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2019.01.11 23:58

오늘의 행복을 위한 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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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아비브 욥바교회 2017년 10월 21일 설교 이익환 목사

사도행전 강해 10 오늘의 행복을 위한 제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17]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18]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행17:16-18)

 

지금 한국사회의 한 트랜드를 보여주는 말이 ‘YOLO’란 단어가 아닐까 싶다. “You Only Live Once”의 줄임말이 욜로다. ‘인생은 한번 뿐이니 지금 즐겨라’는 가치가 담긴 말이다. 미래를 대비하느라 현재를 희생시키지 말고 지금 즐거운 일을 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고 싶은 것이 있으면 과감히 지갑을 연다. 어떤 사람은 전세금을 빼서 세계여행을 떠난다. 사회학자들은 이러한 현상을 사람들이 미래가 불안하니까 현재에 집중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과거 고성장 시대에는 현재를 희생하며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 당연했다. 허리띠를 졸라매 저축하면 집을 살 수 있었고 어느 정도 안정된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경제불황 속에 취업과 실직의 문제를 겪으면서 젊은 세대들은 위축되고 좌절을 경험했다. 성실히 노력하면 기회가 찾아올 것이란 믿음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오늘을 참고 사느니 현재 내가 즐길 수 있는 것을 찾아 사는 삶을 살기 시작한 것이다.


욜로와 비슷한 말이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다. ‘현재를 잡아라’ ‘오늘을 즐겨라’로 번역이 되는 말이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이 학생들에게 외친 말이다. ‘카르페 디엠’은 약 이천년 전 에피쿠로스 학파였던 호라티우스의 송가에 나오는 라틴어 시 구절이다. 오늘 본문에서는 바로 이 에피쿠로스 철학자들 앞에서 연설하는 바울의 모습을 보게 된다. 오늘의 행복과 즐거움에 집중하는 그들에게 바울이 던진 제언은 무엇일까?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핍박을 피해 베뢰아로 간다. 그런데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거기까지 와서 소동을 벌인다. 할 수 없이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를 거기에 남겨 두고 홀로 아덴, 즉 아테네에 이르게 된다. 아테네는 헬라제국 때의 수도였다. 당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와 더불어 세계 3대 도시 중에 하나였다. 민주정치가 꽃피운 곳이었고, 철학과 문학, 예술 등 헬라 문화의 중심지였다. 바울은 거기서 실라와 디모데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도시에 가득한 우상을 보고 분노한다.


당시 아테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사원들로 가득한 도시였다. 당시 3만여 개의 신상이 있었다고 한다. 바울은 우상으로 가득한 이 도시에서 불붙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하나님의 도에 관심이 있는 경건한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했다. 장터인 아고라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복음으로 변론했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이 그런 바울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바울이 예수와 부활에 대해 전하고 다니기에 이 말장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그들은 궁금했다. 그래서 바울을 붙잡아 아레오바고 법정에 세워 새로운 가르침을 듣고자 했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에 대해서는 중학교 때 배운 기억이 있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쾌락이 인생의 최고 목표였다. 행복한 삶은 고통이 작아 지고 쾌락이 극대화되는 것을 의미했다. 스토아학파는 정신과 영혼의 안정을 통해 행복을 추구했다. 기원전 300년 경에 시작된 이 두 학파는 왜 그리 현재의 행복에 관심이 컸던 걸까? 이유는 미래가 불투명했기 때문이다. 당시 사람들은 계속되는 정복전쟁과 가난으로 죽음의 위협에 시달렸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한 개인이 이 괴로운 세상에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당시 철학자들의 관심이었다.


에피쿠로스는 개인의 쾌락을 극대화하고 당장 현실적으로 즐길 수 있는 삶이야말로 불확실한 미래와 험난한 세상을 견뎌내는 바람직한 삶의 방식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신들은 인간이 하는 일에 관심이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인간은 무작위적인 과정을 통해 생겼다가 죽으면 사라지는 원자들의 덩어리일 뿐이라고 했다. 인간이 그런 존재라면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된다. 사후 심판에 대해서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된다. 인간은 죽음과 함께 사라지는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그의 원자론은 인간에게서 죽음과 신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제거하는 역할을 했다. 그야말로 죄 많은 인간에게 복음을 던져준 것이다. 인간은 오로지 현재의 고통을 줄이며 최대한의 쾌락을 누리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가르침이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향해 바울이 입을 연다. 행 17:22-23,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의 종교심을 접촉점으로 삼아 연설을 시작한다. 자신이 아테네를 두루 다니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다고 했다. 아테네 사람들은 여러 신을 섬겼지만 혹시 자신들의 부주의로 빠트린 신들의 분노를 살까 두려워하여 그런 제단을 만든 것이다. 바울은 그들이 알지 못하고 섬기는 신을 그들에게 알게 해주겠다고 자신있게 선포한다.


그러면서 바울은 하나님에 대해서 소개한다. 행 17:24-25,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바울은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며 천지의 주재라고 말한다. 바울은 당시 팽배했던 잘못된 신관을 교정하고 있는 것이다. 스토아철학은 모든 만물이 신이라는 범신론적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 에피쿠로스학파는 신은 이 세상에 관여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이 한낱 신전에 갇혀 인간의 섬김을 받길 원하는 분이 아니라고 말했다. 오히려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시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창조주라면 인간은 결코 우연히 발생한 원자덩어리일 수 없다. 인간은 하나님이 친히 지으셔서 생명과 호흡을 주신 존재인 것이다.


바울은 그의 연설을 이어간다. 행 17:26-29,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27]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29]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당시 사람들은 신은 인간에게 관심이 없기에 찾아도 만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바울에 의하면 하나님은 인류의 거주의 경계를 정할 정도로 인간의 일에 관심이 있으신 분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찾으면 발견할 수 있으며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않다고 말했다. 또한 바울은 인간이 하나님을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한다고 말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돌에 대신 우상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가까이 계신 그분과 살아있는 관계를 맺으라고 도전한 것이다.

이어 바울은 그의 연설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을 선포한다. 행 17:30-31,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바울은 사후세계와 심판이 없다고 믿는 그들을 향해 하나님께서는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신 분이라고 소개한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지만 이제는 모두가 회개하며 하나님께 돌이켜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모두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다고 말했다.


바울의 연설을 들은 사람들의 의견은 나뉘었다. 행 17:32-34,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33] 이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나매 [34]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심판과 사후 세계를 믿지 않았기에 바울이 전한 심판과 부활에 대해 조롱으로 반응했다. 오직 이 도시에서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몇 사람들만 바울의 말을 믿고 따르게 된다.

복음은 세상의 가치, 철학과 충돌한다. 그리고 그것은 역사를 통해 반복된다. 오늘날 사람들 역시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싫어한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공의로운 심판은 허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신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은 망상일뿐이라는 주장을 환영한다. 천국도 지옥도 없고 하나님과 상관없이 돌아가는 세상을 노래한다. 따라서 하나님과 상관없이 현재의 세상에서 즐기고 싶은 쾌락을 모두 즐기며 살라는 것이 이 시대가 추구하는 가치인 것이다.


우리는 쾌락이 우상이 된 시대에 살고 있다. 물질과 돈이 우상이 된 시대를 살고 있다. 우상으로 가득한 도시를 보면서 여러분은 바울과 같은 거룩한 분노가 있는가? 복음을 조롱하는 시대에 여전히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공의로 세상을 심판하실 하나님으로 믿고 있는가? 여러분은 이 우상으로 가득한 도시에서 여전히 하나님을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그분의 자녀로 하나님과 살아 있는 관계를 맺고 있는가?


바울이 아레오바고에서 하나님의 심판과 부활을 강조한 이유가 뭘까? 당시 에피쿠로스, 스토아 철학자들은 내세관이 없었기에 방황했다. 그들은 비록 행복과 즐거움을 추구했지만 그것으로도 공허하여 늘 새로운 가르침을 찾아 귀를 기울였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의 삶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음을 강조했던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우리 역시 죽음 이후 다시 부활하여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는 것이 우리가 믿는 복음이다. 우리가 이 사실을 믿을 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 자신의 즐거움만을 위해 살지 않게 된다. 하나님의 청지기로 하나님의 창조 목적과 부르심을 위해 살게 된다. 그런 사람에게는 내가 어떻게 더 많이 즐기느냐가 인생의 목표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주신 나의 삶을 얼마나 가치있게 사용하느냐가 내 인생의 목표가 되는 것이다. 부활과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대한 분명한 믿음이 있어야 우리는 우리의 오늘을 방황하지 않게 된다. 비록 현실이 힘들어도 내일을 소망하며 살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말했다. 고전 15: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부활하여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는 분명한 믿음이 있었기에 바울은 헛되이 낭비하는 인생을 살지 않았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다. 빌 3: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바울은 이 세대가 추구하는 가치와 상관없이 하나님나라와 그 영광을 위한 삶에 전력했던 것이다.


모두가 행복을 원하며 지금의 자기 즐거움을 위해 투자하는 시대에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바라보며 묵묵히 헌신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나 바울은 오직 한번 뿐인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권면한다. 고전 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29살의 나이로 순교했던 짐엘리엇은 그의 일기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영원한 것을 얻고자 영원할 수 없는 것을 버리는 자는 바보가 아니다“ “He is no fool who gives what he cannot keep to gain that which he cannot lose” 오늘의 행복을 바라는 것은 우리 모두의 소원이다. 그 바램 자체는 잘못된 게 아니다. 그러나 잠시 후 소멸되는 즐거움을 통해 행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을 얻고자 달려가는 삶이기에 행복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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