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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찾아오시는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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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오시는 예수님’.com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니라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께서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쯤에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 지르니 그들이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 이에 예수께서 곧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고 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러 대고 배에서 내리니 사람들이 곧 예수 신 줄을 알고”(막6;45-54) 

오늘 본문은 영화의 여러 장면 같습니다.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에 환호하는 군중들. 그 군중을 피하셔서 산으로 가셔서 기도하시는 예수님, 한밤중에 바다 위에서 괴로이 노 젓는 제자들. 물위로 걸어서 제자들을 찾아오시는 예수님, 그리고 그들을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인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특히 풍랑 속의 제자들을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힘겹게 노 젓고 있는 삶의 현장에 이적을 통하여서라도 역사하시는 주님을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저 자신을 돌아보면 인생의 거센 풍랑속에서 괴로이 노를 젓고 있었을 때가 몇 번 있습니다. 특히나 저는 아버지에게서 받은 상처가 많았습니다. 상처는 아프지 않습니까? 그래서 상처는 분노라는 감정을 불러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산(山)과 같아서 도저히 내가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용기가 없어서 가출을 못했지만, 어른이 되면 성(姓)을 바꾸겠다고 결심도 했습니다. 그렇게 상처가 많았던 사춘기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아버지가 한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그분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게 되었고 그분이 14살 때부터 생존을 위해 몸부림 쳐야했던 삶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도 어차피 나와 같은 연약한 사람인데 그분도 얼마나 아파셨을지,  얼마나 힘드셧을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저는 아버지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게 되었고, 연민과 사랑을 가지고 아버지를 위로해 달라고, 하나님께서 나보다 더 상처가 많으신 아버지의 마음을 만져달라고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사랑을 받으니 사랑을 하게 된 것입니다.  내마음속의 풍랑이 잔잔해지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마음의 풍랑속에 계십니까?  여러분의 마음의 풍랑이 물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만나서 아주 잔잔하게 되는 일이 있게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1. 먼저 잘못된 믿음을 경계합니다.
본문의 ‘물 위로 걸어오신 사건’ 앞에는 ‘오병이어로 5천 명을 먹이신 사건’ 이 사복음서에 공통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두 사건을 비교하면 오병이어 사건은 많은 무리 앞에서 행한 것이므로 공적(公的)인 이적이라 할 수 있고, 물 위를 걸어오신 사건은 제자들만 보았으므로 사적(私的)인 이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자는 배고픈 민중들을 먹이신 인간계의 이적이라면, 후자는 자연을 상대로 한 자연계의 이적입니다. 
  성도여러분, 본문은 먼저 예수께서 오병이어의 현장을 급히 떠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다”(45,46절) 예수님은 서둘러 제자들을 강요하여 무리들과 떨어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본인이 직접 사람들을 떠나보내시고 산으로 산기도 하러 가십니다.  왜냐하면 오병이어의 엄청난 이적을 본 무리들이 예수님을 경제적, 정치적 메시야로 생각하고 왕으로 삼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의 육적인 필요를 채워주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영적인 구원과 온전한 구원을 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군중들과 예수님의 메시아관이 서로 너무 다릅니다. 주님은 군중들의 잘못된 메시야관을 거부하시면서 먼저 제자들을 재촉하사 배에 태워 건너편으로 보내셨습니다. 제자들이 군중들의 생각에 물들까봐 염려하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은 홀로 산으로 가셔서 특별히 산기도를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주시는 태도입니다. 우리가 크고 작은 성공을 거둔 후에 찾아오는 유혹을 어떻게 이길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예수님의 본이 되시는 모습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축복이나 성공을 아주 좋아합니다. 아니 축복이나 성공은 무조건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성공이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축복이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성공과 축복이 하나님의 마음과는 정 반대가 될 수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군중들과 예수님을 보면서 ‘아, 그렇지 않을 수도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예수님께서는  힘겹게 노 젓는 제자들을 보셨습니다.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께서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홀로 산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님은 바다 위에서 풍랑을 만나 힘겹게 노 젓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을 바라보셨습니다. 제자들이 탄 배는 바다 위에서 역풍(逆風)을 맞아 힘들게 노를 저으면서 계속 바다 가운데 정체되어 있었는데, 여기 ‘힘겹게(바사니조메누스)’ 는 ‘고통을 당하고 있는’ 이란 뜻입니다.  제자들이 역풍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고 있는 순간을 예수님이 모르고 계시지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를 저었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6장의 병행구절은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고 하였습니다. 갈릴리 바다는 지중해의 수면보다 200미터나 낮은 곳이고 동쪽은 골란 고원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런 지리적 환경 때문에 갑작스런 돌풍이 불기도 합니다. 이날 밤에도 갑자기 광풍이 불고 풍랑이 일어나서 아무리 노를 저어도 배가 나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주의를 끄는 것은 예수께서 멀리 산에서 이 사실을 아셨고, 이에서 더 나아가 제자들을 돕기 위해 물 위를 걷는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제자들을 찾아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주님은 성도의 형편을 모두 알고 계실 뿐 아니라 성도를 돕기 위해 물위를 걸어오시는 기적도 마다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여러분이 어려움을 당해 힘들어 하고 있을 때 ‘나의 어려움을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다’ 라고 말하며 낙심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어려운 가운데 처한 자기 자녀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요 14: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또한 오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제자들이 풍랑을 만나게 된 것은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건너편으로 가다가 당한 고난이라는 점입니다. 제자들은 어쩌면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났던 장소에 가급적 오래 남아 오랜만에 배불리 떡을 먹으며 쉬고 싶었을 것이고, 몰려든 군중들에게 자기들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자랑하고도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주님께서 급히 명령하셨기에 순종하여 그 자리를 떠나 건너편으로 배를 저어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처럼 광풍과 파도로 인해 괴로움을 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흔히 우리는 말씀대로 순종만 하면 만사형통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에 따라 순종했는데도 불구하고 어려움을 겪은 사례들이 많이 있습니다.  모세, 엘리야, 예레미야와 같은 구약의 인물들과 베드로, 야고보, 요한, 바울과 같은 신약의 인물들은 주님의 명령에 따라 순종하며 사명의 길을 갔지만 도중에 수많은 장애와 역경에 부딪칩니다. 오히려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고 세상과 죄와 타협하면서 살았더라면 환난이 없었을 것입니다.  결정적인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조차도 이 땅에서 자신과 자신의 사역을 반대하는 수많은 장애물을 만나셔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성도에게 고난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신앙은 무조건 만사형통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는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 나라의 길을 가다가 시련과 역경에 부딪치더라도 결코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당황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불평하거나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지도 마십시오. (벧전 4:12-13)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오히려 더욱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물위를 걸어오시는 주님을 만나는 기회로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고난이 영광으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예수님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십니다.
(48-49절) “...밤 사경쯤에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 지르니” 한밤중까지 산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님은 갈릴리 바다 풍랑 속에서 힘겹게 노 젓는 제자들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물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주님은 자연법칙을 초월하면서까지 제자들의 고난의 현장으로 가까이 임하신 것입니다. (요 6:19)“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 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합니다. 
시간은 밤 사경(새벽 3시~6시) 고, 배는 육지에서 십여리 떨어진 곳,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4km이상의 거리를 물위를 걸어오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물 위로 걸어오신 예수님은 두려워 떠는 제자들에게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놀란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인생 풍랑속에서도 그 밤에 제자들이 들었던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하셨습니다. 우리의 상황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더라도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순간 마음속에 바람이 그칩니다.  참된 평안을 가질 수 있고,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바다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던 예수님은 오늘도 인생 풍랑을 만나 힘겹게 노 젓고 있는 자기 백성을 찾아오십니다.  여러분은 오직 제자들을 위해 그 밤에  4km이상의 거리를 물위를 걷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시는 나의 예수님, 나를 만나러 물 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삶을 위협하는 인생 풍랑을 말씀으로 꾸짖어 잠잠케 하시는 예수님을 뵌 적이 있습니까? 있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자주 있을 것입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필요할 때마다 빠짐없이 들으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본문의 물위를 걸어오시는 기적은 오직 제자들을 위한 기적입니다. 아니 ‘기적’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제자들을 위해 이런 일 저런 일을 마다하지 않으시는 우리 예수님, 나의 예수님이십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성공과 축복이라는 우상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중에도 고난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고난 중에 힘들어 할 때에 물위를 걸어서라도 우리에게 오셔서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고 하시며 모든 고난을 잠잠케 하시는 분이심을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이 예수님과 함께 천국까지 동행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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