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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의 큰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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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0:32-35 고난의 큰 싸움

 

믿음은 믿는 자에게 무엇을 가져다줄까요? 믿음이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그것 하나만으로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소위 영의 복 외에 육의 복까지 주어지기를 기대하는 마음을 포기하지 못한 채 예수님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영과 육이 모두 잘되기를 바라는 욕망에 매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디 기독교만의 욕망이겠습니까? 신을 찾는 모든 종교가 가지고 있는 공통적 욕망이며, 설사 어떤 특정 종교를 선택하지 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영과 육 모두가 다 잘되기를 바라는 욕망은 인간의 기본적 본성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종교가 종교의 이름은 다르나 통일된 본질을 드러내고 있는 것도 인간의 기본적 욕망을 바탕으로 종교가 탄생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 종교로서의 기독교가 아닌 세상에 오셔서 말씀을 선포하시고 우리의 죄로 인해 죽으시고 피흘리심으로 말미암아 세워지게 된 참된 교회로서의 기독교가 과연 인간의 욕망을 바탕으로 한 종교와 동질성을 가질 수 있을까요?

만약 기독교에서 종교의 본질과 동질성이 보인다면 그 기독교는 과연 무엇으로 기독교의 구별을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주보에 적은 글) 흔히들 주장하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참된 하나님이시기에 기독교 역시 참된 종교다’라는 주장으로 구별성을 제시할 수 있을까요?

 

사실 타종교가 기독교를 바라보는 시각은 ‘너희나 우리나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너희의 도를 믿고, 우리는 우리의 도를 따라 구원 받는다’라는 것입니다. 즉 종교의 연합을 주장하며 ‘가는 길은 달라도 도착하는 곳은 같다’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지요.

 

세상이 볼 때는 그러한 말이 ‘사랑’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종교가 연합하는 것이 곧 종교의 특성이라 여기는 사랑과 화해에 걸맞게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분명한 구별됨이 없이 무작정 우리가 참된 종교라는 것만을 주장하는 기독교가 세상의 눈에는 종교적 이기심과 독선으로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보니 다른 종교와 전혀 다를 바가 없는데 ‘기독교만 참된 종교다’고 외치는 것이 종교적 아집으로 여겨지는 것이지요.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달라야 한다라고 주장해서 다른 것이 아니라 다를수 밖에 없음을 이야기 합니다. 기독교, 즉 십자가에 피 흘리신 예수님의 은혜만을 사모하고 의지하는 교회로서의 기독교라면 세상에서 분명한 구별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스스로 구별되게 살려고 의식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살피며 말씀을 좇는 삶이 되고자 힘쓸 때 구별은 자연히 드러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즉 복음은 말씀을 따르는 자를 세상에서 분리시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분리는 세상으로부터의 격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 사고방식의 단절을 뜻하는 것입니다.(요4: 목말라 물동이를 가지고 왔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물동이 버려 두고 가는것) 즉 전혀 다른 사고방식으로의 전환이며 이것이 신자의 신자됨, 구별로 드러나게 되고 이것을 가리켜서 ‘거룩’이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따라서 ‘착함’이나 믿음의 대상인 신을 바탕으로 해서 구별을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착함은 기독교만 아니라 어느 누구에게서도 보여질 수 있는 성품입니다. 성경은 다름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오늘 본문 32절 말씀입니다.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사도는 ‘고난의 큰 싸움‘이라는 말을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은 ’고난‘이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에게 있어서 고난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될 수 있으면 멀리 내 던져 버리고 싶은 것이 고난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난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찾아옵니다.

 

이러한 고난에 대한 사람들이 대처 방법이 무엇입니까? 인간의 힘으로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고난을 신의 영역에 맡기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을 찾아 고난이 오지 않도록 해달라고 기원하게 되는 것이고, 고난이 왔다 해도 속히 고난을 떠나게 해달라고 애원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서 현재의 고난을 참으면 장차 큰 축복으로 갚으신다고 믿으면서 지금의 고난을 참을 수 있는 인내를 달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자에게 고난은 기존의 것을 버려야 하는 것으로 다가옵니다. 32절을 보면 고난의 큰 싸움을 빛을 받은 후의 싸움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빛을 받았다는 것은 진리를 알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즉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어둠의 세계에서 옳다고 믿었던 모든 것이 거짓이었고 잘못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빛을 받은 것입니다. 빛이 옴으로 어둠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빛을 받은 자는 필히 기존의 것을 부인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큰 싸움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세상과 다른 가치관과 사고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적 종교관을 가지고 있는 기독교 안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파해 보십시오. 어떤 반응을 보일 것 같습니까? 예수님을 믿으니 복음을 환영할 것 같습니까? 예수님이 유대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들 앞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은 유대인이 알고 있는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단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세상적 종교관을 가지고 있는 기독교 안에서도 그대로 재현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음으로써 기존의 사고방식을 버린다는 것은 고난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지금껏 강조한 것은 율법이 아니라 예수님이었습니다. 제사가 아니라 예수님으로 되어진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제사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가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제사라는 의식에는 눈길을 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제사라는 의식이 인간을 의롭게 한다는 생각은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는 예수님으로 되어진다는 말을 하면서도 예배라는 의식에서 관심을 거두지 못합니다. 예배라는 의식이 자신들을 의롭게 할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의식이 인간을 의롭게 하고 복으로 다가올 것이라는 기대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적 종교관입니다.

 

예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율법적 사고방식을 버림을 뜻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행함에 대해 어떤 의의 의미도 두지 않음을 뜻합니다. 하루에 기도를 5시간 하고 성경을 100장을 본다고 해도 그것 자체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쉬운 일일까요? 그래서 큰 싸움이며 버려야 한다는 것 자체가 고난인 것입니다.

 

신자가 빛을 받은 자라면 이미 이 싸움에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이 싸움을 참을 수 있는 것은 빛이 자신을 하늘의 영원한 나라에 있게 할 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임을 알았기에 참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고난은 고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주어진 영원한 복을 확인하는 기쁨으로 끝나는 것이 고난의 큰 싸움의 승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신자에게 세상의 것을 전해서는 안됩니다. 세상의 것에 기대감을 갖게 하면 안됩니다. 그것은 종교일 뿐입니다. 전혀 구별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세상의 것을 추구하는 세상에 오직 하늘의 것만을 선포하는 것이 교회의 구별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오직 진리만을 외쳐야 하는 것입니다.

 

진리만을 외쳐야 한다는 것은 사람과의 타협을 불허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에 드는 말을 하는 것은 이미 교회가 아닙니다. 그것은 종교일 뿐입니다.

 

신자가 진심으로 생명을 원하고 영구한 산업이 있음을 안다면 자신의 악함을 낱낱이 드러내고 고발해주기를 원해야 합니다. 교회가 자신과 타협하는 것을 원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다함께 망하는 길로 가는 것일 뿐입니다. 서로가 타협하고 마음에 드는 말만 하며 모이는 교회라면 진리 때문에 싸워야 하는 것이 없기에 편할 수는 있습니다. 고난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로서의 구별이 사라지게 되고 빛을 받은 자로서의 거룩 역시 사라지게 됩니다.

 

35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고 말합니다. 신자의 담대함은 무엇일까요? 무엇이 신자로 하여금 두려움이 없게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34절에서 말씀한 것처럼 영구한 산업에 대한 믿음과 소망이 아니겠습니까?

 

벧전 1:3-4절을 보면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약속하신 것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영원한 기업입니다. 바로 이 기업에만 모든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자가 신자이며, 이 기업이 있음을 알고 믿기에 담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것에 마음을 두게 되면 그것이 곧 담대함을 버리는 것이 됨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사람의 반응도 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말씀하신 하늘의 것만 선포하는 것으로 교회됨이 증거 됩니다. 이것을 주저한다면 그것은 사람을 보고 있기 때문이며 교회로서의 담대함을 잃어버린 것이고 고난의 큰 싸움 역시 포기한 것이며, 고난의 싸움이 없이 그리스도의 군사된 교회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썩고 더럽고 쇠하여질 것에 불과한 세상 것을 약속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바가 없는 것을 복으로 선포한다면 그것은 교회의 구별됨을 포기한 것이고 종교의 길을 가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신자는 복음만 원하고 복음만을 바라볼 뿐입니다. 모든 소망을 하늘에 두고 있기에 복음으로 인한 고난과 싸움을 마다하지 않고 그리스도가 가신 길을 가기를 원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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