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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울이 ‘사는’ 부활은 무엇인가

  • 허태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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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사는부활은 무엇인가

8:18-25

     

오늘 제목을 자세히 읽으시면 좋겠습니다. ‘바울이 믿거나, 바라거나, 희망하는부활이 아니라 현재 살고 있는 부활입니다. 결론을 앞에서 제시하게 되는 것이지만, 부활은 바라거나 믿는 게 아니라 자신이 살아내야 하는 현재적 삶의 내용입니다.

 

지난 시간에 바울의 교회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근거로 하여 새 나라, 새 삶, 새 인간을 과녁으로 삼아 모인 공동체 즉 교회를 이뤘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여러분이 혹 ! 바울도 우리와 같은 의미의 부활을 믿었구나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아닙니다입니다. 바울이 믿는 부활은 오늘날 우리가 믿는 그런 부활이 아니라는 겁니다.

 

바울의 부활을 이해하려면 유대 묵시문학의 기본적인 성격을 알아야 합니다. 묵시 문학에서는 현대인들과 달리 신화와 역사를 대립적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유대의 묵시 문학에서는 인간사의 사건들 배후에 악의 세력과 하나님 사이의 우주적인 투쟁이 놓여 있다고 보았습니다. 현실적인 권력이나 사건들의 배후에 영적인 힘이 있는 것으로 이해를 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역사와 신화 사이가 그렇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신화가 역사고 역사가 곧 신화였던 것입니다. 1세기 말에 쓰여진 외경 제4에스라서를 봅시다. 사자는 메시아인데 사자가 독수리인 로마에게 말을 건네는 장면입니다.

 

너는, 나의 세상을 통치하고 나의시대에 종말을 오게 하기 위해서 내가 만든 네 마리 짐승 가운데 남아 있는 한 마리가 아니더냐? 네 번째 짐승인 너는 이미 전에 사라져 버린 모든 짐승을 정복했으며, 엄청난 공포로 세상을 지배했으며, 가혹한 억압으로 온 땅을 지배했고, 오랫동안 온갖 속임수로 이 땅에 머물러 왔다...너는 온순한 자들을 괴롭히고 평화로운 자들에게 상처를 입혔다. 너의 오만은 가장 높으신 분에게 다다랐고, 그리고 너의 자만심은 전능한 분에게 이르렀다. 보라, 그들은 끝장이 났으며, 그분의 시대는 완성 되었다. 그러므로 독수리 너는 분명히 사라질 것이다. 너의 폭력에서 자유로워진 이 땅 전체는 새로워질 것이며, 구원을 얻을 것이며, 그것을 만든 이의 심판과 자비를 소망하게 될 것이다.”(4에스라 11:38-46)

 

여기서 신화적인 독수리와 역사적인 로마 제국은 하나입니다. 그리고 역사의 실체인 로마의 파멸과 하나님의 심판 역시 동일한 사건이죠. 여기서 종말은 뭘까요? 로마가 지배하는 세계가 끝난다는 것이며, 이것은 동시에 우주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뜻합니다. 이처럼 유대의 묵시문학이 말하는 종말론은 현재적이고 역사적인 사건을 의미하는 거였죠.

 

바울의 부활은 이 맥락안에서 작동합니다. 바울의 회심 사건이 그의 전 존재를 뒤 흔들면서 개인적인 차원에서 일어났다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죠. 그러나 바울의 이후 언어들을 볼 때 그 자신에게 일어난 이 놀라운 변화를 그는 전 세계를 변화 시키는 하나님의 행위와 관련해서 이해를 합니다. 바울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와 그의 부활 사건을 통해 세계를 결정적으로 바꾸는 행동을 개시 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바울이 부활한 예수를 만남으로서 깨달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에게 부활은 세계의 변화가 시작되었다입니다. 줄여서 말하면 부활은 인간 개개인과 세계의 변화를 위한 것이고, 변화에 근원인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과 인간은 한계에 도달했으며, 세상은 바뀌고 있다는 것입니다. 옛날에 그가 몸담아 살아가던 세계, 그 세계가 작동하는 원리와 규율, 그 모든 것이 이제 실제적으로 끝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에게 종말론적인 세계전환은 무엇을 의미했을까요?

 

바울은 로마서 8:18-25에서, 바울이 소망했던 종말이 뭔지를 알려줍니다. 바울은 십자가 그리스도를 통해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차원의 종말을 말합니다. 그것이 죽은 자의 부활, 몸의 부활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에게 있어서 부활은 개개인의 생물학적 다시 살아남이 아니라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바울에게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곧 그리스도의 죽음은 아주 중요합니다. 고전2:2에서 십자가에 죽은 예수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때 십자가는 로마의 처형방식으로서의 십자가입니다. 로마제국의 끔찍한 처형방식으로서의 십자가형이 서슬 퍼렇게 시행되는 마당에, 십자가가 다른 어떤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을 의미할 수는 없습니다. 개인의 생물학적 이해와 연결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바울에게 예수의 십자가는 종교적인 상징이 아니라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라는 구체적인 역사가 하나님이 주관하는 구원의 계획과 결합이 됩니다. 그래서 갈릴리 나사렛 출신의 청년 예수가 십자가 달렸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모습을 지닌 신 분이 하나님과 동등 됨을 당연하게 생각지 않고 종의 모습을 취해 자기를 낮추고 순종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고 합니다(2:6-8). 고전2:6-8은 더 명백하게, 십자가의 죽음이 이 세상의 통치자들의 의한 것이고, “영세 전에 미리 정하신 하나님의 지혜에 따라 이루어진 일이라고 합니다. 고전 15:24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통치자의 권위와 권력을 폐하시고 그 나라를 하나님 아버지께 바치실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보세요, 바울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대한 이해는 역사적인 언어와 신화적인 언어들이 섞여 있는데요, 결론은 멸망하게 될 모든 통치자와 권위와 권력”(고전 15:24), “이 세상의 통치자들”(고전2:8)입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현실 권력, 즉 로마와 거기 빌붙어 사는 식민지 지배세력을 떠나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바울의 이러한 언어들은 그가 자신의 시대를 악한 통치자들의 지배 아래 있는 것으로 이했다는 증빙입니다.

 

이렇게 바울은 현재의 삶을 악한 지배 권력 아래 고통 받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악한 지배 권력의 멸망과 세계의 전환을 기다리는 것은 유대 묵시 문학의 기본 양식을 되풀이 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바울의 종말론적인 기대는 권력을 불신하는 유대의 묵시문학의 전통 맥락 안에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권력의 복원이 아니라 권력의 멸망을 말하고 있습니다.

 

, 그러면 이런 이해가 됩니다. 바울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인간 개개인의 생물학적 생성과 소멸을 초월적으로 이끌어내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에게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하나님과 지배 권력 사이의 우주적인 투쟁이고, 그 과정에서 발생해야 하는 결정적 사건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라고 본 것입니다. 십자가는 권력이 세계를 건설하는 원리인 폭력과 파괴를 온 세상에 알 수 있게 폭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부활의 빛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을 보았기 때문에 가까운 미래에 권력이 멸망하고 하나님의 승리가 완성될 것을 기대할 수 있었습니다. 부활의 빛에서 하나님의 구원 행위로 십자가를 이해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죽음은 유대 변방에서 일어난 한 청년의 안타까운 죽음에 머무르지 않고 보편적인 차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회심 이후 바울의 삶이 바뀐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권력의 종말, 세계 전환을 인식한 데 따른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세상이 바뀌고 그 안의 모든 것이 한계에 다다랐으니, 이전의 삶을 지배했던 원리들은 더 이상 쓸모가 없습니다. 그는 이전에 자신에게 이롭던 것들을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3:8절입니다. 이전에 자기를 이롭게 하던 것들이 이제는 쓰레기며 오물이라고 했습니다.

 

덧붙이는 말이지만, 바울의 이런 경험은 동학을 일으킨 수운 최재우의 경험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몰락 양반이었던 최재우는 한울님을 모시게 된 자신의 신비로운 체험을 기점으로 세상이 객관적으로 변했다고 인식하고, 그 이전을 선천(先天), 그 이후를 후천(後天)이라 했습니다. 선천의 원리는 효력을 다하였고, 신분 차별과 약육강식의 원리는 이제 힘을 잃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새 시대인 후천개벽의 원리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실제로 그는 자신에게 속해 있던 여종들을 하나는 며느리로, 하나는 수양딸로 삼습니다. 그 후로 그의 삶은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바울의 삶이 회심 이후로 얼마나 고달팠는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바울에게 그런 삶의 형편은 기쁨의 원인들이었습니다(4:4). 왜냐하면 그는 아직 오지 않은 새로운 세상의 삶을 그의 생애에서 맛보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부활신앙이 우리에게 적용이 된다면 바로 이 선험적 삶의 기쁨입니다. 아직은 오지 않은 세상이지만, 장차 예수가 다스리는 세상이 오면 가치관이나 삶의 방향성이 혁명적으로 바뀔지를 미리 알고 거기에 맞춰 사는 기쁨 말입니다. 물론 그걸 이 세상에서 살아내려면 현실적으로는 고난과 고통이 극심하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다”(11:1)라고 말입니다. 그는 바로 이 믿음 안에 살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에게 부활은 오늘을 욕심대로 살다가 훗날 덤으로 얻어지는 옵션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집단이나 종파에 속하면 되는, 숫자에 들어가면 저절로 되는 그런 보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십자가에 죽이고 부활시키는 대 쟁투를 통해 승리를 하셨던 것처럼, 이 세상을 지배하는 권력과 삶의 방식이 종말적으로 멸망하고, 세계 인식과 삶이 전환하면 그동안 살았던 방식도 필요가 없어집니다. 그 새로워진 세상의 삶의 원리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내 생물학적 몸이 부활할 걸 믿고 바랄 게 아니라, 아직은 성취되지 않은 세계의 종말적 변환을 믿고 새 세상의 원리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고 우리가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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