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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갈망합니다 (시 4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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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갈망합니다 (시 42:1-5)


I. 내 눈물이 내 음식이 되었도다

오늘 본문에 인생의 갈증과 갈망 그리고 깊은 고통을 표현하는 말들이 많이 나옵니다. 

1절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2절 “내 영혼이 ...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3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4절 “...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5절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여러분은 눈물이 볼을 타고 쏟아져 입으로 줄줄 들어가 눈물이 음식이 되어본 경험이 있습니까?

성가대에서 알콩달콩 연애를 하던 청년이 파송을 받습니다. 

♪너의 가는 길에 주의 축복 있으라 - 군대에 들어갑니다. 
다 갔다오는 군대 겠거니 생각합니다. 그러나 군대는 군대입니다. 

고된 훈련, 처음 보초를 서는 날 - 새벽 1시, 부모님 생각이 간절합니다. 성가대에서 노래하던 기억 또 사랑하는 친구들과 애인이 보고 싶습니다. 교회에서 교사라면 아이들의 샛별같은 눈동자가 눈앞에 오락가락합니다. 아이들이 얼마나 보고 싶은지 훌쩍 훌쩍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그러다 첫 번째 주일날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우리 몸에 그렇게 물이 많나 할만큼 고장난 수도꼭지처럼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서 입으로 흘러들어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오래전 모 방송에서 이산가족찾기를 했는데 50년만에 만난 부부, 부모자식, 형제자매가 부여잡고 통곡을 하는 바람에 온 삼천리는 눈물의 바다가 된 적이 있습니다. 

어머니가 시장간 사이에 젖먹이 애기가 잠이 깼습니다. 젖먹는 시간이 훌쩍 지나 배가 고픕니다. 얘기가 얼마나 목매이게 우는지 눈물이 입으로 줄줄 흘러들어 갑니다. 

군대 예배시간에 흘렸던 그 눈물, 이산가족이 만나 끌어안고 울었던 눈물, 배고픈 애기가 흘리는 그 눈물.
과연 “내 눈물이 내 음식이 되었도다”라고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언제, 어디서, 무엇 때문에 이런 진한 눈물을 흘려보셨습니까?
그 눈물이 정말 가치있는 눈물이었습니까?
우리의 영혼을 맑게 만드는 영적인 눈물이었습니까?
아니면 서러움에 북받쳐 울었던 눈물이었습니까?
세상적이고 속된 눈물은 아니었습니까?

오늘 본문에 시인은 하나님을 갈망하여 흘리는 눈물이 음식이 될만큼 입으로 흘러들어 갔다고 고백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너무 좋아 이런 눈물을 흘려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예배가 너무 은혜가 되어 감동의 눈물을 흘려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하나님이 너무 보고 싶어 울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기도하다 말고, 찬송부르다 말고, 말씀 듣다 말고 - 
이런 진한 눈물을 흘려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II. 시의 표제: 고라 자손의 마스길

시편 42편의 표제는 “고라 자손의 마스길”로 되어 있습니다. 
이어지는 43편은 시편 150편 중 표제가 없는 두 편(43편, 71편) 중 한 편입니다. 
시편 42편과 43편은 한 편의 시라 할 수 있습니다. 
너뎃 줄 본문이 나오고 반드시 후렴귀가 등장합니다. 
반복되는 운율을 가지고 있습니다. 

42:5, 42:11, 43:5 후렴귀가 꼭 같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마스길” “교훈을 위한 시”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모두 교훈이 있고 시들 마다 주는 교훈이 있겠지만 
고라 자손이 시인이 되고, 성가대 지휘자가 되고, 성전을 섬기는 제사장 가문이 되었다는 사실엔 정말 깊은 교훈이 있습니다. 

이 시는 다윗시대 쓰여진 시입니다. 
다윗이 왕이 된 후 반란을 만납니다. 반역의 죄수가 아들 압살놈입니다. 
측근 몇 사람을 데리고 망명길에 오릅니다. 다윗왕을 수종들던 신하들 중에 충성스런 신하 고라의 자손 하나가 있었습니다. 

고라는 제사장 족속 레위의 증손입니다. 이스라엘 광야시절 고라는 지도자 모세에 반기를 들었다 멸망한 저주의 대명사였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 모세를 비방하고 반기를 들자 하나님이 가혹한 심판을 내리십니다. 

진의 땅이 꺼지고 갈라져 큰 입을 벌리고 삼키듯 고라를 삼켜버렸습니다. 

“... 그들이 섰던 땅바닥이 갈라지니라 땅이 그 입을 열어 그들과 그들의 집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들의 재물을 삼키매 그들과 그의 모든 재물이 산 채로 스올에 빠지며 땅이 그 위에 덮이니 그들이 회중 가운데서 망하니라”(민16:30-33)

이때 그의 아들들이 심판에서 벗어나 살아남게 됩니다. 
“고라의 아들들은 죽지 아니하였더라”(민26:11)
천벌받은 가문인줄 알았는데 고라의 자손들이 깊은 교훈을 받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더 잘 살려고 애를 썼고 자손들이 번성했고 
명예를 회복할 기회를 다윗시대에 얻게 되었습니다. 

다윗이 나라를 세울때 상처받은 자, 병든 자, 빚진 자, 목자 잃은 양같이 방황하는 천민, 사회에서 억울하게 쫓겨나 천민이 되고 깡패 무리가 된 모든 사람들을 끌어안고 치유하고 새 나라를 건설합니다. 

이때 고라의 자손들도 다윗의 수하로 들어갑니다. 
레위 자손 중에서 가장 유명한 가문으로 등장합니다. 
다윗이 위기를 만나면 칼을 들고 다윗을 보호하고 왕위를 지켜냈습니다.
(대상12:6)
다윗을 섬기고 성전을 섬기던 고라의 한 자손이 도망가는 다윗을 따라 나섭니다. 망명길에 예배조차 할 수 없어 눈물짓는 왕의 마음을 아프게 느끼고 
예배 찬양시를 짓게 되었는데 바로 본문 시편 42편, 43편입니다. 

고라 자손은 후에 유다가 멸망하고 바벨론 포로가 된 이후에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을 지키는 문지기로 봉사합니다.(대상9:17-)
정말 깊은 교훈 “마스길”이 있습니다. 

조상은 하나님의 지도자를 비난하고 반역하다 수치의 가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자손들은 절망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성전의 음악가가 됩니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다윗왕의 마음을 헤아려 시를 짓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포로 시기 - 성전 음악활동이 불가능하게 되자 성전 문지기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III.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시인 고라의 자손은 왕을 모시고 망명길을 헤매며 
다윗왕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그가 얼마나 예배를 그리워하는지.
그가 얼마나 하나님과의 교제와 임재를 사모하는지.

다윗이 목마르게 그리워한 것은 - 
왕궁의 침상이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의 품이 아니었습니다. 
산해진미 진수성찬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교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그리움을 시인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1절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이는 고라자손의 시이지만 다윗왕의 심정, 다윗왕의 마음을 그린 시입니다. 

다윗은 들판에서 양을 치다 사슴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사슴은 피가 더워서 갈증을 견디지 못한다고 합니다. 
평소에는 조용하고 얌전한데 갈증을 느끼게 되면 꽥꽥 소리 지르며 
금방 죽을 것처럼 헐떡거리고 이리 뛰고 저리 뜁니다. 
더구나 팔레스타인 가을 - 사슴의 교미시즌입니다. 
몸에 변화가 일어나 열이 더 높아집니다. 목마름이 극심해 집니다. 

처음엔 짝짓기위해 광야로 나옵니다. 교미 후에 목마름을 견디지 못해 헤매다 목말라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이 사슴에게 있어서 물 한모금은 곧 생명이었습니다. 이 생명수를 찾지 못하면 소리지르다 두 눈을 부릅뜨고 죽어가는 사슴이 허다했습니다. 이 물 한모금의 가치란 이 순간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사슴에게 있어서 이 물 한모금, 다윗에게 이 생명수가 무엇이었을까?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과의 만남, 
하나님 앞에 제사, 예배하는 거룩한 행위, 
이것을 먹지 못하면 얻지 못하면 경험하지 못하면 누리지 못하면 
목마른 사슴이 생명수를 얻지 못해서 죽어가는 것처럼 
죽게 생겼다고 시인은 고백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반드시 마시고 먹어야 할 생명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못 먹으면 죽는 것입니다. 
성경 안 읽고, 말씀 안 들어도 잘 산다구요? 
여러분의 영혼 깊숙이 들여다 보세요. 정말 영혼이 살아 있는지.
감동적인 예배 - 목마른 사슴의 생수입니다. 
예배에 은혜받지 않고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고도 잘 산다구요?
정말 내 영성이 살아있는지, 내 영혼이 하나님 앞에 살아있는지, 진지하게 자신을 통찰해 보십시오. 

다윗 - 이 세상에서 가장 절박한 절규를 목마른 사슴의 절규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목마른 사슴 한 마리의 생수를 시인은 2절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2절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히브리인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뵌다는 이 표현은 
하나님 성전에 나아가 예배하고 행복한 은혜를 경험하는 것을 말합니다. 
쫓겨나서 밥을 먹지 못해도 왕궁의 침상에서 포근한 잠자리를 누리지 못해도 행복한 예배를 드리고 싶다는 뜻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 또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3절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조롱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고난당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내 고난으로 하나님이 조롱받으신다는 사실.
내 고난으로 하나님의 자녀의 이름이 이토록 추해지다니. 
그것 때문에 못 견디겠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떡을 싸 짊어지고 전쟁터의 형들을 위로하러 갔을 때,
골리앗이 여호와의 이름을 조롱합니다. 너희 하나님은 죽었느냐. 
그때 다윗은 골리앗 앞에 가서 내 몸이 갈기갈기 찢겨져 독수리 밥이 된다 할지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어 일컫는 하나님의 백성을 조롱하는 저 입을 가만둘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17:45)
하나님의 이름이 추락되는 것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고난을 당합니다. 직장에서 해고를 당하고 사업을 접어야 할 때도 있고, 불치병으로 고생할 때도 있고, 자식이 방황하고 실패하고 이혼하여 살아가는 이도 있습니다. 

지난주 한국교회를 대표할 수 있는 책임있는 목회자들이 모여서 세미나를 했습니다. 밤이 되어 마음의 문을 열고 소개하는 대화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지도자들이었는데 한결같이 아픔이 있습니다. 
가정의 아픔, 교회의 아픔, 개인적인 고통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고통이 없겠지. 저분들은 고통이 없겠지 하던 모든 분들이
어린시절 불행했던 아픔 때문에 마음에 큰 고통을 살아가는 목사님.
설교시간마다 자식을 자랑했는데 이혼을 하고 집으로 돌아온 자식에게 
교인들에게 얘기할 수 없어서 은퇴할 때까지 숨길 수밖에 없었던 고통.

선교사로 나아가 멋지게 성공한줄 알았는데 
선교현장에서 너무 능력이 나타나 현지인들이 테러를 해 죽은 줄 알고 쓰레기 통에 갖다 버렸는데 새벽에 숨을 할딱거리는 모습을 청소부에게 발견되어져 
목숨을 구했지만 비만 오면 비명을 지르고 땅바닥을 뒹구는 목사님.
사랑하는 후배 부교역자를 선교지로 보냈는데 목과 몸이 두 동강이나 돌아왔을 때 하얀 천을 걷고 통곡했던 목사님의 아픔. 그럼에도 다시 선교지로 또 다른 후배 선교사를 보내는 목사의 고통. 처절한 고통들을 주고 받는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실패 아픔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세상 사람들의 조롱, 엔티들의 비웃음이었습니다. 
마치 큰 죄를 지어서, 큰 잘못을 지어서 저 고통을 당하겠지. 
예배드릴 수 없을 만큼 중병을 앓고 병석에 누웠을 때 - 당신이 매일 설교하던 그 하나님은 어디 있느냐? 조롱하는 것 같아서, 당신은 큰 소리로 하나님을 설교했는데 하나님은 침묵을 지키고 있구만? 비웃는 것 같아서. 
함께 위로하는 시간들을 가지고 함께 고통을 공감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이라고 이 순간에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셔도 그분은 살아계신다. 
하나님의 응답이 늦어져도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건강한 사람은 밥을 먹지 못하면 배가 고프지요. 
건강한 신앙인은 예배하지 못하면 말씀듣지 못하면 기도하지 못하면 
배가 고파 미쳐야 합니다. 
당신에게 이런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하는 배고픔이 있습니까? 
오늘 시인은 우리에게 묻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만나주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하나님이 나를 어루만져 주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성령충만하지 않고는 한순간도 견딜 수 없는 
그 배고픔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IV. 염려(낙심)하지 마라.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죄악된 세상에 살면서 실패, 고난, 고통을 당하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문제를 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 보아야 합니다. 

5절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낙심해서, 불안해 하고, 걱정한다고 해결되는 세상일은 없습니다. 
염려는 인생을 망치는 무서운 적입니다. 
인생을 갉아먹는 두 개의 벌레가 있는데 
어제에 대한 후회요 내일에 대한 염려입니다. 

염려는 불필요한 것입니다. 백해무익합니다. 
유해한 것입니다. 염려는 인생을 쪼갠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worry = 물어 뜯는다.
Don't worry = 돈 워리 
어느 목사님이 돈에 한계가 와서 돈 걱정을 하니까 돈 워리 그러더랍니다. 
돈 걱정은 워리, 개에게나 주고 나는 하나님만 바라보자. 
염려는 전염성이 강합니다. 

영국과 남아프리카 네덜란드 이주민 사이에 큰 전쟁이 한번 있었습니다. 
소위 보어전쟁(Boar War, 1899-1902)이라 하는데 
남아프리카 한 명이 이상한 죄목으로 사형을 당합니다. 
주위 사람들을 낙심시킨 죄입니다. 
이 군사는 주변에 다니면서 부정적인 얘기를 계속합니다. 
우리 군사는 보잘 것 없다고. 영국 군이 얼마나 강한지 아느냐. 
우리 무기가 이게 무기냐. 영국 군 무기는 굉장할 것이라고. 

우리 지도자들은 썩어서 믿을게 못된다고. 영국 지도자들은 세계적인 지도자라고. 자기의 자원을 계속해서 폄하하고 적장을 높이고 적군들을 높이는 바람에 군사들이 총 한번 쏴보지 못하고 패전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전염성이 강한 것이 염려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예화 가운데 아써 랭크의 ‘염려상자’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아써 랭크라는 사람이 1주일 동안 염려할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견딜 수 없었습니다. 기도하다가 내가 걱정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염려, 걱정거리가 있을 때마다 종이에 제목을 적어서 항아리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토요일 오후에 꺼내 봤더니

40%는 이미 해결되었고
25%는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로 바뀌어져 있었고
25%는 자신이 잘못 판단해서 염려한 것들이었고
10%만 남아있었는데 시시한 염려거리들이었답니다. 
주일날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나니 사라지더랍니다. 
그래서 일주일 내내 행복하게 살았다는 얘기입니다. 

V. 나의 다윗 경험

신학대학원 졸업반 시절 졸업준비위원장을 했습니다. 
380명 졸업생을 섬길 교회를 찾아 임지를 소개하는 일을 해야 했습니다. 
소위 조건이 제일 좋은 교회를 제가 먼저 찾아 간다고 나무랄 사람은 없지요. 그러나 제 마음속에 380명을 모두 임지를 찾아 보낼 때까지 내가 다른 교회를 찾아 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380명 모두 다 교회를 찾아준다는게 불가능하더라구요. 

2월에 졸업했는데 졸업할때까지 다 못했습니다. 3-4월 학교에 가서 교회를 연결하고 학생들을 보내고 학생들을 연결해서 보내고 다 보내고 났더니 4월 말이 되었습니다. 내가 갈 곳이 없습니다. 부득이하게 졸업반에서 섬기던 충신교회 교육부를 그대로 맡고 있었습니다. 

그해 말 33세 어린나이에 마포구에 있는 한 교회에 담임으로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4년만에 교회가 급성장했습니다. 소위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영락교회, 임영수, 이성희, 김동호 같은 분들이 팀사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청소년 청년들을 젊은이를 섬길 사역자로 저를 초빙해 주었습니다. 그 교회에 부임하기로 약속했는데 섬기던 교회 교인들이 붙잡는 바람에 그 교회에 부임하지 못하고 다시 짐을 풀었습니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서 소위 개척이란 이름으로 교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개척을 결단하고 떠났지만 사실 쫓겨난 것입니다. 
제가 가난한 동리의 교인들을 떠나려고 마음을 먹었다는 사실 때문에 내 마음이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교인들이 마음을 주지 않았습니다. 
이때 심정이 오늘 본문 도망길에 오른 다윗의 심정이었습니다. 예배드릴 처소를 찾아 다닙니다. 추운 겨울날 장로님, 집사님이 하는 공장 한 곳을 얻어 예배 드려야지 찾아 다녔습니다. 생활비 한푼을 주는 사람도 교회도 없었습니다. 
이때부터 유치원을 빌려 예배하던 기도처, 물 새는 지하 예배실을 빌려 창립예배를 드리던 개척초기에서 상가예배당 시절, 많은 경험들이 있었습니다. 

전도가 하도 안돼 지친 몸으로 기도하다 성령의 불을 받았습니다. 
물 새는 예배당 바닥을 닦다가 치유하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때부터 예언적인 설교를 하던 젊은 목사의 설교는 치유적인 제사장적인 설교로 바뀌어졌습니다. 
미친듯이 목회하다가 병을 얻어 위를 수술하다가 기도 중 만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고 치유하시는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저는 섬기던 교회에서 실패하고 쫓겨난 것이 아니라 영광스런 하나님의 또 다른 교회 한소망교회로 인도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냇가로 빈들로 도망다니던 다윗처럼 예배처소를 6번 7번 옮겨다니던 한소망교회 시절은 여기 비전채플 한소망교회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손길이었습니다. 

VI.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다윗도 고라의 자손도 인생에서 큰 위기를 겪어본 사람이었습니다. 
인생의 위기 가운데서 또 다른 위기를 가져올 수도 있고 
오히려 큰 기회를 만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속에서 문제에 빠지면 ‘나-나-나’자신에게 빠져버리면 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앙망하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면 문제는 해결됩니다. 
위기는 기회로 변합니다. 

시편 42편 43편에서 저자는
나 - 1인칭을 51번 사용합니다. 
하나님을 21번 사용합니다. 
자기에게 갇혀 나 나 나, 자신에게 매여있을 때는 모든 상황이 절망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시선을 돌려 기도하기 시작하자 낙심, 불안은 사라지고 소망이 찾아왔습니다. 고난은 하나님을 만나는 기회가 됩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 없이 살 수 없듯이 인간은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도록 지어졌습니다. 모든 문제 해결은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일찍이 어거스틴의 말대로 
인간은 하나님께로 온전히 돌아오기까지 평안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절정의 위기상황에서 시인은 다윗 왕이 어떻게 그 고난을 이겨냈는가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상처를 묵상하는 사람은 더 깊은 상처를 받습니다. 
반역자, 배신자를 묵상하고 사는 사람은 미움의 수렁에 빠져들게 됩니다. 
원망, 불평을 일삼는 사람은 자신의 영혼이 더러워집니다. 

오늘 본문을 제 말로 한번 바꾸어 봅니다. 
하나님, 목마른 한 마리 사슴이 마실 물을 찾아 헐떡거리듯, 
제가 목마르게 하나님을 기다립니다. 
저는 하나님 한분, 어제도 오늘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합니다. 
사람들은 저를 비웃고 조롱합니다. 

하나님만 믿는다고 하더니 꼴 좋다. 
그 하나님 어디 있느냐.
그 말이 제 가슴을 아프게 하고 기도 중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 
볼을 타고 입으로 쏟아져 들어갔습니다. 
하나님, 제가 제 영혼을 달래봅니다. 
얘야, 제발 낙심하지 말고 불안해 하지도 마라. 
얘야,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그분을 찬양하려무나.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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