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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질서를 따르라 (벧전 2: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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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서를 따르라 (벧전 2:13-17)


성경 외경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높은 산에 올라가시는데, 그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 우리가 이제 저 높은 산에를 올라갈 터인데 큰 돌 2개씩 가지고 올라가자.”
그래서 제자들은 큰 돌을 2개씩 골라 들고 올라갑니다. 베드로는 수제자답게 가장 큰 돌 2개를 어깨에 메고는 낑낑대며 끝까지 산을 오릅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처음에는 큰 돌 2개를 들고 올라가기 시작했지만 한참 올라가다가 그 돌을 내려놓고는 그 보다 좀 작은 돌로 바꾸어 메고 올라가더니 나중에는 아예 조그마한 조약돌 2개를 주머니에 넣고는 산에 오릅니다.
산에 다 오르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그 돌들을 각자 자기 앞에 놓게 하고는 식사기도를 하십니다. 그리고는 식사를 하는데 베드로는 가장 큰 떡을 먹게 되지만 가룟 유다는 조약돌만한 떡만 먹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물론 외경에 나오는 내용이기 때문에 성경이라고 말 할 수는 없지만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는 순종이라는 것입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모든 세워진 법규를 지키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더라도 온전한 상식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지켜야 할 도리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부모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는 경우도 생기더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부모가 자녀에게 도둑질을 하라고 시킨다면 과연 도둑질을 하는 것이 부모를 공경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도둑질을 하라는 그 말씀에는 따를 수 없다고 거절하는 것이 부모 공경입니까? 그래서 사회 정의를 말합니다. 

사회 질서를 깨뜨리는 부모의 명령이라면 그건 당연히 거절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건 우리 믿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 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기 주 안에서라는 말이 먼저 나옵니다. 주님의 뜻에 합당하도록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뜻에 합당하지 못한 부모님의 말씀이 있다고 할 때는 죄송스럽지만 그것은 아니라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교회 다니지 말라고 할 때 이는 결코 따를 수 없는 일이 아닙니까? 

당장은 부모의 말씀대로 따라 교회를 다니지 않는 것이 효도 같아도 그래서 우리가 멸망의 자식이 되고 만다면 과연 그것을 나중에 부모가 기뻐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에 보면 부자가 음부 그러니까 지옥 불 속에 들어가 뭐라고 합니까? “나사로를 보내어 세상에 있는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어 내 형제 다섯에게 증거하여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해 주소서” 라고 간청합니다.

이것은 무얼 말합니까? 지금 당장은 교회 다니지 말라 예수 믿지 말라고 하지만 그건 몰라서 그러는 것이지 나중 지옥에 가면 아버지 말을 거역하였더라고 예수 믿고 교회에 다닌 것이 오히려 잘 한 것임을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진짜 효도는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라의 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열심당원들과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어 묻습니다. 물론 그들은 예수를 올무에 빠지게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쳐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가이사는 로마 황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를 점령하고 있는 로마에다가 세금을 바쳐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하는 뜻입니다. 물론 바치라고 하면 원수의 나라에 붙어사는 매국노라고 할 것이요 바치지 말라고 하면 로마 통치를 반대하는 로마에 대항하는 자라고 고발할 참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동전 하나를 가져오라고 하시고는 이 동전에 그려져 있는 그림이 누구의 모습이냐 묻고는 가이사의 모습이라고 하니 “그렇다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하여 저들로 할 말이 없게 만듭니다. 이 말씀에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라고 하여 비록 지금 로마 통치하에 있다고 해도 그들의 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예수님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나중 로마의 박해를 받으면서도 바울 사도 역시 동일한 가르침을 전합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 그러므로 복종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진노 때문에 할 것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 할 것이라”고 로마서 13:1~5에서 말씀합니다. 이제 베드로 사도도 오늘의 본문에서 동일한 가르침으로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바울 사도나 베드로 사도가 한결같이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라의 권세자를 세우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먼저 바울 사도는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고 했고 베드로 사도 역시 “왕이나 혹 그가 다시 말해서 주님이 보낸 총독에게 순복하라”고 명령합니다. 주께서 보내셔서 왕으로 권세자로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민주주의 정치 제도를 통해 선거로서 지도자를 뽑습니다. 나라의 대통령과 더불어 국회의원을 뽑습니다. 도지사를 뽑고 도의원을 뽑습니다. 시장을 뽑고 시의원을 뽑고 거기에 더하여 교육감을 뽑습니다. 국가 지도자와 더불어 지방자치와 교육 자치를 위한 일꾼들을 우리가 다 우리 손으로 뽑았습니다. 하지만 결국 성경은 말합니다. 이 모든 권력자를 세우는 것이 사람의 손으로 하는 것 같아도 그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모든 주관자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권세자를 세우는 이유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을 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거니와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닙니다. 때로는 어떻게 나라의 위정자가 되어서 이럴 수가 있는가 하고 분개하기도 하고 이래서는 안 된다고 소위 시위를 벌이기도 하지만 성경은 결코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순복하라고 말합니다. 이 순복한다는 말은 헬라어로 휘포타소입니다. 우리 국어사전에서는 순복이란 ‘순순히 잘 복종하는 것’이라며 마치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무조건 굴복하고 복종하는 것으로 풀이하고 있지만 ‘휘포타소’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주종 관계가 아닙니다. 

대등한 두 사람 사이에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존경하는 것’ 또는 ‘양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여기 순복하라는 말은 국가의 권위를 존중하고 국가에 양보하며 그 권위 아래 있으라는 뜻입니다. 더군다나 베드로가 이런 권면을 할 때는 로마의 최대 폭군이라는 네로가 다스리던 시절입니다. 그러니까 어찌 보면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권면입니다. 하지만 권세를 주시는 분도 하나님, 폐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국가의 권력이 하나님을 대적할 때 내가 대적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건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리고 나라의 질서를 따라야 합니다. 

사실 민주주의라고 하는 것은 다수에 의한 대의 정치입니다. 물론 다수가 소수를 존중하며 다수의 뜻을 세워나가는 것이 민주주의의 밑거름입니다. 한데 우리는 모든 것을 떼거리 투쟁으로 몰아가려고 합니다. 대화와 타협이라고 하는 것은 애당초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내 뜻대로만 되어야 합니다. 안 되면 시위를 통해서 얻어내려고 하고 또 사실 시위를 하면 효과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아닙니다. 모두가 내 주장만 해서는 옛말처럼 사공이 많은 배가 산으로 가버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대화로 모든 것을 해결하면 좋겠죠. 하지만 대화를 하건 공청회를 하건 결국은 거기서 타협이 되지 않으면 다수결의 원리를 통해서 문제의 해결책을 찾아나가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인 것이요 그것이 만족치 못할 때 다음 민의가 그것을 심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그것이 없습니다. 다수의 힘으로 밀어붙인다고 하지만 반대로 소수의 극한 대결도 삼가야 합니다. 

사실 그래서 있는 것이 법입니다. 다른 말로는 질서입니다. 그런데 그 질서를 지키지 않고서야 무엇을 바로 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하지만 이건 남을 이야기할 것이 아닙니다. 나부터가 공공질서를 바로 지키고 있는지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를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권세에 복종하고 순복하는 이유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이 질서를 세우고 공동의 선을 추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대표자는 자신의 유익이 아닌 공동체의 유익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이고 이를 위해 우리 모두는 함께 질서를 지켜나가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요즘 심심치 않게 역주행 기사가 나옵니다. 얼마 전 외국의 고속도로 화면이 인터넷에 떴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제목을 아주 재미있게 붙였습니다. 제목인 즉슨 “김여사는 두 시간째 주차 중”이었습니다. 아니 무슨 주차를 두 시간씩 하고 있나 해서 봤더니 4차선 고속도로로 차들로 꽉 차 있습니다. 아마도 도로가 한참 막히는 시간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1차 선에 차 한 대가 거꾸로 달리고 있습니다. 앞으로 달리는 것이 아니라 뒤로 달리고 있는 사진입니다. 

아니 어떻게 앞으로가 아닌 뒤로 고속도로를 들어가게 됐는지 하여간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데 역주행이란 그렇게 뒤로 가는 것이 아니라 반대 차선으로 달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나라는 우측통행을 합니다. 그런데 무언가 착각을 해서 왼쪽으로 달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열이면 아홉 사고가 나겠죠. 그래서 질서가 필요한 것입니다. 질서란 모두에게 유익하도록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일부러 질서를 깨는 사람들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다 그런다고 해도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달라야 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순복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15절에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이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란 뜻이요 무식한 말이란 “알지 못하고 하는 말”이란 뜻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 믿는 사람들은 나그네와 같이 살아가지만 세상 사람들은 이 땅의 주인처럼 행세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 사람과 같은 모양을 하면서 그들처럼 살아가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돈 버는 것도 중요하고, 재산을 모으는 것에 관심도 많겠지만 사실 그런 것은 다 허무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돈을 좀 힘들게 벌고, 어떤 사람은 돈을 좀 쉽게 법니다. 우리 그런 것 가지고 하나님이 나를 축복하셨네 말았네 그렇게 말하지 맙시다. 어떤 사람은 건강하게 살고, 어떤 사람은 골골거리면서 살아갑니다. 우리 그런 것 가지고 하나님께서 나를 축복하셨네 말았네 말하지 맙시다. 만일 내가 돈이 있다고 “오 하나님의 영광이요.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돈을 이만큼 많이 벌었습니다”라고 말하면 나머지 그리스도인들은 뭡니까? 

물론 하나님이 내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셔야만 우리가 부해질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압니다. 하지만 불의의 재물로 부를 쌓는다면 그건 하나님이 결코 기뻐하시지 않는 것이요 이윽고는 다 불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고통밖에 더 있겠습니까?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는 늘 믿는 모든 성도들 위에 언제든지 떠나지 않고 항상 함께 있습니다. 
잠언 기자는 잠 30:7~9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부요하게 되면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하기 쉽습니다. 혹 가난하면 남의 것을 도적질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기 쉽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 살면서 우리가 마음에 늘 확신할 것은 이것입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는 빌 4:19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돈 벌기 위해 나서기 전에 눈을 감고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주님! 오늘 저의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오늘 나의 삶을 통하여 주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도록 도우시옵소서.”
그리고 세상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실패했습니다. 또 눈을 감고 기도하십시오.
“주님! 오늘 저는 주님 앞에서 실패한 모습밖에 보여드릴 수 없게 되어서 너무 죄송합니다. 이 못난 자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성령님 정말 저를 도와주십시오.”
이 인생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범사에 그분을 인정하고 모든 것을 그분께 맡기는 사람의 생애가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의 빛같이 하시리로다.”라고 시 37:3-6은 말씀합니다. 
이 하나님을 굳게 믿으십시오. 우리가 위정자에게 순복해야 하는 이유는, 다시 말해 그들을 존중해 주고, 그들에게 우리의 편리함을 양보해야 하는 것은 부정적인 의미로 말하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어리석은 말을 막으려는 것이요, 긍정적인 의미로 말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질서를 지킴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도록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 거룩한 백성 곧 성도요 보배로운 백성된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이맘아서입니다. 그래서 이를 가리켜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우리는 근본 죄인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구원받을만한 아무런 의도 없었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잘했다고 해도 그것은 오직 더러운 걸레와 같을 뿐이었다고 하나님 말씀합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대신 죽으셨습니다. 죄인인 나를 위해 아무 죄도 없으신 예수께서 죽으셨습니다. 의인이 죄인을 대신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나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더 이상 죄의 형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죄의 형벌과 죄책으로부터의 자유를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것은 없습니다. 
로마서는 계속해서 우리들에게 증거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백성이요 보배로운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들에게는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아보려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주 넘어집니다. 몰라서 넘어지기도 하고 알면서도 넘어지기도 합니다. 누구는 그런 나에게 대고 넘어졌다고 또 비난합니다. 그것도 상처입니다. 넘어진 나를 나 몰라라 하는 사람 때문에 또 상처가 되기도 하고 누구는 지나친 관심이 부담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습니다. 우리가 무얼 하건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의 자유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늘나라 백성이 되었고 우리 이마에 성령의 도장이 찍혔다고 해서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구원파에서 말하는 것처럼 이제는 무슨 죄를 지어도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럴 기회가 있어도 내 스스로 삼가야 될 필요가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할 필요도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데도 그렇지 못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연약해서 자주 시험에 빠집니다. 사람 때문에 마음에 상처가 되기도 하고 물질 때문에 상처가 되기도 합니다. 돈이 있는 사람은 있어서 문제가 되고 없는 사람은 또 없어서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아픈 사람은 아파서 문제고 건강한 사람은 혹시 내가 알지 못하는 병이 있지는 않나 해서 또한 염려합니다. 하지만 이런 것은 그래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은혜로 허락하신 것들이나 기회가 내 마음을 아프게 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구걸을 하며 살아가던 그에게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단 하루라도 한번 눈을 떠서 이 세상을 보았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기적과 같은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에게 오더니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자기 눈에 발라주더니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는 것입니다. 웬 더럽게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눈에 발라주었는지 그 이유는 모릅니다. 그리고 다른 말없이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합니다. 얼떨떨한 가운데 이 맹인은 먼 거리를 떠듬떠듬 거리며 걸어가서 씻었습니다. 

놀랍게도 눈이 떠집니다. 세상이 보이기를 시작합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있습니까? 그런데 누구도 그를 축하해 주는 것이 아니라 아주 죽이려고 덤벼듭니다. 그건 그날이 마침 안식일이라 유대인들은 안식일의 규례대로 따지면 눈에 붙어 있는 것을 물로 씻어내는 것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맹인이었다가 눈을 뜨게 된 그 사람은 결코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한 죄인이 되고 만 것입니다. 

아니 보지 못하던 사람이 눈을 떠서 보게 되었으면 그건 모두의 칭찬과 축하를 받을 일이지 그게 비난 받고 심지어는 돌에 맞아 죽을 일에 해당되느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이 그 맹인이었던 자를 출교처분하려고 합니다. 출교처분을 당하게 되면 돌에 맞아죽기 십상입니다. 스데반이 그렇게 돌에 맞아 죽은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이 눈을 뜨게 된 사람이 얼마나 당황이 됩니까? 차라리 눈을 뜨지 않았으면 그저 구걸을 할망정 죽을 위험은 없었을 텐데 지금 눈을 뜨고 보니 오히려 자칫 잘못하면 죽게 되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내 눈에 진흙을 발라 주며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씻었더니 보게 되었다. 그 사람이 누군가는 모르겠다고 할 뿐입니다. 

그래서 새옹지마라고 하지를 않습니까? 좋은 일 같은데 마음 상할 일이 생기고 마음 상하는 일인데 돌이켜 보니 오히려 좋은 일이 되는 그런 일이 얼마든지 우리들의 삶 속에는 공존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런 믿음이냐 하면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질서입니다. 먼저 뭇 사람을 공경해야 합니다. 형제를 사랑해야 됩니다. 그러기에 모든 사람의 필요를 따라 우리가 함께 협력도 하고 돕기도 해야 합니다. 

흩어 구제하여도 오히려 부하게 되는 일이 있다고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마중물의 원리가 많이 드린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내게 있는 것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이를 통해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부자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는 것을 보시고 뭐라고 하셨습니까? 당연히 부자는 많은 것을 드렸고 과부는 그 당시 화폐 단위로 가장 작은 렙돈 두개를 드렸을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부자보다도 이 가난한 과부가 더 많은 것을 드렸다고 칭찬하셨습니다. 그것은 부자는 자기의 가진 많은 것 중의 일부를 드렸지만 과부는 자기의 가진 모든 것을 드렸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보시는 것은 드려지는 양이 아닌 질과 정성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네게 있는 좋은 것으로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레위인을 돕는다는 것이 단지 물질로 돕는다는 뜻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자존감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함께 하며 격려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보다 귀한 것은 앞의 맹인이 실로암 못까지 간 순종입니다. 그 순종이 저의 눈을 뜨게 했습니다. 사실 그는 불평을 터뜨릴 수도 있었습니다. 아니 당신 누군데 왜 이러는 거요? 왜 내 눈에 진흙은 바르고 그래요? 

그리고 왜 그 먼 실로암 못까지 가서 씻으라는 거요?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왜 그래야 되는지 이유도 몰랐습니다. 어쨌든 눈에 진흙을 발라놓았으니 씻기는 해야 되겠지만 왜 하필이면 그 먼 실로암 못까지 가야하는지 그는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는 조용히 따랐습니다. 단지 무언가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을 뿐입니다. 결과 그는 그토록 소원하던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한데 그게 또 문제가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걸 호사다마라 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은 또 다른 열매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그건 바로 고난을 통한 복입니다. 고난이 없이는 내게 주어진 복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너무도 쉽게 잊어버립니다. 그게 인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연단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모든 기회를 통해 내 자유의사로 복된 길을 선택하시고 이왕이면 순종하시되 안 되면 복종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보물창고를 열으셔서 우리 삶에 필요한 모든 것들 건강과 평안과 기쁨과 모든 풍족함에 더불어 형통함과 번성함으로 채워주시는 귀한 역사가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권세자들을 세우셔서 그들로 하여금 나라의 질서를 이끌어가게 허락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교회의 직분자들을 세우셔서 하나님의 질서를 따라 허락하시는 모든 은혜를 누리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하나님의 질서를 따라 세운 하나님의 사람들의 말에 순복하게 될 때 우리가 마음으로만 간직하던 소원들이 이루어지는 귀한 역사도 보게 되고 은혜로 세우시는 귀한 역사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신명기는 하나님이 우리를 보배로운 백성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셨다고 말씀합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시기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순종함으로 보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순종하는 자에게 주실 복에 대해 신명기 28장을 통해 아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고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고 네 몸의 소생이 복을 받고 창고는 가득차고 어디로 갈지라도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아니하고 위에만 있고 아래 있지 않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두고 순종하고 순복함으로 이 모든 복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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