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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나로 솟나는 삶’을 고민하시라

요14:6-14

 

요한복음서는 “땅 위를 걸으시는 하느님” 즉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참된 삶”은 무엇이며, “참된 삶”이 가능한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복음서입니다. 요한복음을 쓴 이는 공관복음서가 말하는 예수 이야기로는 자신의 공동체를 이끌기엔 아쉬움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펜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한자 한자 적어나가기 시작합니다.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이게 다른 복음서에도 나오는 내용 같지만 사실은 전혀 다른 내용입니다. 전혀 새로운 이야기라는 거죠. 예수는 공관복음서가 말하는 대로 세례요한이 이사야 예언자의 글을 인용하여 예언한 구약의 성취로서의 메시아나(마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이거나(마태), 역시 구약의 성취로서 세계사에 우뚝 솟은 성인의 반열에 드는 인물(루가)이 아니라 태초부터 계셨던 하느님이셨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너무 사랑해서 이 땅으로 내려오신 하느님, 그 분이 바로 예수라고 요한은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서는 이 세상 누구에게도 붙일 수 없는 온갖 수사와 호칭으로 예수의 존재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요 10:30, 17:11, 21). 이것은 유일신을 섬기는 유대인들에게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다(전도서 5장 1절)는 말씀처럼 창조주와 피조물의 간격은 천지보다 큰 것인데, 어느 누가 인간을 하느님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말입니까? 하느님의 형상을 만드는 것조차 금지하고, 그의 이름 부르기를 두려워하는 유대인들에게 “나자렛 예수가 하느님이다”라는 선언은 그야말로 청천벽력의 소리였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나사렛 도당에 대한 저주문”을 그들의 기도에 넣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요한복음서 저자는 당대의 모든 유대인의 사유와 인식체계를 뛰어넘는 모험을 감행한 것일까요?

 

오늘 제가 나누려는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왜 요한복음서는 육체적인 혈통을 의심할 여지가 없는 나사렛 촌 동네의 한 목수의 아들을 감히 하느님이라고 부르는가? 왜 로고스가 사륵스가 되었다 곧 말씀이 살(肉)이 되었다고 말하는가? 이것을 통해서 요한복음서 저자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가?

 

누구나 두, 세 평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한 평생을 살고 그렇게 살다가 죽습니다. 그 삶의 여정에서 신앙은, 그리스도교라는 종교는, 성암교회는 여러분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또 하나님은 어떤 존재입니까? 어떤 방식으로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을 말하며, 하나님께 기도합니까? 스스로 모든 것을 선택하고 책임지는 성숙한 성인이 되는데 신앙생활은 어떤 도움이 되는지요? 상당수의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은 자신들 내부에 가득한 욕망을 이루기 위해 이용하는 대상이거나, 삶의 고뇌와 어려움을 회피하기 위한 크고 안락한 침대역할을 하는 이였습니다. 프로이트가 비판한 대로 종교인들이 말하는 신은 단지 한 때 자신이 사랑하고 무서워하던 유아기 때의 육신의 아버지를 이상화한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해지고 싶어 하지만 여러 가지 여건과 상황이 안 되서 행복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자, 신을 만들어서 그 욕구를 채우려고 하는 것이 바로 종교라고 말하는 포이어바흐의 비판을 피해갈 수 있는 종교인을 저는 많이 보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혹시 여러분은 여러분의 갈망, 여러분의 욕구, 여러분의 자기보존 본능을 충족시키고 만족시키기 위해 하나님을 찾고 교회에 나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닌지요? 상처가 회복되고, 슬픔이 기쁨으로 변하고, 행복한 삶이 가능하게 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만 그것이 전체를 보지 못하고, 좁은 소견으로 자기의 잘못된 이기적 욕망의 추구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왜냐하면 그 욕망의 추구는 형제와 이웃, 그리고 공동체에게 피해를 입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수십억의 돈방석에 앉기 위해 바로 다른 인간을 죽음으로 내몬 도시재개발업자들의 욕망을 우리는 보지 않았습니까?

 

인간의 욕망의 극대화로서의 종교는 역사 속에서 제도와 의식, 율법 등을 만들어 이제는 오히려 인간을 노예로 만들고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기제로 등장하게 됩니다. 주위에서 얼마나 많은 종교인들이 그 종교 때문에 피폐한 삶을 사는지 보아서 알 것입니다. 그래서 제 후배 중 한명은 제게 교회보다 술집 많은 것이 더 낫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술집은 사람들의 스트레스를 해소시켜 주는 반면 교회는 인간의 정신을 망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또 요즘 비종교인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저 친구는 교회는 다니는데 참 사람은 괜찮아. 기독교인인데도 괜찮은 사람이라 말이지. 허 참.”

 

요한복음서의 저자는 자신의 복음서를 통해 이제 인간다운 인간을 말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인간은 땅에 있다면 어차피 인간이 하나님을 들먹이면서 하는 모든 말 곧 신학이라든지, 신앙고백적 언어는 사실 모두 인간의 말일 뿐이라는 것을 요한은 깨달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요한은 새로운 창조이야기인 요한복음서를 쓰면서 거꾸로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기억해 냅니다. 요한복음서 10장 35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성서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모두 신이라고 불렀다. 성경말씀은 영원히 참되시다”(10:35). 오늘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떠올려 봅시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요한은 인간의 존재를 새롭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인간은 욕망 덩어리일 뿐인가? 요한은 예수라는 한 인간을 통해 모든 인간 안에 있는 신의 가능성을 발견하였고, 그것을 자신의 공동체 속에서 발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 타인을 이용해 먹는 인간이 있는가 하면, 오히려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인간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고, 종과 여인과 제자에게 군림하며 부려먹는 주인과 남자와 선생이 있는 반면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발을 씻기는 친구도 있음을 보여주려고 했습니다(13장). 심지어 친구를 위하여 목숨도 버리는 그런 사랑도 있음을 말합니다(15:13).

 

요한공동체는 신앙의 성숙을 위해 예수를 이스라엘의 왕이나 메시아로만 인식했던 초기의 제자들에 비해 참된 삶, 영생이 무엇인가를 물었던 니고데모처럼 정치사회적 안정만을 통한 행복추구보다 더 고차원적 삶, 위로부터 거듭나는 얼로 가득하게 솟아나는, 다석 유영모 선생의 언어로는 얼나로 솟나는 삶을 고민합니다. 물로 씻어내는 정화의식을 통해 지은 죄를 용서받고, 다시 죄를 짓고 용서받는 죄의 순환을 끊고 사랑과 기쁨 가득한 혼인잔치처럼 축제를 통해 적극적인 선을 이루려고 합니다. 가나의 포도주 기적이 말해주는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상징하는 성만찬 의식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의미를 깨닫는 것이며 진정한 참된 하늘의 양식을 먹는 것입니다. 시각장애인이 눈을 뜨고 자신을 고쳐준 사람을 예언자와 구원자로 부르지만 거기에서 더 나아가, 나사로의 부활을 통해 완전히 썩어 부패한 죽음의 동굴에서도 다시 살아날 수 있는 희망을 말합니다. 베드로로 대표되는 사도계 공동체들이 중시했던 조직과 규칙, 제도와 종교의식을 뛰어넘어 모든 이에게 평화와 화해와 유연성을 주는 자유로운 성령의 바람을 말합니다. 성령의 바람은 각 개인의 마음속에서 솔솔솔 예기치 못하게 불어옵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에 의하면, 이전에는 돌 판에 새겨진 율법을 따라야 했지만 앞으로는 마음 판에 직접 하느님께서 새겨놓은 그 음성을 따릅니다. 그래서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하느님의 마음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됩니다(예레미야 31:34). 이것이 새로운 약속이고 우리가 제2성서를 신약(新約)이라고 부르게 된 경위입니다. 그럼 우리의 주인공 요한은 어떤 답을 제시하고 있나요? 진정한 자유를 맛보고 주체적으로 서는 인간이 되기 위해 요한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나요?

 

요한복음서의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 계명을 주십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13:34-35) 요한공동체 내에는 세례요한을 스승으로 모셨고, 예수도 그의 계승자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적통을 중시하는 사람들, 이방인의 대표였던 사마리아인들, 유대교 회당에 여전히 적을 두고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숨기며 눈치를 보는 사람들, 회당을 박차고 나와 떳떳하게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한 강경파들, 베드로로 대표되는 조직과 제도를 중시하는 사도계 제자들, 그리고 애제자를 통해 예수의 이야기를 전수받았던 이들, 예수의 죽음 이후 부활한 예수를 만져보지 않고는 믿기 어렵다는 합리주의자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공동체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은 자본으로 덧칠한 거대 로마제국의 맘몬신이었고, 시시 때때로 맘몬의 사탄적 세력은 로마제국의 조직과 권력을 이용해 공동체를 위협하고 인권을 유린하였습니다.

 

내적으로 분열의 소지가 높았고, 외부에서는 자신들의 존재를 없애려는 사탄의 세력이 분기탱천할 때, 요한공동체는 “서로 사랑”함으로 인간의 자유를 지키고 인간다운 인간의 모습을 그리려 했습니다. 공관복음서에서 말하는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은 사랑의 이름으로 자칫하면 자신의 기준과 방식대로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행동을 하게 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유교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도 하지 말라는 소극적인 방식을 말하기도 합니다(己所不欲, 勿施於人.)그러나 유교에서 말하는 적극적 윤리의 길은 생존하기조차 버거운 이들, 지적인 배움에 동참할 수 없는 이들에게는 너무나도 험난한 길이고, 불교에서 말하는 심리적 깨달음은 가족과 사회적 책무와 현실세계의 복잡한 관계를 몸으로 체험해야 하는 고달픈 삶속에서는 너무도 요원한 길이었습니다.

 

요한은 좀 부족한 사람들끼리라도 서로 사랑을 주고받음으로써 서로의 약점과 아쉬운 부분을 이해하고 채워준다면 그 과정을 통해 인간은 스스로 서고, 또 그 사랑 안에서 참 자유와 해방을 누리는 인간, 그리고 공동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그 곳에 하느님이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기도하신대로 하느님이 예수 안에, 예수가 하느님 안에 있는 것처럼 요한공동체도 하느님과 예수 안에 있어 서로 완전히 하나 되는 길이라 믿었던 것입니다(17:20-26). 서로 사랑함으로 하나가 되는 공동체를 만듦으로써 세상에 하느님이 살아계심을 증거하는 일을 요한공동체는 해 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써 한국의 대다수의 교인이 그러한 것처럼 하나님을 이용해 자신의 욕망을 극대화하고 이 세상에서도 모자라 저 세상의 공간도 차지하려는 욕심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성암교회에서 진행되는 모든 활동과 종교적, 대사회적 행위를 통해 유익을 얻고 그것으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진정한 생명이 있는지, 성숙이 있는지, 서로 사랑이 있는지, 주체적 인간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가는 창조적 자유가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이제 성인입니다. 성암공동체도 하늘의 뜻을 아는 지천명을 지나 이순의 나이에 들어섰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를 가지고 선택할 수 있습니다. 여기 죽음의 길과 생명의 길이 있습니다. 자신을 살리며 지구공동체를 죽이는 길과 자신을 희생하더라도 온생명을 살리는 길이 있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한 알 그대로 남아 있을 수도 있고, 죽어 많은 열매를 맺을 수도 있습니다(12:24). 여러분들이 예수의 말씀에 주체적으로 선다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셨던 그분에게 제대로 배웠다면, 자신에게 적대적이었던 세상조차도 사랑하셔서 한 알의 밀알이 되었던 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면서 땅 위를 걸어 다니는 하나님이 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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