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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영혼의 목자에게로 (벧전 2: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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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내 영혼의 목자에게로
본문 - 베드로전서 2:18-25

남미의 전설적인 혁명가라고 불리는 체 게바라(Ernesto Guevara de la Serna, 1928-1967)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르헨티나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의과 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까지 그는 이른바 엘리트 코스를 걷던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나 대학 시절의 한 경험 때문에 의사로서의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혁명가로서 험난한 삶에 뛰어들게 됩니다. 대학시절 그는 친구와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8개월 동안 남미대륙을 동에서 서쪽으로 횡단하는 여행을 하던 중에, 미국과 유럽의 농장주들에게 박해와 착취를 당하고 있는 가난한 농민들을 목격하게 됩니다. 제국주의에 의해서 처참하게 착취와 유린을 당하는 가난한 농민들과 빈민들을 보면서 그는 빈민들을 위한 투쟁의 삶을 살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의대를 졸업한 후 아르헨티나를 떠나 쿠바로 건너가서 카스트로(Fidel Castro, 1926-)를 만나게 됩니다. 당시 쿠바는 1902년 에스파냐로부터 독립을 했지만, 미국 자본주의의 식민지가 되어 국민들은 극도로 궁핍한 삶을 살고 있었고, 미국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는 정권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부패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 부패에 빠진 독재정권을 몰아내기 위해서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손을 잡게 되고, 그 결과 1959년 부패한 독재정권을 몰아내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쿠바에서의 혁명에 성공한 그는 카스트로 아래서 쿠바의 권력 제2인자 자리까지 올라가지만, 카스트로와의 사상적 차이로 인해 쿠바를 떠나 당시 내전 중이던 아프리카의 콩고로 건너갑니다. 콩고에서 그는 콩고 혁명에 가담하다가 1년 후에 볼리비아로 들어가서 남미의 혁명을 꿈꾸게 됩니다. 그가 볼리비아로 간 것은 볼리비아가 남미의 5개 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기에 볼리비아에서 혁명이 성공하면 남미 전역에 그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볼리비아에서 게릴라전에 참여했다가 39살의 나이에 총상을 입고 포로가 된 후 사형을 당하고 맙니다. 

체 게바라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는 아주 극단적으로 달라집니다. 잔인하고 무능하며, 과대망상주의와 영웅주의에 빠진 몽상가라는 평가도 있는가 하면, 혁명을 이루기 위해 실천에 나선 영웅이라는 평가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는 자신의 신념과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싸웠다는 것입니다. 39살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면서 남미에 혁명을 통해 가난하고 학대받은 사람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이었음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체 게바라를 존경하고 위대한 역사적 인물로 평가합니다. 

무언가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자기의 소중의 생명을 헛되이 버리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희생한다는 것은 참으로 고귀한 것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잘못된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히면 헛된 희생을 하기도 합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자살폭탄테러입니다. 요즘 우리가 자주 듣는 탈레반에 의해서 자행되는 자살폭탄테러는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공포를 안겨주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신념을 이루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는 것은 어떤 일이 있어도 자행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것은 고귀한 일일지 모르지만,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다른 사람의 고귀한 생명을 해친다는 것은 결코 바른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정말로 고귀한 희생이 있다면 그건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명의 위험 속에서도 자신의 신앙과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모진 고난과 박해를 감내한다는 것 역시 귀한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우리를 위해 당신의 생명을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모진 고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때로는 목숨을 걸어야 했고, 때로는 평안하고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고, 때로는 햇빛도 들어오지 않는 지하 무덤에 숨어서 살아야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앙을 가졌다는 것 때문에 가정에서나 직장에서 차별대우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예수를 믿는다는 것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차별대우를 당하는 신앙인들에게 사도 베드로는 편지를 써서 그들을 위로합니다. 그게 베드로전후서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서 사도 베드로는 그렇게 고난당하고 박해받으면서도 꿋꿋하게 신앙생활하는 성도들을 격려하면서 “너희가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에게로 돌아왔다”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영혼의 목자에게로 돌아와 그 목자의 품에 안긴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8절에서는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서 바른 믿음을 따라 살아야 한다고 가르쳐줍니다. ‘사환들’이라는 말은 남의 아래서 일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사회적으로 신분이 천한 종과는 다릅니다. 사환은 그 가족의 일원처럼 그 가정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종은 주인의 말 한마디에 토를 달거나 자기의 생각을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그저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합니다. 주인이 죽으라고 하면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고, 실제로 죽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환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 의견을 말할 수 있습니다. 힘들면 힘들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라.” 여기서 ‘두려워한다’는 말은 존경심을 가지고 경외하는 마음을 뜻합니다. 이 말은 주로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할 때 쓰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의 의미는 분명해집니다. 신앙인으로서 남의 수하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주인을 하나님을 섬기듯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듯이 자기가 섬기는 주인을 그렇게 두려워하고 경외해야 합니다. 
  
물론 좋은 주인을 만나면 그런 마음을 갖는다는 것이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주인의 성격이 고약할 때입니다. 성격이 고약하고, 심지어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차별대우하고 박해를 한다 하더라도 그 주인을 하나님을 대하듯 그렇게 해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럴지라도 주인에게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주인의 성격이나 주인이 나를 어떻게 대하든지, 그것에 관계없이 사환들은 주인을 하나님 섬기듯 섬겨야 합니다. 그게 신앙인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18절에서 말씀합니다.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나에게 잘해주고 마음씨 착한 주인에게만 순종하고 하나님 대하듯 하는 것이 아니라 ‘까다로운 주인’에게도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까다롭다’는 말은 마음이 뒤틀려 있다는 뜻입니다. 성품이 온순하지 않고 괴팍할 뿐만 아니라, 마음이 수시로 변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아침에는 이렇게 하라고 해놓고, 저녁때에는 다른 말을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 주인일지라도 그것을 불평이나 불순종의 변명거리로 삼지 말고 순종하고 존경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참 쉽지 않는 말씀입니다. 인격적으로 훌륭하고 존경할만한 사람을 존경한다는 것이야 괜찮지만, 인격이 별로인 사람을 존경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나를 부려먹는 주인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훌륭한 인격을 가진 주인이더라도 때대로 나를 힘들게 하거나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불평하게 됩니다. 그런데 인격적인 결함이 있고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까지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듯 두려워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말씀은 너무 힘든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그러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정말 힘든 문제인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19절에서 말씀합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아름답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인격이나 성품으로는 괴팍한 주인을 존경하거나 나를 힘들게 하는 주인을 하나님 섬기듯 섬기는 것이 아주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는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21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으신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를 본받음으로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어 22-24절에서 말씀한 것처럼, 우리 주님은 죄를 짓지 않으셨음에도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거짓을 말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욕을 당하셨고, 심지어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욕을 당하실 때에도 죄없는 자신에게 욕을 하는 사람들에게 욕하지 않으셨습니다. 무고히 고난을 당하셨으면서도 항변하거나 위협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묵묵히 고난을 당하기만 하셨습니다. 그 주님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닮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주님을 생각하며 그 주님을 마음에 묵상하면서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려 한다면, 우리 힘으로는 할 수 없지만 주님께서 주신 힘과 주님께서 주신 주님의 마음으로 조금이나마 주님을 닮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몰랐을 때에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세상의 사고나 세상의 삶의 방식으로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의 사고에 지배를 받고 세상의 삶의 방식을 따라가는 옛사람이 아닙니다. 이제는 우리의 목자이신 주님께로 돌아온 사람들입니다. 이제는 고난을 묵묵히 참으시고, 욕을 당하셨음에도 맞대어 욕하지 않으신 주님 품으로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무엇이 참된 삶의 방법이고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인지를 모르던 길을 잃어버린 양과 같았을 때에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길을 잃어버린 양처럼 무엇이 참된 것인지 모른 채 살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방법도 몰랐습니다. 그저 내 마음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 감정이 이끄는 대로만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아닙니다. 우리의 존재양식이 달라졌습니다. 우리가 살아야 할 방법이 분명해졌습니다.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이 분명해졌습니다. 우리 영혼의 목자이신 주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우리 영혼의 목자이신 주님의 자취를 따라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포악한 주인일지라도 존경하고, 성품이 괴팍한 주인에게도 순종하며 살라고 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나그네가 되어 흩어져 살아가고 있는 신앙인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1절에 “흩어진 나그네”에게 편지를 쓴다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신앙의 박해를 피해 소아시아 여러 지역을 떠돌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오직 하늘에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가 있음을 믿고 이 땅에서는 나그네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을 소망하며 산다 하더라도 오늘 우리의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떠돌이 생활을 한다 하더라도 오늘 당장 끼니를 때워야 합니다. 저녁이 되면 어딘가에 들어가서 잠을 청해야 합니다. 그런데 신앙의 박해를 피해서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는 그들을 반갑게 맞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신앙의 박해를 피해 다니느라고 얼마나 힘드냐고 격려해 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들을 안쓰럽게 바라보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끼니가 되었다고 밥을 먹여주고, 저녁이 되었다고 잠자리를 제공해 주는 사람이 있을 리 만무합니다. 

그런데 그나마 떠돌이 생활을 하는 그들을 받아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작은 긍휼로 그들을 불쌍히 여겨 일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고, 먹여주고 재워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오늘 본문 18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주인들”입니다. 비록 성격은 괴팍하고, 떠돌이들이라고 제대로 대우를 해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나마 자신들을 받아주고 일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준 고마운 분들입니다. 
  
내 입장에서만 생각하지 말고 나를 받아준 주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떠돌이들을 받아주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나몰라라 해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주인들이 나그네인 그들을 받아주었습니다. 그러면 고맙기 그지없는 사람들입니다. 그걸 생각해서라도 주인을 존경하라는 것입니다. 비록 성격이 괴팍한 주인일지라도 나를 인도하여 그 주인을 만나게 하신 분은 우리 영혼의 목자이신 주님입니다. 우리 영혼의 목자이신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길을 잃어버린 채 헤매도록 방치하지 않으시고 지금 현실의 삶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왜 나는 그렇게 괴팍한 주인을 만나 이렇게 고생해야 하는지, 왜 우리 주인은 나에게 부당한 대우를 하는지’ 불평만 늘어놓습니다. 어쩌면 그 불평은 우리를 그렇게나마 인도하신 우리 영혼의 목자이신 주님을 향한 불평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삶의 환경과 상황에 만족하십니까? 아마도 100% 만족하며 사는 분들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보다 좀 더 나은 환경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지금보다 조금 더 물질적으로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내 남편이나 아내가 조금 더 상냥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우리 자식들이 좀 더 공부를 열심히 했으면 좋겠고, 부모의 속을 덜 썩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내 주변의 사람들이 좀 더 친절하고 인격적으로 좋은 사람들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공부하는 학생들은 내 IQ가 좀 더 높아서 단어도 잘 외워지고 수학 문제도 좀 더 잘 풀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지금보다 좀 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가지고 싶은 것 마음껏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내게 주어진 삶의 여건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선의 것임을 고백하며 사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만큼 갖지 못했다고 짜증을 내고, 내가 바라는 대로 잘 풀리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유익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짜증낼수록 나만 더 힘들어지고, 불평할수록 행복은 내게서 멀어질 뿐입니다. 
  
우리 영혼의 목자이신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최선의 것을 주십니다. “우리 영혼의 목자”라는 말은 내 영혼에 지금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가장 잘 아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신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새벽의 여신인 에오스(Eos)에게는 티토노스(Tithonos)라는 연인이 있었습니다. 둘은 서로 깊이 사랑해서 에티오피아로 가서 자식을 낳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티토노스가 죽을 운명을 갖고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에오스는 제우스신에게로 가서 ‘티토노스를 영원히 죽지 않게 해 달라’고 간청을 합니다. 

제우스는 에노스의 간청을 허락합니다. 그래서 티토노스는 영원히 죽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에오스는 자신의 간청이 얼마나 큰 비극을 낳게 되는지 곧 깨닫게 됩니다. 그는 티토노스를 영원히 죽지 않게 해 달라고 간청했지만, 늙지 않게 해 달라는 간청을 빼먹은 것입니다. 그래서 티토노스는 계속 늙어갑니다. 늙어 얼굴이 쪼글쪼글해지고 허리가 굽고 키가 작아지면서 힘도 약해지지만 죽지는 않습니다. 병이 들어 고통스럽기에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습니다. 늙어가지만 죽지 못한다는 것, 병들고 아파도 죽지 못한다는 것 - 얼마나 큰 고통이요 비극입니까? 그러다가 결국 티토노스는 매미가 되고 말았다고 합니다.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것, 얼마나 큰 복인지 모릅니다. 어쩌면 모든 사람의 간절한 바램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마저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이 그리스 신화는 우리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은 존재인지를 말해 줍니다.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우리의 욕심만을 위해 간청한 것이 오히려 우리 인간 스스로를 비극으로 몰고 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때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대로 이루어주지 않으신다고 불평할 것 없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때로는 ‘티토노스를 죽지 않게 해 달라’는 에오스의 기도와 같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잘 아는 것 같지만, 사실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가장 잘 아시는 분은 우리 영혼의 목자이신 예수님입니다.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가장 잘 아시고 우리에게 필요를 따라 적절한 것들로 채우시는 분 역시 우리 영혼의 목자이신 예수님입니다.

때로 우리는 사람들로 인해 상처를 받고 고난을 받게 됩니다. 내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부당하게 대우를 받기도 합니다. 직장의 상사에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신앙으로 살려 한다는 것 때문에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도 있고, 때로는 아무 이유 없이 멸시를 받을 때도 있습니다. 교회에 다닌다는 것 때문에 사람들에게 놀림거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금까지 우리는 어떻게 했습니까? ‘언젠가는 꼭 갚아 주리라’고 다짐하면서 이를 갈고 계십니까? 속으로 저주하면서 울분을 삼키셨습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세상 사람들이 사는 방법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 영혼의 목자이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본받고, 예수님의 삶의 자취를 따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죄를 멀리하고 우리의 입술에서 거짓을 없애야 합니다. 그리고 부당하게 고난을 받고 부당하게 대우를 받는다 하더라도 그들을 미워해서는 안 됩니다. 욕을 당하시면서도 맞서서 욕하지 않으신 주님, 고난을 받으셨지만 위협하지 않으신 주님을 닮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영혼의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에 가장 아름다운 것들로 채우시고 우리의 발걸음을 가장 아름다운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고딩 파바로티’라는 이름으로 모 방송국 ‘스타킹’에 출연했던 김호중이라는 사람을 아십니까? 그의 노래를 잠시 들려드리겠습니다.
  
그는 지난 2009년 고등학교 3학년 학생으로 스타킹이라는 프로그램에 참가해서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습니다. 성악을 공부한 지 불과 1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성악가 김동규 교수가 “학생으로서는 믿기 어려울 만큼 놀라운 실력을 갖추었다. 18세에 저런 노래를 하는 사람은 아마도 전 세계에 없을 것”이라고 극찬할 정도로 성악가 못지않는 폭발적인 가창력을 뽑냈습니다. 그리고 그해 그는 ‘대통령 인재상’을 수상하게 되었고, 지난해에는 한양대 음대 성악과에 합격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노래 부르는 동영상을 본 독일의 한 음악원(독일 베를린 소재 RUTC 아카데미)에서 그를 정식으로 초청해서 음악을 체계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어 지금은 독일에서 유학하고 있습니다.
  
이 김호중이란 청년이 더욱 세간에 관심을 받게 된 것은 그의 노래 실력 뒤에 감추어진 가슴 아픈 사연 때문입니다. 그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그의 부모는 아이를 버려두고 집을 나가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할머니 아래서 할머니와 단 둘이 살아야 했습니다. 사춘기를 지내면서 그는 문제아가 되고 말았습니다. 온 몸에 문신을 새기고 나쁜 짓만 골라했습니다. 그런데 2007년 유일한 가족이었던 할머니가 대장암으로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하늘에서 지켜볼테니 똑바로 살아야 한다”는 유언을 남기셨고, 그 말을 가슴에 새긴 그는 마음을 다잡고 공부를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그동안 숨겨졌던 음악적 재능을 발견하고 스타킹에 출연하게 된 것입니다. 
  
그의 어린 시절은 누구보다도 암울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뒷골목 방황의 자리에 방치하지 않으셨습니다. 할머니의 신앙을 통해서 그는 마음을 가다듬게 되었고, 지금은 누구보다도 자신의 재능에 걸맞는 길을 걷고 있습니다. 우리 영혼의 목자이신 주님께서 그를 그렇게 인도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김호중이라는 청년만 하나님께서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김호중의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를 가장 아름다운 길로 인도하신 예수님은 우리 영혼의 목자이십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 영혼의 목자에게로 돌아와 그의 품에 있습니다. 우리 영혼의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가장 아름다운 길로 인도하시고, 우리의 삶에 가장 복된 것들로 채워주십니다. 그 주님을 마음에 품고 우리 영혼의 목자이신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가십시다. 대로 고난의 길일지라도, 때로 억울한 일을 당할지라도 때로 부당하게 대우를 받을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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