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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언약의 시작 (창 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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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의 시작 (창 2:4-25) 
 
 
오늘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최초의 언약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창세기는 1:1-2:3의 서언 이후에 “대략”, “계보”, “사적”, “후예”, “약전”으로 번역된 10개의 ‘톨레도트’(t/dle/T)라는 단어에 의한 단락 구분이 있습니다(2:4; 5:1; 6:9; 10:1; 11:10; 11:27; 25:12; 25:19; 36:1; 37:2). 각각의 ‘톨레도트’ 구절은 이어지는 내용들의 표제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의 톨레도트’는 ‘○의 기원’이 아니라 ‘○의 후대 역사’를 다룹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4)라는 구절도 1:1-2:3에서 다룬 천지 창조의 또 다른 기원을 다루지 않고 천지창조 후대의 언약사를 다룬 2:4-4:26의 표제입니다. 그래서 5-6절은 천지창조의 순서는 무시하고 언약의 대상자인 사람을 중심으로 주인공이 등장하지 않은 들과 밭의 황량함을 말하고 있지요.

먼저 언약의 주체이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6)으로 소개됩니다. 모세 오경에서 출애굽기 9장 30절을 제외하면 ‘여호와’라는 신적인 칭호는 언약의 수립과 파기를 다룬 창세기 2-3장에서만 집중적으로 언급됩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단지 천지를 창조하신 권능자(엘로힘)만이 아니십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후에 천지가 자동적으로 돌아가도록 어떤 원리와 에너지를 부여해두신 채, 당신님께서는 이 세상일에 관여하지 않으시는 초월적인 신만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분은 초월하시는 분이시지만, 동시에 만물 특히 사람에게 지극한 관심을 가지시고 그를 언약의 대상으로 삼으시는 여호와 하나님, 세상 속에 계시는 내재적인 하나님이기도 하십니다.

다음으로 언약의 대상자인 사람은 “흙으로” 지어졌다고 소개됩니다. 하나님께서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자 사람은 “생령”이 되었습니다(7). 이 구절에서 사람의 몸은 흙으로부터 영혼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억측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게 해석하면 22절의 여자는 영혼은 없는 셈이 되어버립니다. “생기”(니쉬마트 하이임)는 영혼이 아닌 생명의 숨결을 뜻하는 단어이고, “생령”(네페쉬 하야)은 영적인 존재가 아니라 단지 살아 숨 쉬는 존재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따라서 동물에게도 생령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1:20-21, 24). 7절은 사람의 몸과 영혼의 기원을 따로 설명하지 않고 다만 인간 생명의 기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말합니다.

성경은 사람에게 몸과 영혼이 있다고 말하지만, 각각을 독립된 주체로 분리하지는 않습니다. 사람의 몸과 영혼은 죽음이 아니고서는 결코 분리되지 않는 단일체입니다.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사람의 모든 행위는 전인적인 것이지 몸의 행위 따로 영혼의 행위 따로 구별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몸만 범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죄를 짓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영혼만 구원받지 않고 사람 자체가 구원을 얻습니다. 7절은 사람이 영적 존재임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는 섬세하고 친밀한 과정을 통해 사람이 다른 생령인 동물과는 구별되는 특별한 존재임을 보여줍니다.

사람의 몸의 구성 분석이 동물처럼 흙의 구성 성분과 같을지라도 사람은 여러 성분들의 총합이 아닙니다. DNA 염기서열대로 나열해놓는다고 해서 살아 있는 인격적 생명체가 되지는 않습니다. 생명은 생명에서만 올 수 있을 뿐 어떤 성분으로부터 자연 발생할 수는 없습니다. 생명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인간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며 그분께서 사람의 생명을 특별히 다루셨음을 인정한다면, 사람의 생명을 동물처럼 취급할 수 없습니다. 또 타인의 생명과 내 생명도 내 마음대로 취할 수 없고, 태안에 있건 밖에 있건 내 자식의 생명 역시 내 마음대로 취할 수 없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와 언약을 맺는 대상이라면 대단한 존재여야 할 것 같은데 성경은 그렇게 소개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귀한 존재라는 사실보다는 그의 근본이 흙에 불과함을 밝힙니다. ‘흙’은 ‘먼지’나 ‘티끌’로도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사람은 때로 강함을 자랑하고 때로 아름다움을 자랑합니다. 때로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위대한 존재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특별히 관여하지 않으시면 사람은 쉽게 부스러져서 이리 저리 날리는 마른 흙먼지 같은 존재입니다. 지금이라도 그 코에서 생기를 거두시면 아무리 강하고 아름답고 위대한 자도 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사람이 흙으로 지어졌다는 사실의 강조는 사람이 언약의 대상자로 선택된 것이 사람 자체에 신과 언약할 만한 가치와 자격이 있기 때문이 아니었음을 생각하게 합니다. 행위언약이든 은혜언약이든 지극히 크신 하나님께서 먼지 같은 사람을 언약의 대상으로 삼아주셨다는 사실 자체가 은혜입니다. 많은 생령들 중에 사람이라는 생령을 특별히 구별해 주셨다는 것이 은혜입니다. 세상으로부터 초월하여 당신님을 감추고만 계시지 않고 당신님의 영광을 계시하여 주셨다는 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지극히 크신 분께서 사람에게 말씀하시고 그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근원적으로는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부터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언약은 단지 말로 하는 약속이 아니라 법적 계약의 성격을 가졌습니다. 고대 근동지역에는 종주계약이 있었는데, 계약을 맺으면 보통 속국이 잃는 것이 많습니다. 절대 군주와의 계약일수록 착취를 많이 당하겠지요. 1905년 11월에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빼고 식민통치하기 위해 강제로 맺은 조약도 을사늑약이라 불려야 맞을 만큼 강제적으로 맺어진 불평등 조약이었습니다. 오늘날 국가 간의 계약 역시 약소국이 착취당하는 측면이 많습니다. 하지만 8-15절을 보면, 언약을 맺으시기 전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사람의 행복을 위해 모든 것을 제공해 주십니다.

먼저 “여호와 하나님”께서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셔서 사람으로 그곳에 거하게 하셨습니다(8).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하셨고,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었습니다(9). 에덴은 네 강의 근원지가 될 만큼 비옥하고 “정금”과 “베델리엄”과 “호마노” 같은 귀한 물품도 풍부한 곳이었습니다(10-13). 여호와께서는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15)하셨습니다. 에덴의 조건을 보면 생계를 전혀 염려하지 않을 수 있는 풍족한 환경 속에서 적절하게 일하며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육체적 정신적 영적 만족을 모두 누릴 수 있는 최상의 환경이었지요.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어떤 상태에서 최상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지 아십니다. 그리고 그런 환경이 여호와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행복은 처음부터 사람의 노력으로 획득되도록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에덴의 구성 요소는 사람이 어떤 상황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는가를 볼 수 있게 합니다. 특이한 것은 생계를 염려치 않을 수 있는 상황과 함께 하나님께서 주신 일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사람은 놀고먹을 때 행복을 느끼도록 되어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할 때 행복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는 것이지요. 사람에게는 생계를 위한 중노동으로서의 일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에덴의 행복 구성 요소 중에서 가장 특이한 것은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입니다. 생명나무는 그 과실을 먹을 때마다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기념하고 확정하는 성례전적인 의미가 있는 나무였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할 수밖에 없도록 프로그램이 짜인 로봇이나 복종할 수밖에 없는 노예 같은 존재로서가 아니라 불순종 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두 나무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계속해서 인격적인 교제가 가능하도록 하는 요소였습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교제하는 이 요소가 없으면 행복의 중심에 구멍이 생깁니다. 나머지를 다 갖추어도 이상하게 뭔가 뻥 뚫린 것처럼 만족이 없습니다.

사람에게 최상의 행복 동산을 제공하신 여호와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신 것은 단 한 가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은 언약을 깰 때 따를 언약적 저주의 선포인 셈입니다(16-17). 왜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따먹고 죽을 수도 있는 선악과를 두셨을까요? 본문의 전후 문맥은 선악과 또한 사람의 최상의 행복을 위한 것임을 알게 하지만 어째서 그럴까요? 힘에 의해 거부할 수 없도록 강제되거나 강요된 계약은 강탈이지 인격적인 관계가 맺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가 사랑한다고 해서 상대방도 나를 사랑하도록 힘으로 강요한다면 사랑이 아닌 스토커입니다. 거부할 수도 있는 자유 속에서 자발적으로 사랑해야 참사랑이고, 선택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인격적인 관계가 맺어집니다. 비록 내가 바라는 최선을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 같은 아픔을 오래참고 기다려야만 하는 것이 사랑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이 사랑과 인격의 관계를 위해서 자유의지를 주셨고, 결국 최악을 선택한 사람을 다시 회복하시기까지 참으로 오래참고 기다리셔야만 했습니다. 사랑은 힘이 있어도 강요하지 않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아픔과 슬픔을 감내하는 약자의 처지가 되지요.

20-25절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켜나갈 최초의 공동체인 가정과 교회의 시작을 보여줍니다. 이 본문은 ‘성경적 결혼관’(2004년 8월 15일 설교)에서 자세히 다루었으므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피조물인 사람은 마땅히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온전히 순종했다고 해서 복을 기대할 수 없는 무익한 종이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언약이라는 수단을 통해 복을 주시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순종을 조건으로 생명을 약속하는 행위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과 더불어 사랑과 인격의 관계를 유지할 때, 주어진 낙원보다 한층 뛰어난 지고의 상태를 누릴 수 있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지금도 그 원리는 동일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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