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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 믿음 더욱 굳세라! (시 6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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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믿음 더욱 굳세라! (시 62:1-12)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이 없는 이 세대를 향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믿어야 할지니라."  오늘 하나님의 집에 오신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으로 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실한 믿음으로 말씀 앞에 서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상황, 어떤 일을 만나도 오직 믿음으로 사십시오.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의 위로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는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가 형통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누가 뭐라고 해도 믿음의 사람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어쩌다가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믿음의 사람은 때마다 일마다, 모든 사건들 속에서 믿음으로 바라보고, 믿음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은 박물관 속에 진열된 쓸모 없는 죽은 믿음이 아니라 우리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역사하는 살아 있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역사는 오늘도 계속되어져야 합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말은 아직 이 땅 위에 증거 되지 않은 것을 증거 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새로운 미래를 바라보면서 모든 불평과 원망으로부터 자유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환경이든 사람이든 재물이든 모든 불평과 원망으로부터 자유하셔야 합니다.  그 자유는 남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능력을 붙들고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고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초자연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곳에는 언제나 기사와 이적과 능력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못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이 하실 수 있도록 믿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문제는 없습니다.  문제를 보는 방식이 문제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믿음을 확인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어떤 기사와 이적을 베풀기 전에 "네가 이것을 믿느냐?" 고 하십니다.  어떤 사람을 뜨겁게 사랑하기 전에 "네가 정말 그것을 믿느냐?" 고 하십니다.  어떤 사람의 장래를 인도하기 전에 한 가지를 확인하십니다.  "너 정말 그것을 믿느냐?  그리고 나를 정말 믿느냐?"  하나님은 이 확인 작업에 성공한 사람을 통해서만 이적과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에 앉았다만 가지 마시고 여러분의 영혼 깊은 곳에서 불같은 믿음이 일어나시기를 바랍니다.  "주여, 저 강단에서 선포되어지는 믿음의 말씀을 내가 믿습니다.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의 간증을 내가 믿습니다.  저 사람들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의 인도를 믿습니다.  내게도 믿음의 역사를 일으켜 주시옵소서."  이런 뜨거운 고백과 믿음을 가지고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봉독한 시편은 다윗의 생애 중에서 가장 어려웠던 때인 그의 아들 압살롬에 의해서 친히 반란을 경험하며 도망 다니던 시절에 쓰여졌던 시편입니다.  그의 인생이 캄캄한 어두운 밤이었을 때 오직 믿음으로 헤쳐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가장 어려웠던 시절에 붙잡았던 믿음이라는 것은 그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겠습니까?
폭풍우가 계속되는 인생의 여정에서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오늘 우리는 다윗의 믿음을 통해서 힘들고 어두운 폭풍의 시대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믿음을 갖고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 믿음의 의미를 한번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러면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만 구원의 소망을 갖고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보십시오.  내가 낳은 아들조차 나에게 등을 돌린 세상입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했던 아들 압살롬, 그 아들마저 나에게 등을 돌린 세상, 이런 세상에서 다윗은 누구를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누구에게 자기의 구원을 호소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본문의 1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계속해서 2절을 보면, "오직 그만"  누구를 가리킵니까?  하나님을 말합니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그리고 5절을 보면, 그는 이렇게 찬양합니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본문을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어떤 단어가 강조되어있습니까?  하나님 만!  그냥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 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히브리어 성경으로 이 부분을 보면 그것이 히브리어로는 "악카! 악카!"라고 하는 아주 독특한 발성을 가진 단어인데, 이 짤막한 여섯 절에 다섯 번이나 이 단어가 강조됩니다.

솔직히 우리는 많은 경우에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또 다른 대상을 찾고 있습니다.  하나님도 믿고 돈도 믿습니다.  하나님도 믿고 다른 사람들도 믿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어쩌면 양다리 걸치기 작전을 하면서 인생을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성도가 밤에 산길을 걷다가 그만 잘못해서 절벽으로 떨어졌습니다.  그가 절벽에서 떨어지다가 다행히 나뭇가지를 붙잡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갈수록 지금 힘이 자꾸 쳐지니까 나뭇가지를 붙잡고 소리를 칩니다.
"누구 없어요?  살려주세요.  누구 없어요?"
그런데 작은 소리가 들리더랍니다.
"나 여기 있다."
"누구세요?"
"나는 네가 믿고 있는 하나님이다."
"그러세요.  하나님, 어서 저를 살려주세요!"
"그래? 그러면 염려 말고 손을 놓아라!  내가 구원하마.  손을 놓아라!"
그러니까 이 사람이 한참 있다가 이렇게 외치는 겁니다.
"하나님 말고, 누구 다른 분 없어요?"
그런데 너무 힘이 빠지니까 어쩔 수 없이 나뭇가지를 놓게 되었는데 보니까 한 뼘도 되지 않는 곳이 땅 바닥이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솔직히 우리가 인생을 이런 식으로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가 바로 이런 식이 아니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바알도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결단을 요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사랑하는 여러분, 참된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참된 믿음이란 이 세상에서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나의 믿음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 오직 하나님만! 하나님만이 내가 섬길 분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옛날 중세기의 수도사들이 늘 강조했던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사랑할 대상이지만 신뢰할 대상은 아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사랑할 대상이지만 신뢰할 대상은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끊임없이 사랑하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그렇지만 사람은 믿을 대상은 아닙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만, 오직 하나님만이 정말 믿을 수 있는 신뢰의 대상이십니다.

때로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으로 하여금 이 진리를 깨우쳐 주시기 위해서 우리가 붙들고 있는 거짓된 믿음의 근거를 흔들어 놓으실 때가 있습니다.  믿었던 사람이 나를 배신합니다.  믿었던 은행이 나를 배신합니다.  믿었던 주식이 나를 배신합니다.  믿었던 회사가 나를 배신합니다.  그때야말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만!  하나님만 신뢰하여야 합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구원, 우리가 영원히 하나님과 더불어 천국의 삶을 누리게 되는 영원한 구원도 그 구원의 근거가 내가 될 수가 없습니다.  내가 행하는 가장 좋은 일도, 거룩한 일도 따지고 보면 거기에는 잘못된 동기들이 섞여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어떤 행위도 나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나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 날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와 그분을 믿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만!" 믿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끊임없이 폭풍우를 경험합니다.  우리는 그때마다 우리가 얻은 구원을 또 새롭게 경험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의 고난, 오늘의 폭풍우 속에서도 나를 도우시고 붙드시는 하나님의 구원케 하심을 경험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시편 기자는 비록 지금 자기의 주변의 삶이 요동치고 있지만 그가 정말로 하나님만을 신뢰했을 때 그는 잠잠히 살아간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잠잠히'라는 말은 흔들림이 없는 고요한 침묵을 말합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요동하는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할 때 결코 흔들림 없이 당당하게 살아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만을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은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3절에 보면, "넘어지는 담"이라고 했습니다.  나를 보호하고 있는 담이 넘어집니다.  그런가 하면 "흔들리는 울타리"라고 했습니다.  울타리는 우리를 보호합니다.  지금까지 나를 보호한다고 믿었던 그것들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지금 다윗의 처지가 이렇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과거에 은행이 부도가 난다고 사람들이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이 땅에서 우리가 절대적으로 안전하다고 믿었던 모든 것들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이 요동치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이 사람을"  그런데 거기에서 흔들리고 있는 나를 그나마 죽이려고 공격해 들어오는 세상입니다.  이런 암울하고 처절한 세상의 한복판 속에서도 당당한 고백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사랑하는 여러분, 다윗이 어떻게 이런 고백을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이것은 그가 구원의 소망을 하나님 안에만 둘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5절에서 이 고백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본문 5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담이 흔들리고 울타리가 흔들리고 우리가 믿었던 모든 것들이 흔들립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가 이런 세상에서 잠잠히 살 수가 있다는 것은 구원의 소망을 하나님 안에만 둘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견고한 평안의 축복이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있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은 흔들리는데 내 마음에는 쉼이 있습니다.  담은 무너지는데 내 마음에는 안정이 있습니다.  흔들림이 없는 청정한 침묵이 있습니다.  이 모질고 험한 세월을 견딜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세상에 폭풍처럼 요동쳐도 내 마음에는 평안과 고요함이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의 소망을 오직 하나님 안에만 두었기 때문입니다.  이 소망이, 이 축복이 여러분과 저의 몫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 안에서만 구원의 소망을 두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로,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만 관계의 자유를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정말 하나님만이 나의 믿음의 대상이다, 하나님만이 내 유일한 신뢰의 대상이다!  이렇게 고백하는 사람들이라면 내가 그분에게만은 모든 것을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분에게만은 모든 것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 그분과는 모든 것을 의논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분이 다 아시잖아요?  아시잖아요?

내 좌절도 알고 내 이중성도 아십니다.  내 속에 있는 그 거룩하지 못한 동기들도 알고 계십니다.  내 좌절과 내 모든 약점도 알고, 열등감도 알고, 내 상처도 아십니다.  그분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이미 아신다면 감춘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다 내어 놓으셔야지요.  그리고 정말 내어놓고 내가 내 마음을 그분 앞에 열 수가 있다면 그분과의 관계 안에서 누릴 수 있는 넉넉한 자유!  저는 이것이 신앙인이 누릴 수 있는 삶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8절에 보면, 다윗이 이것을 경험하고 우리에게 뭐라고 권면합니까?  본문 8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셀라)"  할렐루야!

여기에서 "시시로"라는 것은 언제나, 어느 때나를 말합니다.  언제나, 낮에도 밤에도 황혼 녘에도 새벽에도.  내가 어디 있든지 어디서나, 시시 때때로 저를 의지하고 그 앞에 뭐라고 했습니까?  "마음을 토하라"  토하라.  속마음을 털어 놓아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 속에 숨어있는 저 깊은 무의식 속에까지 잠겨져 있는 내 열등감과 좌절과 눈물과 갈등을 다 내어놓으십시오.  아버지 집에 오셨지 않습니까?  하나님 아버지 앞에 다 내어놓으십시오.  그럴 때에 우리는 자유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유하는 관계라는 것은 숨길 것이 없는 관계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아시는데 그분 앞에 숨겨 보아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다 내어놓으십시오.  그리고 그 분 앞에서 위로를 받으십시오.  그 분 앞에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그 분 앞에서 다시 일어서십시오.  이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금세기 평신도로서 우리 시대의 가장 영향력을 끼친 사람은 아마도 "C.S 루이스"라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의 교수였습니다.  그는 본래 무신론자였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는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였습니다.  "하나님이 있는 것을 알 수가 없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성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모든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문학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문학적 관심 때문에 그래도 성경을 좀 알아야 하지 않느냐?  그래서 신앙을 위해서가 아니라 문학적 관심 때문에 어느 날 성경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 중에서도 내가 시편을 좀 읽어보자.  시에 관심이 많은 분이니까, 그리고 성경 가운데를 딱 펼치면 시편이 나옵니다.

그래서 시편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시편 1편을 읽으면서 그의 소감이 "나쁘지 않다!"  시편 1편이 좋다!  2편? 괜찮다!  3편, 4편, 5편, 그런데 10편을 넘어서면서 그는 고개를 흔들기 시작했습니다.  좀 이상하다!  시는 아름다워야 되는데 이 시편 안에는 정제되지 못한 거친 언어들이 이렇게 많이 나올까?  왜 이 시편 기자는 원수가 이렇게 많을까?  '하나님이 원수들을 언제까지 두시겠습니까? 그 원수들을 죽일 기계를 준비했다가 작살을 내시옵소서,'  이런 험한 말이 나온다는 말입니다.  "에이, 이건 아름다운 시가 아니야!"

그는 성경을 던져버렸습니다.  그런데 던지고 나서 그 다음 생각을 하니까 이런 생각이 들더랍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인생이 아닐까?"  사람이 살다 보면 원수도 생기고 막 죽이고 싶은 사람도 생기도, 그런 좌절이 생기고.  적어도 성경은 인간의 감정 앞에 솔직하구나!  그것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투명하게 내어놓을 수 있는 성경, 그래서 그는 성경을 계속 읽다가 마침내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가 그리스도인이 되고 비교적 일찍 쓴 책 가운데 하나가 "시편에 대한 묵상"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시편의 하나님을 이렇게 말합니다.  시편의 하나님은 우리가 뭘 쏟아놓든지, 무슨 이야기를 하든지, 내가 어떤 절망과 어떤 불평과 좌절을 말하든지, 심지어는 하나님 앞에 "하나님, 나 당신을 믿을 수 없어요.  왜 그랬습니까?  너무 잔인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이런 소리를 해도 그 모든 푸념과 독백과 절망의 언어들까지 다 받을 수 있는 큰 가슴을 지니신 하나님, 그것이 시편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절망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눈물이 무엇입니까?  좌절이 무엇입니까?  아픔이 무엇입니까?  다 내어놓으십시오.  상담은 매우 유익하지만 우리가 사람과 사람에게 내 마음을 열어놓는 데는 언제나 한계를 느낍니다.  그러나 내 모든 것을 안심하고 내어놓을 수 있는 분, 그 분 앞에 왜 안 내어놓으십니까?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뭐라고 말합니까?  하나님 앞에, 다른 사람이 아니라 그분 앞에 네 마음을 토하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우리의 피난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말하십시오.  당신의 절망을 말하십시오.  당신의 좌절을 말하십시오.  당신의 갈등을 말하십시오.  당신의 상처를 말하십시오.  깊은 곳에 숨겨 두었던 내 속에 억눌려 있는 말못할 억압을 그분 앞에 말하십시오.  너무 괴롭다고, 답답하다고….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받으시고 나를 안아주시고, 내 상처를 치유하시는 그 하나님을 경험할 때 여러분은 거기에서 세상이 주지 못하는 참된 자유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믿음은 바로 하나님 안에서 관계의 자유를 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자유가 여러분과 저의 몫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세 번째로,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 가치의 변화를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많은 교인들이 믿음을 이해할 때 믿음이라는 것은 예수 믿고 구원받고 그 다음에 천국의 소망을 갖고 사는 것, 거기에서 믿음에 대한 이해가 끝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본질적인 것입니다.  근본적이고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그 정도에서 이해가 끝난다면 우리의 믿음은 보험 수준 밖에 안 되는 믿음입니다.

생명 보험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천국보험.  내가 예수를 믿어 두면 이 다음에 천국이 있으면 천국에 가겠지, 천국을 향한 투자,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에서는 어떻게 살 겁니까?  여기에서, 이곳에서, 오늘은 어떻게 살 것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의 세상에서 여러분의 신앙은 얼마나 유용하십니까?  만약에 우리가 신앙을 저 미래를 향한 투자 정도로만 생각한다면 바람이 불고, 파도가 몰아치는 이 세상의 한 복판 속에서 우리의 믿음은 무기력한 신앙이 되는 경우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내 존재의 근거로 믿는다면, 이 이야기가 그 이야기가 아닙니까?  오늘 시편 기자가 "하나님은 나의 반석이시요"  내 삶의 근거가 되시는 하나님, 그리고 내 삶의 진정한 소망이 되시는 하나님으로 믿는다면, 그래서 그가 나의 반석이요 요새이심을 믿는다면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치의 변화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을 만났고, 그분을 믿는다면 우리는 변화된 가치를 갖고 살아갈 수가 있어야 합니다.

본문 11절과 12절에 보면 시편 기자는 그 가치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향해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본문 11절과 12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  주여 인자함은 주께 속하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

여기에 보면 권능과 인자라는 말씀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사람들이 추구하는 모든 가치는 두 가지 단어와 반드시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권능이고, 또 하나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가 조화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만약에 사랑이 없이 능력만 추구한다면 우리가 추구하는 권능과 능력은 폭력이 될 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능력이 없이 사랑에만 매달린다면 그 사랑은 무력한 감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시편 기자는 그가 가만히 묵상하면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은 능력의 근원이시고 하나님은 사랑의 근원이시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것은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누구만 구하면 됩니까?  하나님만 구하면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안에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가치가 다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믿었다면, 하나님을 만났다면, 그리고 하나님 안에 살고 있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삶에는 하나님 안에 있는 가치를 통한 변화가 반드시 일어나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능력을 추구하는데 사랑 없이 능력만 빠지면 우리의 삶은 매우 이기적인 모습이 됩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 없이 추구하다 보면 사람이 마지막에 빠지는 사랑은 물질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시편 기자는 10절에서 자기가 하나님을 만나고 인생이 변화된 삶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포악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지어다."

사랑하는 여러분, 돈은 있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나는 마음을 두지 않겠다!  이것이 변화된 사람의 고백입니다.  물질이 자기의 가치가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나의 가치의 근원이지 물질이 내 가치의 고백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믿었다면 저는 현저하게 일어날 삶의 변화의 영역이 물질을 어떻게 쓰느냐?  거기서부터 좀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돈을 어디에다 쓰느냐?  그것이 가치입니다.  돈을 어디에다 쓰느냐?  향락에 쓰면 이 사람의 가치관은 향락주의입니다.  자기만을 위해서 쓰는 사람은 이기주의란 말입니다.  이제는 내가 돈을 하나님을 위해서 쓸 줄 알고, 이웃들을 위해서 사용할 줄 알고 이것이 변화된 가치의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정말로 옛사람이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났다면 물질을 사용하는 영역이 변화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변화된 자기 삶의 자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돈이 있든지 없든지 그것이 나의 관심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안에 가치의 소망을 두고 그 가치를 나의 가치로 삼고 돈이 있든지 없든지 잠잠히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삶이란 무엇입니까?  이 변화된 가치를 가지고 변화무쌍한 세상의 한복판 속에서 잠잠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잠잠히 살아간다는 것이 어떻게 살아간다는 것입니까?  울타리가 무너지고 담장이 넘어지는 데도 잠잠히 살아가는 삶이라는 것이 무엇을 뜻합니까?

저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신촌에서 10평 되는 작은 문화다방을 시작했던 '지승용'씨가 지은 "민들레 영토의 빈 사랑"의 이야기에서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집에 가압류가 들어와서 살던 집에 빨간딱지가 다 붙어졌습니다.  그날 밤 괴로워하면서 잠에 들었다가 새벽에 깨었습니다.  그래서 화장실에 갈려고 하니까 아버지 방에 불이 켜져 있습니다.

"아마도 아버지가 온 밤을 새우신 모양이구나!"  이런 생각도 들고, 혹시 새벽에 일어나서 괴로워하시는 것은 아닌지?  우리 아버지가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지?  그래서 아버지 방에 가서 살짝 방문을 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아버지는 단정한 모습으로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일어나서 앞에 책을 읽고 있습니다.  성경인지 무슨 책인지 쓰여 있지 않지만 책을 읽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자기 마음에 평안이 들어오면서 그가 이런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내용을 그대로 읽습니다.

"빨간 딱지"  차압 들어 온, 가압류 들어 온 빨간 딱지는 어두운 거실에서 여전히 뚜렸하게 보였다.  그렇지만 조금 전에 그 딱지를 보았을 때처럼 마음이 언짢거나 발걸음이 무겁지는 않았다.  방금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평소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다.  저토록 튼튼한 아버지가 제 자리를 지키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집안이 망한다고 생각하면서 나도 모르게 위축되어 있었다.  모든 일이 힘들게 여겨지고 머리 속에는 집이 망하면 어떻게 하지 하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날 오래간만에 잠을 푹 잘 수 있었다.  평소보다도 더 침착하게 더 부지런하게 독서와 함께 하루일과를 시작하는 아버지가 미더웠기 때문이다.  다시 며칠이 지난 뒤 였다.  그날 따라 일찌감치 집에 돌아온 아버지가 나를 불렀다.  나는 아버지가 집안 일에 대하여 말씀하시리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나는 긴장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아버지 앞에 앉아 있었다.

"요즘 네 마음이 많이 상했지?"  "아닙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한 말과는 달리 정말 나는 마음이 많이 닫혀 있었다.  그 무렵 우리 집에는 매일같이 빚쟁이들이 몰려왔다.  그 빚쟁이들은 아버지가 보증을 서 준 사람에게 가지 않고 우리 집에만 몰려왔다.  보증을 서 준 사람은 부채를 갚지 않을 수도 있지만 아버지라면 갚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내가 정말 마음이 상한 것은 그들이 우리 집을 점령한 사실 때문이 아니었다.  빚을 받기 위해 우리 집을 점령한 그들은 불과 얼마 전 까지만 하더라도 아버지에게 돈을 융통하기 위해 혹은 사업상 필요에 의해 선물 꾸러미를 들고 드나들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화장실을 다녀오던 그날 새벽 평소와 다름없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역경을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약삭빠른 세상 인심은 차마 눈뜨고는 볼 수가 없었다.  내가 못 견디었던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늘은 내가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불렀다.  사람들은 내가 이제는 다 망했다고 말하더구나.  망했으니 불행하겠지?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란다.  지금까지 아버지는 돈을 벌어 재산을 모으는 것을 즐거움으로 알고 그것을 행복으로 알고 살아왔지.  하지만 이제부터는 나 때문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빚을 갚는 일을 즐거움으로 알고 살 작정이다.

물론 너희들이 고생이 되겠지만 이것을 알아야 한다.  기쁨이란 즐거울 때만 오는 것은 아니란다.  망할 때에도 즐거울 수 있단다.  빚을 갚는 것도 행복하다고 생각하면 즐거울 수 있단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겠니?"

그 말을 듣는 순간 자기 인생은 변했다고 말합니다.  그는 그날 정말 자유한 삶을 사는 분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저는 시편 기자가 말하는 믿음의 삶의 모습, 울타리가 넘어지고 담이 무너지고 사람들이 나를 공격해 들어와도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사람. 
"내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사랑하는 여러분, 폭풍우가 내리치는 혹독한 세상 속에서도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여러분의 믿음이 더욱 굳세어져서 힘차고 당당하게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 시간 우리 옆에 있는 분들하고 악수하면서 "힘내세요!"라고 뜨겁게 인사하시겠습니다.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사세요!"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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