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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해방되어야 할 피조물 (롬 8: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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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되어야 할 피조물 (롬 8:18-22)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후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에게 홀연히 나타나셔서 그들과 함께 길을 가시며 말씀하시기를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눅24:26) 하신 적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바로 앞에 있는 16-17절에서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썼습니다. 

그리고는 이어서 오늘 본문 18절에서 말하기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합니다. 주님이 받으신 고난과 영광을 먼저 언급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가 받아야 할 고난과 영광에 연결시킨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곧 이어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고난과 영광을 피조물의 고난과 영광에로 확대시킵니다. 달리 말하면 피조물의 고난과 영광은 사람들의 고난과 영광과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 19절 이하의 내용입니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두 말 할 것 없이 사람들을 가리켜서 한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은 사람들이 다시 하나님의 아들들답게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드러내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피조물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을 고대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들답지 못하여 피조물까지 함께 고통을 받으며 탄식하게 하고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피조물이 사람과 함께 고통을 받으며 탄식하는 것은 피조물이 제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이 제 구실을 하지 못하니 허무한 것입니다. 허무한 데 굴복한 것입니다.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한다는 것은 피조물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의 그 본래 목적을 실현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피조물들을 창조하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사람에게 유익하고 사람의 삶이 보다 행복해지는 데 쓰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피조물이 사람에게 유익하고 사람의 삶을 보다 행복하게 하지 못하는 것은 피조물 자체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되게 하신 것입니다. 본문 20절의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한 말이 그 말입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어 하나님의 아들들의 자격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푸시는 행복을 누릴 수 없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피조물 또한 사람과 같이 행복하지 못한 상태에 처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 때문에 다른 모든 피조물이 힘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자유롭게 영원히 복된 삶을 살아야 할 사람이 썩어짐의 종노릇하게 되었고, 그 때문에 피조물도 덩달아 썩어짐의 종노릇하게 되었기에 피조물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를 바라며, 그래서 함께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21절입니다: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사람은 자기가 갖고 있는 삼중의 관계를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들 사이의 관계, 그리고 사람 외의 다른 모든 피조물과의 관계입니다. 믿음은 사람으로 하여금 이 삼중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바로 보게 해줍니다. 참 믿음을 가지고 피조물을 볼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 사람들로 인한 피조물의 탄식과 고통을 깨닫게 됩니다. 본문 22절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면 반드시 사람들 사이의 관계도 잘못되고 사람과 피조물 사이의 관계도 잘못될 수밖에 없음을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합니다. 피조물이 사람과 불화한 관계에서 조화롭고 평화로운 관계로 바뀌기 위해서는 사람이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하고 사람들 사이의 관계도 바로 잡아야 함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작년 11월에 발생한 구제역의 확산과 조류독감으로 소와 돼지 350만 마리와 닭과 오리 600만 마리를 산채로 매장해야 했던 일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사상 초유의 일로 가히 대재앙이라 할 만합니다. 끔찍하고 섬뜩했습니다. 사람과 피조물 간의 관계의 악화를 이보다 더 처절하게 보여준 사건이 또 있을까 하는 의문이 일어났습니다. 

지난 3월 11일에는 일본에서 진도 9.0의 강진이 일어났고 이로 인한 해일로 동북부 지방이 초토화되었으며 초대형 원전 사고가 발생해 전 세계를 경악과 불안의 도가니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로 인한 피해와 오염의 정도는 아직도 예상조차 하기 힘든 지경입니다. 우리나라의 원전 사고가 발생할 경우 그 피해는 어떠할지 생각만 해도 두렵기 그지없습니다. 

그런데 이 끔찍한 재앙들의 배경에 있는 것은 인간의 탐욕이라는 지적에 우리는 귀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최근의 구제역 사태로 돼지만 해도 전국 양돈 규모의 삼분의 일이 매몰되었다고 합니다. 구제역이란 가축의 입과 발굽 주변에 수포가 생겨 일어서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게 되어 죽음에 이르게 되는 바이러스성 전염병으로 치사율은 5%에서 55%에 이릅니다. 

과거의 전통적 소규모 농장에서는 충분히 영양을 공급해주고 상처부위를 핥지 않도록 보살펴주면 수일 내에 회복될 수 있었던 가축질병인 구제역이 오늘날처럼 공장식 축산방식에 의해 좁은 공간에서 사육되느라 운동을 거의 할 수 없는 동물들에게는 치명적인 질병이 된 것입니다. 생산비용을 낮추어 더 값싸게 고기를 공급하기 위해 가축들을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고 햇빛 한 줌 볼 수 없는 공간에서 키우는 열악한 축산환경 때문에 병에 잘 걸려 대량으로 산 채로 땅에 묻히기에 이른 것입니다. 또 가축들을 생매장하기 위해서는 주변이 오염되지 않도록 철저히 해야 할 터인데 인력부족, 시간부족에 비용까지 아끼려고 대충 마구 묻다 보니 더 큰 2차 재앙의 가능성까지 만들고 만 것입니다. 

원자력 발전소 건립도 문제입니다. 우리나라는 2024년까지 현재 24기에서 34기로 원전을 확대하는 계획대로라면 1평방킬로미터 당 원전설비용량이 365킬로왓트로 세계에서 원전밀집도가 가장 높은 나라가 될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더 편하고 쉽게 살려는 욕망이 전기소비를 끊임없이 중대시키고 그래서 값싼 전기를 맘껏 쓰기 위해 더욱 더 원전에 의존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원전은 다른 발전소와 달리 수요량에 맞춰 출력을 조절할 수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심야전기 등 남는 전기를 싸게 팔면서 에너지과소비를 부추기는 구조가 된 것입니다. 현재의 에너지정책대로라면 2030년에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에 무려 90기, 일본에 70기 등 200기의 원전이 가동되어 동북아시아는 원전 최대의 밀집지역이 될 전망입니다. 원전은 다량의 핵폐기물과 방사능물질로 오염된 지구를 후손들에게 물려주게 됩니다. 이번 일본에서와 같은 사고가 나기라도 하면 우리의 삶의 자리는 곧바로 폐허로 변하고 지옥이나 다름없이 되고 말 것입니다. 

원전을 대체할 신재생에너지 개발에 빨리 투자를 해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세계 20개 주요국가 중 재생에너지 개발투자에 가장 인색하다고 판명되었습니다. 유럽의 선진국 독일은 최근 원전사용을 앞으로 전면 중단할 것을 결정하고 선언했습니다. 독일이 할 수 있다면 우리가 못할 것 없습니다. 우리도 보다 안전하며 친환경적인 에너지 생산으로 대체하는 노력을 기울이며 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부터 꾸준히 최대한 에너지 소비를 억제하기 위해 다소의 불편함을 견딜 줄 아는 훈련과 함께 온 국민이 자기희생을 분담해야 할 것입니다. 

나 하나 아낀다고 뭐가 잘 되겠느냐는 생각이나 나 하나 안 아낀다고 뭐 더 나빠질 것 있느냐는 식의 사고를 버려야 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관심과 책임감과 노력이 모여 큰일을 이룩할 수 있습니다. 내 것 네 것 가리지 않고 빈 방, 안 쓰는 방에 부지런히 불 끄는 작은 관심 하나가 중요한 것입니다. 에너지절약에는 주인이 따로 없습니다. 온 지구가 모든 사람의 공동소유이고 모두의 책임 하에 있다는 확고한 인식이 필요합니다. 에너지 소비만이 아니라 음식물 소비 등 환경을 오염시킬 수 있는 모든 분야에서의 절약과 절제를 미덕으로 삼는 풍토가 정착되어야 할 것입니다. 처음에는 어려울 것 같아도 훈련하고 실천을 거듭하면 그러한 삶이 익숙해지고 편안해질 수 있습니다. 

기술과 문명의 발달에 따른 편리함을 극대화하려는 관심과 욕망을 자제하는 삶의 노력은 다른 한편으로 우리에게 영성을 키워주기도 합니다. 전기를 비롯해 각종 문명의 이기가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하고 불안해하는 노예적 삶으로부터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자연으로 돌아간 사람다움의 발견을 통해 새로운 기쁨과 즐거움을 맛볼 수 있습니다. 피조물과의 친근한 관계를 회복하는 경험도 하게 될 것입니다. 정신 차릴 수 없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변화하는 과학과 기술과 신제품에 적응하느라고 우리도 모르게 긴장해 있고 지쳐 있는 우리의 심신을 달래주고 회복시켜주는 조용한 피조물이 우리 곁에 있고 우리를 감싸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프랑스 유학시절 제 지도교수님 이야기를 잠간 하겠습니다. 제가 귀국하고 몇 년 안 지나서 혈액암으로 돌아가신 그분은 늘 자전거를 타고 다니셨습니다. 그분이 흰 머리를 휘날리며 자전거를 타고 가시는 모습은 그 도시의 빼놓을 수 없는 유명장면의 하나일 정도였습니다. 그분이 차를 운전하시는 것을 본 적이 없어서 그는 차도 없고 운전면허도 아예 없을지 모른다고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매년 여름방학이 되면 사모님과 함께 이딸리아 쪽 알프스 산에 가셔서 한 달을 꼬박 지내고 오시곤 하셨습니다. 묵으시는 곳은 양 치는 목자들이 머물기 위해 지어놓은 통나무집이었는데 거기는 전기도 없고 따라서 전화도 없으며 수돗물도 물론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야말로 문명의 이기라고는 전혀 없는 순수한 자연에서 지내다 오곤 하신 것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생활수가 필요하기 때문에 매일같이 두 분이 양손에 양동이를 들고 삼십 분 걸어 내려가셔서 물을 길어 오시곤 했답니다. 왜 굳이 그런 곳으로 가시냐고 여쭈어보았더니 하시는 말씀이 그렇게 한 달을 살아야 다시 일 년을 버틸 힘을 얻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어느 교수에게서도 볼 수 없었던 그분만의 영성이 바로 그 삶에서 나온 것이구나 하고 생각했었습니다. 그 지도교수님을 신학생들은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피조물이 탄식하며 고통을 겪고 있다고 합니다(본문 22절).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남이 없으면 피조물이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될 수 없으며 그 탄식과 고통이 그칠 수 없음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피조물과 사람 사이의 평화는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평화가 먼저 이루어져야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사람과 피조물 사이의 관계 회복의 열쇠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참된 하나님의 자녀들이 많아지는 것이 피조물 해방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진정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과 순종과 감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탐욕과 이기주의를 버려야 합니다. 사치와 허영과 과소비와 낭비적 삶의 태도를 청산해야 합니다. 지금 함께 살아야 할 지구촌 전체의 이웃을 생각하며 이 세상을 물려받을 후세들을 생각하며 행동해야 합니다. 지구촌 환경을 보호하는 일에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앞장서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그것이 단순한 환경보호운동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을 실천하는 삶입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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