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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 시대를 열어가는 교회 (민 13:2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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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시대를 열어가는 교회 (민 13:25-32)


한 구두회사에서 아프리카에 시장을 개척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회사에서는 시장조사를 위하여 두 사람을 현지로 보냈습니다. 세밀한 현지조사와 분석을 하고 돌아온 두 사람의 보고 내용은 아주 대조적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대부분의 아프리카인들은 아직도 미개하여 맨발로 다닙니다. 그들은 신발이 무엇인지 몰라서 신발을 신겨주어도 오히려 불편하다고 벗어버립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구두를 팔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의 보고는 매우 긍정적이었습니다. 그는 희망적으로 말합니다. '우리의 수출시장은 매우 광대할 수 있습니다. 전망이 상당히 밝습니다. 비록 지금은 저 아프리카인들이 신발을 안 신고 살고 있으나, 우리가 그들을 잘 계몽하여 신발의 편리성과 유용성을 알리고, 판매 작전만 적절히 세운다면 아프리카 전 지역이 우리의 수출시장이 될 것입니다.' 똑같은 상황을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엄청나게 달라지지 않습니까?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우리가 결단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게 되고, 또 그로 인해서 우리의 미래는 운명적으로 달라지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대하는 본문은 이제 창립 42주년을 맞이하는 우리 교회에게 굉장히 중요한 메시지가 됩니다. 지금 교회는 새벽마다 출애굽기를 붙잡고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침내 약속의 땅이 바라보이는 가데스 바네아에 드디어 도착합니다. 여기서 그들은 자신들이 살아가야 할 약속의 땅에 먼저 정탐꾼을 보내기로 합니다. 각 지파에서 최고의 실력자들을 뽑아 40일 동안 가나안 지형을 살피는 것은 물론 그들의 모든 생활까지도 살피고 오는 요즘 말하면 특수 임무가 주어집니다. 

오늘의 민수기 본문은 그 12명이 돌아와 보고를 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안타깝게도 민수기 13장에 나타는 리더들 12명 가운데 10명은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지를 못했습니다. 절망과 낙담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보고는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을 제외하고 리더들 ·12명 가운데 10명은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지를 못했습니다. 절망과 낙담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이들의 보고 앞에 백성들은 이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저항을 하게 됩니다. 본문에 이어지는 민14:1 이하에 보면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3)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이제 이스라엘은 출애굽이후 최대의 위기에 직면하게 됩니다. 결국 이 큰 소요와 저항 사건으로 어떤 결과가 초래됩니까? 14:33을 보십시오. “너희 자녀들은 너희 반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년을 광야에서 방황하는 자가 되리라” 결국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 대부분이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죽고 새로운 세대만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리라는 징계를 받게 됩니다. 이 가데스의 반역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중요한 두 가지 역사적 교훈을 남기게 됩니다. 이 두 가지 교훈은 무엇일까요? 

첫째로 관점의 차이입니다. 
저는 부정적 보고를 한 10명의 정탐의 보고가 결코 잘못된 보고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10명은 나름대로 사실과 경험에 입각한 성실한 객관적 보고를 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 땅은 우리가 살만한 땅이 아니고 거기 사는 백성들은 우리가 상대하기 어려운 우리보다 신장이 강한 자들이라고 보고합니다. 마지막 절 33절을 보실까요?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을 것이니라” 여기서 ‘메뚜기 콤플렉스’라는 말이 유래하게도 됩니다. 어떤 분은 ‘거인 콤플렉스’라고 칭하기도 합니다. 

상대는 거인인데 우리는 작은 메뚜기에 불과하다는 뜻이지요. 이것을 우리식으로 말하면 과거 일제 식민지 통치를 벗어난 직후 우리가 스스로를 자조적으로 비하할 때 ‘엽전’(일본 화폐에 비해서 우리 엽전의 화폐가치가 낮은데서 유래한 비하적 표현)이 무얼 하겠는가고 말한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 이들이 이렇게 패배 의식과 열등의식에 사로잡히게 되었을까요? 아직도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노예근성을 벗어나지 못한 때문일까요? 도대체 무엇이 이들의 문제이었습니까?

저는 근본 문제는 결국 믿음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이들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홍해를 여시던 하나님, 반석을 열어 물을 주시던 하나님, 마라의 쓴 물을 치유하시던 하나님,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시던 하나님을 아직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들만의 문제일까요? 우리는 성경의 하나님, 기적의 하나님을 믿는다고 늘 고백하지만 자신의 인생에서 다시 어려움을 경험하게 되면 오늘의 나의 어려움 앞에서는 다시 믿음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지 않습니까? 다시 믿음 없는 사람처럼 말하지 않습니까? 어제는 믿었는데 오늘은 또 다시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갈렙과 여호수아를 보십시오. 그들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10정탐꾼과 아주 달랐습니다. 30절을 보십시오.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안돈시켜 가로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 무엇이 갈렙으로 하여금 나머지 정탐들과 이렇게 다른 반응을 하게 했을까요? 객관적인 상황의 유리함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민14:8절이 그 대답을 들려주고 있지 않습니까?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민14:9하반부의 고백을 주목하십시오.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여기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을 바라본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홍해에서 그 백성들과 함께 하신 하나님, 마라에서 그 백성들과 함께 하신 하나님, 르비딤에서 그 백성들과 함께 하신 하나님, 시내 산에서 그 백성들과 함께 하신 하나님이 오늘 우리의 삶의 자리에 여전히 함께 하심을 참으로 믿는다면--무엇을 걱정하시겠습니까? 무엇을 염려하시겠습니까? 누구를 두려워하시겠습니까? 

여기서 ‘밥’ ‘먹이’라는 단어는 영어 성경(NASB)을 보니까, prey 즉 사냥감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먹이라”는 말은 다른 영어성경(NIV)을 보니까, swallow up 즉 ‘꿀꺽 삼켜버리다’ ‘먹어치우다’ 등의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겁니다. 영적인 안목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면 세상의 문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주 작아 보입니다. 반대로 영적인 안목이 없어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면 이 세상의 문제가 한없이 커 보입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이런 경험 있으실 겁니다. 

어른이 된 후 초등학교 운동장에 가 보면 얼마나 작은지 “애걔~”하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그동안 세월이 흐르면서 운동장이 줄어들었나요? 아니죠. 내가 커진 겁니다. 마찬가지 영적인 안목이 생기고 신앙이 커지면 세상이 작아 보입니다. 세상의 문제들이 별 게 아닙니다.나폴레옹은 “지도자는 희망을 파는 상인”이라고 말했습니다. 왜 주님께서 주님을 믿는 사람들을 이 땅에 두셨을까요? 빛으로, 소금으로 두신 것입니다. 캠블랜 차드는 말합니다. 

“성공적인 리더십의 열쇠는 권위가 아니라 영향력”이라고 했습니다. 선한 영향력, 긍정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 바로 리더의 역할입니다. 잘못된 리더는 백성들의 눈에서 피눈물을 짜내게 합니다. 이들은 똑똑한 사람이었고, 학력과 경력에서도 남다르게 탁월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태도와 대표의 원리를 자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백성에게 아픔을 주었습니다. 말씀을 받을 때마다 이 말씀이 나를 살리고 우리 가정을 살리고 우리 교회를 살린다는 분명한 믿음의 의식을 가지고 산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상상을 초월한 은혜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이 일하시는 원리를 배워야 합니다. 
그것은 순종하는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준비된 사람, 순종하는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아무리 그가 많은 탤런트를 가지고 있어도 순종하지 않는 자들을 통해 주님 일하시지 못합니다. 결국 10명의 정탐 그리고 그들을 따라 소요에 동참한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또 하나의 근본 문제는 불순종의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하심 그리고 인도하심을 따라 애굽을 떠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지금 하나님의 명하심을 따라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여 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지금 이들은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불순종이 아닙니까? 

그래서 여호수아와 갈렙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일 엄중하게 경고한 바가 무엇이었습니까? 민14:9이 어떤 말씀으로 시작되었습니까?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후일 히브리서 기자는 광야 시절의 이스라엘 백성의 경험을 반추하며 그들 대부분이 가나안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원인을 이렇게 규명합니다. 히4:6입니다. “그러면 거기에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들어가지 못하였으니” 이어지는 히4:11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그러므로 우리의 환경이 어려워질 때 제일 먼저 걱정할 것은 환경 그 자체보다도 지속적인 순종의 여부입니다. 우리 중에는 환경이 어려워 졌다고 너무나 쉽게 하나님의 인도 따라 해오던 사역을 중단하고, 하나님이 주신 일이라고 기쁨으로 섬기던 봉사도 중단하고, 환경이 어려워 졌다고 한때 하나님의 인도라고 믿었던 십일조와 헌금도 중단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과 저를 향한 그분의 기뻐하심이 없다면 어떻게 재기가 가능하겠습니까? 건강 약품 맨솔레담으로 백만 장자가 된 알버트 알렉산더 하이드(Albert Alexander Hyde)라는 그리스도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한때 경제 공황시절 10만 불의 빚을 지게 되자 빚잔치를 한 후 새롭게 결심하고 시작한 것이 십일조였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당신 제 정신이냐. 빚더미위에 앉아 무슨 십일조냐”고 했을 때 “나 제 정신이라고. 내가 깨달은 것은 하나님의 빚부터 갚아야 한다는 것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물론 그는 멋지게 재기했고 십의 이, 삼, 사까지, 나중에 10의 9까지 드리는 전설적인 믿음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우리가 순종할 때 늘 유혹은 다음에 대한 걱정입니다. 과연 문제가 해결 될 것인가? 만약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러나 여호수아나 갈렙은 어떤 마음으로 순종했을까요? 순종하면 하나님이 책임져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순종하면 이후의 한 걸음 한 걸음 주께서 인도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민14:8절의 고백이 그것이 아닙니까?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그리고 이런 믿음, 이런 순종이 마침내 그와 그의 백성들을 약속의 땅, 아름다운 땅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물론 10명의 정탐의 보고처럼 그 땅에는 아직 그들을 기다리는 여러 위협이 있을지 모르고 그 땅 자체도 본문 32절의 악평처럼 불편하고 위험한 곳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들의 순종의 노력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면 마침내 그 땅은 약속의 땅, 기업의 땅, 창조의 땅이 될 것을 믿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교회는 이 지역에 머문지 42년이 되갑니다. 저는 역사와 전통을 이야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오늘 여기 계시는 여러분이 정말 주님 주신 은혜 앞에 믿음을 갖고 살아가나?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며 살고 있는가를 먼저 확인해 보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새 시대를 열어가는 사람들로 교회의 지체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러면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가 아닙니다. 지금 현실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우며 여기서 어떻게 탈출할 것인가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의 문제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하는 문제입니다. 우리 교회는 세상의 숱한 소리와 세속의 엄청난 타락의 물결이 밀려온다 할찌라도 이제 우리가 영적인 안목을 가지고 내 한사람의 영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고 담대하게 믿음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지금 분명한 것은 한국 교회가 엄청난 위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통곡할 정도로 내리막길을 걷고 있습니다. 왜 오늘 한국교회가 여기까지 추락을 하게 된 것입니까? 이 민족의 근대화를 가져온 기독교가, 이 백성의 해방의 문을 열었던 기독교, 민족의 등불이요 민중의 희망이었던 기독교가,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시고, 성령이 역사하는 그 기독교가, 유일한 구원의 종교 생명의 종교란 그 기독교가 날개 없이 추락하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교회가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된 원인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 땅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빛을 잃어버리고 비틀거리고 있는 것입니까? 왜 이 땅에 그리스도인들이 갈 길을 알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를 두고 우리 민족의 종교적 유아성 때문이라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종교를 악세사리 정도로, 어린아이가 가지고 노는 장난감 정도로 생각을 했다는 것이죠. 가지고 놀던 악세사리에 실증이나, 종교행각에 실증이나 교회를 떠나는 것이라고 가볍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혹자들 가운데는 위복주의 신앙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동안 복 받으려고 교회 왔습니다. 그런데 받을 만큼 받았습니다. 집도 가졌고 자동차도 가졌고 아이들이 아프면 병원에 갈만한 돈도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교회성장에 눈이 멀어서 진리를 가르치지 않고 사람들의 구미와 입맛에 맞춘 설교와 목회를 했기 때문이라고 아픈 지적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유와 원인을 분석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추락해 가는 한국교회에 날개를 달아 드릴 수 있는 것입니까? 방황하고 있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갈 길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이 도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어떻게 이 땅에서 잃어버린 교회의 공신력을 회복시킬 수 있겠습니까? 한국교회 - 그 위기가 큰 만큼 큰 기도와 큰 수고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큰 처방이 필요하고 큰 희생이 필요합니다. 교회를 살리고 생명을 살리는 데는 반드시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희생은 값진 것입니다. 영원히 빛나는 것이요 천국에서도 빛나는 희생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 교회가 믿음으로 일어서야 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단지 이성적인 판단과 경험의 눈이 아닌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철저히 순종하고 나아갈 때 그들 앞에 축복의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경영학에 보면 시장 경제를 일으키는 대안이 수천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우리 사회에 희망을 주지 못합니다. 그만큼 사회가 이론을 가지고 일어서기에는 복잡함이 많습니다. 

우리는 이런 백화난방식의 세상 논리를 가지고 교회를 바라보면 불행한 결과를 자초합니다. 초대 교회의 베드로와 요한의 고백처럼 “우리는 너희가 원하는 은과 금은 내게 없지만, 내게 있는 것으로 너에게 주기를 원하노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이 믿음의 고백한 마디가 세상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 교회의 머리가 되신 예수를 붙잡고 다시 새로운 40년을 기적의 시를 써 내려갑시다. 믿음 없이 불신 속에 살다가 가데스에 머무는 삶을 살아서는 안됩니다. 확신 속에서 가나안땅에 들어가 축복의 열매를 먹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좋으신 하나님, 크신 하나님,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비전 있는 미래를 향하여 전진하는 신앙의 주역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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