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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 16:13-20)

첨부 1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 16:13-20) 
 
  
13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4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5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20 이에 제자들에게 경고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오랜 전 팝송 가운데 “왜 태양은 빛나는지, 왜 파도는 밀리는지”라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이 노래처럼 우리는 왜 태양이 빛나는지, 왜 파도는 밀리는지 그 이유를 잘 알지를 못합니다. 지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왜 비행기는 날아가는지 과학적으로 잘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결코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태양이 빛나고, 파도가 밀리는지 몰라도, 지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왜 비행기가 떨어지지 않고 날아갈 수 있는지 몰라도 괜찮습니다. 사는데 커다란 불편이 없습니다. 

그런데 神 지식, 곧 하나님 지식에 관해서는 경우가 다릅니다. 몰라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神 지식, 예수님에 관한 지식은 곧 살고 죽고 하는 생사가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요 17:3절에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고 했는데, 이 말씀을 다른 말로 바꾸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멸망한다는 의미와 똑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관한 지식은 인생에게 있어서 자신을 아는 것 이상으로 너무도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지방에 가셔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가이사랴’ 라는 장소는 두 곳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지중해 연안 욥바 항구 바로 윗편에 ‘가이사랴’ 라는 요새가 있었습니다. 그 요새는 헤롯이 가이사 아우구스트를 기념하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지역입니다. 또 다른 한 곳은 본문에 나와 있는 ‘가이사랴 빌립보’ 입니다. 이 도시는 헤롯의 아들인 빌립 왕이, 그 당시에 디베료 가이사랴 라는 로마의 황제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그를 기념하는 ‘가이사랴’ 라는 도시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가이사랴’ 라는 지역이 두 곳이기 때문에, 지중해 연안에 있는 도시와 구별하기 위해서, 그리고 빌립이 만들었기 때문에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이 ‘가이사랴 빌립보’는 바로 헬몬산 밑에 있는 도시로, 거기에서부터 요단강이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두로와 시돈을 거쳐서, 이 헬몬산 밑에 있는 ‘가이사랴 빌립보’에 오셨을 때에, 아주 중대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은 그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어떠한 사람이라고 하는지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그들이 사람들에게서 들은 대로 대답을 하였습니다.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세례 요한은 헤롯에게 목 베어 죽임을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혜성 같이 나타나셔서 갖가지 이적과 권능을 행한 것을 보고, 헤롯왕을 비롯한 어떤 사람들은 아마도 세례 요한이 부활한 것으로 단정한 것 같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을 가리켜 엘리야라고 한 것은,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엘리야가 와서 그의 길을 예비한다고 했는데, 유대인들은 놀라운 권능으로 그들에게 다가온 예수님을 보며, 그가 성경에 예언된 엘리야가 아닐까 생각한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예레미야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유대의 죄악을 통렬하게 책망하였을 뿐만 아니라, 유대의 멸망을 바라보며 눈물을 많이 흘렸던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장차 멸망할 예루살렘을 향해 눈물을 흘리시는 모습이 예레미야와 유사하게 보여서, 예수님을 가리켜 예례미야 같은 분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모세나 이사야 같은 선지자중의 한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는 예수님을 난세의 영웅들과 동일시한 것으로, 로마의 식민 통치가운데 고통을 겪고 있던 그들이,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아로 기대한 것을 의미하고, 후일 예수님에 대한 기대가 사라지게 되자, 그들은 예수님을 외면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이런 사람이다, 혹은 저런 사람이다고 말한다는 제자들의 보고를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그런다 치고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한 평가를, 그들의 소망과 욕구에 따라서 그들을 구원할 정치적인 메시아로만 보았습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질문한 것입니다. 이러한 질문은 예수님께 대한 일반 대중들의 생각보다 더 나은 답변을 기대하시는 것으로, 사랑하는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큰 기대를 보여주시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을 들은 베드로는 즉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베드로의 이 신앙고백은 후일 도마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라는 신앙고백과 쌍벽을 이루는 유명한 신앙고백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들으시고, 매우 흡족해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베드로를 향하여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니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은, 사실 감추어져 있던 진리로, 하나님께서 이 비밀을 깨닫게 해주시지 않는다면, 우둔한 인간의 지혜로는 결코 알 수도 없고, 그래서 신앙을 고백할 수도 없는데,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 놀라운 비밀을 밝히 알도록 해주셨으니, 베드로 너는 참으로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믿음은 인간 스스로의 지식과 의지와 사색의 산물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결과인 것입니다. 비록 베드로가 뛰어난 신앙 고백을 하였지만,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결코 자신의 구원을 스스로 자랑하지 말고, 오로지 하나님께만 감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계속해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향하여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지난 2000년 동안 기독교의 역사상 계속해서 논란이 되어온 구절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반석 위에다 교회를 세우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라는 말이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천주교에서는 주장하기를 “이것은 바로 베드로 위에다 교회를 세우겠다는 뜻이다. 

베드로 뒤에는 교황들이 그 권리를 이어간다. 그러므로 천주교가 정통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틀립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교회를 반석 위에 세우시겠다고 하심은, 허물 많은 인간 베드로 인격 위에 세우시겠다는 말씀이 결코 아니고, 바로 베드로가 고백한 신앙고백을 말합니다. 곧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신앙은 반석과 같고, 이 신앙고백위에 세우진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결코 이기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는 말씀도, 천주교의 주장처럼 베드로가 교회의 통치권을 부여받았고, 그 직계 후계자인 교황 역시 동일한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칼빈에 의하면 복음을 전할 사도직에 대한 강조의 말씀으로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곧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천국 문을 열어 주는 것이며, 이러한 복음을 전파하지 않는 것은 천국 문을 닫아버림을 뜻합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는 말은 사탄의 세력이 교회를 이기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사탄이 날뛰고 사망 권세가 대단해도,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운 교회를 결단코 파멸시키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당시의 제자들에게 하신 질문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오늘날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우리들에게도 던지시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사대 성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혹은 위대한 스승으로, 혹은 탁월한 종교의 창시자로, 혹은 혁명가 정치가 등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장 큰 관심은 사람들이 뭐라고 하느냐가 아니라, 저와 여러분들이 무엇이라고 고백하고 있는가에 더 관심이 있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예수님께서 질문을 했을 때에, 베드로가 즉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참으로 정확하고 위대한 신앙고백입니다. 그러면 베드로의 이 위대한 신앙고백의 내용을 좀 더 깊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베드로는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가리켜 ‘주는 그리스도시요’라고 했는데, 여기서 ‘주’라는 말은 세 가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존경의 의미로 선생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랍비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둘째는 우리의 생명이나 인생의 주인이 되신다는 뜻입니다. 셋째가 가장 중요한 뜻인데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주’ 곧 ‘아도나이’ 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이는 하나님에 대한 호칭입니다. 구약성경에는 거의 대부분 하나님을 ‘주’라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른 것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다는 고백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당시에는 로마 황제 가이사가 ‘주’로 숭배를 받던 시절입니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그 황제 숭배의 중심지이기도 했습니다. 바로 그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가리켜 단호하게 ‘주’라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가이사가 로마 황제가 주 곧 하나님이 아니고, 예수님이 주시고 하나님이시란 뜻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고백은 죽음을 각오하지 않으면 할 수없는, 혁명적이고 폭탄적인 선언이요 고백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베드로는 이 혁명적인 고백을 하였고, 예수님은 그러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듣고 크게 칭찬까지 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우리 인생들의 주인이시며, 하나님이신 것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2. 주는 그리스도시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메시아는 히브리어이고, 그리스도는 헬라어입니다. ‘그리스도란’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뜻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 이 세 종류의 사람들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들에게 기름을 부음은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 가운데서 성별하셨다는 의미와, 그 직분을 감당할 수 있는 성령의 능력을 부어 주심을 의미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라는 말은, 예수님은 왕이시고, 선지자이시고, 제사장이시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기름부음 받은 자’라고 할 때, 그 기름부음 받음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1)그리스도는 왕이심을 의미합니다. 

신. 구약을 막론하고 모든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우주적인 통치자로서, 하나님 아버지의 권세를 위임받으신 왕이심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며 따랐던 것은, 그리스도를 이 땅에 오신 왕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네가 왕이냐?”는 빌라도 총독의 질문에 단호하게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이 세상에 왔나니.”라고 하셨습니다. 부활 승천하신 주님께서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만물을 다스리시고, 성령과 말씀으로 교회와 성도를 다스리시는 왕 중의 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섬기되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서 높이 받들어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2)그리스도는 제사장이심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이전 곧 구약 시대에는 인간이 죄를 사함받기 위해 양, 염소, 송아지 등을 희생 제물로 삼아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 의식은 영구성이 없었습니다. 제사를 드리고 나서 죄를 범하면, 다시 희생 제물을 필요로 했기 때문입니다. 이 불완전하고 번거로운 일이 반복되어야 했습니다. 인간 제사장은 그들 자신도 이미 죄인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집전하는 제사 역시 온전하다고 할 수 없었습니다. 그 제사는 장차 온전한 제사를 위한 하나의 예표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단번에 속죄 사역을 완성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전혀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었기 때문에, 그 일이 가능했습니다. 히 9: 14에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제사장으로서 그 자신이 친히 희생 제물이 되시고,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쉬지 않고 간구하시는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것입니다.

3)그리스도는 선지자이심을 의미합니다. 

신 18:15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고 했는데, 이는 모세가 장차 오실 선지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예언한 것입니다. 선지자 혹은 예언자는 인생들에게 하나님과 그 분의 뜻을 전달해주는 계시의 전달자 역할을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에게 도덕과 철학을 가르치려고 오신 분이 아니십니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와, 그 분의 생각과 계획을 우리 인류에게 온전히 가르쳐 주시기 위해 오신 영원하신 선지자이신 것입니다. 선지자로서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시고, 장래 일을 예언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불신하는 유대교나 마호멧교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선지자, 혹은 예언자로는 인정을 합니다. 그만큼 그리스도께서는 예언자적인 면에서도 신적인 통찰력을 지니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베드로의 개인적인 운명이라든지, 유대 민족과 로마의 멸망에 대한 국가적인 운명이라든지, 복음이 온 민족에게 전파될 것, 그리고 자신의 재림과 사후 세계의 상태를 예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 선지자요 참 예언자이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고, 그 가르치심에 순종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3.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강아지는 무엇의 아들입니까? 송아지는 무엇의 아들입니까? 여러분은 누구의 아들딸입니까? 그렇다면 사람의 아들딸인 우리 인간이 강아지나 송아지와 본질이 같다고 할 수 있습니까? 결코 그렇다고 할 수 없습니다. 원숭이와 사람의 본질 역시 결코 같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공자는 누구의 아들입니까? 석가모니는 누구의 아들입니까? 마호멧은 누구의 아들입니까? 공자, 석가모니, 마호멧, 이들은 모두 사람의 아들이므로 본질이 우리와 똑같은 사람일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의 아들입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곧 하나님과 본질이 똑같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하나님처럼 사셨습니다. 하나님처럼 말씀하시고, 하나님처럼 권능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 삶속에서 하나님을 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예수님의 삶 속에는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고, 하나님의 정치가 드러나고, 하나님의 경제가 운용되고, 하나님의 사상이 천명되고, 하나님의 평화안이 제시되고 실천되었다고 했습니다. 칼 바르트가 UN 총회에 초청되어서 연설할 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세계의 평화를 위해 논의하고 있으나, 이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안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세계의 평화는 이룩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삶 속에는 하나님의 삶이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가리켜, 세례 요한이니, 엘리야니, 예레미야니 또는 선지자중의 하나라는 말은, 곧 예수님을 사람으로만 본 것이고, 따라서 베드로의 신앙고백과의 결정적인 차이는, 곧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이시란 점, 곧 예수님의 신성을 밝히 증언한 데 있는 것입니다. 이 고백이 로마황제에게 헌정된 도시였던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선언된 것은, 실로 커다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믿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구원여부가 판가름 날만큼,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스코틀랜드의 한 나이 많은 성도가 죽음에 임박하여 눈을 감고 누워있었습니다. 그의 아내가 귀에 가까이 대고 “여보, 나 아시겠어요? 당신의 아내예요!” 라고 했으나 아무 대답이 없었습니다. 이번에 사랑하는 딸이 가까이 와서 귀에 대고 “아빠, 저 아시겠어요? 사랑하는 딸이에요!” 그래도 아무 응답이 없었습니다. 

이번에 목사님이 귀에 대고 “샌디, 예수 그리스도를 아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눈을 번쩍 뜨고 웃음을 띠면서 말하기를 “알구말구요. 그 분은 사랑하는 구주신걸요!” 라고 고백을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도 예수님을 이렇게 잘 아시기 바랍니다.“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우리 모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확실하게 신앙고백을 할 수 있기를 바라고, 그 신앙고백으로 꼭 구원을 받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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