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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형제 사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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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아비브 욥바교회 2017년 9월 16일 설교 이익환 목사

사도행전 강해 5 “형제 사울아”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행9:15-17)


김춘수 시인의 ‘꽃’이란 시가 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내게로 와
꽃이 되었다.


이 시가 워낙 유명하다 보니 이 시를 패러디한 시들이 있다. 하나를 소개하겠다.


내가 전화 버튼을 눌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종합책자 속 전화번호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전화 버튼을 눌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치킨이 되었다.


문혜린 시인의 ‘종합책자 전화번호 속에서 배고픔을 발견하다’란 시다.


오늘 본문에는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사울의 이름을 불러주는 장면이 나온다. 이를 통해 사울은 하나님 나라의 의미있는 존재가 된다. 오늘날 우리는 사울, 즉 바울의 이름은 잘 알지만 정작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인생을 붙잡아 세워준 아나니아의 이름은 잘 모른다. 그런데 아나니아는 사울이 회심하여 이방인의 사도가 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윌리엄 바클레이라는 사람은 아나니아가 ‘기독교 교회의 잊혀진 영웅들 중의 하나’라고 말했다. 오늘은 이 아나니아란 사람이 사울의 회심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성경에서 사울은 기독교의 박해자로 등장한다. 스데반이 순교당할 때 그는 그 처형의 집행자로 나온다. 행 7:58,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행 8:1,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행 8:3,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28살 청년 사울은 왜 그렇게 교회에 대해서 화가 나 있었던 것일까? 아이러니하지만 그 이유는 그가 누구보다도 하나님께 열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믿고 있는 율법에 의하면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가 하나님께 저주 받은 자라고 굳게 믿고 믿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는 저주받아 죽은 예수를 메시아라고 외치고 다니는 제자들을 용납할 수 없었다. 남자든 여자든 다 끌어다가 감옥에 가두어 어찌하든 교회의 존재자체를 없애버리고 싶었다.


사울의 활약으로 인해 교회 성도들은 사도들을 제외하고 예루살렘에서 자취를 감추고 만다. 사울은 이제 기독교가 몰락한 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루살렘 밖에서 소식이 들려왔다. 다메섹으로 도피한 성도들을 중심으로 교회가 더욱 활발히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사울은 열받기 시작했다.


행 9:1-2,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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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은 다메섹에까지 가서 기독교를 박멸하길 원했다. 다메섹은 당시 상업이 발달한 교통의 중심지라 유대인들이 많았다. 그는 거기에 있는 유대공동체가 기독교도들에 의해 위험에 빠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제사장 가야바에게 가서 다메섹 회당에 가져갈 공문까지 준비했다. 위협과 살기가 등등한 이 사울을 누가 꺾을 수 있을까? 이런 사울을 꺾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그것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이 직접 그에게 나타나시는 것이었다.


행 9:3-4,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바울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죽었다고 여겼던 예수님의 음성을 직접 듣게 된다. 그는 혼돈스러워 묻는다. “주여 누구시니이까” 그는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는 답을 듣는다. 예수님은 그에게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고 말씀하신다. 이 사람이 바로 아나니아다.


행 9:10,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 때에”라는 표현이 나온다. 여기서 그 때는 어느 때인가? 사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 고꾸라져 있을 때이다. 사흘 동안 보지도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을 때이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촉망받던 청년이 그의 인생에서 가장 깊은 암흑과 혼돈 가운데에 있을 때이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아나니아라는 제자를 찾으셨다. 그리스 정교회 전통에 의하면 그는 예수님이 택하셨던 72인 제자 중의 하나였다. 스데반 순교 이후 박해가 심해지자 그는 고향인 다메섹으로 돌아와 사역했다고 한다. 주님이 그를 환상 중에 부르셨을 때 그는 ‘주여 내가 여기있나이다’라고 바로 순종의 태도를 보인다. 이는 그가 평소에 주님과 기도하며 교제했던 사람임을 말해준다.


주님은 이어서 말씀하셨다. 행 9:11-12,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12] 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아나니아는 좀 당황스러웠을 것 같다. ‘내가 안수하는 것을 사울에게 환상으로 보여주셨다고?” ‘사울이 어떤 사람인데 내가 그에게 안수를 하지…’ 그는 주님께 반문한다. 행 9:13-14,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14]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 그는 사울을 피해 다시 도망가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사울에게 가서 안수하라는 주님의 부탁이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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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시리아 다마스커스에 있는 직가의 모습


주님은 다시 말씀하신다. 행 9:15-16,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이 말씀에 그는 주저하지 않고 순종한다. 행 9: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아나니아는 사울이 있는 집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에게 ‘형제 사울아’라고 부른다. 아무것도 볼 수 없고 귀만 열려 있던 사울에게 이것은 천상의 언어로 들렸을 것이다. 자신이 잔멸하려했던 그리스도인으로부터 처음으로 ‘형제’라는 말을 듣게 된 것이다. 바울서신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바울은 교회들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형제들아’라는 표현을 얼마나 많이 사용하는지 모른다. ‘형제’라는 표현에 깊은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아나니아가 그를 ‘형제 사울아’라고 불러주었을 때 사울은 비로소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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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니아 기념교회


주님께 순종한 사람에게는 주님의 능력이 나타난다. 아나니아가 순종하여 안수했을 때 사울은 성령으로 충만해진다.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져 다시 보게 된다. 사울이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순간이다. 이후 아나니아는 그에게 세례를 준다. 세례는 과거이 죄와 결별하겠다는 선언이다.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겠다는 외적 선언이다. 사울은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고 강건해진다. 이렇게 무명의 아나니아라는 제자를 통해 사울이 하나님의 택한 그릇으로 세워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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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세례주는 모습을 담은 조각상


하나님은 순종하는 한 사람을 통해 당신의 역사를 이루어가신다. 아나니아는 박해를 피해 다메섹에 있었던 한 무명의 제자였지만 하나님의 때에 그는 이방인의 사도 바울을 세우는데 쓰임받게 된 것이다. 후에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자신의 간증을 할 때 아나니아에 대해 언급한다. 행 22:12-13, “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13] 내게 와 곁에 서서 말하되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하거늘 즉시 그를 쳐다보았노라” 성경이 묘사하고 있는 아나니아는 ‘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이었다. 또한 ‘다메섹에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사람이었다.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는 존경받을 수 있는 랍비도 아니었다. 다메섹에 있던 한 제자였을 뿐이다. 그러나 그는 그 당시 유대사회에서 칭찬받는 사람이었기에 바울의 회심을 보증해줄 수 있는 사람으로 역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이 쓰시고자 할 때 쓰일 수 있는 사람으로 준비되길 원한다. 아나니아는 단순히 사울 한 사람의 변화만를 위해 쓰임받은 것이 아니다. 이제 복음이 온 세상에 퍼져가게 되는 아주 중요한 때에 이방인의 사도로 사역한 바울의 영향력을 생각한다면 아나니아의 역할은 실로 엄청난 것이라 할 수 있다.


회심은 사람을 달라지게 한다. 바울은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였다. 그는 로마시민권자였으며 산헤드린공회 의원이었다.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였다. 그랬던 그가 달라졌다. 모든 것을 해로 여겼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겼다. 그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기 원했다. 이것이 회심한 자의 열망이다.


회심한 사람은 살아계신 주님을 만났기에 이 땅에서의 삶을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해석하며 살아간다. 매일 매 순간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그것에 순종하길 원하게 된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한 사람 한 사람이 회심하며 돌아오길 원하신다. 그리고 그 회심의 역사에 동역할 사람들을 찾으신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본문의 내용을 시로 정리해보고자 한다. ‘꽃’이란 시를 패러디한 것이다.


아나니아가 사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쓰러진 박해자에 지나지 않았다.


아나니아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예수께로 와서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다.


오늘 우리가 만나는 사람, 고뇌하는 청년들이 훗날 바울이 될지 모르는 일이다. 우리가 만나서 관심을 가지고 그의 이름을 불러줄 때 그가 하나님나라에서 어떤 존재가 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바라기는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이 하실 일에 쓰임받도록 늘 준비되는 우리의 삶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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