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2)

  • 궁극이
  • 283
  • 0

 

오늘이 설 명절인데, 아마도 이런 날 우리교회처럼 말씀잔치를 하는 교회가 거의 없을 거다. 그러나 설 명절이라고 교인들이 교회에 모여서 일반세상에서 풍습 습관적으로 내려오는 윷놀이는 할 거다. 이런 곳에는 사람이 가득 찬다. 이게 무슨 말인지 아느냐? 계시록에 보면 마지막 시대에 여자가 해를 입고 있고 있다고 했는데, 말세의 모든 교회가 해를 입는 거냐? 아니다. 진리본질에 적중성으로 가는 성도가 해를 입은 여자인데, ‘예수님께서 말세에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하셨듯이 극소수의 참 옳은 성도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성도들이 세상으로 가는 거다.

 

계시록에 바벨론 음녀가 나오는데, 이건 교회를 말하는 거다. 교회란 교인을 말하는 거다. 이 교회 안에는 많은 왕들, 많은 장사꾼들, 많은 귀신의 떼들이 들어있는데 이게 다 불바다가 된다. 그러니까 이련 표현도 교회인 우리들이 자신의 신앙을 판단하라고 비유적으로 말씀을 하는 거다. 믿는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이런 게 깨달아져야 하는데 평소에 늘 듣고 생각하는 게 물질적 가치판단을 놓고 그 기준으로 움직였으니 이건 타락된 사람이다. 귀신들린 사람이다. 믿는 사람이 이렇게 사는 것이 이방인들의 눈에는 멀쩡하게 보이겠지만 성령의 눈으로,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귀신들린 교회로 본다. 타락으로 본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한 이 말씀을 성경 66권이 딱 받쳐주고 있다. 그러니까 어느 성경구절을 해석을 해도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그 목적에서 벗어난다면 이건 마귀가 파고 들 수 있는 허점이다. 성경 어디를 봐도 나쁜 사건이건 좋은 사건이건 다 하나님의 주권섭리와, 성도의 사랑과, 구원의 이치가 나오는 거다. 성경 어디를 해석을 할지라도 이게 받혀져야 만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만일 교회에서 목사님들이 이게 아닌 세상을 가지라고 가르친다면 어느 성경이 그걸 받혀주느냐? 하나도 안 받혀준다.

 

예수님 앞에 왔던 부자청년처럼 세상부자도 되고 천국도 갈 욕심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은 주님을 자기의 종으로 이용하는 사람이다. 주님을 자기의 종으로 삼은 거다. 이 이치를 아느냐? 교인들이 이 이치를 모르기 때문에 이런 신앙을 가진 사람을 신앙 좋다. 열심 있다이렇게 보는 거다. 이런 사람이 나는 주님의 종이니이다라고 할지라도 입술에 붙은 말일 뿐이지 실질적으로는 자기가 주인으로 사는 거다. 자기의 소원 목적이 아무리 좋은 것일지라도 세상 것이면 다 내버리고 주님의 소원 목적을 가지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이다. 주님의 자녀다.

 

창세기를 기록한 모세로 통해서, 애굽 땅에서 아무 희망도 없이 어두운 종살이를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의 말씀을 근거한 하나님의 신의 활동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빛이 임하므로 모세로 통해서 어두움에서 해방이 되어 나온 이것이 첫째 날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안 믿던 자기가 하나님을 믿으려고 교회에 나왔다면 현재 이 첫째 날을 경험을 했느냐? 예수로 말미암아 자기 속에 한 가닥의 구원의 빛이 내려왔느냐 그 말이다. 이게 첫째 날이다. 세상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자기 속에서 세상을 만든 하나님의 신이 역사가 됐는지, 안 됐는지를 모르고 있다면 이걸 어떻게 하나?

 

자기가 처음에는 혼돈과 공허와 깊이를 알 수 없는 흑암에 있었는데 말씀을 근거로 한 성령님의 활동의 빛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자기의 구원을 위해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첫째 날을 맞은 자의 체험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빛을 받은 사람이라는 말이다. 돌려서 말하면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 이 사람은 빛을 받은 사람이다. 그런데 문제는 현재 하나님의 신의 빛을 받은 예수 믿는 자기가 아직도 혼돈 속에서 살고 있지는 않은지 자문자답을 해 봐라.

 

빛 앞에서는 다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에 빛을 받은 사람은 세상을 세상만큼, 하나님을 하나님만큼, 물질을 물질만큼 알게 되어서 정리정돈이 빨리빨리 들어간다. 내가 늘 말했지만 빛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 다음에 인간, 인간 다음에 물질의 순서로 놓고 산다. 그런데 말세에 믿음을 보겠느냐?’ 라고 하는 것은 말세의 교인들이 이걸 거꾸로 뒤집어서 물질 다음에 인간을 놓고, 하나님은 자기의 종으로 부려먹는다는 거다.

 

교회에서 사람을 많이 교회로 끌어들이려고 하기 보다는 교회에 들어왔느냐? 그렇다면 마음이 변화가 되어야 정화가 될 게 아니냐? 정화가 되면 이 사람은 앞에서 말한 정리정돈이 잘 되는 거다. 사람이 마음부터가 어지럽고 혼란스럽고 정신이 없다면 어떻게 정리정돈이 되겠느냐? 오히려 자꾸 어질러 놓는다.

 

현재 예수 믿는 자기가 예수 믿는 게 뭐가 뭔지 모르겠다. 구원이 뭔지 모르겠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뭔지 모르겠다하면서 혼돈 속에서 살고 있지는 않느냐? 하나님을 아는 빛을 가진 교회의 인도자들은 교인들로 이걸 바로 알게 해서 신앙을 정리정돈을 시켜야 한다. 지극히 거룩한 것을 배우고 터득하는 교회 안에 세상 것을 가지고 들어오면 정리정돈이 안 되는 거다. 이런 교회는 굉장히 혼돈스럽다. 집사 장로가, 거듭나지 못한 자들이 교회의 주인행세를 하며 막 싸움이 붙는다. 이게 혼돈이지 정리정돈이냐? 예수를 믿는 사람은 생각과 마음이 정리정돈이 잘 돼야 하는데 서로 붙잡고 싸운다면 이건 물질적 개념으로 들어가 있는 거다. 물질적 개념 속에는 돈이 들어있는 거다.

 

교회에서 특히 돈 때문에 싸움이 많이 생기는데, 재정을 관리하는 부서를 만들어서 통장은 재정관리 집사가 가지고 있고, 도장은 목사가 가지고 있고 이런 식으로 관리를 하는 것은 교인들 보기에 정직하게 한다는 의미다. 이걸 좋게 보면 나쁜 일이 생기지 않도록 정직하게 하려는 거겠지만 교회가 꼭 이런 식으로 해야 만이 재정이 바로 관리가 되는 거냐? 이렇게 하면 우리의 구원 면에서 깨달을 것도 없다.

 

예수님께서는 가룟유다에게 재정을 맡겼다. 차라리 만능의 능력자이신 예수님께서 직접 하시면 부정도 없고 더 정확할 텐데 가룟유다가 돈을 좋아한다는 것을 다 아시면서도 왜 이 가룟유다에게 재정관리를 맡긴 것일까? 우리의 구원 면으로 깨달을 것이 없다면 예수님 당신이 다 하면 될 것인데 우리의 구원에 어떤 깨달음을 주기 위해서 가룟유다에게 맡긴 거다. 천지만물이 다 주님의 것인데 코 묻은 헌금이 욕심이 나서 주님이 그 돈을 가지고 천국으로 달아나시겠느냐? 다만 우리들에게 구원적으로 깨달음을 주기 위해서 가룟유다에게 재정을 맡긴 거다.

 

오늘날 가룟유다와 같은 정신을 가진 목사는 교인들 모르게 땅을 사놓기도 하고, 외국으로 돈을 빼돌리기도 한다. 이러지는 않는다고 할지라도 교인들이 힘들게 번 돈으로 헌금한 것으로 중동으로 성지순례를 가기도 한다. 아니, 성지순례를 안 가면 이 사람은 믿음이 없는 거냐? 그곳에 안 다녀온 목사들은 믿음이 없는 거고, 다녀온 목사들은 믿음이 있는 거냐? 이왕 그곳에 갔으면 요단강 물에 들어가서 속을 뒤집어 씻고나 오지. 그러니 교회가 뭐가 되는 거냐?

 

현재 자기가 예수를 믿고 있으면서 예수 믿기 전의 자기와, 예수 믿은 후의 자기를 비교해 보면 뭔가 다르냐, 똑같으냐? 똑같다면 빛의 역사가 없는 사람이다. 어둡다 그 말이다. 예수를 믿으면 밝은 빛이 비춰져야 하는 건데 진리의 빛의 역사가 없다 그 말이다. 빛이 없으니 깨달음도 없고, 옳은 것을 아는 것도 없고, 세상을 구하며 주여 주여만 했지 가치판단 평가가 안 나온다.

 

사마리아 성 수가 여인이 야곱의 우물가에서 예수님과 단 둘이 예배를 드렸는데, 그 때 예배순서가 뭐가 있었느냐? 대화는 물 좀 달라이것뿐이었는데, 예수님이 그 물을 받아먹었느냐, 안 받아먹었느냐? 안 먹었다. 그러니까 물을 먹을 목적으로 그곳에 간 게 아니라 이 여자에게, 우리들에게 어떤 깨달음을 주려고 간 거다.

 

그 우물을 누가 판 거냐? 조상 야곱이 파서 준 거다. 계시적으로 영적으로 말하면 이 야곱의 신앙사상은 물질로 응답을 받고자 하는 물질적 신앙사상이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얍복강가에서 모은 물질을 다 내어놓은 거고, 사람농사를 잘못 지어서 속을 얼마나 썩였느냐? 사람이 속을 썩일 때는 기가 뚝뚝 떨어진다. 살 의욕이 없어진다. 야곱은 물질성적 신앙사상임을 예수님께서 야곱의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자와 예배를 드리면서 밝혀준 거다. 이 물질성적 정신 사상이 예수를 믿은 후에는 바꿔져야 하는 거다.

 

첫째 날에 되어진 성령의 역사를 알겠느냐? 예수를 믿고 보니 첫째 날에서 빛의 자녀가 있고, 어두움의 자녀가 있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겠느냐? 인간은 과거적, 현재적, 미래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존재로서 하나님의 창조에서 이걸 밝히고 있으니 자기를 두고 판단을 해 봐라. 예수 믿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햇수가 늘어갈수록 점점 고상한 존귀 영광자가 되어가는 건지, 늘 그대로인지? 이런 면도 이어지는 창조에서 다 나온다.

 

6-8: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마음 속에서 그렇게 하겠다고 생각을 했다는 거다. 그리고 생각하신 대로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을 나누어 놓았다. 사람이 나누어 놓은 게 아니라 하나님 당신의 주권으로 나누어 놓았다. 이 주권은 절대다. 띠라서 하나님께서 나누어 놓은 것을 인간이 섞으면 안 된다.

 

그러면 왜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나누었을까? 물과 물이 있는데 왜 이 물을 나누어 놨을까? 같으니까 나눌까, 다르니까 나눌까? 다르니까 나누는 거다. 그러면 같은 물인데 다르다면 뭐가 다른 건가? 쓰이는 용도가 달라서 나누는 거다. 용도를 다르게 쓰려고 위의 물과 아랫물을 나누어 놓았다. 하나님께서 나누어 놨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두 물이 근원적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하는 것을 깨우쳐 주려는 거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해 놓은 것을 인간이 들어서 비슷하네. 똑같네라고 해서는 안 된다. 비슷한 것은 똑같은 거냐, 서로 다른 거냐? 서로 다른 거다. 여기서는 비슷한 게 아니라 다른데, 근본적 근원적으로 다르다는 거다.

 

그러면 물은 어디에 쓰는 거냐? 물로 자기의 몸을 깨끗이 씻는다. 더러운 물로 자기 몸을 씻는 사람은 없다. 이걸 영적으로 말하면 비진리를 가지고 사람의 죄가 씻겨지느냐? 안 씻겨진다. 오히려 더 더러워진다. 이 이치를 알아야 한다. 예수 믿는 것을 우습게 생각하지 말아라. 자기의 생각에 따라 지옥과 천국이 나눠지는 거다. 그리고 물은 생물들을 기르고 살리는 데 쓴다.

 

그런데 인류 제 1차적 심판 때, 즉 노아홍수 때에 땅의 물을 솟아오르게 하고, 하늘 위에 있는 물을 퍼부어 버렸는데, 물을 들어 붓는 것은 그 분의 마음의 표현이다. 이렇게 들어 부을 때는 인정사정이 없다. 누가 조금 더 큰 죄를 짓고, 누가 더 작은 죄를 짓고 이건 볼 것 없다. 다 쓸어버리는 거다.

 

비가 많이 오는 장마철에 놀러가서 왜 강가에 텐트를 치는 거냐? 그곳에 텐트를 치는 사람 중에는 죄를 많이 지은 사람도 있고 적게 지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또한 예수를 믿는 사람도 있고 안 믿는 사람도 있을 것인데, 홍수가 나게 할 때는 하나님께서 그걸 봐 주시느냐? 아무리 의인이라 할지라도 이치를 어기고 장마철에 그런 곳에 텐트를 치면 그냥 쓸려 내려가는 거다.

 

물은 위의 물이 깨끗해야 아랫물도 깨끗하다. 그리고 사람이 오염된 물을 먹으면 몸에 병이 든다. 영적으로 보면 교회 지도자가 바른 교훈을 주지 않으면 교인들의 신앙에 병이 든다. 그래서 물은 반드시 위의 물과 아랫물을 갈라야 한다. 진리교훈과 비진리 교훈을 갈라야 한다. 이치적으로 이걸 알겠느냐? 오늘날 마지막 시대에 목사님들의 설교가 이치가 분명해야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부터 생수가 내려와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세상 운운하거나 종교적 일, 사역 운운한다면 교인들이 이게 더러운 물인 줄을 알까?

 

하늘의 이치를 가르쳐 주면 아래 것은 다 드러나는 거다. 가치판단 평가성이 높고 낮은 것, 깨끗하고 더러운 것이 다 나오는 거다. 그런데 교회의 교훈이 이런 것을 알 수 없는 가르침이라면 이건 빛도 아니고 더러운 물을 먹이고 있구나. 그러니 교인들은 썩은 정신을 가지게 되는 거다. 아무리 성경을 들고 말을 하고 유창하게 말을 할지라도 이치적으로 틀리면 그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사람이 진리 생명수, 위의 물을 먹어야 하는데 이게 아닌 땅의 물을 먹으면, 영적으로 말하면 땅의 지식만 먹으면 그 다음에 사람이 어떻게 되느냐? 그 정신이 황폐해진다. 세상을 봐라. 이방 물질세상을 봐라. 그 이치가 다 틀렸다. 그러니 그 정신이 다 황폐해졌다. 예수를 믿으면서 하늘의 물과 땅의 물을 확실하게 분별할 수 있다면 이 사람은 둘째 날에 해당이 되는 사람이다. 둘째 날을 맞은 사람이다.

 

자기가 진리의 빛, 생명의 빛을 가지고 있으면 구별이 되는 거다. 뭔가를 하려고 하거나 뭔가가 되려면 먼저는 구별이 되어야 한다. 구별이 안 된다면 이 사람이 이단을 아느냐? 영적으로 빛을 못 받은 사람이 이단을 아느냐? 이걸 안다면 이 사람은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거다.

 

우리의 이 진리에 대해 이단이라고 해 봐라. 죽는지, 사는지? 공갈이 아니라 우리가 전에 우리 집 방에서 장애인들 몇 명과 다른 교인들 몇 명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니까, 그리고 우리는 명절이 되면 의례히 말씀집회를 하니까 우리 집 가까이에 있는 교회에서 하는 말이 방에서 예배하는 교회는 이단이라고 했단다.

 

그러냐? 그러면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올 때 예배당부터 지어놓고 교회를 했느냐? 예배당이 교회냐? 예배당은 집일뿐이다. 살림하던 집에서 예배를 드리면 그곳이 교회다. 시골에서 사랑채를 내놓는다든지 해서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면 그게 교회다. 그리고 로마황제 때 교회에 대해 핍박이 얼마나 심했느냐? 산으로, 누구 집 다락방으로 다니면서 숨어서 예배를 드렸다. 이 때 교회간판을 달고 십자가를 붙이고 했느냐? 그래도 그게 교회가 아니냐? 계시록의 일곱 교회가 간판이 있었느냐? 그 때 십자가나 교회간판을 붙였다가는 금방 잡혀간다.

 

우리교회를 이단이라고 한 사람들 다 죽었다. 공갈 협박이 아니다. 예수를 핍박하니 어떻게 되었느냐?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소경이 돼버렸다. 주님의 부탁으로 주님을 믿는 성도가 안수를 해서 눈을 떴다. 교회를 볼 때 간판을 달았다. 목사가 박사다이런 걸 보는 게 아니다. 가슴에 십자가를 달고 다니는 그런 걸 보는 게 아니다. 교회를 이런 식으로 보는 것은 예수 믿는 실속, 실상을 모르는 거다. 껍데기만 보고 사람을 논한다거나, 예배당 큰 것, 덩어리 큰 것을 가지고 진짜다. 가짜다해서는 안 된다.

 

계시록에 보면 마지막 시대의 큰 음녀 바벨론이 건물이 얼마나 큰지? 그리고 그 안에 왕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얼마나 부자인지? 그럼에도 그게 진짜였느냐? 진짜인데도 하나님께서 그 바벨론을 다 불에 태워버린 거냐? 옳은 이치는 불에 타지 않고 영원히 가는 거다. (계속)

 

 *************************
김경형목사님께서 교역자 및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통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http://cafe.daum.net/909kk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삭제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나뉘게 ..."

이 게시물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