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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늘문을 여는 사람 (왕상 18:3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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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문을 여는 사람 (왕상 18:36-46)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엘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그들 중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지라 엘리야가 그들을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 엘리야가 아합에게 이르되 올라가서 먹고 마시소서 큰 비 소리가 있나이다 아합이 먹고 마시러 올라가니라 엘리야가 갈멜 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그의 사환에게 이르되 올라가 바다쪽을 바라보라 그가 올라가 바라보고 말하되 아무것도 없나이다 이르되 일곱 번까지 다시 가라 일곱 번째 이르러서는 그가 말하되 바다에서 사람의 손 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나이다 이르되 올라가 아합에게 말하기를 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소서 하라 하니라 조금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해지며 큰 비가 내리는지라 아합이 마차를 타고 이스르엘로 가니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그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찾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당신의 말씀과 약속을 온전히 의지하는 우리의 마음 자세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임과 동시에 인간의 일이요 의무입니다.

불행하게도 타락한 인간에겐 본래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뚜렷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믿음은 부흥되어야 합니다. 특히 나태하고 타락한 신앙은 부흥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관심을 끌 수 없습니다.

신앙의 부흥(Revival of the Faith)은 먼저 교회 안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부흥은 그리스도인들, 특히 퇴보된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먼저 일어나야 합니다.

호 10:12=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부흥은 묵은 땅과 같은 우리의 마음 밭을 기경하는 것입니다. 묵은 땅은 한 때 경작되던 땅이었으나 지금은 폐허 상태로 되어 있는 땅입니다. 이 묵은 땅은 다시 기경(起耕)되어야 씨를 뿌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흥은 믿는 자들의 마음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깨뜨려진 마음 밭이 아니고는 말씀의 씨를 받아들일 수 없고, 따라서 열매도 맺힐 수 없습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가장 화급한 필요는 신앙의 부흥입니다. 숫자적으로는 1,200만을 헤아린다고 하나 세상으로부터 그 존재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오늘의 조국 교회에 신앙의 부흥만큼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없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열고 하나님의 능력을 부어주시도록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능력이 절실히 필요한 때입니다. 우리나라를 둘러싼 국제정세는 한치 앞을 보기 어렵습니다. 특히 최근 천안함 침몰 사건으로 급격히 냉각되고 있는 남북한의 관계, 이를 둘러싼 열방의 움직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라를 어지럽히고 있는 친북좌파들의 준동 등등.

그 뿐입니까? 세상의 가치관은 물질 중심, 쾌락 중심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포스트 모던의 이 시대는 과학만능의 시대요, 절대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시대입니다.

사람의 가치와 존재 이유를 회의(懷疑)케 할 정도로 인류의 윤리와 도덕의 수준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사람 사람간의 몰이해와 불신, 집단 집단간의 이기주의적인 싸움, 국가와 국가 간의 피를 말리는 정치·군사·경제의 경쟁, 그리고 줄어지기보다 오히려 갈수록 벌어져만 가는 빈부의 차이-- 가히 인류의 위기요 세상의 세기말적 현상입니다.

이 시대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 주셔야만 하는 때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으로 하나님 되시게 해 드려야 할 때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만천하에 드러내어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언제, 어떤 환경에서 자신의 전능하신 능력과 위엄을 나타내십니까? 다른 말로 하면, 진정한 부흥은 언제 어떻게 오는 것입니까?

오늘의 주제는 ‘하나님의 능력의 나타남’ 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선지자 엘리야 시대에 임하셨던 하나님의 능력의 사건들을 통하여 그분의 위대하심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갖기 원합니다. 왕상 18장 전체를 읽으면서 하나님의 능력에 사로잡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하여 하늘 문을 열어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하늘로서 불을 내려 제단을 태우셨고 비를 내려 온 땅의 기갈(飢渴)을 푸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엘리야가 어떻게 하늘 문을 열어 하나님의 능력을 끄집어내렸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이 시대 교회가 부흥을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늘 문을 열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엘리야가 하늘 문을 열고 불과 비를 내리게 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을 높이는 간절한 기도를 드림 (=믿음의 기도)

36절=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본절은 저 유명한 갈멜산 전투의 이야기 중 선지자 엘리야의 기도 장면입니다. 그의 기도는 하나님을 높이는 간절한 기도였고, 하나님은 기도의 응답으로 하늘 문을 열고 불을 내리셨습니다. 엘리야는 믿음의 기도로 하늘 문을 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믿음의 기도는 하늘 문이 열리게 합니다. 왕상 18장을 보십시오. 믿음의 기도를 가슴에 품은 선지자 엘리야의 영웅적인 활약상은 우리의 심장 맥박을 뛰게 합니다. 선지자는 모든 장면에서 주도권을 잡고 국면을 리드하고 있습니다.

바알 선지자들로 하여금 먼저 송아지를 잡고 바알의 이름을 불러 불로 응답하는 모습을 보이라고 요구합니다. 여기서 엘리야가 비 대신 불을 선택한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입니다. 3년 반 동안이나 날씨는 뜨거웠고 건조했습니다. 그런데 누가 불을 원하겠습니까? 오히려 비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의도는 복을 받기 전에 반드시 희생이 있어야 한다는 위대한 신학을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희생을 만나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께 용납되며 그의 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비의 복이 있기 전에 반드시 대속(代贖)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 선지자의 믿음의 행동 속에 자신의 속성과 능력을 보이고 계십니다.

바알 선지자들은 송아지를 잡은 제단 주위에서 종일토록 바알의 이름을 부르며 야단법석을 떨었으나 아무 효험이 없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의 조롱이 흥미롭습니다. 

27절=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여 이르되 큰 소리로 부르라 그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은 그가 잠깐 나갔는지 혹은 그가 길을 행하는지 혹은 그가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바알은 아무 것도 아니다. 바알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으며, 하나님만이 살아계신 분이시다’. 엘리야는 누구보다 이 믿음이 확실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하여 자신의 목숨보다 더 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하여 참으로 자신만만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종들의 믿음의 행위를 통하여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나타내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엘리야 차례입니다. 돌들로 제단을 쌓고 도랑을 파고 거기에 물을 부었습니다. 세 번씩 물을 붓게하여 물이 단으로 두루 흐르게 했습니다. 선지자가 이렇게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물론 하나님의 능력을 극대화하기 위함이지요. 

여러분, 혹시 누군가가 엘리야가 기도하는 중간에 자연 발화(發火)가 생길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지 않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칼을 들고 날뛰면서 춤을 추는데, 누군가의 칼이 바위에 부딪혀 불꽃이 튀고, 바람이 불어서 불이 붙게 되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상상은 이것으로 끝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엘리야의 기도문을 읽겠습니다.

36절=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여러분! 사실 엘리야는 전에 이런 일을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정말 그렇게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습니다. 아마 그는, “주여, 제가 아무도 없는 곳에서 한 번 시험해 보고 백성들 앞에 나서겠습니다” 라고 말했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확신했습니다. 그에게 있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맺어주신 바로 그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은 씨와 땅의 약속을 아브라함과 자손들에게 주셨고, 약속대로 후손들이 가나안 땅을 상속하여 지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복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이 하나님에 대해 너무나 분명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 수년 동안 계속 하나님께 기도해 왔고, 하나님을 만나 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간단히 기도합니다. 히브리어로 육십 단어도 안 되는 짧은 기도입니다. 
“오 주여, 다시 그 일을 행하소서.” 이것이 핵심입니다.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오늘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하옵소서.”

37절=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엘리야는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인정받거나 영광을 받으려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 시대의 백성들이 오직 여호와만이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려고 기도한 것입니다. 그의 기도는 하나님을 감동시켰고, 하나님은 즉시 하늘 문을 여시고 신속히 불을 내려 제단의 모든 것들을 태우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기도는 믿음의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높이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기도입니까? 
여러분은 기도로 하늘 문을 열어본 경험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기도로 인해 ‘하늘로서 불이 떨어진’ 간증이 있습니까? 
우리도 엘리야처럼 하나님을 높이는 간절한 기도의 사람이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교회를 부흥시키는 주역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비를 기대하며 간절한 기도를 드림 (=축복 기대, 인내의 기도)

42-43절= “엘리야가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그의 사환에게 이르되 올라가 바다쪽을 바라보라...”

엘리야는 간절한 믿음의 기도로 하늘 문을 열었습니다. 하늘로부터 불이 떨어져 제단을 태웠고, 따라서 갈멜산 전투에서 엘리야는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3년 반 동안이나 비를 기다려온 그 땅에 비를 주실 차례입니다. 그렇지만 가뭄 종결을 위해 누군가가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했습니다. 선지자 엘리야가 바로 그 ‘누구’였습니다. 그는 비를 기대하며 간절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의 기도는 축복을 기대하며 드리는 인내의 기도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응답을 기대하지 않는 기도, 간절한 마음이 없이 형식적으로 드리는 기도는 하늘 문을 열 수 없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고 기도의 응답을 믿었습니다. 그의 기도는 비를 기대하며 드린 간절한 인내의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성도의 인내와 비례하는 것입니다.

온 나라는 비를 필요로 하고 있는데도 아합 왕은 먹고 마시러 올라갔습니다(42절). 반면에 하나님의 선지자는 기도하기 위하여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었습니다(42절).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열망하며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선지자는 하인을 보냅니다. “올라가 바다쪽을 바라보라”(43절). 이것은 선지자가 비가 내릴 것을 기대하며 기도했음을 보여줍니다. 

“그가 올라가 바라보고 말하되 아무것도 없나이다. 이르되 일곱 번까지 다시 가라”(43절).

일곱은 완전수입니다. 그러므로 엘리야가 사환에게 일곱 번까지 확인하라고 한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이 하신 약속(1절)을 이루실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기다리라는 의미입니다. 

신약의 야고보서 기자는 본절과 관련하여 선지자의 간절한 기도를 이렇게 요약합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약 5:17,1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비를 기대하며 간절한 기도를 올린 엘리야는 하늘 문을 연 용사가 되었습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비가 내렸고, 비는 온 땅의 생물들을 소성케 했습니다. 

기억합시다. 비록 엘리야가 갈멜산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바알 선지자들을 제거했지만, 하나님은 엘리야의 기도에 즉시로 비를 주시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가 여섯 번이나 기도할 때까지 침묵하셨고 일곱 번째의 기도가 있은 후에야 비로소 비를 내리시겠다는 징조를 보여주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무리 하나님의 약속이 확실하다 할지라도 이를 구체적인 사실로 성취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편에서도 이를 위한 진지한 노력과 실천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하며 인내하며 기도하는 사람입니까? 
여러분의 기도가 하늘 문을 열어본 적은 언제입니까? 불을 내리시던 주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생명의 비도 내려주십니다. 
우리도 엘리야처럼 인내의 기도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교회를 부흥시키는 주역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 작은 구름을 보고 응답을 확신함 (=부흥의 징조에 민감, 실천)

44절= “일곱 번째 이르러서는 그가 말하되, (보라!) 바다에서 사람의 손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나이다 이르되 올라가 아합에게 말하기를 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소서 하라”

본절에는 여섯 번의 확인 실패 끝에 일곱 번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무엇인가를 발견한 사환의 흥분된 상태를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바다에서 사람의 손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나이다.”

사환이 본 것은 ‘손바닥처럼 작은 구름’에 불과했습니다. 보통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었지만 엘리야 선지자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작은 표적만으로도 하나님의 축복을 확신하는 선지자는 믿음의 반석 위에 굳건히 섰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작게 시작하셔서 큰 일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사람의 손만한 작은 구름이라 했습니다. 번개와 천둥이 치는 무시무시한 먹구름이 아니라 이제 겨우 사람 손바닥만한 작은 구름이 솟아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한편 생각하면 일곱 번의 거듭된 인내의 기도 응답치고는 실망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작은 구름은 삼년 반이나 계속된 가뭄을 해갈하는 데 어떤 도움도 될 수 없을 것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를 보는 선지자 엘리야의 자세는 달랐습니다. 선지자는 작은 구름을 보고서도 응답을 확신했습니다. 그는 부흥의 징조에 민감했고 믿음으로 실천했습니다. “올라가 아합에게 말하기를 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소서 하라.”

참으로 하나님의 선지자다운 위대한 믿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45절을 보면 잠시 후 과연 그의 말처럼 하늘이 캄캄해지고 천둥과 번개 속에 폭우가 쏟아져 메마른 땅을 완전히 적셨습니다. 할렐루야!
어느 시골교회가 교회당을 지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끝냈는데 마루를 놓을 돈이 없었습니다. 목사님은 성도들과 의논했지만 별 도리가 없었습니다. 수요밤 예배 설교를 준비하고 있는데 목사님의 마음에 “오늘 헌금하는 시간을 가지라” 는 성령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목사님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예배 시간이 되었어도 목사님은 헌금에 관한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설교 도중에 말이 나오질 않았습니다.
목사님은 회개하는 마음으로 헌금시간을 갖겠다고 하였습니다. 혀는 곧 풀렸고, 성도들은 헌금시간을 가졌습니다. 예배후 헌금을 계산하려고 헌금 주머니를 보니 그곳에는 수표가 하나 있었습니다. 마루를 놓을 돈이 25만원이었는데 수표 한장에 27만 5천원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수표는 목사님이 자기 아들에게 등록금으로 준 수표였습니다.

그날 목사님의 아들은 마음에 감동을 받아 등록금으로 받은 것을 하나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그 아들은 그 해에 대학을 들어갈 수 없었으나 다음 해에는 한국의 최고대학에 개교 이래 최고의 수석을 하였고, 지금은 미국에서 물리학 박사가 되었습니다. 그 목사님도 그 아들도 작은 신호에 민감하였고 이를 실천했습니다.

여러분은 부흥의 징조를 보고 있습니까? 많은 경우 그 징조는 ‘손바닥처럼 작은 구름’ 인 경우가 드물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음 속에 스쳐가는 한 가닥 생각일 수도 있고, 예배의 말씀을 통해 주시는 감동의 메시지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주위의 사람이 전해주는 대수롭지 않은 권면의 말일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시작은 작게 하시나 반드시 약속하신대로 큰 일을 성취하는 분이십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부흥의 징조로, 은혜를 주시는 주님의 손길로 인식하십니까? 여러분은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신 증거를 갖고 계십니까?


[나오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선지자 엘리야는 하늘 문을 열어 하나님의 축복을 땅으로 가져온 사람입니다. 그의 기도는 하나님을 높이는 간절한 믿음의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하늘로부터 불을 보내셨습니다.
엘리야는 축복을 기대하며 인내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하늘로부터 단비를 내리셨습니다. 

지금은 성령께서 교회에 임재하시며 우리 모두를 하늘 문을 여는 사람으로 부르시는 성령의 시대입니다. 
하늘 문을 여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여러분의 기도가 믿음의 기도, 인내의 기도가 되게 하십시오.
부흥의 징조를 찾으십시오. 그것이 작은 손바닥만한 것이라도 좋습니다.
믿고 실천하십시오. 거기에 불을 붙이십시오. 
우리 교회가 하늘 문을 여는 성도들로 인해 부흥의 불길로 타오르게 되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하늘 문을 여는 기도자들로 인해 생명이 소생하는 푸른 초장이 되기 바랍니다. 

(대구서현교회.박순오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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