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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 앞에서 판단하라 (행 4: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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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앞에서 판단하라 (행 4:5-21)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많은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물질이나 건강이나 환경으로부터의 두려움이 있는가 하면 불확실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까지 크고 작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두려움은 사람들에게 대단히 큰 영향을 미치고 우리가 믿는 진리를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합니다. 
용기를 내어야 할 때 용기를 잃게 하고, 진리를 알아도 진리의 편에 서지 못하고 두려움에 진리를 부인하는 일들이 다반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인가를 믿는다면 그것이 확실한가에 대해 두려움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복음에 대한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1999년4월20일은 미국 콜롬바인 고등학교에서 총기난사 사건이 있었던 날입니다. 이 사건으로 교사1명과 학생12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그 가운데 ‘캐시버넬’ 이라는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총기를 난사하던 두 학생들은 캐시버넬을 발견하고 평소 그녀가 신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알고 총을 머리에 겨누고 예수님을 부인하면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위협하였습니다.
순간 두려웠지만 캐시는 절대 자신은 예수님을 부인할 수 없다고 고백하였고 총탄에 순교하고 말았습니다.

이 일을 통해 캐시의 죽음을 애도하는 청소년들의 기도 운동이 미국 전역으로 확대되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도전을 주었습니다. 

여러분 그렇게 잘 믿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두려움의 순간에 너무나 맥없이 무너지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어쩌면 저와 여러분도 예외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복음이 진리라는 것을 반드시 믿는다면 어떠한 두려움의 일 앞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담대함을 가지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오늘 본문은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에게 본격적인 핍박이 시작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복음을 전하다가 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지 않습니까? 분명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자가 일어나며 치유의 기적이 일어났지만 왜 이들을 잡아 가두고 핍박하고 위협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복음의 특성 때문입니다. 
여러분 복음은 단순히 교훈이나 좋은 말씀 정도가 아닙니다.
‘착하게 살라, 죄짓지 말라, 싸우지 말라’ 는 말씀이라면 핍박을 당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복음이란 죄와 저주에서 구원받는 놀라운 소식’ 입니다. 할렐루야!

다시 말해 죄와 마귀의 종노릇하던 사람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는 메시지로 악한 영과의 무서운 영적 싸움을 위한 선전포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전해질 때마다 사실상 우리를 지배하고 있던 악한 영과의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와 여러분이 정말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이 되려면 어떠한 두려움과 위협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분명한 믿음이 준비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두려움이 해결되지 않은 사람은 복음을 드러내고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위협과 핍박 앞에서도 당당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이들은 산헤드린 공회라는 당시 유대인의 종교와 정치를 통합한 최고 권력 기구에서 판결에 따라 그들의 목숨이 좌우될 수 있는 자리에 서 있습니다.

예수님도 그 자리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빌라도를 통해서 사형 집행을 당하셨습니다.
과거에 베드로는 벌벌 떨다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그 자리입니다. 
그런데 그 현장에 베드로와 요한이 다시 선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이 둘은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19절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에게 더 이상 예수의 이름을 전하지도 말고,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위협하는 산헤드린 공의회를 향해서 베드로가 무엇이라 담대하게 외쳤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할렐루야!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님 앞에서’ 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두려워 할 수 밖에 없는 그곳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산헤드린 공회보다 더 큰 하나님을 보았던 것입니다. 

이들은 지금 세상의 권세로 살기등등하여 그들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는 공회원들 앞에서 당당하고 떳떳하게 복음을 증거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이고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 충만함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40일이 지난 후에 승천하신 것 뿐만이 아니고, 지금도 우리 가운데 계시다는 것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이 믿음이 바로 지금 베드로에게 충만한 것입니다.
8절을 보면 그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 대답을 하였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도 복음을 전하다 유대인들이 이를 갈며 돌을 던질 때,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서서 내려다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순간 사람들이 돌을 던지는 상황도 아무렇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들을 불쌍히 여겨 달라는 기도를 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서 보셨습니까?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가시떨기 나무 앞에 있을 때
엘리야가 호렙산 동굴 앞에 섰을 때, 
이사야가 성전에 들어가서 눈이 열려서 하나님을 보았을 때, 
베드로가 갈릴리 바다에서 말씀에 의지해서 많은 고기를 잡았을 때, 
제자들이 변화산에서 완전히 변형되신 예수님을 보았을 때,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서 영광스러운 주님의 모습을 보았을 때, 
그 전에는 막연하게 ‘하나님이 계시겠지’ 라는 생각이었다면 이후로는 완전히 달라졌던 것입니다.  

수요일과 주일 저녁은 창세기의 말씀을 강해로 나누고 있는데 야곱을 보면 벧엘 들판에서 잠들 때까지만 해도 너무너무 두려웠고 외로웠고 고통스러웠습니다. 

돌베개를 베고 들판에서 잠을 자야 되는 신세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나 그 밤에 하나님께서 야곱을 만나주셨습니다. 
눈이 열려서 하나님 보좌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잠이 깼습니다.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야곱에게는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야곱은 그곳에 제단을 쌓고 고백했습니다.
창28:16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그는 더 이상 아무 것도 두렵지가 않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언제나 함께 하셨지만 영적인 눈이 뜨이지 않았을 때 두려움과 절망 속에 사로 잡혀 있었다가 영적인 눈이 뜨이니까 모든 두려움이 사라졌던 것입니다. 

왕하6장에서 아람 군대가 도단 성에 있는 엘리사를 죽이기 위해 군대로 포위하였을 때, 엘리사의 사환은 이것을 보고 두려워 떨었지만 엘리사는 태연했습니다. 

상황은 같지만 두 사람의 보는 것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엘리사가 하나님께 종의 눈을 열어달라고 기도하였고 하나님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하나님의 군대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러선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그 사환의 마음에도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세상속에서 우리의 눈을 열려 하나님을 보게 된다면 이 세상의 그 어떤 거대한 것도 우리를 두렵게 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세상의 그 무엇보다 더 크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어떤 수필에서 산골 청년이 친구와 함께 처음 바다에 간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미 사진으로는 보았었지만 실제 바다를 본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은 바다를 보자 눈물을 흘렸습니다. 왜냐하면 듣기는 들었지만 바다가 이렇게까지 큰지는 몰랐다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그는 바다가 큰 것을 보면서 또한 자기가 너무나 작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문제, 자신의 계획, 자신의 삶이 너무 작다는 생각에 눈물이 났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다 하나를 보고서도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되는데 그 크신 하나님을 본다면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아마도 우리의 판단, 생각, 계획, 모든 것이 다 바뀌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알고 나면 그 어떤 두려울 것도, 힘들 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만난 사람의 참된 변화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막연하게 생각하고 믿으니까 하나님을 믿어도 아무런 능력이 나타나지 않고 삶이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눈이 뜨이고 나면 이 세상에 더 이상 나를 두렵게 하는 것은 없어집니다. 
그전에는 크다고 생각하는 것도 많았고 놀랄 것도 많았지만 하나님을 만나고 난 다음부터는 그러한 모든 것이 달라져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에스더서를 보면 에스더에게 모르드개를 통해 동족 유대인이 다 죽을 위기에서 왕이 부르지 않았는데도 왕에게 나아가 동족을 살려달라고 간청해야 할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왕 앞에 나가서 내가 사실은 유대인이고 내 동족이 내일이면 다 죽게 생겼으니 우리 동족을 살려주십시오. 그런 부탁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왕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왕비라도 왕 앞에 나가면 죽임을 당하는 당시 전통을 무시하고 왕께 나아가는 것은 죽으러 가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때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 결심했습니다. 

여러분 만일 저와 여러분이 이와 같은 사명을 받았다고 생각하면 과연 그렇게 하실 수 있겠습니까?
아니 내 인생에 단 한번만이라도 그런 심정으로 살아본 적이 있습니까? 
아마 그런 경험이 없으신 분들이 훨씬 많으실 것입니다. 
당연합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고 나면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이 한 사람도 주저하지 않고 모두가 ‘죽으면 죽으리라!’ 를 고백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엄청나고 놀라운 일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앞이 캄캄해지는 고난의 순간이 오더라도 가야할 길이 오히려 더 훤하게 보입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 길을 선명히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흔들리지 않고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이와 같이 하나님을 바라보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13절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베드로가 자기들 앞에서 복음을 담대히 전하는 것을 듣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이제까지 이런 사람이 없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에 일단 서게 되면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그 중압감에 말 한마디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공부를 많이 한 것도, 지식이 많은 사람도 아닌 베드로와 요한이 당당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 놀란 것입니다.
오히려 막강한 권력을 가진 것 같은 그들이었지만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을 가진 자 앞에서 스스로 위축되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사람이 많이 배워야 말을 잘하는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많이 배워서 말을 잘한다는 사람과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이 열려서 말을 잘하는 사람은 그 차원이 다릅니다. 그 차이는 엄청납니다. 

배워서 잘하는 사람은 어려운 문제나 두려운 순간이 오면 오히려 입이 닫혀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는 두려운 일이 닥쳐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더 크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이 뜨인 사람은 두려운 것 자체가 없습니다.
그의 입을 다물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어떤 환경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와 요한은 오히려 당당하게 공회에서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 받을만한 다른 이름이 없다고 증거했던 것입니다. 

나아가 예수의 이름을 전하지 말라고 위협하는 산헤드린 공의회를 향해서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가 하나님 앞에서 판단하라” 고 외쳤습니다. 

여러분 이들의 외침은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대단히 큰 도전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두렵고 어려운 순간을 만날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늘 하나님 앞에서 판단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이곳에 계신 분들 가운데 현실적인 문제로 혹 밤잠을 자지 못할 정도로 염려하고 두려움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 계시지 않습니까?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우리의 두려움이 결코 환경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단지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니 앞이 캄캄할 뿐인 것입니다.   

행4장에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에게 핍박이 오게 되었던 것처럼 이것은 우리에게도 똑같은 일입니다. 

여러분 어떤 고난 앞에서도 흔들리지 아니하고 끝까지 예수님만 따라갈 준비가 분명히 되셨습니까?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환란과 고난의 길로 간다 하더라도 항상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분명하게 바라볼 수만 있다면 더 이상 고난은 고난이 아니며 그 어떠한 두려움도 우리를 흔들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에게 가장 두려운 순간은 사람이 아닌 ‘내가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는 순간’ 입니다. 
결코 두려움은 환경과 여건 때문에 사람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기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지금 이시간 성령께서 우리에게 계속해서 눈을 열어 주시고 계십니다.
지금도 그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 앞에 계십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붙잡았다는 이야기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어떤 어려운 일이 와도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곳이 가장 안전한 곳이고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는 순간이 우리 인생에 가장 위험하고 두려운 순간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면 세상 어디도 두려운 곳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이 열리면 위험한 자리, 편안한 자리가 달라 보일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핍박이 오고 체포를 당하고 나중에는 매까지 맞았지만 그러나 그것이 그들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을 일으키신 일에도 주님의 계획이 있었다면, 복음을 전하다가 체포를 당하고 핍박을 받게 하신다면 거기에도 주님의 계획이 있지 않겠느냐고 믿은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고 나면 우리 안에 놀라운 믿음이 생깁니다.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십니다. 나를 잊지 아니하십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갖고 모든 것을 판단해야 합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보게 되면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 내가 겪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이 믿어집니다. 이 믿음이 분명하면 반드시 승리합니다. 

십자가를 붙잡은, 우리가 서 있는 곳은 바로 ‘하나님 앞’ 입니다. 
이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들이 세상을 향해서 담대하게 보여주어야 할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동안 저와 여러분이 보았던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본다고 하면서도 그동안 정작 하나님을 무시하지는 않았습니까?
도대체 무엇이 어려운 일이었으며, 도대체 무엇이 힘들었으며,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크다고 생각하셨습니까?

내가 그동안 눈으로 보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하나님을 무시 하였던 불신앙은 아니었습니까? 
이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만 판단해야 합니다. 

원하기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게 하신 하나님, 세상보다 더 크시고 놀라우신 하나님을 바라보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을 뜨고 모든 것을 판단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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