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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9 22:59

사소한 것들과의 생명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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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ys.jpg사소한 것들과의 생명 관계

막9:30-37, 창조절 넷째 주일, 2018년 9월23일

 

30.그 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새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 31.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32.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33.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34.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35.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36.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37.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지난 9월18일부터 20일까지 2박3일 동안 문재인 대통령은 남북 정상 3차 회담을 위해서 평양을 방문했습니다. 인상적인 장면들이 많았습니다. 그중의 하나는 문재인 대통령이 평양 시민들에게 폴더 인사를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폴더 인사는 허리를 굽히는 인사입니다. 유치원 아이들은 배꼽인사로 알고 있습니다. 이 폴더 인사가 문재인 대통령의 트레이드마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는 늘 그런 인사를 합니다. 대통령 전용 비행기 탑승 전에 비행기 점검 기술진들에게 그런 인사를 종종 합니다. 폴더 인사가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대통령 자리를 군림이 아니라 섬김으로 본다는 본인의 철학이 담겨 있기에 가능한 것이겠지요. 북한의 최고 지도자에게서는 가능하지 않은 인사입니다. 북한의 변화는 군사력으로 압박하기보다는 이런 방식으로 접근하는 게 훨씬 바람직하고 실효성이 있습니다.


자신을 섬기는 사람으로 인식하고 산다는 게 쉽지 않습니다. 사람은 본성적으로 자기를 높이는 방식으로 자신을 확인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돌아가는 풍경을 보십시오. 모두가 높은 자리에 오르려고 합니다. 자신의 능력이 닿지 않아서 포기할 뿐이지 기회가 주어진다면 자신의 능력에 넘치더라도 무조건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합니다. 예를 들어 교장이 되면 연봉도 더 적어지고 교사들 뒷바라지만 더 많아진다면 아무도 교장으로 승진하고 싶어 하지 않겠지요. 장관이 되면 연봉이 더 줄고 섬기는 일만 많아진다면 누가 장관이 되고 싶어 하겠습니까. 섬김을 받으려는 것은 인격이 고상하냐 아니냐, 하는 것과도 상관없이, 그리고 교육 수준이나 빈부차이에도 상관없이 나타나는 인간 본질에 속합니다. 세상 사람들만이 아니라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죄의 본질을 ‘휘브리스’(교만)이라고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이런 경향이 똑같이 나타났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에 이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누가 크냐?”


막 9:33절에 따르면 예수님은 가버나움의 어느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그곳이 누구의 집인지는 성경이 밝히지 않습니다. 원래 예수님이 살던 집일 수도 있고, 지인의 집이거나 제자 중 한 사람의 집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곳으로 오는 길에서 무슨 이야기로 옥신각신 했느냐고 물었습니다. 제자들은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서로 ‘누가 크냐?’로 말다툼을 벌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신학적인 논쟁을 벌였을 개연성도 없지는 않습니다. 당시 유대 랍비 신학은 천상의 낙원에서 살게 될 주민들을 일곱 단계로 분류했습니다. 누가 어느 단계에 들어갈 것인지에 대한 논쟁을 종종 벌였습니다. 에세네파에서도 비슷한 주제로 논쟁을 펼쳤습니다. 요즘 교회에서도 천국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할 사람이 있고 낮은 자리를 차지할 사람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섬김을 받고 싶다는 욕망이, 남보다 크고자 하는 욕망이 절대적인 생명의 세계에서도 작동되는 겁니다. 막 10:35절 이하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에서 제자들이 무슨 문제로 옥신각신했는지를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에게 천국에서 자기들을 각각 우편과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결정은 자신의 소관이 아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옆에서 이런 대화를 듣고 있던 제자들이 야고보와 요한에게 화를 냈다고 합니다. 이전투구 식의 논쟁이 인간의 실상입니다.


제자들이 ‘누가 크냐?’ 하는 논란을 벌이고 있을 때 예수님이 어떤 상황에 놓였는지를 알아야합니다. 그 이야기는 오늘 설교 본문의 앞 단락에 나옵니다. 예수님 일행은 갈릴리 지역을 유랑 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시선을 가능한 피하려고 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31절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우리말 성경에는 이 단락이 죽음과 부활을 두 번째로 말씀하신 것이라는 소제목이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의 운명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십자가와 부활에 관한 말씀을 듣고도 무슨 말인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모르면 다시 질문해서 정확하게 이해해야합니다만 제자들은 묻는 것도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궁극적인 것에 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관심이 없으니 그런 것에 관해서 묻지도 않고 대화를 나누지도 않습니다. 이는 마치 초등학생들이 철학에 관해서 관심이 없는 거와 같습니다. 초등학생들이라 하더라도 철학적으로 생각하는 교육을 받기는 받아야 합니다. 빅뱅에 대해서도 생각할 줄 알아야하고, 죽음과 만물의 근원에 대해서도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런 것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바로 철학입니다. 초등학생들이 철학에 관해서 관심이 없는 건 나이도 어리고 그런 교육을 받지 않아서 그럴 수 있다고 하겠지만, 사춘기를 지나서 청년이 되었는데도 생각과 삶의 수준이 초등학생들과 똑같다면 불행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제자들은 ‘누가 크냐?’에만 열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35절에서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만 존경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서로 자기가 높은 자리를 차지하겠고 다투는 제자들에게 맞춤한 말씀입니다. 이런 말씀 자체로만 보면 별로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당시 유대교 유대 랍비나 로마의 내로라하는 스승들도 이런 교훈을 제자들에게 했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말씀을 극단적인 차원으로 끌어들였다는 점에서 다른 스승들과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 하나를 데리고 와서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아이를 안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7절입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우리가 자주 들었던 말씀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어린아이들은 온전한 인격체로 대우받지 못했습니다. 여자들도 그렇고, 노예도 그렇습니다. 겸손하게 섬기는 자세로 살아야한다고 말은 할 수 있으나 어린아이를 영접하라는 말은 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말씀은 마치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처럼 당시 규범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따라가면 결국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는 말이 됩니다. 어린아이와 하나님을 동급으로 다루는 것처럼 들려서 신성모독이라는 오해를 받을만합니다. 예수님은 파격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세상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관해서, 즉 의미 충만한 삶에 관해서 말씀하신 겁니다.


어린아이를 영접한다고 할 때의 이 영접은 말 그대로 ‘받아들임’입니다. NIV(NEW INTERNATINAL VERSION) 영어 성경은 이 단어를 웰컴으로 번역했습니다. 이번 문재인 대통령의 평양 방문에서 북한은 남한 대통령과 수행원들을 진심으로 영접했습니다. 어딘가 ‘웰컴 투 평양’이라는 글자가 적힌 현수막이 달려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결국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는 이 말씀은 가장 낮은 자리에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게 우리의 딜레마입니다. 우리의 욕망은 1등이 되는 것이고 높은 자리에 올라서는 것인데, 하나님 경험은 가장 낮은 자리라고 하니, 하나님 경험이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여러분들은 이 딜레마에서 벗어나셨습니까? 아니면 세상살이가 다 그런 거지 뭐, 하면서 이런 것에 관해서 별로 이렇다 할 문제의식이 없으신가요?


잘 생각해보십시오. 1등과 높은 자리와 섬김을 받는 자리에서 누리는 삶 자체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는 것 자체는 피곤한 일입니다. 저는 그런데, 여러분은 안 그렇습니까? 요즘 젊은이들은 대중 스타를 크게 부러워합니다. 아이돌이 되고 싶어 합니다. 아이돌이 되면 연예 기획사에서 설정해놓는 프로그램에 따라서 움직여야 합니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알아보고 사진을 함께 찍겠다고 달려듭니다. 프라이버시가 유지되지 못합니다. 어느 유명한 여 가수는 조용히 살고 싶어서 제주도에 갔는데, 팬들의 극성으로 집을 팔고 다른 곳으로 옮겼다고 합니다. 이해가 갑니다. 유명한 사람이 되면 돈은 많이 벌겠으나, 그리고 사람들의 인기를 얻기는 하겠으나 영혼의 자유는 누리지 못합니다. 영혼의 자유가 없으면 생명 충만도 없습니다.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백수의 영혼이 가장 풍요로울 수 있습니다. 문제는 백수로서의 삶을 사람들이 버텨내지 못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대개는 영혼이 자유로운 백수가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백수로 전락합니다. 유랑 랍비로 살았던 예수님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영혼이 자유로운 거룩한 백수였습니다.

 

사소한 것과의 생명 관계


어린아이를 영접한다는 것은 단지 겸손하고 섬기라는 뜻에 머무는 게 아니라 사소한 것과 생명 관계가 하나님 경험에서 절대적이라는 뜻입니다. ‘생명 관계를 맺는다는 것’을 잘 생각해보십시오. 제가 대통령과 가까워서 종종 청와대에 초청받는다면 사람들은 저를 주목할 겁니다. 그러나 제가 우리교회 어린아이와 가깝게 지내는 건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제가 대통령과의 관계나 어린아이와의 관계에서 똑같이 생명 충만을 느낄 수 있다면 저는 가능한 대통령과는 거리를 두고 어린아이에게 가까이 갈 것입니다. 왜냐하면 대통령을 한번 만나려면 준비할 게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어린아이와 생명 관계를 맺을 수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게 안 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꾸 ‘누가 크냐?’에만 신경을 쓰게 됩니다. 크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봐야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닌 것을 알지만 작고 낮은 자리에서 만족하지 못하니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생명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세 가지 예로 설명하겠습니다.


첫째는 여행입니다. 우리나라 경제 수준이 높아져서 해외여행을 다니는 사람들이 크게 늘었습니다. 저도 이제 나이가 더 들기 전에 오지 여행을 하고 싶습니다. 페루의 안데스도 동경의 대상입니다. 여러분도 기회가 되면 여러 곳을 다녀보기 바랍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여행 다니는 것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멋진 곳을 가지 않는다고 해도 제가 지구에서 살아가는 한 모든 것이 다 황홀할 정도로 아름답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알프스나 에베레스트 산지를 보는 것이나 제가 살고 있는 영천 원당에서 앞산을 바라보는 것이나 똑같이 황홀한 겁니다. 앞마당에서 군무를 이루는 코스모스를 보는 것만으로, 또는 조용히 내리는 가을비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또는 하늘의 구름과 달의 풍경 앞에 서는 것만으로도 삶의 환희와 자유를 누릴 수 있다면 그는 지구에서 가장 엄청나고 가장 아름다운 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비싼 돈을 들여서 먼 곳을 가지 않고 돈 한 푼 들어가지 않는 이곳에서 똑같이 생명의 절정을 느낄 수 있다면 굳이 돈을 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문제는 어린아이처럼 작은 사람이나 낮은 자리에서 생명 충만을 누릴 줄 모른다는 데에 있습니다.


둘째는 교회입니다. 한국교회는 세계에서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빈부격차가 큽니다. 몇 십만 명이 모이는 교회가 있는가 하면 몇 십 명도 모이지 않는 교회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물론이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마저 대형교회에만 관심을 둡니다. ‘누가 크냐?’ 하는 논쟁을 벌인 제자들의 관심이 지금도 계속되는 중입니다. 저는 대형교회 자체를 매도하고 싶지 않으나 어느 교회에서든지 복음의 기쁨과 자유를 누릴 수 있다면 오히려 작은 교회를 선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로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큰 교회에서 많은 목회 업무에 시달리는 것보다 자신의 능력만큼 목회하는 게 실질적으로 행복한 겁니다.


셋째는 돈입니다. 앞의 두 항목은 동의하지만 돈에서만큼은 동의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를 영접한다는 말은 가난한 삶을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이게 쉽지 않습니다. 돈이 있어야만 행복할 수 있다는 주장은 이미 한국사회에서 절대 진리가 되었습니다. 우리교회만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재정적인 여유가 있다면 조금 나은 예배처소를 구할 수 있을 겁니다. 돈이 있어야만 문화생활도 즐길 수 있습니다. 다른 이들을 돕는 일도 돈이 있어야합니다. 돈이 실제적으로 우리 삶에서 중요하다는 사실을 제가 부정하지는 않지만 거기에 절대적으로 지배받는 한 삶의 생명 충만은, 즉 소소한 것과의 생명 관계를 맺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하게 스스로 질문하고 대답해보세요. 어느 정도의 돈이 있으면 더 이상 돈을 생각하지 않고 삶 자체만을 생각하게 될까요? 끝이 없다는 게 대답입니다. 톨스토이의 단편 동화 <인간에게는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를 읽어보셨는지요. 주인공 바흠은 지주와 계약을 했습니다. 바흠이 걸어서 돌아온 땅을 원래의 가격으로 주겠다는 계약입니다. 단 하나의 조건은 해가 지기 전까지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바흠은 조금만 더 멀리 돌자는 생각으로 걷다가 돌아오긴 했는데, 도착 즉시 죽었습니다. 그에게 필요한 땅은 자기가 누울 무덤의 크기였습니다.


앞에서 예를 들어 거론한 것들을 아예 무시하고 도사처럼 살아야 한다는 뜻으로 이런 말씀을 드린 게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갖자 형편에 따라서 이런 현실적인 문제들을 대처하십시오. 이런 예를 말씀드린 이유는 그런 것들이 여러분의 삶에서 절대적인 기준이 됨으로써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정작 중요한 것은 ‘생명’입니다. 철학적인 용어로 하면 존재이고, 프로세스이고, 도(道)입니다. 우리는 그 모든 것의 기원이자 근원이고 중심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믿습니다. 그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고, 지금도 비밀한 방식으로 세상을 보조하시고, 때가 되면 세상을 완성하실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눈높이에서 세상을 대하는 사람은 세상이 전혀 새롭게 보일 겁니다. 대통령을 만나는 것이나 어린아이를 만나는 것이 똑같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올 겁니다. 대한민국 사람이나 제주도에 들어온 예멘 난민이나 전혀 다르지 않다는 사실도 눈에 들어올 겁니다. 그제야 참된 자유를 얻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이 선포는 막연한 게 아닙니다. 그걸 느낄 줄 아는 사람에게는 아주 실질적인 말씀입니다. 커피 한잔만 갖고도 다섯 시간은 무한한 존재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누가 크냐?’ 하는 방식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의 소소한 것들과의 생명 관계로 들어가는 삶이 여러분을 구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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