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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몸으로 드리는 예배 (고전 6: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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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으로 드리는 예배 (고전 6:19-20)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의 성전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여러분은 성령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모시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고 사들인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몸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십시오.]

• 잃어버린 소리

주님의 은총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전 교인 한마음 운동회로 모이는 이날, 주님께서도 우리의 모습을 보며 너털웃음을 터뜨리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예배를 준비하면서 문득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참 많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라진 소리를 생각해보십시오. 제 기억에 가장 아련하게 들려오는 소리는 저물녘 시골집 마당가에서 엄마들이 아이들을 부르는 소리입니다. 가을 논에서 참새 쫓는 훠이훠이 소리도 들려오는 듯합니다. 

추운 겨울 밤새 우는 문풍지 소리도 떠오르고, 수탉 울음소리도 떠오릅니다. ‘고장난 라디오나 머리카락 팔아요오∼’, ‘퍼’, ‘뚫어’도 떠오르시지요? 겨울 저녁이면 구성지게 들려오던 ‘메밀묵, 찹쌀떡’ 소리, 야경꾼들의 딱딱이 소리도 떠오릅니다.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교회 종소리입니다. 종소리는 묘한 울림을 우리 가슴에 일으키곤 했습니다. 그 모든 소리들은 어른이 되어 살고 있는 이들의 정서의 원형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들을 수 없는 소리 가운데 가장 그리운 것이 있습니다. 친구 집 문 밖에 서서 외쳤던 소리. “∼노올자”. 함께 놀자는 부름이 그렇게 좋은 것인지 그 때는 몰랐습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에 집중하고 있지만, 이후의 시간은 모두가 신나게 어울려 잘 놀았으면 좋겠습니다. 

• 서로 함께 공동체

바울 사도는 교회를 가리켜 ‘한 몸 공동체’라 했습니다. 교회의 신비는 서로 다른 지체들이 어울려 한 몸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어울림의 전제조건은 ‘다름’입니다. 모두가 똑같다면 어울림이란 애당초에 불가능합니다. 어쩌면 어울림은 사람됨의 근본인지도 모릅니다. 어떤 이는 ‘사람’, ‘삶’, ‘사랑’이라는 단어의 뿌리가 같을 거라면서 재미있는 분석을 했습니다. 세 단어 모두에 포함된 것은 자음 ‘ㅅ’과 ‘ㄹ’, 모음 ‘ㅏ’, 그리고 받침에 있는 자음 ‘ㅁ, ㅇ’입니다. 

그런데 시옷은 치아 끝에서 나는 파열음이고, 리을은 치아 안쪽에서 나는 굴림음이고, 미음과 이응은 입의 저 끝에서 콧소리와 함께 나는 비음입니다. 정말 다양한 소리가 어울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사람, 삶, 사랑의 근본이 서로 다른 것의 어울림임을 일깨워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교회가 건강하기 위해서는 우선 구성원이 다양해야 합니다. 남자와 여자, 어린이와 어른, 부자와 빈자, 많이 배운 이와 덜 배운 이, 지위가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 이 다양한 구성원들이 서로를 용납하고 존중하고 아끼고 세워주면서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울 때 우리는 벗들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를 미리 맛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초대교회의 초석을 놓았다고 할 수 있는 바울의 서신을 읽다 보면 유난히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눈에 들어옵니다. 그것은 ‘서로’(άλλήλων)라는 단어입니다. 몇 가지만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형제의 사랑으로 서로 다정하게 대하며,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십시오.”(롬12:10)
“그러나 여러분은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갈5:13)
“여러분은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갈6:2)
“겸손함과 온유함으로 깍듯이 대하십시오. 오래 참음으로써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십시오.”(엡4:2)
“모두가 서로서로 겸손의 옷을 입으십시오.”(벧전5:5)

바로 이것이 공동체의 구성 원리입니다. ‘너’의 자리에 ‘나’를 세울 줄 아는 것, 너의 심정이 되어 상황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 코이노니아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네 기둥 가운데 하나는 ‘코이노니아’ 곧 ‘사귐’입니다. 사귐이란 ‘서로 가까이하여 얼굴을 익히고 사이 좋게 지내다’라는 뜻입니다. 성도의 사귐은 그저 낯이나 익히고 잘 지내는 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성도는 사귐의 중심에 주님을 모셔야 합니다. 그 말은 성도는 서로를 주님의 사람으로 대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눌 뿐 아니라, 하나님이 맡기신 일들을 위해서도 창조적으로 협력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에게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그런데 마음을 연다는 게 참 쉽지 않습니다. 가끔 우리에게 ‘놀이’가 필요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놀이를 함께 하면서 사람들은 자아라는 틀을 깨고 밖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호이징가라는 학자는 <<호모 루덴스 Homo Ludens>>라는 책을 썼습니다. ‘놀이하는 인간’이라는 말입니다. 흔히 일 열심히 하라고 악을 쓰는 세상에서 놀이는 게으른 이들이 하는 짓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놀이야말로 인간 공동체를 세우는 중요한 구성 요소입니다. 우리의 일상은 지나칠 정도로 긴장의 연속입니다. 그래서 물을 흠뻑 빨아들인 스폰지처럼 몸과 마음이 무거울 때가 많습니다. 가끔 그런 촘촘한 일상에 틈을 만들어야 합니다. 놀이는 ‘삶의 필요’에서 독립된 행위입니다. 놀이를 통해 우리는 현실에서 느끼는 불만과 갈등을 현실과는 다른 방식으로 해소합니다.

그런데 놀이에는 언제나 벗이 필요합니다. 혼자 놀기의 진수를 보여주는 이들도 더러 있지만 놀이는 함께 즐김을 본질로 합니다. 그렇기에 놀이는 나와 다른 이와 만나, 대화하고, 몸을 부딪히면서 서로에 대한 공감을 넓혀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놀이를 하면서 우리는 관계를 형성하는 능력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군목으로 재직할 때의 일이 생각납니다. 부대별 축구대회가 열리는 날이 되면 병사들은 저마다 긴장합니다. 혹시라도 경기에서 지면 어떤 벌을 받을지 뻔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인지 경기는 늘 과열되곤 했습니다. 부상자가 속출했습니다. 군대 다녀온 이들이 주로 하는 이야기 가운데 축구가 빠지지 않는 것은 저마다 쓰라린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군대에서는 운동을 해도 ‘전투체육’이라고 포장을 해서 하는 판이니까, 병사들이 몸을 사리지 않고 용감하게 뛰는 것이 전투력을 높이는 일일 수는 있겠습니다.

그런데 군인들도 가끔은 즐겁게 운동을 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지휘관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경기를 두 게임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잘 하는 이들로 선수를 선발해 우선 한 게임 뛰고, 다음에는 상대 부대가 지목하는 선수들이 나와 한 게임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두 번째 게임에 등장하는 선수들은 각 중대의 운동 고문관들이었습니다. 상황 자체가 재미있어진 겁니다. 그들의 실력을 뻔히 아는지라 굳이 이겨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사라지자 모두가 웃으며 그 상황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스타 플레이어는 나오게 마련이어서 가끔 양쪽 부대의 박수를 받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모두가 유쾌하게 그 시간을 즐겼습니다. 그리고 즐거운 회식이 이어졌습니다. 

• 몸과 맘의 상관관계 

교회에 다니면서도 우리의 사귐은 몸을 매개로 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오늘은 몸을 매개로 해서 사귀는 날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우리 몸이 성령이 머무시는 전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바울 사도가 이런 말을 한 맥락은 조금 복잡합니다. 항구 도시였던 고린도 시는 음란함으로 유명했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 중에도 이전의 관습적인 삶의 방식을 청산하지 못한 사람들이 더러 있었던 모양입니다. 몸을 쾌락을 위한 도구로만 사용하는 사람들은 자신은 물론 공동체 전체에도 악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우리 몸을 거룩하게 여겨야 할 까닭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혼 혹은 정신을 중시했던 그리스 사람들은 몸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때가 되면 스러질 거푸집과 같은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들의 그런 생각을 뒤집고 있습니다. 우리 몸이야말로 하나님의 영이 머무는 집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몸이 사라지면 영도 흩어지게 마련입니다. 몸이 편치 않으면 정신도 흐릿해집니다. 몸과 마음은 서로에게 속해 있는 일체입니다. 우리가 몸을 아끼고 건강하게 유지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옛 사람들이 마음 닦음(修心) 못지않게 몸 닦음(修身)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오늘 우리의 사귐은 몸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예배, 곧 몸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더 깊어지고, 하나님의 영이 머무시는 우리 마음이 더욱 넓어지고 맑아지기를 바랍니다. 이 예배를 통해 이전에 깊이 알지 못했던 이들이 더욱 친밀한 벗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은총으로 우리 교회가 ‘어울림’의 본이 되는 한 몸 공동체로 거듭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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