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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 궁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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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槪觀)

 

11-13.

 

11

 

1-4: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노아의 사상에서는 하나님과의 의사단일이었지만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라고 하는 걸 보니 많은 후손이 생기고 땅이 넓은 곳으로 오니 이들의 생각이 달라진다.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우리 이름을 날리세라고 하며 인간의 이름을 내고, 힘을 자랑하고, 부흥발전을 하자고 한다.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라고 했으니까 노아의 후손들이 아라랏산에서 점점 멀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라고 하는 걸 볼 때 이들이 노아의 사상에서 점점 멀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가 크게 만들어서 우리의 이름을 날립시다라고 하는 것은 에덴동산에서 마귀가 아담과 하와를 꾀인 사상이다. 그런데 당시의 사람들은 마귀의 꾀임의 사상이 어떤 것인지를 몰랐던 거다. 그러면 오늘날의 사람들은 알고 있느냐? 여전히 모르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 마지막 교회도 모르고 있다. 오늘날 마지막 시대의 교회들이 노아의 믿음과 얼마나 멀어졌는지를 모르고 있다.

 

말세에 믿음을 보겠느냐?’ 라고 하는 것은 말세의 교인들이 적그리스도의 세력, 큰 음녀, 바벨론, 666, 짐승의 타락적 본능성으로 가득 차 있다는 거다. 마지막 시대의 교회들이 이런 물질적 개념으로 키웁시다. 키웁시다하고 있다.

 

노아의 세 아들 중에 함은 흑인인데, 그 후손 니므롯이 중심이 되어 우리 이름을 날리세라고 하며 니므롯의 명령과 지휘로 바벨탑을 건설했다. 이 니므롯은 사냥꾼이요, 용사요, 그리고 훗날에 흩어지면서 앗수르도 되고, 바벨론도 되고, 블레셋도 된다.

 

5-9: ‘여호와께서 인생들의 쌓는 성과 대를 보시려고 강림하셨더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 고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그 때 당시의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커지면 안 되는 거냐? 말하자면 바벨론으로 커지면 안 되느냐 그 말이다. 바벨론으로는 천국화가 안 되는 거냐? 선악과 따먹은 차원에서 자꾸 커지면 안 되는 거냐? 안 된다. 왜냐? 인간창조의 목적이 그게 아니기 때문이다.

 

10절 이후로 보면 셈의 족보가 나오는데, 27절 이후로 데라가 나오고, 그 다음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 그리고 하란의 아들 롯이 나오는데, 아브람의 아내는 사래이고, 나홀의 아내는 밀가이고, 하란의 아들이 롯이니까, 이 롯은 아브라함과 조카관계가 되는 거다. 이들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아브라함과 같이 가나안으로 간 자들이다.

 

12.

 

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고 복 주고 창대케 하겠다. 그리고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있다.

 

4-6: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오 세였더라.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아브람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

 

아브람이 75세에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가나안을 향해 떠났는데, 이 때 아브람을 따라 같이 떠난 조카 롯이 아브람이 복의 기준이라고 하는 것을 아느냐, 모르느냐? 모른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라고 하는 말씀은 아브람과 하나님과의 얘기이기 때문에 롯은 아브람이 복의 근원임을 모르고 있다.

 

그러면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라고 하는 말씀이 무슨 뜻이냐? 오늘날 교인들이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요 복의 근원이라고 말을 하고 있는데 이 말씀의 정신을 알고 있느냐? 이제 참 문제다. 어떤 게 인격적으로 성품적으로 복인지를 모르고 있지 않느냐?

 

롯이 아브람을 따라간 것은 아브람이 복의 기준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따라간 게 아니다. 그 뒤에 되는 걸 보면 롯은 자기의 세상살이, 육 목적을 위해 아브람을 따라간 거다. 그러니까 아브람의 복관은 하나님께서 보시는 복관을 가졌지만 롯은 이 복이 아니라 자기 주관성에서 보는 복을 보고 따라간 거다. 오늘날 기독자들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이런 걸 생각해 봐라.

 

7-8: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고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1110절 이후로 보면 누가 누굴 낳고, 몇 년을 살고이렇게 되어있는데, 이건 하나의 거쳐 가는 거고, 127절에서 보면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내가 이 가나안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라고 하니까 아브람이 이곳에 단을 쌓았다. 그리고 여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였는데, 이곳에서도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9-10: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왜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느냐? 그 땅에 기근이 있어서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라는 축복을 받은 아브람이 기근 때문에 점점 남방으로 내려갔는데, 여기에서 계속 내려가면 애굽으로 가는 거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분명히 복을 주리라고 했고, 그 땅을 주겠다고 하셨는데도 아브람이 기근을 맞아 남쪽으로 내려갔는데, 한 번을 내려갔던 두 번을 내려갔던 내려가면 앞에서 말한 복의 근원이 될지라라고 하는 이 복이 없어질까, 그대로 있을까? 그대로 있는 거다. 마찬가지로 그 땅에 기근이 왔어도 아브람이 계속 이곳에 있으면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은 그대로 있는 거다. 그럼에도 아브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내려간 것은 그의 불신성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바다에서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나서 제자들은 죽을까봐 두려워 떨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배 안에서 주무시고 있었다. 그러면 그 배에 타고 있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그 풍랑에 의해 죽을까, 안 죽을까? 예수님은 창조주이니까 풍랑이 일어날 수 있는 과학법칙도 당신이 만든 거다. 그러면 주님이 풍랑을 만들 때 당신이 죽을 수 있는 풍랑을 만들어 놓았을까? 하나님께서 사망을 만들어 놨는데 당신이 만들어 놓은 이 사망에 당신이 죽을까, 안 죽을까? 하나님께서 큰 바위를 만들어 놨는데 하나님께서 당신이 들 수 없는 바위를 만들어 놨을까? 하나님은 이런 것들에 영향을 받는 분이 아니다.

 

이런 이치를 가지고 신앙 믿음의 이치로 볼 때 아브람이 기근을 만나서 애굽으로 내려갔는데, 이게 육의 생각이냐, 영의 생각이냐? 육의 생각이다. 자기가 복의 근원이라는 것을 잊어버린 거다. 그러니까 물질초월이 안 된 거다. 이런 아브람의 마음의 태도가 11-13절에 나온다.

 

11-13: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를 때에 그 아내 사래더러 말하되 나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고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원컨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 하니라.’

 

아브람의 이 마음의 태도가 자기 안 죽으려고 그런 거냐, 아내를 사랑해서 아내를 살리려고 그런 거냐? 아내를 사랑한 데서 나온 말이냐, 자기 죽을까봐 나온 말이냐? 자기 죽을까봐 한 말이다. 창조의 목적으로 이걸 보면 아브람이 자기의 정조를 판 거냐, 안 판 거냐? 판 거다. 바꾼 거냐, 안 바꾼 거냐? 바꾼 거다.

 

자기 육의 목숨 때문에 자기 아내에게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이렇게 말하라고 한 것인데, 이런 아브람에게 너는 왜 네 아내에게 그렇게 말을 하라고 했느냐?’ 라고 묻는다면 아브라함으로서는 실지로 사래가 자기의 이복누이이기 때문에 사실이지 않습니까?’ 라고 말을 할지라도 묻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아브람의 마음 속에는 아내가 없구나하는 느낌이 든다. 이런 아브람을 볼 때 점점 남방으로 들어간 것은 아브람이 아직 물질초월이 안 됐구나. 그 다음에 자기 안 죽으려고 아내에게 누이라고 하라고 한 것은 목숨초월이 안 됐구나.

 

14-16: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사람들이 그 여인의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바로의 대신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취하여 들인지라 이에 바로가 그를 인하여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약대를 얻었더라.’ 아내가 바로의 왕궁으로 들어갔다. 그 대가로 아브람에게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약대를 많이 줬다. 아브람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많이 얻은 거다. 그러나 이걸 우리가 제 삼자적 입장에서 보면 아브람이 아내를 팔아먹은 거다.

 

아브람의 아내가 바로의 왕궁에 들어가서 점점 해가 지고 밤이 되어갈 때 아브람의 마음이 편했을까, 아니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약대를 많이 얻어서 부자가 됐다라고 하며 즐거웠을까?

17: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연고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렸는데,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라고 하신 말씀도 있고, ‘너는 복의 기관이 될 것이다라는 말씀도 해 주셨으니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이루기 위해 실수를 한 아브라함과 그 아내를 지켜주시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비록 실수를 할지라도 바른 믿음을 위해서 지키시는구나.

 

18-20: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대접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나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 아내와 그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 하나님께서 바로와 그의 집에 큰 재앙을 내려서 그 아내와 그 모든 소유를 아브람에게 보내게 하셨다.

 

그러면 바로가 이런 일을 당한 게 바로가 잘못해서냐, 아브람이 잘못해서냐?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재앙을 내린 것을 보면 바로 왕이 잘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누가 잘못한 거냐? 아브람이 잘못했다. 왜냐? 바로는 사래가 아브람의 아내라고 하는 것을 알고 빼앗은 게 아니라 아브람이 사래를 자기 누이라고 했기 때문에 데리고 간 거다. 사래가 자기 아내인데도 아브람이 자기 목숨이 죽을까봐 누이라고 했으니 잘못은 아브람이 했는데 아브람의 잘못으로 바로가 벌은 받은 거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복의 근원이라고 하셨는데, 아브람이 그 자리에 있어도 기근에서 멸망을 받지 않을 것인데도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애굽으로 내려오는 잘못을 범했음에도 하나님께서는 이 아브람을 치지도 않았고 멸망되도록 하지 않은 것을 보면 아브람이 복의 근원이라는 게 분명한데 아브라함이 이걸 왜 생각을 못했을까?

 

아브람의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 바로의 집에 재앙을 내렸을 때 벌 잘 받는다. 고소하다라고 했다면 어떻게 될까? 이건 복 받을 사람의 마음이 아니다. 아브람이 실수를 했음에도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벌을 내리지 않았다고 해서 나는 복의 근원이다. 그러니 또 애굽으로 내려가자라고 한다면 이때는 몽둥이로 맞는 거다. 하나님께서 실수를 한 아브람에게 벌을 내리지 않은 것을 볼 때 아브람의 신앙의 후손인 우리 믿는 사람들이 혹 실수를 할지라도 우리가 복의 근원이라고 하는 것은 변하지 않는 거다.

 

13

 

1-4: ‘아브람이 애굽에서 나올 새 그와 그 아내와 모든 소유며 롯도 함께 하여 남방으로 올라가니 아브람에게 육축과 은금이 풍부하였더라. 그가 남방에서부터 발행하여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그가 처음으로 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아브람이 애굽으로 내려갈 때는 거지처럼 내려갔는데 올라올 때는 그 아내와 모든 소유며 롯도 함께 같이 올라왔기 때문에 기분이 좋았을 거다. 내려갈 때의 마음과 올라올 때의 마음이 다를 거다. 아내도 찾았겠다. 부자도 됐겠다. 이로 인해 아브람이 덩실덩실 춤을 췄다면 그 아내가 이 꼴을 볼 때 어떤 마음이 일어날까?

 

아브람이 남방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온 것은 하나님의 보호로 된 것인데, 애굽에서 바로가 아브람에게 네가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대접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나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라고 말을 했으니 이는 아브람이 불신자에게 설교를 한 마디 듣고 올라온 거다. 예수 믿는 사람이 불신자 차원으로 내려가면 안 믿는 사람으로부터 한 소리를 듣게 된다. 이게 설교를 듣는 거다. 차원이 그렇다. 이러면 그 얼굴이 뭐가 될까? 그들에게 본이 되어야 할 텐데 본이 되지 못한다면 그 얼굴이 어떻게 될까?

 

다시 올라와서 벧엘과 아이 사이의 전에 장막을 치고 처음 제단을 쌓았던 곳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 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 것일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시 불러올리셨으니 그냥 좋아서 부른 거냐, 아니면 마누라도 찾고 부자도 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하며 예배를 드린 거냐, 아니면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라고 한 건지?

 

5-13: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그 땅이 그들의 동거함을 용납지 못하였으니 곧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라.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하였는지라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 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하였고 롯은 평지 성읍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소돔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

 

아브람과 롯이 헤어지게 생겼는데 왜냐? 거하는 곳이 풍부해지니까 비좁고 목자들끼리 서로 다퉜기 때문이다. 아브람이 이 사실을 알고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고 하면서 롯에게 거할 곳을 먼저 택하라고 하니까 롯은 자기 보기에 물이 풍부한 요단지역을 택했다. 이것은 보암직한 것을 취한 사상이다. 롯이 그 쪽을 선택해서 점점 어디까지 들어갔느냐? 소돔 고모라까지. 롯 자기가 볼 때는 그곳이 천국이다. 들판도 좋고, 지금으로 말하면 아파트도 있고, 놀 곳도 많고 하니 얼마나 좋으냐?

 

14-18: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동서남북을 바라봐라. 보이는 곳을 다 주겠다라고 하셨는데, 아브람이 바라본 넓은 땅에는 남의 집도 있고 남의 땅도 있는데 이것을 다 주시겠다는 거다. 세상의 모든 땅의 주인은 원칙상 하나님이다. 그러니 다 주실 수 있는 거다.

 

그러면 어떻게 주시겠다는 거냐?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라고 하신 것을 볼 때 아브람의 자손들이 보이는 곳을 다 차지한다는 거다. 이것만이 아니라 아브람이 동서남북, 즉 종횡으로 밟는 곳을 다 주겠다고 하셨다.

 

종횡으로 밟는 곳을 주겠다는 것은 발로 행동 활동하는 것을 다 주겠다는 거다. 여기에는 아브람의 신앙을 이어받은 우리들에게도 이 약속이 들어있는 거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가 이 약속을 가지고 사느냐, 아니면 모르거나 까먹고 사느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다. 옮긴 곳에서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렸는데, 이게 감사의 예배일까, 아니면 내가 이곳의 높은 산에 올라가서 사방을 볼 테니 그것도 다 주십시오라고 한 예배일까?

 

아브람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곳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오늘날 예수 믿는 나는 솔직히 말해서 아브람만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나에게는 그림의 떡일 뿐 아브람이 받은 복을 받을 수 없는 거냐? 내가 이런 생각을 할 때 마귀가 내 옆에서 이 소리를 듣는다면 뭐라고 할까? ‘네 말이 맞다그럴까, 아브라함처럼 되라고 용기를 줄까?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이런 말씀을 하실 때 참 부럽지 않느냐? ‘내가 아무리 못돼도 하다못해 아브람 집의 양을 키우는 목동이라도 됐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마음이 없느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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