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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뻐하는 팔복의 사람들

  •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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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8.기뻐하는 팔복의 사람들(1)  


2014-04-13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2)


Ⅰ. 본문해설


본문의 “선지자들”이라는 말은 매우 의미 있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빛과 소금의 비유, 그리고 이어지는 주기도문과 모든 산상수훈을 해석하는 한 축이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시면서 팔복의 사람으로서의 고난이 구약의 선지자들의 당한 박해와 유사함을 말한다.


Ⅱ. 선지자들과 비교하심


A. 신정국가와 선지자
이스라엘은 신정국가였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나라를 통치하실 때는 당신의 대리자가 필요했기에 왕과 선지자, 제사장의 직분을 세우셨다. 많은 사람들은 선지자의 역할을 미래의 일을 예언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것은 전체의 활동에서 아주 작은 부분이었고 대부분의 일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불변하는 삶의 기준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삶의 기준은 율법이었다. 그러므로 선지자의 사명은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가르쳐 주고 그에 합당하지 않는 삶을 회개하여 합당한 삶으로 돌아오게 하는 데에 있다.

 

B. 고난받는 선지자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구별된 삶을 살도록 촉구하는 선지자의 외침을 싫어했다. 그들은 악한 삶을 사랑하였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한 삶을 미워하였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선지자를 핍박하고 박해하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포도원으로 삼으셔서 그들에게 정의와 공평의 열매를 바랐는데 오히려 포학이 일어나고 불공평에 울부짖는 사람들이 생겨났다(사 5:7).


이 포도원의 비유는 마태복음에서 바뀌어서 나온다(마 21:33-41). 이 비유에서 소작인들은 포도원 주인이 보낸 종들을 핍박하고 마지막에는 주인의 아들을 죽여 버렸다. 이 아들은 곧 그리스도 예수이다.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그렇게 미워했던 이유는 예수님의 존재 자체가 ‘정의롭고 공평한 삶을 살아라.’라고 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앞에서 그들의 불의가 드러났고 그들이 어두움인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C. 이스라엘: 제사장 나라 됨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지자 나라가 아닌 제사장의 나라로 삼으셨다(출 19:6). 제사장의 나라의 핵심 가치로는 거룩함(레 11:45)과 헌신됨(벧전 2:5), 중재됨(롬 15:16)이다. 구약의 제사장이 범죄한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가 된 것처럼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나라와 하나님 사이를 중재하는 나라가 되었다.


선지자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제사장 나라가 된 그 상태를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수단이었다. 제사장 나라가 된 이스라엘이 영적 상태가 좋지 않을 때는 선지자가 외치는 말씀을 통해서 정결함을 회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선지자들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제사장의 나라의 정체성을 유지하게 하기 위해 피를 토하듯 말씀을 외치고 핍박 받으며 죽어갔던 것이다. 팔복의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과 역사적이고 신학적인 연장선상에서 같은 존재가치를 지닌다. 그러니 우리가 팔복의 사람이 되면 우리의 존재와 외침, 삶은 방식은 참된 복음과는 멀어진 사람들에게는 낯설고 싫은 것이 되어 박해를 받게 된다.


Ⅲ. 하나님의 나라와 삼직의 통합


A. 기독론적 통합
선지자와 왕, 제사장 삼직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속에서 통합이 된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육신의 입고 계실 때에 왕처럼 통치하시기도 하셨고 선지자들처럼 죄인들을 깨우치기도 하셨다. 그리고 제사장처럼 그들을 위해 중보의 기도를 드리시고 당신 자신을 제물 삼아 하나님께 바쳤다.


B. 구원론적 적용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신 후에 교회의 머리가 되셨다. 여기에서 기독론적인 통합에 이어 구원론적인 적용으로 나아가게 된다. 구원받은 천국 백성들에게도 삼직이 계승 되는데 왕직은 지금이 아니라 미래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실현될 때 부활하신 주님이 이 세상을 심판하고 통치하심으로 그것에 우리가 참여함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제사장직과 선지자직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충분히 실현될 수 있고 실현되어야 한다. 그래서 현재적으로 이 소명을 교회와 세상을 향해 실현하면서 살도록 부름 받은 사람이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리스도인은 결국 선지자들의 후예로서 거룩하고 구별된 삶을 살아 사랑과 진리를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하고 다른 사람이 겪고 있는 영혼의 슬픔과 아픔을 기억하면서 그의 죄가 자신의 죄처럼 하나님 앞에 고백하며 용서를 비는 제사장의 삶을 살아야 한다.


Ⅳ. 결론
선지자는 세상의 미움을 받으면서도 자신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존재로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사람들이었다. 하나님은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세상이 주는 아픔보다도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하신다.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을 지라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정체성을 유지하며 천국의 기쁨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되길 바란다.


580.기뻐하는 팔복의 사람들(2)  
2014-04-27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2)


Ⅰ. 본문해설


예수님은 팔복의 사람들은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핍박을 받게 될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삶을 살라고 격려하신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그들의 상이 클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기쁨과 즐거움의 이유를 하늘나라에서 찾으라고 말씀하신다.


Ⅱ. 신자의 삶: 기쁨과 즐거움


A. 기쁨과 즐거움
이 땅에서 신자의 삶은 기쁨과 즐거움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불행을 겪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을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물건이든지 돈이든지, 명예이든지 사람이든지 마찬가지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이 섭리 속에서 주신 이 세상과 육체에 속한 것들을 받아들이고 그것들 너머에 있는 하나님으로 인해 행복해하고 즐거워해야 한다.


B. 신령한 세계와 행복
우리가 기뻐하고 환희에 벅차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신령한 세계와 행복에 눈떠야 한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사물들은 모두 창조전에 하나님의 관념에 있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라고 하실 수 있었던 이유는 시간과 공간 안에 생긴 모든 피조물이 당신의 관념과 일치하였기 때문이다.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물을 바라보고 탐구하면서 하나님 안에 있는 관념을 발견하고, 창조 세계 안에서 이것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이루는가를 발견하는 데 있다. 피조물이 창조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지혜를 발견하고 그 너머에 있는 하나님을 사랑 하는 데 진정한 행복이 있다. 반면에 인간의 모든 불행은 이것 이외에서 행복을 찾아보려는 데 있다. 하나님 이외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처럼 사랑할 가치가 없다.


그렇기에 천국의 행복은 먹고 마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에 대한 점증하는 지식과 사랑을 누리는 데 있다. 천국에서는 앎이 증대되고 사랑도 증대된다. 날마다 새로운 날이고 새로운 기쁨이다. 본문은 그 위에 하나를 더 덧붙이는데 ‘상급’이다.


Ⅲ. 천국에서 상급이 있는가?


A. 천국의 상급에 관한 견해들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천국의 상급에 대한 견해는 상급이 없다는 견해와 있다는 견해가 나누어진다. 상급이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상급사상은 가톨릭의 공로사상에서 유래한 것이기에 성경적이지 않다고 한다. 그리고 성경에서 언급하는 상은 구원을 얻은 인간이 태만해지지 않도록 선행을 격려하기 위해 인간의 이해 수준에 맞춘 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여러 곳에서 명백하게 상급이 있다고 말한다(눅 6:32, 빌 3:14, 고전 15:41). 또 하나님이 주신 상급을 보고 달려가는 것을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간주한다. 그러면 천국에서는 어떤 식으로 상급이 주어질까? 아마 상급이 있다고 해도 좋은 집이나 자동차, 먹을 것이나 입는 옷은 아닐 것이다. 그 상급은 물질적인 상급이 아니라 지성의 크기와 감성의 크기의 차별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영적이고 정신적인 차이일 것이고 상급을 받는 사람이나 덜 받는 사람 모두 탐욕이 배제된 가운데 서로 상급의 크기가 다르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차등적인 상급일 것이다.


B. 상급받는 팔복의 사람들
 예수님은 상급을 받는 팔복의 사람을 말씀하신다. 진실한 팔복의 사람이 되어서 박해와 고난을 받더라도 그들이 받는 박해와 고통은 반드시 하늘나라에서 보상될 것이다. 그들의 존재론적인 삶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셨기에 당신의 상급으로 갚으실 것이다.


우리는 고단한 일생을 마치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그 상급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시련과 고통을 이기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섬겼던 사람들을 하나님은 결코 그들을 모르 체하지 않으실 것이고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좋은 것을 주실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하나님에 관한 탁월한 지식을 전달해 주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해 줄 영적이고 정신적인 행복이 될 것이다.


Ⅳ. 결론
십자가로 우리를 구원한 주님은 너희는 팔복의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신다. 여러분에게 주님은 오직 한 가지 소원을 말씀하신다. “너희는 이 세상에서 팔복의 사람이 되어 너희가 이 땅에 존재함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선포되도록 살아다오.”라고 부탁하신다. 여러분은 이 부탁 앞에서 어떻게 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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