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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소설 <우리의 사랑은....> 제21회 ~ 제25회<br>

첨부 1




제21회 - 승호는 지난 날의 아픈 기억이....


<그래요. 맞아요. 대개는 안 좋지.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니 나오미의
두 며느리는 자기 남편이 죽었을 때 옳다구나 하고 시어머니를 떠나 친
정으로 가기는커녕 시어머니가 집으로 가라고 할 때 울면서 매달렸어요.
보니까 시어머니가 재산이 많았던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지. 자, 이제 다
시 물어보겠어요. 나오미는 어떤 사람인 것 같나요?>
그때 수진의 머리 속에 조그만 빛이 들어오는 것 같았다. 수진은 다시
성경 본문을 훑어 보았다. 분명히 조금 전에 읽었을 때와는 다른 시각으
로 읽혀지고 있었다.
이곳 저곳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일어나더니 누군가의 <좋은 사람요!>
하는 말에 와 하는 웃음과 함께 스러져갔다.
전도사님도 웃으며 말씀하셨다.
<맞아요. 나오미는 참 좋은 성품을 가진 사람인 것 같아요. 여러분도 알
다시피 사람은 자기와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기가 참 어
려운 법이지요. 그런데 여기 보니까 나오미는 자기와 한집에 살았던, 자
식도 아니고 며느리인 두 여자에게 사랑을 받고 있었던 것 같아요. 본문
을 한번 읽어 볼까요? 9절과 10절, 그리고 14절, 16절입니다. 한번 같이
읽어 볼까요.>
모두 한 목소리로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수진도 물론 같이 읽었다.
<여호와께서 너희로 각각 남편의 집에서 평안함을 얻게 하시기를 원하노
라 하고 그들에게 입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 나오미에게 이르되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 시모에게 입맞추되 룻
은 그를 부좇더라....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
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
고 어머니께서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
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전도사님이 말씀을 계속 하셨다.
<물론 아무리 시어머니가 심술궂더라도 며느리가 착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어요. 정말 착한 사람은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와는 상관없이 착하니
까. 하지만 두 며느리 모두가 이렇게 나온다는 것은 아무래도 시어머니
나오미가 좋은 성품을 가졌다고 보는 것이 옳겠지요. 자, 이번엔 그 며느
리 중의 하나인 오르바를 한번 살펴 봅시다. 왠지 룻에 가려서 그런지
썩 호감이 가지는 않는게 사실이지요?>
그랬다. 사실 오르바라는 이름도 낯설었다. 말씀이 계속 이어졌다.
<항상 객관적인 입장에서는 높은 도덕적 관점에서 등장인물들을 좀 가혹
하게 평가하게 됩니다. 아까 민호형제가 나오미를 평했던 것처럼 말이지
요. 물론 그 말이 맞습니다. 나오미가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두 며느리를 데리고 고향으로 갔으면 좋았겠지요. 하지만 그것은
구약은 물론 신약까지 다 알고 있는 지금 우리의 관점에서 보는 아쉬움
이지요. 그 당시, 그러니까 룻이 살던 당시는 어떤 시대였습니까?>
누군가가 <사사 시대요!> 라고 말했다.
전도사님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맞아요. 사사시대였지요. 조금 전에 읽은 1절에 있지요. '사사들이 치리
하던 때에....'라고 말이에요. 그럼, 사사시대는 어떤 시대였을까....잠
깐 사사기를 찾아볼까요? 멀리 가면 안되겠지, 성훈 형제. 바로 룻기 앞
이니까.>
강대상 바로 앞에 앉아 있던 2학년 성훈이가 사사기를 찾는다고 성경을
다시 들춘 모양이었다. 모두들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전도사님이 웃으며 말씀하셨다.
<아마 지금 웃었던 사람 중에서도 성훈이처럼 사사기가 룻기 앞에 있는
걸 몰랐던 사람들이 꽤 될걸?>
그러자 또 누군가가 <맞아요!>라고 소리쳤다. 다시 대학부실은 웃음으로
가득 찼다.
전도사님이 말씀을 이으셨다.
<자, 우리가 지금 읽어야 할 본문은 사사기 21장 25절, 사사기의 맨 마지
막 장 마지막 절이니까, 오늘 본문인 룻기 1장의 바로 앞 장이지요....
다 찾았나요? 한번 같이 읽어봅시다. 그 때에....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
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그렇구나. 수진은 이제 확실히 이해가 되었다. 현대인의 시각으로 사사시
대의 나오미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전도사님 역시 지금 그것을
설명하고 계셨다. 수진은 다시 본문을 읽으며 오르바를 생각해 보았다.
전도사님이 오르바에 대해 질문한 의도가 무엇이었을까....? 하지만 오르
바에 대한 기록은 너무나 짧았다. 그 짧은 본문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오
르바도 시어머니 나오미와 헤어지는 것을 아주 슬퍼했지만 결국은 고향에
남게 되었다는 것 정도였다.
수진은 다시 전도사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이 룻기를 읽을 때마다 오르바가 너무나 운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
어요. 만약에....만약에 룻이 없었다면, 아니 룻이 그렇게 착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래서 룻이 시어머니를 따라가지 않으려고 했다면, 그도저
도 아니면 최소한 오르바에게 동서인 룻보다 시어머니를 더 잘 모실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더라면, 오르바가 끝까지 시어머니를 따라서 가지 않
았을까요? 물론 이것은 가정일 뿐이지요. 결국 실제로는 오르바는 고향에
남아서 성경 본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 백성과 그 신에게로' 돌아가게
되었으니까 말입니다. 아마 그 당시 오르바에게는 비록 시어머니를 따라
가지 않는 죄책감도 있었겠지만, 그래도 친정이 있는 고향에 남게 된 것
에 대한 안도감 또한 있었을 겁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한가지 교훈을 얻
을 수 있겠지요? 그것은 지금 당장의 유익함만을 쫓다가는 하나님의 축복
을 잃게 된다는 것 말입니다. 이러한 예의 대표적인 경우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기름진 평야를 택했다가 소돔성의 재앙을 겪게 된 것이겠지요.
아무튼 나는 우리가 시어머니를 따라가지 않은 오르바를 너무 가혹하게
판단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를 속이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말하고 싶
습니다. 아마 이 본문에 등장하는 세 여인 중에서 지금 우리의 모습과
가장 닮은 사람이 오르바가 아닐까요? 선한일에 대한 소망은 가지고 있지
만 선뜻 그것을 하지 못하면서, 빠져나갈 구멍만 있다면 빠져나가려고
하는 인간적인 나약함을 가진, 그것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승호는 속으로 그렇게 부르짖었다. 그랬다. 그것은 바로 자신
의 모습이 아닌가! 바로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삶의 모습이 아닌가! 승
호는 두 눈을 감았다. 불현 듯 지난 날의 아픈 기억이 되살아 났다.

<제22회로 계속 이어집니다.>


제22회 - 승호는 수진을 슬쩍....


벌써 3년이 흘렀구나....승호는 또 다시 등을 타고 내리는 회한을 느꼈
다. 갑석아....승호는 눈 주위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는 약간 고개를
들었다. 금방이라도 그 뜨거움이 방울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승호는 그날의 맑디 맑은 날씨와 고향의 거리, 갑석과 만난 포장마차의
투명한 유리 상자에 담긴 안주거리들, 그리고....그리고....갑석의 그
눈동자가 마치 어제의 일처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승호야, 너는 술만 잘 마시면 진짜 멋진 놈인데 말이야....>
늘상 승호를 보면 습관적으로 이렇게 내뱉는 갑석의 목소리도 여전히 그
의 뇌리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그날은 승호가 군대에서 병장이 된 후 말년 휴가를 나온 날이었다. 일단
고향에 가서 부모님께 인사부터 드려야겠다 싶어서 간 것이었다. 그때
마침 갑석이도 고향에 내려와 있었다. 그게 몇 년 만이었더라....갑석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고향을 떠났었던 것이다. 듣기에는 그래도 제법
성공해서 조그만 가게를 한다고 들었었는데....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형
제도 없이 어머니와 단 둘이 살았던 갑석은 군입대가 면제되었었기 때문
에 승호보다 훨씬 빨리 사회에 뛰어들 수가 있었고, 사실 또 그 당시의
형편에서는 그럴 수 밖에 없기도 했었다.
갑석은 학창시절부터 늘 승호에게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했었다.
<승호야, 난 돈을 많이 벌거야. 아주 많이 말이야. 너는 목사가 될 거
지? 내가 돈을 많이 벌어서 승호 네가 목사가 되면 교회도 지어줄게. 헌
금도 많이 하고 말이야.>
그러면 승호는 그저 슬쩍 웃으며 이렇게 대꾸했었다.
<너는 교회만 다니면 다 목사님이 되는 줄 아니? 그건 그렇고 어쨌든 나
도 네가 돈을 많이 벌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할게. 그래야 네가 교회에
나갈 것 같으니까.>
그리고는 둘다 크게 한바탕 웃어대곤 했었다.
하지만 승호가 휴가 때 만난 갑석의 모습은 그가 꿈꾸던 모습과는 거리
가 멀었다. 그리고 어떤 일을 겪었는지 모를 일이었지만, 갑석의 눈동자
는 이십대 중반의 젊은이의 눈동자가 아니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삶의
무게에 짖눌리다 못해 이제는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만 중년의 그것이었
다.
승호는 그런 갑석의 모습을 집에서 처음 본 순간부터 마음 속으로 다짐
을 했다. 오늘은 기필코 교회에 한번 나가보지 않겠느냐고 말해보겠노라
고. 하지만 갑석과 함께 집을 나설 때 까지도, 갑석을 따라 들어간 포장
마차에서 몇 시간을 보내는 동안에도, 그리고 마침내 술에 잔뜩 취해버
린 갑석을 부축해 그의 집에 들여보낼 때까지도 승호는 끝내 그 이야기
를 하지 못하고 말았다. 언제 얘기를 꺼낼까 두근거리며 기회를 찾다가
결국 승호는 말하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정말이지 가까운 사람에게 전
도하는 것이 몇 곱절 더 어렵다는 말이 실감이 났었다. 승호는 그렇게 갑
석을 바래다 주고 터덜터덜 집으로 오면서 끝내 교회의 '교' 자도 꺼내지
못한 자신을 책망했다. 하지만 오늘만 날은 아니니까....다음에 만나면
꼭....
하지만....그 다음은 없었다. 승호는 부모님과 하루를 더 보내고 학교도
가보고 친구들도 만나기 위해 그 다음 날 아침 일찍 상경했다. 미리 전
화를 해놓은터라 점심때에 도착한 학교에는 동기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
었다. 승호는 교수님께 인사도 드리고 선배들과 후배들, 그리고 동기들
과 즐거운 만남으로 그 날 하루를 채워나갔다. 전화벨은 승호가 친구들
과 저녁을 먹고 막 일어서려고 할 때 울렸다. 웃는 얼굴로 핸드폰을 귀
에 댄 승호의 얼굴은 금방 새파래졌고 곧바로 친구들과 헤어져서 고향으
로 내려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승호의 아버지가 건 그 전화의 내용은
갑석이 약을 먹고 자살했다는 것이었다.
승호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이를 악물었다. 나는 눈물을 흘릴 자격
도 없는 놈이다. 승호는 고개를 흔들며 다시 눈을 크게 뜨고는 강대상에
서 열심히 말씀하고 계시는 전도사님을 바라보았다. 전도사님은 이제 룻
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셨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서로를 위하는 이 모습이 말입니다. 나이
많은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고생시키지 않기 위해서 떠나가라고 하고 며느
리는 나이 든 시어머니를 차마 혼자 보내지 못해서 같이 따라가려고 하
고 있습니다. 뒷 장을 보면 고향으로 돌아간 나오미와 그 나오미를 따라
간 며느리 룻이 어떻게 생활하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생활하고
있지요? 성경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을 가장 불쌍한 사람으로 간주하고
그들을 도우라고 말합니다. 그게 누굽니까? 그건 바로 고아와 과부입니
다. 여기 보니 나오미와 룻은 바로 고아와 과부들, 그리고 나그네들을
위해 남겨놓은 밭의 이삭을 주워모아 입에 풀칠하고 있습니다. 이건 완전
히 거지신세인 것입니다. 이런 생활이 될 것을 미리 불 보듯 뻔히 알았기
때문에 나오미는 룻에게 자신을 떠나라고 한 것이었고, 역시 그것을 잘
알고 있는 룻이었기에 차마 늙은 시어머니를 혼자 보내지 못했던 것입니
다.>
그렇구나....승호는 룻기 2장을 눈으로 읽어보았다. 2절에 보니 룻이 밭
에 가서 이삭을 줍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전도사님의 말씀이 계속 이
어졌다.
<여러분, 착하다는 말을 알지요? 그러면 도대체 어떤 사람들을 착하다고
하나요? 뭐라고? 인철이 네가 착하다고?>
전도사님의 질문에 저요, 라고 대답한 3학년의 인철이 때문에 다시 한바
탕 웃음이 대학부실을 지나갔다. 전도사님이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글쎄....그건 금시초문인데....>
또 다시 폭소....전도사님은 계속 말씀을 이으셨다.
<우리 주위에는 이렇게 늘 써오고 그 의미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생각
하면서도 막상 설명하려고 하면 잘 안 되는 말들이 있지요. 착하다는 말
도 아마 그런 말 중의 하나인 것 같아요. '착하다는 게 뭐지?'라고 누가
물으면 '그냥 착한 게 착한 거지, 그런 걸 질문이라고 하냐?'고 면박이라
도 주고 싶어지지요. 그런데 나는 이 본문을 보면서 착하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로구나 하고 깨달았어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이 룻과 같이 차
마, 차마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것이에요. 그렇지
않나요? 마음이 모질지 못한 사람들, 그래서 사서 고생하는 사람들, 그
런 사람들이 착한 사람들이 아닐까요? 하나님은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지요. 창세기에 보면 룻처럼 차마 돌아서지 못해서 수고를 하다
가 큰 복을 받은 여자가 나오지요. 바로 이삭의 아내가 된 리브가입니다.
리브가가 어떻게 했나요. 저녁에 우물가에 물 뜨러 갔다가 피곤에 지친
늙은 종의 부탁을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물을 길어주었고, 그 늙은 종을
따라온 낙타들의 모습을 차마 그대로 지나칠 수 없어서 그 짐승들에게까
지 물을 길어다 먹였지요.>
차마 거절하지 못하는 착한 사람....룻....리브가....그리고 수진....승
호는 저 쪽 옆에 앉아있는 수진을 슬쩍 바라보았다. 허리를 똑바로 편 자
세로 수진은 전도사님을 열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제23회로 계속 이어집니다.>



제23회 - 승호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승호가 수진에게 마음을 주기 시작한 것은 작년 여름에 주보사 단합회
겸 수련회로 지리산 등반을 함께 하고나서부터였다. 물론 그 전부터 수
진이 괜찮은 자매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승호의 마음이
결정적으로 굳어진 것은 그 때부터였다. 그 당시 수진은 주보사 부편집
장이었다. 편집장은 이제 대학부를 졸업하고 청년부로 올라간 미주자매
였었고, 승호 자신은 주보사 편집고문으로 있었다. 승호와 미주, 수진외
에도 주보사 기자 세 명과 수습기자 네 명, 그리고 컴퓨터부 디자인 담
당 두 명이 함께 어울려 갔었다.
2박 3일 동안 정말이지 고생을 바가지로 했었는데, 그 힘든 와중에서도
항상 뒤에서 말없이 굳은 일을 도맡은 사람이 수진이었다. 리브가가 늙
은 종과 낙타들에게 물을 길어날랐듯이....대학부실에서 늘상 마주쳐도
항상 조용하게, 있는 둥 없는 둥 있어서 잘 몰랐었는데 2박 3일간 함께
지내면서 수진의 진면목을 알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것은 승호 자신이
또한 그렇게 궂은 일을 도맡아하는 사람이었기에 알 수 있었던 일이기도
했다. 그 이후에 다시 대학부실에서 주보사 모임과 예비조장훈련등을 함
께 하면서 계속 보게 되는 수진의 모습은 등반 때 보여줬던 그 모습과 한
치도 다르지 않았다. 수진의 모습은 역시 그가 등반 때 보고 느꼈던 그대
로였던 것이다.
아니야, 뭔가 등반 이후에 달라진게 있긴 있어....승호는 약간 미간을 찌
푸리며 생각했다. 왠지 수진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좀 쌀쌀맞아진 것이
었다. 왜 그럴까? 승호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
었다. 비록 승호의 수진에 대한 마음이 그때 좀 더 깊은 감정으로 바뀌
긴 했지만 전혀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었다. 그것은 지금까지도 마찬가
지였다. 그런데 왠지 수진은 승호와의 사이에 자꾸 벽을 쌓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 승호는 요즘 마음이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웃사랑에 대한 예화에도 착한 사람이 등장하지요.
바로 선한, 그러니까 착한 사마리아인입니다. 그 사람은 어떻게 했습니
까? 길에 쓰러져서 죽어가는, 아니 이미 죽은지도 모르는 사람을 차마
그냥 지나치지 못했지 않습니까? 또한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를 생각해
봅시다. 갈라디아서 5장 22, 23절에 다 외우고 있지요? 자, 그 성경구절
을 한번 같이 외워볼까요, 시~작!!!>
전도사님의 신호에 맞추어 일제히 함께 외우기 시작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전도사님의 목소리가 조금씩 높아졌다.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예수 믿어서 성령받은 사람들
은 착해야 한다는 말씀 아닙니까?....>
전도사님의 얼굴에 열정이 일어나고 있었다. 말씀에 몰두하실 때의 전도
사님의 눈빛은 마치 불꽃이 일렁이는 것 같았다. 수진은 자기도 모르게
두 손이 꼭 쥐어지는 것을 느꼈다.

지난 밤을 뒤척인 탓에 아침에 늦게 일어난 선후는 어머니가 차려주시는
늦은 아침을 먹고 다시 방에 돌아와 침대에 팔배게를 하고 드러누워 멍
하니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냥 아무 것도 하기 싫었다. 윤정이
아침부터 전화를 해서 선후의 잠을 깨우더니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며 같
이 놀러가자고 했지만 선후는 거절하고 말았다. 또 내일 학교에 가서 달
래주려면 고생 좀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선후는 나돌아다니고 싶은
생각이 도무지 생기지 않는 것이었다.
한참을 멍하게 천장을 바라보던 선후는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대답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예.>
문을 열고 들어선 것은 어머니였다.
<왜 그러세요, 어머니.>
<응, 그냥 지금 빨래하려고 하는데 빨 것이 있는지 물어보려고....근데
오늘 우리 아들이 왜 이렇게 기운이 없어 보이지? 왜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니?>
<아니에요. 그냥 어제 좀 피곤했었나 봐요.>
선후는 침대에서 일어서서 의자 위에 걸쳐놓은 옷을 향해 가며 말을 이었
다.
<이 옷도 좀 빨아주세요. 아버지는 운동가셨나요?>
<응, 친구분들과 함께 골프치러 가셨어. 너는 오늘 어디 안 나가니?>
<예....일단 지금은 돌아다니고 싶은 마음이 없네요. 선아는요?>
<선아는 요새 뭐가 그리도 바쁜지 도통 집에 붙어있지를 않는구나. 연애
한다고 바쁘다면야 얼마든지 밀어주겠다만 도무지 선머슴처럼 저렇게 돌
아다니기나 하니....쯧쯧....>
어머니는 잠시 혀를 차더니 선후에게 물어보셨다.
<참, 넌 요즘 어떻게 되 가니?>
<예?....뭐가요?>
<아, 그....윤정이라는 애하고 말이다. 어제도 그 애랑 있었니?>
<예, 그리고 철수하고 정민이도 같이 있었어요.>
<그랬니? 근데 윤정이 그렇게 만나는 걸 좋아하니? 내가 만약에 윤정이
입장이라면 별로 기분 안좋을 것 같은데?>
선후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런가요?>
<그럼, 얘는....너는 여자의 마음을 너무 몰라. 하긴 너희 아버지가 그랬
었긴 하다마는....어쩜 너는 그런 안 좋은 것 까지 아버지를 닮았니?>
어머니는 웃음이 가득한 눈으로 선후를 보면서 말을 이으셨다.
<하긴 연애할 땐 그런 것도 멋있어 보였었지.>
<하하하....>
<그래도 선후야, 너는 너무 그러지 마라. 여자 마음을 잘 다독거려줄 수
있는 남자가 진짜 남자다운 남자인 거야.>
<예, 알았어요.>
<그래, 그건 그렇고 빨래할 것 있으면 다오.>
<아, 잠깐만요.>
선후는 손에 들고 있던 웃옷을 어머니에게 주고 다시 바지를 집어들고 주
머니에 든 것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제24회로 계속 이어집니다.>



제24회 - 나도 저렇게 현명한 아내가....


앞 주머니에서 조그만 종이조각들과 동전이 꺼내졌고 뒷주머니에서 지갑
이, 그리고....이건 뭐지? 선후는 지갑과 함께 손에 잡힌 조그만 소책자
를 잠시 멍하니 들여다보았다. 그때 선후의 등 뒤에 서 있던 어머니의 재
촉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후야, 왜 그러고 있니? 빨리 다오.>
선후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얼른 그 소책자를 책상 위에 올
리고 지갑으로 그 위를 덮어놓았다. 그리고 돌아서서 어머니에게 바지를
건네주었다. 어머니는 그 바지를 받아들고 다시 1층으로 내려가셨다. 선
후는 어머니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확인하고는 지갑 밑에 깔려있는
소책자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가 이윽고 그 책을 펼쳐보았
다.
거기에는 네 사람의 유명인이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는가 하는 짧은 고
백이 있었고 뒷 부분에 그 소책자를 펴낸 교회의 소개가 있었다. 예배 시
간표, 약도, 전화번호, 인터넷 주소 등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이곳 저
곳을 훑던 선후의 눈은 자연스럽게 한 곳에서 멈췄는데, 거기엔 대학부
모임 시간이 기록되어 있었다.

<물론 선한 행위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구원받은 사람들
은 선해져야 합니다. 성경구절 하나 더 찾아봅시다 마태복음 5장 16절입
니다. 한번 같이 읽어볼까요?....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또 한 군데 찾아봅시다. 마태복음 25장 31절부터 46절
까지입니다.>
수진은 부지런히 성경을 뒤적여 전도사님이 말하신 본문을 찾았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
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
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
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
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
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
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
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
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또 왼편에 있는 자
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
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
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저희도 대답하여 가
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
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
양치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
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
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
라 하시니라.>
조금 긴 듯한 본문을 한 목소리로 읽은 후 대학부실은 다시 조용해지며
전도사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잠시 강대상 위에다 시선을 두고 계시
던 전도사님이 천천히 고개를 들며 입을 여셨다.
<그렇습니다. 우리 예수쟁이들은 착해져야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우리
는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착한 행실은 어떤 거창한 구제사
업을 하는 것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착한 사람들은 차마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못 본체 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얘기를 잘
들어주지요. 거꾸로 말하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말을 끝
까지 들어주지 못하고 중간에 토막토막 끊으면서 자기 얘기만 하는 사람
들은 아마도 거의 틀림없이 착하지 않은 사람일 것입니다.>
잠시 말씀을 중단하신 전도사님은 한번 대학부실을 둘러본다음 씨익 웃
으시며 말씀을 이으셨다.
<결혼한 부부의 사이가 원만하지 못할 때 대개 그 원인이 뭔지를 압니
까?....아직 결혼을 해 본 사람이 없어서 잘 모르는 모양이로군. 대화
부족 때문에 그렇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이 많군요. 이런 얘길
많이 들어본 모양이지요?>
다시 한번 씨익 웃으시고 전도사님은 계속 말씀을 이으셨다.
<왜 대화부족이 될까요? 그 이유는 점점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려고 하
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자기가 관심있어하는 부분에 대해서
말을 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남자와 여자로 서로 다른 삶을 20년이 넘게
살아온 부부는 공통된 관심사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남편이 신문이나
뉴스를 보고 아내에게 그것에 대한 의견을 얘기하면 아내는 하품을 하
고, 아내가 이웃집 이야기나 교회의 어느 집 아들 이야기를 하면 남편은
쓸데없는 이야기를 옮긴다고 책망합니다. 이래가지고서야 어떻게 대화
가 되겠습니까? 기껏해야 아이 교육이야기나 집안 이야기 외에는 할 말
이 없어지는 것이 당연하지요. 다른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누
군가가 여러분에게 와서 입에 거품을 물며 열심히 자신의 관심사에 대
해 이야기한다면 열심히 들어주세요. 비록 여러분은 아무 관심도 없
는 분야에 대한 이야기일찌라도 그냥 한번 들어주세요. 차마 그 사람의
말을 못 끊어서 계속 듣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이렇게 생각해도 됩
니다. '내가 조금은 착해졌나보다' 하고....내가 아내에게 가장 고마워
하는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성경을 읽다가 문득
지금까지 깨닫지 못했던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항상 아내에게 달려가서
흥분해서 그것을 말하지요. 그것은 거의 설교입니다. 아마도 아내 입장
에서는 집에서까지 계속 설교를 듣는 것이 지겹기도 할 터인데도 지금까
지 한번도 싫은 내색 한번 하지 않고 끝까지 들어준답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속으로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생각하지요. '내가 아내 하나는 너무
잘 얻은 것 같다.' 하고 말입니다.>
수진은 대학부실 맨 뒷자리에서 싱긋이 웃고 계시는 사모님을 슬쩍 보았
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래....사모님이라면 능히 그러고도 남으실 분이
시지....나도 저렇게 현명한 아내가 될 수 있을까?....

지하철을 타고 가는 선후의 머리 속에 다시 지난 밤의 일이 생생하게 떠
올랐다. 혼자 열변을 토하던 자신과 그것을 열심히 들어주던 그녀....

<제25회로 계속 이어집니다.>



제25회 - 숨까지 막히게 하는 두근거림....


내릴 역에 다 왔는데도 자신의 말을 끊지 못하고 혼자 안절부절하던 그
녀....그리고 당연히 내려야 할 역이라서 내리면서도 그토록 미안해하던
그녀....차분하면서도 진지한 눈빛을 가진 그녀....그리고 그 속에 담긴
따뜻함....
선후는 손에 든 소책자 뒤에 그려져 있는 약도를 다시 한번 보았다. 약
도에는 지하철 출구를 뜻하는 조그만 그림과 버스 정류장 위치와 교회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었다. 지금은 이 조그만 약도가 그녀와 선후를 연결
하는 유일한 끈이었다. 그리고 그 끈은 지금 강력하게 선후를 끌어당기
고 있었다.
도무지 거역할 수 없는 강력한 힘....수십, 아니 수백 번도 더 망설이던
선후를 지금 이렇게 끌어당기고 있는 힘은 도대체 무엇일까? 선후는 그
것을 알 수 없었다. 단지 지금 생각과는 반대로 움직이는 자신이 낯설 뿐
이었다. 그리고 점점 초조해지고 조급해지면서 설레이는 가슴이 너무나
이상할 뿐이었다. 진정시키려고 하면 할수록 더 쿵쿵거리는 가슴....심지
어 목에 까지 차올라 간간이 숨까지 막히게 하는 두근거림....선후는 자
신도 모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면서 얼굴이 상기되는 것을 느꼈다.
왠지 그런 자신이 부끄럽게 여겨졌기 때문에 혹시나 누군가가 자신의 속
마음을 알아차리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지하철을 탄 사람
들은 언제나처럼 모두들 자신만의 습관과 상념안에 빠져 있었다.
선후는 이미 수십 번도 더 본 조그만 약도를 다시 한번 보고는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때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그
와 동시에 선후의 가슴이 요동쳤다. 전동차가 멈추고 자동문이 열리자
선후는 발을 떼었다. 그러자 놀랍도록 갑자기, 요동치던 그의 가슴이 편
안해졌다. 선후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의 머
리 속에 새겨져 있는 약도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진은 교회의 지하 식당에서 문영과 함께 점심을 먹고 있었다. 10시 30
분에 시작되는 대학부 예배와 조별 모임이 마치면 12시 4~50분이 되는데
그러면 곧바로 점심 시간이 되었다. 점심을 먹고 다시 대학부실로 가서
조장단과 임원단이 모여 회의와 기도를 하고 3시에 시작되는 담임 목사님
설교의 대학, 청년부 연합 3부 찬양예배를 드리고 난 후 곧바로 있는 조
장 훈련을 하는 것이 수진의 주일날 스케줄이었다.
지난 밤 늦게까지 모임을 가진데다 뜻하지 않은 사람과의 만남으로 인한
혼란감으로 잠을 설친 터라 수진은 피곤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문영이 말했다.
<수진아, 저기 간사님이 오신다.>
하지만 수진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문영이 계속 말을 이었다.
<참 대단한 사람이야. 넌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
수진이 계속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비로소 문영은 수진의 안색을 살
폈다.
<왜, 그래? 너 어디 아파? 그러고 보니까 얼굴이 너무 안좋다. 눈도 좀
부은 것 같고....>
<아니야.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 오늘은 그냥 우리 둘이 조용히 먹자.
지금은 말하는 것도 좀 힘들거든....>
<그래, 알았어.>
문영은 흘끗 간사님을 쳐다보았다. 그때 두리번 거리던 간사님이 문영을
쳐다 보았다. 하지만 눈길이 마주쳤다고 생각되는 순간 얼른 문영은 시
선을 피하고 숟가락을 입으로 가져갔다.

승호는 두리번 거리며 수진을 찾았다. 그러다 수진의 등을 발견한 순간
문영의 시선과 마주치고 말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평소같으면 승호에
게 손을 흔들며 호들갑을 떨었을 문영이 그의 시선을 피하는 것이었다.
수진을 발견한 기쁨은 문영의 이상한 행동과 왜 그런지 차가워 보이는
수진의 등을 보면서 싸늘하게 식어갔다. 승호는 갑자기 목표를 잃어버린
탓에 잠시 멍하게 서서 두리번 거리다가 가까운 곳의 빈 자리로 뚜벅뚜
벅 걸어갔다.

<너 간사님과 무슨 일 있었니?>
문영의 갑작스런 질문에 수진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문영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문영이 당황하며 말을 이었다.
<아니, 그냥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어서....나도 참 주책이다, 그치? 호
호호호.>
<....>
수진은 다시 천천히 고개를 숙여 밥을 떠 먹었다. 머쓱해진 문영도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열심히 숟가락질만 했다.
천천히 규칙적으로 밥과 국과 반찬 사이로 수저를 옮기는 손의 무의식적
인 행동과는 달리 수진의 생각은 멀리 지리산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
지리산은 작년에 그녀가 부편집장일 때 주보사 단합회로 갔던 곳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수진은 한 해 후배인 기자 윤주와 진지한 대화를 나누
었었다.

<언니....나 어쩌면 좋아?....>
윤주는 커다란 눈에 금방이라도 뚝뚝 떨어질 것만 같은 눈물방울들을 가
득 머금고는 수진에게 말했다. 수진은 재촉하지 않고 윤주의 다음 말을
조용히 기다렸다.
<나, 승호 간사님이 너무 좋은데....근데....근데....>
기어이 윤주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수진은 그런 윤주의 어깨를 살며
시 안아주었다. 잠시 그렇게 앉아있던 수진은 천천히 입을 떼었다.
<윤주야....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은 참으로 소중하고 좋은 것이야....
그러니까 그 감정을 잘 간직해....음....물론 그 감정은 마음을 아프게
도 할 거야....하지만 그래도 가슴 가득히 간직할 만한 것인 것 같아....
그 다음 일은 시간에게, 그리고 하나님께 맡길 수 밖에 없는 것 같아....>
<하지만 언니, 너무 힘들어....흑....흑....간사님은 나같은 거 한테는
조금도 관심이 없는걸....흑....흑....>
수진은 윤주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제26회로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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