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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는 나를 따르라 (마 8: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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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나를 따르라 (마 8:18-22)

   
최근 이명박 대통령의 국정지지도가 급락하고 있습니다. 줄곧 50%대 전후를 유지해 오던 것이 20%대 후반으로 곤두박질한 것입니다. 이미 레임덕이 시작되어 임기 종반까지 회복이 쉽지 않아 보입니다.

사실 이명박 대통령이 잘 한 점이 많습니다. 전 세계적인 금융위기에서 우리나라가 가장 빨리 벗어나 지속적 경제 성장을 이루도록 한 점, 당연히 대통령의 공입니다. G20 정상회담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우리나라의 국격을 선진국에 근접한 수준으로 올려놓은 점, 역시 대통령의 공입니다.

그러나 국민들은 이 점을 높이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약점들만 들춰내며 비판하고 공격합니다. 그런데 이런 점은 이명박 대통령뿐 아닙니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치고 국민들에게 끝까지 그 공을 인정받고, 존경 받는 사람이 없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 경우만 해도 그렇습니다. 노벨 평화상을 탄 유일한 대통령입니다. 군부 독재를 종식시킬 수 있게 했던 분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데 큰 공을 세운 분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평등이라는 가치와 소외된 이와 함께 사는 공동체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분입니다. 게다가 남북관계를 획기적으로 발전시킨 분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국민들은 이런 점을 높이 평가하는데 인색합니다. 우리나라 발전을 위해 큰 공을 세운 대통령이었다고 평가하는데 인색합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가 오늘 이런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룩한 기틀을 마련한 분입니다. 새마을 운동으로 우리 민족에게 자신감을 심어준 분입니다. 그리고 수출입국이라는 경제발전의 비전을 제시했고, 이를 꾸준히 실천하여 산업화를 이루어낸 분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국민들은 이 점을 높이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분의 3선 개헌이라는 단점만 집요하게 비판하며 평가 절하합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나라는 참 훌륭한 지도자들이 있었지만 누구도 국민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김상회 국민대 교수는 이런 주장한 일이 있습니다. “한국인들은 리더에게 너무 과도한 것을 요구한다. 한국의 리더는 기능적 리더십 뿐 아니라 도덕적, 인간적, 정서적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이러다 보니 리더에게 과부하가 걸리고, 문제가 생기면 좀처럼 살아남기가 어렵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모든 문제는 다 역대 대통령 탓이 된다. 그 결과 괄목한 만한 성공을 거둔 나라에서 존경받는 대통령이 없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김 교수는 이런 현상을 한국인 특유의 정체성과 연결시켜 분석했습니다. 한국인은 ‘리더’(leader) 즉 ‘이끄는 이’가 되고자 하지, ‘팔로우어’(follower) 즉 '따르는 이'가 되고자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치열한 경쟁 속에서 서로의 약점을 보게 되고, 리더가 된 사람을 존중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리더가 된 사람을 세워주고 격려하고 지원하는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됩니다. 

결국 모두가 ‘리더십’(leadership)에만 관심이 있지 ‘팔로우어십’(followership) 즉 ‘따름’에는 관심이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주님께서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먼저 따르는 일부터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먼저 팔로우어십 즉 따름을 배우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먼저 따름을 배우고 난 뒤 리더로 세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먼저 따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철저하게 훈련받고, 잘 따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난 후 주님께서 세워주시면, 그 때 이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따르는 사람들을 잘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어서, 제대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리더가 이렇게 따름을 훈련받지 못한 채 리더십을 발휘하려고 할 때, 많은 문제가 생깁니다. 우선 교만합니다. 자기는 원래부터 리더인 줄 착각합니다. 그리고 배려가 없습니다. 따르는 사람들을 이해할 줄 모르니까, 그들을 배려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끄는 사람이 따르는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또 존중받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먼저 이끄는 사람이 되려고 하기 보다는 따르는 사람이 되려고 해야 합니다. 그래서 리더십에 대한 관심보다 따름에 대한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 팔로우어십 즉 따름에 관해서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주목할 것은 예수님께서 두 가지 잘못된 따름의 문제를 지적하시면서 올바른 따름에 대해 가르침을 주시고 계시다는 점입니다.

잘못된 따름 1

본문 19-20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한 서기관이 예수님을 따르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서기관은 어떤 사람입니까? 서기관은 율법의 전문가입니다. 그리고 유대교의 지도층 인사입니다. 성경을 보면 주로 이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복음 사역을 비판했고, 또 방해했습니다. 그런데 이 서기관은 예수님을 따르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가상한 일이요, 주님께 그 자체만으로도 칭찬 받을 만해 보입니다.

이 서기관이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겉으로 보면, 대단한 결단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든지 끝까지 주를 따르겠다는 다짐과 각오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서기관이 이런 결단을 했다는 것이 대단해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보실 때 문제가 있습니다. 이 서기관이 주님을 따르겠다고 나섰지만 한 가지 중요한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문제가 무엇일까요? 

주님께서 이 서기관의 문제를 지적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수님은 쉴만한 일정한 거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그랬습니다. 유다 지역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습니다.(요 5:18) 갈릴리 지역 사람들은 예수님을 내어 쫓았습니다.(요 6:66) 가다라 사람들은 예수님께 그 지역을 떠나기를 청했습니다.(마 8:34)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머무르기를 거절했습니다.(눅 9:53) 그리고 결국 이 세상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말았습니다.(마 27:23)

예수님께서 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이런 고난을 당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 때문에 희생을 당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이런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서기관의 마음 속에는 희생에 대한 각오가 없었습니다. 단지 예수님을 따르는 수고는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배우며 겪는 번거로움 정도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희생을 요하는 일임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주님을 따르려는 사람들 중에 이 서기관과 같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주님을 따르며 얻을 수 있는 것만 생각합니다. 주님을 따른 결과에 대한 유익만 생각합니다. 주님을 따르며 겪게 되는 희생은 생각하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오늘도 이 점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지난 3월 2일 파키스탄의 샤바즈 바티 장관이 괴한들의 총격을 받고 암살을 당했습니다. 그는 소수민족부 수장으로서 신성모독법 폐지 등 소수민족과 종교인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기 위해 앞장을 서 왔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내각 내의 유일한 기독교 신자로서 이슬람 과격 세력으로부터 여러 차례 살해 위협을 받아왔습니다.

이 분이 피격당하기 얼마 전 미국 LA의 한 한인교회를 방문해서 간증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 때 이분이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이슬람 국가인 파키스탄에서 최초의 그리스도인 장관이 되는 은혜를 누리게 된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하심과 핍박 받는 파키스탄의 기독교인들 그리고 형제들의 기도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장관으로 세우신 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하는 목적이라고 믿습니다.”

이 분이 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그리스도인을 “예수를 따르는 사람”(Follower of Jesus)이라고 정의한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예수를 따르는 사람으로서 예수를 위해 살고 예수를 위해 죽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이분이 죽기 전 작성한 비디오 메시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기독교인과 소수 종교인들의 권리를 방어하기 위해 활동하다가 죽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희생을 각오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희생을 준비하고, 구체적으로 희생을 치르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마 16:24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반드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십자가 없는 따름은 진정한 따름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희생 없는 따름은 참된 따름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어떤 십자가를 지고 계십니까? 자기 몫에 태인 십자가를 피하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십자가를 지고 가다가 내려놓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지금 다시 그 십자가를 지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뒤를 따르십시오.

잘못된 따름 2

본문 21-22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자 중의 또 한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이번에는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나섰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제자는 아직 12제자를 부르시기 전이기 때문에, 우리가 아는 12 제자 중에 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넓은 의미로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나선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아마도 이 제자는 죽음을 앞두고 있는 아버지를 모시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본격적으로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서고자 할 때, 아버지가 마음에 걸렸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얼마 남지 않는 마지막을 잘 모셔드리고, 장례까지 다 치른 뒤에, 홀가분한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이 제안은 세상적 기준으로 볼 때, 너무도 당연하고 또 마땅합니다. 당시 부모에 대한 효도는 십계명 제 5계명에서도 강력하게 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의 관습에서도 부모가 임종할 때, 자식은 기도, 율법 공부, 성전 봉사, 할례준수, 유월절 양 잡는 일과 같은 신앙적 의무를 면제해 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제안은 당연히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보실 때 문제가 있습니다. 이 제자의 제안이 타당해 보이지만, 그 안에 한 가지 중요한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문제가 무엇일까요?

주님께서 그 문제를 지적하시기 위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여기서 죽은 자들이란 영적으로 죽은 자를 의미합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자요, 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관심이 없는 자를 말합니다. 오직 세속적 관심과 세상적 욕망을 따라 사는 자들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장례는 이 영적으로 죽은 자들에게 맡기고, 영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주님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제자의 마음속에는 두 가지를 다 손에 잡으려는 태도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세상적인 욕망도 채우고, 하나님 나라의 비전도 이루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이것을 지적하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도 이런 신자들이 많습니다. 영적으로도 부자가 되고, 육적으로도 부자가 되고 싶어 합니다. 신앙적으로도 성공하고, 세상적으로도 성공하고 싶어 합니다. 그야말로 양다리 걸치기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과연 이런 사람들이 둘 다 성공할 수 있을까요?

이솝의 우화에 박쥐 이야기가 있습니다. 짐승과 새들의 전쟁이 있었습니다. 박쥐는 짐승에 속하는 쥐이기도 하지만, 날개로 날기도 하기 때문에 새로 볼 수도 있습니다. 한 때 전쟁은 짐승 쪽이 승기를 잡았습니다. 이 때 박쥐는 자기도 짐승이라고 짐승 쪽에 붙었습니다. 그러나 전세가 역전이 되어 새들이 승기를 잡았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박쥐는 날개를 펴고 날며, 자기도 새라면서 새들 편에 섰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전쟁이 끝났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게 됐습니다. 그러자 박쥐는 설 곳이 없어졌습니다. 짐승들은 자기들을 버리고 새들 편에 섰던 박쥐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새들은 박쥐가 짐승인 것을 알고 내 쫒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박쥐는 양쪽에 다 어울리지 못하고 동굴 속에 살면서, 밤중에만 다니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영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양다리 걸치기는 안 됩니다. 우선 하나님께서 용납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세상적으로도 잘 될 수가 없습니다.

김대두라는 사형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1975년 경기도 송탄에서 일가족 4명을 죽이고 두 달 동안 전남과 경기, 그리고 서울에서 17명을 살해한 사람입니다. 그가 1976년 12월 28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갔습니다. 이분이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어있는 동안 예수를 믿게 됐습니다. 그리고 처형당하기 까지 교도소에서 무려 200여명을 전도했습니다.

이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건 제가 공연히 하는 말이 아니라, 솔직한 저의 심정입니다. 누가 저에게 어느 큰 회사 사장 자리를 줄 테니 예수님을 버리고 오라 하면, 저는 확실하게 대답할 것입니다. 사형의 날을 기다리며 예수님과 영원히 함께하는 기쁨을 기대하는 지금이, 내게는 더욱 행복합니다.”라고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제대로 따라야 합니다. 양다리 걸치기는 안 됩니다. 안 믿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믿는 것도 아닌 식의 신앙생활로는 주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교회 안 다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제대로 다닌다고 말할 수 없는 식의 신앙생활로는 주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올인(All - In) 하는 자세입니다. 사업을 하고 직장생활을 하고 학교에서 공부하고... 세상 한복판에서 살아가면서도 주님께 올인 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주님을 앞세우고, 주님께 인생의 목적을 두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 순종하여 일어나 주님을 따라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따르되 잘 따라야 합니다. 우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양다리 걸치기는 안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에게 올인 해야 합니다. 주님을 우선시  해야 하고 목적도 주님께 두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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