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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포로기 구약연구-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첨부 1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A.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비교 대조하라.

(관심상의 차이)

 

문헌개요 :

노르만 엘 가이슬러. 구약성경개론, 엠마오, pp214-229

구약학회. 구약학회자료집 94-4 역사서 연구 , 총신대학신대원구약학회, pp74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동시대인이다. 두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사람이었는데 각기 다른 직업을 갖고 있었다. 에스라는 제사장이었고, 느헤미야는 평신도로서 아닥사스다왕의 궁중 관원이었다. 그러므로 에스라의 직무는 종교적이었고, 느헤미야는 시정에 관련된 것이거나 국가적인 일이었다. 각자는 그가 부르심 받은 사역을 위하여 특별히 준비된 자들이었다. 제사자이며 서기관이었던 에스라는 하나님의 율법에 기초하여 성전을 중심한 영적인 갱신에로 백성들을 인도하기에 이상적인 사람이었다. 왕궁에서의 느헤미야가 익힌 훈련은 남은 자들이 살아 남기에 필수적이었으므로 정치·물질적인 재건을 위하여 준비된 사람이었다. 지도자들로서 한쪽은 영적이고 한쪽은 사회적인 두 사람은 포로 후기의 남은 자들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다.” 따라서 느헤미야서는 에스라서의 자연스러운 후편으로서의 구실을 하고있으며 두 책들이 수세기 동안 한 단위로 간주되어졌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에스라서의 기본주제는 스룹바벨과 에스라의 지도하에 예루살렘에 돌아온 남은 자들의 영적, 도덕적 그리고 사회적 회복이다. 이스라엘의 성전 재건 예배가 소생되었으며, 그 백성이 정결케 되었다. 하나님의 신실성은 그들이 포로로 있는 동안에는 그의 백성을 주권적으로 보호하심과 이교국의 왕을 일으키셔서 그들이 고국에 돌아가 재건할 수 있도록 격려하심이다. “에스라의 과업은 율법을 중심으로 한 유대인 공동체를 재조직하는 것이었다.”

느헤미야서는 유다의 정치적 지리적 회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처음 일곱장은 예루살렘 성벽의 재건에 할애되고 있다. 예루살렘이 유다의 영적, 정치적 중심이요, 성벽 없는 예루살렘은 하나의 성읍으로 간주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B. 에스더의 내용과 주제가 무엇인지 연구하라.

 

문헌개요 :

정규남. 구약개론, 개혁주의신행협회, p356

글리슨 아처. 구약총론, 기독교문서선교회, p479

노르만 엘 가이슬러. 구약성경개론, 엠마오, p232

셀프성경. 아가페,

아가페성경사전. 아가페출판사, p1219,1230

바울성경연구씨리즈, 에스더

1. 내용

 

페르시아와 아하수에로 치세 시의 이야기이다. 아하수에로는 宴會에서 왕후 와스디로 하여금 축제의 손님들 앞에서 면류관과 아름다움을 과시하도록 요구하였으나, 그녀가 거절하자 화가 난 나머지 그녀를 폐위시켜 버렸다.

새 왕후를 선택하기 위해 경연대회가 열렸고, 기스 자손인 유대인 고아 에스더가 후보들 가운데 하나로 뽑혔고 결국 왕의 마음에 들어 왕비가 되었다. 그녀의 삼촌인 모르드개는 왕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엿듣고는 에스더를 통해 그에게 이 사실을 알렸으며 이 일은 궁중 일기에 기록되었다.

이 사건이 있은 직후 총리가 된 하만은 모르드개가 그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으려는 것에 화간 난 나머지 유대인들이 그들의 특별한 율법들로 인해 왕에게 전적으로 충성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들을 진멸할 수 있는 칙령을 왕에게서 얻어 내었다(3장). 그러나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그녀가 그녀의 백성인 유대인을 위하여 왕에게 중재해줄 것을 호소했다. 권력의 정점에 있다고 생각했던 하만은 그가 교수대에 달도록 명령했던 모르드개에게 역설적으로 경의를 표하고, 왕에 대한 음모를 발견한 대가로 그의 공적을 공표하도록 왕의 명령을 받았다. 또 다른 연회에서 에스더는 유대인에 대한 하만의 음모를 밝혔는데, 그 결과 하만은 그가 달려고 세웠던 바로 그 나무에 달리게 되었다.

모르드개는 하만을 대신하여 총리가 되었고, 유대인들이 그들을 박해하는 자들에게서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새로운 칙령이 내려졌으며 그들은 그들의 대적을 진멸하게 되었다. 유대인의 이러한 기적적인 구원을 기념하기 위하여 부림절이 제정되었다. 이 명칭은 하만이 유대인 학살을 위해 길한 날을 결정하기 위해 뽑은 부르, 곧 제비를 따라 지어진 것이다.

 

2. 주제

 

이 책의 주제는 주권적인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멸망시키려는 이방의 악에서 이스라엘을 지키시며, 구원하시는 궁극적인 왕되심을 보여준다. 비록 그들이 고국으로 귀환하지 않고 그곳에 안주해 있었을지라도, 하나님은 자신을 의지하는 자기 백성에게 살아계신 언약의 하나님임을 확연히 보여주셨다. 이와같이 저자는 여호와 하나님이 이 귀환한 유다 백성뿐만 아니라 이방나라에 남아 있는 유다 백성들도 원수의 손에서 지키시켜 보호하신다는 것을 본서를 통해 보여 주려고 했다. 따라서 전능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만이 유일한 의뢰할 대상임을 논증한다.

 

C. 포로후 시대의 이스라엘 역사에 일어난 변화

 

문헌개요 :

레온 우드. 이스라엘의 역사, 기독교문서선교회, pp417-445

김희보. 구약이스라엘사, 총신대학출판부,pp409-451

구약학회. 구약학회 자료집 94-4, 역사서 연구, pp78-79

 

예루살렘의 몰락과 주요 백성들의 추방은 유다 역사에 급격한 변화를 가져왔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종교적 위기였다. 그들의 종교활동의 중심지였던 성전이 파괴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야훼에 대한 신앙은 무너지고 강대국들의 신전의 웅장함과 약소 민족의 비극 앞에 그들의 유일신 신앙은 심각한 의혹을 받게 되었다. 예루살렘은 민간생활의 중심으로 이어왔으나 이제는 폐허가 되었다. 유능하고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 바벨론으로 추방되었으므로 그 밑의 사람들이 결정하고 정책을 수립하여야 했다. 그러나 생활양식이 바뀌었다 할지라도 유다의 역사는 계속되었다. 추방은 일부분에 속한 것이었고 평민들이 구성하고 있는 대중성은 계속 이어져 나갔다. 많은 사람들이 애굽에까지 이주해 거주하기도 하였다.

 

유대인들이 포로로 잡혀갔을 때(바벨론 포로시기;605-539)는 바벨론의 세력이 전성기에 달한 신바벨론 제국시대였다. 제국적인 지위는 느부갓네살의 통치로 이루어졌으며, 고레스 대제의 지휘 아래 페르시아 군대가 패배를 가져다 준 주전 539년까지 계속 되었다. 유대인 포로들은 이때의 초기부터 페르시아 정복 후 까지 그곳에 남아 있었다.

이들 포로 중에는 다니엘과 같이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일반 포로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그의 조상이 애굽에서 당한 속박의 상태와는 대조적으로 비교적 안락한 생활을 했다. 그들 나름대로 조직이 유지되고 있었으며, 이주의 자유도 있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서신의 특권까지 누려, 유다에 있는 친구들에게 편지를 쓸 수 있었다. 또한 고용의 기회가 있었으며, 비옥한 땅에서 살았다.

 

이들의 징계는 70년의 외국인 지배 후 끝이 나는데 이들의 귀향이 이루어지기 전에 세계 주도권에 변화가 있었다. 그것은 페르시아가 바벨론을 패배시키고 주권을 장악하게 되는 사건이었다. 이제 유다의 귀향과 그 이후 역사는 이 새 세력 밑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이 페르시아의 판도 밑에 유대인에게는 중요한 사건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 중에서 중요한 것으로는 세번에 걸친 귀환이었다. 첫번째는 페르시아의 바벨론 정복 직후인데(주전538, 스1:1) 세스바살이 이끌었다. 이제 유대인 공동체의 재건은 시작되었다. 그러나 소수의 무리만 귀환했다. 왜냐하면 너무먼 거리의 여행의 위험과 복구사업의 장래의 막연함과 또 이때 유대인들은 바벨론에서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본국으로 돌아가 이들이 해야할 첫번째 일은 성전을 건축하는 일이었다. 주위의 반대도 있었지만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의 독려와 스룹바벨의 노력으로 다리오 6년에(주전515년 3월, 스6:15) 성전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스가랴에 의해 설파된 다윗 왕권의 재건과 구속이 이루어지지 않다, 고조되었던 유대 공동체의 희망은 실의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성전은 그런데로 백성의 모임의 장소로서 신앙을 일깨워 주며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의 제의 공동체라는 일체감을 심어 주었다.

 

두번째는, 80년 후로서 아닥사스다 롱기마누스(Artaxerxes Longimanus, 주전458, 스7:7) 7년째 해인데 에스라가 이끌었다. 에스라 역시 페르시아 왕으로부터 귀환에 대한 주목할 만한 특권을 받았다. 이 특권은 원하는 모든 사람들을 데려갈 수 있는 권한이었다. 그리하여 에스라의 관심과 임무는 물질적으로 나라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을 사회적으로 정신적으로 재건시키는 일이었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눈에 들도록 살기 위해서 개혁이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에스라는 이방인과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결혼을 취소하도록 했다.

 

그리고 세번째는 그 이후 13년이 지나 아닥사스다 20년인데(주전444, 느2:1) 느헤미야가 이끌었다. 느헤미야의 목적은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는 데에 있었다. 백성들이 그 땅에 돌아온지 거의 백 년이 되는 데도 아직 성벽이 복구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성을 건축하기 시작하여 적들의 놀람과 미움속에서 52일 만에 완성되었다. 그리고 그는 공동체를 재조직하였다. 즉 느헤미야는 공동체의 정신적 지위를 확고히 하고 행정상의 개혁을 단행하였고, 에스라는 공동체의 정신(종교)생활을 재조직하였다.

특별히 에스라의 개혁은 율법에 의거한 공동체의 재건인데, 비록 그들이 페르시아의 속국으로 있어 국가적 주체성이 없고 전 세계에 흩어져 살더라도 율법을 고수함으로 하나의 실존적 민족으로서의 공동체를 존속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예루살렘의 파괴와 그에 뒤이은 포로생활은 이스라엘 역사의 커다란 분수령을 이룬다. 바벨론 제국의 일격에 이스라엘의 국가로서 존립은 끝이 났고 이와 더불어 이스라엘의 공동체적 삶을 표현하고 있었던 모든 제도도 끝장이 났다. 그것들은 결코 다시는 과거와 똑같은 형태로 재조직되지는 않을 것이었다. 국가가 파괴되었고 국가 제의도 필연적으로 중단되었으며 오랜 국가적-제의적 공동체는 결단이 났다. 이스라엘은 당분간 삶의 터전을 잃고 기진맥진한 개개인들이 몰려 사는 집단이 되어 버렸고 외관상으로는 어느 모로 보나 이미 하나의 민족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스라엘의 역사는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재난을 이기고 살아 남았고 또한 옛 공동체의 잔해(殘骸)로부터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여 하나의 민족으로서 삶을 재개하였다. 연단되고 강화된 이스라엘의 신앙도 마찬가지로 살아 남아서 앞으로의 모든 세기에 걸쳐 추구하게 될 방향을 점차로 발견해 나갔다.

귀환한 이스라엘에는 왕이 없었으며 성경의 율법을 설명할 수 있는 ‘서기관’이라는 새로운 계층의 도움을 받는 대제사장이 국가의 지도자가 되었다. 교육은 잘 수행되었는데 선지자들은 성전재건에 대한 사역의 태만과 십일조 납부의 기피에 대한 책망을 하기는 했지만 우상숭배로 비난하지는 않았다. 이들은 소수였지만, 주변 국가들과 뚜렷이 구별되었다. 특별히 이 당시 ‘차이점’을 강조했던 세 가지는 안식일의 엄격한 준수, 할례시행, 그리고 유대인의 음식에 관한 규례 등 이었다. 종교생활의 초점은 성전이 아니라, 포로기 시대에 회합과 교육의 장소로 발전한 각 지역의 회당이 되었다.

B.C.2 세기 이후 묵시문학이라는 새로운 기록형태가 출현하였다. 이러한 묵시적인 책들의 기록자들은 세계의 종말이 가깝다고 확신했다. 하나님은 그리스나 로마 같은 이방 통치자를 멸망시키고 역사의 새 기원을 시작하기 위해 이제 막 개입하신다는 주장이다.

 

 

 

 

 

 

 

 

 

 

 

 

 

 

 

 

 

 

 

 

 

 

 

 

 

 

 

 

 

 

 

 

 

D. 포로 후 시대의 국제 정치상의 변화

 

문헌개요 :

구약학회. 구약학회 자료집 94-4, 역사서 연구, 총신대학신대원, pp75-77

 

 

B.C.6세기 전반부에 바벨론은 가장 강력한 나라로 군림하였다. 그러나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바벨론에게 자신이 도구로 쓰시는 왕들을 보내실 것이며 또한 비록 이방 강대국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자신의 목적을 성취시키기 위해 그들을 이용하실 수 있다고 외쳤다.

페르시아의 고레스는 바벨론 동쪽에서 메대와 페르시아(바사)의 두 왕국을 통일하였다. 그는 동쪽 멀리 인도까지 정복하였다. 그런 후에 고레스는 바벨론을 공격하였다. B.C.593년 바벨론 성이 함락되었고 그는 제국 전체를 차지하였다.

페르시아의 왕들은 이전 제국보다 땅을 더욱 확장하였다. 그들은 이집트도 정복했으며 오늘날의 터어키 전체 지역도 차지했다. 바벨론을 함락시켰을 때, 고레스는 제국을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그는 제국을 여러 개의 주로 분리하여 각각의 주마다 ‘지방총독’이라고 불린 통치자들을 세웠다. 이 총독들은 주로 페르시아 사람들이었지만 그 휘하의 그 고장 출신 통치자들도 어느 정도의 권력을 보유하였다. 그 이외의 다른 민족들에게는 고유의 관습과 종교를 유지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이런 정책의 일환으로,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에 기록된 대로 고레스는 성과 성전을 재건하기 위해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용했다. 유대인들은 제국내의 여러 지방에 흩어져 거주하고 있었다. 또한 에스더서의 기록대로, 페르시아의 중요 도시들 가운데 하나인 수사에는 후대의 왕 크세르크세스 1세가 유대인 여자를 왕후로 삼아 같이 살고 있었다. 여러 나라에는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소환된 것 처럼 유대인의 ‘분산’은 훨씬 후대인 신약시대에도 있었다. 이렇게 흩어져 살았던 유대인들은 성전이 멀었기 때문에 교육과 예배의 중심지로써 각 지역의 회당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이 회당으로 말미암아 회당의 형태를 따라 조직된 기독교 교회는 후에 급속히 확장될 수가 있었다.

거대한 대도시 페르세폴리스의 건설자요, 서부 인도의 정복자이기도 했던 왕 다리우스(다리오) 1세(522-486B.C.)는 제국을 서쪽으로 확장하였다. 그는 B.C.513년 북부 그리스의 마케도냐를 점령하였다. B.C.490년 페르시아는 마라톤 전투에서 그리스에게 패하였으며, 이로써 역사의 무대는 아주 오래된 고대 그리스의 가장 위대한 사건들로 옮겨지게 된다. 크세르큿스1세(B.C.486-B.C465)는 그리스를 침공하여 아테네를 점령하기도 했으나 살라미스 해전에서 패배하였다. 아닥사스다, 다리우스 2세 등의 그 뒤를 이은 일련의 왕들은 계속해서 전쟁에 휘말렸다. B.C.333년 그리스의 용사인 마게도냐의 알렉산더가 헬레스폰트 해협을 건너 그의 화려한 정복 전쟁을 개시하기 전까지 페르시아, 그리스, 메대, 그리고 이집트의 운은 기복이 심하였다.

알렉산더는 22세 때, 고대 세계를 완전히 정복하였다. 그는 이집트를 페르시아로부터 해방시켰으며 페르시아 제국의 심장부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동쪽으로 진군하였다. 그리고는 동쪽으로 더 나아가 인도까지 위협하였으며, 그의 진로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정복했고 가는 곳마다 그리스 도시를 건설하였다.

그는 B.C.323년 불과 33세의 나이로 죽었는데 그가 죽자마자 거대한 그리스 제국은 그의 네 명의 장군들에 의해 분할되었다. 시리아의 안티오크에 거점을 둔 셀류시드 왕조는 팔레스타인을 다스렸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에 거점을 둔 프톨레미 왕가는 이집트를 통치하였다. 그러나 문화적으로는 통일체로서의 그리스 혹은 헬라 세계가 계속되었으며, 공용어로써 그리스어가 통용되었고, 일상적인 그리스의 문화양식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러한 배경들은 그 다음에 이어진 사건들, 곧 신약성경에 기록된 사건들에서 중대한 역할을 하였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땅에 귀환한 후, 신약시대 때 까지 약500년간 외국의 통치를 받으며 살았다. 그리스의 통치 아래에서 유대인들은 이집트의 프톨레미 왕가에 공물을 바쳤다. B.C198년 시리아의 통치자였던 셀류시드의 안티오쿠스 대왕은 프톨레미 왕가를 격파하고 팔레스타인을 점령하였다. 하지만 B.C.190년 마그네시아 전쟁에서 로마인들에게 패하였다.

로마인들은 셀류시드 제국에 가혹하게 세금을 매겼으며, 로마인들과 셀류시드 왕가의 그리스인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교대로 성읍과 성전을 약탈하곤 하였다.

마침내 이런 행동은 마카비 항쟁을 촉발하였고, 유대인들은 한 동안 자유를 쟁취하였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유대인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 로마인들이 개입할 기회를 주었다. 마지막 대제사장은 B.C.37년에 사형당했다. 그리고 유대는 시리아 주의 총독의 지배를 받는 로마의 속국이 되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종교의 자유를 계속 누렸으며 고유의 통치자를 갖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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