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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강림] 성령으로 충만케 하소서 (행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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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으로 충만케 하소서 (행 2:1-4)
   
최근에 한국에 있는 연예인들의 잇단 자살 소식이 적지 않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 원인들은 각자에 따라 다르겠지만 스타나 연예인들은 일거수일투족이 대중의 관심의 대상이 되며 가치관이나 세계관, 라이프스타일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줍니다. 특히 연예인의 자살 같은 극단적인 사건은 죽음을 대하는 태도나 자살에 대한 인식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연예인들은 대중에게 보여 지는 삶과 실제 사는 삶의 차이가 크다보니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뒤따르게 마련입니다. 인기에 따른 연예인의 위상변화가 수입과 직결되다보니 연예인들에게 항상 불안해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성공 신화와 화려함의 표상으로 연예인과 스타들을 바라보는 경향이 있지만 연예인과 스타들은 자신의 모든 것이 공개됨으로 인하여 대중이 상상하기 힘든 어려움과 고통을 겪고 이것이 우울증, 정신적 질환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요즈음은 인터넷 등을 기반으로 한 팬과 안티 그리고 악플러들의 끊임없는 요구와 맹목적 비난, 악성루머 유포 등이 연예인들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하는 원인으로 작용합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무력해집니다. 마음 문을 굳게 닫고 사람들과의 모든 교제를 끊으려고 합니다.  

성경을 보면 제자들도 그런 상황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으신 사건은 지난 3년 동안 그를 믿고 따르던 제자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메시야 왕국을 꿈꾸면서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막 10:37) 부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믿었던 분이 떠나니 제자들은 모든 것이 무너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을 것입니다. 당장 무엇을 해야 할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듣기는 하였지만 별로 마음에 와 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 나타나시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로마 당국이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을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은 문을 굳게 걸어 잠근 채 방안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그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문은 잠겨 있었으나 부활체를 입으신 주님에게는 통과하는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그들에게 새로운 출발이었습니다.  

하는 일마다 꼬이는 것 같고 막히는 것 같이 여겨질 때가 있습니까? 열심히 공을 들였는데 헛수고였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한 것을 인하여 상심하고 있습니까? 현재의 상황에서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시작할지 막막합니까? 한계에 다다른 것 같은 상황에 있을 때 믿는 자들은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합니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 성경입니다. 본문은 성도들에게 그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요한복음 20장을 보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낙심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1) 평안을 주기 위함입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부활하신 주님이 제일 먼저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인사는 유대인들이 통상적으로 하는 것이었지만 불안에 사로잡혀 있던 제자들에게는 엄청난 위로로 다가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못자국 난 손과 창에 찔리신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은 자기들 앞에 서신 분이 다시 사신 주님인 것을 알게 됩니다. 그들의 굳은 얼굴에 기쁨이 서립니다. 이전보다 더 강하신 모습으로 나타나신 주님을 보면서 제자들의 믿음이 되살아납니다. 주님은 그들이 보여준 연약함과 불신앙을 책망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살아계심과 능력을 깨닫게 하심으로 다시 주님을 의지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낙심하고 두려워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임마누엘의 주님을 붙들 때 불안과 두려움이 사라지고 마음에 평안이 옵니다.   

2) 사명을 주기 위함입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 주님의 나타남 자체가 제자들의 마음속에 있는 모든 의심과 두려움을 내어 쫓는데도 주님이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말씀을 두 번이나 하신 것은 두려움을 능히 고칠 수 있는 능력을 그들에게 주시며 그들에게 중요한 사명을 주기 위함입니다. "너희를 보내노라" 하는 것은 그들이 존재하는 이유가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신 이유는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같은 이유에서 주님이 제자들을 보내십니다. 이제 제자들에게 주어진 사명은 세상에 나아가 그분의 메시야 되심과 구원의 도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시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창세기 2장 7절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의 장면을 연상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어 생명을 주셨습니다. 에스겔서에 ‘생기’라는 말이 나옵니다.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겔 37:10) 

에스겔 골짜기에 있던 마른 뼈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고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싸울 준비가 된 군대가 되었습니다. 이 두 사건은 새로운 창조의 시작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생기를 제자들에게 불어넣는 상징적 행위를 통하여 그들 가운데 함께 계심을 약속하십니다. 

요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예수님은 성령을 또 다른 보혜사라고 하십니다. 보혜사는 paraclatos라는 헬라말의 번역인데 ‘곁에 있도록 부름 받은 존재’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성령은 항상 성도들과 함께 하시면서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감당하게 합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요 20:23) 

제자들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여 예수를 믿으면 죄 용서를 받고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전하는 복음을 거절하여 예수를 믿지 않으면 그들의 죄가 그대로 있어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사람들의 죄를 용서받게 하는 복음은 오로지 주님의 제자들과 교회에게 맡긴 일이며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제자들은 죄 사함의 세례를 베풀고 제자를 삼아야 합니다. 교회가 이 사명감을 느끼고 영혼구원에 힘써야 합니다.

먼저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잡힐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예수님을 잃어버렸다는 상실감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래서 방문을 굳게 잠그고 절망과 좌절 속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잃고 실의에 빠진 제자들의 절망은 오늘 우리에게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 행복을 찾아 방황하다가 주리고 목마르며 고독과 불안 속에 살아갑니까? 

그런데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는 유일한 해결책이 무엇입니까? 성령입니다.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있을 때 기쁨이 생기고 소망이 생기고 새 역사가 일어납니다. 성령이 임할 때 침체된 우리의 삶의 현장에 생기가 임합니다. 사명을 받은 제자들은 더 이상 골방에 숨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복음을 들고 바로 거리로 나간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또 다른 명령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그들은 사명을 감당하기 전에 먼저 성령을 받아야 했습니다. 사역을 하되 성령의 능력을 의지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120명의 성도들은 성령을 받기 위하여 다락방에 모였습니다. 성령은 실의에 빠진 제자들이 이 세상을 살게 하는 힘을 주었습니다. 문을 걸어 잠그고 벌벌 떨던 제자들이 왜 이렇게 변화되었습니까? 성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달라집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합니다.

오순절은 문자적으로 50일째 되는 날입니다. 그러면 언제부터 오십 일째 되는 날입니까? 유월절부터 50일째 되는 날입니까? 초실절부터 50일째 되는 날입니다. 초실절은 언제입니까? 유월절 다음날부터 시작되는 무교절 기간에 있는 안식일 다음 날입니다. 보리 수확의 첫 열매를 하나님께 바치는 절기입니다. 초실절에 예수님이 다시 사심으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었습니다. 오순절은 칠칠절 또는 맥추절이라 하여 밀 수확의 첫 열매를 하나님께 봉헌하는 절기입니다.  

* 오순절이 되었을 때 다락방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습니까?
-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 

성령을 뜻하는 헬라어는‘프뉴마’인데 이것은 성령이란 뜻 외에 바람, 호흡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아주 맹렬한 바람이 휘익 소리를 내면서 하면서 집안으로 밀려들어옵니다. 집안 전체가 바람으로 가득 찼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강력한 능력과 충만함을 보여줍니다.  

-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 

불이 활활 타오를 때 화염의 끝 부분이 여러 방향으로 퍼지듯이 불의 가지 하나 하나가 방안에 모여 있던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임하였습니다. 분명한 것은 성령이 임할 때, 바람이 부는 것처럼 강한 소리를 내었고 불이 임하는 것처럼 확실하게 보였습니다. 귀로 들을 수 있고 눈으로 볼 수 있고 자기들의 입이 성령의 인도되는 대로 움직여지는 이 부인할 수 없는 확실한 표적을 통하여 모인 120명의 무리들은 한사람의 예외도 없이 약속하신 성령 세례를 받았고 그 받은 사실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오순절에 성령 강림은 교회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사건입니다.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무리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오로지 기도에 힘썼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의 첫 열매로 주신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셨다는 유대인의 뜻 깊은 절기인 오순절에 성도들에게 택하신 성령을 충만히 부어 주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모임인 교회를 거룩하게 구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담대하게 증거합니다. 

성령의 임재는 120명을 압도하였고 그들에게 능력을 주었고 그들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다락방에만 앉아 있을 수 없어 길거리로 뛰쳐나와 자기들도 알지 못하던 각국 언어들로 일제히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때마침 오순절을 맞이하여 전 세계에서 모여든 유대인들이 이들의 방언을 듣게 되었습니다. 모인 무리들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소아시아, 로마, 북아프리카, 아라비아 반도 등 지중해 연안을 둘러싼 그 당시의 로마 제국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중에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던 것을 미루어 다락방은 성전 근처에 있었던 것 같고 그들은 방언을 말하면서 성전으로 향하였을 것입니다.    

스바냐 선지자가 종말에 혼돈의 언어에서 회복된 상태인 하나의 언어로 하나님께 예배드릴 것을 언급합니다.(습 3:9) “그 때에 내가 여러 백성의 입술을 깨끗하게 하여 그들이 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한 가지로 나를 섬기게 하리니” 누가는 오순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백성들의 새롭게 회복된 공동체의 삶을 통하여 스바냐 선지자의 예언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 도다”(행 2:11) 하고 다 놀랍니다. 

하나님의 큰일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짐을 지고 십자가에 돌아가셨으나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다시 사셨습니다.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모여든 순례자들이 각 지역의 언어로 선포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듣게 되었다는 것이 우연이 아닙니다. 온 인류가 다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백성으로 돌아오게 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로 인하여 초대 교회가 탄생되었기에 오순절은 바로 성령 강림절이요 신약교회의 생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성령의 임재나 성령 충만이 언급될 때 방언을 말하거나, 치유의 이적을 행하거나, 하나님을 찬양하거나 예언하는 것과 같은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오늘도 이런 역사는 여전히 일어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은 이미 우리에게 임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우리에게 임하신 성령의 온전한 지배를 항상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이란 성령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우리를 다스리는 것인데 기복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기도와 말씀에 힘써서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 부어주심을, 성령의 온전한 다스림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성령을 받으면 권능을 받고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며, 성령이 부어주신 대로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고 기쁨과 평안으로 신앙생활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성령의 충만함을 입을 수 있습니까?

1)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위로부터 주시는 약속된 성령을 받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 말씀에 따라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함께 모여 기도했습니다. 사도행전 10장을 보면 고넬료는 베드로를 개인적으로 만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친척들과 가까운 친구들을 불러 모아 함께 은혜를 나누기 원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자기 집에 들어왔을 때 고넬료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성령께서는 당신의 은혜를 사모하는 자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모하는 자들에게 주어집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회복과 관련해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을 부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사 32:15) 하지만 사도들은 그 약속을 이스라엘의 진정한 회복과 연결 지어 생각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무지를 탓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장차 임할 성령을 다시 한 번 언급해주셨습니다. 장차 제자들에게 임할 성령은 그들에게 권능을 부어줄 것이다. 

그 성령의 권능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게 될 것이며, 이로 인해 이 땅의 사람들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증인임을 알게 될 것이라 하셨습니다. 이에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였습니다. 고넬료의 집에서 베드로가 화평의 복음, 즉 십자가의 복음을 전할 때에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그들은 방언도 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성령님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역사하십니다. 신앙생활에 있어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대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설교를 듣는 이유는 성경의 원리들을 깨달아 각자의 삶에 적용하기 위함이요 말씀 속에 담겨진 약속을 붙들기 위함입니다.  

3) 간절히 기도합니다.

제자들은 다락방에 모여 기도했습니다. 그 모습을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모든 것을 쏟아 부어 기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 고난을 앞두고 땀방울이 핏방울이 될 때까지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다락방 기도모임에는 제자들은 물론 공생애 동안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예수님의 친동생들도 참여하여 함께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기도하다가 성령 충만을 체험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령으로 충만하여 전혀 다른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정한 변화를 경험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지 않으시렵니까?

금산에 가면 'ㄱ자 교회'라고 불리는 금산교회가 있습니다. 금산은 미륵불교의 총본산이라 할 수 있는 금산사가 있고 강일순이 시작한 증산교를 시작한 곳입니다. 영적으로 만만치 않은 곳에 금산교회가 1904년 최의덕 선교사에 의하여 개척되었습니다. 그 교회에는 조덕삼과 이자익이라는 두 분이 있었습니다. 조덕삼은 금산을 근거로 정읍, 김제, 전주를 오가며 비단 장사를 해서 큰돈을 벌었습니다. 

이자익은 경남 남해 출신으로 6세에 부모를 잃고 친척집에 맡겨졌습니다. 그러나 고된 농촌 일과 배고픔에 시달리다가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가출한 후 여기저기를 거쳐 금산에 오게 되었습니다. 구걸을 하겠다고 어느 집 문을 두드렸는데 그 때 마침 문을 열어준 사람이 바로 조덕삼이었습니다. "저는 17세입니다. 아저씨, 무슨 일이든지 맡겨주시기만 하면 정성을 다해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이자익이 어려 보였지만 제법 똘똘하다고 생각하여 그를 받아 들였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마부 일을 시켰습니다. 주인인 조덕삼과 마부인 이자익은 함께 교회를 섬기고 성경학교나 사경회도 함께 다녔습니다. 

1906년 5월 30일 조덕삼과 이자익이 같은 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그 교회를 담당하고 있는 최의덕 선교사가 교회에서 가장 헌신 된 조덕삼 집사와 이자익 집사를 영수로 임명하였습니다. 영수직은 장로보다는 조금 밑에 있는 직분으로서 교회의 모든 살림과 행정을 맡아야 하며, 목사를 모시든지 장로를 세울 때까지는 설교까지 맡아서 해야 하는 중요한 직책이었습니다. 

얼마 안 있어 금산교회에서 처음 장로를 뽑을 때 다들 조덕삼 영수가 먼저 장로가 되리라고 생각했는데 아홉 살 아래인 이자익이 초대 장로로 피택되었습니다.  "만일 조덕삼 영수가 장로선거에 떨어져 낙심하여 이 좁은 마을에 따로 교회를 세우면 어떡하나" 최의덕 선교사는 내심 걱정을 했습니다. 

이때 조덕삼 영수는 공동의회에서 발언권을 얻어 "우리 금산교회 교인들은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서 일하고 있는 이자익 영수는 저보다 신앙의 열의가 대단합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의연하게 말했습니다. 최의덕 선교사는 여러 교회를 맡아 다녀야했기에 금산교회는 장로로 장립 받은 이자익 장로가 주일 낮, 저녁, 수요일밤 예배까지 인도하였습니다. 이때 조덕삼 영수는 교회당을 신축할 수 있도록 자신의 땅을 기쁜 마음으로 교회에 헌납하였습니다. 그래서 역사적인 'ㄱ'자 교회당이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1910년에는 조덕삼 영수가 장로로 장립되었습니다. 이자익 장로는 조덕삼 장로가 장립되자 교회를 조덕삼 장로에게 맡기고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조덕삼 장로는 이자익 장로가 공부하는 동안 학비며 가족 생활비까지 다 책임을 졌습니다. 5년 만에 신학교 과정을 마치고 1915년 전라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을 때 금산교회에서는 이자익 목사를 담임으로 청빙하였습니다. 자기 집 마부 출신이 목사가 되어 전라도 땅에서 크게 활약하는 것을 지켜보며 조덕삼 장로는 크게 감사하였습니다. 

1919년 12월 조덕삼 장로의 임종 때가 되었습니다. 조 장로는 아들들에게 유언을 합니다. "절대로 우상 섬기지 말고 제사는 지내지 마라 예수를 잘 믿어 나를 만날 수 있도록 신앙생활 잘 하고 너희들은 내 대를 이어서 목사님을 잘 섬기고 교회를 지켜야 한다." 그러면서 찬송을 불러달라고 합니다. 이자익 목사는 조장로가 불러달라는 찬송가 221장을 부르기 시작합니다. "주 믿는 형제들.." 이 찬송이 끝나자 조덕삼 장로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곁에서 임종을 지켜 본 이자익 목사가 눈물을 흘립니다. "장로님 우리를 두고 어디로 가십니까? 장로님께서 무식하고 배우지 못한 저를 마부로 써 주시고 또 장학금을 주셔서 평양까지 유학을 보내 주셨습니다." 

2005년 4월 19일 대전신학대학교에서 고 이자익 목사 기념관 현판식과 고 이자익 목사의 전기출판 기념식을 거행하였는데 조덕삼 장로의 손자인 조세형 장로가 축사를 하였고 인사말은 이자익 목사의 손자인 이규완 장로가 하였습니다. 이규완 장로는 인사말을 하기 전에 조세형 장로 앞에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다음과 같은 인사말을 하였습니다. "우리 할아버지께서 주인을 잘 만나셨습니다. 만약에 우리 할아버지께서 주인을 잘못 만났더라면 우리들도 없고 우리 할아버지도 안 계셨을 것입니다."

사회적인 편견이 아직 깨어지지 않았던 20세기 초에 어떻게 주인이 마부를 그렇게 깍듯이 섬길 수 있었습니까?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께서 조덕삼 장로의 마음을 주장하였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성령을 만나는 체험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체험을 인하여 내 안에 변화가 일어났느냐는 것입니다. 또한 그 체험이 과거의 사건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여전히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느냐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지금 내가 내 안에 계셔 나를 주장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성경이 시키는 대로 움직여야 합니다. 성령님은 지금 우리 가정 안에, 우리 교회 안에 계셔야 합니다. 조덕삼, 이자익과 같은 분들이 많이 배출되어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성도들은 성령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교회가 사는 힘은 성령입니다. 성령께서 주관하셔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지 않는 열심은 도리어 교회에 해를 끼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 받기를 간구하세요. 다락방에 임했던 바람 같은 성령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그 놀라운 성령을 체험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할 때 우리의 신앙생활에 기쁨이 없어집니다. 열매가 없어집니다. 영적으로 빼빼 마른 나를 보고 누가 예수를 믿겠습니까? 신앙생활의 기쁨 없이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 찬 나의 모습을 보고 누가 믿음의 도전을 받겠습니까? 성령을 충만하여 변화된 모습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살아계신 주님을 전해야 합니다. 

오순절의 회복은 교회를 교회답게 만드시고 하나 되게 하시며 신앙의 근본을 되찾게 하십니다. 성령의 바람은 우리의 잠잠한 영혼을 깨우십니다. 오순절의 성령은 열정이나 교회성장의 도구가 아닙니다. 사단은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을 알고 마지막 발악을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공중 권세 잡은 마귀와의 영적인 싸움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능력으로 무장하지 않고는 영적인 싸움에서 이길 수가 없고 도리어 마귀의 도구가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믿는 자들을 낙심시킵니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을 힘입을 때 우리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역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는 무리들이 한자리에 모여 한마음으로 전혀 기도에 힘씀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시작된 교회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의 간증에는 힘이 있었고, 그들의 사역에는 풍성한 열매가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초대 교회는 하나님께서 날마다 그 수를 더하시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불과 바람으로 임한 오순절 성령 강림의 역사가 이 자리에 함께 한 모든 성도들에게 임하여 활기 있는 신앙생활, 열매 있는 신앙생활, 능력이 있는 신앙생활, 다른 사람들에게 본이 되는 신앙생활을 할 뿐 아니라 성도들이 있는 곳에 치유와 회복과 화합이 일어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람들에게 덕을 세우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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