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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0 23:53

빈 무덤 이야기의 열린 결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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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무덤 이야기의 열린 결말

막16:1-8

 

둬 주 전에 후배 목사들 4명과 집다리골 자연휴양림에서 하룻밤을 지낸 적이 있습니다. 그 날 밤 후배는 내게 묻기를, 기독교 신앙에서 ‘십자가의 죽음’이 기준이 되는지 아니면 ‘부활’이 더 중요한지를 물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주일 오후에 성서강좌의 ‘주일설교 복기’를 하면서 ‘부활’에 대한 질문이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난 2010년부터 했던 설교 원고에서 ‘부활’부분을 따로 골라서 묶어놓고 다시 읽어 보았습니다. 오늘은 여러 편의 ‘부활’설교들을 종합적으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했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인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무덤에 누워 있지 않고 하나님이 일으켜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죽은 뒤 그를 다르던 많은 사람들이 “그는 살아 있다”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두세 명이 길을 가는데, 제자들이 밥을 먹거나 물고기를 잡을 때, 또는 수 백 명이 모인 자리에 예수님은 부활한 몸으로 나타나서 두려워하는 그들에게 용기를 주고 희망을 불어 넣었습니다. 이런 일이 한 두 명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여기저기서 일어났고 너도나도 부활한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부활은 하나의 현상이 되었고, 초대 교회가 성립하는 출발점이 됩니다.

 

오늘 우리는 마가복음을 읽었습니다. 학자들은 본시 마가복음이 16:8에서 끝이 났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빈 무덤을 발견하고 놀란 여자들이 두려워서 아무 말도 못했다는 이야기에서 끝이 났다는 겁니다. 그러면 마가는 왜 예수의 이 중차대한 장면을 전하면서 이렇게 결말을 지었을까? 그것은 ‘아무 말도 못하고 끝났다’는 의미가 아니라 일종의 열림 결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뭔 이야긴지 귀 기울여 들어 보세요.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에는 부활한 예수님이 갈릴리로 먼저 가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그 반대로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에서는 바로 예루살렘에서 초대교회가 세워진다고 기록합니다. 이 기록들에서 우리가 예수님이 갈릴리로 가셨는지 아니면 예루살렘으로 가셨는지를 묻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이미 역사의 범주를 벗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복음서 마다 예수 부활의 이야기가 다르게 기록되었다는 것은 당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여러 갈래의 이야기가 전해졌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통해 알게 되는 예수님의 생애는 마가복음서를 기틀로 이루어졌습니다. 최초의 복음서 저자인 마가는 예수님이 팔레스타인의 가난한 농민들과 함께한 예수님의 활동과 그로 인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기본적인 틀을 만들었습니다. 마가는 예수님이 공적으로 세상에 등장하신 이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이전까지의 전반부를 1-8장에 놓았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과 예루살렘에서의 일화들을 9-13장에 기록합니다. 그리고 수난과 부활이 14-16장입니다. 마가가 그린 예수님의 공생애 활동은 수난과 부활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분량 면에서도 수난과 부활은 실제 공생애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견주어 적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마가복음서는 수난과 부활을 바탕으로 형성이 된 책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지상 활동을 이해하려면 그의 수난과 부활 이야기와 연관성을 갖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그가 어떻게 죽었는가 하는 것이 그의 삶의 결정적인 내용을 보여 준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의 죽음을 부활에 빗대어 제대로 이해를 해야만 그의 선포와 활동을 올바로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부활을 역사적으로 검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되풀이 되거나 유추가 불가능하다는 것이죠. 빈 무덤도 부활을 증명하기에는 부족합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무덤이 빈 이유가 누군가 훔쳐갔을 거라는 이야기도 나옵니다(마28:13). 성서 속에서 빈 무덤은 부활을 증빙하기 보다는 오히려 의심을 사기에 안성맞춤입니다. 그리니 예수의 부활 사건은 철저히 믿음의 차원(이게 아마도 여러분을 불편하게 하는 모양일겁니다. 이 불편이 한 발자국 더 나아가 ‘그러면 부활이 없다는 말이냐?’는 생각으로도 넓어질 테죠), 신앙 고백의 차원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초대 기독교인들은 부활선언을 신앙적으로 어떻게 해석을 했을까요? 이게 역사적 사실인가 아닌가, 부활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들로 그들은 논쟁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고백을 논쟁할 수 없는 것이니까요. 흔히 사람들은(예수를 믿는 사람들 포함)부활을 사체의 소생, 즉 시체가 다시 살아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복음서 어디에도 무덤에 누워 있던 예수의 시체가 다시 살아나는 장면은 없습니다. 다만 예수를 따르던 여자들이 예수님의 사체에 향유를 바르러 내려갔을 때 무덤이 비어 있었으며, 제자들이 있는 자리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났다는 이야기만 나올 뿐입니다. 복음서 저자들이 예수의 시체가 살아나는 장면을 묘사하지 않은 것은 참으로 현명하고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만약 그렇게 했다면 불활이 중국 소설에 나오는 강시이야기가 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 누가, 요한,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부활 현현 이야기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부활한 예수를 만난 경험들을 전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본문들은 부활한 예수가 유령이나 귀신이 아니라 몸을 가진 존재로 제자들과 대화하고, 밥 먹고, 못 박힌 자국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갈릴리로 먼저 갔다고 합니다. 갈릴리는 공동묘지가 아닙니다. 그때까지 독특하게 야훼공동체를 유지하던 곳이었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이 생을 영유하던 곳입니다. 예수가 그리로 갔다는 것은 이처럼 실제적이고 평범한 사람들의 세상으로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그걸 말해주는 겁니다. 부활하신 예수는 평범한, 가난하지만 함께 ‘공빈 공락’하는 갈릴리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셨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렇게 부활사신 예수가 갈릴리 사람들의 섬ㄹ 속으로 들어갔다는 장면 묘사가 부활처럼 신앙고백적 측면, 심리적 현상일까요? 아니면 현실적인 사건의 기록일까요?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가 갈릴리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셨다는 기록은 고백이 아니라 현실적인 사건임을 말해줍니다.

 

자, 부활의 현장에 살면서 예수의 부활을 신앙으로 고백했던 초대교회로 돌아가 봅시다. 그들은 하나님이 죽음을 넘어 예수를 살리는 참 된 기적을 행했다는 믿음을 ‘몸의 부활’이라는 형태로 표현을 했을 겁니다. 신약성서에 따르면 이 참 된 기적은 예수의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고 도망갔던 제자들을 담대하고 새로운 삶으로 이끔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삶과 인간 역사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났다는 믿음을 나타내는 겁니다. 죽어도 살고, 죽음을 넘고, 죽음을 넘어서 사는 것이 예수의 부활을 통해서 가능해졌다는 것입니다. 허무와 무의미, 물질과 육체, 개체와 생사를 모두 넘어, 그리고 관념이나 추상이나 환상이 아니라 실제로 생명 속에서 몸으로 사는 것이 가능해졌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개인과 역사의 근본 성격과 방향이 바뀌었다는 선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고 선언하는 겁니다. 저주와 파멸, 죽음으로 가는 역사가 공생과 상생, 천국으로 가는 역사로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부활 신앙은 한 인간의 사체 소생이나 죽음 이후의 변신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개체의 삶과 죽음을 넘어선 다른 생명의 차원인 영의 차원이 열렸다는 믿음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약 성서가 말하는 부활은 육신의 생사를 뛰어넘는 참된 기적입니다.

 

바울에 따르면,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의 부활을 내 삶의 중심으로 삼아 내 속에서 예수가 살아나고 내 삶에서 예수를 살려내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의 십자가에서 자신이 죽고 그리스도 예수가 살게 되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날 안타깝게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실제로 이렇게 살지는 못하지만, 원래 기독교는 이런 좋은 믿음에서 출발했습니다.

 

예수의 부활, 즉 예수의 생명을 내 삶에서 살려 낸다는 부활 신앙은 각자 자신의 소유물을 내 놓고 함게 나누었던 초대교회의 공동생활 속에 살아 있었습니다. 또 이자 놀이를 금했던 고대 교회의 법과 교화 안팎에의 나그네와(요즘 난민 거주 문제로 이론이 분분하다. 해서 지방 목사들이 17일에 ‘난민문제에 대한 신학적, 신앙적 통찰의 시간을 갖으려고 한다)병자들을 예수그리스도처럼 맞아서 돌보았던 교회 전통 속에서도 살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유럽이 아메리카를 침략하던 16세기에 아메리카 원주민들 편에 서서 그들의 삶을 옹호하던 라스 카사스(1481-1566)신부에게서도, 이태석 신부(아프리카 톤즈/살레시오 수속)에게서도 부활 신앙의 실천을 볼 수 있습니다.

 

주류 신학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은 아메리카 원주민은 하나님의 형상을 한 인간이 아니라며 학대하고 학살하는 것을 정당화 하던 때 라스 카사스 신부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칩니다. 이런 기독교인이야 말로 자신의 삶에서 예수를 살려내고 부활 신앙을 실천한 분이 아닙니까? 기독교가 이리 갔어야 하지 않습니까? 예수의 부활을 이리 이해하고 실행해야 하지 않습니까? 부활 신앙은 이런 분들에 의해 계승이 되는 것이지, 혼자 잘 먹고 잘 살다가 죽어서 다시 사체 소생의 은덕을 입겠다는 사람들에 의해 계승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부활이 부활의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삶을 통해 예수의 생명을 살려 내는 것이기 때문에, 마가복음은 빈 무덤이 열려져 있다는 것에서 기록이 멈추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부활이 모든 것의 종언이 아니라 ‘믿는 자들의 삶이 예수의 생명을 살려 내야 하는 숙제’가 남아 있었기에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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