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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롯의 가정, 최선에서 최악으로 (창 19: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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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의 가정, 최선에서 최악으로 (창 19:12-22)
 

물리학 용어 가운데 엔트로피 법칙(the entropy law)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에너지와 사물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질서에서 무질서로, 쓸모있는 것에서 쓸모 없는 것으로 변하여 간다는 법칙입니다.
열은 높은 온도에 낮은 온도로 흐르고, 모든 물질은 사용할 수 있는 형태에서 사용할 수 없는 형태로, 질서가 있는 상태에서 질서가 없는 상태로 변해가며 되돌이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엔트로피 법칙입니다.
이 법칙은 가정에도 해당된다며 물리학의 법칙을 가정으로 끌고 온 것이 가정학자들입니다.

결혼을 합니다.
사랑이 뜨겁습니다. 그러나 점점 식어갑니다. 자동차를 삽니다. 점점 고장이 나기 시작합니다. 질서있게 잘 돌아가던 기계들이 무질서하게 됩니다.

롯은 아브라함의 조카입니다. 아브라함이 갈데아 우르를 떠날 때에 아브라함을 따라 갔습니다. 그리고 많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최선의 가정이 이었습니다. 더 이상 부러울 것이 없는 가정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최악이 된 가정입니다.
콩가루 가정이 되었습니다.
그 과정과 그 결과 그리고 그 원인을 살펴 보고 귀감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최선의 가정
아브라함을 졸졸 따라 다니던 롯은 아브라함과 같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기는 놈 위에 걷는 놈이 있고, 걷는 놈 위에 뛰는 놈이 있습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놈보다 더 한 놈이 있답니다. 나는 놈위에 붙어 있는 놈이랍니다.
롯은 아브라함에게 붙어 있는 조카였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같은 두 가지 축복을 받았습니다.

첫 축복

아브라함 때문에 영적인 축복을 받았습니다. 롯이 아브라함과 헤어진 후에 소돔과 고모라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소돔과 고모라가 너무나 음란한 땅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더러워지면 땅이 더러워집니다.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 땅을 유황불로 멸망시키셨습니다.
모두가 다 죽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으시고 롯의 가정을 구원시켜 주셨습니다.
오직 한 가정만 살아 남았습니다. 
갈데아 우르에서 아브라함 가정 한 가정만 이끌어 내신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에서 롯의 가정 한 가정만 이끌어 내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기도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셨더라>(창19;29)

두 번째 축복

하나님은 롯에게 아브라함과 동일한 물질적인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말했습니다.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고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리라.”
롯의 가정은 최선의 축복을 받은 가정이었습니다.

롯의 최악

그러나 롯은 최악의 가정이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콩가루 가정이 되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최악의 가정이 되었다는 것일가요?
롯의 두 사위는 소돔과 고모라를 떠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기고 나오지 않았습니다. 유황불속에 타죽었습니다. 롯의 아내는 소금 기둥이 되어 죽었습니다. 남자들이 없는 소알로 롯과 두 딸이 도망쳐 나왔습니다. 살 곳이 없어 동굴에서 살았습니다. 언니가 동생에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배필될 사람이 이 땅에 없으니 우리가 우리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동침하여 우리 아버지로 말미암아 후손을 이어가자”(창 19;32)
둘이 같이 아버지에게 술을 퍼마시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언니가 아버지의 씨를 받았습니다. 그 자손이 모압 민족을 만들었습니다.
다음 날은 동생이 그렇게 아버지의 씨를 받았습니다. 그 후손이 암몬 족속이 되었습니다.
최선의 가정이 최악의 가정이 되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역대하 26장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웃시야 가정이 그렇습니다.
역대하 26장에 웃시야 왕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16살에 왕이 되어 52년 동안 다스렸습니다. 웃시야 왕은 52년 동안 영적인 사람 스가랴를 좋아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그 동안 웃시야를 형통하게 하셨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가 사는 날에 하나님을 찾았고 그가 여호와를 찾는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셨더라>(대하 26;5)

그러나 점점 교만하여졌습니다. 그래서 제사장만 들어가는 성소에 들어갔습니다.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분향하는 일을 자기가 하였습니다. 제사장 아사랴가 왕에게 대들 수 있는 용기있는 제사장 80명을 데리고 들어가서 왕에게 정면 대항하였습니다.
나가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웃시야 왕이 화가 나서 같이 소리를 지르면 화를 냈습니다. 그 순간 이마에 나병이 생겼습니다. 웃시야는 최선에서 최악으로 떨어졌습니다.
결국은 별궁에 갇혀 죽기까지 살았습니다. 죽은 후에도 왕묘실에 묻히지 못 하고 문둥병자 묘지에 묻혔습니다. 시작은 좋았지만 끝이 좋지 않았습니다.
롯 가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최선의 가정이 최악의 가정이 되었습니다.

롯의 가정이 최선의 가정에서 최악의 가정으로 전락된 원인은 무엇이었을 가요?

두 종류의 가정이 있습니다.
룻의 가정처럼 최악에서 최선으로 바뀐 가정이 있고, 최선에서 최악으로 바뀐 가정이 있습니다. 좋아 지는 가정은 그 가정에 축복의 통로 한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가정에 한 명만 축복의 씨앗이 있어도 하나님은 그 한 사람 때문에 축복하십니다.
노아가 그렇습니다.
욥이 그렇고, 룻이 그렇고, 라합이 그랬습니다.
그러나 반대 가정이 있습니다. 최선이 최악으로 바뀐 가정이 있습니다. 그런 가정은 축복의 통로, 축복의 씨앗 한 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롯의 가정은 이런 영적인 사람 한 명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3가지 없었습니다.

1. 일치가 없었습니다.

롯의 가정은 6식구였습니다. 롯 부부, 두 딸, 두 딸이 결혼하였기에 두 사위가 있었습니다. 남자 3명, 여자 3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하나가 되지 못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유황불로 소돔과 고모라 땅을 멸할 것이니 나가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생명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두 사위는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농담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 중요하고 심각한 예언을 농담으로 여길 정도로 믿음이 없었습니다.

롯의 아내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 곳을 빠져 나왔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뒤를 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롯의 아내는 뒤를 보았습니다. 궁금하여서 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자기 재산이 아까워서 뒤를 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 순간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믿음이 있는 것같았으나 없었습니다.
순종하는 것같았으나 불순종하였습니다.
앞으로 가는 것같았으나 뒤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같았으나 세상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미 말씀드린 대로 롯의 두 딸이 가관이었습니다. 아버지를 술로 취하게 한 후에 같이 잤습니다. 그것도 두 딸이 교대로 아버지와 잠자리를 같이 하였습니다. 아버지는 그것을 모르고 계속 술을 마셨고 두 딸과 함께 잤습니다.
6식구가 다 믿음의 분량이 달랐습니다.
하나가 되지 못 한 가정이었습니다. 신앙의 일치가 되지 못 한 가정이었습니다. 결국 그 가정은 파멸되고 말았습니다.
영적인 사람 한 명만 있어서 그 사람이 식구식구들을 설득하여 나가고 인도하여 나가지 못 하였습니다.

나는 몇 주전에 속초에 부흥회 인도를 하였습니다.
집회를 인도하면서 옆 교회를 들렀습니다. 나와 함께 일하는 동역자 목사님이 시무하는 교회였기에 들렀습니다. 농촌 교회의 열악함을 실감하였습니다. 노인들만 몇 명 모이는 교회입니다. 13년 동안 단 한번도 월급을 받아 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목사님과 사모님이 하나가 되어 십자가를 만들어 팔아 생활하면서 노인들과 청소년들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단 한번도 남에게 손을 내밀어 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대단한 목사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중3 남자 아이를 데리고 살고 있었습니다. 나에게 살짝 이야기를 하여 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와 둘이 사는 데 어머니를 그렇게 강간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하소연하여 목사님이 데려다가 같이 사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롯의 가정이 그랬습니다. 두 딸이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같이 교대로 잠자리를 같이 하는 가정이 되었습니다.

영적인 지주 한 명이 없어서 그렀습니다. 그래서 가정이 하나되지 못 한 결과입니다.
가정은 목적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신앙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도 한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예배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롯의 가정은 일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최선의 가정이 최악의 가정이 되었습니다.

2. 양보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과 함께 한 롯은 아브라함과 같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목축을 하는 데 너무나 가축이 많아져서 풀과 물이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종들과 롯의 종들이 물과 풀을 가지고 싸우기 시작하였습니다.
가난할 때는 같이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자가 되고 나니까 같이 살 수가 없었습니다. 돈없을 때보다 돈이 많을 때가 문제입니다. 실패하였을 때보다 성공하였을 때가 더 위험합니다.
아브라함이 롯에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 하냐? 나를 떠나 가라.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리라”(창 13;8-9)

양보하는 마음은 넓은 마음입니다. 양보하는 마음은 큰 마음입니다. 모두를 포용하는 마음입니다. 양보하는 마음은 하나님께 모두를 맡기는 마음입니다. 양보하는 마음은 남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양보가 없는 곳에는 분쟁이 있을 뿐입니다. 아브라함은 양보하였습니다. 그러나 롯은 양보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 정도로 양보하였을 때 롯도 양보하여야 했습니다. 이렇게 말했어야 아랫 사람의 도리입니다.

“삼촌!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나는 삼촌을 따라다니며 평생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삼촌 때문에 이렇게 축복을 받았습니다.
내 목자들을 혼내겠습니다. 다시는 싸우지 못 하게 하겠습니다.”
이렇게 못 할 바에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삼촌!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삼촌도 가축이 많아졌고 나도 가축이 많아져 물과 풀이 모자라니 어쩔 수 없이 조금 떨어져 사는 것이 좋을 것같습니다. 저들이 싸우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삼촌이 어른이시니 먼저 선택하세요. 나머지 땅을 제가 가지겠습니다.”

그러나 롯은 자기가 먼저 좋은 땅을 선택하였습니다. 그 땅이 바로 소돔과 고모라 땅이었습니다. 음란한 땅이었습니다.
양보를 설득할 사람이 한 명만 있었어도 사정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양보를 설특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어머니가 그런 능력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니면 딸이 부모를 설득할 수도 있습니다. 누구도 좋습니다. 그런데 한 명이 없었습니다.
양보가 없었던 롯의 가정은 최선의 가정에서 최악의 가정으로 전락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파멸될 가정도 양보가 있고 사랑이 있으면 회복될 수 있습니다. 

오래 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어느 날 남편이 아내의 손을 잡고 말했습니다.
“여보! 이렇게 수고해서 고마워. 감사해. 등산하면서 바람이나 쏘이러 나가자.” 남편은 다른 날과 달리 친절하게 말했습니다. 여자는 사랑에 약합니다. 아내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5월 푸르름속에서 인왕산 등산에 나섰습니다. 인왕산 절벽까지 올라서 산 아래를 기분좋게 내려다 보고 있을 때 남편은 아내를 절벽밑으로 밀었습니다.

남편은 빨리 밑으로 내려와서 보니 아내가 거칠게 숨을 쉬고 있었습니다. 죽기 직전이었습니다. 남편은 그 옆에 있는 나뭇단을 아내 위에 얹었습니다. 그리고 불을 질렀습니다. 그리고 도망쳤습니다.
마침 청년들이 등산하다가 산불이 난 줄로 알고 급히 달려들어가서 불을 끄고 보니 여자가 깔려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병원으로 급송하였습니다. 아내의 진술을 토대로 남편 조사에 들어갔습니다.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 남자는 같은 직장에 있는 여인과 내연의 관계가 되어 있었습니다. 아내가 방해물이었습니다. 인왕산 절벽으로 유인하여 죽이려고 한 것이 밝혀졌습니다.
사형언도를 받았습니다.
수감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내는 병원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습니다. 얼굴은 화상으로 말이 아니었습니다. 몸은 불구 가깝게 되었습니다. 온몸이 정상이 아니었습니다. 병원에서 퇴원한 아내는 감옥에 있는 남편을 찾아 갔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여보! 내가 당신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 하여 이런 일이 생겨서 미안해요.”
아내는 백방으로 다니면서 남편 구명운동을 벌렸습니다. 아내가 용서하였기에 그 남자는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습니다. 18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출감하였습니다.

출감한 남편을 아내는 따뜻하게 맞았습니다. 그리고 같이 사랑하며 살았습니다. 3년 지났습니다. 아내가 병에 들어 먼저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아내는 이렇게 유언하였습니다.
“당신은 나 때문에 불행한 삶을 살았지요. 내가 죽으면 당신 사랑하던 그 여자와 행복하게 살아요.”
1968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였던 사건입니다.
아름다운 양보가 있는 가정은 행복한 가정이 됩니다. 그러나 자기 주장만 하면서 양보가 없는 가정은 항상 아픔이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게 됩니다.
롯의 가정은 양보가 없어서 최선이 최악이 되었습니다.

나는 부산 모 기도원 집회를 하면서 어느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내게 말했습니다.
“강목사님! 우리 담임 목사님이 돌아가신 것은 나 때문입니다.”
“무슨 말씀인가요?”
몇 달 전 철야 기도하고 버스를 탔습니다. 목사님이 올라 타시기에 나는 얼른 자리를 내드렸습니다. 그 날 밤 차가 굴렀습니다. 나는 살아났는 데 목사님이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펑펑 울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전도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교회에 열심히 충성봉사하는 부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렇게 좋아 보이는 여자인데 그 남편과 자녀들은 교회에 오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목사님이 그 가정을 방문하였습니다. 남편과 둘이서 은밀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긴 시간 마음놓고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교회에 나오도록 권면하였습니다. 남편이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의 아내가 교회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제 아내 
는 불같은 고약한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집에서 한번만 화를 냈다 하면 아이들 
과 저는 숨어 버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정도입니다. 저는 이러한 것이 올바른 
교회의 신앙생활이라고 생각지를 않습니다.”

목사님은 부인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들은 이야기를 사실대로 말해주었습니다. 아내는 목사님의 충고를 듣고 말했습니다.
“잘못 하였습니다. 앞으로 잘 하겠습니다.”
부인은 목사님과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한 후에 헤어졌습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습니다.
남편이 낚시대를 가지고 집안으로 들어 오다가 실수하였습니다. 새로 사다 놓은 산드리아 등이 있었습니다. 비싼 등이었습니다. 천정에 달려고 하던 중이었습니다. 남편은 낚시대로 그 전등을 건드렸습니다. 산산조각났습니다. 남편은 당황하였습니다. 아내가 불호령을 내릴 것만 같았습니다. 남편은 어쩔 줄 모르고 그 자리에 돌처럼 굳어져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아내가 빗자루를 가지고 오더니 산산조각난 전등을 쓸어 모이며 남편을 쳐다 보았습니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여보. 그럴 수도 있지요. 다시 사면 돼요. 괜찮아요.”
그 다음 주일 아침예배에 그 남편은 아내와 나란히 교회에 나왔습니다. 남편은 그 후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양보가 있는 가정에는 행복이 흐르게 됩니다. 양보를 설득할 영적인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가정은 최선에서 최악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3. 영안이 없었습니다.

롯의 가정은 최고로 좋았던 가정입니다. 그런 가정이 최악의 가정으로 전락한 데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영안이 없었습니다. 일치가 없었고, 양보가 없었지만 영안도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롯에게 먼저 땅을 선택하라고 하였습니다. 롯은 소돔과 고모라 땅을 가지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를 성경은 밝히고 있습니다.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 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같고 애급땅과 같았더라”(창 13;10)
영안이 없었기에 떨어지는 벼락을 쫓아가서 맞은 격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멸하시기 직전이었습니다. 롯은 보이는 것만 보았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영안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빛을 보고 있습니다. 어둡지 않고 환한 이 자체가 빛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빛중에 5%만 보고 있고, 95%는 보지 못 하고 있습니다.

빛을 프리즘으로 비추어 보면 7가지 색깔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 속에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남색 그리고 보라색이 들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도 보암직하고 먹음직한 선악과를 먹고 에덴 동산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영적인 눈이 열려야 합니다.

영적으로 분위기를 조정하는 사람이 한 명만 있어도 그 가정이나 모임은 영적 분위기가 됩니다.

예를 듭니다.
이스라엘 랍비들은 유모어를 좋아 합니다. 그러나 세 가지 유모어는 결코 금하고 있습니다.

1. 성(性)적인 유모어.
말하는 사람은 성(性)적 유모어가 아니라고 하여도 듣는 사람이 성(性)적인 유모어로 들었으면 성(性)적인 유모어입니다.
2. 하나님을 모독하는 유모어
3. 사람들에게 상처주는 유모어
그래서 랍비가 있는 곳에서는 항상 밝은 유모어만 있게 됩니다.

괴테가 또 그렇습니다.

괴테의 집에는 항상 정치가, 문학가, 군인, 실업가, 문인들이 모여서 담소를 나누었습니다. 항상 사람이 모이는 집이 좋은 집입니다. 그런데 가끔 어떤 사람이 남의 흉을 보거나 음담패설을 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럴 때면 괴테는 그 사람을 응시하면서 날카로운 눈으로 쳐다보면서 엄하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종이 부스러기나 음식 부스러기를 흘리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러나 남의 흉이나 음담패설을 흘리는 것은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당신들이 우리 집에서 흘린 그런 말들은 가실 때 도로 가지고 가십시오. 저의 집에 그런 말을 흘려 남기지 말아 주십시오. 흉을 보는 것은 우리 집 공기를 더럽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괴테의 집에서는 항상 밝은 말들만 하였습니다.
한 사람만 있어도 그 사람을 통하여 좋은 영이 흘려 집니다.

하나님은 모든 기도를 들어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들어주시기 않는 세 가지 기도가 있습니다.

1. 과식하는 사람의 위장을 지켜 주시지 않습니다.

성경은 무엇에나 절제하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먹는 것도 절제하여야 합니다. 과식하는 위장을 하나님은 지켜주시지 않습니다.

2. 과로하는 사람의 건강을 지켜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6일동안은 힘써 세상일을 하고 7일째되는 안식일에는 하나님과 더불어 예배드리며 안식하라고 하셨습니다. 지금은 안식일을 안 지킨다고 누가 무어라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구약시대에는 안식일에 일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모세의 율법입니다.

3. 과욕을 부리는 사람의 지갑을 지켜 주시지 않습니다.

욕심은 사망의 원인입니다. 자기 분수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과욕을 용서하지않으십니다.

롯은 과욕이었습니다. 더 이상 가지려고 하면 안 되었습니다. 양보없이 영안없이 더 좋은 땅을 삼촌보다 많이 가지려고 하면서 가정이 파탄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롯의 가정은 최선의 가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최악의 가정으로 전락되고 말았습니다. 좋았던 가정이 엉망이 되었습니다. 엉망인 가정이 최고의 가정으로 바뀌면 얼마나 좋을 가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1. 일치가 없었습니다.
2. 양보가 없었습니다.
3. 영안이 없었습니다.

우리 가정들은 모두 최악이 최선으로 바뀔 지언정, 최선이 최악으로 바뀌지 않도록 하나님이 은총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이야기 하나 드리고 마치려고 합니다. 
나는 월남에 지원하여 가서 전투를 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영어 통역병을 차출되어 미군 부대에 홀로 떨어져 생활하였습니다. 전투하다가 쓰러진 병사들을 모두 헬기로 나 있는 곳으로 후송되었습니다.
의사는 간호원을 데리고 헬기에 수송되어 온 병사들을 한 명 한 명 일차 진료합니다. 간호사는 카드 세 종류를 들고 따라다닙니다.
의사가 후송병들을 빠른 속도로 돌아 보면서 <medical help needed>라고 진단하며 간호원은 그렇게 쓴 딱지를 붙입니다. 빨리 서둘러 치료하면 살 수 있다는 표시입니다. 그러면 뒤에 들 것을 들고 서 있는 사람들이 들 것에 들려 빨리 응급실로 옮깁니다.

의사가 <dead>라고 말하면 간호원은 그 카드를 붙입니다. 죽을 사람이니 신경쓰지 말라는 딱지입니다. 이 딱지가 붙으면 누구도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의사가 <no hope>라고 말하면 희망이 없으나 의사나 침대 여유가 있으면 조치하라는 표시입니다. 어느 부상병 이야기입니다.

부상병이 쓰러져 있는 데 의사가 오더니 <no hope> 희망이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간호원이 자기 발가락에 희망이 없다라고 딱지를 붙이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기가 막혔습니다. 그는 꺼져 가는 소리로 외쳤습니다.
“나 치료시켜 주세요. 나 살 수 있어요.“
지나가던 다른 간호사가 이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간호사는 불쌍하였던지 딱지를 바꾸어 붙였습니다. 들 것에 들려 응급실로 갔습니다. 다리는 절단하여 불구가 되었지만 생명을 살렸습니다.
어떤 최악의 가정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다시 소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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