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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선교적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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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아비브 욥바교회 2017년 9월 30일 설교 이익환 목사

사도행전 강해 7 선교적 인생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행11:19-21)

 

오늘은 욤 키푸르, 대속죄일이었다. 큰 대(大)자의 ‘대(大) 속죄일’이 아니고 ‘대신 속한다’라는 의미에서 ‘대속(代贖)죄일’이다. ‘나의 죄에 대한 댓가를 누군가가 대신 치른다’는 의미다. 그래서 광야 성막시대와 예루살렘 성전시대에는 두 마리의 속죄양이 드려졌다. 하나는 속죄소 앞에서 피가 뿌려졌고, 하나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광야로 보내져 죽음을 당했다. 구약 백성들은 그들 대신 피 흘리는 속죄양을 바라보며 자신들의 죄를 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확인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죄책을 지고 광야로 사라지는 아사셀 염소를 바라보며 자신들의 죄책도 사라지는 은혜를 누렸다. 욤 키푸르, 대속죄일, 키푸르(kippur)는 ‘덮개’라는 뜻이다. 이처럼 구약에서 속죄의 날은 죄를 덮어주는 날이었다. 1년에 한번 죄와 죄책을 해결하는 날이 바로 대속죄일이다. 유대인들은 이날 하루만이라도 금식하면서 천국에 들어가는 도장을 받기 위해 애쓴다. 이런 날이 아직도 국가적으로 지켜진다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축복이다. 어떻게 해서든 1년 동안 묵은 죄와 죄책을 덜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로쉬하샤나부터 욤키푸르까지 열흘동안 한 해 관계가 안좋았던 사람들을 찾아가 화해를 청한다. 이것이 대속죄일에 하나님께 최종 도장을 받기 위한 전제조건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욤키푸르 당일에는 닭을 잡아 속죄의식을 치르거나, 구제금을 냄으로 자신의 죄를 속하는 의식을 한다. 그러면서 한 해 동안 쌓인 자신들의 죄와 죄책을 처리하는 것이다. 속죄의 유효기간은 1년 이지만 그래도 매년 한 해의 시작을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죄의 문제를 진지하게 여기며 회개와 속죄의 시간을 보내는 이스라엘 민족이 대단하게 여겨진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가는 어린양으로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단 한번의 희생제사를 통해서 우리의 속죄를 이루셨다. 예수님의 대속의 피로 인해 우리는 영원한 속죄의 은혜를 입은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영원한 속죄만 믿고 방심해서는 안된다. 우리 역시 여호와의 절기를 맞이하여 크고 작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 관계, 이웃과의 관계가 막혀 있다면 돌이켜 속죄하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예수님이 흘리신 보혈의 능력으로 여러분의 죄와 죄책을 떠나보내는 은혜가 있길 축원한다.


오늘은 계속해서 사도행전 말씀을 전하고자 한다. 오늘 본문은 사도행전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부분이다. 이방인들 중심의 안디옥교회가 세워지면서 본격적인 선교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 교회가 어떻게 세워지고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받게 되었는지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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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11:19,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흩어진 자들이 누굴까? 주로 헬라파 믿는 유대인들이었다. 그들은 예수님 때문에 삶의 의미를 찾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핍박을 받고 삶의 현장을 떠나야 했다. 얼마나 막막했을까? 그들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그들은 집을 떠나야 했다. 생업의 현장도 떠나야 했다. 원해서 떠난게 아니었다. 그들은 성령충만하고 사랑의 교제가 가득했던 예루살렘 공동체를 떠나 흩어져야 했다. 그들이 절망했을까? 하루 이틀 막막했을 것이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그들은 절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베니게와 구브로, 안디옥에 이르러 그들의 동족 유대인들에게 말씀을 전한다.


그들은 핍박때문에 억지로 펼쳐진 낯선 인생의 순례의 기간에도 하나님의 뜻을 구했다. 익숙하지 않은 환경 속에서 먹고 살 걱정만해도 모자랄 판인데 그들은 예수를 전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예루살렘을 떠나야 했던 것은 강압에 의해 할 수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엎드려 하나님의 뜻을 구하면서 그들 안에는 자원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래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하자’ 낯선 환경은 이제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들의 발걸음은 더이상 억지로 흩어진 자의 발걸음이 아니었다. 어느 곳이든 자원함으로 달려가는 발걸음이 되었다.


나는 여러분의 발걸음이 자원하는 발걸음이 되길 축원한다. 직장의 발령 때문에 갑작스럽게 이스라엘에 오게 된 분들이 있다. 여기서 힘들 때 드는 생각이 있다. ‘편하고 살기 좋은 한국을 떠나 내가 왜 이 고생인가?’ 그렇게 느낄수록 남편이 원망스럽고 남편 회사를 탓하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한다. 하나님이 나와 우리 가족에게 허락하신 이 시간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구해야 한다. 그렇게 의미를 찾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된다. 핍박 때문에 흩어졌던 사람들은 어떤 운명에 처하든지 거기서 선교적 의미를 찾았다. 피동적으로 끌려가는 삶이 아니라 자원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선교적 인생이 되었다.


행 11: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구브로는 지금의 북아프리카 리비아다. 구레네는 지금의 싸이프러스다. 헬라파 유대인들은 어쩌면 핍박을 피해 가장 먼저 자신들에게 익숙한 고향으로 갔을 것이다. 그런데 그곳에 이르렀던 몇 사람들은 다시 안디옥으로 간다. 그들은 왜 안디옥으로 갔을까? 안디옥은 당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에 이어 세번째로 큰 도시였다. 인구 50만의 대도시였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그 중 7분의 1이 유대인이었다. 안디옥에는 헬라파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회당도 많고 유대인들의 공동체가 많이 형성되어 있었다. 안디옥은 복음의 확장면에서 너무도 중요한 도시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지경을 넓히시려는 하나님의 선교비전을 따라 다시 안디옥으로 움직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안디옥에서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헬라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한다. 그들이 헬라문화권 아래서 열린 사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히브리파 유대인들은 여전히 유대 중심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방인들과의 교제를 꺼려했다. 예루살렘 교회는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중심이었기때문에 태생적으로 선교적 교회가 되기 힘들었다. 이 때 예루살렘에 핍박이 나서 헬라파 유대인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게 된 것이다. 그들은 언어가 가능했고, 문화적인 장벽이 없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것이다. 그들은 핍박 속에서도 믿음을 지킨 자들이었기에 헬라문화에 쉽게 동화되지 않았다. 그들은 당시 하나님나라 복음의 확장에 있어 최적의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나는 지금 여기 있는 여러분이 하나님나라 복음의 확장에 있어 최적의 사람들이 되길 바란다. 선교는 선교사나 목사가 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 이름도 나오지 않는 무명의 사람들이 하나님나라 선교의 지평을 이방세계로 확장해 나갔던 것이다. 당시 예루살렘에 있었던 사도들은 할 수 없었던 일이다. 사도들은 언어도 안 돼고 문화적으로 준비도 안되었다. 소수의 무명 성도들, 그들이 선교적 인생을 살았기에 사도행전의 역사가 이방세계로 펼쳐질 수 있었던 것이다.


행 11: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한 신앙적인 영웅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주님의 손이 하나님의 뜻에 헌신한 소수의 사람들에게 함께 하실 때 복음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신앙의 영웅이 되기까지 헌신을 유보한다. 고지에 올라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이 되기까지 자신의 성공에만 주력하는 삶을 산다. 내가 높은 자리에 오르지 못했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이 땅에 선포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지금 나의 자리에서 묵묵히 헌신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기에 지금도 이 땅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행 11:22-24,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23]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안디옥에 회심하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그들을 위해 바나바를 보낸다. 바나바 역시 오순절 이후 선교적 인생을 살던 평신도였다. 그는 구브로 출신 레위족 사람이었다. 즉 헬라파 유대인이었다. 그의 원래 이름은 요셉이었는데 사도들이 그를 바나바라고 불렀다. ‘바르 나바’,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그는 자신의 밭을 팔아 사도들 발 앞에 두었던 사람이다. 예루살렘 교회가 부흥할 때 그가 드린 물질의 헌신이 귀하게 사용될 수 있었다. 사도들은 헬라인들의 믿음을 돕기 위해 그만한 인물이 없다고 판단하여 바나바를 안디옥으로 보낸다.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했다. 그는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라고 사람들을 권면했다. 신앙이 어린 헬라인들에게 연약한 점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은혜에 주목했다. 비판을 통해 사람들을 변화시키려고 한 것이 아니라 격려를 통해 그들을 위로하고 세워주었다. 교회는 죄인들이 모인 곳이다. 서로의 연약함이 보이고 아픈 곳이 보이는 곳이다. 안보이는 줄 아는가? 다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는 바나바와 같은 사람들이 있기에 교회는 성숙해가는 것이다. 나는 우리 교회에 바나바와 같은 사람이 많아지길 바란다. 하나님의 은혜에 주목하는 공동체가 되길 바란다.


행 11:25-26,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바나바는 밀려드는 많은 성도들을 가르칠 동역자가 필요했다. 당시 헬라인들을 가르치기에 사울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는 구약에 정통한 랍비였다. 로마시민권자이면서 다소에서 자라나 헬라어에도 능통했다.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한 뒤 10년 가량의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된 새언약의 의미를 누구보다도 잘 정리하고 있었다. 그 역시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받았음을 알고 준비하고 있던 선교적 인생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선교적 인생들을 연결시켜 사도행전의 역사를 이루어 가신 것이다. 바나바와 사울이 일년간 양육에 힘쓴 결과는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된 것이다. 헬라어로 ‘크리스티아누스’는 ‘그리스도에 속한 자’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불리는 것은 선교의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다. 선교는 거창한 사역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로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 속한 자로 살아갈 때 복음이 나누어지는 것이다. 안디옥 교회는 이렇게 선교적 인생들을 통해 시작된 것이다.


존 파이퍼 목사님은 ‘열방을 향해 가라’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했다. “선교는 교회의 궁긍적인 목표가 아니다. 예배가 그 목표다. 예배가 없기 때문에 선교가 필요한 것이다. 이 시대가 끝나고 구속받은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게 될 때 선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일시적으로 필요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예배는 영원히 남는다. 예배는 선교의 연료요. 목표다. 예배가 선교의 목표라 함은, 선교할 때 우리가 오로지 열방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선교의 목표는 열방이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보고 기뻐하게 하는 것이다. 선교는 예배로 시작해서 예배로 끝난다.”


이스라엘 땅에도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예배가 없기에 선교가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은 오늘도 세상의 우상에서 돌이켜 한 분 하나님을 예배하는 세대를 일으키기 원하신다. 그것이 선교가 필요한 이유다. 우리 욥바교회가 이 땅에 예배공동체로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나라 선교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믿는 유대인 친구는 우리의 예배를 보고 시기난다고 한 적이 있다. 믿지 않지만 우리 교회 예배에 왔던 유대인 중에는 예배 도중 자신도 알지 못하는 눈물을 흘리신 분도 있다. 예배가 있는 것은 단지 우리가 주일을 성수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 온 세상에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원하고 계신 것이다.


나는 우리의 예배가 더욱 온전히 하나님 앞에 드려지길 바란다. 준비하여 드리는 예배가 되길 원한다. 2주 전 예배 시간에 대한 건의가 있었다. 예배와 성도의 교제에 더 전력할 수 있다면 옮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금요일 저녁이면 유대인들 가족이 있는 분들이 오기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 하게 되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전통이 깨지지 않는 한 금요일 저녁에 모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가 다시 한번 예배를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오늘 내가 드리는 이 한번의 예배는 눈이 가리워져 참된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는 이 땅의 사람들을 대신해서 드리는 예배다. 우리가 그러한 마음으로 예배 드릴 수 있다면 우리는 적어도 샤밧만큼은 선교적인 인생을 사는 것이다. 바라기는 어떠한 환경의 변화 속에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을 따라 선교적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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