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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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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18.

 

16-18: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기 전에 나사렛 고을에서 자라나시면서 안식일에 규례대로 성경을 늘 읽으셨던 것입니다. 안식일에 규례대로 성경을 늘 읽으셨다. 그러니까 이 성경을 읽는 면에 있어서 자기가 정해놓고 읽는 것도 좋습니다. 그런데 몇 시부터 몇 시까지 내가 성경을 읽어야지그것도 좋지만 늘 수시로 성경을 읽어야 되겠다고 하는 자기 규례 이것도 있습니다. 어쨌든 성경을 우리교회서는 많이 읽어야 돼요. 한글 알고 눈 밝고 하면 예수 믿는 사람이 성경을 갖고 다니면서 다른 그 어떤 책보다도 성경을 많이 읽어야 될 텐데 이게 만화책이나 소설책이나 무슨 여성동아나 남성동아나 이런 걸 늘 읽는다면 이거 참 문제다.

 

물론 상식적인 것은 예수 믿는다고 상식을 다 아느냐? 그렇지 않아요. 모르는 사람들이 참 많아요. 심지어 일반 공중도덕도 못 지켜서 욕을 먹는 사람들이 많아. 그래서는 안 돼. 일반적 상식적인 것은 배우고 듣고 알아야 됩니다. 알아야 돼요. 청년들은 엄마 되기 전에 아버지 되기 전에 상식적인 것은 다 알아야 돼요. 알고 가야 되고. 모르면 부모로부터 배우고, 부모도 모르면 또 할 수 없어. 딴 사람에게 듣고 이래야지. 어른이 아랫사람에게 들려주고 가르쳐주고 또 아랫사람은 알려고 묻기도 하고 그래야지. 경험할 게 따로 있고 알고 가야 할 게 따로 있고 그래요. 성경 많이 읽으세요.

 

마귀에게 시험을 받기 전에 뭘 많이 봤다는 거요? 성경을 많이 봤다는 게 증거가 되지요. 성경 안 보고 이 말씀 들으려면 참 힘들어요. 또 이 말씀만 계속 듣고 성경을 안 본 사람은 남 정죄는 또 잘해요. 자기는 하나도 못 봐요. 이게 엄청나게 못된 사람이다. 그래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 말씀 들어도 성경 안 읽고 이래놓으면 자기의 사고방식은 성경처럼 말하는 것 같으나 알고 보면 그 자기 속에 세상이라고 하는 이게 자기 입을 통해서 뿌리가 그렇게 박혀있어. 그래서 자기는 못 보는 거요. 엄청나게 교만하고 이게 아주 표독스럽다 그럴까? , 악한 사람들 종류가 많아요.

 

다른 날 성경을 못 보면 주일날은 성경을 보려고 애를 써. 다른 날은 또 다른 일 하느라고 성경을 잘 안 보잖아요. 바빠서 어쩌고. 뭐 근데 주일날은 성경을 안 보고 뭐가 바쁘다는 거요? 성경 봐요. 성경 안 보고 이 말씀 들으면 이거 안 돼. 사람이 안 돼져버려.

 

그런데 우리는 성경도 안 보고, 성경 안 보니 마귀의 시험도 모르고 하나님의 종 목사가 된다고 나설 수 있겠느냐? 사실 우리가 몰라서 다 이지경이지 알고 보면 확실히 마귀의 시험을 이긴 후에 그래도 뭘 해도 되지 않겠냐? 마귀의 시험에 계속 넘어가놓고 가르친다면 마귀의 시험에 넘어가는 방법만 가르치는구나. 이런 식이 돼버리지 않겠냐? 성경은 이기라고 하는 거고 능력자 되라고 하는 거고 존귀 영광자 되라고 하는 건데 그게 없으니 그 말이요. 이게.

 

규례대로 성경을 읽는가? 아무 때고 틈만 있으면 성경을 본다는 규례가 있는가? 몇 장을 보든지. 근데 재밌는 만화 있으면 밥을 먹으면서 책을 옆에 놓고 보지요? 뭐 그런 거 없나? 성경 본다는 규례는 있어야 한다. 성경 본다는 규례는 있어야 한다. 그런데 성경을 본다는 규례는 없고 주일날 텔레비전 보는 규례는 있지요? 안 그래요? 식구가 다 같이 모여서 성경을 읽는다는 것이 아니라 식구가 다 모여서 텔레비전 보는 규례는 있지요?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성경에 보니까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서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그러면 드리거늘한 것을 보니까 옆에서 누가 성경을 찾아서 아마 그걸 준 것 같기도 한데, 그러나 또 한 편 예수님이 성경을 딱 펴니까 이사야 선지자의 글이 나타날 수도 있는 거지요? 또 이것 가지고 점칠라. ‘오늘 신수가 어쩔라나? 재수가 좋을라나?’ 하고 성경 착 펴면 탁 보이는 그 곳. 그런 교인들도 간혹 있는 모양이더라고. 그 전에 들어보니까 그래요. 그러면 만약의 경우에 왼 뺨 오른 뺨까지 돌려대라그것도 그렇고, 히스기야에게 한 말씀처럼 네가 오늘 네 집을 정리하라. 네가 살지 못하리라그게 나오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니 얼마나 이게 무당쟁이가 많으냐? 이방신을 믿는 미신적 그런 신관이 엄청나게 많다.

 

우리는 성경의 뜻을 모르면 예수님께 묻고 기다리는 자세입니다. 성경 참 해석은 그 분으로부터 나온다는 말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 분으로부터 나온다는 말입니다. ? 우리를 지으신 창조의 원인 동기 목적은 우리가 예수 당신처럼 되어지는 질적 성품적 우리의 온전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늘 묻는 태도, 기다리는 태도. 성경의 참 해석은 우리가 당신처럼 온전자 되어지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목적이 아닌 세상 것을 구하게 만든다고 하는 것은 그 분으로부터 나온 해석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성경을 펴서 예수님에게 주니 예수님이 그 성경해석을 한다 그 말이요. 이해갑니까? 예수님으로부터 나오는 성경해석 그런 의미가 들어있다 그 말이요. 이 장면에서. 본문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이 예수 당신이라 함을 알리십니다. 곧 그 일을 하러 오셨다는 말씀이지요.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온전케 되는 그 일을 하심입니다.

 

여기에서 또 계시는 하나만이 아니고 중복적으로 또 들어있고 또 들어있고 또 들어있고. 중복적 계시로서 하시는 말씀은 우리에게 성령을 입혀서 보낼 때는, 무슨 말이요? 아까 오전 시간에 말한 대로 성령의 권능으로 들어간단 말이요. 성령을 입혀서 보낼 때는 교훈적인 면에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적인 교훈을 가지고. 그게 예수란 말이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이 예수. 예수가 갈릴리로 들어가잖아요. 그럼 들어가셔서 말씀 전하실 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교훈을 한다 그 말이요. 그리고 당신이 당신의 종을 보내실 때는 성령을 입혀서 보내는데 말씀을 증거 하게 하는데 그 말씀 속에는 역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교훈을 가지고 들어가시는데 그 교훈을 가지고 사람을 온전케 하라고 하는 뜻이 있다. 그런 사명이 주어져 있다 그 말이요. 이해가 갑니까? 그러니까 항상 예수님이 하시는 활동 속에는 제자들이 거기에 늘 붙어서 그림자처럼 따라가져야 되는 해석이 나온다 그 말이요. 딴 짓거리 하지마라 그 말이요.

 

말씀을 전하면 최소한 이 몇 가지 시험은 이겨야 될 거 아니냐? 그런데 오늘날 이 거짓된 목사들은 세상화 사상이 돼서 완전히 넓은 길 사망 길, 전부 예수이름으로 세상 것을 다 갖겠다고 하니 이게 마귀의 종이지.

 

성령의 기름부름을 받은 주님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십니다. 다시 말하자면 부자에게는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는 말이 되는 거지요? 맞잖아요? 18절에 뭐라 그랬어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다그랬지. 부자에게는 안 전한다. 맞잖아요? 그러면 여기서 가난성은 어떤 가난성이며 부요성은 어떤 부요성을 말하는 거냐? 이게 이제 문제가 되는 거지요. 아무리 물질부자라도 영적 면에 가난성에서 사는 사람이 있고요, 또 물질이 아무 것도 없으면서도 이게 헛 부자가 돼서 부요성에서 사는 사람도 있어요. 성경은 정신 사상 소원 목적을 두고 하는 말이에요. 물질을 많이 가졌느냐, 적게 가졌느냐, 안 가졌느냐 이걸 말하려는 게 아니라. 원뜻은. 그러니까 예수님이 너 가난하냐, 부자냐물을 때에 뭐라고 그래야 되겠어요? ‘가난하다그러세요. 무조건 가난하다 그러세요. 허허허.

 

가난성은 어떤 가난성인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세상은 물질성을 많이 가지지 못한 것. 그렇지요? 그런 식으로 알지요? 생활의 궁핍성, 또 학문을 배우지 못해서 지식적으로 많이 모른다는 면에서의 가난성. 그런 거는 다 알지요? 성경은 그런 목적으로 말씀하심이 아니라 영적 면에서의 가난성,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는 면에서 가난성. 그 가난성을 자기가 안다 그 말이요. 모르면 그것도 안 되는 거고. 안다 그 말이요. ‘내가 가난하구나. 깨닫지 못한 것이 많이 있구나그걸 알아야지? ‘나는 믿음이 있다 없다그런 소리 말고.

 

자기 안의 말씀의 가난성 부요성과 자기의 믿음과는 이게 직결적으로 연결이 들어가 있어요. 뭐 행동 어떻게 하는 거보고 아이고, 참 믿음이 되게 크다, 많다하지만 그건 이미 틀렸어. 믿음을 보는 기준이 틀렸어. 영적 면에서 가난성,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면에서 가난성, 예수 그리스도를 모른다는 면에서 가난성, 천국을 모른다는 면에서 가난성,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모른다는 면에서 가난성.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알아요? 안 믿는 사람들이 세상을 세상만큼 알아요? 몰라요.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를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세상사람들이다. 그럼 오늘날 예수 믿는 자기는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압니까? 불타질 세상, 현재 자기가 나그네로 잠깐 거쳐 가는 세상. 그렇지 않아요? 아무리 많이 가졌어도 결국은 불타질 것. 많이 가지려고 하는 것보다 많이 이용할 줄 알아야 돼요. 이용 응용 활용을 할 줄 알아야 돼요. 자기가 다 가지고 있는 상태는 이게 이용 활용을 모르는 사람이 많아요. 그럼 자기가 죽어요. 누구 칼에 죽을지 몰라요. 그건 굉장히 어리석다.

 

자기 소유는 많이 갖고 있으면 세상에서는 부자 소리 들을는지 몰라요. 그러나 이게 정복하는 면에서는 그건 없다. 사람이 정복자가 돼야 되겠는데. 정복이 많으면 판도가 넓어지지요? 물질은 사람을 위해서 써야 되고. 어떤 사람을 위해서 쓰느냐? 우리는 자타의 이룰구원,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는 일에 써야 되겠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안 만들어지려면 그 면에 물질 쓰지 마라. 너는 이용당한다. 하나님도 미워서 그 사람에겐 안 준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거거든요? 사람을 만들어놓은 것은 당신의 일을 사람을 통해서 하려고 인간 너를 만들었다 그 말이요. 그 면도 또 들어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하나님의 일을 안 하려고 하니 인간 네 욕심으로 가지고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서 뺏어버릴 수도 있다. 그 면이 들어있어. 뺏어버려.

 

오늘 박OO집사님 식구들 하나도 안 보이네? 식구들 다 아프데요? 그 집 아는 분들 한 번 가봐요. 들어가면서 마스크도 하고 소독기도 가져가서 다 뿌려주고. 그리고 어린아이들 열나고 기침하고 그러면 데리고 오지 말아요. 안 데리고 오는 게 믿음이에요. 상식이 비뚤어진 사람은 죽자 사자 무조건 뭐. 그건 아니다. 병들고 아픈 사람은 딱 분리시키는 거요. 성경에서 분리시켜요. 다른 사람에게 감염이 되니까. 그리고 영적 사상적인 면으로 들어가서 이단발설을 하게 되면 분리시키는 거요. ? 감염을 시키고 사람의 신앙 믿음을 죽이고 들어가니까. 그래서 어떤 면으로 완전히 결별을 시키는 거요. 그것도 알아야 돼요. 그런데 우리 인간은 자꾸 인간의 어떤 인정정실을 가지고 그냥 상식도 무시하고 위생도 무시하고 이러니까 사람이 고통을 당하지요. 그래서는 안 된다. 그게 지혜가 아니고 미련이요.

 

성경은 영적 면에서의 가난성을 가르쳐 주지요. 많이 가르쳐주고 있다. 예수님께서 첫째 시험에서도 밝혀주었는데, 말하자면 너희들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을 구하지 말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 하늘나라의 뜻을 구하라. 예수님은 하늘나라의 뜻을 전하고 다니셨지요? 세상물질 가난한 자를 부자로 만들어 주겠다는 그런 목적으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그런 말의 뜻은 아닙니다. 예수 믿으면 세상부자 된다는 그런 법은 없어요. 그러지 말아라. 예수 믿다가 순교 당하면 어떻게 무슨 말을 하려고 그래? 말이 안 맞는 거다. 말의 이치가 안 맞는 소리다 그 말이요.

 

물론 사람이 바로 되면 온 집안 식구가 바로 되면 그건 부자로 될 수도 있는 거요. 없는 건 아니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구태여 물질에다가, 따라오는 그 면에다가 해석을 붙일 필요가 없는 겁니다. ? 영 주격이기 때문에 그래요. 눈에 보이는 몸은 영 주격의 사람이 병들거나 곁길로 가거나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육신을 치기도 하고 이런 저런 방법으로 쓰는 거예요. 우리의 영적 차원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자기 몸을 치기도 하고 그래요. 그러니까 예수 잘 믿으면 뭐가 잘 된다이런 식으로 붙이는 해석은 이미 틀렸어요. 해석하는 기준이 그 사고방식이 틀렸어요. 그래서는 안 된다.

 

이 목사님들 세계에 비유와 상징에서 어떤 물건을 말을 하면 그 물건을 쓸 사람을 생각을 해야 되겠는데 자꾸 물건을 갖다가 분해를 하려고 그래요. 이러니 이게 계시의 뜻이 나오느냐? 그건 안 나와요. 그거 잘 아세요. 그리고 계시의 이치를 바로 알면 구태여 그런 책 안 봐도 돼요. 봄으로써 자꾸 성경을 보면서 문자 글자에 사람이 매달려 버려요. 그럼 펴지지를 못해요. 윤곽을 잡고 좁혀 들어가야 되겠는데. 물론 그 이치는 좁아진데서 또 넓어지기도 하고 좁아지기도 하는데 문제는 이게 생각이 사고방식이 딴 데로 자꾸 흐른다는 게 문제요. 성경 못 깨달아요. 그리고 성경에서 그냥 건너뛸게 있고, 자세하게 알고 갈게 있고, 맛을 보고 갈게 있고 이게 성경도 이런 게 다 있는데 쓸데없는 장소에서 오래 머물러 가지고 그러면 시간만 낭비되고 진작 맛을 봐야 할 곳은 못 보고 그냥 넘어버려요. 그런 면이 있다는 거.

 

주님의 옳은 종들은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말하고 하늘나라를 깨닫게 해주시고 신령천국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고 영원히 존귀 영광을 말하고 있는데 영원한 존귀 영광성을 말하고 있는데 거짓 종들은 불에 타지고 없어질 것을 구하게 하고 이루라고 말을 하고 또 주장을 한다 그 말이요. 예수님께서 예수로 오시기 전에, 예수로 오신 것은 사람으로 오신 것을 말하는 겁니다. 그 사람이 바로 구원이다 그 말이요. 예수처럼 만들어진 이게 바로 사람이 구원이다. 그 예수님의 사람 그 안에는 자체적으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신령성으로 된 그리스도의 성질로 그게 딱 들어있단 말이요.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라그럴 때는 바로 그 일을 하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란 말이요. 당신은 그 일하는 거고.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듯이 당신은 교훈적으로 활동적으로 영적 성령의 감화성으로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질적인 사람으로 만든다 그 말이요. 이해갑니까?

 

근데 우리 인간은 자기 이름의 뜻대로 사느냐? 그렇지도 못 해. 사실 가만 보면. 좋은 뜻으로 다 만들고 했겠지만 그렇게 못 사는구나. 사람이름하고 달라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천주교에서 이름을 지어주듯이 그거 아니에요. 예수님이 시몬, 원래 이름이 게바였나? ‘베드로라 하라그랬습니까? 베드로는 바위, 반석. 또 누구 이름을 바꿔줬지요? 누가 우뢰라고? 요한이지요? 그러니까 그 가만히 또 보면 육신의 이름은 부모가 지어줬지만 신앙의 성질적인 면으로 들어가서 예수님이 요걸 본다 그 말이요. 그런 것을 본다 그 말이요. 그런데 진리이치로 우리가 보면 이름은 좋지만 사람이 생긴 소갈머리가 생겨먹기를 참말로 이게 목회자가 할 소리는 아니지만 소갈머리가 생겨먹기를 지랄 같은 사람도 있습니까? 그 어디 사람이겠냐?

 

예수께서 예수로 오시기 전에 선재적 그리스도로 계셨고 모든 신령계와 물질계를 만드신 분이라서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너무나도 잘 아시는 분이시다. 현재 자기는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알고 있나요? 알고 있다면 천만다행이지.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모르는 교인이 있다면 이건 참말로 세상을 헛 사는구나. 젊은 시절을 헛 보내는구나. 일생을 살아도 이게 완전히 헛 살았구나. 그런 면이 나온단 말이요. 사실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 완전히 헛살았고요. 맞잖아요? 예수 믿은 후에도 깨닫지 못해서 알지 못해서 다 헛 산 거다. 이거 다 헛 산 거다. 깨달았다고 해도 이제 바로 살려니 이게 얼마 안 남았구나. 이제 참 몸부림치고 싶지 않는가?

 

만약의 경우에 하나님께서 예를 들자면 앞으로 백 년을 더 살아라그러면 어떻게 주님처럼 살아볼 각오가 있습니까? 어떻게 지긋지긋할 것 같아요? 주님처럼 살아봐요. ‘한 번 백 년만 아이고, 이백 년 더 살게 해 달라이렇게 나갈 텐데. , 세상에 살면서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천국이 어떤 천국인지, 현실에서 우리 이룰구원이 어떤 구원인지 이걸 아는 사람은요 현실이 굉장히 즐거운 거요. 신나는 거요. 재밌는 거요. 아니, 재밌는 놀이를 한다는 의미에서 재밌다 그게 아니고 얼마든지 환경과 처소와 사람을 예, 한 사람 붙들면 예수 전하느라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 재밌지요? 상대방은 죽으려고 그러지. 허허. 그런데 말하는 자기 입장에서는 재밌을 거야. 근데 듣는 입장에서도 그러냐 그러냐그러며 들으면 그 얼마나 재밌을까요? 그래, 상대방이 잘 들으면 잘 듣는다고 자꾸 붙잡고 있고 안 들으면 잘 알아들으라고 더 붙잡고 있고. 이거 참 못 알아듣는 사람은 죽을 지경이야. 참말로. 어쨌든 깨닫는 그 재미. 사람 만나면 깨닫게 하는 그 재미. 어디를 가고 산천을 보더라도 깨달아진 이치가 깨닫는 그 재미.

 

그런데 아무리 돈이 많아도 사람이 심심할 때가 있습니까? 사람이 괜히 짜증날 때가 있어요? 돈이 많아도? 그런데 사람이 됨됨이가 다 있지만 괜히 짜증나는 그런 때도 있습니까? 제 혼자 있으면서 괜히 짜증나는 거. 그런 경험 안 겪어봤어요? 어떤 때 짜증나요? 돈 많은 사람들처럼 못 살아서 그런 거지? 맞지요? 참 설교시간도 빨리 끝나야 이게 재미가 있을 텐데 늦게 끝나서 되게 짜증나. 참말로. 졸려서 몸은 아파서 허리는 아파 죽겠는데.

 

땅의 것 세상 것은 영적 면에 깨닫도록 하는 영적 면에 대한 인용으로. 선재적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취하시고 예수로 오신 것은 우리 죄를 대신함이요 기본구원을 입혀서 하나님의 본질의 사람으로 만들어 인간창조의 궁극목적대로 하늘로 데려 가시는 겁니다. 간단히 말하면 그렇다 그 말이요.

 

오늘날 교회의 인도자들이 성경을 죽을 때까지 파헤쳐도 우리가 이루고 가야 할 구원이치는 무한인데 그런데 성경계시는 다 도통을 했는지 딴 짓을 하고 있다 그 말이요. 세상에 속한 것을 이룬다고 넓은 길로 모두 하나같이 달려가고 있지 않은가? 교인들도 성경을 도통을 다 했으니까 같이 넓은 길로 뛰고 있지요? 안 그래요? 영에 속한 것, 우리의 구원에 관한 것을 모르면 이룰구원에 관한 이치는 가르칠 수가 없고 불타질 세상을 소원 목적할 수밖에 없고 진노의 심판을 자초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우리는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을 자로 지어졌다는 점에서 천국에 들어갈 사람으로서 신령한 하나님의 속성의 성품을 충만하게 입어야 되겠는데 그 점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면에서 가난이다 그 말이요. 가난하지요? 저도 가난하고. 교회를 인도하는 종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아는 면에서 풍부해야 이룰구원 차원에서 그 면에서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가 있는 거요. 모르면 못 주고 없으면 못 주고. 만일 예수이름으로 세상 것을 이루라고 한다면 이는 마귀의 둘째 시험에 걸려든 겁니다. 알겠어요? ‘예수 믿어 부자 되라.’ 벌써 본문을 통해서 보면 둘째 시험에 걸려든 거다. 그건.

 

오늘날 우리가 영의 눈을 가지고 이치적으로 보면 많은 교회들이 목사들이 교회들이 첫째 시험도 걸려 넘어졌고 둘째 시험도 걸려 넘어져 있어요. 그 장면을 볼 줄 알아라. 이해 가요?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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