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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암 4: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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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암 4:4-13)

   
신앙이 좋은 사람들은 남달리 잘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 가운데 하나가 회개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사람들 앞에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 압니다.

고 한경직 목사님은 한국교회의 사표(師表)라 할 수 있는 분입니다. 1973년 1월 2일 한 목사님께서 원로목사로 추대되셨습니다. 이 자리에서 이렇게 소감을 말씀하셨습니다. "건강이 좋지 않아 오래 살 줄 몰랐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까지 왔습니다. 은퇴하는 저에게 분에 넘친 말씀을 해 주셨는데, 영락교회 목사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여 하나님께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지금 저는 여러분들 앞에 사과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교인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 그들의 어려움에 동참하지 못하였고, 양 떼를 두고 도망쳤고, 그분들을 제대로 만나지 못한 때가 많았습니다."

1985년 5월 19일에 KBS (일요방담)에 출연하여, 사회자인 손봉호 교수와 대담을 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사회자가 “목사님이야 말로 신앙과 삶을 실천하신 분이십니다.”라고 칭찬을 했습니다. 이 때 한 목사님께서 어린 소녀처럼 부끄러워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저 저는 하나님의 은혜로 바로 믿어 보려고 애쓴 것만은 사실이지만, 참 제가 원하는 그러한 크리스천이 되었느냐 하는 그런 문제를 생각할 때에는, 지금도 부끄러울 뿐이올시다….” 

1992년 6월 18일 종교 부분의 노벨상이라는 템플턴상 수상하시고, 이를 축하하는 모임이 있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목사님께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먼저 나는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나는 신사참배를 했습니다. 이런 죄인을 하나님이 사랑하고 축복해주셔서 한국교회를 위해 일하도록 이 상을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이 좋은 사람은 회개를 잘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허물과 죄를 깨닫고, 통회하고 자복하기를 잘합니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허물과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기를 잘합니다.

오늘의 한국교회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남의 허물과 죄를 지적하는 일은 잘하는데, 자신의 죄와 허물을 회개하고 인정하는 일을 잘 못합니다. 그래서 저마다 “네가 죄인이요”하며 언성을 높입니다. 그러나 “내가 죄인입니다”하며 고백하는 사람들은 찾아보기 힘이 듭니다.

제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저 역시 가장 힘든 부분이 회개입니다. 하나님 앞에 제 자신의 허물과 죄를 깨닫고, 참회하는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들이 제 허물과 잘못을 지적할 때, 선선히 인정하고 고백하지를 못합니다. 그저 변명하고 자기 합리화하는 일에 급급합니다. 그래서 제 자신에 대해서 참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아모스 선지자의 예언입니다. 그 중에 아모스 선지자의 두 번째 설교입니다. 이 설교 말씀가운데 가장 강조가 되고 있는 말씀이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 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한 마디로 회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분명히 잘못하고 있어서 경고를 보냈지만, 여전히 회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준엄한 말씀으로 이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목할 것은 이 짧은 설교 가운데 이 말씀이 무려 다섯 번이나 반복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6절, 8절, 9절, 10절, 11절입니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회개를 기다리시고, 또 경고하시는데도, 저들이 회개하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저들이 왜 그토록 회개를 하지 못할까요? 오늘 본문 안에 그 답이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회개를 잘 하지 못하는 우리들에게도 귀중한 교훈이 될 것입니다.

1. 자기중심적 신앙생활

본문 4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래 내어 선포하려무나” 당시 북왕국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교적 헌신이 대단했다는 것입니다.

우선 저들은 북왕국 이스라엘 땅에 있던 역사적으로 유명한 벧엘과 길갈을 성소로 단장을 했습니다. 여기서 벧엘은 야곱이 돌베개를 베고 잠을 자다가, 하나님을 만났던 곳입니다. 그리고 길갈은 여호수아의 인도로 가나안 땅에 들어와 처음으로 머물며, 제사를 드렸던 곳입니다. 이 유서 깊은 곳을 거룩한 성소로 복원하며, 이곳에서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아침 마다 희생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십일조를 삼일마다 드렸습니다. 그리고 감사 제사인 수은제, 자원하여 드리는 제사인 낙헌제 등을 드렸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하나님께서 시키지도 않은 일도 자원해서 행했습니다. 당시 저들의 신앙적 헌신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대단한 신앙적 헌신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입니다. 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이런 신앙적 헌신에 대해 하나님께서 한 마디로 범죄라고 규정하셨습니다. 

그리고 5절을 보면 이런 대단한 신앙적 헌신이 하나님 앞에 범죄가 된 이유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소리 내어 선포 하려무나”라는 말씀 속에 담겨있습니다. 즉 저들이 이토록 대단하게 신앙적 헌신을 하게 된 것이 자기들의 신앙을 사람들에게 나타내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것이 너희가 기뻐하는 바니라”라는 말씀 속에 담겨있습니다. 즉 저들이 이토록 대단하게 신앙적 헌신을 하게 된 것이 자기만족을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결국 저들의 이렇게 대단한 신앙적 헌신은 하나님과 전혀 무관한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제사도 자기들을 위해서 드린 것이고, 십일조도 자기들을 위해서 드린 것이고, 그토록 대단한 신앙적 수고도 모두가 다 자기들을 위해서 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다 보니 저들은 점점 자기착각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자기들은 정말 신앙이 좋은 사람들이라고 착각하게 됐습니다. 자기들만큼 열심히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이 또 누가 있겠는가고 교만에 빠지게 됐습니다. 그러니 자기들의 죄를 돌아볼 수 있는 눈이 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회개라는 말은 자기들에게 가당치도 않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약 150년 전,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한창 치열할 때의 일입니다. 링컨이 이끄는 북군이 열세에 처해 있었습니다. 링컨은 평소보다 더 열심히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대통령이 기도에 매달리자 측근 각료들이 자기들도 기도에 동참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우리 북군 편이 되어달라고 기도하겠다고 링컨에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링컨은 정색을 하면서 그런 기도를 하지 말라고 간곡히 당부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 되어주십시오”라고 기도하지 말고, “우리가 하나님 편이 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 되어달라는 기도는, 기도의 중심이 우리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편이 되게 해 달라는 기도는, 기도의 중심이 하나님입니다. 이것은 정말 큰 차이입니다.

오늘 신앙생활의 중심이 우리 자신에게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기만큼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이 없으니, 당연히 하나님은 자기편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만큼 봉사 많이 하는 사람이 없으니, 당연히 하나님은 자기를 특별히 여겨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만큼 헌금 많이 하는 사람이 없으니, 당연히 하나님은 자기에게 남달리 복을 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런 것이 신앙적 자기도취입니다. 

이렇게 신앙적 자기도취에 빠지게 되면, 하나님도 자기 입장에서 바라봅니다. 물론 교회나 다른 사람들도 자기 입장에서 바라봅니다. 이러다 보니 이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어떻게 보시고 계시는지, 알려고 하지도 않고 또 알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또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알려고 하지도 않고 또 알 수도 없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죄와 허물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회개를 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충고를 들을 수 없습니다. 그저 자기변명과 자기 합리화에 빠져들고 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의 중심을 바꾸어야 합니다. 내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2. 깨달음이 없는 신앙생활

본문 6-11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섯 차례나 징계하신 내용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첫째로 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기근으로 징계하셨습니다. 그런데 저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7-8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가뭄으로 징계하셨습니다. 그런데 저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9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흉년이 들게 하셔서 징계하셨습니다. 그런데 저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넷째로 10절을 보면, 전염병과 전쟁으로 징계하셨습니다. 그런데 저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째로 성읍을 무너뜨려 징계하셨습니다. 그런데 저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 징계들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시는 경고입니다. 하나님께서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반복하여 회개하라고 말씀하시는 경고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저들은 그토록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경고하셔도,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저들은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저들이 왜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못했을까요? 왜 회개하지 않았을까요? 한 마디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이 지금 얼마나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 있는 지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이 지금 하나님의 뜻을 얼마나 어기고 있는지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반복해서 경고하시고 말씀하시는데, 저들이 왜 깨닫지 못할까요?

마 13:14-16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간단히 말하면 눈과 귀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우선 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창 3장을 보면, 인간이 타락할 때 가장 먼저 문제가 된 것이 바로 이 귀입니다. 뱀이 하와를 찾아옵니다. 그리고 하와가 솔깃할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 때 하와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듣기 보다는 말하기를 많이 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두신 뜻을 깨닫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깨닫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게 되었고, 죄를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선 귀가 문제입니다. 귀가 가벼워져서 듣지 말아야 할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그리고 귀가 분별력을 잃고,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정작 들어야 할 말에는 귀를 닫습니다. 그리고 꼭 들어야 할 말을 듣고도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회개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1988년 미국 대통령 선거가 한참일 때, 공화당 후보였던 조지 부시의 태도가 갑자기 바뀐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전기가 돼서 결국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선거 운동도중 어머니가 부시에게 짤막한 충고 한 마디를 던졌습니다. “조지야, 너는 자신에 대해 너무 많이 얘기하는구나!” 지나가듯 던진 이 충고를 조지 부시는 가슴 깊이 새겼습니다. 그리고 바로 유세에 반영했습니다. 그 후부터 자기 자랑이나 자기에 관한 얘기를 대폭 줄였습니다. 그러자 유권자들의 반응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귀가 제대로 작동해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께로부터 들여오는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 회개를 잘 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눈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역시 창 3장을 보면, 인간이 타락할 때 또 문제가 된 것이 눈입니다. 뱀이 찾아와 속삭입니다. 선악과를 먹게 되면,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난 후 선악과를 보았습니다. 늘 보던 선악과인데, 그날 따라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눈이 문제입니다. 마치 백내장이 생겨서 사물을 제대로 보기 힘이 든 것처럼, 욕망이 눈을 흐리게 하여 보아야 할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만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그 결과 회개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2010년 5월에 개봉됐던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미자라는 여주인공이 어느 날 동네 문화원에서 우연히 시 강좌를 수강하고 나서, 시를 쓰게 되면서 생기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입니다. 주인공 미자는 시상을 찾기 위해 무심히 지나쳤던 일상을 주시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봐왔던 모든 것들이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새롭게 보이며 설레게 만듭니다.

영화중 시 창작을 강의하는 시인은 ‘시’는 보는 것 시(SEE)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과를 몇 천 번 몇 만 번 보아도 정작 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현대인은 보아도 보지 못하고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시가 죽었어!”라고 절규합니다.

그렇습니다. 눈이 제대로 작동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을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야 깨닫고 회개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이 좋은 사람들은 회개를 잘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와 허물을 깨닫고, 통회를 잘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충고와 지적을 마음에 깊이 새깁니다. 

우리가 회개를 잘하려면, 중심이 변해야 합니다. 내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나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깨닫기를 잘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귀와 눈이 제대로 작동해야 합니다.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하면 안 됩니다. 귀담아 잘 듣고 눈 비비고 잘 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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