다"는 대답을 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속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잃어버릴 때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그리스도는 의를 가르치지 않고 우리의 마음속에서 의를 창조하신 것이다. 그리스도는 의의 태양과 샘의 원천이다. 그래서 개혁 주의의 삼대 원리인 "은총으로만" "성서로만" "믿음으로만"은 "그리스도만"을 가르친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의로운 판결과 무죄 선언은 그리스도와 우리 죄인 사이에 발생한 "신비로운 입장 교환"을 통해서 우리의 것이 된다. 우리는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기쁜 자리바꿈이 일어난 것을 확신한다. 비참한 죄인으로서 자신이 받아야 할 모든 저주, 심판, 진노와 고통, 형벌을 그리스도가 대신하여 당하여 처리하고 극복하였다. 그리고 그는 죄인에게 무죄를 선언하고, 형벌 대신에 자유를, 죽음 대신에 생명과 구원을 값없이 은혜로 주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악된 인격을 입으시고 그 대신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무죄한 승리의 인격을 입혀 주셨다. 신자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써 그리스도에게 넘겨져 처리된 죄를 본다. 아직 완전히 죄의 뿌리와 죄의 힘이 근절된 것이 아니지만 죄악의 사령부는 점령되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후 5:17). 그래서 그리스도의 평화와 생명 의는 이제 우리의 것이라는 신조는 절대성을 지닌 최고의 것이라고 루터는 말한다. 그러므로 신비로운 입장 교환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사심과 행동, 말씀, 그분의 고난과 죽음은 마치 우리가 그분처럼 살고 행하고 말하고 고난받고 죽은 것처럼 우리의 것이 된다. 그의 승리하는 생명과 의는 우리에게 전가되고 우리를 변화시키는 능력이 된다.

이 즐거운 교환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생활에도 적용된다. 이 즐거운 교환을 불타는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경험한 초대 교회는 뜨거운 사랑의 가슴을 갖고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고 배려하고 물건을 나누었다. 오늘의 교인들도 그러한 신앙의 사귐으로 자원하여 소유를 함께 나누고 고난의 짐을 함께 나누어 걸머져야 한다. 그러한 자리바꿈이 기쁘게 일어나는 곳이 성도의 교제로서 교회이다. 그리스도가 즐거운 교환으로 모두의 공동 소유가 되었듯이 우리도 서로의 공동 소유가 되어야 한다. 성도의 교제는 값싼 동정심에서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가난한 자의 곤경과 고난을 자기의 것으로 느끼고 그것을 나누어 걸머지고 자신의 재산을 줌으로써 가난한 자가 유익을 얻게 하는 교제이어야 한다. 모든 성도는 진리를 위하여 투쟁하고 불의에 대항하여 싸우고, 교회의 갱신을 위하여 일하고 이웃을 섬기기 위하여 자신의 소유를 사용하고 자신의 의로써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죄인을 중재하여야 한다.

중재한다는 것은 이웃이 서야 하지만 설 수 없을 때, 내가 그 자리에서 대신 짐을 지고 수고하고 기도하고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신자 사이에 인격적으로 일어난 "기쁨 교환"은 루터에게서 가난한 자를 위하여 자신의 재산을 유용하게 나누어주고 병자를 위해서 자신의 삶을 주는 실천적인 행동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인격적으로 경험한 자들의 삶의 방식이다.

 

3. 의인(義人)이며 동시에 죄인

 

신자는 의인이며 동시에 죄인이라는(simul justus et peccator)라는 루터의 역설적인 명제는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죄의 용서로 깨끗이 씻김을 받고 의인으로 인정되었다면 의인이지 왜 동시에 죄인인가? 하나님에 의해서 의롭다 인정된 것은 불완전하기에 그러한 역설이 생기는가? 그 "인정"은 인간의 내적인 변화와는 무관한 형식적인 것인가?

루터는 바울의 "인정한다"(롬 3:28)라는 말을 해석함으로 "인정"의 분명한 뜻을 제시한다. "인정"은 단순한 의견이 아니고 확실한 것이고 진정한 단정이다. 그것은 의견이 아니고 정의(定義)와 결정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죄인을 의롭다고 인정한다는 것은 단순한 의견 표명이 아니다. 그것은 확실하고 정확한 법적인 효력을 갖는 판결이다. 루터는 하나님의 판결은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함으로, 비록 죄가 남아 있을지라도, 그는 우리를 의롭다고 정결하다고 인정한다고 주장한다. 죄의 본질은 제거되지 않았지만 제거된 것으로 인정하고, 우리의 본성에 죄가 남아 있어도 죄를 가리우는 그리스도 때문에 그것을 덮어두는 하나님의 자비로 죄는 사하여 진다.

그러면 하나님의 인정과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는 인간의 내적인 변화를 일으키는가? 루터는 이 전가가 온 세계와 모든 천사들보다 더 큰 긍정적인 결과를 갖는다고 대답한다. 우리는 믿음으로 우리의 죄를 없는 것으로 여기는 그리스도를 소유한다. 그는 우리를 실질적으로 깨끗이 하기 시작하고 또 완전히 죄를 용서해 준다. 루터는 스콜라 신학에서 주장된 것처럼 신적인 새로운 자질이 주입되기 때문에 의롭게 된다는 견해를 거부하고,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써 우리가 깨끗하게 되고, 성령을 통하여 본질까지 정결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죄를 덮어 주고 용서해 주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죄를 용서하므로, 우리는 정결하게 되고, 성령은 그리스도의 의와 순결한 생명에 우리를 참여시키고 그와 연합하게 함으로 결과적으로 우리의 본질을 정결하게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면 믿음을 통하여 마음이 깨끗해진다면(행 15:9) 의인이 되었는데 아직도 죄인이라는 것은 모순이 아닌가? 이에 대하여 루터는 세례에서 원죄가 제거된다는 카톨릭의 가르침을 거부하면서 원죄를 주장함으로 대답한다. 카톨릭에 의하면 원죄는 세례에서 제거된다. 따라서 세례를 받은 후에 죄는 전혀 남아 있지 않는다. 그러나 세례 이후에 짓는 죄는 그리스의 피까지 미치지 못한다. 그러므로 실제적으로 범한 죄에 대하여 보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의의 상실로서 원죄는 성령을 항거하고 하나님의 법에 복종할 수 없게 하는 근본적인 충동으로 우리에게 남아 있고 작용한다고 한다. 원죄는 범죄의 뿌리이다. 단지 이 원죄는 독약과 같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우리를 해치지 못한다. 그것은 심판의 불로 완전히 소멸될 때까지 남아 있다. 어거스틴도 원죄는 세례에서 용서되지만, 그것은 존재하고 경건한 자에게 전가되지 않는다고 했다.

또한 우리에게 시작된 의는 완성된 영원한 의가 아니다. 우리는 의로워지면서 의로움을 향하여 행진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언제나 원죄의 독을 쓸어버리고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하려면, 지속적으로 그리스도의 치료를 받아야 하고 그의 의에 의지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매일 기도하고 말씀을 일고, 묵상하고, 성례전에 참여하는 것이다. 최후의 심판에서 완성되는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죄의 용서를 받아야 한다. 죄의 용서는 우리가 죽기까지 계속하는 하나님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죄는 일시적인 문제가 아니고 항구적인 것이다. 우리는 계속하여 사죄를 받으면서 살아간다. 그리스도는 끊임없이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는 구원의 주이다. 그가 계속하여 우리를 죄에서 구원한다면 우리는 죄인이다. 이런 관점에서 의로워진 사람도 아직 죄인이고 동시에 그는 계속하여 죄를 용서하는 하나님에 의하여 의롭다고 인정된다.

이상의 논의를 기초로 신자는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라는 루터의 역설적인 면제는 이해될 수 있다. 하나님 자신이 죄인을 용서하고 그를 하나님의 생명 안으로 이끌어 들여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 안에서 새롭게 살 수 있도록 했으므로, 의롭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자비롭게 의의를 전가해 준 빛에서 볼 때, 의롭다. 그러나 그는 공적으로 혹은 사적으로 은혜없이 스스로 존재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없으므로 죄인이다. 하나님의 엄격한 심판의 빛에서 볼 때 그는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의 관점에서 볼 때, 의롭다. 나를 위한 그리스도 없이, 그리스도 밖에서 나를 볼 때, 죄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볼 때, 의롭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 믿음을 통해서 존재하므로, 우리는 의롭다. 그러나 우리가 그를 떠나서 방황하려고 하니, 죄인이다. 우리가 성령의 능력 안에서 옛 사람과 싸울 때, 의롭다. 그가 육의 욕망에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의 뜻을 따라 사는 한 의롭다. 그러나 그는 죄와 죽음에 기울어 성령의 지배를 벗어나려는 육 안에 머물러 있는 한 죄인이다.

그러나 신자는 "동시에 의인이고 죄인"이라는 이 역설적인 형식은 부분적으로 의인이고 부분적으로 죄인인 것처럼 들리지만 신자는 완전히 동시에 죄인이고 동시에 의인이라는 점이 주목되어야 한다. "동시에" 의인이며 죄인된 존재 안에 내포된 역설은 하나님의 판단과 인간의 실제적인 상태에 대한 경험적인 표현이고, 신자들의 내적인 갈등을 규정한다. 그러나 신자는 양자를 평형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과 의인의 은혜를 통해서 시작된 새 존재로서 "의인(義人)"이 "죄인"을 쳐서 정복해 나가는 관점에서 이 형식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과 은혜를 통해서 옛 자아는 점진적으로 죽고 새 존재로 부활하는 결과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믿는 자 안에서 역사하는 그리스도에게 끊임없이 새롭게 신뢰함으로 옛 사람은 점진적으로 죽고 그리스도의 형성을 닮아 의와 진실과 빛을 지닌 새로운 존재가 탄생하여 완성을 향하여 성장한. 이렇게 새로 거듭난 의인은 내적인 의와 상응하게 외적으로 신앙의 열매들로 결실된다. 역기에 의인과 실천의 문제가 걸려 있다.

 

IV. 의인(義認)과 선행(善行)의 관계

 

1. 의인(義認)에 대한 비판

 

루터의 "의인론"은 구원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 인간의 모든 선행을 배제한다. 인간은 공적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를 얻을 수 없고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루터는 이 점을 "신자의 자유"라는 글에서 상론한다. 그는 "무엇보다 먼저 선행이나 공적 없이 믿음만이 인간을 의롭게 하고 자유롭게 하고 구원한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강조한다. 율법이 요구하는 선행을 완전히 실천해도 인간을 의롭게 하지 못한다. 신자는 신앙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소유한다. 그를 의롭게 하기 위하여 어떤 선행도 필요하지 않다. 신앙은 신부가 신랑과 결합되는 것같이 인간을 그리스도와 연합시켜 그리스도가 지닌 모든 좋은 것, 그의 의를 소유하고, 그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 자랑하고 기뻐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불변하는 사랑과 자비와 의로써 그와 결혼한다. 이로써 신자는 만물에서 해방되고 만물에 대하여 자유롭다. 그는 자신을 의롭게 하고 구원하기 위하여 아무런 선행도 공적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구원과 의인은 항상 모든 덕행과 사랑의 실천을 뛰어 넘는다. 심지어 믿음 자체도 의인을 위한 조건이 아니다. 믿음은 빈 그릇과 같지만 그 안에 보화 자체인 그리스도가 담겨 있기에 소중한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신앙에 의한 의인은 신자들을 수동적인 존재로 만들고 모든 선행을 무력화하는가? 은혜를 통한 믿음의 의인은 인간의 모든 창조적인 가능성을 사장시키고 정적주의를 조장하는가? 의롭게 하는 믿음은 선한 행위를 배제하는가? 행동과 함께 믿음이 강조되어야 하지 않는가? 오히려 행동을 통한 사랑의 실천과 의의 실현이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아닌가? 이것은 의인을 강조하는 루터교와 믿음만 아니라 구원을 위한 조건으로 선행을 강조하는 카톨릭과 대결되는 논쟁의 중심점이다. 이것은 현대에서 은혜와 믿음을 강조하는 기독교와 행동과 실천을 강조하는 맑스주의와의 대화에서 중심적인 논쟁점이 되기도 했다. 맑스주의자는 기독교의 은혜는 인간의 창조적인 노력과 불의한 사회를 변혁하여 정의로운 새 사회를 건설하려는 에너지를 무력하게 만든다고 비판해 왔다.

루터의 의인론은 윤리 의식을 마비시키고 선행을 무력화시키는 믿음만을 강조하는가? 대한 관계 문제를 살펴보자. 루터는 죄인을 의롭게 하고 구원하는 것은 신앙뿐이므로 선행으로 의롭게 되고 자유롭게 될 수 없다는 점을 확고하게 주장한다. 그는 이 견해를 카톨릭 교황청과 스콜라 신학에 맞서 관철시킨다. 그러면 루터는 의롭게 하는 믿음과 사랑의 실천에 대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

 

2. 의인(義認)과 선행(善行)의 내적인 관계

 

루터는 의롭게 되고 의롭기 위하여 선행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역설한다. 행위가 사람을 신자로 만들지 못하는 것처럼 선행이 그를 의롭게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선을 행하기 이전에 우선 의로워져야 한다. 선한 사람이 선한 행동을 하며, 신앙인이 선을 행한다. 진리에서만 진리가 나온 것처럼, 선에서만 선이 나온다. 그것은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 것(마 7:18)과 좋은 건축가가 좋은 건축을 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선행은 믿음을 뒤따라야 한다.

이렇게 선행 이전에 믿음을 강조한 루터는 의와 사랑의 봉사를 간과한 값싼 은혜의 생활을 전적으로 거부한다. 의롭게 된 신자들에게 선행의 필요성을 말한다. 그리스도 자신이 신자들 안에서 일하고 있으므로, 은혜로 의롭게 된 사람은 선행을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선행이 따르지 않으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우리의 믿음 안에 살지 않고, 죽음 믿음이 있을 뿐이다." 루터는 신앙만, 복음만, 기적만을 내세우고 믿음의 실천으로서 선행과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거짓된 믿음이라고 지적한다. 참 믿음은 나태할 수 없고 적극적으로 자선을 베풀고 선을 행한다. 참됨 믿음 안에서 신자들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육체의 정욕을 억제하기 위한 극기, 절제와 노동들과 같은 영적인 훈련에 힘써야 한다. 루터가 의롭게 된 신앙인의 삶과 관련하여 극기, 절제와 노동을 강조한 것은 본회퍼가 비범한 "제자직"을 수행하기 위한 신앙의 비밀 훈련으로 기도, 금식, 성서 명상을 요청한 것과 유사하다. 신자들에게 날마다 자기 훈련이 요구되는 것은 육의 욕망을 쳐서 복종하기 위해서이다. 신자들이 육체의 정욕과 탐욕을 성령의 검으로써 무찔러 옛 인간성을 계속하여 죽이지 않으면 하나님에게 헌신하고 이웃을 섬기기 어렵다. 이러한 엄격한 자기 훈련과 절제는 결코 공적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숨어서 해야 할 신앙인의 비밀 훈련이다. 내적으로 의롭다 인정을 받은 신자는 정화된 마음과 올바른 행동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기 위해서 그러한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안다.

이제 루터는 적극적으로 참된 신앙과 참된 실천의 내적인 연관성을 천명한다. 의와 구원의 확신은 한 번 내적으로 경험되면 내적인 필연성에서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선한 행동으로 이웃을 섬겨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이 나타난다. 우리는 이 아무런 업적이나 공로 없이 순수한 값비싼 은혜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의와 구원의 모든 부를 선물로 받았다. 그러므로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선한 것을 소유한 신자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으로서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 그리스도가 자신을 우리의 선과 구원을 위하여 내어 준 것처럼 우리도 이웃을 위하여 필요하고 유익한 사랑의 봉사를 자발적으로 행한다. 신앙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고 사랑은 우리를 사람의 종으로 만든다. 신자는 자유로운 만물의 주이며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동시에 그는 충성스러운 만인의 종으로서 모든 사람을 사랑으로 섬기는 종이다. 신자는 믿음으로 자신을 넘어서 하나님에게까지 올라가고 사랑으로 자신 보다 낮아져서 이웃에게까지 이웃을 섬기는 종으로 낮아진다. 그는 생명, 기쁨, 능력, 지혜, 사랑들과 같은 모든 축복의 원천인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로운 만물의 주로서" "모든 사람을 섬기는 종으

로서" 선행을 한다.

그런 관련에서 신앙이 없는 곳에 어떤 선한 행동이 없고 동시에 선한 행위가 없는 곳에 어떤 신앙도 없다고 루터는 말한다. 양자는 분리될 수 없이 밀접하게 연결된다. 모든 신자의 삶의 본질은 이 양자의 관계에서 발견된다. 믿음과 선행 사이엔 이중적인 상호 교환성이 성립된다. 선행은 믿음에서 나오고, 신앙은 선행에 의하여 그 진실성이 드러나고 강화된다. 빛과 열이 없는 태양 광선이 없는 것처럼 선행이 없는 신앙도 없다. 신앙은 우리를 신자로 만들고 사랑과 선행은 우리가 의로워졌음을 드러낸다. 신앙은 하나님을 참되다고 하고 사랑은 그 신앙을 참되다고 한다. 이러한 행위를 하지 않는 사람은 신앙이 무엇인지 모르는 불신자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신앙과 선행에 대하여 끈임 없이 지껄인다. 봉사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에게 그리스도가 되어 주는 것이 기독교인의 자유의 가장 깊은 차원을 실행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우리들 사이에 행하는 것처럼 우리도 이웃에게 행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에 의한 의인은 정적인 믿음의 체험으로 끝나지 않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게 하고 사랑으로 역사하는 선행의 열매를 맺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루터는 자신의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하지 않은 소유는 이웃에 속한다고 한다. 이웃의 필요를 위하여 사용하지 않고 쌓아 둔 소유는 불의하다.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도둑질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루터는 "사유재산은 도둑질이다"는 사회주의자들의 표어를 미리서 내다 본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의 표어에 의하면 이웃의 복지를 위하여 공동으로 사용되어야 할 재화를 독점하는 것은 도둑일 수 있기 때문이다.

 

3. 의인(義認)의 참된 표징인 선행

 

선행은 믿음의 열매로서 믿음이 진정으로 실체적인 진리라는 것을 보증하는 표가 된다. 믿음은 선행의 내적인 근거라면 선행은 믿음의 외적인 징표이다.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진정으로 만났다면, 그리스도를 진지하게 붙들고 있다면, 그는 죄에 대한 싸움과 새로운 순종과 자유롭게 사랑을 실천하고 선행을 한다. 참된 믿음은 자기 만족에 취하거나 태만할 수 않고 역동적인 실천으로 표현된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인 신앙의 삶은 그 자신 안에 살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면서 사랑의 실천으로 고난 당한 이웃 안에 산다.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는 그 자신을 넘어서 수직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살고 사랑의 삶으로 이웃 안에서 산다. 그는 이웃에게로 내려가서 하나님에게서 받은 선한 것들을 가난한 자들, 억압당한 자들, 병든 자들에게 유익이 되도록 사용한다. 신자들이 받은 모든 선한 것 즉, 지식, 재산, 명예, 권력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흘러가서 그들에게 유용하게 되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신자들은 참으로 선하게 하고 신자가 될 것이라고 루터는 강조한다. 여기서 참된 믿음과 거짓된 믿음이 판별된다.

그러므로 루터의 의인론은 윤리적인 행위를 마비시킨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활성화시키고 촉구한다. 신앙은 선행을 통하여 활동적인 것이 된다. 신앙은 자신만을 위한 이기주의적인 삶에서 인간을 해방하여 가난한 이웃의 필요한 것과 유익한 것만을 바라게 하고 그것을 위하여 투신하게 하는 삶으로 나타난다. "가난한 자들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일하라는"(엡 4:28) 바울의 말은 신앙의 충만과 부를 누리는 신자들의 삶의 방식이다. 여기서 신앙의 의가 시험된다. 참된 신앙은 선행 없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랑의 실천이 없는 신앙은 마음속에서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은 것이고 환상이며 거짓된 관념이다. 이 점에서 루터는 야곱의 의견에 일치한다. 사랑의 실천과 선행은 해의 열과 빛처럼 신앙이 살아 있다는 증거이고, 신앙의 진정성을 입증하는 도장과 같다. 심지어 선행은 우리가 참으로 믿고 있으며,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영생의 참된 상속자라는 확신과 표징을 준다고 한다. 신앙은 선행으로 가꾸어야 하고 내가 지닌 것을 남에게 줌으로서 그를 유익하게 하고 이웃의 짐을 내 자신의 것으로 걸머지고 그를 섬기는 것이 내 믿음과 의를 하나님 앞에 드린 것이다. 사랑을 실천하고 선행을 하는 것은 내적인 의를 외적인 의로 나타낸 신앙의 삶이다. 나무는 열매를 보아 알 수 있듯이 행위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 안에 완전한 믿음이 있음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신앙은 선행을 하는가 하고 묻지 않고 묻기 전에 이미 선행을 했으며 부단히 행하고 있다, 은총을 입은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조건 없이 아무 때나 즐거이 선을 행하고 도와주고 모든 고난 속에서도 참는다. 신앙에 의한 의인의 삶은 정지된 것이 아니고 가득 찬 저수지에서 물이 넘쳐 흘러가듯이 끊임없이 선행을 한다. 실로 그것은 살아 있고 분주하고 활동적이고 힘찬 것이다. 우리들이 의롭게 되었다는 것과 우리의 일에 대하여서도 하나님은 기뻐하신다는 것을 확신할 때 큰 일과 작은 일, 일상적인 일과 특별한 일, 속된 일과 거룩한 일 사이의 구별은 사라진다.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 즉 신앙 안에서 어떤 일을 하였을 때, 하나님은 그 일을 기뻐하신다는 확신을 가질 때, 그 일은 거룩한 것이 된다. 이것이 의인이 모든 행위의 전제라는 의미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루터의 의인론의 배경과 그 내용을 살펴보았고 의인론과 윤리의 관계를 분석해 보았다. 새의 노래를 들어보면 어떤 새인지 알 수 있듯이 그의 의인 교리는 루터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도록 한다. 그의 의인론은 견딜 수 없는 영적인 시련과 고뇌, 기도와 명상의 깊은 골을 통과하는 중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빛을 받아 탄생되었다. 그의 의인론이 빛을 보지 못했더라면 종교 개혁은 발생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의 깊은 확신과 깨달은, 영적인 경험은 중세의 타락한 교회와 사회를 개혁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는 "이신 칭의(以信稱義)"라는 복음의 예리한 칼과 전광석화 같은 날샘과 강력한 무기를 들고 중세의 황량한 교회와 사회를 개혁하는 봉화를 높이 치켜들 수 있었다. "하나님의 의"라는 복음의 생명력과 능력이 한 수도자 루터의 골수를 적시고 강하게 하고 솟아올랐다. 그의 이신 칭의의 신조는 참된 개인적인 신앙의 체험으로 흠씬 젖은 신조이며 그것을 예리한 신앙의 언어와 진지한 지성의 끌로 다듬어 낸 은총의 산물이다. 교인의 윤리 생활은 의인의 결과로 나타난 은총의 윤리이다. 선행과 사랑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신앙에서 시작된 신앙의 열매이다.

루터는 가공할 만한 생명의 위협을 받았고 파문당하면서도 자신이 새롭게 발견한 하나님의 의를 불타오르는 확신으로 천명하였다. 그는 복음의 진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할 순교자의 영성을 지녔다. 그는 사람들의 갈 길을 인도하는 정신적 지휘자였고, 성령의 깊은 지혜와 통찰력으로써 말씀의 샘을 발굴한 신학자였다. 그는 생명의 말씀을 불같은 진지성으로 설교하는 설교자와 목회자였다. 그가 설교한 뷔텐베르크 교회의 강단 앞에서면 하늘에서 빛과 영감을 받아 일상생활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고 낡은 세계를 변화시켜가는 한 예언자적인 설교자 상을 느끼게 된다. 그는 그리스도의 주권 이외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신성한 체험을 밑받침으로 부드럽고 조용한 빛을 발하면서 하늘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그것을 사람들을 위하여 해석하고 증언하였다. 그는 실로 하늘의 비밀을 해석하고 증언하고, 썩은 교회를 개혁했고 사회의 개혁을 위한 정신적인 토대를 마련했다.

독일에서 100년 가까이 발생했던 농민 전쟁에 대해서 루터는 처음에 동조적이었다. 그는 농민들이 불의한 권력과 결탁된 지주들의 착취에 대하여 저항한 것은 정당하다고 지지하였다. 그는 영주들을 반대하는 설교를 했고 지배층의 각성을 촉구했다. 그러나 농민들이 폭력을 사용하였을 때, 그는 뮌처(T. M?nzer)와는 달리 영주들에게 저항하는 그들을 "학살하고" "찔러 죽이라"고 요구했다. 이것은 씻을 수 없는 그의 과오이다. 그는 카톨릭의 성직자들이 독점한 해방의 영, 성령을 농민들에게서 작용하는 영으로 인정하였다. 이로써 그는 예언자적인 비판에서 새로운 세계를 바라보았지만, 농민 전쟁에 대한 그의 태도는 그 전망을 흐리게 했다. 이러한 과오에도 불구하고 의인 교리를 중심으로 한 루터의 신학 사상들은 오늘도 빛을 지닌다.

 

 

B.J. 칼빈의 의인론과 성화론

 

I. 의인(義認)론의 본질

 

1. 의인론과 성화론의 관계 문제

 

의인론은 루터에서만 아니라 칼빈의 경우에도 기독교의 중요한 기초가 된다. 칼빈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믿음에 의한 의인을 철저히 인식해야 한다고 한다. "기독교 신앙은 의인에 걸려 있다. 우리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으며 우리에 관한 하나님의 심판의 성격을 파악하지 못하면 구원의 기초와 하나님에 대한 경건의 기초가 상실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인론이 잘못 인식되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업적을 오해하게 된다. 은혜의 복음이 상실되고, 신앙이 폐지되고, 인간의 능력과 가치와 업적이 최고의 가치로 평가된다. 그러면 교회의 터가 무너질 것이며, 구원의 소망이 무너진다. 루터에게서 의인론은 교회를 세우거나 무너뜨리는 중심되는 조항이며, 그의 삶과 실천을 관통하는 중심 주제이며 그것이 칼빈에게선 신앙이 걸려 있는 돌쩌귀이다.

그런데 루터와 달리 칼빈은 의인론을 다루기 이전에 성화론을 취급한다. 그는 성화론을 먼저 치밀하게 논의한 후에 의인론의 교리로 넘어간다. 왜 칼빈은 루터가 그렇게 중요시하게 여겼고 그 자신도 중시한 의인론을 성화론 다음에 다루었는가? 성화론이 더 중요한 이유에서 그렇게 했는가?

여기에 대하여 맥그래스(A.E. McGrath)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개혁 1세대의 파도를 주도한 루터는 신앙을 떠받치는 교리로서 의인론을 주장하고 호소했다. 업적을 지향하는 카톨릭의 경건 안에서 의인 교리는 고통 당한 개인의 양심과 타당성을 지녔다. 그래서 루터는 의인론을 개인적인 체험과 깨달음으로 해명했다. 그의 의인론을 통해서 해명된 기독교적 실존의 개념은 그의 지역에 제약되었다. 그러나 츠윙글리, 부처와 칼빈이 파악한 기독교적인 실존 개념은 루터의 그것과는 대조적으로 더 공동체적이었다. 그리고 개혁의 제2물결에서 전투장이 개인의 경험에서 교회의 구조와 훈련, 지역 사회의 필요에 대한 교회의 대처 문제로 바뀌었다. 그래서 칼빈은 성화론을 먼저 다루게 되었다고 추론된다.

또한 칼빈이 성화론을 먼저 다룬 더 깊은 신학적인 이유가 있다. 루터의 의인론에서 중심적인 요소는 믿음을 통한 그리스도와 신자간의 인격적인 살아 있는 만남이었다. 그러나 멜란히톤(P. Melanchton)은 루터의 의인론을 개념적으로 정리하면서 법정적인 의인화로(義認化)로 발전시켰다. 물론 루터도 밖에서 전가된 낯선 의를 말한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와 인간의 놀라운 자리바꿈 혹은 결혼과 연합을 통해서 선사되고 입혀지는 그리스도의 의를 말한다. 그리스도 자신이 이 결혼을 통해서 우리의 것이 되고 우리는 그의 것이 된다. 멜란히톤도 의인을 그리스도가 그의 의를 인간에게 전가(轉嫁)시켜서 선언하는 의로서 이해한다. 그러나 그의 의인론에선 루터의 중심적인 요소인 그리스도와 신자 사이의 산 만남 대신에 그리스도가 순수하게 밖으로 비인격적으로 개입하고 그의 속성이나 그에게서 나오는 혜택을 믿는 자에게 전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므로 멜란히톤의 법정적인 의인론을 유지하면서, 그리스도의 비인격적인 속성을 단지 넘겨주는 것이 아니라, 루터가 강조한 그리스도 자신의 생생한 임재와 상호 인격적인 산 만남을 회복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일어났다.

의인론과 관련되는 다른 문제는 하나님의 주도권과 인간의 응답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무조건으로 의롭다고 인정되는 믿음의 의인은 매일의 생활에서 실천해야 할 복종의 요구와 어떻게 일치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것은 의인과 성화의 관계의 문제이다. 이 문제를 진지하게 인식한 칼빈은 성화론을 먼저 취급한 것이다. 의인(義認)은 인간의 도덕적인 갱신이나 재생으로 되지 않지만, 의인은 그것을 폐기하거나 피상적으로 만들지 않는다. 칼빈에서 의인과 성화는 믿는 자와 그리스도와가 결합하는 것의 결과이다. 믿는 자가 성령이 일으킨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면, 그는 하나님에게 의롭게 받아들여지고(義認) 동시에 윤리적으로 갱신되는 새 삶을 산다.(聖化) 지금까지 이 두 요소를 독립적인 것이나 원인과 결과로 간주해 왔지만, 칼빈은 그것들을 믿는 자와 그리스도와 연합에 속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양자의 상관관계를 다루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을 받아들이는 의인의 무조건적인 은혜와 뒤따르는 복종의 요구를 둘 다 주장할 수 있었다.

칼빈은 기독교인이 삶에서 선행을 간과하고 믿음만을 강조하는 사람들과 개혁 교회는 의인을 강조하기에 선행을 무시한다는 카톨릭의 비판과 행업을 중시하는 카톨릭의 신학에 맞서서 성화를 먼저 다루었다. 이에 대하여 칼빈은 말한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붙잡고 그와 함께 연합함으로 이중의 은혜를 받는다. 첫째는 하나님의 자비로 믿음을 통하여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는다. 둘째는 그리스도의 영에 의하여 성화됨으로 우리는 흠 없고 순결한 생활을 신장하고 촉진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에 의하여 값없이 의를 얻는 그 믿음은 선한 업적, 선행을 결하지 않는다는 것을 먼저 이해하는 것과 그 선행의 성격을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자기를 부정하고 십자가를 지는 성화의 새로운 삶과, 선행과 정의를 위하여 박해받은 삶은 그리스도와 연합에서 발생된 의인에서 분리될 수 없다. 이것을 우선적으로 강조하기 위하여 성화론이 먼저 취급된 것이다. 이로써 칼빈은 카톨릭의 비난에서 벗어난다. 왜냐하면 의인론은 우리의 삶과 선행과 무관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경건한 관계를 표현한 것이라는 오해의 가능성이 제거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의 신학의 고유성을 나타낸다. 그래서 칼빈은 먼저 성화론을 조직적으로 무게 있게 다루고, 의인론으로 넘어간다.

칼빈이 성화를 의인론에 앞서 다룬 것은 전자가 후자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양자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낯선 의를 우리의 의로 전가시키고 입혀 주시는 동일한 원천이 되는 성령의 구체적인 역사인 믿음에서 나온다. 둘 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나온다. 그리스도는 동시에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 아니면 누구도 의롭다고 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조각 조각으로 나누어질 수 없듯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받아들이는 두 가지 은총, 즉 의인과 성화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의인과 성화는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현실이고 그 안에서 통일을 이룬다. 성화를 의인에서 분리한다면 그리스도 자신을 찢는 것이다. 그러므로 양자는 구별될 수 있으나 분리될 수 없고 상호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2.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띠로서 믿음과 의인(義認)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되는 것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이루어 놓은 은혜에 참여할 때이다. 그리스도가 우리밖에 계시고 우리가 그와 무관하면 그가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고 행한 모든 것이 우리에게 무용하고 허사가 된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는 우리의 의와 생명과 성화의 원천인 그리스도와 연결할 수 있는가? 그것은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이룩된다. 그 연합은 성령의 역사인 믿음으로 실현된다. 이 연합을 통하여 그리스도는 우리의 것이 되고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는 그 안에 있게 된다. 우리는 이 연합으로 그리스도의 살 중의 살이 되며 그의 뼈 중의 뼈가 되는 거룩한 결혼과 같은 결과를 갖게 된다(엡 5:30). 그러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모든 은혜에 참여하게 되고 그의 은혜를 누리고 그의 지체가 된다. 칼빈은 믿음이 믿는 자를 위하여 소유하는 것을 인상 깊게 말한다. 믿음으로 "우리는 하늘 나라를 소유한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의를 옷입게 할 수 있게 하고, 그의 의를 우리의 것이 되게 한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유효해진 생명에 참여할 수 있게 한다." 이 모든 것은 믿음이 실재로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서 그리스도 자신을 얻고, 소유하고, 즐기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띠를 창조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은 믿음에 의존하고 그 연합의 깊이와 힘은 믿음의 척도에서 결정된다.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믿음은 하늘 나라로 뚫고 들어가 우리의 지상의 삶을 그리스도의 생명에 뿌리를 내리게 하고 그리스도의 천상의 생명을 우리에게 전달한다. 그것은 뿌리가 양분을 나무에 전달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믿음은 그리스도의 값없는 선과 은혜에 참여하게 하고 하늘에 있는 것을 지상에서 맛보고 소유하게 한다. 이 믿음은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자비의 하나님과 연합하게 한다. 하나님은 이 믿음을 통하여 인간 안에서 일한다.

그러므로 믿음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성취한 모든 은총을 받는 유일한 길이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먼저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총은 우리에게 이를 수 없다. 여기서 칼빈에 의하면 은총은 어떤 능력이나, 우리의 본성의 개선도 아니고, 하나님의 본질을 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은총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자신을 우리에게 주신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그의 소유가 되고 그에게 속하고, 그가 우리의 소유가 될 때 우리는 모든 것을 소유하는 것이 된다. 그것이 그리스와 연합에서 일어난다.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을 확신하는 것이며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그에게 이끌고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고 은혜스럽다는 것을 경험과 그것을 맛보는 데서 일어난다. 그러나 사람의 지성은 어두워져 하나님의 뜻을 파악할 수 없고 사람의 마음은 흔들려 확신 안에서 살 수 없다. 여기서 칼빈은 성령의 사역을 말한다. 하나님은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인간의 지성을 조명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고 인간의 지성을 초월한 믿음의 진리를 알게 하고, 그의 마음을 강화시켜 하나님의 신실한 약 속의 말씀이 우리 사이에서 충분한 믿음을 얻게 한다.

그래서 칼빈은 믿음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믿음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확고하게 분명하게 아는 지식이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값없이 주어진 진리 위에 기초되고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에 계시된 것이며 우리의 마음에 인친 것이다." 믿음은 더 깊이 말하면 우리의 의와 죄의 용서와 평화와 성결을 위하여 파견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고(요 6:29, 고전 1:30) 하나님의 선하심을 확신하고 그것의 감미로움을 직접 느끼는 것이다.(골 2:2, 히 10:22) 여기서 확신이 생긴다.

 

3.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띠로서 성령과 의인(義認)

 

칼빈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인격과 업적은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인간에게 오고 작용한다. 성령으로부터 말씀을 통하여 일어난 믿음은 하나님의 인식과 신뢰와 긍정과 복종이다. 믿음의 진리는 이성의 능력을 초월하므로, 성령이 우리의 지성을 조명하고 그의 거룩함으로 우리를 성화하고 그리스도와 연합하지 않으면, 우리는 바른 믿음을 지닐 수 없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객관적으로 일어난 구원의 사건을 우리가 실존적으로 주체적으로 믿고 고백하여 우리를 위한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역사한다. 그래서 성령은 그리스도의 거룩한 피가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불과 말씀으로 우리를 깨끗하게 한다. 성령은 이렇게 하여 그리스도에 의한 정화와 의를 우리의 마음에 인을 친다. 이런 이유로 바울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성령 안에서"(고전 6:11) 우리는 정결하게 되고 의롭게 되며 성령은 의로 인한 생명이라고(롬 8:10) 말한 것이다.

이제 칼빈은 믿음을 일으키는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고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는 효력 있는 띠라고 정의한다. 그것은 성령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그 자신과 힘있게 효과적으로 연결하는 줄이기 때문이다. 성령은 하늘에서 생명을 내려서 하나님의 확실한 보호와 안전을 확신하게 하고 우리의 구원을 보증한다. 성령은 하늘의 은사가 우리에게 흘러오게 하는 샘물의 원천이고 사람들에게 시냇물처럼 은혜를 부으고 그들의 생기를 회복하고 강하게 하므로 "기름"과 "부음"이라고 불린다. 성령은 반면에 계속하여 우리의 육욕을 태우고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열렬한 헌신의 불길을 일으킨다. 그래서 성령을 불로 부르는 것은 정당하다. 성령은 그의 능력으로 우리를 감동시키고, 거룩한 생명을 불어넣고 새로운 삶의 능력을 베푼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자신의 힘으로 살지 않고 성령의 감동과 활동과 능력 안에서 산다. 우리에게 있는 선한 것은 모두 성령의 은사로 열린 열매이다.

그리스도가 손을 펴서 우리를 잡고 성령으로 세례를 줄 때, 우리는 그에게 참여하고 그와 친교 하게 된다. 그리스도는 그의 영의 힘으로 우리를 조명하여 믿음을 갖게 하고 우리를 그의 몸에 접붙임으로, 우리는 그가 우리를 위하여 이룬 모든 선한 것에 참여하게 된다.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는 믿음은 바로 성령의 역사이다. 성령의 감동과 조명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주로서 믿고 고백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이다. 그리스도가 세상이 받아들일 수 없는 진리의 성령을 보내시고 그 성령이 우리에게 역사하기에 우리는 구원의 약 속의 말씀을 확실하게 믿게 되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된다(요일 4:13). 그리스도 안에 온갖 하늘의 보화와 지혜와 신성이 넘치고 있기 때문에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살게 하고 그리스도와 연합시킴으로써 하늘 나라의 보고를 우리에게 열어준 것이다. 이 연합으로 우리는 그리스의 살 중의 살이 되며 그의 뼈 중에 뼈가 되고, 그와 하나가 되는 거룩한 결혼을 하는 결과를 갖는다. 그러면 신부는 신랑에게 속하고 신랑은 신부에게 속한다. 그리고 신부는 신랑의 모든 선한 것을 함께 소유하고 즐길 수 있게 된다. 이 연합과 신비로운 결혼은 달리 표현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옮겨진 것이다. 바울의 표현을 따르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라는 신비로운 연합과 사귐이다. 그러나 칼빈에 의하면 이 연합은 존재의 신비적인 혼합일 수 없고 그것은 신비의 환상 속에 잠기는 것도 아니다. 십자가를 걸머지고 주를 따르는 값진 제자직의 수행이 강조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의인의 삶으로서 성화이다. 끊어질 수 없는 줄로 연결된 그리스도와의 이 신비로운 사귐은 성령의 역사를 통한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통해서 날마다 성장하고 심화되고 넓어질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신비로운 연합은 인간의 도덕이나 선행으로 창조할 수도 지성으로 이해될 수 도 없다. 그것은 성령만이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성령만이 하늘에 있는 것과 지상에 있는 것을 결합하여 인간이 파악할 수 있게 하고 지상에 있는 인간이 하늘의 생명과 영광에 참여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칼빈은 성령을 우리와 그리스도를 매는 연결 고리와 하늘의 보고를 여는 열쇠로서 규정하고, 그리스도가 소유한 것을 우리에게 흘러오게 하는 수도관이라고 말한다. 성령은 우리의 마음을 하늘을 향하여 열고 높여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로 응답하는 믿음을 일으킨다. 이렇게 칼빈은 의인을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결혼의 관계에서 파악하고 그것을 이루는 것을 성령의 역사를 통한 믿음 사건에서 파악한다. 이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신뢰하고 기도하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간다. 이 믿음에서 영원한 구원자이고 생명의 주이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내주하고 그의 의가 우리에 전가된다.

 

4. 그리스도의 의(義)의 전가(轉嫁)와 의인(義認)

 

믿음으로 우리는 그리스도로 옷입고 그의 의를 통하여 죄의 용서를 받고 하나님과 화해되었다. 하나님이 용서하는 사람은 그들의 죄가 용서되므로 의인은 사죄라고 할 수 있다. 이 사죄는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써 일어난다. 그 의는 "우리 밖에 있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낯선 의이다. 그 의는 성령의 선물인 믿음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신비로운 연합"에서 우리에게 전가된다. 칼빈에 의하면 이 연합은 성령으로 일어나고 그것은 현실적이며 실재적인 연합이다. 밖에 있는 그리스도를 멀리 바라봄으로써 그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이 아니라, 그와 연합되고 그를 옷입으며 그의 몸에 접붙여지기 때문에, 즉 그가 우리를 그 자신과 하나로 만들기에 그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轉嫁)된다. 칼빈은 이 그리스도를 샘물로서 지칭한다. 그러므로 그와 연결된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의는 깊은 은밀한 샘 속에 숨겨진 샘물로서 흘러간다고 한다. 우리는 필요한 모든 것을 그리스도에서 받는다. 우리는 참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의를 완전히 풍부하게 소유한다. 그리스도

가 자신의 의를 우리에게 나누어주고 놀라운 방법으로 자신의 힘을 우리 안에 넉넉히 부어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신비한 연합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어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판정을 받고 의인으로 인정된다. 그러므로 의인은 예수 그리스도가 죽기까지 복종을 통해서 얻은 의에 우리가 믿음으로 참여하는 것이며,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아니라, 의인으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죄인을 용서하고 의롭다고 판정하는 하나님의 의의 심판은 은혜의 심판이다. 여기서 믿는 자를 위한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 보장된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믿는 자들에게 주신 구원의 선물이다. 하나님 자신이 값없이 베푸는 선으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포용하고 그리스도의 무죄를 우리에게 입히고 그것을 우리의 것으로 인정한다. 우리가 믿음으로 얻는 그리스도의를 보고 하나님은 우리를 순결하고 결백하다고 인정하고 그의 의가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 우리를 보증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그리스도의 의로써 획득되었다. 이렇게 의를 획득한 신자는 자신의 의와 행위의 자랑을 버린다. 하나님 앞에서 인정되는 의는 은혜에서 오며 어떤 선행에서도 발생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선행을 보고 그들을 이롭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고 그의 자비를 불러일으키는 비참한 인간을 찾아서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 구원한다. 이 비참한 인간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를 위하여 나타내고 실천한 하나님의 구원하는 사랑과 자비를 깨닫는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와 죄의 용서를 받아 의롭다 함을 얻게 되는 믿음에서 발생한다. 믿음의 의는 하나님과 화해이고 그것은 죄의 용서이다.

칼빈은 루터와 함께 믿음만이 죄인을 의롭다고 인정하는 복음의 의를 얻게 한다고 한다. 그것은 믿음만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의에 참여하도록 인도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가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의에 참여하면 우리 자신만 아니라 우리의 행동도 하나님 앞에서 의로 인정된다. 우리의 속 사람과 행동 전체는 불결을 씻어 의롭게 하는 그리스도의 피로 덮여 있기 때문이다(벧전 1:2). 그러면 그리스도와의 이 관계를 통하여 순결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 번만 아니라 계속해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와 자비에 의존해야 한다. 우리의 구원은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우리의 불완전한 인간성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능력으로 옛 사람을 날마다 죽이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계속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게 하고 마침내 영화롭게 하려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의가 완전히 우리를 둘러싸고 영광스럽게 하며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는 완전한 사귐 속에서 지금 시작한 우리의 구원은 완성될 것이다. 칼빈은 성화를 이렇게 시간의 과정에서 점진적인 과정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믿음으로써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하고 우리를 향하여 약속한 것들을 소유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순례한다. 우리는 소망을 가지고 미래를 바라볼 수 있다. 이 믿음과 소망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에 뿌리를 내린다. 믿음은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영광스럽게 할 것을 알고 그것을 희망한다. 이 지식은 그리스도 안에 값없이 주신 약 속의 신실성을 근거로 삼고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지성에 계시되고 우리의 마음에 인친 것이다. 그 희망은 우리를 의롭게 하기 위하여 고난을 당하고 죽고 부활한 그리스도의 미래와 관계하기 때문에 단순한 유토피아를 기대하는 것과 구별된다. 우리는 어떤 것에도 방해를 받지 않고 그리스도와 함께 완전히 사귈 수 있는 그 때에 우리의 구원은 완성될 것이다. 이 희망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날마다 십자가를 걸머지고 믿음의 선한 싸움에서 진보할 것이다.

 

II. 성화론의 성격

 

1. 의인(義認)과 동등한 성화(聖化)

 

우리가 성령의 역사인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심겨지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고 그와 신비롭게 연합된다. 이 연합과 사귐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두 가지 은혜를 동시에 얻는다. 그것은 의인이고 성화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관계 안으로 받아들인 사람을 의롭게 하고 동시에 거룩하게 하기 때문이다. 의인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통해서 사죄를 얻고 하나님과 화해되므로, 하나님은 준엄한 재판관 대신에 자비한 아버지가 된다. 성화는 그리스도와 사귀는 친밀한 관계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에 상응하는 새로운 삶의 형태를 의미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임재와 성령의 거룩하게 하는 역사에 의하여 마음의 성실성과 순결과 믿음의 열매로 표현된다. 하나님의 의롭게 하는 은혜에 대한 믿음은 성화에 대한 의지와 새로운 삶이 없이 존재할 수 없다.

그러면 양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카톨릭의 구원론은 의인론과 성화론이 강하게 연결되었다는 것을 말하지 않고, 그 연결 안에서 성화론 쪽으로 기울었다. 반대로 루터는 의인론을 강조했고 성화론은 의인론의 산물과 그 결과로 보았다. 그래서 그는 의인의 두 종류를 주장했다. 의인 교리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칼빈에서도 모든 구원 교리의 기준이고 모든 신앙의 토대이다. 그러나 칼빈에 의하면 양자의 관계는 인과 관계도 단순히 병립하는 관계도 아니다. 둘 중 어느 하나를 최종적인 목표로 여길 수도 없다. 성화는 의인의 목적은 아니다.

그러면 양자의 관계와 가치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위에서 언급된 것처럼 칼빈은 의인과 성화를 구별하지만 서로 분리하지 않는다. 양자는 서로 상관성을 갖고 서로 함께 속하고 같은 가치를 지닌다. 의인과 성화는 시간의 순서 속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상이한 두 행동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서 수행된 하나님의 한 화해의 행동으로서 상이한 효과를 지닌 다른 두 가지 요소들이다. 여기서 칼빈의 신학의 독자성이 나타난다. 칼빈은 이것을 해명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연합에서 나오는 의인과 성화의 은혜를 연합하는 띠의 존재와 성격을 강조한다. 이 띠는 그리스도와 누리는 연합 혹은 교제에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가 되시고, 의롭게 하여 주심과 거룩하게 하여주심이 되고 대속하여 구원하였습니다"(고전 1:30). 여기서 볼 때, 그리스도가 어떤 사람을 의롭게 할 때는 반드시 거룩하게 한다. 그의 은혜는 영원한 띠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그가 우리를 지혜로 깨우칠 때, 동시에 우리를 구속하고, 우리를 구속할 때, 동시에 의롭게 한다. 우리를 거룩하게 할 때 동시에 의롭게 한다. 예수가 어떤 사람에게 은혜를 줄 때 그 자신도 함께 주기 때문에 그는 항상 양자를 함께 주지 어느 하나만을 주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분리해 나눌 수 없듯이 이 두 가지도 떼어놓을 수 없다. 그 분 안에서 의와 성화를 동시에 한꺼번에 받기 때문이다. 그것은 태양의 빛에서 열을 분리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 양자는 혼동되지 않아야 하나님의 은혜의 다양성과 각자의 영역과 역할이 뚜렷이 더 잘 드러날 수 있다."

콜프하우수는(W. Kolfhaus) 칼빈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지적한다. "의인과 성화는 그리스도 안에서 동시적으로 성취한 하나님의 한 화해의 행동이다. 양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동시적으로 성취된 단일한 사건이지만, 인간에게 경험되는 구원 사건의 상이한 요소들의 질서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는 다른 것의 원인이 아니고 다른 것의 결과가 아니다. 그래서 칼빈도 양자는 생각에서만 분리될 수 있고 경험에서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실천적인 삶에서 하나는 언제나 다른 하나를 동반한다." 의인과 성화는 두 종류로 분리된 하나님의 행동이 아니다. 하나님이 거룩하게 함으로, 우리를 의롭게 하는 방식이 아니라, 인간으로부터 적극적인 전제없이 자유로운 은혜에서 우리를 정의롭게 판단함으로써 우리를 거룩하게 한다. 이렇게 성화는 의인과 함께 속해 있고, 의인과 같은 근원에서 나온다. 의인과 성화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현실이고 통일을 이룬다. 그러나 성화는 여전히 독자적으로 남아 있다.

칼 바르트에 의하면 의인과 성화의 관계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와 같다. 그것들은 혼합될 수 없고, 뒤바뀔 수도 없다. 어느 하나가 다른 것에 해소되어도 안 된다. 의인은 믿음으로만 붙들 수 있고, 성화는 선행으로 표현되는 복종으로만 붙들어진다. 양자 사이에 관련성은 있지만 동일성은 없다. 양자가 혼동되면 양자의 역할이 모호해진다. 의인이 성화 속으로 해소되면 율법의 행위와 선행이 구원의 조건으로 함께 작용한다. 성화가 의인으로 해소되면 은혜의 응답으로서 윤리적 실천이 약화된다. 그러므로 양자는 서로 함께 속하면서 구분되어 각자의 영역과 기능이 분명해진다. 의인이 성화에서 분리되면 "믿음만, 은혜만"이라는 표어 아래서 신앙생활은 나태한 정적주의로 떨어진다. 그것은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이다. 그것은 본회퍼가 적시한 것처럼 "싸구려 은혜"로 변한다. 그러나 성화가 의인에서 분리되면 무분별한 영웅적 행동주의로 떨어진다. 의인이 있는 곳에 성화가 있으며, 참된 믿음이 있는 곳에 진실된 실천이 있다.

그러면 양자의 질서 관계는 어떻게 이해되는가? 거기에 선후의 질서가 있는가? 칼빈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의롭게 하시고 동시에 거룩하게 한다. 성화 없이 하나님을 볼 수 없지만 성화는 의인의 조건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양자 사이엔 시간적 전후의 관계가 없다. 내적인 질서에서 살펴볼 때, 의인이 상위에 있는 질서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은 왜 죄인을 의롭게 하는가? 의인을 통해서 하나님과 신실한 관계 안에서 사는 성실한 백성이 되고 그러한 삶을 원하는 것이다. 그것은 성화를 위하는 것이 된다. 그러면 의인은 성화의 전제로 보여지므로, 의인은 아래에 있는 질서로 보인다. 그러나 양자는 동일한 가치를 지니고 동시에 주어진 한 은혜의 두 다른 요소이므로 서로 배제하거나 우열을 말할 수 없다. 의인과 성화는 둘 다 각자의 특별한 기능과 관점에서 상위의 질서이기면서 동시에 하위의 질서이기도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한 은혜가 이 두 계기와 두 차원을 포함하면서 작용하고 창조하기 때문이다. 의롭게 하고 거룩하게 하는 은혜는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작용한다. 하나님은 그의 영광을 인간의 구원에서 구하고 창조한다.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인간과 함께 마련한 영광 안에 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영광은 인간을 의롭다 인정하는 것에서 말할 수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인간의 구원은 그가 하나님에게서 의롭게 되고 거룩하게 되었다는 것에서 말해야 한다. 그러므로 의인과 성화를 각자의 특별한 역할에서 살펴보면 첫 번째 질서가 두 번째 질서이고, 두 번째 질서가 첫 번째 질서이다. 양자의 질서 문제에 대한 이 대답은 모순되지 않고 그 내용과 의도에서 볼 때, 올바르다.

바르트에 의하면 칼빈은 의인과 성화의 관계를 그렇게 자유하게 맺고 풀면서 전략적으로 성화론을 우선적으로 다룬 근본 사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양자를 포괄하기 때문에 양자 보다 높은 곳에서 출발한다. 그 빛에서 양자는 서로 연합하고 구분되는 전체로서 모순 없이 다른 기능들을 갖는다. 그 기능들에서 그들은 서로 상위 질서이기도 하고 하위 질서이기도 한다. 그러면 칼빈이 지닌 이 근본 사고는 무엇인가? 그것은 성령을 통하여 인간에게 선사한 그리스도의 참여이다. 그리스도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갈 2:20). 이제 칼빈의 성화론의 내용을 살펴보자.

 

2. 거듭남으로서 성화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얻게 된 은혜인 성화의 내용은 무엇인가? 칼빈은 그것을 거듭남, 회개, 새로워지는 것, 성화라고 한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함으로써 옛 사람은 그의 능력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되고, 그의 부활에 동참하여 하나님의 의에 해당되는 새로운 삶으로 일깨워지는 거듭남 중생이다. 옛 사람에서 새 사람으로 전환이다. 그 전환은 그리스도 안에 근거한다 이 전환은 성령의 선물인 믿음을 통한 회개이다. 그러므로 칼빈은 거듭남과 관련하여 회개를 다양한 시각에서 깊이 해명한다.

 

1) 믿음과 회개

종교개혁의 발화점이었던 95개조 1조에 의하면 신자의 삶에서 회개는 한 번에 끝나지 않고, 일생 동안 계속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신자의 생활 전체가 회개가 되기를 원하였다. 그러면 회개는 무엇이고 그것은 언제 일어나는가? 회개와 믿음의 관계는 무엇인가?

믿음과 회개는 의인과 성화와 같이 성서에서 항상 연결되어 있다. 전자는 후자 없이 존재할 수 없고 그 역도 같다. 그들은 구별할 수 있으나 분리될 수 없다. 그러면 양자는 어떻게 구별되는가?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제공된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믿음은 은혜의 약속에 대한 존경과 자비한 하나님의 아버지 됨에 대한 사랑과 확신의 응답이다. 회개는 우리의 모든 생활을 하나님에게 복종하려고 방향을 정하고 하나님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회개는 하나님에 대한 진지하고 심각한 경외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전환, 귀환"이라는 히브리어에서 나왔고 희랍어로 "마음이나 의도"를 바꾼다는 뜻이다. 그 뜻은 우리 자신을 떠나서 전적으로 하나님께 향하고 이전의 마음을 버리고 새 마음을 입는다는 뜻이다. 회개가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라고 할 때, 그것은 외적인 행위만 아니라, 속마음 전체가 변화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과 모든 생활을 하나님에게 전향하는 것으로서 회개는 언제 어떻게 일어나는가?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버리고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돌아 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사 55:6-7). 주님은 회개시키고자 하는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기를 결정하고 만일 그들이 은혜를 얻고 싶으면 결정하라는 말이다.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자신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일어난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호의를 지녔다는 것을 믿지 않는 사람은 사랑하는 마음으로써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올바르게 회개하지 않는다. 그래서 칼빈은 회개의 근원은 믿음이라고 보고, 회개는 믿음을 뒤따를 뿐만 아니라 믿음의 열매라고 한다. 그것은 나무가 열매를 맺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런 근거에서 칼빈은 복음의 회개와 하나님의 위협과 벌에 대한 공포에서 발생한 율법의 회개를 구분한다. 그러나 복음의 회개는 하나님을 진지하게 경외하는 것을 포함한다. 죄인이 회개를 하려면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날카롭게 찔리지 않으면 우리의 육은 태만은 고쳐지지 않는다. 때로 하나님이 성령의 검으로 깊이 찌르지 않으면 우리의 육에 아무런 효과가 없다.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날카롭게 우리의 육을 찌르지 않으면 우리는 회개하기 어렵다. 사람의 삶이 덕으로 가득 차고 있다고 해도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다면 그런 삶은 세상에서 칭찬을 받을지라도 하늘에서 가증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무시하고 정욕대로 살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영적인 지도자들이 부르는 곳으로 갈 때 그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회개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복음의 회개는 하나님에 대한 진지한 경외심과 전적인 전향 없이 생각할 수 없다.

 

2) 죽임(mortification)과 살림(vivification)으로서 회개

회개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면서 하나님을 순수하게 두려워하므로 생기는 전향이다. 이런 회개는 두 요소로 구성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힘으로써 옛 생활과 정욕을 죽이는 것과 그리스도의 부활의 힘과 성령에 의한 새 생명으로 일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칼빈은 이 두 가지 사건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할 때 발생한다고 한다. "우리 엣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롬 6:6) 썩은 본성이 힘을 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였으니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므로 산다"(갈 2:20). 우리가 그의 부활에 참가한다면 그 부활의 힘으로 부활하여 새로운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의에 상응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칼빈은 회개를 거듭남이라고 한다. 거듭남은 옛 자아(육)는 죽고 물과 성령으로 새롭게(영으로) 출생하는 것이다(요 3:6).

칼빈은 옛 자아가 죽는 것을 두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는 내적인 것으로 악과 패역으로 가득찬 자아와 육을 죽이는 것이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간의 본성을 부정하고 처리하는 것이다. 이것의 가장 완전한 모범은 그리스도이다. 그는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복종하고 자아에 대하여 죽었다. 그는 자신의 의지를 죽였다. 이것은 내적인 죽임이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내던졌다. 그리고 몸으로 견딜 수 없는 치욕과 고난을 당했다. 이것은 외적인 인간의 죽임이다. 그리스도와 지금 사귀는 신자도 그리스도와 같이 내적인 자아와 외적인 인간이 죽임을 당하고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의 향락과 육의 욕정과 탐욕을 포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그렇지만 자기 부정이 선행되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으로 돌아갈 수 없다. 자기 죽임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칼빈은 여기서 하나님의 칼이 우리를 쳐죽여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또한 성령이 우리의 마음을 감동하여 새로운 생각과 마음으로 그의 거룩함에 깊이 잠길 때 우리는 내적으로 새로워졌다고 말할 수 있다. 외적인 인간의 죽임은 건강, 지위, 명예, 우정과 지상의 생명의 상실로 일어난다. 내적인 자아와 육의 죽임은 외적인 인간의 죽임과 일치된다. 양자의 죽음은 같은 목적을 갖는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의 죽음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것은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르는 제자직이다.

"살림(vivification)은 우리가 옛 자아를 죽이고 성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창조된 새 사람을 입는다."(엡 4:23-24)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와 구원을 깨닫고 다시 살아나서 하나님을 향하여 거룩하게 헌신적으로 살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영광에 참여하는 삶이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영광에 참여는 그의 십자가와 수치에 참여하는 것과 분리될 수 없다. 이것은 그의 부활은 죽음에 포함되고 그의 죽음은 부활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서 "죄는 폐기되고 죽음은 절멸되었다. 그의 부활에 의해서 의는 회복되었고, 생명은 부활되었다." 이것을 신자의 삶에 적용하면 그의 죽음에 참여함으로 악은 우리 안에서 정복되고, 철폐된다. 우리의 자랑도 명예도 함께 죽은 것이다. 그의 부활에 참여함으로 우리 안에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것이 된 것이다(고후 5:17). 이 새로운 삶은 하나님 나라가 최종적으로 완성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지만, 그것은 이미 우리 안에서 시작하여 힘을 발휘하고 있다. 이 신생은 신자들 안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의 현실화이며 궁극적인 부활 생명의 선취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고 함께 죽고 함께 사는 신자는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창조된 새 사람으로 거듭난 사람이다"(엡 4:23-24). 그는 어두운 일을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고 선행과 의로움과 성실함을 통하여 그의 내적인 변화를 드러낸다. 칼빈은 이러한 삶을 잃어진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라고 하고 그 회복은 한 순간이나 하루나 한 해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한 평생이 필요하다고 한다. 루터가 말한 것처럼 칼빈도 신자는 평생 동안 회개를 하고 죄악과 평생 동안 싸워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신자들은 회개와 믿음을 통하여 성화를 체험하지만 현재에선 죄없는 완전성을 성취하지 못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성취될 미래적인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희망하면서 순례하는 도중에 있다. 이 도상에서 우리는 매일 육을 죽이는 싸움을 해야 한다. 육을 죽이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고 훈련하고 드디어 육을 완전히 죽이고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서 주관하도록 하는 것이 신자의 생활이다.

 

3. 성화의 생활

 

칼빈은 성화로서 믿음. 회개. 거듭남을 다룬 후 이제 성화는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신자의 삶을 통해서 구체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의인은 선한 열매 없이 존재할 수 없으므로 성화는 이제 믿음의 생활로 이어진다. 하나님의 거룩함이 그리스도와의 친교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입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부르시는 곳으로 나간다. 성화의 생활은 바로 그곳에서 이루어진다. 신자의 생활은 이론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마음 깊은 곳에서 복음의 효력이 침투하여 인간을 개조하고 영향을 주어 일상생활을 통하여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은 어디서나 그에 대한 경배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서 마음의 완전성과 신실을 요구한다. 마음의 신실한 단순성. 순결한 마음, 위선과 가장이 없는 진실성은 영적이다. 이 영적인 생활의 출발점에서 거룩함과 의로움을 성장시키고 체득하기 위하여 마음의 깊은 감정을 진심으로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 이것은 순례자의 길이므로 성공이 작아도 낙심하지 말고 노력을 중단하지 말라고 격려한다. 목표를 바라보고 만족에 빠지지 말고 악행을 변명하지 말고 단순한 마음으로 목표를 바라보면서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친교에 들어갈 때까지 종점을 향하여 계속 분투하는 것이 성화의 삶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로 소명을 받은 자들의 생활이다. 그의 제자들이 참으로 그를 따르려면 제자들의 길을 걸어야 한다. 칼빈은 마태 16장 24절에서 그리스도 자신이 말한 제자직의 규범을 근거로 두 가지를 말한다. 그것은 자기 부정과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1) 자기 부정

칼빈은 인간의 본성의 부패를 깊이 인식하고 있다. 원죄로 인하여 인간의 감정, 정열, 능력, 목적 추구들과 같은 요소들이 완전히 부패하고 무용지물이 되지 않았지만, 샘근원이 독약으로 오염된 것처럼, 썩은 뿌리에서 썩은 가지가 나온 것처럼 인간 본성의 근원적인 부패로 인간의 마음은 끝없는 탐욕과 정욕과 향락을 추구하고 비리와 악을 행한다. 지성과 의지, 영혼과 몸 전체는 탐욕과 정욕으로 더럽혀져서 인간은 악을 행할 수밖에 없다. 바다는 채울 수 있으나 인간의 탐욕은 채울 수 없다. 마음의 자연적인 사악으로 인간은 하나님이 준 세계의 모든 선과 아름다움과 자원을 파멸시키고 오용한다. 그의 의지는 선을 행하는 데는 무력하고 악을 행하는 데는 자유하다. 인간의 의지는 어거스틴 루터 칼빈이 지적한 것처럼 악의 노예가 되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 것이다. 자연의 욕망을 추구하는 삶은 결국 자신만 아니라 이웃도 사회도 파멸시킨다.

이러한 근원적인 인간의 마음의 부패와 불타는 탐욕을 보면서 칼빈은 신자의 삶을 악과의 치열한 전투로서 규정한다. 신자의 삶은 우리 자신과 지속적으로 전투하는 것이며, 우리를 탈선시키려는 모든 유혹과 정열과 충동과 싸우는 전투장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화에서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를 본받아 살기를 원하고, 이웃을 사랑하려 한다면, 우리의 본성이 무엇이든지 그것과 싸워야 하고, 멸절시키고 죽여야 한다. 우리의 본성과 자연적인 욕망을 그렇게 공격함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직의 표식인 참된 단순성과 정직성에 이를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와 뜻과 우리의 본성은 결코 평화스럽게 공존할 수 없다. 그것들은 불과 물처럼 서로 용납될 수 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더 지배하려고 할수록, 우리 안에서 그에 대한 반대도 강하게 일어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거부하는 정욕과 사악, 반역하는 자연적인 성향을 부정해야 한다. 그러한 자기 부정을 통해서만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이라고 불릴 수 있다.

자기 부정의 본질적인 부분은 먼저 우리는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고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주이고, 우리 자신이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자각하는 것이다(고전 6:19). 우리가 주의 것이므로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롬 12:1) 우리 자신을 드리어 하나님의 영광만을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래서 이성과 의지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고 이성의 지배권을 빼앗아 하나님께 드리고, 육의 향락이나 기쁨을 추구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이 전적으로 지배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의 사욕을 도모하는 것이 우리를 가장 효과적으로 파괴하는 해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부정했는가를 분명하게 시험해 보는 것은 우리 자신에 대한 평가와 자랑과 의심을 버리고 그 대신에 복음에 계시된 하나님의 지혜와 평가를 받아들였는가를 확인하는 것이다. 신자의 삶은 지속적으로 이성과 마음의 자연적인 평가와 사변을 떠나서 그리스도에게 모든 것을 위탁하고 순종하는 것이다. 이것은 쉽지 않지만 하나님의 은혜에 지속적으로 의존하고 엄격히 훈련함으로 극복될 수 있다. 자기 부정은 감정과 마음의 악한 정열과 사악한 감정을 극복하려는 훈련을 포함한다. 이것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을 걷는 훈련이다. 세상의 부와 명예를 얻으려는 마음의 갈망과 소유와 생명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포기하는 것은 자기 부정의 본질에 속한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얻기 위하여 모든 보화와 자랑을 버리는 바울의 고백에 일치된다.

자기 부정의 본질적인 다른 부분은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도 자신을 섬기려는 제자들에게 절실히 요구한 것은 자기 부정이다(마 16:24). 자기 부정이 확립되면 자만과 허식이 용인되지 않는다. 우리가 참되게 하나님 앞에서 살면 교만과 과장된 허식을 피할 수 있다. 욕망과 자랑을 없애는 유일한 길은 자신에 대한 걱정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을 추구하고 그가 기뻐하는 일을 전심으로 실행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자기 부정은 자신의 광적인 노력과 근면으로 재산과 명예와 부를 추구하지 않는다. 그는 주께서 주시는 복을 받으려 한다. 주께서 주시는 복에 몸을 맡기면서 평화와 안심을 얻는다. 우리의 수완이나 수고에도 주께서 도우시지 않으면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다. 그러나 주께서 축복하시면 모든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일이 우리에게 유익한 기쁜 결과가 될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아니면 우리가 얻은 복은 우리를 불행하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좋은 결과를 얻으려면 하나님이 내리시는 복만을 토대로 삼고 항상 주를 우러러보고 주의 지도를 받아 주께서 정하신 처지에 도달하도록 하는 것이 합당한 태도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순결하고 올바른 생활을 하고 그것을 구하는 사람은 잘못된 사고와 악한 생활에서 돌아서게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되는 것들을 바라면

서 하나님의 도움으로 그것을 얻으려는 것은 어리석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그의 모든 수고를 통해서 얻은 부귀는 충분하게 보일지라도 참된 기쁨과 행복을 거기서 얻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모든 장애물을 극복하고 모든 문제들은 유리하게 기쁘게 해결될 것이다. 일이 바라는 대로 되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고 하나님의 선한 섭리를 신뢰하면 세상의 부귀와 영예를 넘어선 하나님의 평화와 위로를 경험한다. 자기 부정의 진정한 내적인 검증은 자신의 모든 소유를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 순결한 마음과 올바른 행동으로 하나님이 주신 복을 기다리며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려고 힘쓰고 있는가에서 확인된다. 그러면 우리는 사악한 계략과 탐욕으로써 재물을 취하려고 하지 않은 것이고, 지위와 명예를 쟁취하기 위하여 이웃을 해치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자기 부정의 중요한 요소가 발견된다.

이러한 자기 부정은 모든 인간이 맹목적으로 지닌 자기애를 버리고 이웃에 대한 바른 태도를 갖게 한다. 모든 사람은 자신 안에 왕국을 건설하고 자신이 왕좌에 앉아 있다. 그리고 그는 자기와 비교하여 이웃을 경멸하고 자만에 빠져 있다. 타인의 과오는 침소봉대하여 폭로하고 그의 인격과 윤리 생활을 비난하지만, 자신의 큰 수치는 숨긴다. 이것은 가장 무서운 독약과 같고 전염병과 같다. 이 병을 치료하는 유일한 약은 성서의 교훈이다. 모든 재능과 지혜는 하나님의 선물이므로 자신의 것이라고 자랑할 수 없다. 동시에 다른 사람의 재능도 하나님이 준 선물이므로 그것을 존중해 주고 이웃에게 준 영예를 우리가 훼손하면 그것은 큰 죄악이다. 결점이 있어도 이웃을 관대하게 대하고 그를 다정한 마음과 겸손한 정신으로 대하라는 것이 성서의 교훈이다. 진심으로 자신을 낮추고 이웃을 남보다 낫게 공손하게 대하라는 성서의 교훈은 우리의 마음속에 깃들인 투쟁욕과 이기심을 치료한다.

이제 칼빈은 적극적인 자기 부정의 성격을 밝힌다. 자기 부정은 이웃의 관계에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고(빌 2:3) 진심으로 다른 사람에게 선행을 행한다(롬 12:10). 자기를 부정한 사람은 이웃의 유익을 위하여 기쁨으로 자신의 의무를 다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웃을 도울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은사를 맡겨 주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 은사를 효과있게 가장 잘 사용하는 청지기가 되어야 한다. 그 청지기의 유일한 자격은 사랑의 실천이다. 우리가 실천해야 할 이웃의 봉사와 사랑은 사람의 종류와 그 가치에 따라서 결정되지 않고 그들의 반응과 관계없이 실천되어야 한다. 우리는 모든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며 그 형상에 경외와 사랑을 표현해야 한다. 불의한 행동이나 감정으로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게도 그의 악의를 보지 않고 그들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며 그를 선대하는 것이 자기를 부정하는 삶이다. 이러한 자기 부정은 역경을 견디는 힘을 준다. 생사 화복을 주장하는 분은 선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자기를 부정하는 신자는 추수를 얻지 못하는 황량한 처지에서도 하나님은 일용할 양식을 주실 것을 믿는다. 그는 자신의 모든 소유를 하나님에게 위탁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섭리의 손은 우리에게 행복과 불행을 가장 공정하게 배정한다는 것을 확신하므로 우리는 역경에서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생각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인내하고 순종하게 된다. 이것이 자기 부정이 주는 큰 유익이다.

위와 같이 칼빈이 밝힌 성화 속에서 이루어진 자기 부정의 삶은 단순히 자기 극기와 엄격한 훈련을 통하여 발생되지 않는다. 그것은 성령으로부터 복음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속에 일어난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이 믿음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한다. 그러면 그의 거룩함과 새로운 생명이 정욕과 교만으로 가득한 우리의 옛 사람을 죽이고 의와 진리와 빛으로 창조된 새로운 사람으로 일으킨다. 자기 부정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 존재로 지음을 받는 자들의 생활에서 나타난다. 그런 점에서 자기 부정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열매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자신을 죽이는 현실적인 과정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칼빈은 신자와 교회의 삶에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살아 있는 교제를 말한다. 나무의 가지가 뿌리에서 양분을 끌어내듯이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신비스러운 에너지를 끌어낼 수 있다. 참다운 자기 부정의 비밀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 참여가 성령의 역사를 통한 믿음으로 일어나기에 칼빈은 자기 부정을 성령의 역사라고 말한다.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하는 것은 육의 정욕을 죽이는 성령의 능력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령의 이러한 효과적인 역사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마음을 성결하게 씻고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 안에서 성화의 열매를 맺는다.

 

2) 십자가를 지는 것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저마다 져야 할 십자가가 있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삶이 내적으로만 아니라 외적으로 그리스도와 일치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수많은 시력과 고난의 쓴잔을 마실 각오를 해야 한다. 먼저 그리스도 자신이 십자가를 졌을 뿐만 아니라 그의 생애가 끊임없는 십자가였다. 머리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의 몸과 지체가 된 우리들의 십자가는 다를지라도 머리와 몸은 서로 연합되어 있으므로 우리는 십자가를 회피하려고 하면 안 된다. 우리의 고난은 머리된 고난 당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루고 그의 제자들과 연합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은 십자가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선택한 자가 되는 것은 신약에서만 아니라 구약에서 고난의 공동체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특별히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하여 혹은 의를 위하여 고통을 받고 궁지에 몰리고 감옥에 가고 명에와 재산을 뺏기고 생명을 희생까지 참고 견디는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다른 사람과 구별하는 "특별한 표식"이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지는 십자가를 통하여 훈련하고 단련시킨다. 그는 그의 백성들이 믿음의 생활에서 당한 고난을 그리스도의 고난에 관계시키고 성화시켜 영광에 참여하게 한다. 그의 제자들은 많은 고난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사귐을 심화시키고 그것은 확실히 보장받게 된다. 우리는 십자가를 질 때, 우리의 성화 과정이 진전되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가게 된다는 확신으로 우리 자신을 강화하고 인내할 수 있다. 십자가를 지는 것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와 친구가 된다. 제자들과 교회가 십자가 아래서 고난을 당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고난에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됨으로, 그들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사귀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친교를 경험하고 그리스도의 죽음의 친교에 참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와 밀접한 친교로 우리를 이끌기 때문에 우리는 고난 자체가 복이 되고 구원을 촉진하게 됨을 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기쁨으로 질 수 있다.

칼빈은 이제 십자가의 교육적인 면을 강조한다. 그것은 인간의 교만과 자랑을 꺾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완전히 믿도록 한다. 우리가 평화로울 때, 우리의 용기와 인내심을 자랑하면서 하나님의 은혜 없이도 자신의 능력으로 선을 행할 수 있다고 교만하기 쉽다. 이 교만을 억제하려고 하나님은 치욕, 빈곤, 가족의 죽음, 병과 기타의 재난으로 우리를 괴롭힌다. 그러면 우리는 재난 속에서 자만심이 꺾이고 항복하고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간구한다. 하나님의 능력만이 재난을 극복한다는 것을 믿는다.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 위에 서 있다는 것을 아는 거룩한 사람도 하나님이 십자가의 시련을 통해서 그들을 깨우치지 않으면, 자신의 용기, 선과 지혜를 과신한다. 십자가의 고난은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육에 대한 신뢰를 버리게 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하는 은혜에 몸을 맡기게 한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하나님의 신실을 경험하는 기회와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가져다준다. 하나님의 신실과 은혜는 십자가를 걸머지고 인내하는 중에서 경험된다. 그러면 우리는 승리하게 되고 미래를 희망할 수 있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심으로 앞으로도 신실하리라는 확증을 주시기 때문이다. 칼빈은 이 점에서 우리는 십자가를 질 필요가 분명하다고 한다.

십자가는 우리의 인내와 순종을 훈련시킨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통해서 그의 충성과 믿음과 인내와 순종이 신실함을 증명했다. 우리의 믿음도 시련으로 연단 되고 시험되고(벧전 1:7) 십자가를 통해서 받은 은사와 덕성을 활용할 수 있게 된다. 십자가 없으면 인내력도 없을 것이다. 신자들은 십자가를 통해서 순종을 배운다. 그래서 자신의 가벼운 생각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기를 배운다. 모든 일이 자신의 뜻대로 이룩되면 하나님을 따른다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약일 수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배반하고 무시하고 타락하기 쉽다. 우리가 충동으로 날뛰지 않게 하고 풍부한 재산으로 방탕하지 않도록 하고, 자신의 명예에 교만하지 않게 하고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자랑할 만한 것 때문에 거만하지 않도록 하나님은 십자가의 치료법을 사용하시어 우리를 제압하고 굴복시킨다. 하늘의 의사로서 하나님은 어떤 사람은 부드럽게 치료하고 어떤 사람은 가열 차게 다룬다. 그러나 그는 모든 사람을 건강하게 하시려고 그런 십자가의 치료법을 사용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병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우리의 죄와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일 수 있다. 그가 징계하는 것은 우리를 유익하게 하려는 것이다. 타락했을 때, 하나님의 책망을 듣고 혹은 징계를 받고 돌아서지 않으면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더 큰 징계를 내린다. 그것은 우리가 참된 그의 아들이기 때문이다(히 12:8).

칼빈은 이제 의를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고통을 받고 박해를 당할 때, 지는 십자가를 강조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특수한 휘장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악을 거부하고 의를 위하여 일어설 때 재산과 명예와 생명을 잃을 위험에 부딪힌다. 때로는 투옥, 추방, 감옥에 수감, 치욕을 당하고 사형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때 우리는 슬퍼하거나 낙심하지 말자고 한다. 그것은 하늘의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신비한 은혜를 주시고 하늘의 상급을 클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집에서 추방되면 그는 하나님의 가족으로 더 친근하게 영접을 받을 것이다. 모욕과 박해를 받으면 그는 하나님 나라에서 더 영광스러운 자리를 얻을 것이고 괴로움과 멸시를 당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더 굳게 뿌리를 내릴 것이다. 죽임을 당하면 복된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이 열린다.

빈곤과 고통은 우리의 가슴을 찌르고, 불안하게 하고 죽음의 공포는 견딜 수 없게 할 수 있다. 우리가 처한 역경은 가혹하게 우리를 괴롭히고 병고로 신음하게 하며 불안하게 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고통으로 연단을 받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깊은 경외와 순종으로 가득 차게 되면, 인간의 지각을 뛰어난 그리스도의 평화가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고 하나님이 위로와 격려를 믿음으로 경험하면서 불의를 저항하고 의를 행하고 복음을 위하여 박해를 감당할 수 있게 된다.

고통의 가시가 찔러서 피가 흐르고 눈물을 억제할 수 없을 지라도 주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신앙의 결단으로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감수하자고 칼빈은 말한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고통은 하나님의 의와 구원이 드러날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아니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인식에서 우리는 십자가의 학교에 입학하여 훈련을 받고 연단을 받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 없이 영광이 없다. 그러므로 고난을 참고 견딜 때 우리는 영적인 기쁨을 느낀다. 십자가의 고통은 영적인 기쁨으로 조절될 필요가 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삶의 비범성이 깃들인다.

이상에서 칼빈의 의인론과 성화론의 내용을 살펴보았다. 루터는 의인론을 회피하거나 포기하면 하늘과 땅이 무너지고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교황과 악마와 세상을 맞서 가르치고 살게 되는 모든 것이 의인론 위에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의인론은 루터에게서 신학의 핵심 주제였다. 바닷물이 범람하여 제방을 무너뜨리듯이 그것이 무너지면 그에게서 복음 진리는 여지없이 무너진다. 그러나 그것은 칼빈의 신학에서 핵심적인 주제는 아니었지만, 기독교인의 삶을 지탱하는 중요한 돌쩌귀(요점)이었다. 의인론은 죄의 용서에 근거하는 하나님과의 화해, 죄인에게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인정하는 믿음을 토대로 죄인을 의롭다고 판결하고 선언하는 하나님의 심판의 성격, 성령의 은사인 믿음을 통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문제들을 다루기 때문이다. 그래서 칼빈은 의인론은 구원의 토대와 참된 경건을 세울 수 있는 기초가 된다는 것이며, 그래서 의인론을 잘 이해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했다. 칼빈의 의읜론의 내용은 칼빈의 그것과 대동소이하다. 그러나 그는 루터와 달리 성화를 의인론의 결과나 그 열매로 보지 않고 양자를 동일한 가치로 파악하고 있다.

선행이 의인을 얻는 데 기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윤리적으로 바른 삶은 의인을 얻는 데 함께 작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선행과 윤리의 열매 없는 의인은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칼빈의 의인론의 특징이다. 의인은 성화의 단순한 원인이 아니고 성화의 계속적인 근거라면, 성화는 의인의 단순한 결과가 아니라 신자의 구체적인 생활에서 의인을 지속적으로 성취하는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의롭게 한 사람을 동시에 거룩하게 한다.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은 성화와 의를 포함한다. 그러므로 의인과 성화는 칼빈의 신학에서 구별될 수 있으나, 양자는 결코 분리되지 않고 항구적으로 함께 연결되어 있다. 여기서 볼 때, 선행 혹은 성화의 삶 없이 우리는 의롭게 될 수 없으나 동시에 선행으로써 의롭게 된 것이 아니다. 이것이 종교 개혁적인 신학의 전통에서 다양한 색깔을 지니고 발전되었지만, 칼빈 신학은 강력한 윤리의 근거를 확보하였고 그것은 개인적인 윤리와 정치-사회적인 윤리로 발전되었다. 그의 성화론에 기초된 기독교의 윤리는 그를 건설적 혁명가로 부를 정도로 서구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는 사회의 불평등을 인간의 죄라고 규정하고 비난하고 빈곤의 해결을 위해서 노력했다. 그래서 그는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된 사람들의 사회이므로 그 생활을 통해서 정의, 빛, 사랑들을 나타내고 실천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고 했다.

이런 면에서 그가 기독교 강요에서 펼친 성화의 삶은 개인적인 윤리를 중심으로 하지만 그의 성화의 윤리는 교회와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 정치-경제의 질서에까지 적용될 수 있는 틀을 마련했다. 그래서 칼빈의 영향을 받은 법학자들과 정치 사상가들은 인권 신장 문제와 정의 실현에 크게 기여해왔다. 그러므로 칼빈이 말한 것처럼 동전의 양면과 같은 성화론은 단지 혀의 문제가 아니고 기독교인들의 실천의 문제이다. 그것은 개인적인 차원과 사회적인 차원에서 함께 논의되고 실현되어야 한다. 물론 중세기 신학자인 칼빈의 성화의 윤리와 정치 사상이 최첨단의 기술-정보가 지배한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대로 실천될 수 없고 이해될 수도 없는 많은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정치 설교와 사회의 이른, 정의 문제와 부와 빈곤의 문제, 시민 저항의 원리들은 개혁 교회의 선교가 나갈 수 있는 방향을 분명하게 지시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일부 보수적인 개신 교회와 신자들이 칼빈 신학을 빙자하여 "신앙만으로만" "은총만으로만" "성서만으로만"이라는 표어를 내걸고 교회 안에서만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면서 칩거해 왔다. 그들은 개혁 신학과 개혁 교회가 세상을 위하여 수행해야 할 정치-사회적인 책임을 회피하고 현상 유지에 만족했다. 이제 우리는 종교 개혁자들, 특히 칼빈의 성화론에서 내향적이고 소극적인 신앙 생활의 양식을 극복하고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믿음의 선한 싸움, 정의의 싸움을 힘써 싸우며 십자가를 지라는 기상나팔 소리를 새롭게 들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세상을 위한 책임이라는 것은 우리가 소명을 따라서 일하고 있는 모든 현실, 즉 정치, 경제, 문화, 사회와 종교, 교육의 개혁을 위한 투신을 말한다. 의롭다 함을 받음으로써 전에는 알 수 없었던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그와 상응한 응답으로서 새로운 윤리적 사고를 향해 출발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의인론과 성화론은 시대의 변화를 넘어서 복음 진리의 연속성을 확보하고 신앙의 경험을 새롭게 하며, 신앙과 실천의 밀접한 상관관계를 현실감 있게 조명하기 위하여 더욱 심화되고 발전되어야 할 것이다.

 

 

맺는 말

 

 

카뮈는 인간 본성의 내적인 상황을 소외, 순결 상실감으로 파악한다. 인간은 고향에서 쫓겨나 뜨내기로서 불행하게 낯선 곳을 헤맨다. 그는 삶의 의미와 목적을 상실하고 박탈감에 젖어 있다. 가장 깊은 곳에서 상실, 소외, 거짓됨, 부조리와 허무를 느낀다. 본향을 떠난 그는 길을 찾지 못하여 낭패감에 젖는다. 실존적인 비극 속에 휘말려 있으면서 권력과 돈을 거머쥔 자들은 권력의 의지와 탐욕의 노예가 되어서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아니라, 국내외적으로 약자를 억압하고 착취한다. 그들은 가장 무도회를 열고 온갖 불의를 획책하고 이권을 노린다. 현대 사회에서 인간의 능력과 성취가 만물의 척도이다. 권력 엘리트들과 기술 관료들은 자신들의 능력과 성취감에 젖는다. 그들은 구원을 창조하기 위하여 필요한 자원과 능력을 스스로 지니고 있다고 믿기에 신도 이웃도 필요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로 인한 사회악은 지능화 되고 고질적이다. 사회 변두리로 밀려난 무력한 사람들과 능력을 박탈당한 자들은 빈익빈 부익부가 구조적으로 심화 확대되는 부조리한 현실에서 분노한다. 그들은 체념하고 절망하거나, 최소한도의 생존권을 확보하기 위하여 특권층과 싸울 수밖에 없다. 모든 사람은 모두에게 적대감을 갖고 속인다. 이것이 인간의 원죄에서 발생되는 비극적 상황이다.

실존적인 비극적인 상황에서와 정치-사회에서 발생되는 구조적인 악순환 속에서 의인과 성화가 지닌 현실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여기서 인간 실존의 가장 깊은 곳과 마주쳐서 이기욕과 아집과 협잡의 사슬에서 해방시키는 진리가 요청된다. 머리로만 아는 지식이 아니라 가슴으로 체험하고 느껴서 그의 전존재를 새 존재로 변화시키는 진리가 필요하다. 병든 마음과 영을 치료하고 삶의 의미와 방향을 새롭게 선사하여 이웃의 자유와 복지를 위하여 헌신할 수 있게 하는 창조적인 진리가 요구된다.

이 진리는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실존과 삶의 중심에 부딪혀 놀라운 충격을 일으키고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는 행동적이고 인격적인 진리이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죄인을 만나서 사죄와 용서를 선언하고 그를 얽어맨 모든 속박에서 풀어서 자유하게 하고 새롭게 변화시키는 진리이다. 그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역사적인 사건이 되었고 모든 시대와 사람들에게 효력을 갖는다. 루터는 바로 이 진리를 그의 의인론과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자신의 깊은 체험과 실존적인 깨달을 통해서 천명하였다. 칼빈도 루터의 영향을 받고 성서에서 의인론과 성화론의 진리를 발견하였다. 그들이 발견한 의인론과 성화론은 매우 역동적이었다. 그래서 개혁자들은 교회 공동체를 자유로운 복음의 진리 위에 확고하게 세워 나갔고 세상의 가치관을 전복하면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 나갔다.

이것은 그들이 종교의 천재들이어서가 아니라, 성서를 통해서 복음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을 만났고 발견했고 붙들었기에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 수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된 하나님은 세상에서 버림당하고 쓰레기처럼 여긴 자들을 택하고 그들에게 은혜와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불타오르는 믿음과 산 소망을 주었다. 그래서 그들은 의인 교리를 통하여 지금까지 감추어진 삶의 진정한 의미를 선사 받고 풍성한 삶을 경험하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새 존재로 거듭난 것이다. 이처럼 의인론과 성화론을 통하여 중세기를 비춘 자유화 해방의 횃불이 타올랐다. 의인론과 성화론은 개혁 교회의 진주와 같다. 그 진주의 빛깔이 신학사와 역사적인 교회의 삶을 통해서 때로 흐려진 적이 있지만, 그것이 지닌 가치는 놀라운 것이다.

우리는 개혁자들이 물려준 진주와 같은 유산 속에 녹아 있는 기본 원리를 깊이 탐색하여, 그것이 개인의 사고와 행동에 끼치는 영향력만 아니라, 교회의 개혁과 사회의 변혁에 미치는 결과를 주목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달리는 경주자들이다. 우리는 이 값진 유산들이 다음 세대에서도 빛을 발하는 진리로 전달하기 위하여 힘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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