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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간지성과 복음이 만날 때 (행 17: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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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지성과 복음이 만날 때 (행 17:16-25)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이 세계를 향해서 퍼져나갔습니다

사도행전을 읽다보면 사도 바울이 선교 여행을 갔던 여러 지명들이 등장합니다. 팔레스타인의 예수살렘을 떠나서 도보로 안디옥에 이릅니다. 이 안디옥에서 바울은 회심하고 선교사로 파송을 받습니다. 그리고 다소, 이고니온, 라오디아, 에베소, 드로아 등의 지명이 나오는데 이곳은 당시 갈라디아 지역이었고 지금은 터키 지방입니다. 바울은 다시 드로아에서 에게 바다를 건너 유럽으로 가서 빌립보, 데살로니가, 고린도, 아테네 등에 이릅니다. 아테네는 당시 최고 학문의 도시였고 지혜와 철학의 도시였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갈라디아(터키)나 그리스를 보면 격세지감이 느껴집니다. 종교적으로 터키 지방은 이슬람권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전도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터키의 인구는 약 7천만 명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이는 만 명이 채 못 되고 있습니다. 바울이 모든 정성과 수고와 생명을 걸고 증거 했던 복음의 역사가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있습니다. 

당시 그리스는 최고 지성과 문화의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재정적으로 국가부도의 파산위기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역사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흥망성쇠의 역사를 거치고 있습니다. 어느 나라도 안전판 위에서 계속 흥하리라고 보장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친히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도 수많은 역사의 굴절을 겪으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본문을 보면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예수님의 복음이 전 세계를 향해서 서서히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특별히 사도 바울의 선교 여정을 살펴보면 중요한 곳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아테네였습니다. 또 하나는 로마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아테네는 문학과 철학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리고 로마는 정치와 권력의 중심지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계 속에 당당하게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보이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서서히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던 것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교감이 일어날 때 삶이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아테네는 아크로폴리스의 성채가 있었고, 도시 곳곳에는 신전들과 신상들이 있었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은 아테네의 수호 여신이었던 아테네 파르테노스라는 여신을 숭배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파르테논신전은 아테네 사람들이 아테네 여신에게 헌납한 신전이었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은 지성과 종교를 함께 묶었던 철학을 지니고 왔습니다. 아테네는 헬라문화, 헬라철학, 헬라교육의 본산지였습니다. 지적인 자부심이 아주 강했습니다. 이 아테네는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고향이도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본 것은 수많은 신상에 둘러 싸여 우상들을 섬기는 도시의 모습이었습니다. 외적으로는 화려했습니다. 수많은 신전들, 멋진 건축물들이 즐비했습니다. 철학적인 논의도 곳곳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보았던 아테네 시민들은 영적인 갈급함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영적으로 빈곤한 것을 보면서 마음이 울컥하여 영적인 교감이 그의 속에서부터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거룩한 분노였습니다.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사도행전 17:16)

바울의 마음이 격분하였습니다. 삶의 변화는 마음에 영적인 교감이 일어날 때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공동체가 변할 때도 그렇습니다. 역사의 변화가 일어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 영적인 교감을 가지고 그 속에 뛰어들 때 역사의 현장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미움의 교감이 아니었습니다. 사랑의 교감이었습니다. 마음속으로 안타까워하는 교감이었습니다. 모든 위대한 일들은 마음속으로 영적인 교감을 깨닫는 사람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사도 바울은 거룩한 분노, 연민의 분노, 불쌍히 여기는 분노를 마음속에 가졌습니다. 바울은 신을 그리워하고 만나고 싶어 하지만 참된 신을 만나지 못하고 있는 아테네 시민들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우리는 어떨 때 전도를 할 수 있을까요?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마음의 기쁨과 감격이 있어야 전도가 시작됩니다. 아니,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을 볼 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진리의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있어야 전도하게 됩니다. 심드렁하게 예수 믿고, 예수 안 믿는 사람을 볼 때에도 심드렁하게 보면 아무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신앙이란 내가 믿고 있는 것에 자부심인 동시에 믿지 않는 사람에 대해 영혼의 불쌍한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내 삶에 영적인 역동성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바울은 헬라의 철학자들과 논쟁하기 시작했습니다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사도행전 17:17) 

바울은 그들에게 전하고 싶었습니다. 회당에 들어가서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아라는 사실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장터에 나갔습니다. 장터는 먹고 마시는 장소였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상을 함께 나누는 철학적인 논쟁의 장소였습니다. 이곳을 아고라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여기에서 헬라 철학의 진수를 자랑하던 사람들과 토론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기 보면 헬라 두 가지 그룹의 헬라철학자들이 나옵니다. 첫째는 에피쿠로스입니다. 이들은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를 얻기 원했습니다. 육체적인 고통으로부터 해방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들을 쾌락주의자라고 명명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단순한 쾌락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육체적인 욕망들은 끊임없이 제하고 영적으로 해방되면서 최고의 정신적, 지적인 쾌락을 누리려고 했습니다. 고상한 인물들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스토아학파입니다. 이것은 범신론에 가까운 철학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의 우주와 삼라만상의 가장 밑바탕에 최고의 로고스가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육체적인 절제와 극기를 통해서 세상의 질서와 평안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스토아 철학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력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들고 그들과 직접 부딪치기 시작합니다.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사도행전 17:18)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십자가의 복음, 부활의 복음과 당시의 철학사상과 부딪친 것입니다. 그러자 헬라 사람들은 뭔가 신기한 것이 있음을 발견하고 새로운 것을 듣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함께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아레오바고 언덕이라는 곳에 있었습니다. 이곳은 바울보다 350년 전, 소크라테스가 청년들을 선동하고 아테네의 질서를 파괴하는 사람이라는 죄목을 뒤집어 씌고 배심원들 앞에서 재판을 받았던 곳이었습니다. 바울이 바로 그 언덕에 섰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선포하기 시작합니다. “아테네 사람들이여, 내가 곳곳을 다니면서 보았더니 여러분은 종교심이 참으로 많은 사람들입니다. 

또 어떤 재단을 보았더니 그 밑에는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는 제목이 쓰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내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그 알지 못하는 신이 누구인지를 말입니다. 이제 내가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에 대해서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면서 설교를 시작하는 장면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많은 내용이 있습니다만 그 중에서 두 가지만 함께 묵상하면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성전 안에 가두어진 분이 아닙니다

첫째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에 대해서 얘기하기 시작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온 우주를 만드신 창조의 하나님이라고 선언합니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사도행전 17:24)

모든 지성과 종교성이 모여 만든 것이 성전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성전이 신이 거주하는 곳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신이 거주하는 곳을 들어가서 예배만 드리고 재물만 드리면 나는 신의 화와 저주로부터 안전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고를 사도 바울이 깨뜨리기 시작합니다. 물질적인 사고, 형식적인 외형만을 갖추면 된다고 하는 신앙의 초보성을 뒤집어 놓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음에도 하나님에게로 나아가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보이는 세계에 집착했기 때문입니다. 물질적인 세계, 만지는 세계에 모든 것을 쏟아 부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만든 지성이 그랬습니다. 인간이 만든 종교성이 그랬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의 복음의 역사가 퍼지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을 뛰어넘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그리움들이 펼쳐지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20C 말~21C에 들어오면서부터 더욱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세상적인 언어로는 창의성이라고 말합니다. 기독교적인 용어로는 영성이라고 합니다. 

과거에 모든 인간을 평가하는 기준은 IQ였습니다. 그래서 IQ가 높으면 멋진 사람, 능력 있는 사람,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IQ만 가지고 다 되지 않습니다. 감성이 풍부해야 합니다. 영성적인 사고가 있어야 합니다. 보이는 세계 속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를 열어놓는 창의적인 능력이 있어야 모든 일에 동참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인은 본래부터 창의적이었습니다. 본래부터 하늘의 영적인 것을 붙잡고 있는 사람들이 기독교인입니다. 

우리는 성전이라는 이 자리를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전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성전 안에 가두어진 분이 아닙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면 우리의 예배가 헛된 예배가 될 위험성이 있습니다. 3,000년 전 예레미야 선지자가 놀라운 말씀을 합니다.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 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 뒤를 따라 화를 자초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이 곳에 살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무궁토록 준 땅에니라.” (예레미야 7:4~7)

하나님께서는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라고 했습니다. 모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불의와 악을 행하고 연약하고 힘든 자들을 억압하고 세상에서 피를 흘리면서 살면서 “내가 여호와의 성전을 들어왔으니 안전하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화내지 않을 것이다. 징벌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예배도 아니고 성전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2,000년 전이나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도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드리는 사람을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을 높이는 공동체를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예배가 참된 예배가 되도록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갈 때 하나님께서는 그 예배를 받으시고 그 성전을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성전으로 바꾸어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구약에서 솔로몬에게 성전을 지으시라고 말씀하십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짓습니다. 성전을 멋지게 지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헌당하고 하나님께 드리려고 하나님 앞에 숙였습니다. 그런데 자꾸만 가슴이 떨립니다. 두렵습니다. 그때 솔로몬이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합니다. 뭐라고 기도를 합니까? 

“하나님이 참으로 사람과 함께 땅에 계시리이까 보소서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 (역대하 6:18)

솔로몬이 말합니다. “하나님, 내가 어떻게 하나님이 이 성전 안에 거하실수 있겠습니까? 저 하늘의 하나님을 누가 감히 다 붙들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가 지은 이 성전에 이름을 두리라. 네가 내 이름으로 예배드리고 내 이름으로 제물을 바치면 그 자리에 내가 함께 하겠다.” 우리들 또한 이러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오면 하나님께서 예배당을 축복해주시고 예배드리는 사람을 축복해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런 면에서 우리는 지성이 깨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영성의 어리석은 부분들이 깨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영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복된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물을 주시는 분입니다

사도 바울은 두 번째로 말씀합니다.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사도행전 17:25) 

모든 지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 신앙생활을 해왔습니다. 신에게 무언가를 바칠 때마다 신의 노여움을 풀어달라고 하면서 바쳤습니다. 신은 뭔가를 우리에게 요구하는데 그것을 우리가 채워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그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시길 원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우리에게 호흡하는 것을 주시고, 모든 만물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것을 빼앗아 가는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것을 빼앗아 가는 Taker가 아니라 모든 것을 넘치게 주는 Giver다!”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을 주시는 분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바치는 것을 좋아합니다. 왜 좋아할까요? 거기에 감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 뇌물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아첨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내게 주신 이 모든 것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 영광을 받아주세요.” 이러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헌금하고 십일조를 드리는 것입니다. 

부모가 되어 보셨습니까? 어린 자녀들이 용돈을 모아 부모님께 고맙다고 선물을 사드리면 그 자체가 좋은 것입니다. 그러면 더 주고 싶습니다. 부모가 돈이 모자라서 돈을 빼앗으려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다시 생각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내 것을 빼앗아가는 분이 아닙니다. 그건 잘못된 신앙입니다. 잘못된 종교성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그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높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속에 하나님의 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감이 있습니다. 그 속에 우리의 길과 진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최고의 선물입니다. 

최근 위기에 처해있던 스타벅스를 다시 세우기 위해서 회장으로 재취임한 하워드 슐츠가 스타벅스를 다시 일으키면서 'Onward'라고 하는 「전진, 앞으로」라는 책을 씁니다. 그리고 1982년에 스타벅스를 인수하면서 직원들에게 편지를 썼던 것을 다시 회상합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우리는 지구상에게 가장 훌륭한 커피 회사가 되기 위해서 노력할 것입니다. 우리는 커피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어 놓을 것입니다. 우리 매장은 품질과 가치를 높은 수준으로 끌어 올리고 고객의 존경과 사랑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편지 마지막에는 “Onward”(전진, 앞으로)라고 적어 놓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커피를 파는 사람도 이런 자부심과 열정을 가지고 일합니다. 이 세상의 어떤 브랜드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을 수 있습니까? 누가 비교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 안에는 모든 생명과 은혜와 지혜와 창의적인 영감이 들어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로 기뻐 받고 있습니까? 이것은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 모릅니다. 지성과 부딪쳐도 넘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문화와 부딪쳐도 넘어서는 것입니다. 수많은 종교성과 부딪쳐도 넘어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의 계시와 하늘의 영광을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소망교회 성도님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그런 성도님이 되기를 열망합니다. 지성적인 그리스도인, 그러나 가슴에는 뜨거운 열정을 가진 그리스도인,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면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 그리고 예수님을 내게 주신 최고의 선물로 여기며 자부심을 갖고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를 통해서 예수님의 역사, 복음의 역사가 이 세상에 흘러가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특권을 마음껏 자랑하면서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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